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첫 연재에 이어 5월 호 시민 시대에 게재한 생활수필(컬럼)을 공유합니다.
제가 사는 산청을 비롯한 경남, 부산, 울산의 지식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의 깨어 있는 시민 의식으로
얼른 '살만한 세상'이 오면 좋겠습니다.
시골 작가의 총선 평
이인규/소설가
그럴 줄 알았다.
얼치기, 불공정하고 무도한 권력 집단의 수장이 대권을 잡더니 2년도 채 안 되어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에 분노한 다수의 국민은 이번 총선에서 현 대통령과 여당에 반기를 들었다. 어디 한두 번 한 솜씨던가. 역사적으로 우리 국민은 절대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은 촛불이든, 몽둥이든 가리지 않고 제대로 심판하지 않았던가. 이번 총선은 예상한 대로였다. 서울 및 수도권을 비롯한 지역 민심은 익히 언론에서 듣고 보아서 그러느니 하였다. 비록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정권 심판이라는 큰바람은 없었지만, 변화의 바람에는 이미 전조가 있었다.
시골 작가의 일상은 무척 단조롭다. 아침에 일어나서 글 몇 줄 쓰고 오후엔 텃밭을 가꾸거나 산책한 뒤, 읍내 목욕탕에 가는 순서다. 총선을 앞둔 어느 날, 목욕을 끝낸 후 탈의실에 나오니 TV에 현 대통령의 얼굴이 비쳤다. 그러자 근처에서 딸기 농사짓던 어떤 이가 “테레비 꺼라. 저따위가 어찌 한 나라의 지도자란 말시. 민생은커녕, 제 마누라가 무서워서 야당이 내놓은 특검을 모조리 거부하는 저 인간을 뽑을 게 진짜 부끄럽다.” 하며 소리 질렀다. 나로선 매우 충격이었다. 더 놀라운 건 그는 현 여당의 권리당원이었고, 더 놀란 건 주위에서 그의 말에 일부 동조했다는 사실이었다. 이곳은 TK 못지않은 보수 지역이고 여당이 막대기만 꼽아도 당선되는 곳인데 말이다.
문득 12년 전, 청운의 꿈을 안고 시골로 귀촌할 때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서울 용산, 국방부 직할 부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미 나 몰래 산골로 이사해버린 아내와 어린아이들 때문에 그해 9월에 명퇴를 신청하였다. 당시 정년이 10년이나 남았기에 직장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도시락을 싸 들고 나의 이른 퇴직을 말리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나의 소망이 관철되어 나는 고향인 부산 대신, 가족이 있는 산골로 들어와 버렸다. 나를 알던 지인들은 내가 ‘진정한 자유’를 찾아 자연을 택하였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때 낯선 서울이란 도시와 쳇바퀴처럼 돌아가던 직장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무엇보다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던 막내딸이 너무 보고 싶어서였다. 물론 나의 이런 황당한 결정에 친가와 처가는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했다.
어쨌든 그해 12월 중순께, 모처럼 서울에서 나를 보러 내려온 형과 함께 대선 개표상황을 보기 위해 읍내 중국집에 갔다. 소주 두어 병과 탕수육을 시킨 우리는 느긋하게 TV에서 나오는 개표상황을 보고 있었는데,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다. 같은 공간에 있던 주민 대다수가 야권후보더러 “저런 빨갱이 새끼가 어디 대통령에 나오나!” 하며 분개하는 게 아닌가. 거기에다 주민들은 아까부터 낯선 외지인 둘이 노무현이 어떻고, 진보가 어떻니 하던 소리를 들었기에 우리에게 따가운 눈총까지 주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형과 나는 시켜 둔 소주와 음식을 채 먹지도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그 집은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집권한 보수의 그 여자 대통령은 탄핵으로 쫓겨나고 당시 주민들이 빨갱이란 부르던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데, 당시 그는 이 지역에서 22% 정도를 받았다. 그러니 그가 임기를 마칠 때까지 이 지역은 정치적으로 큰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작년에 이 지역에서 거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현 대통령의 실책이 반복되자, 지역 민심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바이든, 날리면’부터 2년 동안 총 8건의 거부권을 행사한 그가 양곡관리법 개정안마저 거부하자, 지역의 양식 있는 농민은 돌아섰다. 지역 곳곳에 현수막이 붙기 시작했고, 각종 지역 커뮤니터에 과연 이 자가 보수가 맞나, 하는 말이 돌아다녔다. 결정적으로 해병대 채상병 사건이 터지고 김건희 특검이 거부되면서부터 이젠 여당의 현 당원마저 동요한 것이다.
이번 선거는 우리 지역은 아니지만, 전국적으로 야당이 절대적으로 당선되면서 현 정부와 집권 여당에 혼쭐을 낸 거 같아 다행이다. 국민 50~ 60%가 이번 선거만큼은 “투표 마렵다”하고 했으니 말이다. 모쪼록 당선자들은 앞으로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 될 것이고 여·야 낙선자들은 다음 선거를 대비해 자기반성과 당선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면 될 것이다. 단지 시골 작가의 바람이 있다면 얼른 이 정권이 지나가고 다음 정부를 구성할 때 시대를 앞서갔던 고. 노무현 대통령이 주장한 ‘연립정부’를 구성했으면 한다. 그래야만 현재 진보와 보수 등 둘로 나누어 갈등의 골이 깊어진 민심을 한군데로 모을 수 있고, 나 같은 글쟁이가 정치적 피로감 없이 이런 산골에서 글만 써도 먹고살 수 있는 세상이 될 테니까. 하긴, 그렇다고 하더라도 3년이 너무 길기는 하다.
이인규
- 경부울 문화연대 스토리 위원장
- 2008년 경남일보 신춘문예
- 저서 : 장편소설 '사랑과 절망의 이중주' 등 다수
e-mail : leeingu6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