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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12일 일요일에 자유인 산악회 금북정맥 제16회 차 백화산→퇴비산→매봉산 구간을 다녀왔다. 도상거리 24km다. 출발 전 서초구청 앞에서 정상교 회장을 만났다. 정 회장과는 산악회 버스가 올 때까지 구청 휴게실에서 서로 안부를 묻곤 한다. 평소와 달리 정 회장은 이런 말을 했다.
“이 동지가 히말라야에 다녀오더니 눈동자가 달라졌다. 자세도 달라지고. 전체에서 겸손함이 묻어난다.”
이런 투의 말은 정 회장 뿐이 아니었다. 산행 중 ‘불고 님’이나 ‘너와나 님’에게도 들었다. 거의 1년 만에 만난 ‘수색대 님’까지 그랬다. 뒤풀이자리에서 ‘함박웃음 님’도 그랬다. ‘이형도’ 팀장은 군살이 싹 빠졌다고 했다. 이러면 나에게 뭔가 변화는 분명이 왔다. 이것도 히말라야 신의 선물인가.
“산에서 머리에 침 꽂고 다니는 놈은 처음 봤다.”
백화산 쌍괴대 바위 위에서 태안반도를 바라보며 정상주를 나누던 자리에서다. 정상주 나눔은 백두대간 시작부터 시작된 정 회장의 배려다. 이번에도 21살짜리다. 머리 양쪽에 서너 시간 째 꽂혀있는 침을 본 모양이다. 산행 중 만난 사람들도 ‘뭘 꽂고 다니냐’는 말을 했었다.
이번 산행 내내 침을 꽂고 다녔다. 출발 전 어깨통증 얘기를 들은 함박웃음님이 버스 옆으로 오라더니 배낭에서 침을 꺼냈다. 그는 한의사다. 평소 웃음 진 얼굴이 아닌 근엄한 표정이다. 침만 보면 도망가던 내가 고양이 앞에 쥐 신세가 된다. 꼼짝없이 네 대를 맞았다.
“내가 개발한 이동 침이다. 아무나 놔주지 않는다. 오래 꽂고 있을수록 좋다. 자세 바로 잡고 걸어라.”
서울 도착 후 양재 생맥주 집에 몇이서 자연스레 모였다. 서너 달에 한번은 이런 기억이 있다. 엄처시하에 있는 ‘이백’ 님과 ‘이 팀장’은 집으로 향했다. 히말라야 여행담이 주를 이뤘으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분위기가 익었다. 한 번 더 갈 것 같다. 우리가 전철역으로 갈 땐 모두 걸음걸이가 휘청거렸다. 계산은 함박님이 했다. 집에는 밤 11시가 넘어 도착했다.
오는 26일 금북정맥 최종 구간을 걷는다. 태안면 안흥리가 최종 날머리다. 17번째다. 지난 8개월여 동안 금강 위 산줄기를 걸어왔다. 4월부터는 다시 안성 칠장산에서 김포 문수산까지 한남정맥으로 이어진다. 이를 마치면 남한 1대간 9정맥 완주라는 대단원의 막이 내린다. 5년이 넘는 시간동안 흘린 땀의 결실을 거두어들이기 직전이다.
백두대간, 한북, 한남금북, 낙동, 금남호남, 호남, 낙남, 금남, 금북, 한남정맥을 합쳐 남한지역 1대간大幹 9정맥正脈이라 한다. 도상거리로 3,000km가 넘고 실 거리는 약 1,000km 더한다. 이러고 나서 기맥岐脈을 이어가는 골수산악인들이 많다. 이들이 걷는 기맥은 166개 정도다. 그 중 한강기맥은 웬만한 정맥보다 더 길다. 그 다음 줄기가 우리 마을 뒷동산인 지맥枝脈이다.
나무로 말하면 대간은 기둥, 정맥은 큰 가지, 기맥은 큰 가지에서 갈리는 가지, 지맥은 가장 가느다란 가지고 열매가 열리는 부분이고 터로 말하면 도시가 형성되는 곳이다. 우리 조상들이 나눈 산줄기 분류개념이다. 산자분수령이 근간을 이룬다. 『산경표』란 족보 책으로 만들었다. 그걸 그려놓은 게 『대동여지도』다.
이번 구간에서는 기암괴석과 해송 그리고 서해안 낙조로 유명한 백화산에서 태안지방을 관망했고,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국보 307호 마애삼존불상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특히 신진도 포구에서 새조개와 도다리 새코시를 안주삼아 봄날 오후를 즐겼다. 백수가 된 후 싱싱한 횟감 앞에 앉아 보긴 처음이다.
이번에도 정 회장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와중에 정 회장이 세계 경제지수 199위 부탄국 행복지수가 아시아 1위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이번에 본 히말라야 고산족 속으로 들어가 직접 보니 아니었다. 통계가 매번 그래서 가기 전까지는 당연히 그런지 알고 있었다. 궁금했던 차에 잘 되었다.
“이번에 현지인들이 알던 것보다 훨씬 더 구차스럽게 살고 있었다. 뭘 기준으로 행복지수를 정하는지 모르겠다.”
“성취나 소유보다는 정신세계가 아닐까.”
“배가 고파도 그럴까. 아니면 일부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닐까”
“편견이다. 그들 전체에서 나온 것이다.”
“아예 없었기에 불편을 모르는 건 아닐까”
“글쎄. 자연 그대로 모두 소중할 수 있는 곳이라고 보자.”
“이해는 되는데 실체를 다시 보면 또 의심은 들 거 같다. 내가 아직 덜 익어서일까.”
“영국 심리학자가 ‘타인을 짓누르지 않고도 나를 나이게 하는 곳이다.’라고 했다.”
“그 말이 와 닿는다.”
# 마침내 5천m 고지 경계선을 넘는다. 아흐레 만의 일이다. 2월 7일 화요일이다. 이동 거리는 로부체(Lobuche, 4910) → 고락셉(Gorak Shep, 5140) → 에베레스트 B.C.(5364) → 고락셉(Gorak Shep, 5140)으로 약 7시간이 예상된다. 꿈에서까지 그리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품에 안겨본다는 기대 앞에서 고산증세는 날아갔다. 오늘의 기록도 잠에서 깨면서부터다.
벌써 날이 밝아 시간을 물어보니 6시 20분이다. 어제 밤 스태프들과 시간을 보내고 늦게 올라와서 바로 잠이 든 모양이다. 지난 밤 기억은 없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여기서 100여m 위만 오르면 5천m가 시작된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 정도로 몸이 잘 따라준다.
이 롯지에는 복도 중간에 공동 화장실이 있다. 2개소다. 하나는 양변기인데 앉는 곳이 본체와 분리되어 창틀에 있다. 볼일 볼 때 올려놓고 다시 제자리에 놓는 식이다. 오면서 여러 경우의 수를 본 덕분에 먼저 다녀온 사람이 “변기 뚜껑이 없다”고 하면여긴 그런가 보다하고 더 묻지도 않고 잘 적응한다.
대신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분리된 뚜껑이라도 일단 앉아서 일을 보니 쾌변이다. 배가 가벼워지면서 몸 상태가 좋아졌다. 약한 비위 탓에 망설여지던 밀크 티도 이제는 속에서 잘 받는다. 아직 이렇다 할 고소증세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도 내려갈 때까지 방심은 금물이다.
어제 밤에 스태프들에게 나눠준 물건 중에 오늘부터 칼라파타르 오를 때까지 입을 넉넉한 바지가 없다. 얼결에 그것까지 준 모양이다. 오래 입어 색이 바라고 낡은 바지다. 식전 보리차를 가지고 온 순돌이에게 새 바지를 주고 바꿔달라니 의아해 한다. 몸무게가 90kg에 육박하던 시절에 입던 바지다. 겨울철 장거리 산행 때 한 번씩 쓰려고 10년 이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요즘 옷은 등산복까지도 몸에 착 달라붙는다. 다른 옷들은 그렇다고 해도 등산하면서까지 몸매 자랑할 일은 없다고 본다. 오기 전 새로 산 바지가 다 그랬었다. 그래서 더 일찍 나눠준 지도 모른다. 4개 중 하나 남았다. 가방을 정리하다 보니 내려갈 때 신을 양말꾸러미가 없었다. 얼결에 다 준 모양이다.
이번에 옷을 필요이상 많이 가지고 왔다. 여행사 준비 목록보다 두 배는 더 가지고 온 덕에 가방만 뚱뚱해졌다. 계획대로 갈아입을 필요도 없었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다 퍼준 거 같아도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이게 경험이다. 처음이라 수업료를 많이 내고 있다.
이곳 롯지 방에도 거울이 있었다. 임 선생은 매번 핸드폰으로 얼굴을 보고 썬크림도 바르고 머리도 다듬는다. 나는 이럴 때나 거울을 한 번 본다. 먼저보다 얼굴이 더 벌겋게 익었고 수염이 많이 길었다. 머리가 가려워 가끔 모자 위로 긁고 나올 땐 푹 뒤집어쓴다. 임 선생이 그런 머릿속을 본 모양이다.
“머리에 피났다.”
딱히 할 말이 없어 머리 빠지는 사람의 특징이라고 얼버무렸다. 여기서 재미있는 생각이 났다. 그냥 버티고 있어 꾀죄죄한 얼굴의 나와 관리를 하는 임 선생 중 누가 얼굴을 닦을까.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에서 ‘뫼비우스의 띠’가 생각나 웃었다.
「두 아이가 굴뚝 청소를 했다. 한 아이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어 내려왔고, 또 한 아이는 그을음을 전혀 묻히지 않은 깨끗한 얼굴로 내려왔다. 어느 쪽의 아이가 얼굴을 씻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다이닝룸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홍일점 진 선생이 결국 고소증세로 하산을 결정한 모양이다. 홍 선생이 어제 눈물을 봤다는 말에 나도 슬쩍 보니 또 눈에 물기가 보였다. 가이드 역시 “하산은 자기 결정사항이 아니라며, 이미 속까지 메슥거리면 하산해야 한다.”고 하니 그 결정을 따랐다. 현명한 판단이었다.
본인에게 묻어나오는 아쉬움만큼 우리도 같은 마음이다. ‘다 온 거다. 승리했다. 울지 마라’ 이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빈말로라도 무어라 위로해 줄 상황은 아니었다. 다행히 메인가이드 ‘라나’가 동행하니 안심이 되었다. 홍 선생과 나는 서로 바라보면서도 할 말 없었다. 눈으로 배웅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즈음에 우리 일행의 상태를 보자.
“머리에 진통이 온다.” 홍 선생을 필두로 류 선생 역시 고소증세를 호소한다. 지호 군은 하루 지나고 회복 증세를 보이는 중이다. 김 선생도 두통약을 복용 중이고, 임 선생도 두통 증세가 온다며 행동에 조심하고 있었다. 일행 중 구토 증세 보이는 이가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면 고산 등반이나 고산 트레킹의 가장 큰 걸림돌인 ‘고소증세’는 무엇인가.
‘조석필’ 선생이 자세하게 알려준다. 조 선생은 히말라야 렌포강(7,083m) 원정대를 성공적으로 이끌기도 했지만, 『고산에 가면 보이는 고산병』 저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산줄기를 중심으로 풀어간 『태백산맥은 없다』는 한국학의 종합보고서며 백두대간의 복원을 말하기 위해 탄생한 엄청난 책이다.
이번 여행 전에 혜초여행사에서 제공한 「히말라야를 즐기는 일곱 가지 방법」 자료를 받았다. 그 자료를 정리한 사람이 바로 조석필 선생이었다. 그러면 이 자료는 고산여행의 바이블이다. 고산증에 관한 그의 자료다.
「고산증은 병이 아닙니다. “집 떠나니 고생이다”라는 개념입니다. 굳이 정의하자면 “우리 몸이 고소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발생하는 여러 가지 증상”이 고산병입니다. 고도계 바늘이 3,000을 넘으면서부터 슬슬 머리가 아파오고, 입맛이 떨어지며, 숨이 가빠지는 뭐 그런 것들입니다. 고도가 4,000~5,000을 넘어가면 열에 다섯은 그런 불편한 일들을 경험한답니다.
“고산병이 왜 생기는가?”하고 물으면 흔히 “산소부족”하고 대답합니다. 5,500미터에서는 공기 중의 산소가 절반으로 줄고, 에베레스트 꼭대기에서는 삼분의 일 수준으로 떨어진다니까 그럴 듯 합니다. 그렇지만 산소 결핍이 중요한 요인이기는 하지만 원인의 전부는 아닙니다. 고산병 환자에게 산소 치료는 효과가 없는 경우도 있으나, 하산은 언제나 효과적입니다. 고산병의 총체적 원인은 산소 결핍이 아니라, ‘고소 그 자체’입니다.
고산병에 잘 걸리는 사람이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8,000미터를 오르도록 ‘왠 고산?’하며 끄덕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사람이 ‘웬 고산?’인지 미리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산병에 민감한가 그렇지 아니한가 하는 것은 완전히 개인적이고 체질적인 것입니다. 감수성에 성별, 연령별 차이도 없습니다. “나는 체력이 강하므로 고소에서도 끄덕없을 것이다”라는 생각도 착각입니다. 고소에서 잘 견딜지 그렇지 못할지를 아는 딱 한 가지, 스스로 고소에 올라가 보는 것뿐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고산병이 체력이나 정신력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산병에 불편을 겪으면서도 “이것도 못 참으면 체면이 말이 아니네”라는 생각으로 입을 다무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자존심이야말로 고산병이 가장 좋아하는 함정입니다. 고산병은 한번 진행하기로 마음먹으면 무섭게 빠른 속도로 생명을 위협합니다. 체면 때문에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셔야 되겠습니까. 다행히 고산병에는 과로금지! 탈수금지!‘라는 예방책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산!‘이라는 놀라운 해결책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끙끙 참는 것이 미덕이 아닙니다. ’병은 자랑해야 낫는다,“는 옛말이 딱 맞는 경우가 바로 고산병이고, 충분히 주의만 한다면 별 것 아닌 것이 고산병입니다.」
고산병의 증상은 다양하며 그것들이 내포하는 의미도 제 각각이다. 그냥 견뎌도 되는 상태가 있는가 하면(고소증), 어디로 튀는지 감시해야 하는 단계가 있고(급성고산병), 즉각 조치를 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고소폐부종과 고소뇌부종). 그래서 증상들을 잘 읽어야 한다. 고산병인지 아닌지, 심각한지 사고한지 알아내야 한다.
「높은 산에 올라가면 무슨 일이 생기냐고요? “슬슬 머리가 아파 오고, 입맛이 떨어지며, 숨이 가빠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지럽거나 잠이 안 오기도 하지요. “고소를 느낀다.”고 표현되는 이런 것들은 일단 그냥 견뎌도 되는 가벼운 증세로 분류됩니다. 히말라야를 받아들이기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이지요.
그렇지만 머리가 욱신욱신 아프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병’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물론 단순히 과로에 의한 두통도 있을 수 있습니다만, 자고 일어난 아침까지 두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건 고산병입니다. 두통은 고소에서 가장 흔한 ‘친구’같은 증상이지요.
등반 중에는 누구나 숨이 가쁩니다(이건 병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휴식시간에도 ‘쌕쌕쌕쌕’하는 사람이 있답니다(이게 병입니다). 가슴이 답답하기까지 하면 거의 확실하지요. 기침은 대부분 차고 건조한 공기 자극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가끔 흉부감염이나 고소폐부종에 의한 기침이 있기도 합니다.
손, 발이 붓는 것은 대게 물리적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 시간 동안 팔을 흔드는, 즉 평소에 안하던 짓을 하면 그리 됩니다. 배낭끈이 조여서 그럴 수도 있지요. 그렇지만 눈 주위가 붓기 시작하면 고산병을 의심합니다. 온 얼굴이 퉁퉁 부었다면 폐부종이나 뇌부종을 감시할 필요도 있습니다.
소변량까지 줄었다면 특히 그렇습니다. 아무리 물을 마셔도 소변을 찔끔거리고 있다면 ‘충분히’ 걱정하세요. 그래야 합니다. 그나저나 그 많은 물들은 대체 다 어디로 갔을까요? 십중팔구, 얼굴이나 폐에 쌓이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고소 체질’인지 아닌지 알려주는 것은 밥맛과 오줌입니다. ‘잘 먹고 잘 싸면’ 쾌청이지요. 고산병의 ‘심각한 정도’를 알려주는 증상은 두통과 숨가쁨입니다. 특히 쉬는 시간에도 쌕쌕거리는 것이 좋지 않답니다. 마지막으로, 응급상황을 예고하는 신호가 2가지 있습니다.
사람이 믿을 수 없도록 게을러지고 무력해지는 쇠약권태(고소폐부종을 의미합니다)와 운동실조(고소뇌부종을 의심합니다)가 그것입니다.」
「중증고산병에는 세 가지 치료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하산, 둘째 하산, 셋째도 하산.”
하산만이 유일하고 확실한 치료입니다. 가능한 한 조기에, 가능한 한 많이 하산해야 합니다. 증상이 인지되자마자, 한밤중에라도, 업혀서라도 내려가야 합니다. 구조대나 의사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고소에서 하산보다 똑똑한 의사는 없습니다. 산소는 도움이 되겠지만 하산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산소를 주더라도 하산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결론은 둘 중 하나입니다. 전진이냐, 하산이냐. 그나저나 ‘머리 조금 아프다고 하산, 입맛 없다고 하산’해서야 언제 산을 오르고 언제 구경을 하겠습니까. ‘결정하는 일은 어렵고, 경험은 늘 부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미 있는 증상 몇 가지와 운동실조 검사법 등을 잘 알아 두면 크게 도움이 됩니다. 히말라야에서 고산병에 관한 지식은 등반기술의 하나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히말라야를 즐기는 일곱 가지 방법을 이렇게 말한다.
하나, 단계적으로 오르십시오.
둘, 과로하지 마십시오.
셋, 물을 많이 마셔야 합니다.
넷, 불편하면 약을 드실 수도 있습니다.
다섯, 자존심은 없습니다.
여섯, 마음을 편하게 합니다. 많이 드십시오. 날 것을 피하십시오. 담배는 집에 두고 오십시오. 술은 더 나쁩니다. 눈을 보호하십시오. 피부도 보호해야 합니다.
일곱, 하산을 망설이지 마십시오.
「아주 심각한 것처럼 보입니다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손이 붓는 듯하면 반지를 빼고, 더우면 옷을 벗는 것처럼 모두가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체질적으로 고소에 민감한 것을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만 인위적인 요소인 과로와 탈수만 잘 다스려도 “고산병은 없답니다!” 히말라야에서는 캔디를 자주 입에 머금으십시오. 기침을 막아주고, 입안이 축축하면 기분도 좋아집니다.」
길게 왔다. 나는 조석필 선생의 책을 통해 산에 대한 지식을 넓혀오고 있다. 수시로 꺼내보고 찾아보고 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는다. 그의 필력을 이미 수차례 경험한 터라 옮겨 적는 동안에 이미 고산증은 내 손안으로 들어왔다.
이제부터 여섯 명이다. 순돌이가 리더다. 아직은 라나 가이드에 비해 격이 떨어지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통해 성장해가는 것이다. 어찌 보면 순돌이에게는 좋은 기회다.
로부체에서 고랍셉까지 롯지를 기준으로는 230m를 오른다. 고락셉에서 EBC까지는 220m를 더 오르고 다시 그 높이를 내린다. 전체적으로는 어제에 비해 230m가 높아진다. 전반부는 고소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편한 길이다. 빙퇴석 사이로 길이 잘 나 있었다.
조금 가다 ‘8000m Inn’이라는 간판을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류 선생에게 사진 한 장을 부탁하고 아차 싶었다. 관악산에 온 게 아니었다. 아픈 머리를 참으며 오는 사람에게 아무 의미 없는 간판 앞에 서서 사진을 부탁한 게 너무 경솔했다. 그래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찍어준다.
길 오른쪽으로 눕체봉이다. 작은 언덕도 있다. 걷다말고 언덕을 후다닥 올랐다. 좋은 그림이 예상되는 구도라 걸어오는 자세를 일부러 연출하기 위해서다. 언덕은 끝없이 이어지고 배경은 눕체고 하늘은 맑았다. 그러고는 류 선생에게 의도적으로 한 번 더 부탁했다. 그 역시 프로다. 이번에는 의도적으로 앵글을 맞춘다.
“어떠냐.”
“아주 좋다.”
그 사진이 확대되어 왔다. 언젠가는 얻고 싶었던 장면이다. 지금 컴퓨터가 있는 책상 뒷면에 걸려있다. 그러면서 앨범도 다시 한 번 천천히 넘겨봤다. 볼 때마다 좋은 그림이 하나씩 늘어난다. 여유를 가지고 몇 장 더 액자에 담아볼 생각이다.
류 선생은 어제보다 더 힘들어하면서도 이런 부탁도 들어주고 가끔은 앞뒤로 오가면서 사진을 찍는다. 흔적은 그가 보내준 앨범에 다 들어있었다. 따로 보내준 USB 안에도 앨범에 넣지 못한 많은 그림이 있을 거다.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고 있다.
거기다 요즘 e-mail을 통해 그 사진을 마음껏 사용해도 좋다는 답도 받았다. 그는 실제로 6척이 넘는 후리후리한 키에 시원스런 외모를 가졌다. 그에 비례해 통도 큰 사람이었다. 사진 찍어주어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다. 보고 느낀 대로 그대로다. 아들 지호 군에게서 그의 청년 모습을 봤다. 붕어빵이다.
“머리도 아프고 배가 아프다.”
“속이 느글대나.”
“아니다. 똥이 마렵다.”
잘 따라오던 지호 군이 쉬고 싶다는 표현이다. 나이에 비해 참을성이 많다. 이 말에 홍 선생이 배낭을 내린다. “다음부터 가지고 오지 말아야지” 하면서 망고 절임을 꺼낸다. 그러면서 큰 소리로 “간식거리 있습니다. 배달은 못합니다.”라는 그만의 특유의 멘트로 일행들 기운을 돋아준다. 그는 어느 때부터 나를 단장이라 불렀다.
“단장님. 무게를 줄이려고.”
“이해한다.”
“저 고개 넘으면 롯지가 15분 남았다.”
후기를 정리하다 보니 그 언덕 너무 앞쪽이 두드코시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쿰부 빙하였었다. 이 빙하를 덮고 있는 게 자갈과 모래다. 이래서 마지막 마을 고랍셉까지 발바닥은 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래선지 아무리 등산화 밑창이 단단하다 해도 도착 무렵엔 발목이 저렸다.
어제 반나절 오늘 반나절 돌투성이 길을 걸었다. 너덜 끝이 작은 오르막이다. 홍 선생 말대로라면 롯지가 보여야 한다. 그러나 롯지는 한 시간 지나서 나왔다. 내려가는 미국 여자애가 포터 짐을 대신 받아준다. 이런 것도 구경거리가 될 정도로 쉼도 잦았고 걸음걸이도 느렸다. 와중에 의정부 팀도 만나고 수원에서 온 학생도 만나지만 이젠 그저 스치며 안부나 묻는다. 의정부 팀하고 같은 롯지에 든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게 묘하다.
들리는 건 거친 숨소리고 보이는 건 물 마시는 모습이다. 출발도 슬로우 모션이다. 스틱도 ‘드륵 특-특’ 찍는 게 아니고 끌고 오는 소리다. 이젠 5천m를 넘었는지 알려주는 사람도 없다. 돌탑이 나오고 다 낡은 만국기가 날리는 걸 보면 5천m 경계가 아닐까 한다.
하늘은 여전히 파랗다. 만년설을 인 봉우리에서 흰빛이 반짝인다. 그 아래는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한 잿빛이다. 신이 살고 있는 나라로 착각하기 딱 좋은 색깔의 조합이다. 신의 노여움인 지진과 산사태도 잦은 곳이다. 여기는 신의 땅이라는 가이드 말대로 정말로 신이 살고 있을까.
풀포기 하나 없는 오로지 돌밭을 세 시간 정도 걸어 마침내 고락셉 롯지에 짐을 내렸다. 태양열 에너지 기구가 다수 설치되어 있다. 이 높은 곳에서도 까마귀가 많이 날고 있었다. 롯지 앞산이 바로 그렇게 만나고 싶었던 ‘칼라파트라’란다. 결국엔 왔다. 그리고 보았다.
박범신 님은 남체부터 찾아온 고소증세와 처절하게 싸우며 결국 고락셉까지 오른다. 본인의 말로는 한국인의 의지 하나만 가지고 고락셉까지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쓰러졌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익숙한 자세로 오렌지주스를 마셨다. 그리고 식사 전까지 자유 시간을 가졌다. 그의 도착 소감이다.
「로부체에서 마지막 롯지가 있는 고락셉까지 두 시간 반 걸린다고 하나 나는 세 시간 반이 걸려서야 간신히 닿았다. 고락 셉 로지의 너른 홀엔 세계 각지에서 온 나그네들로 넘쳐난다. 이곳에선 누구나 체면을 차릴 겨를이 없다. 나는 바닥에 쓰러져 눕습니다. 어떤 부부도 내 곁의 맨바닥에 누워 있습니다.
고락 셉은 고원 분지다. 수천 미터 고봉들로 빙 둘러쳐진 고락 셉은 사막처럼 모래밭으로 된 넓은 분지로서 로지가 두 개 있다. 모래밭이 끝나면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곧장 가면 해발5264미터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가 나오고, 왼편으로 틀어 얼어붙은 작은 개울을 건너 곧장 올라가면 해발 5545미터의 검은 바위산 칼라파타르에 닿는다.」
5천m를 넘기고 처음 갖는 점심식사는 고락셉 롯지에서다. 카레가 두 번째로 나왔다. 반찬은 된장국, 소시지, 달걀말이, 김치, 깍두기다. 아직도 두 그릇씩 먹을 정도로 식욕이 좋았다. 식후 눌음밥도 이번에도 두 번을 먹었다.
내 입맛이 그렇다는 거고 일행 대부분이 고소증세에 고생하고 있다. 지호 군도 결국 고소증세가 왔는지 아픈 머리를 참으며 버티고 있다. 아직 약관에 이르지 못한 나이임에도 극한 상황을 대처하는 능력은 여간 대견스럽지가 않다. 와중에 나오는 그의 말 한마디는 물들지 않은 순수함 자체의 독백이다.
“아! 힘드네. 일주일 후면 서울 간다. 지금 남체까지 헬기 탔으면 좋겠다. 화이트데이는 남자가 선물하는 날인데...”
배정받은 3층 숙소에서 임 선생이 어지럼 증세를 보였다. 철인3종 우승자에게도 고소증세는 예외가 없었다. 나 역시 순간 머리가 멍했으나 다행히 바로 사라졌다. 어제 “건강한 몸을 주신 어머니께 감사하다”며 홍 선생 식으로 자연스럽게 나는 왜 표현을 못 할까. 자괴감이 들었다.
오후 1시 30분에 드디어 꿈에서나 그리던 EBC로 출발이다. 나는 배낭과 물은 두고 망고 절임 몇 조각과 생강 절임만 주머니에 넣었다. 맘에 들지 않았지만 사진기도 챙겼다. 전에 EBC를 다녀온 홍 선생은 롯지에 남았다. 일행 중 5명이 길을 나섰다. 주 안내자는 순돌이다. 보조는 쪼프쿄 사장이다.
롯지 앞은 모래밭이다. 이 높이에 끝 모를 평지가 있다는 것도 그렇고 그 바닥이 모래라는 것을 와보기 전에 누가 알겠는가. 바로 앞산이 칼라파타르다. 롯지보다 400여m 높다. 무등산 정상에서도 서석대 바로 앞 봉우리를 500m를 더 오르나 불과 30분 이내다. 둘은 별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칼라파타르는 3시간을 오른단다. 여기까지 오면서 많이 경험한 일이다. 끝까지 이런다. 아무리 내공이 쌓였다 해도 한계를 드러내기 딱 좋은 구조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를 악물고 라고 올라가긴 할 거다.
칼라파트라는 내일 새벽에 오른다. EBC는 모래밭 오른쪽 방향이다. 만년설봉인 눕체를 보면서 걷는다. 다녀와서 저녁식사를 한다. 그러면 길어야 왕복 3시간 정도라는 말이다. 그 정도면 거리도 4km 안팎이니 부담 없는 여정이다.
어찌되었든 이번 트레킹의 정점을 찍으러 가고 있다. 지루했던 모래밭이 끝나면서 돌밭 길로 들어선다. 호랑이 피하고 곰을 만났다. 오른쪽 계곡이 빙하란다. 전방은 확 트였다. 분지형 평지다. 어디가 EBC인지 묻지도 않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다. 그저 앞사람을 따라 다들 묵묵히 걸을 뿐이다. 돌 밟는 소리 외엔 들리는 게 없다.
작은 오르내림이 계속되면서도 고도는 200m 이상 올라간다. 황량한 돌밭 길이 계속되니 발목이 저리기 시작한다. 아직까지도 고소증세가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녹색이라곤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길이다. 와중에 어쩌다 마주치는 이름도 성도 모르는 트래커들과 ‘나마스테’하고 인사를 주고받는 게 작은 울림이다.
“눕체를 봐라”
바로 뒤에서 오던 쬬프교 사장의 높고 짧은 소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정상 왼쪽 봉우리 8부 능선에서 흰 바탕에 검은 점 하나가 움직였다. 정중동靜中動이란 단어를 눈으로 봤다. 뒤이어 쿠궁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그 근방의 중심이 깨졌다. 산을 덮고 있던 눈들이 아래로 쏟아진다. 옆 봉우리까지 합세한다. 높이를 감안하면 2km 정도 눈이 순식간에 쏟아져 내렸다.
잠깐 동안에 흰 벽이 검은 벽으로 바뀌었다. 눈이 개스가 되어 계곡을 넘어 우리를 덮친다. 얼굴에 닿는 순간 무척 차가웠다. ‘아아’ 소리 몇 번 하는 동안 끝이 났다. 와중에 몸은 굳어 움직이질 않았다. 주변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온해졌다. 이런 사태를 불시에 만날 수 있는 곳이 히말라야다. 원정대가 베에스캠프에서 라마제를 지내는 이유다.
평생 한 번도 서보기 힘든 눕채 봉우리 바로 앞에서 눈사태 장면을 생으로 봤다. 이래면서 자연의 기운을 보충 받았다. 각자 좋은 그림도 선물 받았다. 류 선생 부자는 콤비가 되어 사진기에 담고 비디오를 찍는다. 이런 상황이 자연이다. 스스로 그렇게 흐른다. 그 속에서 인간의 희비와 생사 역시 스스로 그러한 거다.
대자연의 퍼포먼스가 막을 내렸다. 관중석의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난다. 가도 가도 길이 줄어들지 않는다. 공중에서 보면 점 몇 개가 움직이는 정도다. 어디선지, 얼마를 더 가선지 돌아가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곳쯤이 베이스캠프라는 짐작뿐이다. 그래도 반대의사는 없었다.
생각해보니 “여건에 따라 오후 EBC 일정을 생략할 수 있다. 가봐야 아무 것도 없다”던 말을 가이드가 몇 번했었다. 원정 철이 아니니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그곳을 다녀올 필요가 없다는 말이 현장을 보니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내 입장은 아니었다. 당시 혼자라도 다녀오겠다고 했었다. U턴이 너무 아쉬웠다. 나는 ‘조지 말로리’ ‘힐러리와 텐징’ ‘매스너’ ‘박영석’ 등 위대한 산악인들이 지나간 자리를 걷고 싶었고, 그들이 발자취를 남긴 현장에 서보고 싶었다. 내가 이 트레킹에 선뜻 나선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나에게 칼라파트라는 그저 조연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급조된 모임이라도 지킬게 있다. 거기다 웃자는 얘기로 일회용 단장 역할도 하는 내가 모아진 의견을 깰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럴 때 누구라도 베이스캠프를 중심으로 설명이라도 해줬으면 아쉬움은 반감될 것이나 그건 언어도단이었다. 오히려 돌아간다는 말에 이미 안도하고 있는 분위기였다.
몇 발 가기 전에 맥없이 걷는 나를 순돌이가 돌려세우더니 쬬프쿄 사장과 둘이 베이스캠프를 다녀오란다. 내 간절한 마음이 읽힌 것인지, 히말라야 신이 순돌이를 움직인 건지 반전이 된 것이다. 한 시간 정도 더 가면 목적지란다. 쬬프쿄 사장과 둘이 걷긴 처음이다.
“길을 잘 아나.”
“원정대 짐을 싣고 여러 차례 다녔다.”
가도 가도 변함없는 빙퇴석 길이다. 원하던 길이라 불편함도 지루함도 없었다. 얼마나 더 걸었을 까 쬬프쿄 사장이 팔을 들어 두 시 방향 쪽을 가리킨다. 눈으로 짐작키 어려운 넓은 땅이다. 유독 그 자리만 직사각형이고 검게 보인다. 흰색과 경계가 뚜렷하다. 흰색은 거대한 빙하다.
맨 위쪽을 보면서 엘로우 텐트라는 말을 한다. 자세히 보니 노란색 텐트 다섯 동이 나란히 있다. 성수기에는 각국에서 모여든 원정대 텐트가 꽉 들어찬단다. 입추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지금 텐트는 어느 나라인지는 모르나 선발대는 분명하다.
홍 선생이 왔을 땐 태국원정대에서 장비도 구경하고 차도 얻어 마셨다는 데 나는 원정대 텐트를 본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다. 풀 한포기 없는 불모의 땅에서 세계 정상급 산악인들의 자취를 봤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마침내 오른쪽을 타고 내린다. 경사진 돌길이다. 얼마나 다녔으면 돌 반 흙 반 길을 잘도 찾아내려간다. 이런 길을 쬬프쿄나 야크가 걷는 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난생처음 아이스폴도 건넜다. 다니기 좋을 만큼만 돌로 메꿔놓았다. 그러면 나는 지금 빙하지대를 걷고 있는 것이다. 드디어 갈망하던 베이스캠프로 들어섰다.
막상 들어와 보니 황량하고 적막했다. 쌓인 빙설의 규모는 눈으론 가늠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물 안 개구리가 하늘을 보는 격이다. 베이스캠프가 두드코시나 임자콜라 강의 발원지였다. 이 빙하에서 생명체 하나 살지 못하는 차디 찬 물을 흘려보내고 있다. 에베레스트와 눕체 봉우리 사이 흰 봉우리가 빙하지대였다.
빙하에 대해서는 김영도 선생님의 『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고산군의 특징은 그 주변의 빙하에 있다. 빙하는 고산에서 비로소 발달하는데, 그 양상은 지구상 고산군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몽블랑, 마터호른 주변의 빙하를 비롯해서 유럽에서 가장 길다는 알렛치 빙하가 있지만, 세계적으로 이름난 곳이라면 뭐니뭐니 해도 에베레스트 산록의 쿰부 빙하일 것이다. 거기를 지나지 않으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오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에베레스트에 간 지 이제 30년이 되었는데(이 책은 2009년 초판 발행), 그 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 수도 없이 쿰부 빙하지대를 지나갔다. 그런데 쿰부 빙하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듣지 못했으며 글로 남은 것도 없다.
‘쿰부’라는 이름은 어떻게 해서 붙었고 그 뜻은 무엇인지, 그리고 빙하의 길이는 얼마나 되며 쿰부 빙하의 특색은 무엇인가 등등은 이른바 ‘에베레스터’로서 마땅히 알아야 할 일이다.
발토로 빙하는 길이가 58km로 세계에서 가장 긴 빙하다. 그 유명한 에베레스트 산록 쿰부 빙하가 18km인 것을 보면 그 규모가 짐작이 간다. 쿰부의 경우는 초입에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 가기 위해 여기를 반나절 통과하는데, 발토르는 K2까지 10일 안팎이다.
그런데 빙하와 고산은 어떻게 다를까. 자연이라면 보통 산·천·초·목을 말하는데 그중에서도 산이 중심인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자연관에서 볼 때 빙하는 고산의 예속물이나 다름없다. 사실 빙하는 고산에서 발달하다 보니 고산의 산물인 셈이다.
그러나 빙하라는 존재는 독립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고산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한 속성이 빙하에게 있다. 태곳적 정적과 영원이 그것이며 이러한 속성은 특히 알펜글로우(산노을)가 지배하는 아침 여명과 저녁 박모때 그 세계가 열린다.
에베레스트 산록의 쿰부 빙하는 그 규모가 발토로에 비할 것이 못 돼도 발토로에게 없는 것이 여기에 있다. 즉 거대한 아이스 폴(氷瀑)이다. 1921년 조지 말로리가 북쪽에서 로라 능선에 올라가 비로소 내려다보고 그 존재가 알려졌는데, 그때 말로리는 복잡하게 엉킨 아이스 폴 지대는 절대로 통과 불가능하다고 했는가 하면, 1978년 매스너가 에베레스트에 처음 도전하며 여기가 제일 무서웠다고 했다.
30년 전 우리는 이 빙폭지대에 길을 내려고 길이 3m 되는 사다리 100개를 가지고 갔다. 그러던 곳이 지금은 어떤가. 여기를 통과하려고 이른바 루트 공작을 하는 등반대는 하나도 없다. 셰르파들이 길을 만들어 놓고 통과료(약2000달러)를 받기 때문이다. 톨 로드Toll road라는 말이 생긴 까닭이다.」
텐트가 있는 곳까지 가기는 시간적으로나 거리상 쉽지는 않았고 큰 의미도 없었다. 라마제단까지만 가기로 했다. 라마제는 등반 전에 성공과 무사귀환을 위한 셰르파 족의 입산신고 의식이다. 라마제를 지낼 땐 예수님 믿건 석가모니를 믿건 공자님을 믿건 모두 경건하고 엄숙해 진단다. 맞는 말이다. 이 땅의 주인은 히말라야 신이다.
진짜 사나이 고 ‘박영석’ 대장은 라마제를 ‘희망을 위한 기원’이라고 했다. 그가 남긴 유일한 저서 『끝없는 도전』에서 그는 라마 제단 앞에서 기원하는 것은 언제나 두 가지라고 했다.
「첫 번째는 대원들의 건강과 안전이고, 신께 두 번째로 갈구하는 것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지혜다.」
돌로 쌓아 놓은 제단에 오색 타르초가 날리고 있었다. 마침 먼저 도착한 외국인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그들도 뭔가를 이뤄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쬬프쿄 사장이 사진도 많이 찍어주고 이곳저곳 안내를 하면서 설명도 곁들인다. 비록 단어 몇 개 연결한 영어와 보디랭귀지지만 서로 잘 통했다.
“크기엔 상관없으니 베이스캠프 돌 하나만 가지고 오라”는 정상교 회장의 돌도 그 친구가 찾았다. 영락없이 베이스캠프에서 보는 에베레스트 산이다. 검은 돌에 박힌 흰 줄 무늬는 구름 띠다. 나도 내친김에 바닥을 뒤진 끝에 에베레스트 정상 축소판을 찾아냈다. 그 돌도 검은 색에 흰 띠가 선명하다. 쬬프쿄 사장도 ‘사가르카타’라며 좋아한다. 왕년에 수석에 미쳐 강가를 누빌 때 실력이 나왔다.
“짐 검사 때 걸리지 않나.”
“그 정도면 문제없을 거다.”
그의 이름은 ‘TIRAK SHAESTHA MAGER’다. 쿠르드 병사 같은 강인한 외모에 비해 정도 많고 수줍음도 많았다. 오면서 그가 롯지에서 야크 똥을 능숙하게 다루는 솜씨를 본 적이 있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그 역시 자기 삶에 충실한 순수한 네팔인이었다.
이러면서 많이 가까워졌다.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사람은 이럴 때 감동한다. 보답하는 방법이 금전밖에 없다는 게 아쉬웠다. 20불을 주니 고맙게 받는다. 주는 내가 오히려 미안했다.
롯지로 돌아올 땐 내가 앞에서 청계산을 걷는 정도로 속도를 냈다. 약간의 오르막을 만나면 호흡이 가빠지긴 했어도 부담은 크지 않았다. 다시 만난 모래밭을 꽤 오래 걸은 끝에 롯지에 도착했다. 이러면서 고소 공포는 사라졌다. 가지고 온 돌을 순돌이에게 보여줬다.
“걸리면 붙잡힌다.”
“그 정도냐.”
“절대 안 된다(수갑 차는 행동)”
“그래도 선물로 하나만 부탁한다.”
“알았다. 루쿨라 공항은 통과시켜 보겠다.”
“하나 더 있다.”
“한국에 갈 때까지 RANA에게 절대 얘기하지 마라.”
저녁식사는 야채를 넣은 된장국에 꽁치를 넣은 김치찌개가 나왔다. 이젠 익숙해진 질어터진 밥을 말았다. 속이 풀렸다. 여기가 5천 고지를 감안한 식단이라면 이건 분명 한국 사람이 머리에서 나왔다. 거기다 네팔인이 솜씨를 더하고 있으니 나무랄 데가 없다. 감자튀김 몇 개를 집어먹으니 속도 든든했다.
내일은 새벽 3시에 출발한다. 이번 여행의 최고 높은 곳 칼라파트라다. 숫자는 잊어버릴 수 없는 5,550m다. 이번 트레킹에서 우려했던 출렁다리도 건넜고 가장 강적인 고소증은 피해가고 있다. 새벽 산행은 십여 년을 매달 두 번씩 다니고 있으니 이번 트레킹은 내가 주인공이 된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 베이스캠프 후기가 5일을 넘기고 있다. 산에도 다녀오고 지인들과 잔도 나누다 보니 반쯤 써놓은 게 마무리가 되지 않는다. 어제 3월 15일에 김진원과 수차례 통화를 했다. 그 친구와 자전거 국토 종주 중이다. 작년 말에 남한강 북한강을 마치고 낙동강 안동댐 구간까지 마친 상태다. 통화는 제주도 종주 건이었다. 5월 1일 출발해 4일 까지 마치고 돌아오기로 했다. 비행기와 자전거 예약을 끝냈다.
와중에 스쳐가는 게 있었다. 진원의 이모부가 한때 세계 7대륙 최고봉 완등 최고령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김명준’ 선생이다. 그 분이 마지막으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 등극에 성공하면서 『A LIFE NO LIMITS』란 책을 냈다. 2104년 발표회에 다녀온 친구가 준 책을 이번에 다시 읽었다. 내가 히말라야를 다녀온 뒤라 느낌이 확실히 달랐다.
가이드가 어느 롯지에선가 셰르파 중 에베레스트를 가장 많이 오른 이가 24번이고, 그 기록을 경신하려던 셰르파는 17번에 그쳤다고 했었다. 한두 번만 올라도 소위 팔자가 풀린다는데 20번을 넘겼으니 그 삶이 궁금했다. 당연히 네팔에서 명사로 살고 있다는 답을 예상했으나 “미국으로 이민 갔다”는 이외의 답이 돌아왔다.
책을 보니 바로 그 셰르파가 유타 주 솔트레이크에 정착해 살면서 김 선생과는 가족 간에 왕래도 하고 있었다. 김 선생은 재미교포다. 셰르파 이름은 ‘아파’다. 두 분이 정상을 같이 올랐고 지금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미국 땅에서. 이 기막힌 사연을 지금 내가 읽고 있다. 이렇다면 이건 인연을 넘어 숙명이다.
아파 셰프파는 쿰부 히말 기슭에서 나고 자라 힐러리 경이 세운 쿰부 마을의 초등학교를 4년밖에 다니지 못했다. 그런 그가 미국 유타대학에서 인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자리에 초대된 김명준 선생과 아파 셰르파는 어떤 눈으로 서로를 봤을까. 그 두 분이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나눴던 눈빛과 같았을까.
선생은 베이스캠프 입성과 ‘아파 셰르파’를 첫 만난 소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베이스캠프 앞쪽으로는 얼음폭포인 아이스폴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쿰부빙하를 출발시키고 있었다. 8,516m의 로체도 보이고, 바로 건너편에는 7,861m의 눕체가 칼날 능선 끝에 서 있었다.
베이스캠프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원정대들이 형형색색의 거대한 텐트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번 시즌에는 모두 25개 팀이 왔다는데 대원과 셰르파, 네팔인 스태프들로 베이스캠프는 몹시 북적였다.
베이스캠프로 입성하는 우리를 한 사내가 막아섰다. 바로 ‘아파 셰르파’였다. 몇 번 통화한 적은 있으나 얼굴을 대하기는 처음이었다. 아파 셰르파는 생각보다 체격이 작고 호리호리한 몸집이었다.
“M.J.Kim, 베이스캠프에 도착한 것을 환영한다.”
아파 셰르파는 독실한 티베트 불교도답게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나를 반겨 주었다. 에베레스트는 잘 훈련된 등반가라도 오르지 못하고 사고를 당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그는 에베레스트를 무려 15번이나 오른 베테랑이었다.」
무사히 등정을 마치고 본 느낌은 달랐다. 뭇 고수들에게는 이런 체취가 있다.
「165cm의 키에 55kg의 몸무게에 불과한 작은 체구지만 나는 한 번도 그를 왜소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에베레스트에서는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가장 든든한 거인이었고, 지금은 숭고한 꿈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존경할 만한 거인이다. 나의 에베레스트 도전은 그가 지지하고 이끌어 주었듯, 나 역시 그의 도전에 가장 든든한 조력자로 남을 생각이다.」
아파 셰르파도 김 선생의 출판을 기념해 ‘에베레스트가 맺어 준 고마운 인연’이란 글을 남겼다. 이런 글을 읽으면 감동이 인다.
「원정대는 어떤 셰르파를 만나느냐에 등정의 성패가 갈릴 수 있지만, 셰르파 역시 어떤 원정대를 만나느냐에 따라 등정의 보람이 달라진다. 셰르파를 그저 짐꾼 정도로 취급하는 산악인과 함께하면 정상에 서도 큰 감격이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한 등반이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한다.
하지만 나보다 산을 잘 아는 사람, 나와 함께 저 험한 곳을 오를 든든한 동행인으로 셰르파를 대하는 산악인과는 아무리 힘겨워도 함께 정상에 서고 싶은 마음이 생겨난다. MJ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다. 사람에 대해서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에베레스트가 그를 기꺼이 받아 주리라고 확신했다. 드디어 정상에 선 순간 우리는 서로를 힘껏 껴안고 벅찬 감격을 나눴다. 15번이나 오른 정상이었으나 MJ와 함께 오른 정상은 내게도 각별한 경험이었다.」
EBC에는 이런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과 종주, 북극점에서 다시 남극으로 수직과 수평을 넘나든 ‘허영호’ 대장의 EBC 추억은 좀 특이하다. 허 대장의 책 『걸어서 땅 끝까지』에서 발췌해 옮겨본다. 그는 로체 원정 때 베이스캠프에 부인과 아들을 동반했다.
본인이 “아무런 트레이닝도 하지 않은 부인과 아들을 히말라야로 데리고 간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고 우려한 대로 로브체 롯지에 도착하면서 그 둘은 고소증을 앓기 시작했다.
그러나 허 대장은 베이스캠프를 쳐야하는 일로 그들을 롯지에 두고 떠나야만 했다. 그가 BC에 도착해 짐 정리 후 저녁을 먹기 전 로브제로 무전을 친다. 정부 연락관에게 “애가 많이 아프고 열이 대단하고 먹은 것을 토하고 난리다”는 답을 받고는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쉬지 않고 뛰는데도 길은 참으로 멀었다. 로브제 롯지와의 사이에 있는 고랍셉 롯지를 지나, 보통 같으면 한나절 넘게 걸리는 거리를 나는 세 시간 만에 달려갔다. 달려가면서 나는 심한 자책감으로 내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쩌자고 가족들을 이런 고생 구덩이로 끌어들였던가. 내 이기심을 용서할 수 없었다.」
허 대장이 고산 마라톤 대회에 참석했으면 상상 못할 기록을 가지고 있을 거다. 이런 정성 때문인 지 가족은 회복이 된다. 그후 BC의 마스코트가 된 아들과 부인은 거친 산사나이들의 깍듯한 대우를 받으며 허 대장의 정상 등정 과정을 보게 된다. 이 원정에서 허 대장은 한 차례 공격에 실패하고 두 번 째 공격에서 로체 정상에 선다. 그 부인의 말이다.
“다신 따라오나 봐요. 다신 안 와요, 다시는!”
베이스캠프의 긴박한 상황은 박영석 대장을 통해 들어본다.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캠프 설치와 루트 개척을 위한 작업조를 편성한다. 조 편성이 끝나면 베이스캠프를 치는데, 만약 베이스캠프와 제1캠프간의 거리가 멀다면 그 사이에 전진 캠프를 설치한다. 그 다음은 표식기를 세우고 고정 로프를 설치해 가며 루트를 개척하게 된다.
그렇게 루트를 개척하며 제1캠프, 제2캠프까지 올라가는 동안 대원들은 고소 적응을 하게 된다. 다시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면 그 다음에 할 일은 정상 공격의 시기를 잡는 일이다. 한번 놓쳐 버리면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느껴질 때, 나는 즉시 정상 공격조를 꾸려 베이스캠프를 출발한다. 고지대에서 하루 이상 버티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정상 공격 시기가 결정되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등반하려고 노력한다.
히말라야 8천 미터급에서는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보통 사흘에서 닷새쯤 걸리고, 캠프도 루트 난이도에 따라 서너 곳 정도 설치하게 된다. 다른 대원들은 대개 내 등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에 나보다 하루 이틀 베이스캠프를 출발한다.」
1977년 국민소득 1000불도 안 되던 시절에, 우리나라의 산악인들은 배포 하나만으로 고상돈 대원을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린다. 대원도, 훈련도, 소요자금도 백지상태였던 시절이었다. 세계에서 여덟 번째 이룬 쾌거다. 기적은 18명의 피와 땀의 결과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세계 최강 선수들이 몰려와 메달 경쟁을 벌일 때 우리나라 산악인들은 ‘에베레스트–로체 동시 원정대’를 꾸려 무형의 금메달에 도전한다. 당시 산악 국가대표 21명은 에베레스트에 6명을, 올림픽 폐막일에 맞춰 로체에 4명을 올린다. 금메달 2개가 추가된 것이다. 세계최초로 8000m급 16좌에 오른 엄홍길이란 별도 이때부터 뜨기 시작한다. 더불어 우리나라도 최강의 산악국가로서의 초석을 닦는다.
2017년 2월 7일 나도 마침내 EBC에 내 발자국을 남겨놓았다.
# 이번이 아홉 번째 후기다. 초반부와 같이 이번에도 홍역을 치렀다. 이유 없이 겉돌았다. 초조하기도 했다. 마침 낙원동 기타 장인에게 잠깐 보자는 전화가 왔다. 보자마자 적조했다며 무조건 끌고 나간다. 손은 거절하는데 다리는 따라간다.
술자리가 익어갈 무렵 선배는 아침 출근길에서 “내가 요즘 너무 서두는 게 아닌 가”란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며 자책을 한다. 선배는 70이 눈앞이다. 내가 들으라고 한 말 같아 뭔가로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에 몇 번 후기를 길어야 이틀에 끝냈다. 평생을 그리 살아왔으니 은퇴 후에도 그래야 편했고 뭔가 한 것 같았다.
내 어깨 통증으로 화제가 바뀌었다. 수술을 권하는 의사를 만났다니 선배가 펄쩍뛴다. 같은 증상으로 부부가 고생했다며 일단 물리치료를 권한다. 그 역시 안 해본 게 없다며 종로 3가 의료기점에서 안마기까지 하나 선물한다. 그러고 나서 수술을 하던 뭘 하던 하란다.
집에 돌아와 정리 중인 베이스캠프 후기를 덮었다. 곰곰이 생각했다. 아침에도 손을 대지 않고 관악산으로 갔다. 세 시간 정도를 걸었다. 마침 근처에 있는 김진원과 짜장면을 먹었다. 후기가 여덟 개 들어와 있단다.
집에 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후기를 폈다. 앞부분을 천천히 읽어 봤다. 매 장면마다 자료를 인용하고 있었다. 단 한 번 다녀오고 정리하면서 한계를 느낀 게 부담이 되었나 보다. 히말라야엔 또 갈 생각이다. 그때를 대비한 기록이라 생각하니 또 편해진다. 그러면서 마침표를 찍게 된다. 길게 왔다.
다음은 이번 트레킹의 정점인 칼라파트라를 올라본다. 그러고나서 남체까지 귀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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