마음은 국어사전적 정의로는 “생각, 의식 또는 정신”, “감정이나 기분”, “의지나 결심” 등으로 표현한다(우리말 큰사전). 헬라어로는 καρδια(카르디아)라고 하는데 그 뜻은 “정신, 사고, 감각, 중심부, 또는 지성, 감정이나 충동이나 애정이나 욕망의 자리로서 마음”을 정의한다. 마음이라고 번역되는 헬라어는 대략 10종류가 된다. 대표적으로 헬라어의 Ψυχη(프쉬케)가 마음을 뜻하는 용어라 할 수 있는데 그 뜻은 “정신, 영혼, 혼, 마음, 내적 생명, 마음 속 깊은 존재”를 의미한다. 마음에 대한 연구는 심리학에서 다루기도 하지만, 분명히 신학적 주제이다. 심리학(心理學)이라는 용어는 마음(心)의 이치(理)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영어로 “psychology”라고 하는데 이는 헬라어의 “Ψυχνη”를 영어로 음역한 psyche에서 온 말이다. 물론 심리학은 인간의 마음, 혼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나 그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므로 혼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마음의 장소
마음이 있는 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머리인가? 가슴 어디인가? 심장이 마음인가?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율동을 가르치면서 “우리의 마음….”이라고 할 때 항상 가슴에 두 손을 얹어 표현한다. 머리를 가리켜 마음을 표현하지는 않는다. 교사들이 학생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심장 뛰는 것 외에는 느낌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마음이라고 생각해 왔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양심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또 골치 아픈 일을 만난 사람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면서 “요즘 마음이 아파서 괴롭다!”고 말하는 것은 왠지 어색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과연 우리의 마음은 어디인가? 의사들이 방사선 사진(X-Ray)을 촬영하고, 인간을 해부해 보아도 마음은 발견할 수 없다. 심장은 마음을 상징하는 장기일 뿐, 마음 자체는 아니다. 이는 심장 속에 생각하는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긴장, 불안, 공포 등을 느끼게 되면 뇌가 지각하여 호흡이 가빠지고 혈류량이 많아지거나 빨라지고, 혈압이 상승하고, 심박 항진이 감지될 뿐이다. 그러므로 의학적으로 마음은 심장이 아니라, 뇌일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병은 뇌 그리고 뇌의 활동인 정신의 병이다. 마음이 우리 몸의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로 논란이 있었던 로마시대의 의사 갤런(Galen 130~200 A.D.)은 플라톤(Platon)이 주장한 가슴이라는 설을 뒤엎고 그야말로 해부학적으로 뇌라는 것을 주장한 사람이었다.
마음의 영역
신학에서 인간의 구성 요소에 대하여는 논란이 많이 있다. 즉, 영혼과 육으로 구성되었다는 이분론과 영, 혼, 육으로 구성되었다는 삼분론이 서로 대립되어 있으며 양자는 모두 견고한 성경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영혼이든, 혼이든 이 안에 역시 지(지성), 정(감정), 의(의지)의 기능이 있다고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즉 이것들을 일컬어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지성
어른은 공경해야 할 대상으로 학습하여 공격하지 않고 공경하는 것을 학습하게 된다.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것과 성령에 대한 것도 우선은 지적인 활동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이다. 지식을 통과해서 영으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것과 복음이 오직 지식에만 머무르게 될 때는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성을 수립할 수 없게 된다.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은 지성이 새롭게 됨을 포함한다. 그렇다고 하여 있지도 않은 새로운 지식의 마술적 형성이 아니라 사상과 지성이 성경적으로 건전하게 되려는 성향을 의미한다. 지성은 지혜와 지식 그리고 추리와 사고의 영역으로서 이것이 부족할 때 인간은 어리석게 되고 둔하게 된다. 성경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렘17:9)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죄로 인해 인간의 모든 부분에 타락을 초래하여 지성도 함께 손상을 입게 되었고 오류에 빠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인지 능력도 흐려지고 자기 왜곡(self-distortion)이 나타나 자신을 정확하게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분명하게 인지하거나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욱 알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14:1)고 분석했다. 그처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갖지 못하게 되며 또한 지성의 타락은 선악을 명확히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되며 지성과 창의성은 잘못된 상상력으로 발전하게 되어 그 마음의 생각이 하나님의 의도와는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성령으로 인하여 마음이 깨끗하게 되면 지성의 변화가 초래되는데 이로 인하여 행복을 인식하게 된다. 즉 재산, 명예, 연령, 학식의 많고 적음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어 삶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새로운 인생관의 형성, 그리고 환경을 초월하는 감사가 나타나게 된다. 이 같은 인지의 변화는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그로 인해 마음의 평안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감정
감정은 인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느끼는 기능으로서 이것의 타락은 감정의 왜곡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의심뿐만 아니라 부정적 감정을 초래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정적인 요소가 강해서 슬픈 것을 보면 눈물이 나오고, 감동을 받고, 아울러 감정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인간의 죄와 타락은 다른 영역에서보다 감정의 변화로부터 비롯된다. 일반적으로 마음의 병이라고 하며 정서 장애라고 할 수 있는 우울, 불안, 공포, 강박, 망상 등을 신경정신증(psycho-neurosis)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감정의 장애이다. 감정의 병리적 현상은 자기애, 자기비하 및 학대, 열등, 불만, 죄책, 의심, 억압, 반항, 거부, 충동, 변덕, 과민, 고집 또는 냉소 등의 상태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들은 결국 마음의 내적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하여 심리적으로 암울한 생활을 하도록 한다. 성경에 따르면 감정과 관련하여 마음은 근심(시 13, 잠 12:25)하기도 하며, 두려움을 느끼고(요 14:27), 아프기도 하며(욥 7:11), 상처를 입기도 한다(잠 25:20)고 기록하고 있으며, 마음이 약한 자들도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살전5:14). 또한 마음이 둔하게 되고(사 6:10), 경화증과 같이 감정이 딱딱하게 굳어지기도 한다(출 4:21). 뿐만 아니라 마음에는 기쁨을 느끼게도 된다고 했다(시 4:7). 잠언 4장 23절에서는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고 했다. 내 마음속에 아무 생각이나 들어오도록 허용한다는 것은 내 마음을 창녀촌으로,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 것과 같다. 우리는 아무 생각이나 해서 마음을 더럽혀서는 안되고, 신앙적인 순결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의지
이것은 인간의 의지적인 면을 말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해서는 안될 것을 알고 자제하는 것이 이 영역이다. 신앙은 감정과 지식의 동의를 거쳐 의지적 결단을 통해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본다면 죄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원죄와 자범죄(또는 고범죄)가 있는데 자범죄는 자신이 죄를 짓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서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술에 취해보고자 하는 의지, 성폭행을 하고자 하는 의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허락 없이 내 소유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 사실이 아닌 것을 말함으로써 내게 이익이 돌아오도록 하는 의지 이런 것들은 항상 자신의 의지로 범하는 것인데 의지가 타락되면 감정과 지식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불일치적 행동이 나타나는 문제가 된다. 의지는 행동 이전에 갖게 되는 마음의 태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의지는 독립적이며 자유로운 실체(free entity)가 아니라 지식과 감정에 종속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의지가 지성과 감성에 따르지 않게 되면 그것은 일종의 분열 현상으로서 질환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의지적 변화는 지성과 감성의 동의와 변화 다음에 오는 2차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성결된 신자는 지성과 감성의 성결을 통해 결국 혼의 의지적 변화를 경험하게 되어 죄의 유혹에 대해서 강한 의지적 거부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의지의 나약 및 박약은 자제력 상실과 맥을 함께 하는 개념으로서 이것은 곧 죄의 노출을 의미한다. 죄의 유혹이 있을 때에 자신의 의지가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수용하게 되면서부터 죄가 발생된다. 사람은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어떤 영적인 힘을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도록 할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들이는 것과 세상의 영을 받아들이는 것을 대비시키고 있다(고전 2:12). 성령으로 인해서 인간의 나약한 의지가 강해지며 악한 영의 점령상태에서 벗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장차 의지의 나약으로 인해서 발생되는 유혹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의지의 성결이 요청된다. 결국 죄라는 것은 지성의 왜곡, 감정의 불안정, 의지의 박약 등의 혼적 작용을 통해 영의 문제가 야기되는 것이다. 성령은 인간의 심리에 역사하셔서 인간의 마음 상태가 깨끗해지도록 하신다. 결국 마음이 성결하게 됨으로써 지성, 감성, 의지의 변화를 겪게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느끼고, 올바르게 사고하며, 올바르게 행동하게 된다.
마음의 변화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는 구절에서 변화를 받는다는 용어는 헬라어의 μεταμορφουσθε(메타모르푸스데)인데 이 말은 μεταμορφομαι(메타모르포마이)에서 비롯된 말로서 “형태의 변화를 받는 것(be changed in form)”을 의미한다. 즉 인간의 외형적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구조적 변화가 발생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변화( μεταμορφομαι)는 마태복음 17장 2절, 마가복음 9장 2절에서도 사용되는데 “예수께서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누가는 이 말을 “용모가 변화되고”(눅9:29)라고 표현했다. 즉 얼굴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아니라, 똑같은 얼굴이면서 인식하기에 똑같은 것이 아닌 상태를 뜻한다. 이처럼 성령에 의해 마음도 변화될 수 있는데 이는 “사고 방식”의 변화로서 이는 동일한 사람이지만 충동과 유혹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더 이상 과거의 그 마음이 아닌 상태로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지식, 감정, 의지, 상상, 동기, 야망 등에 대해서 거룩한 생각과 관련을 맺는 것을 진정한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같은 심리구조의 변화는 그리스도와 성경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아담스(Jay E. Adams)는 에베소서 4장 24절의 변화를 성경적 사고로의 변화에 두었는데 그것은 25절 이하의 내용과 연관을 맺고 있다고 전제하고 도적질하는 사람이 도적질하지 않는 변화가 아니라 도적질이 변하여 선을 행할 때 진정한 마음의 변화로 이해했다. 욕하던 사람은 다시는 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욕하던 입이 변하여 선한 것을 말할 때 비로소 마음의 변화로 보았다. 이와 같이 잘못된 행동의 변화는 성경적 사고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며 목회상담의 목표도 여기에 두어야 한다. 빌립보서 4장 7절에는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분명히 마음을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분은 우리의 육신만 지으신 것이 아니라, 영혼과 마음을 지으셨기 때문이다(시 33:15).
(전요섭/성결대(목회상담학) 교수, 대학원(상담학) 주임교수이며, 학생생활상담 소장으로 있습니다. 한국복음주의 목회상담학회 총무, 남부성결교회에서 협동목사로 섬기며 저서로 「신학에서 본 심리학」,「기독교상담방법」,「사이버 심리와 목회상담」등 30여권이 있습니다. E-m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