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1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7a2851a (백과사전)
<주내용> 외암 주장 : 사람의 기품이 다양하지만 심(心)이 발(發)하지 않으면 기는 순선(純善)하다고
했으며, 이(理)는 일찍이 선악(善惡)이 없으므로 발하기 전에는 악(惡)자를 붙일 수 없다고함.
출처 2 : http://cafe.daum.net/poongkihighvill/R5c/259?docid=10ybG|R5c|259|20051118084054&q=%BF%DC%BE%CF%BB%E7%BB%F3%BF%AC%B1%B8%BC%D2&srchid=CCB10ybG|R5c|259|20051118084054 (아래 내용)
외암 이간(巍巖 李柬·1677-1727) 선생의 유학사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게 될 외암사상연구소가 창립됐다.
‘외암사상연구소’는 2005.11.18일 오전 11시 아산시 온양그랜드호텔에서 이원직 외암유고위원회 위원장과 박성규 고려대 교수(한문학)를 공동대표로 연구소 창립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연구소는 아산시 송악면 외암민속마을(중요민속자료 236호)에서 태어난 외암 이간 선생의 유학사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게 된다.
외암사상연구소는 외암 선생의 고택인 건재고택에 두고 고려대학교에는 연락소 형태로 운영할 계획이다. 외암 건재고택은 1200평에 90여칸의 규모를 뽐내며, 정원은 국내 굴지의 정원백서에서 10대 정원으로 꼽힐 만큼 수려함과 멋을 자랑한다.
외암 이간은 이황과 이이의 ‘사단칠정논쟁’ 이후 조선 후기 성리학 최고의 논쟁인 ‘인물성동이론(일명 호락논쟁)’을 이끈 장본인이다.
이간은 ‘사람과 사물이 모두 나름대로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남당 한원진과 치열한 논쟁으로 잠잠해진 조선 성리학의 불꽃을 재연했다.
‘외암’이란 마을 이름도 이사정의 5대손이자 조선 중기 성리학자인 수암 권상하의 8제자 중 으뜸으로 꼽혔던 외암(巍巖) 이간 선생의 호에서 따왔다.
외암은 숙종36년(1710) 33세 되던 해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릉참봉을 제수받은 후 회덕현감, 경연관 등을 지냈으나 관직에 뜻을 두기보다는 오로지 학문 연찬에 노력해왔다. 저서로는 외암유고가 있으며, 외암문집목판 307매가 전해진다.
이원직 외암사상연구소 공동대표는 “외암 선생은 조선시대 3대논쟁의 하나인 호락논쟁의 단초를 열고 보편주의적 사상을 창조적으로 계승, 17세기 이후 당쟁을 역사발전으로 주도한 분”이라며 “외암의 철학적 관점의 현대적 계승을 위해 연구소를 설립하게 됐다”고 말했다. <李燦善 기자>
外岩(외암)리는 1988년 민속마을로 지정됐다.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소장 박성규교수)에서 제12회 연구회를 개최하여 외암집 번역본을 문서로 일부분 발표.
첫댓글 높고 큰 모양 외巍, 바위 암巖('바위 암岩'은 巖의 속자)...원래는 巍巖마을이었으나..일제시대때 外岩마을로 됐다고 합니다..어제 학술대회에는 아산시장,국회의원, 고려대 등 10여명의 교수, 문화재원장 등 총 100여명이 참석했더군요..전 참가자에게 각 권당 450여page나 되는 외암문집 등 번역본 전 4권(1질)을 기증하였고요...아마 아산시와 예안이씨 대종회에서 비용을 반씩 지원한 듯 하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