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부모님을 자주 뵐 수 있었던 큰 은혜
조득제·정혁순 가정
유년 시절
나(정혁순)는 1959년 12월 19일(음), 6남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이중 2남1녀가 사망하고 4남2녀만 남았다. “부모는 자식을 잃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슬픔으로 가득 찼을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그 당시는 아들을 선호하는 사회였지만 내가 막내로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딸이 태어났다고 무척 좋아하였다. 4남1녀 중에 막내로 딸이 태어난 것이다. 오빠들과 언니는 나를 무척 예뻐하였다. 오빠들은 일찍 집을 나갔고 언니는 시집을 갔기 때문에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외동딸처럼 부모님과 나 셋이 살게 되었다. 부모의 사랑을 과분하게 받았다.
내가 살던 동네는 평야지대로 영산강을 접하고 있다. 전형적인 시골 농촌마을에서 살았다. 봄이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우리들은 들에 나가 나물을 캤다. 우리 집은 부농은 아니라도 상당한 논과 밭을 가지고 있어서 먹는데 곤란을 겪지는 않았다. 특히 논 가운데 가뭄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는 문전옥답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가을에 논둑에 앉아 벼를 쪼아 먹는 참새를 쫓던 일이 생각난다. 참새와 새를 쫓는 이들의 숨바꼭질이 이어졌다. 얼핏 그런 일이 한 폭의 산수화처럼 낭만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정작 참새를 쫓아내는 우리 또래 아이들에게는 아주 귀찮은 일이었다.
여름에 저녁 먹고 멍석을 깔고 자리에 누워 하늘을 보면 은하수가 흐르고 별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 당시 오빠들은 날마다 들로 산으로 다니며 온갖 놀이를 다하며 놀았다. 연 날리기, 팽이치기, 얼음지치기, 쥐불놀이 등등. 내가 다섯 살 무렵의 어느 겨울, 손위의 오빠들은 연 날리기를 하면서 연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어느 날 연을 만들어 연날리기를 하려고 막 나가던 오빠들이 나와 마주쳤다. 오빠는 나가면서 “네 것도 만들어 놨어. 작은 방에 가봐.” 했다. 얼른 뛰어가 보니 정말 조그맣고 예쁜 연이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닭털을 붙여서 만든 예쁜 연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기쁘던지 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여섯 살 무렵의 어느 날, 추석을 지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집 앞의 들에 있는 샘에서 앞집 언니가 물을 길러 배추밭에 뿌리고 있었다. “언니! 뭐 해?” “응, 배추밭에 물 주고 있어.” “나도 해볼래.” 하고 두레박을 잡고 샘에 던졌는데 줄이 손에서 미끄러져 그만 두레박을 놓치고 말았다. 큰일이다 싶어 얼른 줄을 잡는다는 게 그만 줄을 잡고 물에 빠져버렸다. 물속에서 신발이 벗겨지려고 하여서 발을 들어 손으로 신발을 잡고 물을 꼴깍꼴깍 마시며 누워서 떠다녔다. 둑으로 가면 물이 차갑고 어두웠으며 중앙으로 나오면 밝고 따스했다.
내가 물에 빠졌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가 순식간에 뛰어들어 나의 옷을 잡고 건져내셨다. 그때 “앙!” 하고 울음이 터졌다. 물은 많이 마셨으나 다행히 아무 이상이 없었다. 추석 무렵이라 아버지가 집에 계셨기에 다행히 살았지 농사철로 어른들이 집에 계시지 않았다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죽다 살아난 기억이 있다. 철부지 나이였지만 ‘죽음이라는 것이 이처럼 우리 곁에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오빠들의 통일교 입교
나는 너무 어려 기억도 안 나지만 어느 해 겨울 아리따운 아가씨가 우리 동네로 전도를 나왔다. 우리 집 사랑방이 교회가 되어 저녁마다 동네 처녀총각들이 방으로 가득히 모여 말씀을 들었다. 하지만 교회와 연결되지 못하고 우리 집 오빠들만 남고 모두 떠나갔다. 그때 말씀을 들었던 동네 언니 한 분은 결혼을 하고서도 교회를 잊지 못하고 오빠들만 만나면 참부모님의 안위와 교회 안팎의 소식을 듣고 싶어 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 할 무렵, 첫째 오빠와 둘째 오빠 두 분이 430가정 축복을 받았다. 축복 후 올케들이 집으로 온다고 잔치를 했다. 나는 셋째, 넷째 오빠와 함께 5리나 되는 시골길을 걸어 버스 정류장으로 마중을 나갔다. 그렇게 3일을 다녔고 하루 종일 기다렸다. 결국엔 버스로 오지 않고 목포에서 배를 타고 집에 왔다. 기다림에 대한 보람이 없어서 참 허전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430가정 축복 후 전라도에 심한 가뭄이 들었다. 당시에 부모님은 빚을 내어 두 며느리에게 금반지를 해주었는데, 그 빚은 해마다 복리로 점점 늘어 갚을 길이 막막했다. 그래서 문전옥답의 논이 그 빚으로 다 넘어가고 말았다. 이 일로 아버지는 농사철이 되면 화병이 나서 한동안 힘들어 하였다. 하늘 앞에 자랑스러운 축복가정이 되기까지에는 고통을 감내하고 탕감해야 하는 이런 사연이 숨어 있었다.
내가 교회에 들어와서 원리를 들었는데, 깨달음을 준 말씀이 있다. “축복을 받으려면 조상의 공적이 많든지, 자신의 성품이 좋든지, 그렇지 않으면 시대적 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조상의 공적이 모자라서 두 명이나 축복받는 것은 무리였던 듯하여 재산으로 탕감을 하였구나.’ 하고 느꼈다.
1970년대에 목회를 하던 큰오빠는 올케언니가 전도를 나가야 된다며 3살 된 조카와 백일이 갓 지난 둘째를 데리고 시골 우리 집으로 왔다. 너무 귀엽고 예쁜 조카들이었다. 어머니는 낮에는 고단한 들일로 힘들었지만 밤을 꼬박 새다시피 하면서 백일 된 손주를 돌보았다. 분유가 많은 시절도 아니어서 쌀을 갈아 미음을 만들어 먹여야 했다. 그러던 중 둘째가 심한 홍역을 앓았는데 제때에 치료를 받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갔다. 뻣뻣하게 굳은 아이를 안고 어머니와 나는 한없이 울었다. 그날의 슬픔과 아픔은 말로는 표현이 안 된다. 어린 나이였지만 지금도 생생히 남아 있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아픔을 진하게 느낀다. 어쩔 땐 숨이 안 쉬어지도록 가슴이 먹먹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완전히 정신이 나간 상태의 나날을 지냈고 아버지는 독약을 마시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지만 다행히 어머니가 일찍 발견한 덕분에 목숨엔 지장이 없었다.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오빠들이 통일교회로 입교하면서 우리 집안은 이렇게 마음 아픈 일들이 생겼다.
육신의 부모님
나의 친정 부모님은 6500기성가정이고 시어머님은 3만 기성 영·육계 축복가정이다. 우리 아버지는 예능에 능하고 어머니는 사리에 밝았다. 아버지는 작은 체구에 깔끔한 시골 할아버지였다. 훗날 손주사위가 우리 아버지를 보고 “이런 오지 시골에 어떻게 이렇게 멋진 할아버지가 있느냐?”며 놀라워했다. 하얀 한복에 흰 두루마기, 백구두를 신고 모자 쓰고 지팡이 들고 나서면 그 지역에 그만한 멋쟁이가 없다. 노래도 아주 잘 했는데 그중에서도 창(唱)을 잘 했다. 지금도 ‘쑥대머리’ 부르던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리 동네에선 매년 신년 대보름에 지신밟기 풍물놀이를 하였는데 그때 아버지는 꽹과리를 치면서 전체를 지휘하는 상쇠가 되어 맨 앞에서 사물놀이 패를 이끌었다.
친정아버지에 대해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축복을 받고 아이들이 4세, 5세 정도 되었을 때 어느 날 친정을 갔더니 아버지가 “어느 점쟁이가 동네에 왔는데 나에게 복이 4가지가 있다”고 했다면서 좋아했다. 그래서 내가 농담으로 “아버지 그분 말이 맞네요. 첫째 부인(처)복이 있고, 둘째 자식복이 있고, 셋째 건강복이 있는데 복이 하나 남으니 그 남은 복을 나에게 주시지요.” 했더니 허허 웃음만 웃으며 “죽음 복이 있어야 된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는 참 편히 영계로 가셨다.
2000년 1월 2일(음), 모든 자식들과 손자들이 모여 구정 명절을 잘 지냈다. 다음날 아침을 드신 후 누우려다가 다시 일어나 어머니에게 “나 반주 안 먹었네. 반주 한 잔 주소.” 해서 어머니가 주는 반주를 들고 누우셨다. 자식들이 씻고 정리하고 나서 귀가할 준비를 하였다. “아버지, 저희들 이제 가 볼랍니다.” 하고 인사를 하려고 하니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는 중이었다. 가족들 모두 우당탕 난리가 났다. 황당하다면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또 아버지께서 한 말씀처럼, 죽음복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우리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래서 제사가 설날 저녁이다. 묘하다면 묘한 인생이지만, 달리 보면 참 복을 많이 받은 아버지이셨다.
친정어머니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다. 키가 아버지보다 크셨다. 어머니는 내가 고향을 떠나기 전까지 한 번도 나의 생일상을 거른 적이 없었다. 시루떡과 미역국, 소소한 나물이 전부였지만 참 귀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렸을 때는 ‘교과서에서 배우는 신사임당보다 나의 어머니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어린 시절의 나에게 위인전 같은 옛날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우리 엄마는 동네에서 소문난 양반이었다. 많은 아이를 키우면서도 큰 소리가 없었고 아이가 잘 못한 일이 있으면 곡식을 저장하는 광으로 불러 조용히 타일러서 그 아이의 인격을 지켜 주었다. 이는 동네 아저씨의 증언이다. 마을 지도자들이 어머니를 칭찬하기를 “우리 동네 면장님이다, 좌장이다.”라며 존경하였다.
그만큼 사리가 밝고 영리하였다. 동네의 아주머니들은 모든 고민을 우리 어머니에게 와서 상담하였다. 글도 잘 읽었지만 셈도 잘 하여 동네사람들이 장에 나가 물건을 사거나 팔면 그 계산을 다 해주었다. 물론 우리 아버지도 한글과 셈을 하였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한글과 숫자를 아버지에게서 배우고 입학하였다.
친정어머니는 2004년에 돌아가셨다. 잘 계시다가 한 열흘 정도 입원한 후 돌아가셨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영계에 대한 두려움도 싹 없어졌다. 왜냐하면 죽어서 영계에 가면 내 사랑하는 어머니를 뵐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만은 가시지 않아서 때때로 눈물짓는다.
시어머니는 77세 되던 해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특별한 것은 영·육계 축복을 받아서인지 성화식을 치르는 기간에 은혜가 많았다. 성화하셨을 때 3명이 우리 어머니의 환영을 보았다. 첫째로 작은어머니의 증언이었다. 입관 예배 후 울면 안 된다고는 해도 모시고 살면서 많은 삶의 내용을 함께해서인지 눈물이 났다. 울고 있는 나에게 기성교회의 열렬한 권사인 작은어머니가 증거하였다. “울지 마라. 네 엄마 아주 좋은 곳으로 가셨다. 입관하는 그 장소의 천정을 다니면서 흰옷을 입고 너울너울 춤을 추면서 좋아 하시더라.”
이 작은어머니께 내가 약혼하고 인사드리러 갔다. 작은시댁은 사업을 하여 살림이 넉넉하였다. 가사도우미 아주머니가 밥을 차려 내왔다. 기도를 하고 밥을 먹으려는데 “아유, 너네 통일교회도 기도를 하니?” 하였다. 나는 너무 의외의 말씀에 깜짝 놀랐다. 통일교회가 기도를 안 한다고 잘못된 소문을 들었던 것 같았다. 그런 분이 나중에는 “너 같은 며느리 소개해 달라.”며 특별히 부탁하였다. 그런 작은어머니의 증언을 들으니 좋기도 했지만 감회가 새로웠고 기분도 묘했다.
두 번째로 당시 교회 사모께서 성화한 시어머니의 영인체를 보았다. 성화식장에서 식이 끝나고 나니 하얀 옷을 입은 어머니가 아주 기뻐하면서 제단 앞 천정에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내려와 원전지를 향해 출발하는 관행렬에 앞장 서 있었다고 한다. 세 번째는 둘째 시누이가 성화한 어머니를 보았다. 산에서 입전식을 거행하기 전에 산소자리를 파는데 어머니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곳을 내려다보고 있더라고 했다.
나는 기도했다 “어머님 감사합니다. 아들 며느리의 말을 듣고 순순히 따라와 주셔서…. 지독한 멀미를 하면서도 청평을 다니며 수련 받고 약혼교육도 받고 영육계 축복을 받더니 드디어 아버님을 만나 행복하시군요. 감사합니다.” 하고 다시 한 번 명복을 빌었다. “알고 받든 모르고 받든 이래서 축복이 중요하구나.” 하고 나는 축복의 귀함을 느꼈다. 참 착하고 선한 분이었다. 모시고 살면서 고부간의 갈등도 없었고 서로 위해 주려 애썼다.
학창 시절
우리 집의 집안분위기는 아주 따뜻했다. 나는 어렸을 때 동네 사람들로부터도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의 귀여움을 많이 받았다. 그 시골학교에 여선생이 한 분 계셨다. 그 당시에는 생화가 잘 없어서 외부 손님이 오면 조화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종이를 손수 오려 붙여서 꽃을 만들었는데 그 일을 여선생님과 나 둘이서 하였다. 나는 장학사나 다른 손님들의 가슴에 조화를 직접 달아드리기도 하고 차 심부름도 하였다. 또 선생님이 내게 도서관 관리를 맡기었다. 나는 도서관 키를 가지고 도서 관리를 했는데 그래서 책을 많이 읽었던 것도 기억에 새롭다. 어버이날 행사 때는 모든 학부모들을 학교 강당에 초대하여 재롱잔치(학예회)를 하였는데 나는 노래를 잘하여 독창을 도맡아 하였고 무용도 많이 하였다. 공부도 곧잘 하였기에 동네 아주머니들이 “나도 저런 딸 하나 있으면 좋겠다.”며 우리 어머니를 부러워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해 크리스마스 아침에는 눈이 많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마당에 노트와 크레파스가 놓여 있었다. ‘누가 이걸 두고 갔을까?’ 궁금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우리 동네 이웃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그 교회를 다니는 동네 아주머니에게 “마을에서 가장 모범적인 학생에게 주라.”고 해서 우리 집 마당에 두고 갔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받은 어떤 선물보다 기분이 좋았고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를 정겹게 느낄 수 있는 감성을 선물받았다.
초등학교 3~4학년 무렵이었다. 들에 나가 밤늦도록 일만하는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집 뒤에 앉아서 많이 울었던 적도 있었다. 그때 교회 다니는 동네 오빠(오빠친구)와 모르는 사람들이 하수구(시궁창)에 살충제를 뿌리러 왔다가 내가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왜 우느냐? 엄마 아빠가 교회를 못 가게 해서 우느냐?”며 놀렸다. 또 어느 해질 무렵 부모님을 기다리면서 또 울고 있는데 어머니가 오셨다. 울고 있는 나를 보고 “왜 우냐? 무슨 일 있느냐?”고 하였다. “밤늦도록 일하는 아버지, 어머니가 불쌍해서 운다.”고 하니 “울지 마라. 괜찮다. 시골에선 다 이렇게 산다.”라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때 나는 ‘사람은 누구라도 살다가 죽는데 평생을 고생하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일찍 죽을 것인가? 좀 일찍 죽는다는 것뿐이지 일찍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 당시 동네 사람들의 삶의 내용이 행복해 보이지가 않고 힘들게 농사일로 고생만하다 죽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어린 나이지만 힘들게 사는 부모님을 보면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을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힘든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재학생 대표로 5학년인 나는 송사를 하고 6학년 졸업생 대표가 답사를 하였는데 송사를 하고 나오는 나를 교감선생님께서 부르더니 “너 오늘 정말 잘 했다”며 칭찬해 주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더니, 칭찬을 들으니까 기분이 좋았다. 앞으로 칭찬받을 일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4km를 걸어서 다녔다. 그 당시 여학생들의 중학교 진학률은 극히 저조하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해 겨울에 동네 1년 선배가 “너 이 책 읽어 볼래?” 하고 책 두 권을 주었는데 그것이 구약이야기와 신약이야기라는 책이었다. 중학교 졸업하고 그해 겨울에 1주일 수련을 받으러 갔는데 내가 읽었던 성경이야기가 그대로 나와서 신기했고, 수련 받으면서 많은 의심을 했는데 동시성의 시대에 대한 강의를 듣고는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지나온 역사로서 사람이 자기 생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의심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6천년의 역사과정에서 2천년이라는 긴 세월을 사이에 두고 3부분으로 나누어 동시성으로 흘러온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어찌 역사가 저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되었고 그때부터 원리 말씀에 대한 의심의 먹구름이 완전히 사라졌다.
중·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해 보면 나는 아직 어린데, 친구들은 나에게 고민거리 상담을 해왔고, 선생님은 나에게 여러 가지 일을 시키었다. 아마도 상담 자질이 있었나보다. 중학교 시절 우리 동네에 나와 한 학년인데 학교 길을 외톨이처럼 혼자만 등하교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한센병에 걸려 아무도 같이 놀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너는 언제나 저 아이와 함께 등하교를 하거라.”고 하였다. 다른 친구들을 설득하여 함께 다니자고 하였지만 다들 싫어하여서 한 동안 그 친구와 둘이 다녔다. 사실은 나도 힘들었다. 언제나 웃고 떠들며 왁자지껄하게 다녔던 등하교 길이 재미가 하나도 없어서였다. 그래도 나는 그 친구를 돕는 마음으로 같이 동행했다. 아마도 선생님은 나를 다 큰 어른처럼 생각하였던 것 같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오빠들이 있는 마산으로 가서 마산여자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축복
마산여상을 졸업한 나는 그 당시 창원에 있는 ㈜통일산업에 취업을 하였다. 처음에는 자재과에 근무를 했지만 나중에는 상무와 공장장을 모시는 비서실에 근무하게 되었다. 정한채 상무는 후에 전무가 되었고, 36가정으로서 박봉애 여사님의 사위였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통일교회에 입교하여 고생을 많이 하셨다. 무뚝뚝하고 무심한듯하였으나 정이 참 많으셨다.
1981년 봄에 약혼식이 있다는 소문이 회사에 퍼졌다. 나는 나이가 어려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언니 오빠들이 들떠 다니면서 “너도 함께 가자”고 권유를 하였다. 그 통에 나도 그만 함께 마음이 들떴다. 그해 4월에 참부모님이 통일산업을 방문하셨고 나는 식사와 다과 등의 서빙을 담당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문을 나서며 “여기 이번에 축복받을 사람 없나?” 하며 좌중을 둘러보시는데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아버님의 눈이 불이었다. 인간으로서의 눈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로 보였다. 나는 깜짝 놀라며 “어머나!” 하고 소리를 지르며 눈을 아래로 깔았다. 그리고 5월에 약혼식에 참석하였다. 그때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의 마지막 인테리어 작업을 하려던 몰딩팀이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그분들을 먼저 축복해 주려고 “국제축복 받을 사람 앞으로 나와.” 하셨다. 나는 하고 싶기는 한데 용기가 나지 않아 잠시 망설였다. 몇 사람이 우르르 나갔다. 그러자 참아버님께서는 “이제 그만 나와.”라고 하셨다. 그때 나가지 못한 게 참 아쉬웠다.
오후 시간에는 맨 뒤에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나도 모르게 기도를 하고 있었다. “키가 작아도 좋고 절름발이라도 좋습니다. 아무라도 좋으니 축복해 주세요.” 하고 있는데 앞에 계셨던 아버님이 “너, 너.” 하셨다. 그래도 모르고 있으니 “곤색 입은 너 말이야.” 하면서 어느새 내 뒤쪽에 오셔서 나를 지목하셨다.
그런데 그 순간 일어나면서 나는 ‘이왕이면 학사출신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아버님과 종적으로 일치가 되지 않고 사적인 것을 앞세우는 생각을 했더니 나에게 약혼을 안 해주셨다. 철저히 마음을 비워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모습이 너무나 죄송스러웠다. 몇 사람의 여자후보자를 더 일으키더니 “너희들 앞으로 나와. 여기서 줄 맞춰 서.” 하고 통로에 세우셨다. 나도 나갔다. 10명 정도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3명 정도 매칭이 진행되고 있을 때, 나는 또 고개를 숙이고 ‘대학을 못 나왔으면 살면서 보내면 되지.’라고 생각하였다. 그 순간 아버님은 저 뒤에서 어떤 남자를 지목하고 나와 만나보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만난 우리 부부다. 내 생각을 순간적으로 파악하시는 참아버님의 초능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바보스러운 기도를 했다고 후회한다. 그때 ‘후손이 좋은 사람과 해주세요.’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그때는 어떤 작정을 하고 기도를 한 게 아니라 그냥 나도 모르는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렇게 아버님은 신기할 정도로 나의 생각을 알고 읽고 계셨다. 지금까지 애들과 남편이 무탈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까 된 것 아닌가? 남편은 정말로 나에게 없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시집을 와서 보니 남편은 장남이었고 아버님이 돌아가고 안 계셨다. 누나와 바로 밑의 여동생은 결혼을 하였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고등학생 여동생과 중학생인 남동생이 함께 살고 있었다. 임지기간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지나가는 어떤 분이 나를 보고 말했다. “아가씨에겐 훌륭한 아들이 있다. 그리고 당신은 부모를 모시고 사는 팔자다. 시부모를 모시지 않으면 친정부모라도 모시고 산다.” 그분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나는 그 말을 상기하며 당연하게 시댁식구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시어머님은 우리를 위해 많은 희생과 봉사를 하였다. 내가 바쁘게 활동을 하니까 나 대신에 우리 아이들을 많이 보살폈고 살림도 거의 도맡아 하였다. 그러면서도 “며느리가 어떠어떠하다.”는 말씀을 일체 하지 않았다. 참 순하고 마음씨가 고운 어머니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리 아프다, 허리 아프다 할 때 왜 좀 더 신경써드리지 못하고 공감해 주지 못했는지 내가 나이 들어 보니 많이 후회가 된다.
시어머님은 아들인 내 남편을 키우면서 매를 한 번도 들지 않았단다. 아버님이 아들을 너무 사랑하여서 만약 어머님이 매를 들면 아버님이 노발대발하여 야단도 못 치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머님은 약간 억울하였다는 식의 하소연을 하였다. 남편은 영동에서 출생했지만 부모님의 고향인 무주 무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흔 아홉 칸 저택 중에 제일 큰집에서 살았는데, 무풍시장을 마주하고 있는 집이었다. 시아버지는 거기서 약국을 하였고 외상으로 약을 줬어도 다들 잘 갚아서 떼인 돈이 없었다고 한다. 베풀면 감동이 되어서 은혜를 갚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것을 시아버지께서 증거를 한 셈이었다.
시어머니는 장날을 맞이하여 장사를 마치고 저녁에 돈을 세어야 하였다. 잠이 마구 쏟아졌으니 돈 세는 일이 귀찮았다고 한다. 그 정도로 돈을 잘 버셨다. 시댁에서는 아들에 대한 기대가 높아서 아들의 교육을 위해 전 재산을 정리하여 부천으로 이사하였다. 그 당시 남편은 인천기계공고에 합격을 하였다. 그런데 올라오는 길에 전 재산을 도둑에게 털리게 되었다. 요즘같이 은행이 없어서 현금을 들고 다녀야 하는데, 강도가 돈뭉치를 갖고 가버렸다. 큰 충격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바람에 상당히 어려운 시절을 보냈고 어머님이 많이 고생하였다. 그 후 남편에게는 부천이 제2의 고향이 되었다고 한다.
세계평화통일당 근무
세계평화여성연합에 근무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 사길자 회장은 내가 통일당에서 근무하기를 원하였다. 참아버님은 1992년 8월 24일, 3만쌍 축복 전야제에서 ‘세계평화통일당’을 창설하셨다. 어머니의 사랑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집’이라고 하며 여기서의 당은 ‘무리 당(黨)’이 아니라 ‘집 당(堂)’이라 하셨다. 나는 원리를 듣기만 했지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어려웠다.
내가 기독교인을 만나 논쟁을 한다면, 아직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원리공부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통일당에 나가 원리공부를 시작하였다. 참아버님은 사길자 회장에게 차트 강의안을 만들 것을 지시하셨다. 사 회장께서는 참아버님의 명을 받들어 차트 강의안을 정리하였다. 그런데 교회 내에서조차 많은 반대가 있었다. 판서강의가 설득력도 있고 이해가 쉽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로는 판서강의가 대세여서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지금은 어디에서도 판서로 강의하는 곳은 없다. 반대는 있었지만 ‘참아버님은 먼 미래를 보고 차트강의안을 만들라고 하셨다.’는 생각을 해본다.
참아버님이 원리차트 강의안을 만들라고 하신 목적은 세 가지였다. 첫째 분파를 막기 위해서, 둘째 자기 방식의 강의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셋째 전 식구 강사화를 위해서였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나 대학을 나온 사람이나, 어린이나 어른이나 똑같은 강의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취지를 교회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사길자 회장께서 개인적으로 만든 것으로 알고 있는 지도자가 많았다. 처음에는 《원리강론》에 적색, 청색, 황색의 3색으로 구별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는 참아버님께서 1994년 6월 20일에 한남동에서 지시한 것이었다.
세 가지 색깔이 갖는 의미가 있다. 적색은 정의, 공식, 기본적인 개념이다. 청색은 적색부분을 좀 더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황색은 예화나 성구 등으로 구별하는 의도였다. 1997년에 처음 5시간 강의안을 만들어 참아버님께 시범강의를 하러 가는 날이었다. 한국어 강사, 영어 강사, 일본어 강사가 강의안을 준비하여 한남동으로 향하였다. 나는 한국어 강사로서 참아버님께서 지시하신대로 삼색을 구분하여 만들었다는 보고와 함께 시범강의를 하였다. 참아버님께서는 “영어도 만들었느냐? 영어로 해보아라.” 하시었다. 영어강사가 영어시범강의를 마치고 나서는 아버님을 모시고 사진도 찍고 노래도 불렀다. “앞으로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말씀을 듣고 돌아왔다.
그 후 2002년 8월에 1시간 강의안이 나왔다. 지도자 교육을 할 때 1시간에 할 수 있는 차트가 있으면 좋겠다는 국제승공연합 여성회 문수자 회장의 요청에 의해 만들어졌다. 우리는 그것도 참아버님 앞에 시범강의를 하였다. 이번에도 강의는 내가 하게 되었다. 두렵고 떨린 마음을 안고 사길자 회장과 함께 한남동공관에 들어가서 참부모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니 참아버님이 나오셨는데 우리가 있는 것을 보고 식사를 거실로 가져오라 하셨다. 간단한 가락국수를 준비하여 작은 소반에 차려 왔다. 참 소박한 상이었다.
우리는 앞에 앉아 있었는데 참아버님께서 “아주머니들이 앞에서 보고 있으니 쑥스럽구만.” 하셨다. 늘 당당하신 지도자로만 생각했는데 꼭 아버지같이 정겹게 느껴졌다. 식사 후, 거실에서 강의를 하였다. 우리는 참부모님께서 늘 바쁘시고, 오후에는 참어머님 잠실대회가 있는 날이어서 전편 강의만 하면 될 것으로 생각하고 갔으나 참아버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으셨다. “한 시간이지만 핵심은 다 들어 있구나.” 하며 흡족해 하셨다. 이 자리에서 “3시간 강의안도 만들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렇게 두 번이나 참부모님을 모시고 강의를 하는 영광을 입었다. 그 이후 많은 교육들이 이루어졌다. 통신 원리교실을 통하여 전국을 누비며 여성강사 육성에 앞장섰고 학사장 교육과 목회자 총회에서도 시범강의를 하였다. 남편 8일 수련과 청평 부인 40일 수련과 21일 수련에서 늘 시범강의를 하였다. 그것에 내게 큰 기쁨이고 영광이었다.
그 후 참아버님께서는 “2세들도 원리교육을 시켜야 한다. 12살부터 원리강사로 길러라.” 하시는 것이었다. “해와가 12살 되던 때부터 천사장이 노렸다. 원리를 교육해야 영계가 동원되고 지상이 해방되는 거야. 선생님 말씀 외에는 말하지 말라. 그래야 영계 참소조건에 안 걸린다. 그래야 내가 안심해. 선생님 말씀 외에 자기가 들어가면 얼룩덜룩하기 때문에 사탄이 들락날락한다. 자기 색깔, 자기 개념은 자기 중심이며 그것은 타락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생명력이 없다.”(2000.2.9 한남동공관)고 하셨다.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생까지 매달 한 번씩 1박2일로 교육하였다. 교육장소는 수택리 수련소였다. 수련생이 매번 150명에서 200명 이상씩 모였다. 지금 그때를 생각해보면 참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통일당에서는 현재까지 2세 원리교육과 2세 원리강사 배출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다.
제2의 믿음의 부모
원리공부를 시작하여 매주 용산의 세계일보사 내에 있는 사무실을 다녔다. 대선배로 어렵기만 했던 사길자 회장을 뵙고 말씀을 듣기 시작하였다. 초창기에 있었던 아버님에 대한 생생한 말씀과 증언을 통해 신앙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길자 회장은 지금 생각해도 절대신앙의 표본과 같은 생활을 하였다. 아주 솔직하였으며 거짓이 없고 사심도 없으셨다. 지방순회를 다니다보면 초대한 교회에서 기름 값이라도 하라며 많지는 않지만 정성껏 준비하여 금일봉을 주셨다. 그러면 돌아오는 길에 봉투를 열어 액수가 얼마이던지 먼저 십일조를 떼셨다. 그리고 회장, 기사, 그날 동석한 강사 등에게 금액을 똑같이 나누어 주셨다. 회장이라고 더 갖지 않으셨다.
사 회장께서 그토록 십일조에 투철한 이유가 있었다. 이화여자대학시절, 집에서 생활비가 오면 우체국에 가서 새 돈으로 찾아 십일조를 봉투에 담아 학교 채플실 헌금함에 넣으셨다. 그때 “그래, 내가 너의 정성을 잘 받았다.”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단다. 그런 독특한 경험은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생활화하는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사 회장님은 3대가 기독교 집안이었고 아버지 때도 십일조를 철저히 하셨다. 법조인 집안으로 집안일을 돕는 집사를 두었다. 어느 날, “김 집사, 이번 달에 십일조를 했는가?” 물었다. “아직 정리를 못 해서 못 했습니다.”라고 하면 “빨리 하라구. 그러니까 내가 하는 일이 잘 안 풀리지.”라고 하며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남는 장사가 십일조이다.”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회장님을 모시고 일본의 여러 지역과 미국 워싱턴, 뉴욕 등을 다니며 강사교육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미국은 2001년에 갔었는데 뉴욕에서 배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을 구경하며 그곳에서 유독 눈에 띄는 쌍둥이 빌딩이 아름답게 보였다. 세계무역센터는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9월 10일에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왔는데 9월 11일 오전에 관공서에 근무하는 식구 한 분이 하얗게 질려서 뉴욕 세계무역센터에 테러가 발생했다고 했다. TV에서도 연일 떠들어댔다. ‘어머나, 이틀 전에 보았던 그 건물이 테러를 당하다니…. 최고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자랑하는 미국에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참 만감이 교차했다. 그리고 그렇게 테러를 가하는 자들의 가치관을 속히 바꾸어야 진정한 평화세계가 올 것을 확인하였다.
이렇게 사길자 회장을 모시고 많은 것들을 경험하였고 많은 일들을 하였다. 원리 공부를 하면서 마냥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서 참부모님의 심정을 느낄 수 있었으며 신앙의 뼈대를 갖추고 뿌리를 확고히 내릴 수 있었다. 회장님은 나에 대한 신임이 대단하였고, 부족한 나를 한없이 믿어 주었다. 나의 신앙을 돈독하게 해주었으며,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사길자 회장을 제2의 믿음의 부모라 생각하고 있다.
잊을 수 없는 나의 친구
나에게는 내가 사는 동안에 잊을 수 없는 친구가 있다. 중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인데 키가 나와 비슷하였다. 비교적 큰 편이어서 둘이 짝꿍으로 항상 뒷자리에 앉았고 선생님들은 우리가 쌍둥이라고 오해할 정도로 몸집도 비슷하였다. 학창시절 항상 붙어 다니는 단짝이었고, 낙엽만 굴러가도 웃음이 난다는 사춘기이기도 했지만, 우리는 뭐가 그리 좋은지 늘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깔깔대며 다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고등학교를 경상도로 갔기 때문에 그 친구와 헤어져야 했다.
결혼 후에 서울에서 친구를 다시 만났다. 그 친구는 사업을 하여 크게 성공한 편이었다. 나는 학업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1999년 3월에 방송통신대를 들어가서 2003년 2월에 졸업하였다. 졸업하고 바로 대학원을 들어가고 싶었으나 언제나 나를 지지해 주던 남편이 반대를 했다. 이유는 너무 공부만하여 집안일이나 아이들 돌보는 일에 너무 소홀하다는 것이다. 그 말도 맞았다. 아이들에게 한참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때였던 것이다.
꿈을 접고 몇 년이 지나 이 친구를 만나 얘기를 나누던 중 “나는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했더니 “그렇게 하고 싶니?” 하면서 “하고 싶으면 해.” 하는 것이었다. “야, 얘들 공부시키기도 힘든데 나까지 어떻게 공부할 수 있냐?”라고 했더니 “내가 학비 대줄게.” 하는 것이었다. “나 정말 등록 한다.” “그래, 열심히 해라.” 하면서 석사과정과 박사과정 5년 동한 매 학기마다 말도 없이 통장으로 학비를 보내주었다. 계산해보니 그 돈이 수천만 원이나 된다.
나는 형편이 넉넉하면 누구라도 이런 봉사를 하는 것은 해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금도 음으로 양으로 나를 도와주는 친구다. ‘친구’라는 노래 가사가 있다. “세상에 꺾일 때면 너와 마주 앉아서 두 손을 맞잡으면 두려운 세상도 내 발아래 있잖니. 눈빛만 보아도 널 알아. 늘 푸른 나무처럼 항상 변하지 않을 널 얻은 이 세상 그걸로 충분해. 내 삶이 하나듯 친구도 하나야.” 내가 갖는 이 친구에 대한 고마움은 글로 표현할 길이 없을 만큼 넓고 깊다. 지금까지 둘도 없는 막역한 사이로 지낸다. 우리는 서로를 믿고 지지해 준다. 늘 위로가 되어주는 내 귀한 친구, 그 친구가 있어 난 참 행복하다.
국회의원 출마
2008년 4월 9일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참부모님은 “이번 선거에 모든 여성이 출마하라.”고 지시하셨다. 나는 인천 서구 검단지역과 강화지역에 출마하게 되었다. 사무실을 두 군데에 두고 왕래하였다. 선거 며칠 전 동아일보의 여론조사에서 ‘떠오르는 다크호스’라고 신문에 났다. 그 이튿날부터 지지율이 추락했다. 기성교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유세 중에 순복음교회 목사가 와서 이단교회 운운하며 떠들어댔다. 우리 권사님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정혁순, 정혁순’을 외치고 있었다. 나는 빨리 선관위에 전화하라고 시켰다. 선관위원들은 사복을 입고 항상 우리의 주변에 있었던 듯하다. 금방 선관위 직원이 나타났다. 순복음교회 목사에게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니 그분이 분을 삭이지 못하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내가 출마한 강화지역은 외부인에 대한 터부가 대단히 심하여 힘든 곳이었으나 장현선 교역장 내외분의 헌신적인 활동과 협조로 무사히 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 검단지역은 인천 서구 석남교회 식구들이 많이 고생하였다. 어떤 장로님은 당선을 위해 만배 경배를 드렸다. 지금도 그 시절의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을 잊지 못하며 ‘식구님들께 많은 빚을 졌구나. 그 빚을 갚을 날이 올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우리가 이런 선거를 치를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많다.
선거의 참패가 참부모님의 가슴에 큰 못을 박는 일이 되어 날마다 회개하여도 참부모님에 대한 심정의 빚을 갚을 길이 없다. 모든 것이 참부모님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거가 끝난 후 어떤 지역의 지도자 한 분이 “내가 반드시 공천시켜 줄 테니 시의원에 다시 나오라.”고 권고하였다. 나는 정치에 뜻이 없었고 정치판이 어떤지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못 한다고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는데 ‘내가 세상을 너무 몰랐구나.’ 하고 후회가 된다. 왜냐하면 지역 공천 받기가 어렵지 공천만 받으면 충분히 당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후보는 잘 보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정당 정치이기 때문에 어느 당의 후보자냐가 중요한 것이다. 당의 바람은 여당바람과 야당바람이 번갈아가면서 분다. 물론 지역에 따라 반영이 안 되는 지역도 있긴 하지만. 어느 당의 바람이 부는지 그 당의 바람만 타면 충분히 당선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지금도 지역사회에서 2, 3세들을 정치에 참여시켜 봄도 좋을 듯하다. 요즘은 젊은 사람들도 얼마든지 정치참여가 가능한 때이기 때문이다. 선거에 참패하여 아쉬움이 많아 가슴 아파하고 있던 어느 날 참아버님께서 ‘천일국 국회의원 정혁순’이라는 친필 사인을 해주셨다. 마음의 상처가 많이 위로가 되었고 우리 가정의 제일 소중한 가보로 간직하고 있다.
목회자의 길로 입문
어느 날 한남동공관에 새벽 훈독회에 참석하러 갔다. 거실에 들어갈 때 항상 경배를 하며 다녔는데 그날은 나도 모르게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 “아버님, 참 많이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이 자리는 많이 갖추신 분들이 와야 하는데 저같이 부족한 사람이…. 아무것도 갖춘 바가 없는 모습으로 뵙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더욱이나 영적으로도 너무 무지하여 죄송합니다.” 하고 거실에 들어가 앉았다. 그날 여러 지도자 들에게 훈독과 보고를 시키셨다. 한참을 지난 시점에 아버님은 정원을 가만히 응시하면서 무심한 듯 “영통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잘못하다가는 미쳐, 미쳐.” 하시는 것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 생각하니 그 말씀은 내 기도에 대한 답이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어느 날 참아버님께서 분명히 나를 바라보며 “너 나와. 노래해.” 하셔서 “저요?” 하고 일어나려니까 “너 말고, 그 옆에 사람 나오라구. 남편과 함께 나와서 노래하라.”고 하시며 다시 나를 보고 “혼자 왔나? 남편과 함께 왔나?”라고 물으셨다. 혼자 왔다고 하니 아버님은 “훈독회는 혼자 오는 게 아니야. 부처가 함께 와야 하는 거야.” 하시는 것이었다. 공직자 아니고는 도저히 함께 올 수 없는데…. 브라질 수련도 함께 갈 수 없어서 못 갔는데, 훈독회도 함께 올 수 없는데 같이 오라시니 나는 걱정이 되었다.
21일 부인수련과 40일 입적 축복 부인수련이 청평수련원에서 있었다. 매일 120배 경배정성을 들이며 지내는데, 천심원에 가서 기도를 하면 목회를 해야 모든 일이 풀릴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밝았다. 이대로 산다면 희망이 없고 깜깜하였다.
그리고 통일당에 근무할 때, 원리 공부를 하면서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목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신앙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남편을 설득하는 일이 힘들었다. “한참 애들 대학 가고 돈이 많이 드는 때인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며 철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나는 “거기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겠다.”고 하였다. 무슨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알 수가 없다.
처음 발령받은 교회에 가서 생활해 보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마음이 편하고 안정이 되었다. 목회를 하고보니 오히려 남편이 하늘 대한 심정이 불변이었고 어떤 일이 생겨도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불만스럽게 얘기하면 그건 그렇지 않다고 정리를 해주며 하늘 대한 자세를 다시 잡게 만들어 주었다. 남편은 나의 신앙의 키맨과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렇게 시작한 지가 벌써 15년이 되어 감회가 새롭다.
목회를 하면서 느낀 것은 어느 교회나 하늘이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심정과 심성을 가진 식구들이 꼭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사이동이 되어 새로운 임지를 가면 전 교회 식구들이 그리워 몸살을 앓는다. 우울증이 올 정도로 많이 보고 싶고 그리웠지만, 새로 온 목회자를 생각하여 전화 한 통 하지 못하고 아픈 가슴을 안고 끙끙 앓는다. 그리고 기도한다. 저렇게 아름다운 심성과 심정을 지닌 그들의 앞길엔 꼭 축복이 있어야 된다고 하나님께 떼를 쓰기도 한다.
목회하면서 느끼는 덕목 한 가지는 “어떤 사람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말자.”라는 깨우침이다. 모든 사람은 아롱이다롱이다. 천주도 아롱이다롱이의 모습으로 조화를 이룬다. 완벽한 사람은 없으며 내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지만 남의 눈의 티는 쉽게 볼 수 있다. 지금까지 하늘은 수시로 나를 시험하셨다. 그로 인해 죽을만큼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되는데, 그 시험을 이기고 나면 하나님은 무엇으로든 보상을 해주셨다. 2022년 협회창립기념일에는 교회와 식구와 목회자 가정이 4가지 상을 수상하였다. 4월 10일에 있었던 여성연합 창립 30주년 기념행사에서는 지역봉사상을 수상하였다. 9월 1일에는 부천시장상을 수상하였다. 이렇게 내적·외적으로 수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수상을 많이 해서 좋은 게 아니라 하늘부모님께서 ‘내가 너희 가정이 수고한 것을 안다.’고 하시는 것 같아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너무 감사했던 것이다.
어찌하다보니 부족함 많은 나에게 6000가정 부인회장이라는 큰 임무가 주어졌다. 많이 부족하지만 맡겨진 책임을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해볼 생각이다. 한데 이 글을 쓰려니 많이 부끄럽다. 삶의 내용을 새롭게 느끼며 나는 오늘도 익어가고 있다. 돌아보면 참부모님을 만나서 모시고 함께한 인생길, 너무 귀하고 감사한 일이 많은 인생길이었다. 모든 것이 감사 또 감사하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첫댓글 정광해님 댓글
정혁순 부인회장님, 사길자회장님을 모시고 원리교육에 앞장서시고 천일국 국회의원후보로 인천 서구을에 출사표를 내셨었군요. 그후에 시의원을 하셨더라면 아마 지금쯤은 당당한 천일국 구회의원으로서 다선을 하고 계시지않으셨을까 아쉬움이 듭니다. 혹시 2008년 8-9월에 하와이에 오시지 않으셨나요? 잠깐 이야기를 나눴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만. 그때의 그 기백으로 승공연합, 국민연합, 여성연합의 동지들이 시의원, 군의원, 구의원부터 계속했더라면 지금쯤은 판도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말씀대로 뻐꾸기들보다 축복가정들과 2-3세들이 지역사회에서 정치에 참여시켜야 우리의 미래가 있다고 봅니다.
이길삼님 댓글
정혁순!!!
부인회장님
감동입니다.^^(굿)
역시 하나님을 느낌니다.(최고)(최고)(최고)
황경성님 댓글
°°조득제ㆍ정혁순가정°°
통일당 사길자회장님을 모시고 늘 원리강사로써
최선을 다하는 모습 ^^ 😀
사길자회장님의
절대적인
하늘대한 충성심 ^^ 😀
정혁순 부인회장님!
은혜롭고
감동적인 자서전
감사합니다.
이홍규님 댓글
저도 사길자 회장님의 절대적 신앙에
감동받고 살아 왔는데 옆에서 보좌
하며 절대 신앙으로 살아온 정혁순
가정은 영원히 빛나는 보석과도 같은
신앙에 감동받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