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따로 ‘길’이라 불릴만한 것이 없다.
산등성이만이 아닌 골짜기도 산이 듯이, 집도 길이고, 담벼락도 길이다.
그것들은 ‘쉬어 머무르게 하거나’, ‘일시적 정지’를 이끌어낼 뿐, 그 본질은 길이다.
걷거나 뛰나, 앉아 쉬고 누워서 자고, 병이 나고, 아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죽는 것 역
시 길 위에서 생겨나는 일이다.
차에 탄 이는 아스팔트도로만을 길로 보고, 자전거를 탄 이는 평평한 흙바닥이 다져진 곳이
라야 길로 보이겠지만, 배낭을 짊어진 나그네에게는 세상의 모든 ‘곳’이 길이고, 세상의 모
든 ‘것’이 길이다. 가진 것 없이 자기를 찾아 나선 이에게 길은 인생의 여정 자체이다.
2006년 8월 유랑캠페인을 처음 시작했을 때, 전국을 돌면서 캠페인을 할 시간으로 4년
103일을 계획했다. (이에 대한 궁금증은 ▶유랑캠페인 소개 배너를 참조할 것.)
하지만 이론과 현실의 간격은 생각보다 컸다. 이런 저런 변수가 끊임없이 생겨나면서 유랑
기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2011년 7월 강정마을에 들어오기 전까지 5년을 유랑했지만, 목
표하던 곳의 반밖에 돌 수 없었다.
[둥글이의 전국 유랑사진 / 전국 250여개 지자체의 절반밖에 돌지 못한 상황]
그사이 강정에서 20개월 생활하다가 (▶강정마을 활동 보기) 다시 짐을 꾸려 유랑을
시작해야할 상황이 되니 팔다리, 어깨, 삭신이 뻑적지근하다. 앞으로도 다양한 변수가 내 유
랑의 발목을 잡겠지만, 앞으로 10년 이내에 유랑을 끝내자! 이는 굳은 다짐이다... 아니 그
보다는 처절한 절규이다.ㅠㅡ 지팡이 짚고 허리 구부러져서 배낭을 짊어질 생각을 하면 자
다가도 경기를 할 지경이다.
익숙한 곳을 떠난다는 것.
어딘가 머물러 있는 만큼 인간은 그 장소에 대한 적응력을 갖는다. 낯익은 지형과 기후, 경
험은 그 장소에 대한 애착을 만들어낸다. 그 장소에 ‘사람’이 있어 다양한 사건의 관계가 얽
혀지고 그것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삶속에 녹아들라치면 그 장소는 내 몸의 일부를 대할 때
와 같은 정서를 풍겨낸다. 그것이 딱히 즐거운 기억일 필요는 없다. 힘겹고 어려운 경험이
더라도 쓰러지지 않고 결국 극복해 낸 일일라치면 그러한 경험들은 그 장소에 대한 정감을
마음속에 심어낸다. 이렇기에 익숙한 곳을 떠난다는 것은 깊은 단절감과 향수를 불러일으키
는 것이다.
익숙한 곳을 떠나는 순간 교차하는 만감의 정도는 그곳에서 얼마만큼의 경험을 농도 깊게
축적했는지와도 상관이 있다. 가령 애착을 가지고 있던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그 물건에 대
한 다양한 기억들이 없어진 물건의 정도만큼의 상실감을 불러오듯이, 다양한 경험들이 중첩
된 장소를 떠날 때 과거는 우리의 머릿속에는 지난 일들이 파노라마가 되어 회상된다. 슬픔
과 기쁨, 안타까움과 분노, 사랑과 미움 등의 다양한 경험과 정서, 느낌, 감정이 '바람에 넘
겨지는 책장' 같은 이미지들과 함께 복잡하게 얽혀 요동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로 인해
격해진 감정은 종종 물리적인 쓰라림까지 느끼게 한다.
시시껄렁한 사랑보다 애절한 사랑과의 헤어짐에 다양한 감정적, 정서적 요동이 따르듯이,
자기가 머무른 장소에 얼마나 치열하게 반응하였는지는 익숙한 곳을 떠나면서 겪는 감정적
동요의 정도를 결정한다. 물론 딱 그만큼... 남겨진 장소, 남겨진 사람이 반응 한다.
- 20개월간 머물렀던 강정마을에서 짐을 꾸려 나오며...
(조만간 다시 돌아가기는 할 것이지만...)
다시 시작된 유랑
유랑이 중단 된지 20개월 만에 다시 그 유랑의 중단된 지점 밀양에 선다.
[20여 kg의 배낭이 얼마나 앞으로 둥글이의 진을 빼낼지 / 밀양역]
20개월 전 이곳을 걷던 희미한 기억이 현실에 희석되어 ‘지금’의 감을 만들어 낸다.
배낭을 내려놓은 기간 동안 ‘앞으로 배낭을 짊어질 걱정’에 대한 두려움이 배낭의 무게를
과하게 책정해 놨는지, 생각보다 배낭이 무겁지 않다. 아니면 배낭을 짊어지고 길바닥에서
고생해야할 긴장감이 근력을 20% 쯤 향상시켰을 수도 있다.
[짐을 짊어지고 밀양의 거리를 걸으며]
5분 쯤 걸으니 그게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깨는 조여오기 시작하고, 골반과 다리관절
에는 압박이 느껴지며, 왼쪽 발등이 쑤셔댔고, 발바닥에는 묵직한 압력이 느껴졌다. 몸무게
반절의 짐이 몸에 얹힌 것에 대한 신체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간 안 쓰고 방치해 두
던 배낭이 변형이 가해졌는지 어깨끈 부분의 스펀지가 뭉쳐서 어깨뼈를 후벼 파듯 했다.
[스펀지 뭉쳐진 것이 이렇게 큰 통증을 유발하는지 전에는 미처 몰랐다. 배낭이 내리누르는
압력이란...]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밀양 시내를 가로질러 빠져나와 시 외곽의 중고자동차 매매점 한쪽 구
석에 텐트를 폈다. 물론 이 작업은 ‘땅주인 행세를 하면서 쫓아낼 만한 사람’들의 존재여부
를 부지런한 사주경계와 함께 살피면서 은밀하게 이뤄진다.
텐트에 들어와 양말을 벗고 보니 기껏 한 시간 걸었는데 발바닥에는 벌써 물집이 잡혀 있었
다. 물집을 그대로 두면 점점 커져서 나중에 감당하기 힘들다. 가위로 껍질을 따서 빨간 살
을 드러낸다.
야영장으로 캠핑 온 게 아니어서, 씻을 물도 없기에 급작스레 혹사당한 발바닥을 위로해줄
방법은 없다. 쭉 뻗고 쉬는 것으로 위로받으렴...
누워서 텐트 천장을 바라보니 이제 실감이 난다.
다시 길바닥 생활이 시작되었음이.
일단 텐트 안에 들어오면 할 수 있는 일이 지극히 한정이 되어 있다.
쑤시는 삭신을 뒤척거리며 누워있었더니 저녁 여덟시 반쯤부터 피곤이 밀려와 스르르 잠이
들었다.(이날 비행기 멀미를 한 영향도 있으리라. )
새벽 세시쯤에 추위에 깨서 일어나 잠바를 추려 입고 두어 시간 떨다가 아침 여덟시 넘게까
지 푹 잤다.
새벽녘에는 텐트에 습기가 가득하더니
예닐곱시 경부터 따스한 햇살이 비추니 습기를 다 날려버렸다.
4월 14일
장비를 추려서 다시 몇 발짝 걸으니 창녕으로 향한 이정표가 전의를 상실시킨다.
유랑 첫 스타트부터 너무 빡세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을 몇 개는 넘어야 창녕에 도착할 것이다.
이제 서서히 태양 빛이 뜨거워지기 시작할 텐데 앉아 쉴 수 있는 그늘을 찾는 게 또 주업
중의 하나가 되겠다.
배낭에 등을 기대고 쓰라린 발바닥을 보니 양말이 빵구가 나 있다.
전날 물집이 잡혀서 껍질을 잘라낸 곳이다. 그러니까 사건을 되짚어 보면 전날부터 배낭을
짊어지기 전부터 양말이 빵구가 나 있었고, 그 빵구 난 양말 사이의 맨살이 내리누르는 짐
의 무게로 신발 깔창에 비벼댄 결과 물집이 잡혔던 것이다. 그리고 빨간 속살이 드러난 발
바닥이 다시 신발 깔창에 비벼지니 쓰라린 것이었다. 신은 참으로 불공평하다. 뇌가 멍청한
결과를 왜 발바닥이 감당해야 하는가...ㅠㅜ
갓길에는 봄꽃의 화사함이 말할 수 없는데,
그 화사함 속에도 죽음이 널려 있다.
[강정마을에서는 천연기념물까지 마구 파헤치고, 법도 어기고, 지역주민들을 ‘종북좌파’로
규정하면서, ‘안보사업’이라는 것을 강행하고 있다. 파고가 세서 1년의 몇 달은 배가 출항도
못할 곳에 해군기지를 만드는 것이 과연 안보에 도움이 될 것인지도 미지수인데... 어쨌든
그곳 구럼비해안에서 저 장비가 계속 삽질을 하고 있다. 이날도 강정마을에서는 활동가 한
명이 구속당했다고 한다.]
[직업병이다. 오르막길을 보면 요실금증이 돋는다.]
[2년간 저질체력을 길러왔는데, 과연 저 고개를 넘을 수 있을는지...]
[고개 입구의 음식점에서 시원한 물 한 통을 떠서 움직인다. 이 한 병의 있고 없음이 인간
의 생사 유무를 결정할 수 있다니...]
‘헉헉’ 거리며 걷고 있으니 이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서 신께서 특별 하사금을 내려주셨다.
'신은 죽었다.'
전날부터 밀양 시내에서 줄곧 걸어왔어도, 밀양의 ‘억압받는 서민의 가장 큰 이슈’인 ‘송전
탑 반대 투쟁’의 흔적을 꼴랑 스티커 한 장으로 확인 했을 뿐이고 이후로도 볼 수 없었다.
밀양시장의 치적에 대해서는 시내 전역에 큼지막한 현수막이 붙을 것이다. 건설업자들의 이
권사업에 대해서는 마치 공익사업이 빚어지고 있는 마냥 호들갑스러운 축제의 분위기가 만
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어르신 한분이 분신자결 까지 했던... 부당한 국책사업을 성토하는
힘없는 주민들의 목소리는 이렇게 작은 스티커 이외로는 전해지지 않는 사회이다.
밀양에서 어떤 일이 빚어지고 있는지 아래 영상 참조.
-> ‘밀양 송전탑 투쟁’ 관련 둥글이 영상 / 5분 20초부터
보기보다 높은 재가 아녀서 20분 좀 넓게 부지런히 걸어서 그 정상에 다다른다. 재 정상에
홀로 선 소나무 한그루 아래 자리를 잡고 배낭에 기대 눕는다.
사지를 뻗고 누워서 앓는 소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떨어진다.
황급히 배낭에 비닐을 덮고 초췌한 표정으로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린다.
잠깐 지나가는 비였다. 비가 지나간 후에 찬바람이 불고 쌀쌀해져서 잠바를 추려 입고 고갯
길을 내려간다.
[군부정권시대 새마을 운동 하면서 마을마다 군용 차량 하나씩 나눠줬다고 하던데... 아마
그때 쓰던 게 아직도 굴러가는가 보다.]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차지 마라!]
밀양에서 창녕으로 향하는 길에는 유독 오래전 고향의 기억이 더듬어지는 흙돌집이 눈에 많
이 띄었다.
그 앞에 맑은 개울이 흐르는 오래된 흙돌집... 정말 살만하겠지 않은가...
멍멍이들의 다양한 표정이 둥글이의 여정을 즐겁게 한다.
밀양시 무안면 어느 작은 마을에서 점심을 사 먹고 강둑에 누워서 흐드러지게 낮잠을 한숨 잔다.
길위의 만남
밀양시 청도면 소재지 들어가기 2km 지점인 듯하다. 자동차 하나가 휙 지나가면서 속력을
낮추더니 후진해서 멈춘다. 운전자가 창을 열고 “무슨 일로 다니냐?”고 묻는다. “이런 저런
이유로 다닌다.”고 하니, ‘얘기하게 잠깐 타시라’는 것이다. 걷는 게 본업이어서 그럴 수 없
는 처지를 말씀드리니 못내 아쉬운지 차에서 내려서 잡아끄는 것이다. 하여 인근 마을 정자
옆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다.
길을 걷는 중에 지나던 행인이 둥글이에게 “애기 좀 하자”고 잡아끄는 경우는 한 달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는 일이기에 그분이 둥글이에게 관심을 갖는 것만큼이나 그분에 대한 호기심
이 일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제작년까지는 그냥 일상생활을 해왔는데 작년에 형님이 돌아가셨단다. 그
것도 그냥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산업재해로 돌아가셨단다. 늘상 일하는 공장의 유독물질
때문에 돌아가신 듯 했다. 그리고 아마 업주 측에서는 배 째라고 나왔을 듯하다. 하여간 친
형이 이렇게 운명을 달리하자 인생을 보는 눈이 갑자기 바뀌면서 환경을 파괴해서 배를 채
우는 인간의 삶에 대한 회한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배낭 짊어지고 환경구호를 외치
고 다니는 사람에게 관심이 가져졌다는 것이다. 부디 그 마음 시간 지나면서 세태에 닳아서
온데간데없이 흐트러지지 말고 고이고이 간직하면서 키워 가시기를... 생각에 실천이 동반되
고 동반되는 실천의 지속으로 그것이 ‘삶’의 경지에 이를 수 있기를...
나이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 듯한데,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 귀담아 듣고 내가 하는 얘기
를 꼼꼼히 메모하는 모습이 참 겸손해 보였다. 이분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며 인근
자장면 집으로 끌고 가서 식사까지 대접해 주셨다. 이른 저녁을 대접받고 감사한 마음으로
헤어지려는 찰나 식사비까지 챙겨주신다.
인간의 선의는 어떤 때 발현되는 것일까? 내가 되갚을 수 없는 자비를 나에게 베풀어주는
모습이 감사했다. 나에게 직접 뭔가를 베풀어줘서가 아니라, ‘세상의 어떤 누구에게 조건 없
는 배려’를 해줬음이 감사했다. 그로 인해서 분명 세상은 조금... 아주 조금 더 아름다워졌을
테니... 그리고 나는 그 감사의 마음을 받아 배낭에 고이 넣어 짊어지고 다른 그 누구에게
그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걷는다.
[어디선가 밭일을 하시고 트럭에 실려 오신 할머니 내리자마자 둥글이를 보고 대뜸.
“저게 뭐꼬???”
(혼잣말)전쟁 일어나서 피난가요.]
공포의 천왕재로 오르는 고개의 시작이다.
해는 뉘엿거리기 시작하고 하루 여정 빵빵했기에 산중 공터에 텐트를 세운다.
이틀간 고생한 발바닥을 씻는다. 물 한 컵이면 양쪽발 말끔히 씻고 나서, 잔량으로 세수를
하고도 물 한 모금 들이킬 수 있다.(뻥 아님.)
이곳 천왕재 올라가는 길목에서의 야영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밤이 되니 차량의 이동은 아예 없었는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이름 모를 동물들이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무엇인가가 ‘칵칵’하며 소리를 내며 풀숲을 바스락거리는데, 혹여나 텐트
를 습격해 올까 약간의 걱정이 되었다. 물론 아무리 두렵더라도 ‘텐트 걷어서 빨리 나가라’
고 소리치는 수위아저씨 등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날의 주된 악몽은 ‘추위’였다. 기온이 떨어졌는데, 더군다나 산중이라 몸을 파고드는 한기
는 말할 수 없었다. 여름활동 대비한 짐이라 잠바 말고는 두꺼운 옷이 없었는지라 추위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11시부터 잠이 깨서 방한대책을 강구했다. 침낭위에 무릎담요를 덮고,
텐트 덮개까지 걷어서 이불처럼 감았다.
하지만 추위가 막아지지 않아서 새벽 6시 반경까지 계속 비몽사몽간에 떨었다. 그러다가 떠
오른 태양으로 인해 악몽이 끝냈다.
태양을 숭배하라~
날씨가 변덕스럽고 추운 유럽 쪽에는 (예수 등장 전까지)‘태양신’이 신중의 으뜸이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반면 아프리카와 같이 태양이 강렬한 곳에서는 ‘흉작’에 대한 걱정으로
태양보다는 우물을 보다 신성시 했으리라~ 하여간 ‘신’은 필요가 만들어낸 도구임이 떠오르
는 햇살에 행복해지는 내 모습을 통해서 확인된다. “이렇게만 따뜻하게 하소서~”
[아침밥은 전날 볶음밥 대접을 해주신 분과 먹다 남겨온 것으로 하고.]
다시 고갯길의 시작...
[천왕재는 전날 올랐던 고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이 였다. 오른쪽으로 돌아 왼쪽으로 쭉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그 사이사이 십여 차례 휘어지고 뒤틀어지고를 반복하는 첩첩 산길
이었다. 1시간 10분 동안을 쉬지 않고 걸어서 저 정상에 다다를 수 있었다.]
[후손들에게 냉장고가 버려진 산하를 남겨주기 위해 애쓴 흔적들...]
[이곳 밀양에서 창녕으로 가는 24번 국도는 시외버스도, 시내버스도 다니지 않는 차량 통행
이 적고 굴곡이 심한 지형으로서 오토바이족들이 속도를 즐기는 주 무대라고 한다.]
[시냇물이 양편으로 내려오고 그 중간에 오솔길이 나 있었다. 다소 특이한 지형이었고 풍수
지리적으로 의미가 있는지 누가 그 오솔길 입구에 검은 선돌을 세워 놓은 터였다.]
[헥헥 거리며 뒤돌아보니 발걸음이 시작된 저 밑 세상이 하찮기 이를데없다.]
[어느새 밀양과 창녕의 경계인 천왕재를 넘다.]
[쑥 한 뿌리를 뜯어 쌉쌀한 맛을 음미한다.]
[흘린 땀을 씻기 위해서 발가벗고 계곡물을 몸에 들이 부었는데, 워낙 차서 후다닥 다시 옷
을 추려 입는다.]
[과열된 타이어를 담가보지만 10초 이상 버티려니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오른쪽 발바닥의 첫날 물집 터트린 안쪽에 또 하나의 물집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고, 왼쪽
에 터트린 물집으로부터는 피가 흥건히 배어나와 양말을 물들였다.]
산 중 괴승과의 만남.
배낭을 짊어지고 고개를 넘다가 누군가를 만났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밝힐 수 없다.
자신을 만났다고 사람들에게 떠벌리지 말라고 했다. 만약 그랬다가는 우리의 인연은 그것으
로 끝이란다. 해서 그냥 ‘어떤 분을 만났다.’고만 해두자.
첩첩 산중 샛길에서 그분이 약초를 캐시고 계시기에 인사를 드리며 ‘약초 캐세요?’라고 여
쭈니 ‘올라와서 차나 한잔 하라’고 하셔서 연이 이어졌다.
머리는 번들번들 깎으셨는데, 평상복 차림이고 고무신을 신고 있어서 처음에는 이분의 정체
를 유추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신원파악의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직감하셨는지 ‘과거에는
스님이셨다는데 형식에 구애 받는 것을 싫어해서 그냥 홀로 산속에서 생활하면서 수련하고
있다.’고 언질을 주신다. 한편으로는 투박하시면 서도 눈이 부리부리 하고 총기가 있으셨는
데, 언 듯 봐도 평범치 않음이 느껴졌다.
봄에 산에 나는 모든 풀이 약초라고 하시는 스님은, 드믄 드믄 캐서 오솔 길에 던져 놓은
각양각색의 풀들을 주섬주섬 모아, 200여 미터 위쪽에 있는 작은 집으로 나를 인도했다.
흙집이 아주 운치 있었는데, 아궁이의 그을음이 벽을 타고 올라온 모습이 정겨움을 더해줬다.
스님은 다소 정리가 안 되어 어수선한 방으로 들어가 앉을 것을 권했다. 초반의 찝찝함을
견디고 이불을 좀 밀쳐내고 바닥에 앉으니 구수한 흙내와 뜨뜻한 방바닥의 온기가 고향의
정취를 느끼게 해줬다. 이틀 전에 땐 군불의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란다.
하여간 그렇게 앉아서 방문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산세에 취해 있는데 물을 끓여 들어오신
다. 스님은 통의 약초가루를 꺼내 털어 넣더니 주전자를 흔들어 찻잔에 따라주신다. 둥글이
가 본래 형식을 좋아하지 않는지라 복잡한 다도의 지루함 없는 투박함이 참으로 좋았다.
그런데 ‘차 향기가 뭔지 이냐?’고 물으시기에, ‘모르겠다’고 하니 갑자기 육두문자가 나오시
더니 ‘할아버지 제사도 한번 안 지내봤냐’고 욕을 하신다. ‘코 막혀서 무슨 냄새인지 잘 모
르겠다.’고 하니 도시에서 100만원 주고도 먹기 힘든 ‘침향차’ 라고 하신다.
하여간 여차저차 하는 순간 카리스마 넘치는 스님의 설법이 시작되었는데, 사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말을 하니 문제가 생긴다’고 한다. 스님은 나처럼 ‘말(구호를 적은 조끼를
입는 것)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은 결국 사람을 해하는 일이라고 하신다. 그래서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신신 당부하시면서 다양한 말씀을 해주셨다.
내가 스님의 말씀을 적으려고 하니 ‘그 (필기하는)어리석음’을 지적하면서 ‘그렇게 글로 써
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고 한탄하신다. 그래서 ‘머리가 워낙 멍청해서 기억이 잘 안 된
다’고 말씀 드렸더니, 대충 이해하시는 듯 한 눈빛이다.
7살 때부터 동자승 생활을 하셨다는데, 척보면 사람의 상태를 안다고 하신다. 그래서 나를
처음 보실 때도 ‘기독교? 천주교? 신자’냐고 물으셨다. ‘아니다’라고 하기에 좀 미안해서 ‘기
독교집안’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사실 스님은 그보다는 ‘의학’쪽의 지식이 혜박하신 것을
인정받고 싶으신 듯 했다. 부산과 대구 사람들은 본인을 ‘허준’이라고 칭한단다. 그러더니
대뜸 나보고 ‘목이 안 좋냐?’고 물으신다. ‘목은 괜찮고 기관지가 좋지 않다.’고 하시니 ‘목
을 낫게 해주겠다’고 하시더니 허름한 박스에서 침구를 꺼내더니 목과 뒤통수에 침을 한방
씩 놔주셨다. 스님의 주저 없는 확신과 자신감에서 이뤄지는 자비로운 행위가 내 몸에 난데
없는 두 개의 구멍을 냈지만, 난 영문을 따져 물을 사이가 없었다. 무조건 감사드릴 뿐이다.
스님은 문득 나에게 ‘전국 돌아 다니냐 보면 어디 인심이 제일 좋냐?’고 묻는다. 그래서 내
가 체험했던 바대로 ‘전라남도 인심이 좋다.’고 말씀드렸더니, ‘아니다’며, 갑자기 역사 얘기
를 꺼내신다.
전라도는 과거에 죄인들이 유배당하던 지역이기 때문에 ‘피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게 ‘생물학적인 피의 청결성’을 뜻하는 것인지 ‘혈통의 순수성’을 얘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둘 다를 의미하는지 궁금하던 찰라, 자신이 현재는 ‘주딩이를 놀리지 않기 위해서’ 산속에
살고 있지만, 전쟁이 일어나는 등으로 나라에 큰 일이 생기면 초야에 묻혀 있지 않고 세상
에 나가서 나라를 구하는 전쟁에 참여하신다고 하신다. 그럼 ‘칼을 쓰실 거예요, 총을 쓰실
거예요.’라고 물어볼까 말까하는 찰나 밥 때가 되어서 식사준비를 하시기 시작했다. 주변이
온통 봄나물 천지인지라 뒷모습을 보이고 사라진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산미나리, 냉이 등의
봄나물을 한소코리 따 오셨다. 냉이는 데쳐서 양념을 해서 내오셨고, 나머지는 옹달샘 물로
씻어낸 후에 된장과 함께 내놓으셨다.
그렇게 맛나게 점심을 함께 하고 난 후에 스님은 자신의 밑에서 3년만 공부하면 진리가 터
득 되서 뭐를 하던 성공한다고 얘기를 하신다. 스님은 세상만사는 ‘태어나고 - 먹고 - 자고
- 죽는 것’의 원리만 정확히 알면 잘 살수 있다고 하신다. 하지만 이를 아는 것이 쉽지 않
기 때문에 ‘면밀히 공부’해야 한단다. ‘보통은 세 가지만 배우면 된다’고 하신다. 그러고 보
니 20년 전부터 ‘죽음을 기다리고 계신다’고 하셨던 것을 보면 스님은 그 앞선 것들은 진즉
에 다 깨닫고 나머지 죽음의 과정을 배우시는 듯 했다. 하여간 스님은 그렇게 자신이 아는
것을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은데 “이렇게 내 것을 다 내버려도 가져갈 도둑놈이 없어!”라
며 한탄하신다. 과거 스님이 출가시킨 사람도 몇 명 있다고 하셨고 집도 구해서 보내주셨다
고 하신다. 그러며 ‘배움과 집 장만을 병행’행 가능성의 운을 띄우시더니, 둥글이에게 ‘집이
필요하지 않냐?’고 하신다.
‘필요 없는데요’라고 얘기하니 ‘하여간 집은 있어야 한다. 3년 함께 있으면 집 한 체 쯤은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하신다. ‘집구하려고 작심했으면 일을 하고 다니겠지, 이렇게 배낭 메
고 유랑 다니고 있겠냐?’고 하니 ‘작심해서 집을 구하려고 해도 집구하기가 쉽지 않음’을 설
법하신다.
이 스님은 자기 인생을 참 주도적으로 잘 꾸려나가시는 분이셨다. 아마 정신적으로 방황을
하고 있을 사람이었다면 이 스님에게 넙죽 절하고 제자가 되는 길을 청했을 것이다. 말씀
중간 중간에 예상치 못한 통찰과 자신감은 그의 모습으로부터 산과 같은 든든함을 풍기기
했다.
사실 이런 분들이 세상 안 보이는 곳곳에는 상당히 많이 있다. 이분들이 자신이 ‘믿는’ 원리
에 자신감과 확신이 가득한 이유는 스스로의 삶의 궤적으로 봤을 때는 그러한 ‘믿음, 이해,
앎, 원리’가 체험된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저 없는 확신을
가지고 권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비슷한 반응을 할 수 있는 정신을 가진 이들에게는 그들
은 ‘선각자’ ‘고승’이 될 것이고, 그에 정신이 반응을 하지 않는 이들은 그냥 ‘눈귀가 막힌
사람’이 된다.
문제는 이런 부류의 분들은 ‘똑같은 믿음, 원리’를 가진 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런 분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서로 싸움이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분들은 서로 피해 다니
거나 산속에서 도를 ?조리신다. 이러한 사연을 알지 못하고 우연히 이러한 분들을 대면하
는 방랑객은 이분들이 보이는 고도의 확신과 주관에 ‘획~’ 넘어가서 ‘광신도’로 전락할 가능
성이 크다.
이날 만난 스님을 폄하하고자 하고자 쓰는 말이 아니다. 이 스님의 순박하고 때론 엉뚱하면
서도 악의 없는 맑은 마음은 특별한 것이었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보편적으로 ‘도’
‘수양’ ‘마음공부’를 하는 이들의 특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공부’를 하고자 하는
이들은 대단한 자신감으로 그럴싸한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한방에 ‘훅’가지 말고 우선 세상
을 객관적으로 조망할 시야를 갖은 후에 고루고루 사람을 섭렵하라는 것이다.
하여간 이후로도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짐을 추스르기 시작했고, 사람이 그리우셨
는지 스님은 하룻밤 묵어가라고 권하신다. 하지만 이미 창녕에 전단지 도착한 것을 찾아야
할 상황여서 정중히 사양하고 다음기일을 약속했다.
스님이 다소 괴이하지만, 소탈하고 욕심이 없으며 거리낌이 없어 보이는 것이 참 좋았다.
언제곤 놀로 와서 없으면(산 위쪽의 토굴에서 종종 수련하시느라 집을 비운다고 한다.) 방
에 불 때고 묵어가라고 하신다.
‘다음에 올 때 뭐가 필요하시냐?’고 하니, ‘필요 한 것 없다. 신경 쓰지 말라’며 ‘어차피 두
번 세 번 만나면 도반이고 벗이 되어 있을 것이니 편히 오라.’고 하신다.
이런 괴이하면서도 유쾌한 인연은 둥글이 유랑의 활력소이다.
[마늘 농사를 짓는 동네 어르신들이 분주하다.]
다섯 시가 좀 넘어 농촌마을 답지 않게 거대한 요양센터가 들어선 고암면에 이르러
어린 나이에 수많은 보수정치인들과 이권세력을 호위호식하게 먹여 살린 소년의 동상이 세워진 모 초등학교
그곳 뒤편 잔돌바닥을 다져 텐트를 세운다.
4월 16일
전날보다는 덜 추웠지만, 이날 역시 추위에 떨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특히나 이곳은 학교 안이기에 (공포의)수위아저씨에게 걸리지 않기 위해서 여섯시 조금 넘어
짐을 꾸려서 나오는 통에 정신이 영 개운하지 못했다.
[이 넓은 갈대밭은 중대천이다. 조만간 ‘하천정비사업’의 마수가 뻗힐라... 창녕을 돌아다니
며 보니 대부분이 건천이다. 비가 조금 안오면 다 말라서 돌바닥 밖에 안 보인다. 차라리
저리 갈대밭으로 놔둬라. 보기 좋고, 환경도 살리고...]
[언덕길을 달음질하는 동네 아저씨다. 유랑을 시작한 2006년도에는 보기 힘들었던 모습이
다. 하지만 웰빙이니 뭐니 하면서 작은 마을의 학교 운동장에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트랙
을 돌며 운동을 하시는 붐이 번지는 듯 하더니, 이렇게 일손이 바쁜 철에도 건강을 생각하
셔서 마을길 뜀박질까지 거르지 않는다. 더 많이 갖기 위한 쉼 없는 파괴는 절대반대지만
여유를 갖고 이렇게 건강관리를 하는 모습은 절대긍정~]
저 멀리 언덕위에 ‘창녕교동고분’(가야시대무덤)이 눈에 들어오고...
그 언덕 너머에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창녕 읍내가 눈에 들어온다.
창녕군
[다음지도]
창녕은 경상남도 북부 중앙에 위치해 있는 인구 6만 3천의 농업기반의 지역이다.
대중에게는 흔히 ‘우포늪’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우포늪 관련해서는 작년 평화대행진 우포늪 답사영상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개발을 갈구하는 정서와 난개발
여느 도시에서 보기 힘든 흙벽이 눈에 들어온다. 이것은 창녕군 창녕읍내(창녕군내의 가장
번화가)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흙벽집이다.
[창녕군 번화가에 아직 남아 있는 흙벽집]
읍내 번화가 곳곳에 이런 흙돌집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시골의 풍경은 말할 바 없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풍경에 서정성이 느껴지고 나중에 이런 곳에서 살고픈 바람이 가
득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시야로는 이는 ‘낙후’의 상징물로 보여질 만 하다. 이는 다른
지역과의 ‘비교’를 만들어 내고 '지역 열등정서'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지역에 개
발에 대한 압력을 만들어 낸다.
대중사회에서는 ‘가진 것의 양’을 통해서 인간의 가치가 평가되다보니 적게 가졌을 때의 열
등감이 지역적인 정서로 표출되는 ‘낙후된 지역감’은 개발에 대한 압력을 만들어 내거나 지
역을 떠나서 더 잘사는 지역으로 이주하고픈 욕망을 만들어 낸다.
문제는 대도시의 정치인들은 국가예산을 낙후된 지역과 나누기를 원치 않고, 자본가들은 투
자대비 수익비율이 높은 대도시에 대한 투자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결국 군소지역
에서는 지역 개발은 하고 싶지만 개발이 가능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는 괴리가 생겨나고 이
순간 ‘난개발’을 가능케 하는 지역정서가 만들어진다.
물론 그렇다고 개발이 많이 된 도시가 ‘난개발’이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개발이 많이 된
도시는 도시대로 개발의 가속도가 붙어서 난개발이 난립한다.
특히나 ‘개발을 갈구하는 정서’ ‘낙후감’이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것은 난개발을 멈추게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발의 정서’ ‘낙후감’은 절대적 빈곤상태에서 솟구치는 정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치인들과 기업가들이 부추기는 정서일 뿐이다. 정치인들과 기업가
들은 정치적 경제적 이권을 확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우리가 빈곤하
다. 더 잘 먹고 잘살아야 한다.’는 욕망을 주입한다. 그 욕망을 주입당한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것인 줄 알고 그것을 갈구한다. 이러한 대중의 ‘지지’에 힘입어 산과 들, 강과 바다
가 파괴될 정책과 제도가 마련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자연과 후손의 미래는 되돌릴
수 없이 파괴되지만,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의 이권은 그에 비례해서 커지는 것이다.
정치인과 기업인들이 이러한 ‘잘 먹고 잘살고자 하는 욕망’을 대중에게 주입하기 위한 방법
은 실로 교묘하고도 다양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봤다.
“이제 우리도 좀 먹고살아야 합니다.”
“21세기 희망의 미래를 엽시다!”
“저 환경단체들은 허고 헌 날 반대의 반대만 합니다.”
“저기 전라도(혹은 경상도)사람들은 잘 먹고 잘사는데 우리는 뭡니까?”
“제주도 남방 항로, 해양자원을 보호하기 위해서 제주해군기지가 필요합니다.”
“싸고 값싼 에너지 원자력 발전만이 희망입니다.”
그렇다. 단순한 욕망주입만으로 그들 정치인, 기업인들의 이권이 챙겨지지 않다보니 이제는
거짓과 왜곡을 동원하고 공포와 증오를 주입시켜서 이러한 추잡한 이권사업이 추진되는 것
이다. 이러한 욕망의 장막을 걷고 제정신으로 현실을 직시해 보자. 그래도 TV에서 남북극
빙하가 거의 다 녹고 있고, 인류가 종말로 향하고 있음을 호소력 있게 보여주는 다큐를 접
하는 몇 분씩은 ‘제정신’이 되돌아오지 않는가? 그 제정신으로 세상을 보자. 우리가 얼마나
그들 정치인과 기업가들에게 속아왔는지를.
결국 이 말은 우리가 영호남, 남북이 싸워야 할 것이 아니라. 정치인과 기업가들의 횡포에
맞서서 힘없는 서민들이 뭉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정치인과 기업인들이
여태껏 민중의 정신에 심어놨던 개발에의 욕구를 걷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 오래된 건물을 봤을 때 느끼는 ‘낙후감’ ‘개발에의 욕구’가 진정 자신이
원해서 만들어진 것인지 되돌이켜 보는 것은 그 작업의 시작일 것이다.
* 우리가 증오해야 할 대상은 영남사람, 호남사람이 아니다. 지역감정의 가장 큰 피해자는
서민이고 그 최대의 수혜자가 정치인과 기업가들을 잘 고뇌해 보라.
또한 우리가 전쟁 준비해야 할 대상은 북한도 아니다. 대한민국 보수정권은 북한과 전쟁할
생각은 전혀 없음을 보라. 만약 그들이 전쟁을 하고자 했다면 과거 천안함 폭침(북한이 침
몰시킨 것이라면) 때 주석궁으로 탱크 몰고 쳐들어갔어야 했다. 하지만 왜 그러지 못했을
까?? 정치인과 기업인들은 전쟁 일어나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전쟁의 긴장감으로 남북적대구조와 그로 인한 군비증강을 통한 이권 채우기이지 전쟁
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서 남한의 원전에 미사일 한발만 떨어지더라도 후
쿠시마보다 심각한 문제가 발생되고 대한민국은 영원히 죽음의 땅이 될 것임을 생각해 보
라. 따라서 보수정권도 결코 전쟁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고, 결코 한반도에는 전쟁이 일어
나서도 안된다. 이는 북한 김정은 정권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하다. 정밀유도폭탄 몇 발 터
트리면 북한지도부가 괴멸 당할 텐데, 뭐 하러 전쟁을 벌이겠는가? 결국 남한 정부나 북한
정부나 대중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북적대관계의 긴장을 고조‘만’하고 있는 것이다.
** 참으로 괴리적인 현실은 호남에는 부산과 대구 같은 대도시는 없지만, 창녕처럼 도시 번
화가에 흙벽돌집이 있는 지역은 없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호남은 생활수준이 중간 정도
로 어느 정도 평준화 되어 있는 반면, 영남은 잘살면 아주 잘살고 못살면 아주 못사는 상황
이라는 것이다. 호남 지역은 집과 집, 마을과 마을, 도시와 도시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데, 영남 지역을 돌아다니다보면 편차가 엄청나게 느껴진다. 이 때문에 영남의 정치인들은
이렇게 못사는 영남의 여러 지역을 전략적으로 이용하기에 딱 좋을 듯하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호남 발전시킬 때 우리는 갱상도는 미래를 잃어버렸습니다!”
일명 낙후된 영남지역의 주민들은 그 말에 솔깃할 것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그 따위 말
을 할 때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렇게 대응해야 한다.
“이 문딩이 같은 놈들아. 대구와 부산, 포항에 편중된 발전전략이 아니라, 영남을 고루 잘살
게 만들어야지 그렇게 하지 못한 결과를 호남사람들에게 뒤집어씌우고 지역감정을 부추겨서
뭐하자는 거냐?”
이런 표현을 보고 혹시나 둥글이가 영남지역의 정치인들에게만 적대감을 갖고 있음으로 오
해하지 않기를... 본인은 호남지역의 정치인들이 지역의 서민 피 빨아 먹는 현실에 분개해서
쇠파이프로 (군산)시장실 문짝 두드려 깨 부셨다가 멱살 잡혀 나오고 경찰서 오갔던 전력이
있다. 모든 반성은 내부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창녕군 중심을 가로지르는 창녕천 / 산비탈에서 불과 1km도 떨어져 있지 않은데 이리 썩
은 냄새가 풍기고 있다. 돈 들여 하천 정비한 목적이 ‘깨끗한 하천’이었을 텐데 깨끗하기는
커녕 자정작용마저도 안 되는 상황...]
둥글이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희소식? 인가 애소식인가?
그간 3년 정도 채식을 해왔다. 과거에도 몇 년 채식을 했었는데, 구제역 파동을 보고 나서
차마 그들의 고기를 씹어 목구멍에 넘길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유랑 중에는 밤낮으로 쌩 쌀
을 불려 먹는 것으로 끼니를 때웠었다.
이에 사람들은 둥글이가 점점 야위어가는 것에 대한 걱정의 마음을 보냈다. 그들은 ‘고기
좀 먹고 살 좀 찌고 건강해져라’며 둥글이에 대한 간절한 걱정의 마을을 전한다. 그래, 나도
나이는 들어가는데 배낭 짊어지고 이리 길바닥을 전전해야하는 것에 대해서 ‘위기의식’이
생겨 난 터이다. 3, 4년 전쯤에는 자신 있었지만, 앞으로 나이 더 먹으면 이 배낭을 짊어질
수 있을지, 그때까지 체력이 유지될는지 걱정이 된다. 하여 한시적으로 채식 중단하고 고기
를 먹기 시작했다.
['떡~'하고 시킨 돼지 볶음 정식]
이런 맛일 줄 알고 있었지만, 정말 맛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고기 사먹으려면 돈이 들
어야 한다. ‘둥글이 고기 먹고 건강해지기’를 바램 했던 분들의 마음이 진실 된 것인지 확인
해보도록 한다.
계좌 (농협)090-12-023267 (강도)박성수 이름으로 고기 사 먹을 수 있는 돈이 채워지면 고기를
먹을 것이요. 아니면 생쌀로 연명해야할 터... 과연 여태껏 나를 걱정해줬던 인간들의 면모
를 이번 기회에 확인해보고자 한다. ... 배고프다.
[낮잠]
[개양이]
[창녕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님 가게. 소포로 캠페인을 위한 전단지 보내서 받은 곳.
우포늪 지키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쓰고 계신다고 한다. 잠깐만 신경 안 쓰면 개발론자들이
우포늪을 파괴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단다. ‘식사나 하고 가라’고 하시는데, 바쁘신 듯해서
정중히 사양하고 전단지를 추려 가게를 빠져 나온다.]
어둑해진 저녁.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대는 상황에 창녕문화공원 한편에 텐트를 세운다.
나무가 바람막이와 은폐역할을 해줘서 일석이조이다. ‘최고의 잠자리’라며 안도를 하고 있는
찰나, 스피커에서 나오는 라디오 방송은 물론이거니와 12시가 다되도록 젊은 친구들이 공원
한쪽 탁자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떠들어대는 소리가 귀에 속속들이 들어온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다섯시에 시작되는 라디오 방송은 그간 추워서 미뤄둔 늦잠을 못 자게 나를 깨워냈다.
4월 17일
유랑캠페인 창녕 명덕초등학교
아침에 비가 우두둑 떨어져 내려 화들짝 놀랐는데, 잠깐 오다 말았다.
배낭을 꾸려서 명덕초등학교로 향한다.
전날 꽃집에서 찾아온 전단지를 개봉해 아이들에게 살포할 만반의 준비를 한다.
20개월 만에 다시 시작된 활동이지만 낯설지 않다.
“애들아 지구가 돌아가시려고 하고 있어.
지구가 돌아가시면 우리들도 죽겠지?
지구를 구하자~“
이야기를 들은 몇몇의 아이들은 ‘지구를 구하자’는 다소 황당한 얘기에 시시덕거리고 들어
가고, 그 몇몇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서 전단지를 뚫어져라 살피고, 몇몇은 관심 없어
하는 투다. 그대들이 받아든 생각의 씨앗이 정신이 만개하는데 일조하기를...
만년 텐트 생활
2011년 7월. 강정마을에 처음 갔을 때 구럼비 해변에 텐트를 쳤다.
바람이 너무 불고 습도가 높아서 며칠 버틸 수 없었다. 그래서 짐을 꾸려서 강정마을회관 4
층의 으로 왔다.
그곳은 마을 주민들 체력단련실로 쓰이던 곳이어서 잡다한 기구들 때문에 어수선하기는 했
지만, 사람들이 복잡대기 전까지는 간간히 운동도 하고 나름 평온한 공간이었다.
그렇게 몇 달 생활하다가 4층을 활동가들 숙소를 만든다고 해서 짐을 꾸려 마을 어르신 댁
샛방으로 이사 했다. 그그리고 다시 마을회관 2층 사무실로 이사해서 사무실 한편에 텐트를
세우고 생활 했다.
...
이제 다시 그 텐트가 길 바닥에 세워지다.
2013년 유랑의 시작.
무얼 먼저 고민해야 하는가?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인 우리는 흔히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갖곤 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답변을 얻기란 쉽지 않다. 그건 아마 ‘질문이 너무 어려운 이유’ 때문일
것이다. 미적분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인수분해를 알아야 하듯이 생각에도 순서가 있
어야 한다. ‘내가 왜 사는지?’는 미적분이고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는 인수분해이다. 따라
서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우선 잘 고민하는 것이 ‘내가 왜 사는지’와 ‘어떻게 살아야할
지’에 대한 해답을 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 2013. 4. 17 경상남도 창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