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류시인 삼의당
▷ 김삼의당(金三宜堂: 1769∼?)
조선 정조 때의 시인. 본관은 김해(金海). 당호는 삼의당(三宜堂)이다. 전라북도 남원 누봉방(樓鳳坊)에서 태어나 18세때 같은 해 같은 날 출생이며 같은 마을에 살던 담락당(湛樂堂) 하립(河립)과 혼인하였다. 삼의당과 담락당은 당시 남녀차별의 사회모순을 과감히 딛고 일어선 서민 계층의 부부 시인이다. 저서로 『삼의당고(三宜堂稿)』가 있다. 그의 문집에 기록된 것처럼 남편 하립이 그 부인이 거처하는 집의 벽에 글씨와 그림을 가득히 붙이고 뜰에는 꽃을 심어‘삼의당’이라 불렀다 한다. 그는 평생을 두고 남편에게 권학하는 글을 많이 썼으며, 가장 규범적이요 교훈이 되는 글을 많이 썼다.
和夫子吟詩(화부자음시)
滿天明月萬園花(만천명월만원화)
花影相添月影加(화영상첨월영가)
如月如花人對坐(여월여화인대좌)
世間榮辱屬誰家(세간영욕속수가)
-『三宜堂稿』
꽃송이 송이마다 흰 달빛 흐르는 밤
꽃빛 달빛니 서로 어울리듯
달처럼 꽃처럼 그대 앞에 앉노니,
世事(세사)에 시끌던 마음 고요히도 비어라.
▷ 남편과 아내의 화답시
<담락당>
서로 만나보니 광한루의 신선이구려
전생 인연으로 밝힌 오늘밤이 있음을
원래 천정 배필로 만났으니
속세의 중매란 분분한 것일 뿐
<삼의당>
선랑과 선녀 같은 나이 열 여덟에
동방화촉의 인연을 맺었으니
한 날 한 시 한 마을에 나서
이 밤 서로 만남이 어찌 우연이리오.
<담락당>
부부는 사람된 도리의 처음이라
만복이 이에서 비롯된 까닭에
도요시 한 편을 들여다보니
남자가 돌아갈 곳 따뜻한 가정일세
<삼의당>
혼인은 백성된 도리의 시작이라
이로써 군자의 근본을 이룩했네
공경과 순종만이 오직 아내의 길
임의 뜻 끝끝내 어기지 않으리
당시 사회에서는 담락당과 삼의당의 관계는 일반적 통념을 초월하였는데, 이는 신혼 첫날밤의 화답 시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여류 시인으로 삼의당 김씨는 담락당 하립과 나이도 같고 가문이나 글재주가 비슷하여 천정배필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잘 어울리었다. 특히 삼의당은 중국의 '양귀비'나 '서시'가 불충하였기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는 것을 지적하여
'여성의 충(忠)'을 강조하였다 한다.
▷ 담락당·삼의당 부부 시비
전라북도 진안의 마이산탑사에서 금당사 쪽으로 내려가면 탑영지에 담락당· 삼의당 부부시비가 세워져 있다. 담락당 하립과 삼의당 김씨는 남원에서 태어나 혼인하여 살다가 진안군 마령면 방화리로 이사와 여생을 마쳤다.
임형의 남도문학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