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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문학창작지원금 대상작품입니다. 금강산을 다녀왔습니다. 재미있었냐고 묻는 사람도 있고 그런 관광 무엇 때문에 갔느냐는 사람도 있더군요. 묘한 것은 갔다와서 생각이 바뀐 거예요. 나는 반대쪽이었죠. 지금 같은 조건에서 뭐 하러 가냐. 나뭇가지 하나 건드려도 눈 부라리고 쵸코파이 먹다 부스러기 흘려도 쓰레기 버렸다며 벌금을 물린다던데. 이런 식의 제약 많은 관광을 마음 조리면서 너도나도 가야합니까. 술 담배도 금지, 흐르는 물에 발은커녕 손도 씻을 수 없고 사진도 마음대로 못 찍는 관광을 앞다투어 가야하냐 말입니다. 언제까지나 가지 말자는 건 아닙니다. 모순된 조항들이 없어진 뒤 가도 늦지 않을 거란 생각이었죠. 그런데 갔다 온 후 생각이 바뀌었어요. 너도나도 금강산에 가서 느꼈으면 하는 대목이 있었던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반대하던 나만 생각이 바뀐 게 아니라는 점이에요. 앞장서서 가자고 했던 사람은 그 사람대로 생각이 달라졌어요. 왜 그런지 궁금하시죠? 중역회의에서 금강산 관광을 제안한 건 영업이사였어요. IMF 한파를 이겨내는데 공을 세운 우수영업사원에게 포상으로 금강산 관광을 시켜주자는 거였죠. 해당자 대부분이 원했다는 거에요. 그런데 기획실장이 반대했어요. 금강산 가는데 제약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오죽하면 '하지마 관광'이라 부르겠냐. 그것도 북한에 1인당 200불씩 주면서 가는 거다. 쌀도 주고 비료도 주고 경수로도 지어 주면서 그야말로 파산 직전의 경제를 앞 뒤 따지지 않고 도와주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오만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상태에서 너도나도 우우 몰려가는 건 자제해야 한다… 홍보이사는 영업이사 편이었어요. 금강산 가자는 목적이 무엇이냐. 포상 관광 아니냐. 노사 신뢰를 다지고 일 잘하는 사원 더 잘하게 동기 부여하자는 것이니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원하는 곳을 보내주는 게 옳다. 이건 경영이지 정치가 아니다. 하며 동조했어요. 상무이사인 나는 반대쪽이었죠. 가지 말자는 게 아니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그 반대의 극단이라 할 금강산을 누가 반대하겠느냐. 하지만 너무 떼쓰는 것 같은 제약이 많은 게 사실 아니냐. 스트레스나 잔뜩 받고 돌아온다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반대했어요. 영업이사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어요. 담당자를 불러 자세히 알아봤다. 제약이라는 건 결국 체제 비판 금지와 자연훼손 방지를 위한 거 두 가지다. 우리도 지켜야 하는 거 아니냐. 막말로 북한을 러시아나 헝가리 같은 외국이라 생각하고 간다면 모두 군소리 없이 지킬 거다. 아랍에 가면 왼손 조심해야 하고 인도에서 어린아이 귀엽다고 머리 함부로 쓰다듬다 곤욕을 치르지 않느냐. 어느 나라나 제나름의 제도와 인습은 있는 거다. 그러자 좌장인 전무가 한마디했어요. 에이, 북한을 어떻게 외국이라고 생각합니까. 분단 반세기지만 같은 언어를 쓰는 한 민족인데… 감정이 있는 한 그리는 안될 겁니다. 좌장이 그렇게 말하니 영업이사는 몹시 난처해했어요. 그는 땀을 흘렸지요. 말하지 않아도 뻔합니다. 우수영업사원에게 금강산 관광 시켜주겠다고 이미 큰소리 친 겁니다. 이틀 전 전국 지시장 회의가 있었거든요. 지난 해 여름은 우리 화장품 회사도 정말 고비였어요. 금리는 치솟고 현금 아니면 어떤 원자재도 구할 수 없었고 소비는 꽁꽁 얼었었죠. 위기에서 회사를 구한 것은 일선 영업사원들이었어요.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을 선물로 주자는 과감한 아이디어가 그들에게서 나왔어요. 구조조정 때 알짜기업을 먼저 처분하는 거와 같은 발상이었죠. 흔히 사은품으로 주는 물건이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잖아요. 우린 반대였어요. 사도 그만 안 사도 그만인 물건을 사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상품을 선물로 주었어요. 반응은 정말 좋았어요. 덕분에 창고에 쌓여있던 비인기 품목들이 날개돋친 듯 팔려나갔고 회사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죠. 예측하지 못했던 다른 플러스 요인도 있긴 있었어요. IMF로 남자들이 직장을 잃으니까 여자들이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고, 그러니 화장품 수요는 많아졌던 거죠. 이래저래 회사는 예상보다 경기가 좋았습니다. 그러니 우수 사원 포상 건의가 자연스럽게 나왔고, 여기서 금강산 관광 이야기가 나오니 영업이사는 약속할 수밖에 없었겠죠. 그러니 상황적으로는 가야 했어요. 회의에 붙이지 않고 그냥 품의서를 올렸다면 일사천리였을지 몰라요. 회의에 붙인 것은 신문에 오르내리는 비판 여론 때문이었죠. 까다로운 제약 조건이 불안감을 주긴 했어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우리 사원이 북에 억류되는 일이라도 벌어진다면 그런 낭패가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중역회의에 붙였던 거예요. 그날 결론을 내리진 못했어요. 회의 말미에 전무가 말했어요. 제안자인 영업이사와 반대 의견을 낸 기획실장이 금강산 관광을 먼저 갔다와 보라고요. 그날 저녁, 영업이사와 한 잔 했어요. 영업이사는 대학, 그것도 같은 과 3년 후배라 내가 의지인 셈인데 금강산 건에 견해가 갈린 것이 마음에 걸렸어요. 위로해 주려는 자리였는데, 그런데 결과는 서로 반대하는 입장만 더 확고하게 인식하고 말았어요. 나는 당장 마누라가 이틀이 멀다 하고 금강산 가자 노래하는데 미루고 있는 사실을 말해 주었어요. 마누라 고향이 금강산 너머 통천이다. 만물상 코스의 정상인 망양대에 오르면 고향 앞바다 내음을 맡을 수 있다고 한다. 얼마나 가고 싶겠느냐. 분단과 전쟁으로 고향 잃은 사람은 다 그럴 거다. 이런 기회에 북한 땅 밟아보고 싶은 건 누구도 말릴 수 없을 거다. 하지만 갔다온 뒤의 스트레스를 생각해 보자. 고향을 마치 남의 나라 다녀오듯 한다는 게 좀 처량하고 가슴 미어지는 일이냐. 영업이사는 술이 약간 올랐어요. 그렇다면 지금 금강산 가는 건 간도 쓸개도 없는 사람들입니까. 그런 관광에 매일 천명씩 몰리니 참 한심한 국민들이네요. 영업이사는 쓴웃음을 흘렸어요. 다녀오겠습니다. 금강산 갔다와서 답사 보고서 낼테니 그때 다시 검토해 주십시오. 우린 제법 취할 때까지 마신 후 헤어졌어요. 집에 갔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하필이면 그날 아내가 금강산 표를 내놓는 거에요. 자식들이 모아서 사왔다는 거에요. 보나마나 어미가 소원을 했겠죠. 아내는 결연한 의지로 말했어요. 당신 안 가면 혼자라도 가겠어요. 북한방문신청서를 미리 써내야 한다니까 내일까지 결정하세요. 다음에 가자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요. 그건 의논이 아니라 통고였어요. 나는 당황하고 말았지요. 밤새 고민한 끝에 함께 가기로 했어요. 아내는 실향민이니 자격이 있었어요. 고민의 핵심은 혼자 보내느냐 함께 가느냐 였죠. 회사에서도 마침 이야기가 나왔고 갈수록 금강산 이야기가 가깝게 들리니 엣다 모르겠다. 이 기회에 나도 가보자 한 거에요. 회사에는 말하지 않기로 했어요. 뒤로 부뚜막에 먼저 올라갔다는 소리 들을까봐 였죠. 일정표를 보니 금요일 하루만 연가를 내면 월요일은 오후 출근으로 될 것 같았어요. 그렇게 해서 우리 부부는 금요일 출발 월요일 도착의 3박4일 짜리 금강산 관광을 다녀오게 되었어요. 오후 2시쯤 동해항에 도착하니 수백 명이 이미 모여 있었어요. 하나 같이 등산복 차림에다 들뜬 모습이었어요. 하긴 금강산 가는 사람에겐 설레임이 있을 거예요. 접수처에 이름을 대니 가반 2조 12번이라고 소속을 알려주더군요. 무슨 소린가 했더니 총 팔백명 가까운 인원을 크게 가반과 나반으로 나누고, 반은 다시 30명씩을 한 조로 편성한 것이었어요. 또 한 조 30명에겐 1번부터 30번까지 번호가 주어졌어요. 학교에서 몇 학년 몇 반 몇 번 하는 거와 같아 받아들이기 나름일텐데, 사회주의 냄새가 풍기는 거 같아 기분은 별로 였어요. 가이드가 조장을 겸했는데 20대 젊은이들이었어요. 여성 조장도 꽤 많았어요. 등산을 함께 하는 가이드들이라 아주 건강하고 생기가 넘쳤어요. 그들은 아버님들, 어머님들, 하면서 방북시 주의사항과 행동요령을 말해 주었어요. 첫째 사진촬영을 조심하라고 했어요. 장전항은 중요한 군사지역이기 때문에 사진은 물론 관측을 해서도 안 된다. 버스로 이동 중일 때도 안 된다. 북한 사람과 함께 찍는 것도 안 된다… 망원렌즈 달린 카메라나 멀리 볼 수 있는 쌍안경은 당연히 휴대금지라고 했다. 둘째는 북측 사람 접촉시 언행을 조심하라 했어요. 세관원 군인 안내원 감시원 등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특히 체제나 사상을 언급하지 말고, 또 기암절벽에 새겨진 선전구호를 보고 손가락질하거나 비판해서도 안 된다고 했어요, 듣고 있으니 역시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에게 틱틱 거렸어요. 이렇게까지 일방적인 세칙을 만들어 적용하는 줄 몰랐던 거죠. 비싼 돈주고 이런 굴욕적인 대접받으면서 이래도 흥 저래도 흥, 가야 합니까. 아무래도 난 잘못 왔어. 그냥 당신이나 갔다오라고 하는 건데… 주의사항은 계속 이어졌어요. 자연을 훼손해서도 안 됩니다. 휴지 쓰레기는 모두 배낭에 넣어 관광선에 가져와야 합니다. 흙 한 줌, 작은 돌멩이 하나도 가져오면 안 됩니다. 산에서 술을 마시거나 재떨이 없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시면 안 됩니다. 찢어진 청바지나 성조기 그려진 티셔츠를 입어도 안 되고…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달러는 어서 줍쇼 하면서 성조기 그려진 티셔츠를 못 입게 하는 건 대체 무슨 경우인가요. 아내에게 말했어요. 현대가 금강산 관광 부추기는 것이 잘하는 일 같지 않다. 조건이 나빠도 실향민이야 갈 것이니 그들에게 길 열어주는 것은 좋지만 일반 사람은 급한 거 없지 않으냐. 지금은 명맥만 유지해야 하는 거다. 북측에서 왜 이렇게 안 오냐고 묻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그때 모순을 지적하고 일방적인 조항들을 수정할 수 있지 않느냐. 우린 그때 가도 되는 건데… 듣기만 하던 아내가 한 마디 했어요. 지금 그런 거 보러 가는 거에요. 왜 당신 기준에 맞추려고 해요. 이웃집엘 가도 그 집 관습 지켜 주어야죠. 우리 나라엔 그런 법이 없나요. 아무데서나 침 뱉고 쓰레기 버릴 수 있어요? 함부로 자연 훼손해도 괜찮아요? 안 되잖아요. 벌금 물어야 하고. 하긴, 그렇게 말하면 할 말 없죠. 벌금도 국내가 더 높을 거에요. 하지만 아무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죠. 감시도 소홀하고 원칙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일 거에요. 그리 보면 금강산에선 적당히 가 통하지 않는다는 게 불만의 요지인 것 같았어요. 관광증을 받았어요. 그런데 관광증을 반드시 목에 걸고 다니라는 건 또 무슨 불쾌한 소립니까. 허허 참. 갈수록 속이 메스꺼워 지는 거죠. 더 비위 상하기 전에 돌아설까. 생각도 해봤어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죠. 기왕지사 아내를 위해 나선 것. 봉사한다 생각하고 눈 딱 감고 다녀오자, 하고 비장한 각오를 했지요. 사사건건 의미를 부여해 생각하는 게 피곤했어요. 휴지를 꺼내 코를 푼 후 휴지통을 향해 던졌어요. 골인이 안 되고 옆에 떨어졌어요. 아내가 얼른 가서 그 휴지를 집어 휴지통 속에 넣었어요, 에이그 성격두. 그냥 두어도 될 걸… 옆에 있던 안내 조장 한 명이 그 말을 듣고 빙긋 웃으며 나에게 말했어요, "아버님, 금강산 가셔서 그러시면 큰일납니다." 얼굴이 약간 붉어지데요. 생각 말자 했음에도 금세 뒤집혀 이런 고약한 관광을 툴툴 대며 가고 있는 내가 이해되지 않았어요. 금강호를 탔습니다. 영화에서나 보던 10충 짜리 호화여객선으로 북유럽의 바이킹라인 같은 유람선이었죠. 3층부터 객실인데 우린 7층의 한 방을 썼어요. 샤워실까지 갖춘 호텔방 그대로였어요. 배 안에는 회의실, 레스토랑, 바, 수영장, 헬스장에 스포츠안마실까지 있었어요. 선상 회의실에서는 계속 비디오 테이프가 돌아갔지요. 금강산 관광 기초교육인데 산을 탈 때의 안전요령이 아니라 북쪽 감시원에게 흠 잡히지 말라는, 품행상의 주의사항을 반복하는 것이었어요. 비디오를 보고 난 우리 부부는 8층 갑판에서 오랜만에 ― 단 둘이는 실로 오랜만에 ― 맥주를 한 잔 했죠. 회사 이야기를 했어요. 우수 사원들 금강산 보내주자는 데 나와 기획실장이 반대했다니까 아내는 제발 이제는 좀 열린 생각을 가지세요. 하고 속 넓은 충고를 했어요. 조금 낫다는 쪽에서 이해하고 감싸주어야지 똑 같아 가지고 무슨 대화나 통일을 바라냐는 거였어요. 사면초가 상태의 북한이 억지 부리는 것은 세계가 다 아는 일이잖아요. 나는 입을 벌렸어요. 아내가 그런 말도 하는 사람인줄 몰랐기 때문이죠. 그리고 보니 아내와 마주앉아 진지하게 이야기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에 없었어요. 아마 결혼 전에나 그랬을 거에요. 결혼 후엔 집안 이야기 따위밖에 안 했으니까요. 30년이 지나 문득 보니 나보다 더 열린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였지요. 허허허. 공연히 미안하고 새삼스러워지는 건 왜일까요. 허허허허. 그때 한줄기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참 덥더군요. 오후 6시쯤 배는 미끄러지듯 동해항을 떠났어요. 직접 가면 얼마 안 걸리는 거리를 공해로 나갔다가 위로 올라가 장전항으로 들어가야 하는 관계로 12시간이나 걸린다고 했어요. 삼척동자도 쓸데없는 낭비라고 할 거에요. 유람선은 살 같이 바다를 지났어요. 하얗게 부서지는 물살만 안 보면 가만히 있는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어요. 해가 지니 달이 떴죠. 달빛 잔잔한 바다 위를 순백의 웅장한 유람선이 미끄러지는 게 퍽 낭만적이었어요. 레스토랑은 6층과 9층에 있는데 한번에 800명이 함께 식사하기는 어려웠어요. 방송이 나왔어요. …노란색 관광증을 가진 가반 1조에서 6조까지는 9층 식당에서 빨간색 관광증을 가진 가반 7조에서 13조까지는 6층 식당에서 6시반부터 7시 20분 사이에 아침을 드시고… 가반과 나반으로 나누어 가반이 식사하는 동안 나반은 쇼를 보고, 나반이 식사할 때 가반은 쇼를 보았어요. 1시간 20분 가량 라이브로 진행되는 쇼는 70년대 극장쇼를 생각나게 했어요. 저녁 먹고 쇼 보고 맥주 한 잔 걸치니 피곤했어요. 묘한 설레임과 역겨움으로 보낸 하루였어요. 이튿날 아침 일찍 아내와 함께 갑판에 나갔더니 옆에 봉래호가 있었어요. 금강호 보다 하루 먼저 온 현대의 다른 유람선이죠. 봉래호는 오늘 관광을 마친 후 저녁에 동해항으로 돌아가고 내일 아침에는 풍악호가 그 자리를 채운대요. 석 대의 유람선이 그렇게 움직이니 매일 금강산 출발이 가능한 거였어요. 두 유람선의 모양은 댓돌 위에 나란히 놓인 한 켤레 신발 같았어요. 해안은 말로만 듣던 장전항이었어요. 북한에서는 동해안 최남단의 군사항이니 가치를 따지면 남한의 동해항과 다를 바 없을 겁니다. 그런데 생기 넘치는 동해항에 비해 장전항은 너무 쓸쓸했어요. 경비정 몇 척이 정박해 있고 70년대 주체공법으로 지어져 페인트도 칠하지 않은 콘크리트 건물이 몇 채 띠엄띠엄 있는 작은 군사 기지 같았어요. 멀리 금강산엔 수목이 무성했지만 장전항을 둘러싼 것은 하나 같이 민둥산이었어요. 마치 어떤 건설업체가 콘도를 짓다 부도 나 중단하고 내버려 둔지 몇 해 된 것 같은 음산한 풍경이었죠. 먼저 북한을 다녀온 황석영씨는 대단히 놀란 글투로 그런 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했어요. 정말 그런 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어요. 50년대식 스피커 방송이 울리자 주민들이 잠깐 보이더니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뒤이어 바다로 나가는 어선 몇 척이 보였어요. 그 후 민간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요.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있음직 한데 역시 볼 수 없었어요. 7시쯤 되니 삼삼오오 열을 지어 이동하는 북한군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들은 경비병이 교대하는 의식을 보여주었어요. 뷔페로 아침을 먹고, 현대에서 주는 배낭과 산행 때 먹을 간식, 점심 도시락을 하나씩 받아들고 금강호에서 내려 작은배를 타고 장전항을 밟았어요. 선착장 시설이 빈약해서 큰배를 직접 댈 수 없기 때문이었죠. 출입국관리소가 있었어요. 이 곳을 통과하기 위해 우리는 또 반별, 조별로 줄을 섰고 번호대로 들어갔어요. 입국 심사대에 서니 세관원이 어서 오십시오. 하고, 겸손하게 웃으며 인사했어요, 처음 만난 북한인 치고는 너무 인상이 좋았어요. 그가 물었어요. "금강산 관광이 처음이십네까?" 그렇다고 하니 좋은 추억 가지고 가십시오 하고 입국 스탬프를 찍어주었어요. 휴대품 검사는 외국 출입 때와 같았어요. 그렇게 8백명이 줄줄이 출입국관리소를 통과하는 데 삼십 분 정도 걸렸나 봐요. 정해진 순서대로 입국하니 빨리 처리된 거죠. 만약 한 명에게라도 문제가 생기면 8백명 전원이 해결되기까지 기다려야 한댔어요. 출입국관리소 안팎 요소요소에 경계병이 부동자세로 서 있는데 눈동자조차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안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어요. 절차를 마치고 북쪽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니 35인승 중형버스 수십 대가 늘어서 있었어요. 한 대에 한 조씩 타게 되어있는 거죠. 모두 현대에서 만든 버스였어요. 현대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어요. 운전기사는 모두 연변의 조선족이었죠. 구색을 잘 갖췄더라구요. 이윽고 버스가 온정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모든 움직임은 군대처럼 절도가 있었어요. 버스도 1호차, 2호차, 3호차 순으로 움직였죠. 우리의 출발이 신호인양, 이번엔 봉래호에서 내린 관광객이 줄줄이 세관으로 들어갔어요. 장전항에서 온정리까지는 이십 리 남짓인데 폭 오륙미터의 시멘트 포장도로였어요. 양편에는 2미터가 넘는 철책이, 휴전선 155마일에 설치된 것처럼 이어져 있고 백 미터 간격으로 북한군이 경계를 서고 있었어요. 그런데, 입고 있는 군복이 눈에 들어오는데 얼마나 오래 입으면 색이 그렇게까지 바랠까요. 낡고 바랜 군복과 까맣게 그을린 얼굴… 게다가 하나 같이 비정상으로 보일 만큼 키가 작았어요. 굶주린 탓일 거예요. 뒷자리에 앉은 여성 한 분이 울음을 터뜨렸어요. 불상해서 못 견디겠다는 거였어요. 버스 안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지요. 가이드가 일어나 설명했어요. "우리 기준으로 보지 마십시오. 금강산 관광길에 만날 수 있는 북한 사람은 그 계급이 어떻든 우리 옷차림이나 자유분방한 언행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주체사상으로 철저히 무장된 정예 세력입니다. 다소 빈틈을 보이더라도 서툴게 동정심 베풀었다간 그 자리서 관광증 뺏기고 낭패 당하기 십상입니다…" 철책 너머로 밭일하는 주민들이 보였어요. 붉은 기 꽂아놓고 한데 모여 일하다 버스를 보자 손을 흔들더군요. 우리도 열심히 손을 흔들어 주었어요. 우리 일행이 온정리 휴게소에 도착하여 조금 쉬고 있으니 20여대의 버스가 줄줄이 들어와 합쳐졌어요. 뒤에 입국한 봉래호 관광객이었죠. 이틀째인 그들은 금강산에 제법 익숙해진 모습이었어요. 혹 아는 사람이 없나 공연히 두리번거려지더군요. 다시 버스를 타고 신계사까지 갔어요. 첫날 코스는 구룡연이었기 때문이었죠. 버스는 신계사 바로 위에서 우리를 토해놓았어요. 시간차를 두고 뒤따라온 봉래호 버스는 한 텀 아래에 관광객을 내려놓았어요. 가이드가 소리쳤어요. "금강호 승객이 먼저, 봉래호 승객이 나중 올라갑니다. 조별로 질서 있게 행동해 주십시오." 그러나 순식간에 금강호와 봉해호는 뒤섞이고 말았어요. 꾸물거리고 느린 사람은 뒤쳐졌고, 부지런한 사람은 앞 서 올라갔어요. 금강산 등반은 그렇게 신계사에서 시작됐어요. 도시락은 버스에 두고, 간식만 배낭에 넣고 산행을 시작했어요. 한 때 이름을 떨쳤다는 음식점 목란관까지 3km는 설악산이나 지리산의 평이한 계곡과 같았어요. 양지대를 지나 금수다리를 건너면서 독특한 계곡미가 조금씩 느껴졌지요. 삼록수 만경다리를 건너 금강산의 문이라는 금강문에 닿았어요. 금강문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바위굴인데 문안에서 보는 금강산과 문밖에서 보는 금강산이 신기할 정도로 다르더군요. 길도 문까지는 평탄하나 문 이후는 심한 오르막이었죠. 다시 말하면 금강문이 곧 절벽과 폭포와 소로 가득한 옥류동 계곡의 시작이었어요. 초입의 옥류담은 금강산에서 가장 큰 못으로 넓이가 6백평방미터 수심은 오륙미터가 실한데 물이 어찌나 맑은지 바닥의 작은 조약돌까지 아주 선명했어요. 몇 걸음 더 올라가니 두 개의 못이 안경처럼 이어져 있는 연주담이 보였어요. 에메랄드빛이었죠. 물 빛깔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보는 사람마다 탄성을 질렀어요. "야아, 저 물빛 좀 봐…" 아내는 한참 연주담을 보다 주위를 둘러싼 바위를 보며 추억을 끄집어냈어요. 꼭 50년 전에 여길 와 봤다고 하더군요. 재담꾼인 삼촌을 따라왔는데 연주담은 선녀가 흘리고 간 두 알의 구슬이 윗못과 아랫못에 하나씩 떨어져 아름다운 빛깔을 내는 거랬대요. "아아, 삼촌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아내는 연주담 물빛보다 주위 풍광을 더 감개무량해 했어요. "저 바위를 봐요. 금강산 바위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게 특징이에요. 나이나 직업, 취미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구요. 당신에겐 저 바위가 어떻게 보여요? 책 좋아하니까 독서하는 것 같겠죠? 여자들 눈에는 거울 보며 화장하는 것으로 보일 거예요. 화가에게는 그림 그리는 것 같고, 할머니 눈에는 아마 애기를 달래는 것으로 보일 거예요. 삼촌이 내게 물었어요. 우리 경숙이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통천에 살고 있을 삼촌인데, …지금 여든이시니 돌아가셨을까요?" 아내의 눈에 연주담 물빛이 스쳤어요. 아내는 비봉폭포 전설도 기억해 냈어요. 높은 세존봉 중턱에서 층층으로 된 바위벽을 타고 내리는 긴 폭포로 금강산 일만 경치 중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비경이었어요. "옛날 남방에 평화로운 왕국이 있었대요. 부러울 게 없는 나라의 왕이 하루는 신하를 불러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곳이 어디냐고 물었어요. 한 신하가 아뢰기를 해동조선에 있는 금강산이 천하 제일이니 한 번 구경하시면 평생소원을 이룰 것이라고 했어요. 왕은 서둘러 길을 떠났는데 봄에 떠나 가을에 금강산에 닿았어요. 왕은 단풍으로 붉게 타는 금강산의 황홀경에 취해 감탄을 연발했죠. 연주담을 지나 여기, 비봉폭포 앞에 이르렀을 때였대요. 갑자기 거대한 봉황새 한 마리가 긴 꼬리 한 끝을 계곡물에 드리우고 중천으로 솟아오르는데 그 꼬리가 손에 잡힐 것만 같았던 거에요. 왕은 신하를 시켜 저 꼬리를 잡아라! 어서 달려가 꼬리를 잡아! 하고 명령했어요. 뛰어가 꼬리를 잡으려는 순간 수만 개의 물 구슬이 쏟아져 내려 얼굴이며 어깨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통에 신하는 벌렁 나가 자빠졌어요. 왕은 봉황이 날아간 위를 보았죠. 그제야 봉황은 환상이요 거대한 폭포인줄 알았대요… 아유타국의 왕이었나 봐요. 금강산을 보고 돌아 간 왕은 금강산을 잊지 못하더니 꿈의 계시라며 아들과 딸을 보냈대요. 수로왕 부인 허황옥이 그 딸이었대요." "그랬던 거래?" 나는 아내를 다시 보았어요. 전설의 진위 여부를 떠나 30년을 같이 살면서 아내가 그렇게 이야기 잘 하는 줄 정말 몰랐거든요. 뭉클 하는 감정과 함께 무언지 크게 잘못한 것 같은 생각이 사정없이 밀려왔어요. 나는 그렇게 금강 선경 속에서 차츰 젊음으로, 동심의 세계로 갔어요. 아내는 처녀 때의 청순함을 그대로 보여주었어요. 구룡폭포는 9백 미터쯤 더 가야했어요. 가파른 오르막길 곳곳에 철제 계단이 놓여져 있었어요. 헬스클럽에서 에어로빅이다 수영이다 꾸준히 한 아내는 보기에도 가볍게 올라가는데 나는 헉헉거렸어요. 온 몸이 땀에 젖어 가다 쉬고, 가다 쉬었어요. 수건으로 땀을 닦다보면 침을 뱉고 싶은 때가 많았어요. 아내는 그런 나에게 결정적인 순간에 경계를 주곤 했어요. 마치 나의 못된 버릇을 완벽하게 연구한 사람 같았어요. 나는 항복했죠. 가장이랍시고 큰소리친 게 알고 보니 아내 손바닥 위에서 놀았던 거예요. 팔순은 돼 보이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파른 산길을 부지런히 올라가고 있었어요. 힘들어하시는 것 같아 한 말씀 드렸어요. "무리하시지 말고 쉬엄쉬엄 올라가세요. 꼭 위에까지 가지 않으셔도 되잖아요." 할머닌 고개를 저었어요. "안돼요. 올라가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사위에게 보여줘야 해요." 사위가 보내준 거예요. 별 일 없기만을 바래야겠죠. 이윽고 구룡폭포를 한눈에 보며 쉴 수 있는 구룡연 정각에 올랐어요. 구룡폭포는 정말 장관이더군요. 깎아지른 절벽에 물이 계속 떨어지는데 그 길이가 7, 80미터였어요. 물이 많을 때는 폭포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고, 물줄기는 천 갈기 만 갈기 부서지며 영롱한 무지개를 꽃 피우는데, 반대로 물이 적을 때는 하늘에서 비단필을 드리운 듯 하며 골 안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킨다는군요. 물이 떨어지는 곳의 절구통 같은 못은 깊이가 13미터나 된다는데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고도 하고, 아홉 가지 조화를 부리는 용이 살았다고도 하더군요. 어쨌든 그래서 구룡연(九龍淵)인 거죠. 고운(孤雲) 선생이 다녀갔을 때는 물이 적었나 봐요. 그랬기에 …구룡폭포야, 너 천 길 비단필 드리운 듯 하고, 만 섬 진주알 쏟아내는 듯 하구나… 했겠죠. 큰소리로 시를 읊조리니 가이드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어요. 폭포 옆에 새겨놓은 구호를 읽는 줄 알았나 봐요. 북한인 감시원도 의심이 되는지 다가와 지금 뭐라고 하셨습네까. 하고 물었어요. 죄진 것 없는데도 겁이 나더군요. 나는 한껏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어요, 신라 때 최치원이라는 시인이 있었는데 그 분이 여기 와서 읊은 시가 생각 나 흉내를 내 보았다구요. 감시원은 공손히 물러갔어요. 그 광경을 옆에서 본 오십대 일행 하나가 나를 힐책하듯 뭘 그렇게 절절 매십니까? 하며 침을 탁 뱉었어요. 치사하고 아니꼽다는 생각에서겠죠. 그런데 하필이면 그걸 돌아가던 감시원이 보았지 뭡니까. 감시원은 얼른 되돌아 와서 챔 뱉은 사람의 목에 걸려있는 관광증을 나꿔채며 사납게 말했어요. "금강산이 당신들 와서 침이나 뱉으라는 산입네까?" 오십대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했어요. 분노도 일고 겁도 나는 거죠. 가이드가 끼어 들어 침 뱉은 것은 잘못이니 사과하라고 했어요. 오십대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지 상황을 말했어요. 감시원은 더 듣기 싫다며 관광증을 움켜쥐고 가 버렸어요. 가이드는 여봐요, 잠깐만, 하며 감시원을 쫓아갔어요. 잠시 후 돌아온 가이드는 침 뱉은 오십대에게 말했어요. "벌금을 내시지 않으면 일행 모두 돌아가지 못 합니다." 오십대는 더 버틸 수 없는 거죠. 그가 침을 뱉을 만큼 더럽다고 느낀 것이 무엇인지 나도 알아요. 상황이 바뀌었다면 내가 그랬을지 몰라요. 하지만 불끈 솟는 순간을 넘겨 생각하면 잘못을 하긴 한 거죠. 남북 문제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왜 자연에다 해소합니까. 구룡연에서 간식을 먹고 상팔담에 올랐어요. 구룡연 위로 여덟 개의 못이 연이어 있는데 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 상팔담이었어요. 거리는 얼마 안 되지만 길이 가파르고 험했어요. 하지만 올라간 보람은 기가 막힐 정도였죠. 팔담도 볼만하지만 전망이 좋아 주위의 천 가지 풍치 만 가지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어요. 옆으로는 수려한 옥녀봉이 흰 살결을 드러내며 반기고, 앞에는 세존봉 천화대가 보이는 것이 마치 구름 위에 뜬 기분을 갖게 하였지요. 정상에 바위 구멍이 있는데 옛날 구룡이 유점사에서 구룡연으로 들어올 때 만들어진 것이라더군요. 멀리 북쪽으로 옥녀봉과 관음연봉도 보였고 동북쪽으로는 바다도 아스라히 보였어요. 상팔담에 있는 북측 관리인은 묻지 않는데도 말을 했어요. "상팔담 골 안은 티끌 하나 없이 어찌나 정갈한 곳인지 흐르는 물도 이슬 같고 향기가 납네다." 돌아오면서 그 말을 음미했죠. 참 멋진 표현이었어요. 하산 길에 휴대한 식수가 떨어졌어요. 계곡 물을 물통에 담아 마시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발은커녕 손도 못 담그게 하니 깨끗하겠지요. 그러나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로프가 쳐 있어 넘어갈 수 없었어요. 북한 감시원을 만났어요. 그들은 취약지라고 생각되는 곳마다 남녀 한 쌍이 배치되어 있었어요. 외모는 우리 농촌의 순박한 젊은이예요. 그들이 한 눈에 구별되는 건 청색 운동화였어요. 현대에서 주었다죠, 아마. 남자에게 계곡물 좀 담아 줄 수 없는냐 고 했더니 뜻밖에도 싱긋 웃으며 "돈을 내야 하는데" 하는 거였어요. 나는 반가워서 "줄게, 얼마?" 하니 그는 얼른 일어나 "아닙니다." 하고 비탈을 내려가 물을 한 통 담아다 주었어요. "정말 얼만지 말해요, 드릴게." 하고 다시 말하니 그는 정색을 하고 "정말 아닙네다. 농담이었습네다." 했어요. 억지로 줄 수도 없어 고맙다고 악수하고 말았어요. 손을 내미는 그의 얼굴이 붉어지더군요. 순간적으로 어리석은 생각을 하긴 했었나봐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게 역력했어요. 뒤 따라 오던 부부가 자기네 물도 부탁하자고 했어요. 감시원은 두 손을 내저으며 거절했어요. 내 물을 나눠주었더니 맛있게 마시더군요. 주차장에 돌아온 건 오후 2시쯤이었어요, 버스에서 도시락을 꺼내 주차장 주변에 매트를 깔고 앉아 먹었어요. 신개발품으로 보이는 조리형 도시락은 독특하고 맛있었어요. 아까 물을 나눠준 부부가 함께 앉을 수 없느냐고 해서 자리를 내주었죠. 그들도 부부만 왔다 하여 함께 어울렸어요. 인사를 나누니 남자는 의사요, 여자는 시인이었어요. 의사가 물통을 내밀었어요. 아니 아까 물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니 웃으며 이건 소줍니다. 하는 거였어요. 한 컵 받아 마시니 정말 소주였어요. 나는 얼른 북측 감시원을 살폈어요. 감시원은 그곳에도 있었거든요. 어떻게 술을 가져왔느냐고 물으니 의사는 미리 물어 보았다며 웃었어요, 이렇게 물통에 소주를 넣어오는 건 알면서도 모른 척 해준다는 거예요. 북한도 술에는 관대한가 봐요. 술이 오가니 분위기가 부드러워지고 말이 많아졌어요. 의사는 금강산 오길 참 잘했다고 했어요. 구룡폭포 갔다 온 기분이 매우 좋았다는 거지요. 특히 잘 보존된 자연에 대해 감탄을 연발했어요. 쓰레기로 얼룩덜룩한 우리 나라 산과 너무 비교가 된다고 했어요. 부인은 산에서 지은 시를 낭송했어요. 그 산 앞에서 나는 말을 잃었다/ 웅장하면서 섬세한/ 날카로우면서도 담담한/ 넘볼 수 없는 힘을 지닌/ 자연 그 자체인 산 앞에서 나는 그만 말을 잃었다/ 살아있는 전설/ 숨쉬는 역사/ 그 산 앞에서 우리 할 말이 무엇이랴/ 보고 듣기에도 모자라는 시간에. 박수를 쳤어요. 한 편의 시가 금강산을 다시 보게 했어요. 노래를 좋아하는 나는 그리운 금강산으로 답해 주고 싶었지만 참았어요. 고성방가도 아마 안 될 거예요. 잠시 후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고 돌아갈 채비를 했어요. 담배가 피고 싶어 재떨이 있는 곳으로 갔죠. 북한측 감시원은 그곳에도 있었어요.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달콤하게 빤 뒤 그들에게 말을 걸었어요. 이렇게 공기 맑은 곳에 근무하니 참 부럽습니다. 했더니 여자가 말을 받더군요. "구경 잘 하셨어요?" "아주 잘 했습니다. 금강산은 정말 빼어난 산이네요." 남자가 끼어 들었어요. "겨우 구룡연 하나 올라가 보고 무슨 금강산 이야기십네까. 금강산은 온갖 재주 가진 바위가 다 모였고 물은 천 가지 재롱을 부리는 곳입네다. 천하명승 금강산을 봤다 하려면 최소한 이십 이 일, 스물 두 개 코스는 올라가야 합네다. 선생이레 오른 것은 금강산도 아닙네다. 봉래산이죠. 새싹 돋아나고 만물 소생하는 봄에나 여기를 금강석 같이 아름답다 하여 금강산이라 하는 겁네다. 녹음 우거지고 흰구름 안개 감도는 여름은 신선이 사는 산이라 하여 봉래산이라 불러요. 단풍으로 붉게 타오르는 가을에는 또 풍악산이라 부릅네다." 남자 감시원의 조리 있는 설명에 마음이 끌린 나는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며 또 물었어요. 주위 사람들은 나와 그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들었어요. "그럼 물어 봅시다. 금강산 첫째 명승은 어뎁니까." "그거야 중심인 비로봉이죠. 비로봉이 최고의 절경입니다. 금강산은 비로봉을 중심으로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나뉩네다. 거칠어서 남성적인 외금강엔 열한 개 명승구역이 있고, 산세가 온유하고 수려하여 여성적이라는 내금강엔 여덟 개 명승구역이 있습네다. 그리고 해금강에 3개 구역이 있는 겁네다." 나는 감탄하며 또 물었어요. "해금강이 그렇게 좋습니까?" "좋다 마답네까. 하루만 놀고 가려던 사람이 주변경치에 홀려 3일을 머문다는 곳이죠. 수정처럼 맑은 바닷물과 수면에서 솟아오른 바위들의 조화는 가히 환상입네다." 그때 뒤에 있던 중년 남자가 끼어 들었어요. "듣기에 해금강도 곧 개방한다든데 언제쯤인지 압니까?" 그러자 이게 웬일입니까. 이제껏 친절하던 북측 감시인이 갑자기 사나운 표범으로 돌변하는 것이었어요. "아니 동무레 지금 뭐라고 했습네까? 개방이요? 우리가 지금 개방한 겁네까?"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어요. "보시오. 남조선 인민들 죽기 전에 금강산 한 번 보는 게 소원이라 해서, 우리 장군님의 인덕정치로 방문 기회를 준 것인데 개방이요?" 그는 중년 남자의 목에 걸린 관광증을 확 나꿔채 살폈어요. 관광증엔 이름 나이 직업 등 기초자료는 적혀 있었어요. 중년남자는 대학교수였어요. 북한인은 씩씩 거렸죠. "교수면 지식인 아닙네까? 지식인이 그런 말 하는 것은 의도적인 거 아닙네까?" 그들은 확실히 해석하는 관점이 달랐어요. 중년 남자는 의도적이란 갈고리성 해석이 나오자 금세 얼굴빛이 창백해졌어요. "별 뜻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니니 양해하시오. 개방이란 말 취소하겠소." 주위 사람이 모두 한 마디씩 도와주었어요. 북한인은 으쓱해서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용서해 주었어요. "앞으론 말을 조심해서 하시라우요!" 나는 담배를 끄고 천천히 걸어 아내가 있는 쪽으로 갔어요. 좋아졌던 금강산이 다시 싫어지고 있었어요. 우리가 왜 그런 추궁을 당해야 하는 거죠? 오후 4시쯤 버스를 타고 온정리로 나왔어요. 북한 특산품을 팔고 있었는데 품질은 어떤지 몰라도 포장이 참 엉성했어요. 다시 장전항으로 와서 아침 입국할 때의 역순으로 출입국관리소를 빠져 나와 금강호로 돌아왔죠. 배에 도착하여 내 선실 침대에 누우니 비로소 살 것 같았어요. 가슴을 펴고 선실이 떠나가라 이삼분간 소리를 질러 버렸어요. 아내는 그런 내가 재미있는지 깔깔 웃더군요. 저녁을 먹으면서 들으니 오늘도 사고가 많았더군요. 북한 감시원 옆에 서서 은근 슬쩍 사진 찍다 필름을 빼앗긴 사람도 있고, 한 사람은 글쎄 천선대에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지 뭡니까. 물론 감격해서 무의식중에 그랬겠죠. 하도 뜻밖이라 일행은 물론 감시원도 멍청하게 한참을 보고만 있었대요. 50불로 해결 보았는데 천만 다행이라고 가이드들은 입을 모았어요. 또 한 사람은 성조기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다가 곤욕을 치뤘더군요. 속에 입고 있었는데 산 위에서 겉옷을 벗었던 거에요. 감시원이 지적하자 즉시 들고 있던 남방을 입었는데 소용없었다는 거예요. '하지마 관광'의 적나라한 사례만 보고 듣는 것 같아 또 구역질이 올라왔어요. 금강산은 아직 올 곳이 못 된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더군요. 그날 저녁은 의사 부부와 함께 보냈어요. 의사의 시각은 의외로 북쪽을 두둔하는 쪽이었어요. 자연 훼손 안 하기로 했으면 지켜야 하는 거 아니냐. 우리가 거듭나야 할 부분이 많다 는 거였죠. 의사 부인도 같았어요. 우린 너무 적당주의에 배어 있다. 부도덕한 짓도 권력으로 적당히, 직권 남용도 직위로 적당히, 법을 어기고도 얼버무리는 일이 너무 많잖아요. 하루 빨리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가 되어야겠죠… 허허 참. 하고 나는 말했어요. "내 느낌에는 여기 감시원에게도 하루 몇 건 적발하라는 할당량이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위법자가 그 수만큼 안 나오면 트집을 잡는 것 같습니다. 본질이 어디 갑니까? 여기라고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러나 아내가 말했어요. 아내는 내 편을 들어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의사 부부와 견해가 같았어요. "그런 소리 마세요. 우린 이미 우리 고유의 도덕심 예의범절을 모두 잃어 버렸어요. 그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금강산에서 보여주고 있는 거에요. 제 생각엔 금강산 관광이 오히려 자연보호의 산교육장이고 나아가 통일 의식에도 기여할 것 같아요." 허허 참. 넷이 있는데 셋의 생각이 그러하니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죠. 그 밤은 피곤한 탓에 그쯤에서 헤어져 들어가 잤어요. 구룡폭포 같다온 덕에 녹초가 되었습니다. 이튿날은 여유가 생기더군요. 한번 들어갔다 나왔기 때문입니다. 봉래호는 어제 밤에 갔고 아침에 보니 풍악호가 그 자리에 있었어요. 풍악호 사람은 어제의 우리처럼 호기심으로 들떠 있는 것 같았어요. 하늘에 약간 구름은 있었지만 날씨는 좋은 편이었어요. 오늘은 풍악호 승객이 먼저 배에서 내려 출입국관리소로 들어갔어요. 우리는 그 뒤에 배에서 내렸어요. 조별로 열을 서 있는데 가이드가 안내를 했어요. "오늘은 만물상 코스입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온정리 휴게소에 들렸다가 만상정 까지 버스로 갑니다. 만상정에서 산행을 시작하는데 정상까지 이 점 이 키로미터니까 왕복 십리길입니다. 산길이 경사가 심해 두 시간 반 내지 세 시간 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유념하실 것은 이 코스에는 화장실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화장실이 없다고 아무데서나 용변을 보면 그것도 벌금입니다. 그러니 화장실이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억지로라도 반드시 들려주십시오." 허허 참. 아마도 남한의 국립공원에서 그런 소리를 했다간 따귀를 맞았을 겁니다. 생리 현상을 어쩌란 말입니까. 엉터리도 이만저만이 아닌 거죠.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조건에 순응해서 산을 오르던가, 싫으면 유람선에 남아 지내야 한다는데. 투덜대기는 해도 포기하는 사람은 없더군요. 온정리 휴게소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붐볐어요. 풍악호 금강호 구분 없이 만나는 광장이었으니까요. 조금 쉰 후 버스는 만상정을 향해 움직였어요. 금강산호텔과 온천을 지나 한하계를 통과하는데 풍광이 묘했어요. 한하계는 안개가 자주끼고 온도가 낮은 계곡인데 한번도 물이 마른 적이 없다는군요. 버스 안에서 관음폭포를 보았어요. 만상정 주차장에 닿으니 조금 먼저 온 풍악호 사람들이 산행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신계사에서 봉래호 사람과 섞였듯 만상정에서 우리는 풍악호 사람들과 곧 섞였지요. 주차장에서 삼선암까지 3백 미터는 평탄했어요. 삼선암을 지나니까 가파른 길이 나오는데 노인에겐 힘들어 보였어요.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걱정 마시우. 내 알아서 가는 데까지만 갈 거니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보다 잘 올라가시더군요. 귀신 형상이라는 귀면암을 지날 때였어요. 아니 상무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는데 낯이 익었어요. 돌아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영업이사가 서서 나를 보며 웃고 있는 거 아닙니까. "아니 이게 누구요."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상무님." 우린 서로 그렇게 말했지요. 영업이사는 풍악호를 타고 오늘 아침 도착한 거에요. "아니 금강산 간다고 말이나 하지…" "제가 할 소리를 상무님이 하시네요. 참…" "그래 혼자 왔오?" "왜 혼잡니까. 전무님이 기획실장과 함께 답사하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럼 기획실장도 왔단 말이요?" "그럼요. 곧 나타날 겁니다. …허허 참 상무님, 그 따위 금강산 뭐 하러 가느냐 더니 웬일이십니까. 정말…" "어허 그건 그건…" 나는 대답 대신 옆에 떨어져 의사 부부와 함께 있는 아내를 불렀어요. "여보, 이리와 봐. 영업이사가 왔네. 기획실장도 함께 왔대." "어머나 반가워라." "아이구. 사모님도 오셨군요. 이렇게 오실 줄 알았으면 우리와 같이 오실 걸요. 저희도 식구와 같이 왔는데." 우리는 정말 반가워서 손잡고 흔들며 활짝 웃었어요. 그런데 곧 나타날 거라던 기획실장과 부인들이 올라오질 않았어요. 조금 있으니 뒤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어요. 무슨 일인가 귀동냥 해보니 어떤 부인이 머루 넝쿨을 두 뼘 길이쯤 끊어 팔지 삼아 손목에 두르다가 북한 감시원에게 적발됐다는 거예요. 잘못했다고 했으면 모르는 데 그 부인이 이런 것도 안 되냐 며 막 대들어서 아예 싸움이 벌어졌다는 거예요. 뒤늦게 가이드가 증간에 들어 열심히 타협을 보고 있다는 거였죠. 사람들은 계속 우리를 지나 올라갔어요. 20분이 지나도 기획실장은 안 왔어요. 우리는 싸움 구경하느라 그런가보다 했어요. 기다리는 동안 의사 부부와 영업이사를 인사시켰어요. 삼십분이 더 지나서 기획실장과 두 부인은 나타났어요. 알고 보니 머루넝쿨 사건의 주인공이 영업이사 부인이었지 뭡니까. 부인이 어찌 할 수 없어 30불 벌금을 물었다고 하니 이번엔 영업이사가 얼굴까지 붉히며 펄펄 뛰었어요. 모두 한 목소리로 달랬지만 영업이사는 쉽게 안 풀리는 모양이었어요. 머루넝쿨 사건 때문에 분위기는 식어버렸어요. 지체한 시간이 많아 부지런히 올라가다 망장천에서 잠시 쉬었어요. 한 노인이 샘물을 마시자 힘이 솟구쳐, 짚고 올라왔던 지팡이를 잊어버리고 갔다해서 망장천이라 이름지어진 곳이죠. 망장천 물을 받아 영업이사에게 주었어요. "이거 마시고 머루넝쿨 일은 잊어버리게" 영업이사 부인도 위로해 주었어요. "다 잊어버리고 경치를 보세요. 정말 절경 아닙니까?" 물을 마시며 우리는 그곳에서 쉬었어요. 잠시 있으니 웬일인지 그 곳에 있던 감시원은 우리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위로 올라갔어요. 수많은 바위가 만가지 형상을 연출해 내는 만물상은 정말 절경이었어요. 산에 오르지 않고는 맛볼 수 없는 절경이었죠. 금강산 다녀와서 금강산이 설악산 보다 난 게 뭐 있냐고 하는 사람은 산에 올라오지 않은 사람일 거에요. 중턱에서는 그 맛을 느낄 수 없거든요. 영업이사는 아무래도 머루넝쿨 일이 분한가 봐요. 씩씩거리면서 내게 말했어요. "상무님 말씀이 옳았습니다. 이런 이상한 관광은 올 게 아니었습니다. 장전항 통과할 때도 기분이 안 좋았어요. 다 늙어서 예비군 동원훈련 들어온 기분이었어요." 나는 빙긋 웃었어요. "내가 아는 영업이사는 그렇게 변덕스런 사람이 아닌 데… 내일 구룡연까지 가보고 판단해 봐요." 영업이사는 고개를 저었어요. 이 코스나 저 코스나 분위기는 같겠죠 뭐, 경관이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그때 칠순 할머니 두 분이 씩씩거리며 올라왔는데 이게 무슨 놀라운 일입니까. 방금 딴 듯한 곰치를 한 다발씩 움켜쥐고 오는 거 아닙니까. 아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어요. "할머니 그게 뭐에요?" 할머니는 태연하게 말했어요. "곰치에요. 곰치. 곰치도 몰라요? 올라오면서 보니까 곰치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 내 팔자에 금강산 곰치를 먹게 되다니…" "아니 할머니. 올라오면서 뜯었다구요? 얼른 배낭 속에 넣으세요. 북한 감시원이 보면 큰일 당한다구요." "아니 왜 그래. 이건 먹는 건데…" 영업이사 부인이 일어나 할머니 손에서 곰치를 빼앗다시피 하여 얼른 배낭 속에 넣어 드렸어요. 숨막히는 순간이었어요. 간발의 차이로 위에 갔던 감시원이 돌아왔어요. 두 할머니는 눈을 껌벅이며 눈치를 보다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위로 올라갔어요. 우린 서로를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죠. 구룡폭포에 두 개의 정상이 있듯, 만물상 코스에도 천선대와 망양대가 있었어요. 천선대는 만물상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어 상등봉 옥녀봉 영랑봉 관음련봉 세존봉이 한 눈에 보였어요. 천선대에 오른 의사 부인은 또 즉흥적으로 시를 지어 읊었어요. 사람들아/ 금강산 대자연을 묻지 마라/ 눈에도 다 담을 수 없는 것을/ 어찌 입으로 다 말하겠느냐/ 금강산이 궁금하거든 묻지 말고/ 여기, 천선대에 올라 보거라. 수정 기둥처럼 삐죽삐죽 솟아오른 바위들이 구룡연 보다 백 배는 더 다양한 형상을 보여주고 있었어요. 웅장하고 신비롭고 황홀하고 장쾌하여 탄성을 내지르지 않을 수 없고 나 자신 신선이 되어 거기 서 있는 기분이었죠. 천선대 정상의 바위는 절경에 취해 일어설 줄 모르고 앉아있다 그대로 돌이 된 나그네라고 했어요. 아내가 빨리 움직이자고 했어요. 망양대를 가자는 거죠. 맞아요. 아내의 목표는 처음부터 망양대였어요. 망양대에 오르면 고향이 보인다고 했거든요. 우리가 서둘러 천선대를 내려오니 다른 일행도 뒤쫓아 왔어요. 아내는 부지런히 앞서 갔어요. 망양대는 천선대에서 5분쯤 내려와 오른쪽 길로 20분쯤 다시 올라가야 했는데 길이 엄청 험했어요. 내가 좀 쉬어가자 하니 아내는 그럼 나 먼저 갈게요 하고 한걸음에 달려갔어요. 나는 뒤에 처져 그늘에서 쉬며 물을 마셨어요. 그때 아차, 싶은 신호가 왔어요. 오줌이 마려워진 거에요. 큰일났다 싶어 얼른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숨어서도 소변 볼만한 곳이 없었어요. 마침 조장 한 명이 지나가길래 형편을 말하고 도움을 청했어요. 조장은 고개를 저었어요. 참는 방법밖에 없다는 거에요. 이만 저만 낭패가 아닌 거지요. 영업이사와 기획실장이 다가왔어요. "사모님은 어디 가시고 상무님만…" "아, 집사람은 젊으니까 먼저 올라갔네." "상무님은 왜 안 올라가세요?" 속도 모르고 그들은 물었죠. "난 잠시 쉬었다 올라갈거니 먼저들 올라가게." 나는 기슭에 박혀있는 바위에 걸터앉았어요. 그러자 그들도 쉬어가겠다며 옆에 앉았어요. 영업이사는 담배 한 대 피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고 주머니를 만지작거렸어요. 그리고 보니 영업이사가 참 신통했어요. "참 신통하군. 골초가 어찌 그렇게 담배를 참고 있나…" "아이구. 그러는 상무님은 출출한 목을 어찌 달래고 계십니까." "그런가. 그러면 장군멍군인가." 하하하. 우린 한바탕 웃었지요. 순간 나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앉은 자세에서 슬그머니 바지 자크를 열고 그것을 꺼내 방뇨할까 생각했어요. 까짓 옷이 좀 젖으면 어떠냐. 땀인줄 알겠지. 곧 마를 것이고, 또 배에 가서 갈아입으면 되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자크에 손이 갔어요. 자크를 내릴까 말까 몹시 망서렸어요. 아랫배가 아파왔지요. 하지만 끝내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후배들 앞에서 이 무슨 망령된 생각이냐, 싶었던 거죠. 걸으면 참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만 갑시다' 하고 일어났어요. 그러나 망양대를 올려다보니 막막했어요. 아직 한참 올라가야 하는데 저길 갔다가 다시 주차장까지 내려가야 화장실이 있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던 거에요. 그렇다고 그냥 돌아갈 수도 없었죠. 오냐. 참는 데까지 참아보자. 정 안 되면 자진해서 벌금 내고 일만이천봉 내려다보며 내깔겨버리자. 생각하기 따라서는 그것도 멋있잖은가. 그런 각오로 올라갔어요. 아내는 망양대 제1전망대에서 그야말로 하염없이 북녘을 보고 있었어요. 내가 가까이 가자 어깨에 얼굴을 묻으면서 눈물을 터뜨렸어요. 내 가슴도 뭉클해져 아내를 꼭 안아주었죠. 눈을 들어 바라보니 동해 푸른 물이 한눈에 들어왔어요. 그야말로 만경창파였어요. 날씨 맑고 파도 선명하니 그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남쪽으로는 천불동과 선창계 촛대바위가 보이고 천선대에서 보던 옥련봉 관음련봉 영랑봉은 더 선명했어요. 시인이 아니라도 노래가 나왔어요. 금강산 만이천봉 아름다운 산이여/ 봄이면 기화요초 벼랑가에 피어나고/ 여름이면 선녀들 구름타고 하강하네/ 가을이라 단풍잎 온 산에 불 타고/ 겨울 되니 수정기둥 서로 키를 재네/ 아아, 금강산 무엇을 더 원하리오/ 말과 노래 끊어진 곳에 금강산 솟았다네 망양대 있는 동안은 오줌 마려운 것을 잊겠더니 하산길에 또 생각이 났어요. 이제는 찔끔찔끔 새나올 것 같았어요. 일행과 같이 있다가는 망신을 피할 수 없겠다고 판단되자 나는 먼저 내려가겠다 하고 혼자 부지런히 내려왔어요. 같이 가자고 아내가 불렀지만 머뭇거릴 형편이 절대 아니었어요. 문득 여자들은 참 편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생리대를 이용하면 이런 위기쯤 거뜬하지 않을까 싶었던 거죠. 수건을 바지 속에 넣어 일을 볼까도 생각해 봤어요. 하지만… 역시 용기가 나질 않았어요. 아랫배를 움켜쥐고 뛰다 걷다 하며 억지로 참고 주차장까지 내려와 화장실로 달려갔어요. 그런데 왜 이 모양일까요. 시원하게 한줄기 뽑아져야 마음 조렸던 값을 하는 건데 찔끔 나오고 마는 거에요. 영 기분이 풀리지 않고 몸도 개운치가 않았어요. 뒤에 의사가 말하길 심리적인 영향으로 그럴 때가 있다는 거지 뭐에요. 먼저 내려온 죄로 물가에 좋은 자리 잡아 매트 깔고 점심 준비를 해 놨어요. 그 주차장에선 금강호 승객과 풍악호 승객이 한데 어울려 점심을 먹을 수 있었어요. 자리 깔아놓고 한 잠 자고 일어나니 그제야 일행이 내려왔어요. 모두들 내가 궁금했나 봐요. 왜 그렇게 서둘렀어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나는 빙긋 웃고 솔직히 말했어요. 그랬더니 모두 한바탕 크게 웃었지요. 빙 둘러앉아 점심을 먹었어요. 의사의 물통에 어제처럼 소주가 있어 자리가 부드러웠죠. 한 사람 한 사람 돌아가며 말하는데 많은 부분 소감이 비슷했어요.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 하며 배를 탔죠. 이런 제약 많은 관광을 가야 하나 해서였죠. 그런데 와 본 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우선 산이 깨끗한 게 너무너무 좋습니다. 빈깡통 콜라병은 물론, 담배꽁초 하나 볼 수 없는 자연 그대로의 깨끗함이 이렇게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는 줄 몰랐습니다. 담배 연기조차 없는 맑은 공기도 잊을 수 없습니다. 대기가 온통 향기인 것 같습니다." 물론 일방적이고 불편부당한 이런 저런 제약에 대한 불만도 나왔어요. 그러나 그런 제약을 두지 않는다면 석 달도 못 가 온 산이 쓰레기 투성이가 되고 오염된 물이 흐르는 금강산으로 변할 것이 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어요. 그건 반성하자는 소리였죠. 나는 휴지를 꺼내 코를 풀었어요. 그 종이를 평소처럼 휙 버리려다 아내와 눈이 마주쳤어요. 얼른 접어 조끼 주머니에 넣으니 아내가 엄지를 세워 보이며 빙긋 웃더군요. 의사가 말했어요. "금강산 관광은 지금 이대로 훌륭한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주일이 지나 중역회의가 다시 열렸어요, 금강산 답사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였죠. 먼저 영업이사가 일어났습니다. "답사 차 금강산 관광을 다녀왔습니다. 볼수록 아름답고 신비했습니다. 유람선에서의 시간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총평을 하자면 아직 아니라는 게 저의 결론입니다. 머루넝쿨 한 뼘 끊었다고 30불이나 벌금 물리는 그런 공포분위기 관광을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트레스로 인해 우리가 원하는 기대와는 정반대의, 역효과가 우려되는 정도입니다. 지난 번 회의 때의 기획이사님 말씀대로 조건이 완화되기까지 기다리는 게 좋다고 판단됩니다. 이번 우수사원 포상은 기획을 다시 하겠습니다." 다음은 기획실장이 일어났습니다. "영업이사님 생각이 갔다와서 바뀌었군요. 공교롭게 저도 바뀌었습니다. 저는 반대했었는데 갔다 와 보니 찬성하고 싶습니다. 금강산 가서 범칙금 문 사람은 대단히 불쾌할 겁니다만, 하지만 규칙을 안 지키며 사는데 너무나 익숙한 우리에게 반성의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가서 느꼈으면 하는 대목이 많았습니다. 금강산 관광은 지금 이대로도, 애사심을 고취시키고 단합을 도모하며 원칙의 중요성을 되새기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일이 이쯤 되자 전무는 나를 보았어요. "상무님도 다녀오셨다면서요? 한 말씀 해 주셔야 끝이 나겠는데요?" 할 수 없이 나도 일어났어요. 내겐 오줌 마려워 쩔쩔 맸던 일이 너무나 선명했어요. "예. 저도 금강산을 다녀왔습니다. 시종 긴장된 분위기였습니다. 금강산 구경보다 북측 감시원에게 흠 잡히지 않으려는데 더 신경을 써야 했습니다. 때문에 금강산은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아내와 갔었다는 게 좋았습니다. 저의 경우 애초의 목적도 실향민의 한 사람인 아내를 위해서였습니다. 금강산이 목적이었다면 느낌이 달랐겠지요. 제 결론은 어떤 시각에서 금강산을 보느냐 가 열쇠인 것 같습니다." 영업이사는 내가 제 편을 들어준 것으로 생각했는지 눈짓으로 고마움을 표하더군요. 최종 결론은 전무의 몫이었습니다. 숙고 끝에 전무가 일어났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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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많은일있으셨네요 -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