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본|
사랑하는 사람들
권영갑
등장인물
희주(43); 말기 간암으로 시한부 인생.
영준(43); 희주 남편. 여성 잡지사 발행인 겸 편집장.
은비(20); 희주 딸. 여대생.
준혁(17); 희주 아들. 고교 2년생.
이박사(55); 희주 오빠. 의사.
윤수정(33); 번역작가. 영준과 불륜 관계.
파출부(50대); 영준 집의.
의사1
의사2
M 시그널
효과 의자 당겨 앉으며
희주 말씀해보세요. 저, 무슨 말이든지 받아들일 수 있어요.
이박사 (한숨) 후--
희주 (재촉하듯) 오빠!
이박사 박서방하고 같이 다시 오너라.
희주 죽을병인가요?
이박사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
희주 혹시… 암?… 맞네요… 암이군요. 그렇죠?
효과 이박사, 한숨 쉬며 담배 피우고
희주 (떨리는 목소리로)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죠? (날카롭게) 얼마나 더 살 수 있냐니까요!!
희주 (N) 간암 말기. 내게 남은 시간은 앞으로 길어야 6개월. 오빠가 근무하는 대학병원에 들른 김에 받아본 종합검진. 처음에는 만성피로의 원인을 알아보려고 시작한 혈액과 소변 등 단순한 기초 검사가 초음파, 시티, 조직검사로 이어지고 오빠의 표정이 차츰 심각하게 변해가자 나는 내가 큰 병에 걸렸다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오빠의 입에서 간암 말기라는 말이 떨어지자, 내 몸의 모든 관절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일시에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제발 꿈이기를 바라며 거리를 몇 시간이나 헤매다가, 갑자기 밀려드는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어서 남편의 잡지사로 찾아갔다. 남편은 여성지의 발행인이자 편집장이었다.
효과 문 열고 들어가는
희주 (혼잣말) 아무도 없네?
효과 여기저기 찾는 발걸음 소리.
영준 (off) 도대체 어쩌려구 이래?
희주 (혼잣말) 회의실에 있었구나. 누구하고 같이 있는 모양이네.
윤수정 (off) 사모님하고 이혼하고 나하고 같이 살자고 떼쓰지는 않겠어요. 단지 저도 선생님의 여자로 인정해달라는 것 뿐이에요.
희주 (놀라서) 아니!
영준 (off) 그렇다고 애를 낳으면 어떡해. 당장 떼.
윤수정 (off) 몇 번이나 병원에 갔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도저히 못 떼겠더라고요. 내 뱃속에서 꼬물거리며 살아있는데….
영준 (off) 이것 봐, 윤작가. 우리가 그 애 장래를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해?
윤수정 (off) 걱정 안 끼칠게요. 저 혼자서 키울 자신 있어요. 선생님은 지금처럼 그냥 조금 떨어져서 지켜봐 주기만 하세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 낳아서 키우는 거 어쩌면 당연한 거잖아요.
희주 (혼잣말)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효과 희주가 허겁지겁 돌아나가느라 의자와 책상 따위에 부딪히는 소리.
영준 (off에서 가까워지며) 누구요?
효과 문 여는 소리.
영준 (놀라) 아니 당신….
효과 희주, 뛰어나가고
영준 (뒤쫓으며) 여보!
효과 급박한 발걸음 소리. 우당탕 무엇인가 넘어지기도 하고.
M 브릿지
희주 (N) 남편과는 대학 다닐 때 만났다. 처음에는 사랑이 전부였지만, 애들 키우고 집 마련하면서 사랑보다는 생활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남편이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임신까지 시켰다는 것은 내가 암에 걸린 것보다 더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땐 집 안으로 들어가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폭풍우에 쫓긴 새가 둥지로 찾아 들 듯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곳이라 여기며 매일 매일 쓸고 닦고 어루만져온 내 집! 하지만….
효과 현관문 여닫는 소리.
효과 가방 끌어다 놓는 소리.
희주 은비야. 어디가? 그 큰 가방은 뭐구?
은비 집 나갈 거야.
희주 뭐어?
은비 도저히 집에선 살 수가 없어. 자취하는 친구 있는데 거기 얹혀 지내면서 아르바이트루 학비 벌어서 내 힘으로 대학 다닐게. 이해해줘, 엄마.
희주 너 왜 이래. 도대체 이유가 뭐야?
은비 엄마한텐 감정 없어. 정말 미안해. 그치만 제발 나 하려는 대로 가만 내버려 둬. 안 그러면 나 형편없이 질 나쁜 애로 막 타락해 버릴지두 몰라.
희주 너 요즘 아빠하고 자주 싸우더니 그것 때문이야? 아무리 그래두 어쩜 이럴 수 있어? 엄마한테 이러는 거 옳은 일이야?
은비 엄만 바보야.
희주 뭐어.
은비 아빠 지금 무슨 짓 하고 다니는지… 관둬. 비켜줘. 엄마가 아무리 그래두 난 나갈 거야. 이 집에서 하루두 있기 싫어.
희주 네가 뭘 안다구 그래. 빨리 들어가.
은비 아빠 바람핀단 말야! 엄만 그것두 몰라?
희주 (놀라서) 너… 너 알고 있었어?
은비 (놀라서) 어, 엄마두 알고 있었어?
희주 니, 니가 어떻게… 그걸….
은비 새벽에 아빠가 다른 여자랑 전화하는 거 우연히 듣구 알았어.
희주 (허탈해서) 그랬구나. 그래서 니가 그렇게 아빠한테 사사건건 삐딱하게 대들었었구나.
은비 (화나서) 엄만 알고 있었으면서두 어쩜 그렇게 태연할 수 있어? 응? 진짜 화나구 신경질 나네.
희주 그렇다구 집 나가면 이 엄만 어떡하니. 누굴 믿고 살라구.
은비 바람피우는 아빠나 모른 척 눈감아 주는 엄마나 다 똑같애! 다 싫다구! 이거 놔. 집에선 숨이 막혀 하루도 못살아.
효과 문 쾅 닫고 나가는 소리
희주 은비야! 은비야! (울먹이며) 은비야아--- 이 엄만… 이 엄만 말야 얼마 못살아… 그러니 제발 같이 있어 줘….
M 브릿지
희주 (N) 남편은 늦도록 들어오지 않았고, 나는 불도 켜지 않은 텅 빈 거실 구석에 몇 시간이고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무덤 속이 이처럼 적막하고 어두울까? 내가 죽고 나면 우리 식구들은 어떻게 될까? 걱정이 꼬리를 물며 일어나고 있을 때, 고2인 준혁이가 야간 자율학습과 학원 과외로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들어왔다. 나는 서둘러 눈물을 닦아내고 거실 전등을 켰다.
효과 현관문 여는
준혁 다녀왔습니다.
희주 (애써 명랑하게) 힘들지?
효과 거실로 가서 가방 내던지고 소파에 앉으며
준혁 (장난스레) 힘들어. 그러니까 엄마가 대신 좀 해줘. 응?
희주 대신? 어떻게?
준혁 음… 엄마가 학교도 가구, 학원도 가구, 난 집에서 맛있는 거 해놓구 기다리구.
희주 맛있는 거 뭐?
준혁 음.… 개구리 뒷다리 튀김에 돌멩이 무침.
희주 (웃으며) 관둬. 가서 씻기나 해. 엄마가 맛있는 새우튀김 만들어 줄게.
준혁 오우 역시 우리 엄마는 이 시대가 낳은 최고의 요리사라니까. 오늘 도시락 김밥도 맛이 짱이었어. 엄마--
희주 어머 얘가 왜 이래.
준혁 뽀뽀해주려고.
희주 어머 징그러 얘.
효과 쪽-- 하고 볼에 입 맞추는
준혁 난 장가 안 가고 평생 엄마하고 같이 살 거야. 진짜야.
희주 (젖은 목소리로) 씻어, 빨리.
효과 샤워하는 소리.
효과 새우튀김 만드는 소리.
준혁 (off에서 가까워지며) 이야 맛있는 냄새! 이거 먹고, 공부 않고 자면 정말 불효자는 웁니다.
효과 희주가 식탁에 튀김 접시 놓고, 준혁이 의자에 앉는 소리.
준혁 잘 먹고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희주 녀석두.
희주 (N) 어제까지 평범하게 들렸던, 준혁의 장난기 많은 한마디 한마디가 오늘은 나를 한없이 행복하게도 했고 슬프게도 했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인지, 철없는 아이들이 나 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혼란이 남편의 외도 탓으로만 여겨졌다.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가 불길처럼 나를 휘감고 있을 때, 남편으로부터 집 근처 카페에 있으니 나오라는 전화가 왔다.
효과 카페 분위기.
영준 애들 때문에 집에서 얘기하기가 불편할 것 같아서 나오라고 그랬어. 미안해.
희주 (도전적으로) 뭐가요? 밖으로 불러낸 게요?… 아님… 후(한숨)… 입에 담기도 싫군요.
영준 우리 잡지에 글 써주는 번역작간데… 회식 때 술에 취해서… 실수였어.
희주 한두 번 만난 사이가 아닌 것 같던데… 그것두 실수라고 할 건가요?
영준 정리할게. 사실 그동안 힘들고 괴로웠어… 당신이나 애들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엉뚱하게 화만 자꾸 내게 되고… 이렇게 들통난 거 차라리 잘됐어. 한 번만 용서해줘.
희주 (목소리 높여) 어떻게 당신은 자기 입장만 생각해요? 사랑한다며, 애까지 낳겠다는 여잘 그렇게 쉽게 정리한다구요? 정말 이기적이군요!
영준 남들 듣겠어. 좀 조용히 말해.
희주 더 이상 얘기할 것두 없어요. 이혼해요.
영준 여보!
희주 (N)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이혼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온몸이 떨려서 커피잔도 제대로 들 수 없었지만, 남편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내가 너무 초라해 보일까 봐, 죽을병에 걸렸다는 말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하지만… 너무 슬펐다. 눈물이 가슴 속으로 흐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M 브릿지
효과 병원 소음
효과 문 여닫기고
희주 결과가… 어떻게 나왔죠?
의사1 (침통하게) 말씀하신 대로 간암 말기가 맞습니다.
희주 (N)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몇 군데 종합병원을 더 찾아가 봤지만, 결과는 한결같았다. 사실 병도 병이지만, 남편과의 문제를 잊기 위해 이 병원 저 병원을 분주하게 찾아다니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문득 그런 내 모습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서, 무슨 일이라도 있는 듯 급하게 남편의 회사로 찾아갔다. 남편은 기는 시늉을 하면서 나를 맞이했다. 최근에 남편이 나를 대하는 태도였는데, 가식이 느껴지는 그런 모습이 나를 더욱 짜증 나게 했다.
효과 문 닫고 소파에 앉는 소리.
영준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웬일이야? … 그래 은비는 찾았어?
희주 아뇨.
영준 당신 안색이 안 좋은데 너무 걱정하지 마. 애가 똑 부러진 데가 있어서 별일은 없을 거야.
희주 맞아요. 당신보다 나아요.
효과 서류 꺼내는 소리
희주 도장 찍어줘요.
영준 이게 뭔데?
희주 이혼서류예요. 길게 입씨름할 기운 없으니까, 그냥 찍어줘요. 애들은… 애들은… 당신이 잘 키우구요.
영준 내가 잘못했다고 그러잖아. 다시는 그 여자 안 만날 테니까 제발 이러지 마.
희주 (날카롭게) 누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요?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흐느낌으로 변해) 난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다구요. 왜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요.
영준 당신 해도 너무 하는구만. 그렇게 용설 빌었는데, 회사까지 찾아와 이런 식으로 난리를 치고… 당신 이렇게 밖에 안돼? 엉?
희주 그래요! 난 이렇게밖에 안 돼요! 나도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줄 이제 겨우 알았어요! 너무 억울해요! 간통으루 경찰에 고소 안 한 것만두 고마운 줄 알라구요!
영준 차라리 고소해. 그게 나도 맘 편하겠어!
M 브릿지
희주 (N) 남편한테 퍼부으면 속이라도 시원할 줄 알았는데,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부끄러워질 뿐이었다. 몸도 마음도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처럼 흩어진 채 집으로 돌아왔다.
효과 현관문 여닫기는 소리.
은비 엄마!
희주 (놀랍고 반가운 느낌으로) 은비야!
은비 (흐느끼며) 엄마!
희주 얘가 어린애처럼 매달리구 그러네. 거봐. 어디가도 내 집 같은 데 없지?
은비 엄마 미안해. 너무 미안해. 나 진짜 못된 딸이야….
희주 미안하긴. 이렇게 돌아왔으면 됐지. 들어가자.
효과 거실로 걸어가고
이박사 (약간 off에서) 희주야.
희주 어머 오빠, 언제 왔어요? 저녁은 드셨어요?
이박사 은비하고 같이 먹었다. 병원으로 찾아왔더구나.
희주 은비가요?
은비 (울먹이며) 얘기 다 들었어, 엄마. 어떡해. 어떡해.
희주 (나무라는 투로) 오빠, 애한테 왜 그런 얘길… 놀라잖아요.
이박사 내가 놀랐다. 미국에 출장 갔다 오늘 왔는데, 아직 식구들한테 얘기 안 했더구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희주 나 곧 죽는다는 말 꺼내기가 힘드네요.
이박사 언제까지 말 안 하고 있을 거냐? 시간두 없구,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 힘들어. 가족이 뭐니? 어려울 땔수록 더 깊은 정을 나누는 존재 아니냐?
희주 사정도 좀 있었어요.
이박사 이보다 더 큰 사정이 어딨어. 박서방은 언제 들어오니? 한 이불 덮고 자면서 그렇게도 몰라? 무심한 사람 같으니.
희주 아휴 그만하고 가세요. 그이한텐 내가 직접 얘기할 테니까, 오빤 얘기하지 마세요. 알았죠?
이박사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구나.
희주 은비야. 너도 내가 얘기할 때까지 아빠한테 말하지 마. 알았지?
은비 몰라!
효과 괘종시계 두 번 울리고
효과 현관 벨 소리와 문 쾅쾅쾅 손으로 두드리는 소리 반복되고
영준 (off-인사불성으로 취한 목소리로) 여보! 문 열어, 문!
효과 문 발로 차는 소리
영준 (off) 이젠 문도 안 열어주는 거야? 엉?
은비 (혼잣말) 한심해, 정말.
효과 방문 열리고
준혁 (졸린 목소리로) 아빠잖아. 누나, 문 안 열어 드리고 뭐해? 아이씨, 시끄러워 죽겠네.
은비 그럼 니가 열어줘.
효과 은비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문 쾅 닫는 소리
준혁 참 나. 성질 한번 고약하다니까.
효과 문 열어주고
영준 (들어오면서) 아이고 우리 준혁이구나… 공부 열심히 하고 있지?
준혁 으으 술 냄새.
영준 하하하. 이 아빠가 괴로운 일이 너무 많아서 한잔했다. 근데 니 엄마는 어디 있냐?
준혁 방안에 계시겠죠. 들어가 보세요. 아빠가 늦게 들어오시니까 뿔나 있을 거예요. 잘 좀 달래주세요. 엄마, 요즘 너무 기운이 없는 것 같던데.
영준 하하하. 우리 준혁이 다 컸구나. 엄마 걱정두 하고. 그래 알았으니까… 넌 들어가 자거라.
준혁 안녕히 주무세요.
영준 그래그래.
효과 방문 여닫는 소리
영준 아니 여보 거기 구석에 그렇게 쪼그리고 앉아 있으면 어떡해… 여기 와서 나하고 얘기 좀 해. 나두 너무 괴로워서 한잔했어.
희주 (가라앉은 목소리로) 늦었어요. 그냥 주무세요. 낮에 일은 미안했어요.
영준 (넋두리처럼) 당신두 힘드니까 그렇게 했겠지. 근데 말야, 당신이 그렇게 하고 간 뒤에말야, 직원들 얼굴 보기 부끄러워서 다섯 시간 동안 내 사무실 밖으로 나가질 못했어. 그러면서 생각 많이 했는데 말야…. 내, 당신한테 어떤 모욕을 당해도 좋은데… 이혼하자는 얘긴 하지마… 난 당신 없으면 못 살아….
희주 굳이 이혼할 필요 없어요. 그냥 화나구 답답해서 해본 소리였어요. 이혼 안 해요…. 하구 싶어두, 할 수가 없게 됐어요.
효과 영준이 침대에 털썩 드러눕는 소리
영준 고마워… 앞으로 잘할게… 나도 정말 그 여자 때문에 힘들어… 방법을 모르겠어… 당신이나 애들 보기도 정말 괴롭고… 여보… 너무 미안해… 내가 죽일 놈이야….
희주 (N) 밤새도록 남편은 미안하다며 혼자 중얼거렸다. 남편도 정말 힘들고 괴롭나 보다. 그러나, 곧 그 괴로움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어쨌든 나는 가족들 곁을 떠나야 하고, 그 빈자리의 고통과 후회는 고스란히 남아있는 자들의 몫이 될 것이다. 앞으로 6개월. 내가 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무엇일까? 밤을 하얗게 새우느라 찌릿찌릿 전기가 통하는 듯 쑤시는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주방에 들어섰을 때, 은비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밤새 울어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향해 억지로 웃고 있는 은비는 벌써 내 빈자리가 두려워서 저러는 것인가?
희주 뭐하니?
은비 밥.
희주 네가 할 줄 알아?
은비 엄만. 이래 봬두 학교서 엠티 가면 내가 우리 학교 왕 요리사라구. 엄만 가서 더 자.
희주 은비야.
은비 응?
희주 안 이래두 돼. 그냥 전처럼 어리광 피구, 떼 쓰구… 그런 모습 보구 싶어. 그래 줘. 응?
은비 (못 들은 척) 참, 준혁이 깨워야 하는데… 오늘부터 주번이라서 일찍 가야 된다던데.
희주 그래?
효과 희주, 준혁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희주 준혁아 일어나. 빨리.
준혁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엄마… 사랑해… 뽀뽀해줘.
희주 아휴… 이거 놔. 징그러. 일 나기나 해, 빨랑. 주번이래매.
준혁 엉?… 이크크. 큰일 났다.
효과 푸카푸카 급하게 세수하는 소리.
효과 우당탕퉁당 준혁이 현관문으로 뛰어가는 소리.
희주 (따라가면서) 밥 먹구 가.
준혁 어우 늦단 말야… 좀 일찍 깨워주지 씨.
희주 주번이라구 말을 했어야지. 조금이래두 먹구, 도시락두 갖구 가. 응?
준혁 늦었는데 뭘 먹구가. 엄마는 제대루 하는 게 하나두 없어.
은비 (발끈해서) 너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어린애두 아니믄서. 니가 시간 맞춰 일나믄 안돼?
준혁 누나 왜 그래? 아침부터 뭐 잘못 먹었어?
은비 니가 엄마 말 안 듣고, 니 맘대루 하니까 그러잖아.
준혁 내가 엄마 말 듣든 안 듣든 누난 상관마. 엄마 속은 자기가 다 썩이면서.
은비 요게.
효과 은비, 준혁의 머리통 쥐어박고.
준혁 아얏. 에잇 씨--
효과 준혁이 가방을 휘둘러 은비를 때리는 둔탁한 소리.
은비 악- 이게 엇다 가방을 휘둘러.
희주 아휴 얘들아, 그만해. 니들은 어째 다 커서도 싸우니. 어린애들처럼… 흠흠… 근데 이거 밥 타는 냄새 아니냐?
은비 어머나!
효과 은비 후다닥 뛰어가 가스레인지 불 끄고.
효과 아침 식탁 차리고.
효과 영준 희주 은비가 식사하는 소리.
영준 국이 왜 이렇게 짜. 밥에는 화근내가 나구.
희주 미안해요.
영준 아, 아냐. 입맛두 없구 해서 해본 소리야.
은비 (도전적으로) 입맛 없으면 안 드시면 되겠네요.
희주 (나무라듯) 은비야. 아빠한테 그러면 안 돼.
은비 그렇잖어. 그리구, 난 아빠라구 생각지두 않어. 역겹다구.
영준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대학생이란 게 그렇게밖에 말 못 해?
은비 아빠나 남들한테 손가락질 안 받게 조심하세요.
영준 뭐라구? 에잇!
효과 영준, 은비의 뺨을 때리고.
은비 악! 왜 때려요. 왜. 아빠가 뭘 잘했다구요.
영준 못된 것!
효과 영준, 다시 은비의 뺨을 때리고.
은비 악!
희주 (절규하듯) 그만들 해! 제발 그만들 하라구! 우리 집이 언제부터 이렇게 됐어… 그렇게 정이 넘치던 집이… (숨이 가빠지며) 흐흐헉---흐허억-
효과 희주가 쓰러지는 소리.
은비 엄마!
영준 여보!
효과 병원 구급차의 비상 사이렌 소리.
M 브릿지
희주 (N) 몇 시간 후 깨어났을 땐 병원이었다. 모든 것이 꿈이었고,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이전의 즐겁고 행복했던 삶이 다시 이어지길 바랐지만, 내 옆에 삥 둘러서서 울먹이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을 보는 순간, 그것이야말로 헛된 꿈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그들로부터 위로받아야 하는지, 내가 그들을 위로해야 하는지 언뜻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은비 엄마 괜찮아?
희주 은비야.
준혁 엄마 아픈 거 아니지? 응? 아무렇지도 않은 거지?
희주 넌 공부 안 하고 왜 여기 왔어?
준혁 공부 그런 거 안 해! 뭣 때문에 해? 엄마 아프면 나 공부 안 해!
영준 당신 이럴 수가 있어? 응? 날 정말 이렇게 나쁜 놈으로 만들 수가 있어?
희주 집에 가요. 김치 담그려고 배추 절여놨는데… 침대 시트도 갈아야 하구… 나, 병원에 있기 싫어요.
영준 그걸 말이라고 해? 내가 당신 살려낼 거야. 무슨 짓을 해서라두 살려내고 말아!
희주 그러니까 집에 가요. 우리 집, 거기 가야 난 살 수 있어요.
효과 문 열리며 이박사 들어오고.
이박사 깨났구나.
희주 오빠, 나 집에 가두 되죠?
이박사 앞으로 통증이 심해질 거야. 진통제 가져가도록 해라.
영준 (벌컥) 형님 어떻게 남에 얘기하듯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어떡하든지 치룔 해봐야죠.
은비 외삼촌 우리 엄마 살려 주세요!
준혁 오늘 아침까지도 괜찮았단 말예요.
이박사 은비야. 준혁아.
은비 (울먹이며) 예.
준혁 저 시키시는 거 뭐든지 다 할게요.
이박사 어머니 마음 편하게 해드려라. 그게 제일 좋은 치료다.
영준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수술도 안 해보구요? 형님이 정 이렇게 나오시면 저 다른 병원에 가겠어요. 이 사람 데리구 외국에라두 가서 치료받게 할 겁니다.
희주 그만 해요, 제발! 당신은 당신 앞가림이나 제대루 하라구요! 걱정거리는 지금 당신이 제일 많이 만들어놨잖아요.
영준 (할 말을 잃고 더듬거리며) 여, 여보.
M 브릿지
희주 (N) 이틀 만에 퇴원해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주방에는 그릇이란 그릇은 모두 꺼내어져 있었고, 여기저기 옷과 양말 짝이 나뒹굴고 있었다. 은비는 생전 처음 해보는 살림살이에 지쳐 헉헉대고 있었고. 나는 어렴풋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일을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수소문해서 남편의 아이를 배고 있는 그 여자, 윤수정을 만났다. 결혼 석 달 만에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5년째 홀로 살고 있는 외로운 여자였다. 그리고 착해 보였다.
효과 다방 분위기
윤수정 (울먹이며) 이렇게 따뜻하게 절 만나주시리라곤 생각도 못 했습니다.
희주 모든 걸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싶어요. 아니 어쩌면 잘됐는지도 모르죠.
윤수정 …….
희주 부탁이 있어요. 내가 떠나고 난 뒤에 남편하고 결혼해줘요.
윤수정 싫습니다.
희주 왜요?
윤수정 한때는 사모님 자리가 부럽기도 했지만… 생각해보니 거기는 저같이 부족한 사람이 설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앞으론 선생님을 만나지도 않을 거예요.
희주 그이를 사랑하고, 애기도 낳을 거라면서요?
윤수정 저 혼자… 사랑하고, 저 혼자 애 낳고 키울 거예요. 이것만두 얼마나 큰 잘못인지 저 잘 압니다. 그 이상의 괴로움 끼쳐드리고 싶지 않아요.
희주 나도 힘들게 하는 말예요. 수정씨가 그 이하고 열 살이나 차이가 나지만 기왕에 애를 낳겠다니까… 그이 옆자리가 비니까… 결혼하라는 거예요.
윤수정 저두 사람인데 그렇겐 못 해요.
희주 내가 이렇게 부탁하잖아요. 우리 애들 못된 새엄마 밑에서 크는 거 나, 원하지 않아요. 나한테 미안한 게 있다면 그거 갚는 셈 치고 우리 애들 잘 좀 돌봐줘요! 부탁해요!
M 브릿지
효과 현관문 열쇠로 열고 들어가고
효과 희주, 무거운 짐을 들고 끙끙거리며 현관에서 주방으로 가고.
영준 (off에서 나오며) 당신이야? 아니 몸도 안 좋으면서 시장 갔다 온 거야? 이리 줘… 어휴 무겁네.
희주 당신 회사 안 갔어요?
영준 이번 호 다음 호, 취재 부장한테 맡겨놨어.
은비 엄마!
희주 학교 벌써 갔다 왔어?
은비 (약간 켕기는 목소리로) 으, 응.
파출부 안녕하세요?
희주 (의아해서) 누구…?
은비 파출부 아줌마. 아빠가 부르셨어.
영준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할 거야.
희주 당신두 참.
파출부 잘 부탁드려요, 사모님.
희주 네에….
은비 엄마 들어가서 쉬어. 있다가 가볼 데가 있어.
희주 어디?
영준 강릉에 이쪽으로 용한 한의사가 있대. 예약 환자만도 몇 달 치가 밀려있다는데, 마침 우리 잡지사 기자가 예전에 취재한 적이 있는 인연으루 어렵게 내일 아침 진료 잡아놨어.
희주 소용없는 짓이에요.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아니까 날 그냥 편하게 내버려 둬요.
효과 고속도로나 국도를 달리는 자동차 소리. 때로는 시내 복잡한 도로에서의 경적과 소음이 희주의 내레이션에 깔리며.
희주 (N) 그렇게 나의 병원 순례는 몇 달간 이어졌다. 남편과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했지만, 내 자신이 어떡하든 생명의 끈을 이어보려고 그 누구보다도 더 치료에 매달렸는지 모른다.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이 두려워서 겉으로는 초연한 척하면서. 병원 한의원 민간요법을 거치면서 식구들은 지쳐갔고, 차츰 나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절망도 익숙해지면 견딜 수 있는 것인지. 나는 남편의 재혼 문제를 시간 날 때마다 가족들에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어떨 땐 우회적으로, 어떨 땐 직접적으로.
효과 문 쾅 닫기고
은비 아빠, 뭐래요?
영준 에잇 가자, 가! 아주 고약한 병원이다!
준혁 왜요? 우리 반 담임선생님 아버지도 여기서 고쳤다고 분명히 그랬는데요.
영준 입원할 것도 없이 집에 가랜다. 무슨 병원이 환자한테 희망은 눈곱만큼도 주지 않고….
희주 (다가오면서) 입원 수속 끝냈어요?
영준 어, 입원실이 다 찼다는구만. 다른 병원에 가보자구.
희주 (실망해서) 나 기운 없어요. 집에 가요, 그만.
M 브릿지
효과 천둥소리. 빗줄기 거세게 쏟아지고
효과 빗길을 달리는 자동차 소리.
영준 깜깜한데다 폭우까지 쏟아지니 앞이 안 보이네. 여기가 어디쯤이야?
준혁 이정표 보니까 안성쯤 되는 모양인데요.
영준 한 시간을 달려도 아직 안성이야? 고속도로로 올릴까?
준혁 아까 뉴스에서 엄청나게 밀린다고 나왔잖아요. 주말이라서.
영준 진퇴양난이군. 그러게 거기서 자고 오자니까.
희주 (웃음기 띄고) 당신 운전하는 12인승 승합차 뒷좌석 침대에 편안하게 누워있으니까 호텔보다 좋은데요 뭐. 빗소리 들어가며. 이런 행복이 또 있을까 싶네.
은비 아빠, 힘들면 제가 운전할게요.
영준 어이구 은비가 아빠 걱정까지 다 해주네. 승합차 사서 뒷자리 침대칸으로 만들 때두 칭찬 한마디 없더니.
준혁 누나 엄청 착해졌죠, 뭐. 키키키.
은비 까불지 마.
영준 (장난스레) 누구? 나?
은비 준혁이요.
영준 난 줄 알고 깜짝 놀랐네. 하하하.
준혁 나두 휴학하고 아빠 엄마 따라다닐까? 집시 가족처럼.
희주 아서라. 휴학, 은비 하나로두 족해. 그리구 이렇게 떠돌며 병원 찾아다니는 것두 이제 그만이야.
영준 (딴청을 부리듯) 야! 비 정말 엄청 온다.
희주 그리구… 당신… 나 떠나고 나면… 장가가세요. 괜히 혼자 살면서 궁상 떨지 말구.
영준 그 얘기 다신 하지 말랬잖아!
은비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난 아빠하구 같이 안 살아.
준혁 누나는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해.
은비 넌 그럼 아빠가 새장가 가는 거 찬성이란 말야?
준혁 그건 아니지만… (가라앉은 음성으로) 근데 엄마가 진짜 어디루 가? 진짜루 없어지기라두 하냐구!
희주 준혁아, 걱정 마… 그냥 해본 소리야.
영준 (벌컥) 당신은 왜 쓸데없는 소릴 해 갖고 사람 심란하게 만들어?, 엉?
효과 경적 소리 빵빵빵--
은비 아빠 앞을 봐야지!
효과 끼이익 급브레이크 밟는 소리와 비명.
효과 승합차가 가로수 따위에 부딪혀 길가로 나뒹구는 소리.
효과 빗줄기 쏟아지는 소리 B.G
효과 차 내부를 정돈하고, 차 문을 발로 차서 여는
영준 여보--은비야---준혁아--
은비 아빠! 엄마가, 엄마가 정신을 잃었어요.
효과 이것저것 치우고
영준 여보! 여보! 정신 차려!
희주 (신음) 으으….
영준 119에 신고해야겠다 휴대폰 어딨어?
효과 휴대폰 찾는 소리.
은비 못 찾겠어요. 아아아---아퍼.
영준 왜 그래? 어디 다쳤어?
은비 아까 차 뒤집혀질 때 어깰 부딪쳤는데 참을만해요.
영준 준혁이는? 준혁아! 괜찮아?
준혁 (조금 떨어져서) 으으,… 다리가 부러졌나 봐요. 못 일어나겠어요.
영준 안 되겠다. 난 엄마 업고 근처 병원으로 데려갈 테니, 은비 너는 준혁이 돌보고 있거라.
은비 예.
영준 (희주를 업으려다가 고꾸라지며) 흐헉--아으으--(비명 억지로 참는)
은비 아빠 다리 다치셨나 봐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영준 그래라. 뒤에서 엄말 좀 받쳐줘.
효과 영준이 은비의 도움으로 희주를 겨우 둘러업는 소리.
은비 어쩌죠. 제가 엄말 뒤에서 받치고 가야겠는데 준혁이 때문에….
준혁 (조금 떨어져서) 갔다 와. 난 그냥 여기 앉아 있으면 되니까.
영준 괜찮겠어?
준혁 걱정 마세요. 저두 남자라구요.
영준 그럼 엄마 병원에 데려다 놓구 곧 오마.
효과 빗길을 뛰어가는 영준과 은비의 발걸음 소리. 거친 숨소리.
은비 (헐떡거리며) 아빠 다리에 피가 많이 흘러요.
영준 (헐떡거리며) 괜찮다. 빨리 병원을 찾아야겠다. 니 엄마 살려야 해.
효과 빗줄기 속을 뛰어가는 두 사람.
M 브릿지
효과 문 여닫기고.
의사2 깨나셨군요.
영준 제 집사람은…?
의사2 부인께선 워낙 신체기능이 저하돼 있어서 정신을 잃은 것뿐이고 사고로 인한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문제는 악성종양으로 인해 복수가 차오르고 호흡곤란이 심해진 것입니다. 지금 응급처치 중입니다만, 어떻게 그 몸으로 버텨 왔는지 놀랍습니다.
영준 통증이 아무리 심해도 내색 않는 사람입니다.
의사2 더 놀라운 건 선생님입니다. 오른쪽 허벅지와 종아리가 찢어지는 큰 부상을 당하시고도 부인을 업고 2㎞나 뛰셨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출혈을 조금만 더 방치했더라면 목숨을 잃을 뻔하셨습니다.
영준 그런데 사고 현장에 있는 제 아들 녀석은…?
의사2 따님이 의료진과 함께 벌써 떠났습니다. 이제 곧 도착할 겁니다.
영준 딸애도 어깨를 다쳤는데.
의사2 그래두 기어코 본인이 동생한테 가야 한다며 우겨서요… 아무튼 정신력이 대단한 가족입니다.
희주 (N) 그렇게 해서 우리 네 식구 모두가 병실은 비록 다르지만,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했다. 주로 내 병실에 모여든 우리 네 식구는 무슨 소풍이라도 온양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남편과 은비의 관계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삐치기 잘하지만, 감격도 잘하는 은비는 제 아빠가 큰 부상을 당한 데도 불구하고 제 엄마를 업고 빗길을 뛰어준 것이 그렇게 고맙고 자랑스러운 모양이었다. 하긴 나도 그런 남편이 새삼스러워 보였다. 얼마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우리 식구들은 예전의 다정한 모습을 많이 회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는 윤수정, 그 여자가 한시라도 떠난 적이 없었다.
M 브릿지
효과 풀벌레 울음소리.
효과 영준이 방에서 나와 주방으로 걸어오는 소리.
영준 (약간 off에서 가까워지며) 어디 갔었나 했네. 안 자고 식탁에서 뭐 해?
희주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 제삿날, 당신하고 애들 뭘 잘 먹고, 뭘 잘 못 먹는지, 우리 집안 비법으로 내려오는 게장 담그는 법, 은비하고 준혁이 어릴 때 병치레한 내력… 이런 거 쓰고 있어요. 쓰다 보니 끝이 없네요. 네 식구 사는 것도 이렇게 복잡다단한 줄 이제야 알았어요.
영준 그러니까 당신이 훌륭한 거지. 그런데, 그거 은비가 제대로 이해할려면 한참 기다려야 할 걸? 그때까지 당신 살아 있어야 해.
희주 은비 주려는 게 아녜요.
영준 그럼?
희주 윤수정… 그 사람 주려는 거예요.
영준 (단호하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마!
희주 그 사람이 낳은 아이가 아버지도 없이 크게 할래요?
영준 애, 절대로 못 낳게 할 거야.
희주 나도 죽는 거 무섭고 두려워요. 그 여자가 내 자리에 들어오는 거 어떨 땐 너무 싫어서, 혼자서 펑펑 운 적두 있어요. 신경은 얼마나 쓰이는지 알아요? 나 입던 구멍 난 속옷이며, 리어카에서 산 싸구려 머리띠 같은 거 흉 안 잡히려구 내버리면서, 또 서럽구 괴로워서 밤잠 설치구…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새 생명이 오는 것두, 사람 마음먹은 대로만 되는 건 아닌데요. 뭘. 그냥 그걸 조용히 인정하고,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받아들일 건가 그것만 생각할 수 있을 뿐이더라구요.
영준 어떤 말로 날 설득해도 난, 재혼 안 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평생 혼자 살 거야. 당신 떠나고 나면, 당신 맘 아프게 한 만큼 철저하게 날 괴롭히면서 고통스럽게 살 거야.
희주 은비하고 준혁이가 엄마도 없이 지내게 할거하는 거예요? 준혁이 내년에 고3인데, 당신이 엄마 노릇하며 시시콜콜 뒷바라지할 수 있어요? 은비, 시집갈 때 당신 혼자서 혼주석에 덩그라니 앉아 있을 거예요?
은비 (조금 떨어져서 울먹이며) 엄마! 그렇게 멀리까지 걱정 안 해두 돼! 하루씩만 더 살아 있으면 돼. 엄마 딸 은비, 매일 매일 아침마다 기도하고 있어. 우리 엄마 오늘 하루만 더 살게 해 달라구.
영준 은비야, 아빠가 니 엄마 대신 죽었음 좋겠다. 그렇게 해달라구 기도해줘. 응?
준혁 (차츰 가까워지며, 울먹이면서) 왜들 그러세요. 제발 떠난다는 말, 죽는다는 말 하지 마세요. 무섭다구요. 싫다구요.
희주 준혁아! 엄마 잘못했다! 엄마 절대로 안 떠날게!
준혁 약속했어요?!
희주 그래… 그래….
은비 엄마!
영준 여보!
식구들 (흐느끼고)
효과 풀벌레 소리 B.G
희주 (N) 그렇게 그날 밤이 깊어 가면서, 모두 한데 엉켜서 울고 또 울었다. 그런데 그렇게 살을 함께 부비며, 체온을 나누며 우니까, 아무리 울어도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따뜻하고 만족스러운 사랑의 느낌이 솟아올라 온몸을 감싸 안았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가족이란 어떤 슬픔도, 어떤 미움도 녹여버리는 용광로와 같다는 것을… 며칠 뒤, 나는 정말 평화로운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남편과 은비와 준혁이가 나를 사랑한 것처럼, 새 생명도 사랑해서 기꺼이 한 식구로 맞아들일 것을 믿으며.
- KBS 무대 방영 작품
권영갑|2019년 기독공보 《기독신춘문예》, 《경북일보 문학대전》 소설 당선. 《창조문예》 시 추천. 1996년 KBS 드라마극본 공모, 《스포츠투데이》 신춘문예 드라마 부문 당선 후 드라마작가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