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장님께 연하장 대신 드립니다.
어느덧 한 해가 저뭅니다. 해마다 이맘때마다 늘 그랬듯이 또 지나갑니다.
그간 건강하셨는지요?
보내주신 시집과 책자는 잘 받았습니다.
성함 석 자를 대해는 반가움과 제목에서 풍기는 궁금증으로 책을 펴 보았습니다.
먼저, 사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생각보다 얼굴 주름이 옅어 보였습니다.
보령의 ‘젊은 중년’(?) 시절의 처장님은 주름이 많았다고 기억되는데 사진은 훤하게 잘 나와서 한참 웃었습니다.
회춘하신 것인지, 제 기억이 왜곡되어 있었던지 아무튼 옛날 생각부터 추억과 상상이 한꺼번에 밀려와
행복한 추억 여행을 한참 동안 다녀왔습니다.
우편물을 받아 책을 꺼내 내자에게 쑥 내밀어 보였더니, 순간 ‘아- 아-’하고 깜짝 놀라며 먼저
사모님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집사람이 기억하는 사모님은, 보령을 떠난다고 인사드리러 갔을 때, 차비를 꺼내 손에 꼬옥 쥐여 주시던
정감 많으신 모습이라 했습니다.
사반세기 전 일인데도 꼭 작년 일처럼 생생하다 추억하더군요.
이글을 빌어 사모님께 감사 인사드리고 건강하신지 안부 여쭙니다.
책을 읽은 소감을 올리기 전에 먼저, 근근 33년의 조무래기 봉급쟁이가 직장생활 53년의 대선배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본래 열정적이고 끈기 있는 분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오래도록 현직에서 활동하시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퇴직하시고 한가한 툇마루에 앉아 편하게 쉬셨을 거로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이게 다, 건강하시니까 가능한 일이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보내주신 ‘무릉도원기’를 읽어보면서 많은 걸 느끼고 배웠습니다.
역사 공부도 하게 되었고요, 지리도 공부하고 고래로 면면히 이어온 혼과 기상도 어렴풋하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처장님의 열정과 생활 철학이 곳곳에 배어 있어 마주 앉아 얘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고
제가 기억하는 예전의 처장님 상이 아직 그대로시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삼척 근덕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옛 근덕농고 자리에 있는 삼척마이스터고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생각에 ‘근덕’은 그저 평온하고
넓은 들이 있어 예로부터 사람 살기 좋은 동네였겠구나……. 그래서 홍씨, 최씨, 김씨 등 지방 세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구나라는 정도의 느낌을 받았지요.
그러나 ‘무릉도원기’를 읽고 난 지금은 감회가 전에 느낌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아는 만큼 달라진 거겠지요.
교가리 느티나무 앞에 처음 섰을 때는 탄성이 절로 나왔더랬지요. 오래된 거목이라 신령스러웠고,
그것도 같은 동네에 한 그루가 아닌 두 그루나 있다는 사실에 너무 놀랐습니다.
일차원적인 놀람과 탄성으로 끝난 靈木 감상이 이제는 처장님 덕분에 그 역사와 혼을 더해 입체적으로 알게 되었으니
엄청난 행운이지요.
앞으로 그 동네를 또 지나게 된다면 이젠 우러러보게 될 거 같습니다.
그 보호수 그늘로 작은 시골장이 서고 바로 옆에는 막걸릿집(주막)과 새로 생긴 옛날식 다방이 생겼는데
거기 자주 갔드랬습니다.
그리고 근덕 교가리에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수업이 없는 시간에 일부러 구경 가기도 했었구요.
어느 봄날에 꽃구경 삼아 무료함을 달래려고 길을 나섰다가 무릉마을회관을 지나서 높은 곳에 올라
마을을 내려다본 적이 있습니다.
새로 난 7번 국도가 콘크리트 고가로 나보란 듯 쭉 뻗어 있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동해안 교통은 좋아졌겠지만, 아랫마을 경관이 많이 훼손되었다고 하고 안타까워했었는데
거기가 바로 처장님 고향마을이었다니…. 아 ~ 아 ~ 이게 무슨….
지금도 그 풍경이 조감도처럼 떠오르는데 지금의 내 머릿속 조감도에는 처장님 얼굴이 오버랩되니 기분이 묘합니다.
학교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제가 근무하던 고등학교(삼척마이스터고)는 중학교(근덕중)와 한 건물을 사용하는데 층을 달리해서 나누어 쓰고 있습니다.
중고 병설도 아니고 각각 독립학교인데도 말입니다.
근무할 때는 시골 학교니까 그러려니 하고 중학교 층의 복도를 무심히 지나다녔는데 거기가 바로 처장님 모교였군요.
ㅎㅎ 진작 알았더라면 구석구석 사진을 찍어 보내드리는 건데, 아쉽습니다.
학교 건물 중에 '덕봉관'이란 동이 있고 '수양관'도 있는데 ‘덕봉관’은 덕봉산을 말하는데
수양관은 도무지 연관되어 생각나는 게 없었습니다.
교사나 교직원 누구에게 물어봐도 대답을 얻지 못해 미제로 남은 의문이었는데
그게 바로 백이숙제-수양산-최수-근덕수양산-김수형으로 이어온 것이 었군요.
또 교내에 남양홍씨 선산과 재실이 있는 것에도 특이하다 하면서 놀라고 그들의 과거 세력과
지역사회의 영향력에 대해서도 상상해 보았지요.
아무튼, 목련이 활짝 피는 이른 봄날의 교정이 예쁜 학교였습니다.
지금 같은 한겨울에 봄이 잉태된다는 태극의 원리를 꺼내는 게 성급한지는 몰라도
이런 추운 겨울에는 봄날의 따스한 목련 교정이 그리워집니다.
처음에는, 작은 시골 마을 무릉리와 ‘별유천지비인간’의 무릉도원을 연결한다는 다소 비약적인 발상에
그냥 고향에 대한 찐 사랑에서 나온 과장이겠거니 했는데
글을 읽어보니 시말이 너무도 정연하고 고향 사랑이 무릉도원에서 염원으로 상통함을 느꼈습니다.
장자방에 관한 생각과 무(힘)를 생각하는 차원을 다시 한번 되짚게 되었고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릉 부흥전략 부분에서는 근덕의 발전을 넘어 우리 민족, 우리나라 중흥으로 꿰뚫는
역사적 소명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처장님 글을 읽고 지난 삼척 생활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교내에 있는 관사에서 생활했는데 제가 있던 208호는 동향이라서 근덕 들판 끝 저쪽 덕산해변에서
해 뜨는 풍경을 허구한 날 바라보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그래도 성에 안 찼는지 1월 1일 원단에는 덕산항에서 해맞이 행사에 참여하였고,
떡국을 먹으면서 바라보던 새해 일출에 감격해했습니다.
근덕 얘기도 좀 해보겠습니다.
좁고 기다랗게 그리고 멋들어지게 휘어진 나무다리를 건너 덕봉산에 올라가서 바라보던 동해바다,
이봉주 동상을 지나 덕산해변 횟집에서 맛보던 물회, 시원하게 뻗은 모래밭 풍경이 일품인 명사십리 맹방 해수욕장,
상맹방의 샛노란 유채꽃밭이 아름다운 곳. 그리고 딸기로 유명한 곳.
딸기 하우스에서 딸기가 발갛게 익어가면 이미 군침이 돌아 있고요, 옛 7번 국도는 화려한 벚꽃 터널로
꽃그늘을 만들었지요.
오분동 넘어가는 길에 한치(재) 정상에 정자가 하나 있어 거기서 바라보면 정라진 항과 오밀조밀한 정라동 산동네가
이국적 풍경으로 예쁘게 보이고,
남으로는 멀리 장호 바다까지 탁 트인 바다 풍광이 아주 호쾌했습니다.
지금은 그 아래는 삼척화력 시설 공사(아마도 물양장이나 접안시설인 듯)가 한창입니다.
제가 있을 때는 환경단체와 갈등이 점점 커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어느 정도 공사 진척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요즘 탄소중립 관련 정책과 맞물려 있어 한때나마 전력회사에 관여했던 사람으로서 안타깝습니다.
근덕에서 삼척 시내 첫 입새에 다다르면 보이는 첫 풍경….
삼표시멘트(구 동양 시멘트) 공장이 경관을 방해하여 아쉬움이 더하는 오십천 둔치의 장미공원,
(아름다운 오십천 풍경을 해친다고 시멘트 공장을 원망할 수만은 없지요,
그래도 한때는 산업화의 주역이었는데 지금 와서 미관을 조금 저해한다고 해서 나쁘게 평가할 수는….),
그리고 정라진항(지금은 삼척항으로 개명되어 이름에서 풍기는 정감이 조금 떨어지지만)의 곰치국은
해장국으로는 최고였습니다(지금 생각해도 군침 넘어가네요. ㅎㅎ).
이번에는 근덕 교가리에서 남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조금 내려가면 레일바이크 궁촌입니다. 그리고 초곡의 촛대바위는 진입 산책로가 새로 생겨 관광지가 되었구요,
그 동네 회 맛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내려가면 요즘 한창 뜨고 있는 그림같이 예쁜 장호항과 해상 케이블카….
지금도 눈감으면 떠오르는 근덕의 면소거리(처장님 글에서는 재동이라고 그랬나요?), 요즘은 건설 현장
(고속도로, 철도, 삼척화력 등)이 많아 근로자들로 붐비고 꽈배기(도너츠)로 유명한 곳이 두 곳이나 있었는데
그 맛도 그립고요, 이 모든 삼척 풍경을 처장님 덕분에 다시 소환하게 되었네요. ㅎㅎㅎ
여느 시골과는 다르게 활기가 넘치는 곳. 물론 각종 공사로 일시적일 거라고 현지인들은 말하지만,
처장님 바람대로 계속해서 번영하길 바랍니다.
까맣게 잊고 살았던 세시풍속들, 그리고 정겨운 시골 할머니의 언어(사투리), 시골 동네 풍경과
당시의 가난하고 소박했던 생활상 등이 아련아련 소환되어 책을 읽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그 시절은 가난했지만 별 불만이 없었고 탐욕이 적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가난, ‘째지는 가난’이라 표현된 예전의 가난.
그런 환경에서 자란 세대와 물질적 풍요와 부모의 과도한 관심 속에서 자란 신세대와는 뇌세포가 다르고
‘한국인’이라 명명하는 정의부터 달라진 것.
같은 국민인데 같은 한국인이 아닌 것 같은 젊은 세대, 그리고 그사이에 낀 세대 간의 갈등이 지금의 우리 문제지요.
글을 읽다 보니 옛 추억과 근간의 문제점이 교차하는 묘한 기분이 많이 들었습니다.
세대 간의 갈등 특히나 민주화 세대와 산업화 세대의 갈등, 정보화 세대와의 견해차가 현실에서는
좁혀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에 관한 생각도 많이 언급되어 있네요. 저도 나름대로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늘 부족하다 느꼈는데 덕분에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민족을 먼저 생각하느냐, 국가에 대한 가치를 높게 보느냐의 차이인데 양, 극단을 달리는 사람들
(특히 정치인)이 밉네요.
옛날얘기도 좀 해보겠습니다.
보령화력에서는 물론 이려니와, 여수 화력에 계실 때 한번 찾아뵌 적이 있었지요.
그리고 대전에서 근무하실 때 지나다가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제게 너무도 잘 대해 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글이 길어져 이제는 저도 손도 아프고, 머리도 정리가 잘 안 되어 더 길게 쓰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처장님과 오천에 대한 기억들.
오천항 성곽(오천성?)에 열정을 보이시던 모습, 도미부인 설화를 길게 설명해 주시던 모습,
이지함 산소로 가는 高行 길과 1월 1일 참배의 기억,
그리고 송전철탑의 이전 경위(토정 선생의 예언과 한산 이씨 문중(이문구씨(?)의 노력) 등을 설명해 주시던 모습 등등이
순간 휙 하니 스치네요.
그리고, 보화한마당을 준비하던 기억, 보령화력 발전부와 효율과, 고길상, 강대훈, 윤경현, 황우선, 정정우, 홍원표, 정미옥
(이름이 다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3,4호기 운영과, 5,6호기 건설에 힘쓰시던 처장님….
이 모든 게 전부 까마득한 옛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써 내린 탓에 기억이 완벽하지 않은 것도 있을 테고, 오탈자나 비문도 있을 테고요,
비논리나 비약도 있을 테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바쁘신데도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로써 연하장을 대신합니다.
옛날 상투적 어구이기는 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글이 없다고 생각하여 그대로 옮깁니다.
지난날 후의에 감사드리며 새해를 맞이하여 더욱 건강하시고 가내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태백에서 세모에 손중락 드림
첫댓글 그럼 .그렀지요...김순옥님께서 보령 떠난다고 차비를 손에 꼭 쥐어주시는 모습은 어머니 마음입니다 ... 손중락선생님의 새해인사 글보니 많은 교감있어군요.무튼 옛 추억이 소릇소룻 향기나네요
그래요. 손선생이 추억을 되살려주었어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볶은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