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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봉구 음악칼럼] 스크랩 산조특집 57 - 단소산조 1 - 전용선(추산)
Mr.송™ 추천 0 조회 203 08.11.10 11:0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산조특집 57 - 단소산조 1 - 전용선(추산)





단소산조의 첫째 곡으로 전추산 명인의 연주를 싣는다. 단소는 그 악기의 한계성으로 인하여 산조를 연주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극복하고 산조가락을 연주할 수 있었던 전추산은 진실로 걸출한 명인이라 할 수 있다. 단소 연주는 그 전승의 맥도 끊긴 것으로 여겨졌으나 다행히 당대의 명인인 이생강이 단소 산조를 연주해냈다. 전용선에 대한 글은 앞서 예용해 선생의 글을 모두 인용하여 소개한 바 있다. 여기서는 음원이 되는 음반에 실린 이진원의 글을 생략함이 없이 전체를 인용하여 싣는다. 좋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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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산 전용선의 단소 예술 - 이진원 (한국고음반연귀회 회원)



1. 추산 전용선의 생애(1887~1967)



단소산조의 창시자인 전용선은 1887년에 정읍(井邑) 고부(古阜)에서 태어났다. 전용선은 전추산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용선이 본명이고, 추산은 호라고 생각된다. 또 신소(神簫), 소선(簫仙)이라고 했는데 이는 그의 단소 솜씨가 신에 비유될 만큼 탁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전추산은 줄풍류와 산조 모두에 능한 예인이었다. 단소산조에 대해서 일부 국악인들 사이에서 “전추산이 단소산조에 대해서 일부 국악인들 사이에서 전추산이 단소산조를 짜서 창시 했으나 그로서 끝막음을 했다.”,“단소로 산조를 짤 만큼 단소에 그 기예가 절륜하였다.”라는 말만 전해질 뿐 그의 산조 음악을 이은 전수자가 없어 한때 우리나라에 단소산조가 사라진 것처럼 인식되기도 하였다.

전추산의 줄풍류 음악의 경우도 구례나 이리 지역에 전승되는 줄풍류에서 전추산의 단소 가락을 연주하고 있으나 국립국악원에서 연주되는 줄풍류와 달리 일반인들은 이들의 음악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다 더욱이 전추산이 직접 연주한 음악은 여러 가지 이유로 공개되지 않았는데 이 음반을 통해서 그의 단소 줄풍류와 산조를 공개하게 되니 기쁘기 그지없다.

전추산의 어린 시절에 관해서 살펴보면 추산 전용선은 농사를 짓는 중농가(中農家)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사형제 중의 셋째로 태어났다. 서당에 나가기보다 놀기를 좋아한 전추산은 17세에 처음으로 단소에 손을 대었다고 한다. 그는 단소에 크게 애착을 가져 잠자리에 들어서도 단소를 품고 잘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는 동안 집안에서 그는 내논 자식처럼 되었고, 동네 어른들까지 그를 외면하였다고 한다. (예용해 [인간문화재] 중에서)

그의 스승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고 다만 그는 집안 어른인 전계문에게 사사하였다고 한다. 전계문은 당시에도 국악 명인으로 꽤 알려져 있었는데, 그 전계문의 대금 풍류는 정경태의 [국악보]에 실려 있다. 전추산의 풍류는 전계문의 대금 가락을 보건데 전계문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전북대박물관에서 발행한 [정읍지역 민속예술]에 보면 전계문은 허창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풍류를 배웠다고 전해지는데 이 허창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추산은 단소이외에도 많은 다른 악기를 연주할 수 있었고,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 그는 일가를 이룬 단소이외에도 대금, 가야금, 거문고 등에도 능통하여 여러 악기에 걸출한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전공으로 생각한 것은 단소였고, 그 음악이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전추산은 단소의 음악 중 산조보다 스스로 정음에 더 공을 쌓았다고 말한다. 그가 단소를 배운 경력을 보면 정악을 먼저 배우고 산조를 뒤에 시작하였다고 한다.

전용선의 행적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없는 다른 이유는 그가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방랑벽으로 인해 전주 국악원에서 후진에 힘을 쏟은 사실과 1963년 12월 20일 국악진흥회에서 주는 국악상을 시상한 일 외에 더 알려진 일이 없다. 이 국악상을 수상한 날짜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은데 대부분 1960년 10월 6일 수상했다고 하지만 국립국악원 기록에 보면 1963년도에 국악상을 시상한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제자인 김무규는 전추산을 1935년부터 10년간 모시고 있었다고 언급한바 있고 그가 추산의 장례까지 치렀다고 하였다. 전북대박물관에서 발행한 [정읍지역 민속예술]에 보면 추산이 1930년대 후반 정읍의 부호였던 김기남의 산정에 머물며 풍류를 했는데, 이때 김용금, 신달용, 이기열, 나용주 등이 어울리며 풍류를 했다고 조사되어 있다. 예용해의 글에서 추측해 보면 1960년 이전에 전주에서 후학을 가르친 것 같고 그 후 진주, 부산등지를 떠돌아다닌 것 같다.

추산은 괴팍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의 제자인 김무규는 그에게서 산조를 배울 때 그가 처음 가락을 연주해 주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해보라 해서 이를 제대로 따라하지 못하면 가르치기를 그만 했다고 한 것을 보면 좀 까다로운 성격을 가졌던 것 같다. 또, 그는 녹음하기를 싫어했다 한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임방울 명인과 같이 녹을 싫어하여 몰래 녹음한 것이 많았다고 한다. 그를 친아버지처럼 따랐던 김소희 명인이 어느 비오는 날 녹음한 산조가 가장 깨끗하게 전해져 오고 있고 이 녹음은 얼마 전 방송을 탄 적도 있다.

전추산의 단소 줄풍류 음악이 무형문화재로 전승된 것에 비해 단소산조는 이를 이으려는 사람이 있긴 했어도 그의 절묘한 기량을 이어받은 연주자가 없었기 때문에 특히 사장된 음악으로 인식되기까지 하였다. 이 단소산조가 많이 계승되어 단소를 연주하는 이들의 주된 연주 레파토리가 될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추산은 1963년 국악상을 시상한 후 서울의 국악계에 알려지기 시작할 즈음 생을 달리하였다. 그가 정확히 몇 년에 유명을 달리했는지는 그의 일생을 기록한 글마다 다르다. 그러나 김무규 명인의 증언 등을 통해 짐작컨대 1967년에 사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읍지역 민속예술]에 그가 죽음을 어떻게 맞이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빈궁한 생활 속에서도 단소를 놓지 않았다. 죽기 직전 그는 승암사에 자러 올라갔다가 슬픔에 복받쳐 단소를 불다가 그대로 쓰러져 죽었다고 한다.

추산 전용산은 그의 단소 예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단소는 끝내는 영(靈)인 것이여.” 예술의 경지와는 너무 다르게 어려운 말년을 보낸 예술가가 우리에게 보내는 마지막 메시지로 그의 깊은 예술적 경지를 이 말에서 볼 수 있다.

2. 추산 전용선의 음악

오늘날 옛 명인의 음악을 평가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의 기호도 변하였고, 예술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며, 유행되는 음악 스타일도 몇 년 단위로 계속 바뀌기 때문에 당연히 힘들다. 전용선이 생활했던 당시의 주변 환경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30년이나 시간이 지나버린 지금에서 그의 예술을 평가하는 것은 지금 우리의 기준틀에 이를 한번 대어 보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를 미룰 수는 없다.

우리나라에서의 구전심수 음악 전승체계 속에서 예술가들이 일가(一家)를 이루는데 있어 스승의 가락을 답습하여 발전시켰던 것과 달리 추산은 단소의 주법을 스스로 개발하고 새로운 가락을 만들어 내는 등 보통 여느 예술가들과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줄풍류 단소 음악을 보면 정악이 가지는 자유로운 변형을 거부하는 독특한 음악적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음정과 가락이 단순하면서도 담담한 선율을 담백하고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에서 그의 예술적 재능을 느낄 수 있다.

산조에 있어서는 그의 창조적 기능이 발휘되는 부분이다. 산조라는 것의 음악 본연이 유동적인 가락과 절묘한 연주 기법을 필요로 하고 있는데 많은 악기적 제한을 가진 단소로서 산조를 연주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로 그의 산조가 어색하거나 이상스럽지 않다. 그 선율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답기 때문에 그의 단소 산조를 듣기 시작하면 귀를 다른 곳에 둘 수 없다.

오늘날 산조에 무슨 류(流)라고 하여 각 악기마다 이를 만든 작곡자의 이름을 대는 것이 보통이다. 추산의 산조는 그 맥이 이미 끝났지만 직접적 전승이 아닌 그가 남긴 녹음에 의한 재전승이 이루어져 오늘날 연주되는 이생강 명인의 단소 산조도 그 근본을 전추산의 가락에 둔 추산류 단소산조라 할 수 있다.

전추산의 줄풍류는 그의 집안 어른인 전계문에 의해선 전승된 것이 확실하다. 그의 산조는 그의 독창성에 의해 짜인 것이다. 예용해의 [인간문화재]에 의하면 평생을 죽관(竹管)에 붙여 불원가사(不願家事)하였고, 외도(外道)도 모르고 지냈으며, 예(藝)를 돈과 바꾼 일도 없고, 푼전(分錢)을 몸에 지닌 일도 없다고 한 것처럼 그는 단소를 한(恨)으로 분다고 하였다. 여기서 한이 추산을 정음에서 산조로 이끌지 않았나 생각된다. 스스로도 정음에 힘을 더 쏟았다는 추산이 단소 산조의 명인이 된 것은 그 스스로의 음악적 재능을 절제된 생활 속에서 산조로 푼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추산은 순리에 역행함 없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 단소의 영을 얻은 예술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한다.

전추산의 줄풍류 음악이 그의 산조 음악에 녹아든 것으로 보면 그의 산조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정악은 지금 무형문화재 제 83호 기능 보유자인 김무규 명인이 잇고 있는데 이 전승된 음악을 들어보면 추산이 산조를 시작하기 전에 타는 다스름이나 우조 선율에서 이 정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의 줄풍류를 듣노라면 그 웅장함은 거문고의 다스름을 듣는 듯하고, 그 가락의 유현함은 해금의 물 흐르듯이 연결되는 선율과 닮아 있다.

추산은 단소의 명인이었지만 대금에도 특출한 기량이 있었다고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아쉽게도 그의 대금 산조는 맥이 끊기고 말았다. 시각장애자였던 편재준에게 그의 퉁소와 대금 기량을 물려주었으나 편재준에게 대금 가락을 이어 받은 이가 없어 그 맥이 막히고 말았다.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긴 일생을 단소 하나에 큰 비중을 두고 살다간 전추산의 음악에 관해서 간술해 보았다. 이러한 예술가의 음악이 많은 부분 사라지고 없어졌지만 남아있는 자료라도 빨리 수습하여 연구하고 복원하는 노력을 우리 후학들은 아끼지 말아야 한다.

(2)단소산조

단소산조는 말 그대로 단소로 연주하는 산조를 말한다. 단소산조의 창시자는 오늘날 전추산이라고 전해진다. 그가 태어난 해가 1887년이고 그가 17세에 단소를 처음 잡았으니까 1904경에 단소를 배우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호남 퉁소의 명인이라는 유동초가 1930년대 중반에 퉁소산조 음반을 취입했고, 경기 시나위권의 정해시 퉁소 명인도 30년대 퉁소산조를 취입했으므로 퉁소산조가 만들어진 것이 1920년이라고 본다면 같은 종취 관악기 산조로서 단소산조도 이 당시 처음으로 연주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전추산의 단소산조에 관해 백대웅은 [인간과 음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산조의 작곡자는 음악의 짜임새가 정해진 형식의 틀에 얽매일 수 없다는 생각이 앞선 사람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음악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이 ‘단소산조’의 멜로디는 아주 자연스럽고 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멜로디를 우리는 훌륭한 멜로디라고 말합니다. (중략) 여러분은 단소를 불어본 일이 있나요? 단소라는 악기는 높고 영롱한 음색을 지녔지만, 이 악보의 음악처럼 반음이 출현하고 글리산도(glissando)와 떠는 음의 시김새를 연주하기에는 아주 부적당한 악기이지요. 악기의 조건이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단소로는 산조와 같은 기교와 시김새가 복잡한 음악은 연주가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전용선이라는 천재적인 명인은 단소로도 산조를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지요.”

전용선이 연주한 단소산조는 오늘날 국립국악원에서 연주하는 줄풍류를 연주하는 안공법으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단소에 보이는 앞면 네 개의 지공을 모두 사용하는 안공법을 이용해서 연주한다.

위와 같은 안공법으로 단소산조를 연주할 때 계면조의 슬픈 소리는 반규법으로 사용해서 낸다. 반규법은 단소의 지공을 손가락 끝을 이용해서 반을 막거나 여러 가지로 음을 만들어서 내는 것을 말하는데 대금산조에서도 이러한 연주법이 많이 사용되나 특히 대금보다 한 지공이 적은 단소에서는 이 반규법과 같은 연주법이 매우 중요하다. 전추산의 단소산조를 듣고 있으면 단소로 이렇게 굵은 요성 소리를 낼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즉 단소산조에 있어서의 요성을 어떻게 내느냐하는 문제인데 단소를 퉁소와 같이 생각해서 고개를 이용하여 요성을 내는 법이 있고 호흡을 조절하여 배로 요성을 내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문화재전문위원 이보형님에 의하면 옛날 전추산 명인의 산조 연주를 본적이 있는데 고개를 흔들지 않고 목젖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전추산 명인의 단소산조는 고개를 이용하여 요성을 내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생강 명인에 의하면 구례 화엄사에서 전추산 명인과 이생강 명인이 다른 방에서 각자 음악을 연마할 때 전추산이 명인이 고개를 이용하여 연주하였다고 증언하고 있고, 실제적으로 전추산이 남긴 단소산조에 보이는 요성을 호흡으로만 했을까 하는 의문도 있으므로 이 요성에 관한 문제는 더 연구가 있어야 해결될 것이다.

이 음반에 담긴 전추산의 단소산조는 진양조와 중모리이다. 진양조는 보통 24박 장단으로 6박이 네 개 모여 [기경결해]라 하여 밀고, 달고, 맺고, 푸는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음악의 구성이 딱 24박이 한구절로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 진양조는 6박 한각의 5박, 6박에 장고 점이 확실하게 들어가도록 장고를 치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고 감상하면 좋다. 전추산의 단소산조에는 우조와 계면조가 주를 이루고 우조가 약간 보인다. 중모리는 12박 한 장단인데 9번째 박을 크게 치므로 이를 주의해서 들으면 장단을 다라 음악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16장단에서 음악이 끊기는데 뒤의 녹음이 없는 것이 안타깝다. 중모리도 계면조가 주를 이룬다.

전추산 단소산조에서도 전조가 보인다. 전추산 단소산조는 a음을 중심으로 하는 계면조가 대부분이나 가끔 f음으로 연주하는 계면조가 등장해 새로운 분위기를 전해준다. 이 음반의 산조에서는 중모리에서 확연히 볼 수 있다. 다른 전추산 단소산조에서는 a음을 중심음으로 하는 계면조 선율 중에 a음보다 5도 위의 음에서 흘려주는 음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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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원 : 신비의 가락, 추산 전용선 단소 연주집 - 서울음반, 녹음 1959. 6. 3., 제작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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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소산조 - 진양조 - 단소 전추산 - 장고 박영복






단소산조 - 중모리 - 단소 전추산 - 장고 박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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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11.17 10:27

    첫댓글 단소! 내추억이생각나네요.조그마하고,소리가청아해서,유일하게 동요2곡정도소리하는데,아~처음왜그리소리가안나든지,지금도어느구석방에 누워있을것입니다.대금도아마,처음이리소리가 터져나오지않치안을까,생각합니다.

  • 09.01.09 21:03

    귀한 소리 모셔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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