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진을 하게 되고, 아무런 저항 없이 도망가는 공산군을 좇아 평양에 입성하니 303고지를 사수한 공적을 치하하는 훈장이 와있었다. 1953년 전쟁 중에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는다. 대통령이 훈장을 보내와 그곳에서 훈장을 받고, 중사에서 상사로 일 계급 특진하여 최전선에서 더욱 더 열심히 싸우게 된다.
검도에 입문
김석순 선생은 일본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던 서울 필동에 살고 있었다. 부친은 동네에서 생선 소매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6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 선생은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김 선생이 살던 필동사무소에 검도장이 있었는데 그 당시 일본사범(4단)이 검도지도를 하고 있었다. 김 선생은 부친의 권유로 검도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김 선생이 초등학교 1학년, 두 살 위인 친형(김석춘 선생)이 3학년이었다. 얼마 후 부친이 사업차 일본 오사카에 다녀오면서 두 형제의 몸에 꼭 맞는 호구 두 벌을 사오게 되었다. 두 형제는 그 호구를 착용하고 본격적으로 검도수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부친은 직접 검도를 하지는 않았지만 늘 검도에 대한 동경이 컸었던 모양이다. 그런 자신의 갈망을 두 아들을 통해 실현시키고 싶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개인 호구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고, 돈이 있다고 해도 구입할 만한 곳이 없을 뿐더러, 호구를 갖는다는 자체가 크나큰 사치였던 시대였다. 그러니 부친의 검도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컸었는지는 이 일을 통해서 단적으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부친의 그 결단이 훗날 우리나라 검도계의 훌륭한 두 선생을 배출할 수 있었던 탁월한 선택이었다.
소년 검도인
그 시절 초등학교에서는 대개 4학년 정도는 되어야 검도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친형 김석춘 선생은 이듬해 4학년이 되어 정식으로 검도부에 들어가게 되었고, 선생은 3학년 말에 특별히 뽑혀서 검도부에 합류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을 검도로 보내고, 중학교 1학년 때 학도병으로 선발되어 일본 나고야로 파견되어 미쓰비시 군수공장에 배치되었다. 미쓰비시 하면 자동차로 유명한 공장인데 그 당시는 대동아 전쟁 중이라서 전쟁에 필요한 여러 가지 군수품을 제조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곳에서 그가 담당한 일은 전투기가 다 만들어지고 나면 마지막 마무리작업(시야기)을 하는 것이었다. 일이 힘들고 고되었지만 전투기를 만든다는 자부심으로 힘든 줄 모르고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어느 날 김 선생은 일본인 장교에게 검도를 배울 수 있느냐고 물으니, 그 장교가 직접 그를 데리고 가서 검도장을 구경시켜주며 수련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다음날부터 검도수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도장은 개인 도장이었는데 마쓰바라(6단) 선생이 운영하는 대동검도관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일본에서 초단을 받았다. 나고야에서 만 2년 정도 생활하다가 해방이 되면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고 다시 학교에 복학한다.
6.25사변 - 금성화랑무공훈장
김 선생은 19살 때 군대에 자원입대한다. 육군으로 국방경비대에 배치를 받아 근무하던 중 6.25사변이 터져 전쟁에 참전한다. 공산군에게 밀리고 밀려 낙동강 부근까지 내려와 303고지에서 항전을 하게 된다. 지금의 왜관 근처였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수도 없이 뺏고, 뺏기는 과정을 반복했던 치열한 전투였다. 그 전선이 함락되면 더 이상 도망갈 데가 없었음으로 배수진을 쳤던 것이다. 결국 김 선생의 부대는 그 고지를 끝까지 사수한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진을 하게 되고, 아무런 저항 없이 도망가는 공산군을 좇아 평양에 입성하니 303고지를 사수한 공적을 치하하는 훈장이 와있었다. 1953년 전쟁 중에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는다. 대통령이 훈장을 보내와 그곳에서 훈장을 받고, 중사에서 상사로 일 계급 특진하여 최전선에서 더욱 더 열심히 싸우게 된다. 그리하여 청천강 이북까지 진격하게 되었는데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바람에 다시 후퇴하게 된다. 김 선생은 전쟁 중에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전쟁이 끝나고 결국 5년 4개월의 군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명예제대를 한다.
제대 후 서대문 동양극장에 취직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검도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적당한 곳이 없었다. 당시 친형 김석춘 선생이 경무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관계로 가끔 경무대에 나가서 수련을 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검도수련을 하면서 검도대회에 나가서 남들과 겨루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었지만 김 선생은 소속이 없었음으로 그럴 기회가 오질 않았다. 그래서 교도관이 아닌 신분이었지만 서울구치소 소속으로 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차례 대회에 나가서 자주 입상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5.16혁명이 일어나고 이후 결국 정식으로 교도관이 되었다. 정부에서 검도를 하는 특기자들은 해산하라는 명령과 함께 정식으로 교도관 채용명령을 하달한 것이다. 이제는 정식교관이 되어 그후 꾸준히 전국교도관검도대회에 출전하여 여러 차례 입상을 하였고, 전국체전에 서울대표로 출전하게 되었다.
김 선생은 46세까지 서울대표로 전국체전에 출전하여 수많은 입상을 하였다. 서울팀이 전국체육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많이 올렸고, 교도관 대회에서도 서울구치소가 거의 우승을 독차지하였다. 개인전 우승기록은 단별 선수권 대회 2단부에서 우승을 하여 3단이 되고, 3단부에서 우승하여 4단이 되었다. 김춘경, 고규철, 전영술 선생이 김 선생의 라이벌이었다.
그 당시 자주 사용하는 기술은 아니었지만 한손 옆머리 치기가 주특기였다. 상대방이 방심하고 있을 때 이 기술을 날리게 되면 득점률이 높았다. 언젠가 국제사회인검도대회 결승전에서 이 기술을 사용하여 승점을 올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또 선생의 다른 기술은 머리치고 들어가는 순간 병혁을 잡은 오른 손을 순간 뒤로 조금 당겨 왼손과 겹치게 하면 순간 죽도의 길이가 몇 센치는 길어져서 득점 확률을 높이는 기술이다. 이 기술도 상대의 허를 찔러 가끔 비장의 무기로 사용했었다.
김 선생은 서정학 선생과 김영달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두 선생으로부터 직접 검도 지도를 사사받았다기보다는 단지 눈빛만으로도 마음이 통할 정도로 두 분 선생은 그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주었다. 두 선생이 그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항상 그가 먼저 그 뜻을 헤아리고 먼저 말을 할 정도였다. 서정학 선생이 우리나라 검도를 처음 보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분이 김 선생의 친형하고는 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였던 것이 사실이다. 두 분은 체격도 비슷하고 검도하는 스타일도 그렇게 흡사할 수 없었다.
지도자 생활
교도관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대학교 검도부 지도사범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데 서울대학교가 혜화동에서 관악산으로 캠퍼스를 옮기게 되면서 지도사범을 그만두게 된다. 그 후 중경고등학교의 검도부를 몇 개월 지도하다가 성동고등학교 검도부를 1년 정도 지도하게 된다. 그때 전국체전 고등부에서 성동고가 우승을 하였다. 그 당시 김영달 선생께서 잠깐 쉬는 동안 대신해서 가르쳤었는데 그때 지도했던 제자로는 김석진, 강진형, 권은택 등이다. 그러던 중 여의도 고등학교에 검도부가 창단되면서 검도사범으로 부임하게 된다. 신생팀이 창단되는 관계로 1기생들은 성남중학교 검도선수들을 대부분 스카웃했다. 그 당시 제자로는 김영근, 차공근, 한승택, 박종선, 김윤수, 서명호 등이었다. 신생팀이었지만 좋은 선수들을 많이 데려왔으므로 빠른 성장을 보였다. 그리하여 중고연맹전을 비롯한 전국대회에서 다수 입상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5년 여 동안의 여의도고등학교 검도지도사범 생활을 정리하고 아프리카 서해안의 가봉으로 가게 되었다. 이종구 선생의 친척이 가봉에서 건설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 원주민들에게 검도를 가르쳐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가봉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가봉에서 철도학교 학생들을 2년여 정도 지도하게 되었다. 가봉의 기후는 너무 더워 검도수련을 하기에는 힘든 조건이었다. 죽도나 호구는 본사에서 수송되는 건설 물자와 함께 들여와 보급되어 어려움은 없었지만 더운 날씨와 그곳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낮아 검도를 보급하기에는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었다. 결국 실패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귀국하여 가게 된 곳이 청주였다. 충북검도회에서 순회 코치로 부임해달라는 제의를 받았던 것이다. 그 당시 충북팀이 소년체전에서 7연패할 때였는데, 김 선생은 충북에서 3년 정도 순회 코치생활을 하였다. 충북에서 가르칠 때 기억에 남는 제자로는 지금 용인대 체육학과장인 김영학 교수, 공군사관학교 검도교관인 민창기 소령 등이다. 그들은 선생이 부광공고검도부를 가르칠 때 지도를 받았던 제자들이다. 사실 충북에서는 너무 어린 선수들을 키워서 그런지 정이 안 들었다. 아무래도 충북은 고규철 선생 가르침의 영향이 가장 컸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다가 청주에는 고단자가 많은 편이었으므로 고단자 지도자들이 없는 불모지로 가야겠다는 결심을 할 무렵 경남이 부산과 갈라지면서 경남검도회에서 순회코치로 부임해 달라는 요청을 해오게 되어 경남으로 가게 되었다.
진주와 남해에서 순회코치를 하였고, 울산에도 파견되기도 하였다. 당시 울산은 검도의 불모지였다. 그 무렵 울산에 검도를 보급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특히 울산은 사회인들이 무척 검도에 심취하는 분위기였다. 그 당시 경남검도회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 현 경남검도회전무이사 김진옥, 김두길, 울산의 강호훈, 박원경 등이다. 그 무렵 경상대학이 무척 강팀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 선생이 경남에 머물다보니 충북검도회에서 다시 와달라는 요청을 받고 충북으로 가게 된다. 충북에서 6개월 정도 생활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강원도에서 부임해 달라고 졸라대어 원통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가 83년이었는데 강원도 원통에서 2년 정도 사범생활을 하게 된다.
그동안 김 선생은 전국을 누비며 오로지 검도지도에 전력을 기울였다. 김 선생에게 배운 제자들은 수없이 많은데 그 중에서 여의도고등학교와 경상대 학생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지역적인 텃세 등의 문제점은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오로지 검도만을 생각하며 다녔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점이 없었던 것이다.
재미한국검도회 결성
가족들이 모두 미국 LA로 이민을 가는 바람에 강원도를 떠나 LA로 이민을 가게된다. 미국에서는 누이동생이 주유소를 세 개씩이나 운영하고 있었음으로 일감은 떨어지지 않아 생활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주로 야간에 주유소 근무를 하였는데 야간일은 방탄유리 속에 앉아서 편안히 컴퓨터로 기름을 판매하는 일을 하였다.
미국에서 검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 당시 LA 한인 타운에는 도장이 따로 없었고 공원에 있는 체육센터를 빌려서 운영하는 방식이었음으로 관리비가 많이 들지 않는 장점은 있었다. 그러나 많은 시간동안 운동할 수는 없었고 하루에 2~30분 정도 운동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여러 곳에서 검도를 하기위해 몰려들었다. 미국이라는 사회가 우리나라와 같이 가까운 곳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보통 몇 시간동안 차를 타고 움직여야 되는 일이 많다. 한국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거리 개념을 깨어야만 적응하며 살 수 있는 곳이라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재미한국검도회를 조직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김 선생의 친형(김석춘 선생)이 운명을 달리하였다. 그로인해 김 선생은 실의에 빠져 잠시 서울로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어머님마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미국으로 급히 들어갔지만 한 달 만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그리하여 김 선생은 더욱더 상심하게 되고 급기야 미국이 싫어지게 되었다. 결국 LA 생활을 청산하고 92년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만 2년만의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돌아왔던 것이다.
유랑의 종착역
김 선생은 93년도에 의정부에 정착하여 현재까지 의무관을 운영하고 있다. 김 선생이 그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가족들은 모두 서울에 남아 있었다. 자식들의 교육문제도 그렇고 유랑생활에 가족들을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로인해 가족들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었는지 그 당시는 몰랐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선생이 그동안 68년의 검도인생을 살아오면서 검도의 좋은 점을 들라고 하면, 어려서부터 이렇게 늙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수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75세의 나이에도 매일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이렇게 수련할 수 있는 운동은 검도밖에 없다고 말한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훈련을 할 때 거울속의 자신이 바로 자신의 적이라고 생각하고 훈련을 하라. 그러면 자신의 눈동자가 조금이라도 삐뚤어졌다가 다시 오더라도 삐뚤어지는 순간에는 둘 다 못 볼 것이다. 자신의 눈과 눈싸움을 하라. 그렇게 눈싸움을 하다보면 반드시 호면 속에서 보는 눈의 시야가 넓어지게 된다. 또한 대부분 검도수련을 통해서 죽도를 뒤로 넘길 때 중간 정도까지 올리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데 그러한 것이 결코 정석이 아니다. 죽도는 뒤 엉덩이를 때릴 정도로 뒤로 재껴서 휘둘러야 한다. 그렇게 하게 되면 아이들의 관절스냅이 유연해지고, 부드러워지는 것이다. 이 방법을 기본하는 아이들에게 철저하게 시켜야한다. 옛날 선생님들은 이렇게 죽도를 잡은 양손을 뒤로 넘겨서 엄지손가락이 등에 닿을 정도로 휘두르며 수련하였다. 반드시 칼을 뒤로 넘길 때 크게 확 넘겨서 수련하는 방법을 어려서부터 가르치면 중학교 정도만 되어도 큰칼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칼을 크게 쓰라고 백 마디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다.
오늘도 김석순 선생은 아이들을 지도하기위해 호루라기를 목에 걸었다. 엄격하면서도 자상하게 어린제자들을 다독이며 그들의 검도미래를 손수다듬어가는 모습이 그저 엄숙하게만 느껴진다. 평생을 그렇게 아이들과 생활하며 검도지도에 정열을 바쳤건만 아직도 그 유랑은 끝날 줄 모른다. 아이들도 그런 선생의 뜻을 헤아리는 듯 선생의 지시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마치 훈련된 병사들처럼 도장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수련에 열중하고, 선생은 잔잔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