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3일 화요일 맑음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을 먹지 않고 7시 30분에 출발했다.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시간이 너무 늦다. 오늘의 미션은 코비랍에 다녀오고 여건이 맞으면 노라방크 까지 다녀오는 것이다. 코비랍에 가는 교통편은 사순치 다비드 역 뒤편에 있다. 시내에서 22번 버스를 타고 역에서 내렸다. 역 전에서 열리는 아침 과일시장에서 복숭아를 샀다. 기차 역사 뒤편으로 가는 복도 옆에는 가게들이 있다. 오늘 먹을 빵도 샀다. 빵 종류는 생각보다 많고 모두 무척 달다. 값도 저렴하다. 코비랍에 가는 버스 467번은 오전 9시에 출발한다. 오전 11시에도 있고 오후에는 2시, 3시, 5시에 출발한다. 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인원이 차면 출발하기 때문에 빠를 때도 있고 좀 늦을 때도 있단다. 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식수대에서 오늘 먹을 복숭아를 씻었다.
함께 버스에 동승하게 된 이태리 커플에게 노라방크 가는 방법을 물었다. 차량이 정확하지 않단다. 예레반의 아라지마스 에서 타야한단다. 아라지마스는 또 어디인가? 차는 아침이고 첫차라 사람들이 금방 찼다. 약 40분을 달려 코비랍 이라며 우리를 내려주었다. 내린 사람은 다국적이다. 중국인 일본인 이태리, 독일 사람이다. 국적 불명의 사람도 내렸다. 길가에 형성된 마을을 벗어나 벌판이 펼쳐지고 멀리 아라랏 산이 보인다. 멀리 우측에 코비랍이 보인다. 사진에서 보던 풍광이다. 걸어서 약 1km를 간다. 걷기에 좋은 환경이다. 포장도로 양 옆에는 넓은 벌판으로 농사짓고 있는데 들판이 푸르다. 길에는 건초 더미를 잔뜩 실은 낡은 트럭이 고장 나서 세워져 있다.
코비랍이 점점 가까워 온다. 우리가 먼저 만난 곳은 공동묘지다. 묘지의 비석들이 참 다양하다. 큰 돌 판에 자신의 모습을 새긴 것, 얼굴만 새긴 것, 얼굴을 조각한 것 등 죽은 자를 기억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어 눈길을 끈다. 그 옆에는 오래된 무덤으로 표지석만 풀 속에 퍼져있다. 드디어 코비랍 주차장에 도착했다. 관광버스와 개인 승용차는 이곳까지 들어온다.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온 19명의 한국 단체 팀을 만났다. 오늘 여기를 끝으로 귀국하신단다. 무사히 잘 끝나서 다행이다. 이번 여행 중 몇 번 만나게 되어 서로 인사를 하며 소식을 듣게 된 분들이다. 교직에서 퇴임하신 분들과 현직 교원들이라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인사를 나눈 후 코비랍으로 올라갔다.
이 교회는 아르메니아 왕 트리다테스 3세에 의해 13년간 감금되었던 성인 그레고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교회다. 성 그레고리는 아르메니아를 기독교 국으로 만든 성인으로 그의 아버지는 동로마제국이 고용한 자객으로 아르메니아 왕을 죽이고 쫓기다가 유모가 어린 그레고리를 안고 터키로 도망가 성장했다고 한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수도사가 되어 가파도기아로 가서 기독교를 전파하다가, 아버지의 죄 값을 갚으려고 이교도를 믿는 아르메니아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다가 아버지가 죽인 왕의 아들에게 잡혔다. 왕은 아버지를 죽인 죄와 이교도를 전파한 죄로 그가 죽도록 전갈과 뱀이 우글거리는 땅굴로 던진 곳이 코비랍이다. 코비랍은 깊은 감옥, 깊은 장소, 또는 지하 감옥이라는 의미란다.
성 그레고리가 땅굴에 갇혀 있을 때 동로마제국으로부터 33명의 수녀들이 기독교 전파를 위해 이곳으로 왔다. 그 중에 흐립시메라는 아주 아름다운 수녀가 있었다. 흐립시메를 탐내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를 피해 그녀는 32명의 수녀들을 동행했는데 황제는 이곳까지 사람을 보내 이곳 왕에게 그들을 잡아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 왕이 33명의 수녀들을 잡았으나 흐립시메의 미모에 반해 자기 청을 들어주면 모두의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협박했다. 수녀의 좌장인 가이얀 수녀는 우리는 다 죽어도 좋으니 하나님을 배반하지 말라고 흐립시메 수녀에게 말했고, 그녀도 가이얀 수녀의 말을 따라 왕의 협박을 물리치고 모두 순교했다고 한다. 수녀들은 혀를 뽑히고 머리 가죽이 벗겨지는 고문 속에서 죽었고, 흐립시메는 돌로 쳐서 죽였다고 한다. 악행을 저지른 왕은 병이 들었으며 악몽을 꾸다가 땅속에 감금한 그레고리가 생각났다고 한다. 13년 동안이나 전갈 과 뱀이 있는 곳에서 살아있었던 것에 감동을 받았고, 또 그레고리의 기도로 그의 병이 완치되어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왕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성 그레고리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따르는 기독 신자들이 밤마다 몰래 도왔기 때문이란다. 왕은 301년 세계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정했다. 계몽자 그리고트 루사보리치라는 사람이 성 그레고리로 아르메니아 왕 트리다테스 3세 시대의 사람이라고 한다.
여기에도 십자가 석이 있는데 부활을 의미하는 날개를 가진 십자가도 보인다. 교회 안을 둘러본다. 신자들에 의해 밝혀진 촛불의 그을음으로 어둡다. 땅굴로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다. 입구가 딱 한사람만 수직 사다리를 통해 들어간다. 지하1층으로 내려가는 구멍이 두 개 있고 지하 2층으로 내려가는 구멍은 하나밖에 없다. 이곳이 그레고리가 지냈다는 감옥이다. 철 사다리만 없으면 올라올 수 없는 깊이 10m 쯤 되는 직경 5m 도 안 되는 좁은 곳이다. 들어가고 올라가는 것이 스릴 있다.
마당에는 몇 개의 석관묘가 있다. 이제 언덕을 올라 교회 전경을 내려다보고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언덕을 오르는 길은 사람들이 많이 다녀 길이 나 있다. 약간 뜨겁다. 언덕에 서니 먼저 아라랏 산이 보인다. 터키와의 국경지역임을 나타내는 철조망이 길게 들판에 세워져있다. 아라랏 산이 보이지만 그 산은 터키에 있다. 터키 동부에 머물던 10여일 전에 도우베얏짓에서 가까이 보던 산이다. 여기서는 철조망이 가로막혀 있어 갈 수 없는 아득한 산이다. 정치적으로 통제되고 빼앗겨 밟을 수 없는 산이 되어 마음속으로만 그리게 된 정신적인 산이 되어버렸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 성산이고 이곳을 여행하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산이다. 이 산은 현재 터키 동부 아르메니아 고원에 있으며 대 아라랏(5185m)과 소 아라랏(3925m) 이 나란히 있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터키 땅에 있는 이 산을 지금도 자기나라 것처럼 사랑한단다.
소련의 스탈린은 오스만 제국의 보호국 이었던 크림반도의 종주권을 얻는 대신 말썽 많은 아라랏 산을 터키에 양도하였단다. 아르메니아는 억울하게 영토를 잃었다. 지금도 아르메니아는 아라랏 산이 자기의 영토임을 세계에 알리기를 바라고 있다. 터키는 반대로 조용히 묻히기를 바라고 있다. 타키는 아르메니아가 아라랏 산을 자기나라 것처럼 사용하는 것에 대해 항의 하고 있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터키는 달과 별이 터키의 소유라 국기에 사용하는 가? 라고 말하고 있단다. 지형적으로 주변 국가들과 얽히고 있어 복잡한 곳이 이곳이다. 노아가 머물렀다는 아라랏 산은 아르메니아 산이 아니듯, ‘여기에 노아가 정착했다’는 뜻의 ‘낙히체반’도 아르메니아 같지만 엉뚱하게도 아제르바이잔 영토란다. 고립되어 육로로는 갈 수 없다. 나히체반 자치 공화국 수도로 되어있다. 아르메니아 전설에 의하면 BC1500년 경 노아가 세웠다고 한다. 13~19세기 이란의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다가 1828년 러시아로 넘어갔다. 1924년 아제르바이잔 자치공화국이 되었고, 인구는 30만으로 아제르바이잔 사람이 주류이나 소수의 아르메니아 사람과 러시아 사람이 있다. 그리고 이란 남부에는 ‘노아의 마을’이라는 ‘유정겔리’가 있다고 한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이 펼쳐져 있어 갈등 속에 있지만 여기서 내려다보는 눈에는 참 평화로워 보인다.
회교도 국에 둘러싸인 아르메니아가 대단해 보인다. 철조망을 보니 우리 비무장 지대가 생각난다. 자유롭게 왕래하며 살면 좋으련만, 현실을 생각하면 어려워 보인다. 무덤을 보면서 얼마나 죽고 죽으면, 무덤이 넓어지고 넓어지면 소원이 이루어질까? 아라랏 산꼭대기의 구름이 연기처럼 흘러간다. 이제 내려간다. 주차장으로 갔다. 나갈 차가 없다. 예레반으로 돌아가지 않고 큰 길로 나가 노라방크로 가는 차를 잡아보기로 했다. 예레반으로 갔다가 다시 오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다. 택시를 잡고 흥정해 보니 너무 비싸다. 큰 길, 우리를 버스에서 내려주었던 11번 도로까지만 타고 가기로 했다. 노라방크 행 버스는 모두 이 길을 거쳐 간다. 택시 기사는 우리를 노라방크 까지 태워다 주지 못해 안달이 났다. 기회는 지금 밖에 없어 비싼 경비를 주고 가는 것도 맞겠지만 맘이 내키질 않아 그냥 우리가 해보기로 했다. 일단 큰 길에서 내렸다(택시비 1300드람=3900원)
큰 길 삼거리 코너에는 천막을 치고 수박과 토마토 등을 팔고 있는 젊은이와 영감님이 있다. 노라방크 라는 단어를 얘기하니 기다리라고 한다. 자기가 알려준다고 한다. 10여분을 기다리니 버스가 온다. 멀리서 오는 차를 알려준다. 직선 도로라 차가 빨리 달린다. 손을 들고 차를 세우니 그냥 가려다가 세워준다. 하늘색 현대 마크의 버스다. 01번을 달고 있다. 노라방크를 외치니 태워준다. 드디어 차를 탔다는 성공감에 기분이 좋아졌다. 멀리 이국땅에서 히치하이킹으로 버스를 잡아타고 간다는 것이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무식이 용감하다. 맘먹고 포기하지 않으면 길이 열린다. 하나님이 보내 주신 차다. 어디까지 가는 버스인지도 모른다. 거칠고 큰 산들, 건조하여 나무도 없는 산을 넘어간다. 한참을 생각하며 가는데 차가 갑자기 멈추더니 우리보고 내리란다. 노라방크 란다.
아내와 둘만 서둘러 내렸다. 차는 도망치듯 가버린다. 시계를 보니 약 1시간 20분을 달려온 것 같다. 76km 거리다. 주변에는 좁지만 양이 제법 많은 강물이 흐른다. 초록색 물이다. 작은 다리를 건너서 식당이 하나 있고 그 앞으로 길이 있다. 이 길로 약 8km를 가야 노라방크 가 있다. 차량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도 보이지 않고 그저 모두가 멈추었고 강물만 흐른다. 조용하다. 뜨겁다. 택시도 없다. 버스 정류장 같이 생긴 곳에 앉아서 연구를 하고 있는데 영감님 한 분이 나타나더니 식당에 가서 차를 대절해서 가면 된다고 알려준다. 머뭇거리니까 영감님이 우리를 데리고 식당으로 안내해 준다. 주년 남자 3명이 열심히 쇠꼬지에 고기를 굽고 있다. 우리를 노라방크에 데려다 준다고 한 분이 나온다. 요금은 왕복 3천 드람(약 만원)에 약속을 하고 차를 태워준다. 개인 차량이다. 의례 이렇게 개인 여행자가 오면 영업을 하는 것 같다.
드디어 노라방크로 향하게 되었다. 시간이 많으면 걷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계곡 길은 조용하고 멋지다. 절벽 돌산이 양 옆에 늘어서 있다. 노라방크 계곡이다. 계곡의 절벽 색깔도 검은 색에서 붉은 색으로 바뀌어 간다. 드디어 오라방크 주차장에 도착했다. 우선 오길 잘 했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주변 경관이 멋지다. 교회와 어우러진 주변은 온통 붉은 바위, 암벽 산이 둥글게 교회를 감싸고 있어 신비롭다. 이곳에 3개의 교회가 지어졌다. 가장 먼저 4~5세기 경에 지어진 세인트 카라펫 교회는 지금은 벽만 일부 남아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교회는 아스트바찻친 교회와 스테파노스 교회다.
성 아스트바찻친 교회는 고유명사가 아닌 성모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여러 곳에 같은 이름 교회가 많다고 한다. 이 교회는 모믹 이라는 당시 유명한 건축가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 그 모믹의 무덤이 바로 이 교회 안에 있다. 교회의 벽에 장식된 조각과 멋진 종탑 그리고 노라방크 안에 있는 많은 돌판 십자가 조각들도 모믹의 작품이란다. 특히 이곳의 돌 십자가는 아르메니아 카치카르(돌 십자가)중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란다.
성 스테파노스 교회가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1321년 아마도 모믹에 의해 다시 지어졌을 것이라는 설명과 현재의 돔을 1948년에서 1949년에 걸쳐 보수되어 지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옛날에 노라방크에 예수님의 피 묻은 십자가 한 조각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이것을 찾아내어 죽은 아이를 살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 조각은 에키미아진으로 옮겨 갔단다. 성 스테파노스 교회의 입구인 Gavite 에는 평장으로 무덤들이 있다. 가비트는 일반인들의 출입처로 성소의 입구 전실이다. 안에 들어가면 성 스테파노스와 성 그레고리 성소가 있다. 십자가 모양의 무늬석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어 카메라 후레쉬 세례를 받고 있다. 나무 문 모양도 참 섬세하다.
다시 아스트바찻친 교회로 가서 2층으로 올라간다. 계단이 밖으로 나있어 위험하다. 벽에는 십자가 문양도 있지만 유대교의 다윗별 문양도 부조되어있다. 주변을 둘러본다. 십자가석(카치카르)이 줄지어 묘비 석 같이 세워져 있고 코스모스 꽃도 있다. 요나서에 나오는 박 덩굴 식물이 여기에 줄지어 심어져 있다. 우리나라 팔손이 식물 같다. 2013년 교회 달력에 요나의 박 덩굴이라고 소개되어있다. 아주까리(피마자) 비슷한데 줄기가 붉다. 히브리 원어가 ‘키카욘’이므로 아주가리 피마자로 번역되는 것이 옳단다.
병풍처럼 둘러싼 붉은 바위 절벽 산들이 너무 인상적이다. 노라방크는 교회와 주변 환경이 멋있다. 다시 차를 타고 나온다. 꼭 걸어보고 싶은 계곡 길이다. 식당에 내린 우리는 수돗물로 세수를 하고 씻어간 복숭아를 먹었다. 정말 꿀맛이다. 식당에는 단체 손님들이 북적댄다. 여행사와 연결이 되어 있는 식당인가보다. 야외에 마련된 긴 식탁에 음식과 사람이 가득하다. 이제 에레반으로 가야한다. 차가 없어 할 수 없이 지나가는 차를 세워본다. 아레니 반대 방향, 예그나드자르 방향으로 20여 m 걸어가니 길가에 공터가 있고 작은 가게가 있다. 이곳 가로수 그늘에 서서 지나가는 차를 잡아본다. 차가 자주 오면 기회도 많으련만 정말 차가 가뭄에 콩 나듯 가끔 한 대 지나간다. 지나가는 차도 워낙 속도를 내고 달려가니 여유가 없다. 미니버스 한 대가 지나간다. 손을 들고 세워 예레반을 외치니 가려다가 세워준다. 죽으라고 달려가 얼른 올라탔다. 감사, 감사.
이렇게 해서 오늘의 숙제를 마치고 간다. 아레니 라는 마을도 그냥 통과해 간다. 아레니 마을은 포도주 공장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포도밭과 와이너리로 알려진 마을이다. Areni-1 이라는 이곳의 동굴에서 6천 년 전 포도주 양조에 쓰인 유물들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조지아는 8천 년 전에 포도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누가 원조인지 모르겠다. 이곳은 포도도 유명하지만 살구도 엄청 많다. 우리가 탄 미니버스에는 군인청년들과 아가씨들이 탔다. 예레반으로 달려가는 길에 모두 잠들어버렸다. 눈을 떠보니 예레반 시내다. 아직도 해가 질려면 멀었다. 이제 나머지 예레반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오늘이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이다.
예레반 시내 구경은 성 그레고리 루사보리치 성당에서 시작한다. 성 그레고리, 이 이름은 주변에서 많이 들었다. 예레반의 최초의 참된 교회로 아르메니아 기독교 공인 1700년을 기념하기위해 만들어져 2001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 교회는 규모가 웅장하고 화려하고 깔끔하다. 들어가기 전 입구 양 옆에는 나무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교회를 등지고 돌아서면 오른쪽에 정원이 있는데 여기에 말 두필에 올라탄 칼을 든 용감한 전사가 있다. Zoravar Andranik 라는 영웅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아르메니아의 독립전쟁과 투르크 및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을 이끈 장군이다. 아르메니아의 영웅이라고 한다. 다른 권력자들과의 의견충돌로 말년에는 유럽과 미국에서 보내고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했다. 그러나 시신은 이곳 예레반에 묻혔다고 한다. 지하철 이름도 그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그를 기리기 위해 동상도 세운 것이다.
교회 정면에는 지하철 역 건물과 시장이 보인다. 교회 주변 언덕에는 아르메니아의 현재 서민들의 삶이 보인다. 황량하고 낙후된 가옥들이 이어진다. 경제적 상황이 힘든 나라임을 보여준다. 교회 내부는 부활을 상징하는 십자가 모양이 3개, 정면에 금빛으로 보이고 장의자가 길게 설치되어 있어 앉아서 구경한다. 반원형의 홀은 깔끔하고 높다. 석재로 만들어진 제단과 기둥 등이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다. 성당 뒤편으로 걸어가는데 공원이 이어진다. 흉물스러운 소련식 아파트는 보이지 않는다. 공원으로 계속 이어지는데 야외 카페가 많다.
또 말 탄 동상을 만났다. 양손을 벌리고 칼을 오른손에 들었는데 하늘로 날아갈 듯, 좀 오버해서 만들어 놓은 동상이다. Vardun Mamikonyan, 영웅으로 1975년에 세워졌다. 451년에 조로아스터교의 페르시안 30만 명에 대항하여 기독교 아르메니아 군사 6만 명으로 대항해 싸운 영웅이다. 식당이 보인다. 내일 사용할 돈을 남겨놓고 모두 먹어보기로 했다. 좀 고급스러운 식당에 들어갔다. 그림이 그려져 있고 음식형태가 사진으로 걸려있어 주문하기 쉬웠다. 밥도 시키고, 꼬치고기, 야채샐러드, 계란 노른자 2개가 선명한 빵도 주문했다. 계란 노른자 빵은 보기는 예쁜데 빵 맛이 별로 없었다. 실컷 먹으니 좀 살 것 같다. 걸어 갈수록 정원도 고급스러워지고 사람도 많아진다. 길 건너에는 대학 건물도 보인다.
시내 중심가에 들어서는 것 같다. 1000드람 지폐에 나오는 예지쉬카렌츠(시인)의 기념비도 보인다. 예레반 대학 건물 앞에 두 명의 동상이 책을 들고 서 있다. 어린이 호수 공원도 만난다. 둥그렇게 이어지는 공원을 거닐어보니 이 도시를 설계한 사람이 대단해 보인다.
이제 마지막 목적지 마텐다다란으로 향했다. 마텐다다란 박물관은 무게가 느껴진다. 중세 고대문서 보관소로 이곳은 국보급이라 실내촬영은 금지되어있다. 건물 앞에 있는 동상은 한국의 세종대왕 같은 분으로 성 메스롭 마쉬토츠(361~440)이다. 아르메니아 알파벳 36개를 만든 분이다.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은 집현전 학자 같은 사람으로 스승의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란다. 오른쪽에 칼을 들고 있는 독수리 형상이 있다. 독수리는 지혜를 의미하며 칼은 힘을 의미하는데 자신의 문자를 갖지 못하면 지혜도 힘도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남의 문자를 빌려 쓰면 그 나라에 예속된다고 한다. 아르메니아도 문자를 만들고 나서 획기적인 문화발전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세계 최초로 하나님 아래 남녀가 평등하다는 법을 만들었다는 사람의 그림도 있다. 지구를 들고있는 사람은 갈릴레이 보다 먼저 지동설을 주장한 사람이란다. 자기들은 일찍이 8세기 초부터 종이르 사용했으며 종이는 10세기 경에 유럽에 전해졌다고 한다. 마시토즈는 그리스 책, 조로아스터교의 책 뿐 만 아니라 성경을 번역했기에 왕보다 더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한다. 13세기에 남녀평등법전, 7세기에 지구는 둥글다고 주장한 책, 예루살렘이 세계의 중심이 되는 지도, 18세기 동의보감 같은 의료서에는 3000개의 약초가 기록되어있다. 의학, 문학에 관한 책, 1500년 경에 양피지로 만든 책, 교회 달력, 12000권의 아르메니아 고서, 3000권의 미국 책, 일본 중국 인도 히브리어 책들도 있단다.
책 색깔도 흰색은 계란에서, 노란색은 금에서, 검은색은 호두에서, 먹물의 재료는 나무 열매에서 채취하여 사용하였는데 벌레에서도 색깔과 약을 얻어냈다고 한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부활까지의 내용을 기록한 책도 있다. 책보다는 그림과 글이 더 아름다워 보인다. 건물안 입구의 스테인글라스엔 아르메니와 페르시아 전쟁의 그림이 있으며 계단에는 도자기들이 전시, 2층이 고문서 전시관이다. 건물 외벽에는 조각상들이 있다. 아르메니아 알파벳은 시리아어와 페르시아 글자를 조합해서 만들어졌는데 성경필사본 중에서 아르메니아 역본은 때때로 ‘역본들의 여왕’ 이라고 불린다.
이제는 다 돌아본 것 같다. 해가 진다. 오페라 하우스를 돌아보며 야외 그림전시장, 4명의 동상들 사이에서 함께 사진을 찍는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 들러 복숭아 주스를 하나 샀다.
8월 13일 경비 -- 복숭아, 빵 550, 버스비 5900, 택시 4200, 화장실 100,
저녁식사 5230, 주스,물 680, 아이스크림 350
계 17010*3=51030원.
누계 2,04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