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 큰스님을 생각하며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일타 ∥ 해인총림율주
내가 성철스님을 처음 뵌 것은 지금으로부터 사십칠 년 전, 송광사에서 한철을 나며 여름을 지낼 때였다. 스님이 나타나자 뒤에서 수군수군했다. “만물박사여서 세상 천지 모르는 것이 없다지? 글이 우리나라 제일이래.” “철수좌, 철수좌”하며 스님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아마도 스님의 박학다식함은 물론 십 년 장좌불와의 수행을 부러움 반, 외경심 반으로 바라보았던 것같다. 그 때 스님의 나이 서른다섯으로 칼날 같은 정진으로 일관하던 시절이었다. 스님이 생식중이란 얘길 듣고 노장 영월스님이 단호히 말했다. “생식중인 사람은 대중과 조화를 이룰 수 없어 방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벌떡 일어나 절을 한번 하곤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스님의 모습은 당당했고 어느 것에도 걸림이 없어 보였다. 국사전 노전에서 며칠 머물던 스님께 상추를 씻어다 드렸던 기억이 엊그제처럼 새로운데, 이제 스님은 안 안계시고 그 당시 열여덟이었던 내가 스님의 살아오신 길을 더듬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초연히 내 홀로 걸어가노라 스님은 1912년 2월 19일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이상언, 모친은 강상봉이셨고, 스님의 속명은 영주英柱였다. 스님이 태어나신 임자년은 전세계적으로 큰 인물이 나는 해였고, 탄생지 또한 지리산과 덕유산의 정기를 받아 백의정승 셋이 나오리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던 곳이다. 그러고 보면 스님의 탄생은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생전에 스님의 머리를 여러 번 깎아드렸는데 스님은 예의 그 걸쭉한 음성으로 말씀하시곤 했다. “머리통이 이상하게 생겼제? 청담스님은 머리가 미끈하게 생겨 마음이 좋은데, 나는 머리가 이리 울툭불툭해 성질이 괴팍한가봐.” 선종의 제2조인 혜가스님이 달마스님을 찾아가기 전, 머리가 뻐개질 듯 아픈지 사흘만에 머리 가운데가 위로 솟고 사방이 다시 솟아나 도골을 이루었듯, 성철스님의 머리 모양 또한 그렇게 오봉이 수출했다. 안광은 또한 어떠했던가. 부리부리 큰 눈에 찌를 듯이 내 쏘는눈빛. 그 눈의 섬광이 남다른 만큼 기지 또한 뛰어났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플래시’였다. 세상에선 무슨 보통학교와 사범학교를 나왔느니 하지만 생전에 스님께 그런 얘기를 들을 적은 없고, 어린 시절에 대한 이런 말씀은 하셨다. 세 살 때, 어른들이 읽으려고 갖다 놓은 책을 넘겨보니 다 알겠더란다. 다섯 살 때에는 어른들을 따라 백일장에 갔다가 장원을 해 신동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언젠가는 보따리에 서유기, 삼국지연의 등 중국의 4대기서를 싸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산모퉁이 양지 바른 곳에 앉자 해지는 것도 모른 채 삼국지연의를 읽은 적도 있다. 물론 순 한문으로 된 원전이었다.
누구에게도 배운 바 없이 시와 문장을 지어냈고, 열 살이 되기 전 사서삼경 등 모든 경서를 독파해 더 가르칠 선생이 없을 정도였다. 청소년기에는 그간 읽은 책으론 갈증을 느껴 서울 총독부 도서관으로 갔다 읽을만 하니 보고 싶은 책이 떨어져 다시 일본으로 가 중앙도서관과 동경대학 도서관에서 몇 달씩 책에 파묻혀 있기도 했다. 스님만큼 널리 많은 책을 읽은 분은 드물 듯한데, 청담스님이 훗날 이를 알고 속가의 김병연 씨를 소개했다. 천석군으로 수백마지기 의 땅을 팔아 불교서적만을 사들였던 김병연 씨는 죽기 전 자신이 사 모은 책들을 읽고 이해할 만한 사람을 찾고 있다가 성철스님을 만나 보곤 아낌없이 책을 주었던 것이다. 평소 스님이 소장하고 있던 책이 그것이다. 그뒤 봉암사로 그 책들을 옮겨 모두 섭렵하셨는데, 그 책들을 보고 계신 것을 본 적이 있다. 책을 잡고 넘기는 것이 마치 그림을 보는 것과 같았는데 내용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으니, 그 분의 천재성을 알 수 있겠다. 스님의 공부는 누구에게 배운 것이 아닌 독학으로 이 루어졌는데 언젠가 스님 곁에 가니 상좌의 머리를 쥐어박고 있었다. “이게 그런 말 아니가? 공부 좀 한다고 하더니...” 타임지에 밑줄을 그어 놓고 해석을 해 보라고 했더니 상좌가 우물댔던 모양이다.
스스로 익혀 티벳어, 산스크리트어, 영어, 독일어, 일어 등을 마스터한 것을 보면 타고난 총명과 기억력은 물론 헤아리기 어려운 의지 력의 결과로 생각된다. 진리에 대한 구도심에서 모든 신학문을 섭렵하여 국내외의 도서관을 전전하였으나, 모두 진영의 문에 들어가는 길이 아님을 자각하고 일본에서 돌아와 ‘장자’의 소요유편을 읽으며 지내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노승이 지나가다 영가대사의 「증도가」 한 권을 주었다. 이것을 받아 읽은 스님은 심안이 밝아짐을 느꼈다. “시원한 것이 여기 있구나.” 읽기를 몇 차례, 금세 외워 버렸다. 바로 증득하고자 양식을 짊어지고 덕산 대원사로 갔다. 탑전에 머물며 사십여 일을 한자리에 붙박혀 있었다. 눈에 시퍼런 불을 켜고 사람이 가고 오는 것도 모른 채 밤낮으로 앉자 있자 대원사의 사판승들이 이를 보고 고개를 흔들었다. “사십이 일 만에 마음이 다른 데로 도망가지 않았제. 그래중 될 마음 가졌어.” 스물네 살에 입산 출가를 결심하고 해인사로 떠나면서 출가시를 읊었다.
彌天大業은 紅爐雪이요 跨海雄基도 赫日露다 誰人이 甘死片時夢가 超然獨步 萬古眞이로다 하늘에 넘치는 큰 일들은 붉은 화로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볕에 한방울 이슬이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통해 모든 것 다 버리고 초연히 내 홀로 걸어가노라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서니 1935년 3월, 최범술 스님을 따라 해인사로 갔는데, 최범술 스님은 스님을 자신의 은사 스님이 임환경 스님의 상좌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면서 책도 좀 더 보고 일본에 유학할 것을 권했다. 이에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집도 살만해 책은 사 볼 만하기도 하고, 그 동안 책은 볼 만큼 보았으니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출가한 것은 책의 내용을 바로 실현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리곤 백련암으로 올라가니 하동산 스님이 주석하고 계셨다. 귀인처럼 잘 생긴 풍모의 동산스님과 뜻이 통해 상좌가 되어 해인사에서 수계, 득도했다. 이로부터 십여 년 동안 동화사, 금상산 마하연사 등 제방 선원에 안거하면서 생식, 오후 불식, 그리고 저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장좌불와 를 감행했다. 더불어 지혜가 섬삭閃爍하고 선기禪機가 활발발活潑發하여 임제의 선풍을 잇는 걸출한 선승이기에 손색이 없었다. 스물아홉에 동화사 금당선원의 하안거중에는 바로 코 앞에 있는 대웅전엘 가보지 않을 만큼 고행 정진하던 중 확연히 칠통을 타파하시고 오도송을 읊었다.
黃河西流崑崙頂이여 日月이 無光大地沈이로다 遽然一笑回苜立하니 靑山은 依舊白雲中이라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 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져 내리도다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서니 청산은 예로되 흰구름 속에 섰네.
이때부터 제방 선원에서는 기봉이첨예, 다문박식으로 스님의 명성이 자자했다. 그 즈음 동산스님의 법문을 듣곤 잘못 된 곳을 지적하여 동산스님을 난처하게 하여 눈흘김을 받기도 했는데, 동산스님은 곁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했다는 것이다. “아, 그 놈이 글쎄 사사건건 나를 물로 늘어져.” “후회하고 있는 눈치던데요. 스님이 그만 이해하시지요.” 물론 곁에 있던 사람이 동산스님의 마음을 돌리려고 한 말이었다. “어른 말 끝에 물고 늘어져 그렇지. 그 놈이 나보다 나아. 버릇은 없지만 말은 옳거든.” 허허 웃으면서 동산스님은 마음을 풀곤 했는데, 늘 그만한 인물이 없다 하여 성철스님을 무척 아끼곤 했다는 것이다. 훗날 사변 중에 동산스님이 병원에 입원하고 계셔서 찾아뵈었더니,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며 스님의 손을 잡았다고 한다.
출가자는 누구에게도 절하지 말라 1947년 문경의 희양산 봉암사에서 가졌던 ‘봉암사결사’는 한국불교의 방향을 결정짓는 기초 작업이었다. ‘부처님 법답게 살자’라는 가치를 걸고 ‘공주규약共住規約’을 설정하여 소리없이 개혁 작업을 시작했다. 이에 동참한 청담, 우봉, 보문, 향곡, 일도, 자운, 월산, 혜암, 성수, 도우, 법전스님 등이 대덕들은 동량이 되었고, 스님은 그 견인차였다. 해방은 되었으나 조선조 오백 년 동안 탄압 받고 거기다가 일제강점 삼십육 년 동안 왜색불교로 왜곡되어 버려 불교의 제 모습을 찾는 일이 시급하던 시절이었다. 스님은 이 때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청규를 기본으로 삼고 자신은 물론 대중스님에게 하루에 나무 석 짐씩을 하게 하기도 했다.
이 시절의 일화가 많다. ‘범망계 보살계’가 있던 어느 날, 범사인 자운스님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설하고 있었다. “출가한 사람은 국왕, 부모에게 절하지 않는 법이며 귀신을 공경하지 않는 법이다. 출가한 사람은 일체 사람의 공경을 받아야 할 존재이 니라. 만일 이러한 법을 어기는 자는 경구죄를 범하는 것이다.” 이 때 문을 열어 젖히며 성철스님이 들어왔다. “법사 스님, 지금 읽으신 부분을 한번만 더 읽어 주시길 원합니다.” 대중들의 눈길이 성철스님에게 모아지는 가운데 영문을 모른 자운스님은 다시 한번 읽어 내려갔다. “대중들은 들으셨습니까? 출가자는 부모, 처자권속은 물론 재물을 다 버렸습니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도 버리고 외로운 그 맛으로 중노릇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가 무엇을 얻으려 속인에게 절을 해야 합니까? 불법을 읽고 배우기만 하면 무엇합니까? 오늘 당장 실천합시다. 이의있소?” 당장 스님들은 탁자 앞에 나란히 앉고 그 앞에 죽 늘어선 신도들은 절을 세 번했다. 한국불교에서 신도가 스님에게 절을 한 최초의 순간이었다. 신도가 절에 오면 좇아나가 누님, 어머님하며 지내던 시절, 교단정화의 기초가 다져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일제 때 입던 붉은 비단가사를 불태우고 광목가사를 입기 시작한 것도 성철스님이 벌인 개혁 가운데에 하나였다. ‘정화의 성공이 가사를 바꿔 입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는 말이 있을 만큼 가사의 개혁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스님의 봉암사 시절은 청담, 자운, 향곡스님 들과 깊은 교우관계가 맺어진 시기이기도 했다.
자운스님이 ‘법망경’법사가 되기 전이었다. “법망경 토 좀 달아줘.” 자운스님이 나이로도 한 살 아래요. 조카 상좌뻘 되는 성철스님에게 ‘법망경’을 툭 던지며 한 말이었다. “뭣이 어째. 토를 달아줘? 엎드려 삼배를 하고 부탁해도 달아 줄까 말까 한데. 이게 어디서 배워먹은 행동이야.” 스님이 고분고분했을 리 없다. 그 큰눈을 화등잔만하게 뜨고는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부아가 치밀어오른 자운스님은 말없이 책을 들고 나와 그야말로 공부를 ‘되게’했다. 스님의 뛰어난 기지가 자운스님을 법망경 법사로 만들었던 것이다. ‘사’에 밝았던 자운스님은 성철스님을 일러 ‘법을 알고 다문박식한 천재형인 이런 인물 죽고 나면 다시 없다’하시곤 늘 뒤에서 스님을 쓸어 덮기도 하고 밀어주기도 했다. 스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옮겨 실천했던 청담스님과 함께 스님을 진정으로 아끼고 도와 주었던 도반이 었던 것이다.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동정을 여덟 번이나 뜯어 고칠 만큼 깔끔하고 치밀한 향곡스님은 스님과 가장 각별한 도반이었다. 울산의 어느 부실한 선방에 있던 향곡스님을 스님이 찾아 나섰다. 선뜻 향곡스님이 따라 나서지 않자 멱살을 잡았다. “향곡이 니, 저 건너 보살절의 예쁜처자 때문에 여기 살라카나?” 오직 화두 한 생각을 몰라 애를 쓰고 있던 향곡스님과 한바탕 주먹다짐을 벌어진 뒤에야 함께 봉암사로 왔는데, 그뒤 향곡스님은 그 곳에서 견성했다고 한다. 그렇게 다져진 인연 때문이지, 뒷날 향곡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평소 스님들의 열반 소식에도 아무런 미동이 없었던 스님도 ‘네가 나보다 먼저 갔구나’하며 큰 한숨을 여러 번 쉬었다고 한다.
밥값 내라, 이 도둑놈들아 육이오 동란으로 봉암사결사를 마무리 하지 못하고 경남 안정 천제굴 등지에서 안거를 끝낸 스님은 19556년 교단정화 후 초대 해인사 주지로 임명되었으나 취임을 마다하고 팔공산 파계사에 은거했다.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위에 철책을 두르고 십 년 동안 독거하며 묵언정진했던 성전암 시절을 스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토굴에 들어앉자 책보고 참선하고 시도 짓고 그랬제.” 그 뒤 해인사로 돌아와 백련암에 주석하면서, 1967년 총림방장에 추대되었고 백일법문을 열어 인간천상의 무량중생을 화도하기 시작했다. 출가, 제방편력, 오도, 대중결사, 독거수행 등의 전형적인 수행납자의 길을 걸어오신 스님은 마침내 해인총림에 신통묘용한 교화의 방편을 펴게 된 것이다. 스님이 해인총림방장으로 계시면서 해인사의 수행가풍이 확립되었다. 해인사의 용맹정진중 스님의 몽둥이 세례를 기억하는 납자가 많으리라. 일 년에 두 번 하안거와 동안거중에 실시하는 용맹정진은 칠일 주야를 눕지 않고 자지 않는 목숨을 건 정진이다. 그런데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졸고 있거나, 다른 방에 잠깐 피해 드러누워 있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스님의 방망이가 날아왔던 것이다. “일라라, 이 돼지새끼들아” 혹은 “밥값 내놔라. 이 도적놈들아” 이런 육두문자와 섞여. ‘잠 많이 자지 말라. 말 많이 하지 말라. 간식하지 말라. 책 보지 말라.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 스님은 참선수행자가 지켜야 할 수칙으로 이 다섯가지를 강조하면서 후학들에게 죽비를 내리쳤던 것이다.
스님을 친견하려면 절을 삼천배씩 해야 한다는 저 유명한 일화도 해인총림에 주석하시면서 가풍으로 확립된 수행이다. 여름에는 소낙비에 맞은 것처럼 땀을 흘리고, 겨울철에는 온통 땀으로 젖는 삼천배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우는 겸손과 불법에 대한 외경심을 갖게 하기에 충 분했다. 날로 해이해져 가는 선원의 기풍을 바로잡기 위해 백장청규에 바탕을 둔 새로운 수행의 가풍으로 총림청규를 만들어 제방 납자를 제접했고, 또한 이 시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선문정로禪門正路를 저술하여 갖가지 이설이 난무하는 선종의 난맥상을 돈오돈수頓悟頓修라는 수행법 을 제시하여 최상승의 선법을 펴보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967년 하안거 기간 동안 날마다 두세시간을 하루도 빠짐없이 행한 법문인 백일법문은 너무도 유명하다. 백일법문은 불교의 핵심을 중도사상中道思想에 두고 원시불교에서 시작하여 중관, 유식사상, 중국의 제종파의 불교사상과 우리나라의 선종사상까지 관통하여 정리한 기념비적 법문이다. 이로써 1600년의 장구한 역사만 끌어안은 채 스러져 가는 한국불교를 새롭고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 놓은 계기가 된 것이다. 1976년에는 「한국불교의 법맥」을 출간해 법통을 바로 세웠고, 두 차례나 종정에 추대되는 등 종통宗通과 설통說通에 겸전했음에도 종단행정이나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평소‘만 가지를 도에 두고, 언제나 입가에 미소를 띄고 가슴에는 태양을 안고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전연前緣을 믿고 사는 것이 수도인의 자세’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스스로 실천한 것이다.
스님은 자신과 뜻이 통하는 이와는 몇 날 며칠을 밤을 샐 만큼 얘기를 잘했다. 언젠가는 아침 공양을 들고 양치질을 하러 나왔다가 청담스님을 만났다. 칫솔을 든 채로 서서 점심 마지종을 칠때까지 한국불교개혁에서부터 수행, 대장경 번역, 포교 등 불교의전반적인 얘길했다. 점심 공양을 하고 나와 저녁가지 얘기를 계속했다고 한다. 그렇듯 얘기하기를 즐겨했으나 칠십이 넘으면서부터 사람 만나기를 즐겨 하지 않았다. 건강 문제도 있었지만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만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어느 해, 대장경 목록을 영어로 작성한 버클리 대학의 랑카스터 박사가 백련암으로 올라왔다. 스님을 친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스님은 얼굴 을 내밀지 않으셨다. 그 뒤 이 석학은 두 번이나 백련암을 올라왔지만 끝내 스님을 뵙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고 돌아가 쓴 기행문에 이런 물음표 를 달아 놓았다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유명하다는 불교학자나 스님네들을 다 만나 보았지만 성철스님은 뵙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분일까?”
스님처럼 선사로 교법에 해박해 책을 많이 내놓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1981년 「선문정로」출간, 1982년 어록집 「본지풍광」출간, 1986년에는「돈오입도요문론 강설」과 「신심명 증도가 강설」등 어록 십여 권을 출간했다. 「선림고경총서」37권도 번역, 완간되었으니 스님의 대위 신력은 전대미문의 희유성사가 아닐 수 없다. 스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한달 전쯤, 선불교의 핵심 저술 가운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성철스님이 골라낸 것을 한글로 번역한 선림고경총서 37권과 스님의 법어집 11권 등 모두 48권으로된 불경집이 도서 출판 장경각에서 나왔으니 할 일을 다하고 가신 것 같다.
한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도다 지난 봄 어느 날로 기억된다. 스님이 부르신다는 전갈을 받고 백련암으로 올라갔다. 혜암스님, 법전스님 등 몇몇을 앞에 두고 스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오라고 부를 때까지 오지마. 그 소리하려고 불렀어. 이제 그만 가 봐.” 그 말씀뿐이었고 그것이 스님을 뵌 마지막이었다. 저 사십 년도 훨씬전, 한쪽으론 약탕관이 한쪽으론 바루가 울퉁불퉁 튀어나온 걸망을 걸머지고 오만하리만치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나 학문의 박학다식함과 십 년 장좌불와를 외경으로 바라보게 했던 스님을 뵌 마지막 순간이었다.
生平을 欺誑男女群하니 彌天罪業이 過須彌로다 活陷阿鼻恨萬端이여 一輪吐紅掛碧山이로다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갈래나 되는 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1993년 11월 4일 새벽, 거처하고 계셨던 퇴설당에서 상좌를 불러 ‘때가 되었다’고 이르시곤 열반에 드셨다. 위 의 임종게를 남기시고 육신의 옷을 벗으시니, 세수82세, 법랍59년이셨다.
육신의 극한점까지 몰고 가는 고행난행의 수행, 작은 알음알이에 빠져 흐려있는 안목을 바로 잡는 최상승의 법문. 세속에의 발길이 잦으면 산승의 빛이 바랜다 하여 동구불출하시던 모습 등은 향상일로의 보리행이며 동체대비의 자비행이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오고 가는 머뭄 없는 것이 본분납자의 행리처이겠지만 가야산 자락을 진중하게 받쳐 주던 스님의 덕화를 잃은 우리는 허전하기만 하다. 그러기에 이 산자락에 남은 이들의 몫은 더욱 크리라. 이제 스님은 가고 그 분의 체취를 느끼려는 발걸음들만 해인사 경내에 가득하다. 어디서, 무엇으로 스님은 그들을 지켜보고 계실까.
月刊 海印 1993년 12월호[통권142호] |
첫댓글 감사합니다. _()_ _()_ _()_
감사합니다 _()_ _()_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