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의 천재 손미라의 계획은 내가 생각해도 치밀하고 잘 짜여진 작전표였다. 쓰루바시의 한국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그 일당에게 치명타를 주는 사이에 손미라는 재산을 정당하게 처분한 뒤에 우리나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암흑가에서 손미라의 행적을 추적할 때쯤이면 나도 돌아간 뒤일 것이다. 마약 밀매 현장에는 두목이 결코 나타나지 않는 게 상식이었다. 잔챙이의 행동을 주시할 필요는 없었다. 일본 소녀들을 밀매하는 현장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왕초 녀석을 어떻게 끌어내죠?" "어떻게요?" "밀매 현장을 덮치면 연락병이 재빨리 보고를 할 거고 그러면 당연히 수습하기 위해 두목이 나서게 되죠. 물량을 확보했기 때문에 쉽게 만나서 흥정을 할 수 있죠." "그러나 한국인을 괴롭히는 부분을 해결할 수 없잖아요?" "그것도 방법이 있어요. 경찰에선 지금 소탕령이 떨어져 증거만 잡히면 그들을 모두 잡아넣으려고 별러요. 총찬 씨가 일을 처리한 뒤에 경찰이 개입하도록 하면 되잖아요. 총찬 씨는 감쪽같이 뒤에 숨는 거예요." "그렇다면 텔레비전 그 기자 녀석은 어떻게 됩니까?" "빤하죠. 한국인이 일본 소녀를 구했는데 여자들이 일본 내에서 어떤 일을 하며 한국인의 폭력 행위와 범죄 발생률과 배경, 일본인을 괴롭히는 방법과 일본 암흑가 조직이 한국인을 괴롭힐 수밖에 없는 이유 등을 늘어놓겠죠." "도대체 상식을 벗어난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속이 빤히 보이는 그런 행위가 통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일본인 가운데엔 아직도 국수주의자가 많아요. 아직도 옛날처럼 한국을 통치하기 바라고 영토 확장이란 말만 나오면 제일 먼저 한국을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요. TV방송국의 고바야시(小林 正)국장 같은 사람은 알려진 사람예요. 그러니까 그 부하들도 그 지경이죠. 물론 안 그런 "한국 사람에게 제일 악독한 녀석은 어떤 놈입니까?" "도오야마(遠山)라고, 독종이죠. 고바야시의 동경대 후배로 TV방송국에서 가장 똘똘하다는 평도 듣고 진급도 제일 빠르죠. 우리가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도오야마 어머니가 한국인이란 얘기도 있어요. 지금 어머니는 물론 일본 여자예요. 친어머니가 일찍 죽었는데...... 아무래도 정통 일본인이라는 걸 강조하려는 몸부림이 아닐지 모르겠어요." "그럴 수도 있죠." 손미라와 나는 밤 이슥토록 쓰루바시의 한국인을 괴롭히는 암흑가의 내막과 내가 돌아간 뒤에라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도록 도오야마 프로듀서를 잡을 계획도 세웠다. 인신매매와 마약 밀매의 현장에 뛰어들기 위해 여러 날을 기다려야만 했다. 내 초조한 마음을 아는 듯 밀매 현장은 그렇게 쉽사리 드러내지 않았다. 병규와 손미라가 뛰어다니는 사이에 나는 내 손에 맞는 표창을 만들어 두었다. 파리에서 다혜가 돌아오는 것보다 내가 먼저 서울에 가려면 이 일을 서둘러야 할 판이었다. 나는 여러 번 도이미쓰로(土居支郞) 두목을 습격할까 망설였다. 미쓰로 두목은 기타노신지 한복판에 빌딩을 소유하고 그곳을 본거지로 해서 상권을 쥐고 있는 부자 녀석이었다. 다혜는 어떻게 변했을까? 외국물 좀 먹었다고 혀 꼬부라지는 그런 소갈머리 없는 계집애는 아니었다. 그녀와 헤어져 있던 시간은 참으로 괴로운 시간이었다. 나 같은 사내를 사위로 맞을 수 없다는 집안의 분위기를 이제는 조금씩 이해할 것도 같았다. 햇살이 몹시 따가운 어느날이었다. 수영장에서 돌아오자 병규 녀석의 급한 전갈이 도착해 있었다. 오사카에서는 혼자 일을 추스릴만큼 발이 넓은 녀석이었다. 나를 손미라에게 맡기다시피 하고는 저대로 돌아다니며 정보를 캐곤 했다. "오늘 밤예요." 손미라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 약도를 더 정확히 그릴 수 있겠죠?" "그럼요." 규모와 도주, 수송 루트 가능 지역을 도면 위에 상세하게 그려 나갔다. "사업체는 정리되겠죠?" "조금 손해는 보겠지만 완벽하게 넘길 수 있게 됐어요. 금융기관에서 처리하는 거니까 안심해도 돼요." "다나카는 만났겠죠?" "얘기가 다 끝났어요. 그에게도 소망이 있다면 우리나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땅에 묻히는 것이 소망이죠." "이번 기회에 정리하고 돌아가자고 그러지 그랬어요." "정리할 게 너무 많아요." "그렇긴 하겠지만." "아마 몇 년 걸릴지도 몰라요. 데리고 있던 사람을 다 뒷바라지 해 줄 수 있을 우리는 밀매 현장 근처로 일찌감치 자리를 옮겼다. 대형 창고와 배 턱이 마주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지역 여건이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도주로를 차단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모터보트 서너 대를 준비해 두고 대형트럭으로 길을 막아 버리면 우선은 되겠네요. 그리고 일이 끝나는대로 난 여길 떠나겠어요." "모터보트로 가시게요?" "보트로 부산이나 인천까지 갈 순 없잖아요?" "그럼 바로 한국으로 가실 참예요?" "날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여잔가 보죠?" "아무렇게나 생각하십쇼." 달려갈 수 있는 여자라면 어떤 여잘까요?" 손미라의 눈빛은 어쩐지 애잔해 보였다. 바닷가가 잘 내려다보이는 창가에서 망원경으로 주위를 점검해 보았지만 아무런 변화나 움직임이 없었다. 야간에도 사용할 수 있는 적외선 망원경을 준비할 정도로 손미라는 치밀한 여자였다. 선창 옆에 몇 대의 모터보트가 들어와 배 턱에 기대어 있는 모습도 보였고 냉동차처럼 생긴 대형트럭이 공터에서 대기하는 모습도 보였다. 손미라는 전화기 한 대로 모든 지시를 신속하게 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다른 지역과 달라 어둠을 빨리 빨아들였다. 넓은 공터와 음산한 바닷바람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다 위에 한껏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병규가 길목을 지키고 있었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다. 망원경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손미라가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창고 문이 열렸어요." "병규 이녀석은 왜 연락이 없죠?" "모르겠어요." "무슨 사고가 난 거 아닐까요?" "조금 더 기다려 보죠." 밤이 깊어지자 초조해지는 걸 감출 수가 없었다. 내겐 아무래도 낯선 땅이었다. 편하게 말이 통하지도 않았고 남의 도움 없이는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간단한 인사말이나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은 되었지만 의사 소통엔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 손미라의 재빠른 모습을 보며 내가 이 여자의 술수에 말려들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출발했대요."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예정시간보다 늦었어요. 이런 밀매엔 시간이 생명과 같은데 말예요."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이렇게 말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내려갑시다." 창고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나는 건물을 내려와 지름길로 접근해 갔다. 손미라는 자동차로 배 턱을 돌아 창고 뒤켠으로 이동했다. 바람이 옷깃을 펄럭이도록 불어왔다. 후텁지근한 밤바람이었다. 집 떠난 지 여러 별로 달갑지 않은 것들이었다. 창고 옆엔 장정 두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모자를 눌러쓴 채 운전을 했다. 뭐라고 물었다. 나는 대꾸 없이 손을 들어보였다. 한 패거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창고 문이 열렸다. 대형트럭 한 대와 하얀 승용차 두 대가 입구 쪽에 세워져 있었다. 작업복 차림의 창고지기가 손짓을 했다. 나는 다짜고짜 대형트럭의 뒷문을 열었다. 얼핏 보아도 스무 명이 넘는 계집애들이 빈사상태처럼 흐트러진 채 누워 있었다. 마약이나 수면제를 투여해 의식이 바르지 못하게 해 놓은 것 같았다. 문을 쳐닫고 돌아서자 승용차 옆에 기대섰던 사내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펼쳐보였다. 두꺼운 비닐봉지와 포장지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나는 들었던 가방을 바닥에 놓고 작은 비닐봉지 한 개를 열어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혀 끝에 살짝 가루를 대보기도 했다. 나를 쳐다보는 여러 사람의 표정에 의심의 빛이 역력해졌다. 차 안에 그때까지 말없이 앉아 있던 회색 싱글 차림의 신사가 내가 내려놓은 가방을 가져오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가방을 들고 그쪽으로 갔다. 사내가 가방을 열었다. 나는 그 순간 일그러지는 사내의 턱을 가격했다. 내가 가져온 가방 속엔 신문지 뿐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어서 미처 무기를 빼지 못한 사내들을 향해 나는 표창을 날렸다. 나자빠진 사내들과 미처 피하지 못한 채 멍청하게 서 있는 사내들은 내 올려진 손을 쳐다보녀 공포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창고 문이 다시 열리고 미니버스 한 대와 황병규 일행이 탄 차가 쏜살같이 들이닥쳤다. 손 빠른 애들이어서 금방 트럭 안에 갇혀 있던 계집애들을 미니버스에 옮겨 실었다. 사내들을 오라지어 승용차에 분승시킨 병규가 손을 털며 다가왔다. "연락하게 할까요?" "경찰보다 먼저 도착하게 해라." "알았습니다." 병규는 회색 싱글 차림의 사내를 끌고 창고 안의 전화기가 있는 책상 앞으로 갔다. 다이얼을 돌리고 난 사내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꼭 시키는대로 하라고 일러라. 무기를 가지고 오면 경찰을 동시에 부르겠다고 해라. 빈 몸으로 몸 값과 히로뽕 값을 가지고 오라고 해라. 미쓰로 두목이 직집 오지 않으면 흥정을 하지 않겠다고 해." "방송국 애들은요?" "손미라가 조치할 거다." 사내가 미쓰로 두목과 통화를 끝내고 돌아앉았다. "미쓰로 두목은 약속을 꼭 지킨답니다. 그러니 부하들을 풀어달랍니다." "흥정이 끝나면 풀어 준다고 해라." "어느 단체 소속이냐고 묻는데요?" "벼락대신이라고 해라." "처음 듣는답니다." "지옥에서 왔으니까 처음 듣겠지." "한번만 더 나불거리면 주둥아리를 못 쓰게 만들 테니까 얌전히 앉아 있으라고 해. 그자식 되게 말 많네." 병규가 내 얘기를 전하자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깊은 생각을 하는 눈치였다. "혹시 한국에서 온 벼락대신이냐고 묻는데요? 이자식들한테까지 소문이 난 모양인데요. 형님 인상을 보니 그런 것 같대요." "어떻게 소문 들었느냐고 물어라." 병규가 한참 동안 사내와 얘기를 주고받더니 이렇게 말했다. "후쿠오카나 벳푸에서 그런 인물이 돌아다녔다는 소문을 들었답니다. 나가시마 두목이 현상금 천만 엔 걸었을 때 이쪽에서 움직이려고 했었답니다. 이곳 야마구치 이곳 기타(北)파에서 정식으로 초청장을 보낼 거라는 소문도 있답니다. 기타 파엔 중국정통파 무예가들을 고용하고 있어서 임자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차라리 이곳에서 한밑천 잡으려면 새로운 요도가와 파와 손 잡는 게 낫답니다. 기타노신지를 주름잡고 있어서 살림도 넉넉하다는 자랑예요. 형님같으면 제일 높은 보수를 받을 수 있답니다. 연봉 오억 엔에 특별수당까지 붙을 수 있답니다. 야마구치 조직도 요도가와는 건들지 않을 거랍니다." 병규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일본 내의 암흑가 전쟁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기타 파가 중국무예가를 고용했다거나 대화단이 폭파전문가를 규합한다거나 각 인신매매에 열을 올리는 것은 자금확보를 통해 암흑가의 자리다툼을 유리하게 하려는 조짐으로 보였다. 한국에서 자취를 감춘 유기하 같은 고수가 일본의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것도 다 그런 맥락인 것 같았다. 암흑가의 전쟁은 인물과 자금동원에서 판가름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인물과 자금을 한없이 써도 일단 암흑가를 지배하게 되면 단시일 안에 본전을 찾을 뿐 아니라 암흑가의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굉장한 이권을 얻을 수 있었다. "임마, 내가 고작 연봉 오억 엔짜리밖에 안 되냐?" 구둣발로 사내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뒹굴었다. 병규가 "형님, 일본에서 오억 엔짜리면 거의 최고 대접예요. 이녀석을 살려둬야 말이 통할 거 아녜요." "떡 줄 놈은 생각지도 않는데, 이자식들이 저희들 맘대로 값 정하고 흥정하는 게 보기 싫어서 그런다. 세상에 무슨 짓을 못해서 일본놈 앞잡이를 하란 말이냐." "이놈들이 한국인을 그만큼이라도 인정해 주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일본놈들은 코 큰 놈들 이외엔 인정 않는 버르장머리를 가졌거든요." 애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창고의 뒷문을 열어 승용차가 빠져나갈 만큼만 빼고 나머지는 길목을 막기도 했고 대형트럭과 그 일당이 타고 온 차량의 바퀴 버리기도 했다. 천장의 대들보에 최루가스통을 매달아 급박한 상황에 터뜨려 버릴 계획도 세워 놓았다. "난 어떤 땐 이렇게 못 배우고 우락부락하지만 의리 있는 새끼들이 차라리 이뻐보일 때가 있다." "나도 그래요. 뭣 좀 배웠다고 떠드는 자식들, 뒤 끝이 항상 개판이거든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야. 혼자만 애국자고 민중의 편이고 가난한 이들의 벗이며 옳은 소리 혼자 다 지껄여 놓고 결국은 훼절해서 잘 처먹고 사는 자식들 투성이니까. 목청 높여 떠는 놈들은 죄다 먹고 살기 바빠 변절한 치들 투성인데 그래도 기 안 죽고 꿋꿋하게 살던 말없는 사람들은 "목청 큰 놈치고 변변한 놈 없는 법 아녜요?" 사내로 태어나서 의리라도 지니고 있다가 죽는 녀석들이 차라리 고와보이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 같았다. "옵니다." 병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각자 제 위치로 가라." 검정빛이 유난히 빛나는 신형 벤츠와 연녹색의 대형승용차가 공터를 가로질러 창고 쪽으로 달려왔다. 자동차가 천천히 들어섰다. 단정한 차림의 신사가 내렸다. "미쓰로 두목이 맞답니다." 자동차에서 내린 사내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미쓰로 두목과 연녹색 간편한 차림새였다. "누가 여기 책임자냐고 물어요." "알려 주고, 미쓰로 두목만 한복판으로 나서라고 해라." 병규가 내 말을 전하자 미쓰로 두목이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사내는 보통 일본 녀석들보다 한 뼘 가량이나 훤칠한 키에 인중이 길고 어깨가 벌어진 기형인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눈에도 힘깨나 써보였다. "먼저 누군지 밝힌 뒤에 흥정을 하잡니다." "한국에서 온 벼락대신이라고 소개할 수밖에 없잖느냐." "어떤 조건의 흥정이냐는 겁니다." "우리가 짠대로 얘길 해라." 설명을 시작했다. 병규의 설명을 듣다가 미쓰로 두목은 가끔 질문을 던졌다. "고의적으로 한국인을 괴롭힌 것도 아니고 손미라가 약혼자인 줄은 처음 알았답니다." 병규가 설명하며 싱긋 웃었다. 일부러 그랬겠지만 나보다 목이 하나씩 더 큰 사내들이 시멘트 바닥에 무릎 꿇은 채 미쓰로 두목의 명령만 기다리는 표정이었다. 병규가 눈짓으로 신호가 왔다는 걸 알려 주었다. "너희들은 한국인들을 괴롭히는 것도 부족해서 지금 일본 여고생들을 무더기로 팔아먹으려고 했다. 더구나 텔레비전 방송국의 고바야시 국장과 도오야마 프로듀서가 지금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어. 수단으로 한국인이 일본 여고생을 밀매하려고 했다는 식으로 조작할 준비가 완료된 걸로 안다. 내 말이 틀렸나?" 병규가 내 얘기를 전하자 미쓰로가 웃었다. "결코 그런 일은 없답니다." "그렇다면 지금 저 건물 위에서 망원렌즈로 여기를 촬영하고 있는 놈들은 누구냐?" "모른답니다." "좋다. 고바야시 국장의 멱살을 잡아채라고 해라." 병규가 들고 있던 무전기를 두드렸다. 저쪽에서도 신호가 왔다. 미쓰로는 여전히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난 능글맞게 웃는 놈을 보면 이빨을 줘라." 병규가 그대로 전한 모양이었다. 미쓰로가 입을 앙다물었다. 표정도 몹시 굳어졌다. "어금니를 맞무는 놈도 나는 그냥 두는 성미가 아니라고 해라." "이러지 말고 제발 말로 풀어나가잡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얘길 해 달랍니다. 어떤 조건이든 들어 줄 만한 선에서 타협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한답니다." "이새끼들, 희망을 더럽게 좋아하는 놈들이구나. 그렇다면 먼저 흥정해 보라고 해라." 미쓰로는 잠깐 생각하는 눈치더니 이내 좔좔 지껄였다. "이 일대는 이미 요도가와의 충성스런 거인들은 수류탄을 품고 있어서 여차하면 전부 폭사하게 된답니다. 또 오사카의 암흑가 조직 모두가 지금 한국에서 온 벼락대신을 혈안이 되어 찾고 있기 때문에 요도가와 파와 적절한 선에서 흥정하지 않으면 어떤 자객단의 손에 당할지 모른답니다." "겁을 준다고 해서 손 들 놈이 아니라는 건 네놈들도 알았지. 흥정부터 하라고 해라." 나는 미쓰로의 행동과 미쓰로의 졸개들 표정을 면밀히 관찰하며 미쓰로가 먼저 흥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애들 부탁만 들어 주면 약혼자인 손미라의 재산이나 그의 사업을 결코 방해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계 여고생들의쓰루바시의 한국인을 괴롭히는 조무래기들이나 한국인 남학생들에게 마약 밀매를 시키고 폭력하수인으로 이용하던 것도 한마디만 하면 없어진답니다." "부탁이 뭐냐고 물어봐." "이번 일은 몰랐던 걸로 해 주고 연봉 오억 엔에 계약을 하잡니다. 물론 수당도 있고 집과 자동차도 제공하겠답니다." "내가 할 일이 뭐냐?" "그건 여기서 밝힐 수 없답니다." "그럼 내 입으로 말해 주지. 구 요도가와 파를 쓸어낸 뒤에 야마구치 조직을 없애러 가자 이거겠지? 몇 개의 제휴 조직과 함께 말이다. 다섯 개 조직에서 일언 엔씩 각출해서 나를 사기로 했다는 것도 안다." "조건은 더 좋게 해 줄 수도 있답니다." 적은 액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만한 돈이 필요하다면 차라리 내가 일본의 은행을 털든가 할 일이지 암흑가의 돈을 받을 사내는 아니었다. "오백억 엔이라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해라." "놀라는데요." 병규 녀석도 의아한 눈초리로 말했다. "놀랄 것 없다. 나는 이미 야마구치 조직에서 이놈들을 없애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미쓰로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도 웬만큼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야마구치 조직과 계약을 하거나 손이 닿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놀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오백억 엔이다." "무리들과 협의를 해 보겠답니다." "으흐흐흐......" 나는 꽤 음흉한 축이었다. 녀석이 그런식으로 자리를 피하려고 해도 내가 놓아 줄 리가 없었다. 우리는 십여 분 동안이나 미쓰로의 제안과 흥정을 놓고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의 부하들이 이 근처에 잠복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고 해상에도 몇 척의 모터보트가 대기하고 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 너희들이 팔려고 하던 여고생들과마약은 내 맘대로 처리하겠다. 그리고 한 가지 명심해 둘 것은 고바야시 국장 같은 군국주의자들을 동원해 한국인을 못 살게 구는 일에서 손 떼지 않는 한 내가 "여고생과 마약을 얼마면 돌려 줄 수 있느냐는 겁니다." "미쓰로 두목의 목과 바꾸자고 해라." 미쓰로 두목은 어이가 없는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도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놈들은 가슴에 손을 넣은 채 미쓰로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미니버스 한 대와 TV방송국 마크가 선명한 촬영차가 뒤따라 들어왔다. 손미라의 작전은 적중한 셈이었다. 한국인이 낀 범죄단이 일본 여고생을 밀매하는 현장으로, 또 한국인의 마약 밀매 조직의 현장으로 그들을 유도해 낸 것은 손미라와 구 요도가와 파가 파놓은 함정이었다. 마치 요도가와 파의 미쓰로 일당이 고바야시 국장이 직접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나온 것이었다. "전부 끌어내라. 고바야시 국장하고 도오야마 프로듀서 놈은 이쪽으로." 발버둥치다 몇 대 얻어맞았는지 기가 죽은 두 사내가 내 앞으로 끌려나왔다. 고바야시 국장은 미쓰로를 발견하고 뭐라고 떠들어댔다. "두 사람이 친한 사이군요. 구해 달라고, 속았다고 하는데요. 빨리 테이프를 없애야 한답니다." "잘 됐다. 애들한테 필름이 든 테이프부터 빼내라고 해라." "이미 빼낸 모양입니다. 현장 중계이기 때문에 국장하고 도오야마의 목소리가 직접 들어간 모양입니다. 중계차가 나갔다고 나는 국장과 담당 프로듀서를 족치기 시작했다. 미쓰로는 차마 말릴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미쓰로 두목, 잘 들어라. 이놈들은 너희가 팔아먹으려던 여고생과 마약 밀매 현장, 그리고 우리가 그 현장을 방해하는 모습을 다 찍었다. 그런데 문제는 밀매 조직은 한국인 범죄단체로 말했고 나중에 말리고 나선 우리는 일본의 의협단체로 그렸다. 그 필름과 테이프는 이미 내 수중에 있다. 우리가 일부러 창고 문을 활짝 열어둔 것은 저놈들의 카메라에 잘 찍히도록 도와 준 것이다. 그동안 수도 없이 한국인을 편파적으로 그려 텔레비전에 내보낸 그 배경은 바로 암흑가 조직의 돈을 먹고 있었고 암흑가와 무서운 결탁을 해 온 양심이라고 떠받쳐지고 있다. 이 진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희들이 인간이라고 한다면......" 한참을 망설이던 미쓰로가 국장과 두런거린 끝에 말했다. "유감으로 생각한답니다. 필름과 테이프를 돌려만 준다면 자술서를 쓰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답니다." "유감은 좋다. 왜놈들은 그놈의 말이 입에 발린 걸 내가 아니까. 좀 맞아 줘야겠고 테이프와 필름도 찾으려면 내가 납득할 만한 네 노력도 보여 줘야 할 것이다." "어떤 조건이든 듣겠답니다." "내 주면 너희들은 금방 너희들이 유리하게 또 조작한다는 걸 안다. 미쓰로 나는 병규의 통역이 끝나자마자 국장과 도오야마를 개 패듯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한 방이면 끝장낼 수 있지만 나는 녀석들을 죽일 수 없었다. 살려두고 괴롭힐 작정이었다. 그동안 한국인을 계획적으로 괴롭혀온 이 사내들을 한방으로 끝낼 순 없었다. 시멘트 바닥에 나뒹굴리며 평생 동안 죄업을 생각하도록 지근지근 밟아놓았다. 아마 몇 년간은 몸뚱아리의 골병 때문에 고생을 할 것이다. 미쓰로 두목의 졸개들은 수류탄을 품 안에서 꺼내 안전핀을 이빨로 물었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두 서너 명이라면 안전핀을 뽑기 전에 해치울 수 있겠지만 상대는 미쓰로를 뺀 그들은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벙어리이거나 기형아들인지도 모른다. 미쓰로의 명령대로만 사는 놈들인 것 같았다. "미쓰로 두목, 너를 살려보내는 마지막 제안을 하겠다. 방송국 차에다 수류탄을 던져라. 그리고 할 얘기가 있으면 내 약혼자인 손미라에게 연락해라. 이것이 최후의 제안이다." "좋답니다." "우린 고바야시 국장과 도오야마를 데리고 간다. 너희들이 공격을 한다면 우린 즉시 경찰에 연락할 것이고 마약과 팔려가던 여고생들을 증거물로 제공하겠다." "결코 공격하지 않겠답니다." "알겠답니다." 자폭을 결심할 만큼 준비를 해 온 미쓰로를 이 자리에서 잡으면 우리 쪽에도 큰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들 손으로 방송국 차를 공격하게 한 뒤에 일단은 보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뒤로 물러났다. 미쓰로의 명령을 받은 졸개 녀석이 수류탄을 방송국 촬영차 안에 던졌다. 그리고 녀석은 철기둥 뒤에 재빨리 숨었다. 굉음이었다. 촬영차는 맹렬한 폭음과 함께 부서졌다. 고바야시 국장과 도오야마는 무릎을 꿇고 뭐라고 애원을 했다. 돌아가서 한국인 암흑가의 깡패 조직에게 폭파당하고 겨우 목숨만 건졌다고 얘기할 수도 없는 입장일 것이다. 그들은 폭파된 촬영차에 대한 핑계를 그럴 듯하게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미쓰로 두목은 이를 앙다문 채 돌아갔다. 그를 잡지 못한 것은 그가 수류탄으로 무장한 자폭탄을 대동하고 나타날 것을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재빨리 창고를 빠져나와 바닷가 쪽으로 달렸다. 손미라가 준비해 놓은 모터보트는 바다 한가운데로 질주하듯 달렸다. 기타 거리의 호화판 술집 이층의 특실. 실히 삼십여 평쯤 되어보이는 방은 연주할 수 있는 무대와 춤출 수 있는 공간까지 갖추어져 있는 곳이었다. 한편엔 기모노 차림의 여인들이 얌전하게 순백색의 새하얀 투피스와 깃털 달린 하얀 모자와 역시 하얀 색깔의 구두가 손미라를 한층 아름답게 보여 주었다. 여인은, 젊은 여인은 옷이 천사의 날개일 수도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미인대회에서 뽑힐 정도의 미모에 어울릴 만한 옷가지는 요도가와 파라는 암흑가의 거물들이 손미라에게 욕심을 부릴 만도 했다. 미쓰로 두목은 꼿꼿한 자세를 결코 허물어뜨리지 않을 것처럼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고 그의 주변에는 그의 보디가드로 보이는 정장의 신사들이 둘러앉았거나 출입구와 미쓰로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요도가와 파의 두목다운 위용이라고 생각했다. "장총찬 선생의 일본 체류를 풀어나가 쌍방의 우정을 돈독히 하잡니다." 손미라가 미쓰로의 말을 받아 나에게 전해 주었다. 처음엔 손미라 대신 병규 녀석을 데리고 나설 생각이었는데 손미라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영악스런 그들이 손미라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무슨 함정을 팔지도 모르고 믿어 주지도 않을 거라고 우겼다. "별로 즐겁지 않지만 이자식들이 환영하는 것까진 좋다고 해 두죠." "제가 알아서 적당히 대꾸할게요." 손미라가 엷게 웃으며 미쓰로에게 얘기했다. 아마 정중하게 인사를 한 것처럼 하겠지. 술잔이 한 순배 돌고 미쓰로 두목이 데리고 나온 졸개들이 차례로 인사를 했다. 데리고 나온 녀석들도 만만찮은 실력파라는 걸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한 녀석씩 악수를 하며 손바닥과 눈매로 전해 오는 상대의 실력을 읽어보려고 애를 썼다. 미쓰로 등 뒤에 버티고 서 있던 사내가 앞으로 나와 허리를 꺾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순간적으로 이 사내가 요도가와 파에서 간판으로 내세우는 무술의 제일인자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손을 놓자마자 나는 녀석의 덜미를 잡아 앉은뱅이 술상 쪽으로 내던졌다. 녀석은 한 바퀴 회전하더니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섰다. 녀석은 곧장 공격 자세를 취했다. 미쓰로가 손을 들어 녀석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경고를 보냈다. "봤겠지만, 저 정도 실력자들은 요도가와 전국에서 제일급의 무술가랍니다. 잘못 손댄 거라며 야유하는데요." 손미라는 내 엉뚱한 행동 때문에 입장이 난처했는지 표정이 굳어졌다. 나를 믿었던 만큼 내 실력에 대한 걱정이 생긴 것 같았다. 이런 세계에선 실력의 차이가 눈에 뜨이기만 하면 갑자기 상대방이 고자세가 되는 게 상례였다. 미쓰로가 속으로 웃고 있는지 모른다. "끝날 때가 중요한 거요. 마음 놓고 우리들이 계획한대로 밀고 나가요. 저녀석 눈동자를 잘 보고 있으슈.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에 쓰러질 테니까." 손미라가 무슬의 제일인자라는 사내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약산 자신을 얻은 듯 술잔을 비웠다. "뭐라고?" "조금 전에 실수한 것 때문에 갑자기 오만불손해진 것 같애요." "전해요. 내 앞에서 오만불손하게 굴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웃잖아요." 미쓰로와 그의 졸개들은 정말 웃고 있었다. 웃고 있지 않은 녀석은 미쓰로 뒤에 서 있는 제일급의 실력자란 녀석 한 놈 뿐이었다. 연봉 오억 엔을 제시했던 녀석들이고 손미라를 귀찮게 하지 않겠다며 술자리를 마련한 미쓰로의 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사내를 거꾸러뜨렸으면 아마 더 높은 연봉으로 나를 일본의 암흑가 전쟁에 끌어들이려고 했을 게 틀림없었다. "내가 일어나면 저녀석은 쓰러질 거라고 손미라가 내 얘기를 전했다. 미쓰로가 웃으며 돌아보았다.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제일급의 무술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미쓰로 얼굴이 굳어졌다. 내던지는 순간에 혈을 죄어 겨우 버티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내가 일어서는 순간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오만불손한 놈은 용서하지 않는다고 했다." 손미라의 통역이 끝나자마자 나는 몸을 날려 미쓰로의 가슴을 걷어찼고 옆에 앉았던 두 녀석의 턱을 가격해 버렸다. 나머지 녀석들은 표창 세례를 받아 뻗어 버렸다. 손미라가 핸드백에서 무전기를 꺼내 열심히 신호를 보냈다. 우리는 쓰러져 있는 녀석들을 가리켰다. "손 들엇! 움직이면 죽인다." 갑자기 내 등허리에 총신이 닿았다. 경찰관을 경계하지 않은 것은 내 불찰이었다. 나는 그 순간에 미쓰로 두목과 암흑가의 꾼들에게 속았다는 걸 알았다. 한국 말을 하는 사내는 계속 지껄였다. "움직이면 벌집을 만들겠다." "당신은 경찰인가?" "오늘 하루만 경찰이다." 손미라는 이미 수갑이 채워져 끌려 내려가고 있었다. "장총찬 씨, 속았어요. 이놈들은 경찰이 아녜요." 나는 짐작하고 있었다. 손미라를 따르던 어떤 녀석이 배반을 했고 경찰관 대신 안심하게 했다는 것을. 미쓰로가 우리가 제안한대로 순순하게 술집으로 나왔다는 것부터 의심했어야 옳았다. 고바야시 국장이나 미쓰로는 아마 목숨을 걸고 손미라의 주변 인물을 매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수갑이 채워진 뒤에도 밧줄로 꽁꽁 묶여 술집 이층으로 끌려 내려왔다. 정문을 피해 뒷문으로 끌려가 냉동차에 실렸다. 손미라의 입엔 테이프가 붙여져 있었고 냉동차 바닥엔 단단하게 붙여놓은 철제의자에 꽁꽁 묶어놓아 꼼짝 할 수 없게 해 놓았다. 나도 별수 없이 같은 신세가 되었다. 눈 앞이 아득해졌다. 살아날 수 있을까? 눈을 감았다. 미쓰로 두목의 함정에 빠진 않았다. 손미라는 눈짓으로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다. 절박한 상황에서 그녀는 퍽 여유있는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무슨 얘길까? 그녀의 눈짓만으로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다만 살아날 수 있다는, 그러니 마음을 놓으라는 그런 얘기일지 모른다고 생각해 보았다. 내 입에도 테이프가 붙여져 있어서 말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 냉동차의 철제의자에 단단히 묶어놓아서 조금치의 틈도 없었다. 손미라의 주변인물 가운데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손미라를 배반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손미라의 계획은 내가 미쓰로와 그 졸개들을 해치우면 즉시 경찰이 뛰어 들어와 요도가와 파를 이미 우리가 확보한 증거도 넘겨받기로 약속한 일이어서 경찰 내부에서도 치밀한 준비를 했다고 했다. 밀매하려던 마약과 인신매매의 제물이 될 뻔했던 여고생들, 또 한국인이 주도자라며 덤터기용 필름과 테이프가 우리 수중에 있기 때문에 경찰로선 달려들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경찰관까지도 매수했는지 모른다. 나는 얼핏 스쳐가는 이런 의문점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와 손미라만 감쪽같이 없앨 수 있다면, TV방송국의 고바야시 국장이나 도오야마도 살아날 수 있고, 미쓰로 두목이나 그 파벌도 감옥살이를 하지 않을 수가 있었다.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빤한 것이었다. 손미라와 나는 물론이지만 병규나 다나카 두목까지도 없앨 것이고, 암흑가의 생존을 위해 몇 개의 폭력단이 연합작전을 펼쳤을지도 모른다. 이 거대한 함정, 이 거대한 음모의 늪에서 내가 살아날 수 있을까? 냉동차에서 끌어내리는 순간 나를 죽인다면 방법 없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시간을 벌 수만 있다면 살아날 구멍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죽음을 생각하기엔 너무나 억울한 시간이었다. 손미라는 체념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일본 녀석들이 가끔씩 묶인 것을 확인하거나 앞자리와 연결되는 구멍으로 천국직행교라는 사교 본부의 지하실에 잡혀 있을 때는 정말 죽음이라는 걸 뼈가 저리게 느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일본놈에게 당하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자결을 하면 했지 일본놈 손에 내 목숨을 내 줄 생각은 없었다. 일본 암흑가는 지금 지하 전쟁으로 경황이 없는 판이었다. 나를 쉽게 없애지 않고 유리한 조건으로 흥정을 제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동안의 증거만 없앤다면 내가 아무리 날뛰어도 별 수 없을 테니까. 자동차는 몹시 흔들렸다. 아스팔트 길을 벗어나 산으로 올라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손미라는 묶인 손을 꿈틀거리며 손가락 글씨를 써보였다. 안심. 흥정. 증거 인멸. 병규 당함. 정도였다. 단단하게 결박지어 놓아 그만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기도 힘들었다. 그들이 지껄이는 얘기를 알아듣고 내게 전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녀에게 다른 계책이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한국 말 할 줄 아는 녀석은 내 옆에 바싹 붙어앉아서 도통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어깨로 녀석을 건드렸다. 녀석은 나를 노려보기만 했다. 우리가 갇힌 곳은 지하실이었다. 어딘지 가늠할 수 없는 산 속이라는 것과 별장이나 목장 같은 곳의 지하실이라는 것만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묶여 있었지만 충분히 의사를 소통할 수가 있었다. 상대의 손바닥에 글씨를 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있는 실력자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죽이진 않을 거라고 했다. 손미라는 전혀 불안한 기색이 아니었다. 철문이 열리고 세 사내가 들어왔다. "미리 말해 두겠다. 여기서 살아나갈 방법은 없다. 너를 죽여 없애는 건 한 방이면 된다. 그러나 우린 그렇게 쉽게 죽이지 않는다." 녀석의 손엔 권총이, 아주 갖고 싶을 만큼 예쁜 권총이 들려져 있었다. 그거 한 방이면 내 목숨줄을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나와 손미라를 번갈아가며 겨누던 녀석은 테이프를 뜯어내 주었다. 통역하는 녀석은 너무 유창한 한국 말을 하고 있었다. 나머지 두 녀석은 생김새나 복장으로 미루어 잔챙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 "이자식아, 왜놈 밑 닦아 처먹고 사는 게 재미있냐?" "이걸 카악!" 녀석은 주먹을 치켜들었다. 옆에 있던 녀석들이 말리지 않으면 내 면상을 갈겼을지도 모른다. "미쓰로를 만나게 해 줘라. 할 얘기가 있다." "헛소리 말고 얌전하게 앉아서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라." "물어라." "야마구치 조직이 정말 너를 샀냐?" 나는 잠시 망설였다. "난 팔려다니는 놈이 아니다. 다만 제안을 받았을 뿐이다." "요도가와, 호리, 후지, 오사카 패들의 두목을 잡아달라는 거였다." "얼마였나?" "오억 엔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야마구치 조직에게 넘기지 않고 경찰에 넘기려 했나?" "난 야마구치가 싫다." "네가 확보한 증거는 이제 하나도 없다. 네가 야마구치 조직의 두목을 잡아 준다면 우리도 오억 엔쯤은 내놓을 수 있다. 어때? 우리와 흥정할 수 있겠나?" "그건 좀 생각해 봐야겠다." "어쩌겠다는 거냐? 넌 한 방이면 죽을 텐데." "날 쉽게 죽여선 안 될 텐데. 무술의 제일인자라는 친구가 혈을 짚여 꼼짝 "미안하지만 걱정 안해 줘도 된다. 네가 짚은 혈은 풀어 줄 사람이 있으니까." "그게 누군가?" "차차 알게 될 거다." 내가 짚은 혈을 풀어 줄 만한 사람이라면 한국에서도 몇 사람 되지 않는 일이었다. 혈을 짚는 것 만큼이나 혈을 푸는 것은 고수가 아니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유기하가 일찌감치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소문이 있었다. 유기하라면 내가 짚은 혈 쯤은 쉽게 풀 수 있는 사내였다. 일본인 가운데 그만한 인물이 있다면 벌써 시끄럽게 소문이 날 일이었다. "한 가지 묻자." "말해." "내가 야마구치와 한판 붙겠다면 풀어 "그렇다." "뭘루 날 믿는가?" "네 약혼자를 인질로 삼는다." "만약 내가 야마구치와 타협을 하거나 역습을 시도할지도 모르잖는가." "그만한 준비는 우리도 할 수 있지." "야마구치를 꼭 해치워야 되나?" "야마구치는 어차피 끝장을 볼 수밖에 없다." 몇 차례 느끼는 것이지만 일본의 야쿠자 조직은 야마구치 조직을 어떻게든 거꾸러뜨리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아직 야마구치 조직이 어떤 힘과 배경을 지니고 있는지 모르며, 그들과 조우해 본 적도 없었다. "지금 결정할 수가 없는가?" 녀석이 나를 설득하다가 일본 녀석들과 상의를 했다. 나는 쉽게 그들과 흥정하지 말라는 손미라의 말대로 한번쯤 버텨볼 심산이었다. "한번 생각해 보겠다." "기회는 많지 않다. 죽은 뒤에는 기회가 없는 것이다." "안다. 하루쯤 시간을 줘라." 저희들끼리 수군대더니 그냥 나갈 것처럼 했다. "이봐, 묶은 걸 풀어 주는 아량은 좀 있어야잖아?" "잔소리 말고 얌전히 있어." 녀석은 내 등 뒤로 돌아와 묶인 걸 확인했다. 그리고 또 손미라의 등 뒤로 돌아가 묶인 걸 확인했다. "한 시간쯤 후에 다시 오겠다. 잘 내 입에 다시 테이프를 붙이고 그들은 철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손미라의 눈가에 웃음이 감돌았다. 무엇인가 열심히 몸을 놀리는 모습이었다. 한국인이라는 그녀석이 손미라 손에 칼 한 자루라도 쥐어 주었는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입이 봉해져서 말을 할 수 없고, 몸이 묶여 움직일 수 없었지만, 손미라 손엔 줄을 끊을 수 있는 것이 들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참 만에 손미라는 팔목을 뺐다. 그녀의 팔뚝엔 붉은 피가 배어있었다. 작고 날카롭게 생긴 칼 끝으로 발목의 밧줄을 잘라내고 일어섰다. 흥건하게 땀이 밴 그녀가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졌다. 내 입의 테이프부터 떼 준 손미라의 손엔 "팔목부터 끌러요." "이젠 걱정하지 마세요." "그 녀석 쓸 만한 놈이군요." "아녜요. 그도 매수당한 거예요. 누군가 우리를 구해 내라고 일렀겠죠." 손목을 풀었다. 발목도 끌러냈다. 칼 끝으로 수갑을 풀어냈다. 그녀는 사내가 쥐어 주고 간 메모지를 펼쳤다. 깨알처럼 작게 쓴 일본어였다. 지형을 알 수 있게 약도까지 그려져 있었다. "무슨 얘기요?" "여긴 산성 별장예요. 그리고 뒤쪽은 절벽이고, 이곳 경비는 삼엄하대요. 전부 총으로 무장하고 있대요." "누가 우릴 구한다는 겁니까?" "흑장미요." "여고생 밀매 현장을, 원래는 흑장미가 덮칠 계획였대요. 그리고, 이 산성 별장은 흑장미가 포위하고 있어요. 폭파할 수 없는 건 우리의 신변 때문예요. 밖에서 총소리가 나면 철문을 안으로 잠그고 기다려야 해요. 이 건물이 폭파된 뒤에 문을 열고 뛰어나가면 오토바이가 준비되어 있을 거래요. 뒤를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산성으로 내려 가면 아래에서 자동차가 기다리고 있대요. 큰길로 내려가지 말고 지름길로 달려야 돼요." 그 작은 메모지 한 장 속에는 별의별 얘깃거리가 많았다.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흑장미가 보낸 사연이었기 때문에 자상하고 세심한 것까지 지시하고 있었다. "우리를 누가 배반한 거요?" "경찰은?" "매수 당했겠죠. 그러나 걱정할 거 없어요. 나가기만 하면 찾게 될 테니까요. 배반자나 경찰은 물론이지만, 고바야시 국장과 도오다마도 그냥 두지 않겠어요. 이번엔 결코 안 당하겠어요. 총찬 씨한테는 정말 미안해요." "흑장미와는 어떻게 알죠." "우연히 한두번 만난 적이 있어요." "혹시 손미라 씨도 흑장미 일원이 아닌가요?" "아녜요." "내 눈은 못 속입니다. 다나카 힘으론 손미라 씨가 버텨낼 수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치밀한 계획을 세울 수도 없고, 이렇게 신속한 구조의 손길이 오지 않아요. 계획적이었을 거구요." "총찬 씨, 아무렇게나 생각하셔도 좋아요. 다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여기서 살아나가는 일 뿐예요." "한마디만 부탁하겠소. 나를 이런 식으로 끌어넣지 마시라는 거요. 까놓고 얘길 하고 협조를 한다는 건 몰라도 숨김 뒤에, 일이 끝나면 털어놓는 건 질색이오. 저놈들이 나를 쉽게 죽이지 않는 배경엔 손미라 씨, 당신네가 연막작전을 펼쳐왔기 때문이라는 걸 알겠어요. 야마구치 조직과 다른 야쿠자 조직간에 전쟁을 붙이려고 나를 끌어들인 거죠? 이제 알겠어요. 내가 야마구치 조직과 흥정을 한다는 걸 소문냈고, 이쪽에다는 내가 야마구치 조직을 거덜낼려고 온 것처럼 손미라 입가엔 미소가 흘렀다. 그리고 내 손을 힘 주어 잡았다. "총찬 씨, 미안해요. 그러나 총찬 씨 짐작대로는 아녜요. 내가 흑장미 일원이라는 건 사실이지만 계획적으로 끌어들인 건 아녜요. 오히려 우리는 총찬 씨를 보호한 셈예요.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야마구치도 요도가와도 모두 총찬 씨를 노리고 있었어요. 한번 휘말리면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발목만 잡혀요. 그들은 교묘하게 총찬 씨가 살인죄로 도망다닐 수밖에 없도록 사건을 만들어 놨어요. 총찬 씨가여기서 나가도 경찰에 쫓길 수밖에 없어요." "내가요?" 명이나 죽었대요." "그럴 리 없어요? 난 결코 사람을 죽이지 않아요." 나는 급소에 표창을 꽂지 않았다. 아무리 쳐죽이고 싶은 놈이라도 내 손으로 죽일 만큼 상처를 입히진 않는 사람이었다. 인간은 가장 존엄성을 인정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한 사람의 개체는 그 사람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온 우주 전체보다 소중하고 오히려 하나님보다 더 존엄한 존재인 것이다. 인권이란 생명의 보전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며, 어떠한 경우라도 사람이 사람을 죽이거나, 하늘의 정의가 아니고선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요즘엔 그놈의 하늘의 정의라는 게 버렸다고는 하지만...... "그들이 죽인 거예요. 그걸 노린 거예요. 그러나 반박할 증거가 없게 만들었지요." "알 만 합니다." "살인죄를 벗어나기 위해선 별수 없이 그들과 타협해서 지하 전쟁, 그 무시무시한 암흑가 전쟁에 휘말려들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지금 나가도 상황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 셈이죠. 그러니까 미쓰로를 잡아야 돼요. 고바야시 국장은 벌써 장총찬 씨를 얽어놨을 거구요." "난 우리나라로 빨리 가야 돼요. 여기서 혐의를 뒤집어 쓴 채 기다릴 수만은 없어요." "알아요. 그래서 테이프와 필름을 복사해 매수 경찰관은 결국 미쓰로의 조작이란 걸 털어놓지 않고는 못 배기겠죠." 나는 미쓰로와 고바야시 국장만 음모의 천재하고 생각하지 않았다. 손미라도 보통내기는 넘었다. 총성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쌍방에서 총격을 가하는 것 같았다. 철문을 두드리던 사내들도 급했던지, 철문에다 몇 방의 총질을 하고 사라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폭파음이 들려왔다. 손미라가 철문을 열었다. 흙먼지가 보얗게 피어나는 속으로 나와 손미라는 뛰어나갔다. 얼핏얼핏 총을 든 사람들이 보였지만 우리를 공격하진 않았다. 시동이 걸려 있는 오토바이 위에 뛰어올라갔다. 손미라가 내 가슴을 깍지 끼어 끌어안았다. "샛길로 가요." 오토바이는 샛길로 들어섰다. 숲 속으로 내달렸다. 새벽의 산길은 어둡지도 밝지도 않았지만, 상쾌한 기분을 주었다. 산책로인 듯 싶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저쪽인가 봐요." 손미라가 가리키는 계곡 아래쪽엔 승용차 서너 대가 세워져 있었다. 우리는 오토바이를 계곡에 팽개친 채 철책을 뛰어넘었다. 승용차 문이 열리고 흑장미의 환한 모습이 보였다. "안녕." 흑장미의 인사였다. "어서 타세요." 손미라가 앞자리에 올라타며 소리쳤다. 흑장미 옆에 바싹 붙어앉았다. 자동차는 손미라는 열심히 지껄였다. "고맙다고 전해요." "그러지 않아도 전했어요." "미쓰로를 지금 잡아야겠어요." "지금 그쪽으로 가는 중예요." "경찰관은?" "잠깐만 기다려 봐요." 손미라와 흑장미가 얘기하는 사이에도 흑장미는 내 손을 꼬옥 쥐고 놓지 않았다. "아직 안심하고 있어서 도주하진 않았대요. 고바야시 국장은 한국계 깡패한테 당한 걸로 신문에 이미 보도됐고, 장총찬 씨는 긴급 지명수배가 됐대요." "빌어먹을......" "그러나 걱정하지 말래요. 미쓰로만 잡으면 된대요." 여러 대의 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흑장미가 내보인 신문에는 내 사진과 범죄 행위가 상세하게 보도되어 있었다. 한국 여자를 일본에 팔아먹는 장면도 나왔고 마약 밀매, 추적 취재하는 텔레비전 방송차를 불지른 행위와 한국계 지하조직의 작태, 그리고 일본 여고생을 밀매하려던 거대한 음모의 주모자로 종적을 감춘 것으로 보도되어 공항과 항만의 봉쇄작전까지 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의 배후 조작자가 누구라는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고바야시 국장이 살아남기 위해서, 사건의 조작극이 드러나면 멸망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계획적으로, 또 한번 한국인을 제물로 내세운 것 같았다. 손미라가 이렇게 말하고 흑장미와 무슨 얘긴가 한참 동안이나 나누었다. "아지트를 급습하면 역전시킬 수 있대요. 미쓰로가 아직은 산장 별장 사건을 모를 거고, 전화선을 끊었으니까 아직은 깜깜할 거래요. 도주하기 전에 잡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잡지 못할지도 모른답니다. 그리고 이건 흑장미가 준비한 거래요." 그녀가 내민 것은 놀랍게도 표창이었다. 내 손에 꼭 맞도록, 내가 평소에 지니고 다니던 형태와 무게였다. "고맙다고, 이 은혜는 갚을 거라고 전해 줘요." 손미라가 내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 같았다. 흑장미는 의미 있게 웃었다. 그녀와는 아름다운 밤의 역사를 지니고 달래 주었고 여느 일본 녀석들과 달리 정을 느끼게 할 만한 여자였다. 일본 여자 가운데 저만한 여자가 있다는 게 오히려 신비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흑장미의 작전 계획은 치밀하게 짜여져 있었다. 기타노신지 주변의 칠층 건물 옥상을 흑장미가 가리켰다. 새벽녘 거리는 인파가 많았다. "도와 줄 만한 사람들이 건물 전체를 에워싸고 있으니 안심하랍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성큼성큼 걸어 건물로 들어섰다. 요도가와 상사라는 간판이 그럴 듯하게 붙어 있는 건물, 이 건물이 요도가와 파의 본거지이며 겉에 내 건 것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건물은 임대를 주고 있고 칠층과 지하 이층의 방들이 바로 요도가와 파의 아지트였다. 지하와 칠층만 연결되는 엘리베이터까지 준비되어 있고 주변의 건물 몇 채도 요도가와 파 소유로 탈출로가 지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하통로와 연결 엘리베이터를 책임져 달라고 부탁했고 해결되는 즉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비행기 예약을 해 달라고 했다. 나는 돌아가야만 했다. 다혜가 이역만리에서 돌아올 시간이었다. 몸부림치도록 보고 싶은 계집애였다. 그녀가 김포공항을 떠날 때 나는 악을 쓰며, 공항대합실이 떠나가도록 사랑한다고 외쳤었다. 미친 놈처럼. 날뛰며 하고 싶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오른쪽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카펫이 깔린 복도를 따라가다가 오른쪽 끝의 모서리라고 했다. 반드시 세 개의 방을 거쳐서, 곳곳마다 경비원들에게 허락을 맡아야 들어설 수 있는 아지트여서 나처럼 말도 통하지 않고 설사 통하더라도 안에서 미쓰로 두목의 허락을 받을 수 없는 걸 알면 그 자리에서 총격을 가할 거라는 주의를 받았다. 모퉁이를 돌아서서, 문이 열리는 순간에 두 녀석의 급소를 찍었다. 두 녀석의 덩치는 마치 황소 같았다. 두 번째 문 앞에 서서 TV회로판을 표창으로 뭉개어 버렸다. 밖의 일을 안에서 모조리 알 수 있게 해 놓은 장치였다. 흑장미가 일러 준대로 소리 없이 열렸다. 쉭쉭쉭! 세 개의 표창이 동시에 날았다.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세 명의 사내가 급소를 맞고 그대로 누워 버렸다. 비명을 지르게 해선 안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급소를 때렸다. 그러나 난 어리석은 놈도, 그렇다고 사람을 죽이는 사내는 아니었다. 혈을 짚듯 정확하게 그들을 기절시켰을 뿐이었다. 생명이 존엄한 걸 안다. 이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며 우주 전체보다도 한 생명은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다. 작은 나라를 장난감 병정처럼 가지고 노는 강대국이란 너울을 쓴, 인권이니 입에 달고 다니는 그들은 약소국의 국민들 생명을 실험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며 열 명의 죄인을 엄단하기 위한 한 사람의 무고한 시민을 매섭게 다루고도 양심의 가책은커녕 희열을, 사람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직분에 쾌락을 느껴보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난 생명이 얼마나 존엄한 것인지 무공 스님에게 배워온 사내였다. 말로는 모두 생명을 존중하는 무리들, 그러면서 쥐꼬리만한 권한으로 인권을 유린하는 무리들이 이놈의 세상엔 너무 득실거리고 있다. 일본놈이라면 씨를 말리고 싶지만, 아무리 내게 악독하게 군 놈이라도 나는 결코 죽이진 않을 것이다. 죽어야 하고 남을 아프게 하거나 괴롭히려면 먼저 십 년의 고행을 한 뒤에나 하는 거라고, 그리고 정의라는 이름으로라도 결코 생명을 빼앗는 짓은 용서할 수 없노라고 말씀했었다. 하느님. 당신은 한국 땅 강원도 산골짜기, 사람 하나 없는 그 깊은 산 속에 혼자 선을 하고 있는 스님 한 분 앞에 감히 나설 수 있겠소? 당신이 당신의 정의 아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으며 전쟁과 기아와 병마를 통해, 더러는 힘 있는 자의 쾌락과 욕망의 빌미로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는지 아십니까? 당신은 일기를 쓰나요? 솔직하게 쓰나요? 거요. 안 봐도 알 일이지만. 만약 당신이 참회록을 쓴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릴 겁니다. 세계 인구만큼, 금방 죽을 노인네부터 갓 태어난 아기까지도 읽을 겁니다. 어떠슈? 이 늙은 하나님아, 참회록 써서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 한번 만들어 돈 좀, 인간들 세상의 돈 좀 싹 긁어가 보슈. 하나님. 난장박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세상을 이 꼴로 계속 내버려둘 작정이라면 거기 숨어 있지 말고 내려오슈. 당신을 난장박살 내려고 벼르는 괜찮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말요. 에이, 떡칠 양반아. 비상벨을 떼어내고 지하통로와 연결되는 쪽문의 전선을 차단해버렸다. 그리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힘 없이 문이 열렸다. 두 명의 사내가 느닷 없는 내 출현에 권총을 빼려고 몸을 숙였다. 나는 책상 위에서 뛰어내리며 뒷덜미를 가격했다. 두 녀석이 엎드려 그대로 뻗었다. 방문이 벌컥 열리고 미쓰로가 나왔다. 흠칫 놀랐다. 그러나 미쓰로는 두목이었다. 명색이 요도가와 파의 두목이었다. 가볍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지만 느낌으로는 환영한다는 투였다. 내가 한발짝 다가서자 그는 한발짝 물러섰다. 방문이 열리고 잠기 가시지 않은 계집애, 그녀의 손엔 빛나는 권총, 날씬하고 귀엽게 생긴 권총이 들려 있었다. 나는 그녀를 응시하며 표창을 바짓가랑이에 닦았다. 쉭! 미쓰로가 권총을 받아쥐려는 순간에 계집애는 비명을 지르며 벌렁 누웠고 미쓰로는 쪽문을 밀었다. 그러나 열리지 않았다. 나는 키들거리며 웃었다. 미쓰로의 당황한 표정이 금방 드러났다. 말이 필요 없었다. 말이 통하지도 않았고 통한다고 해도 이런 녀석은 말을 주고받을 필요도 없었다. 목의 혈을 쥐었다. 금방 얼굴이 검붉어지며 숨을 헐떡거렸다. 경련하며 거품을 쏟았다. 모질게 정강이를 걷어찼다. 잔뜩 웅크린 채 방바닥을 기어다녔다. 멱살을 끌고 비상계단을 내려섰다. 뒹굴렸다. 이런 사내는 뒹굴려서 끌고 가는 것만도 다행한 것이었다. 미쓰로는 내가 걷어차는대로 계단을 뒹굴며 굴러내려갔다. 지하차고까지 나는 계속 굴려 버렸다. 자동차 뒷트렁크에 싣고 열쇠로 채워 버렸다. 덩치가 커서 그 큰 자동차의 트렁크가 꽉 찰 정도였다. "고바야시를 잡아야죠." "어딥니까?" "교외예요. 호화주택이래요. 새벽에 들어와서 아직 안 자고 있나봐요. 잘라 없앤 필름과 녹화 테이프를 찾아내야 하니까 내가 같이 들어가야 돼요." "쉽게는 않겠죠. 그러니까 증거물을 찾아내고 자백을 녹음해 둬야 돼요. 또 경찰이 인정할 만한 증인도요." "되겠죠." 자동차 행렬이 우리 차 뒤로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흑장미의 부하들이 흑장미를 보호하기 위해서거나 내 일을 도와 주기 위해 호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배신자는 찾았나요?" "도망쳤어요." "누구죠? 한국인였나요?" "그랬어요. 돈에 눈이 어두웠나 봐요. 그녀석은 사건이 어떻게 끝나든간에 한밑천 잡은 셈이죠." "어디 가서 나쁜 짓 그만하고 그 돈으로 잘 처먹고 잘 살기나 했으면 좋겠네요." 사내였는데. 그러니까 믿고 데리고 있었죠." 교외지역이란 게 한눈에도 알 수 있는 지역으로 들어섰다. 산 옆으로 무성한 가로수가 하늘을 가릴 만큼 울창했다. "저 집이래요." 우리 앞을 섰던 자동차가 옆길로 빠지라는 신호를 보냈다. 우리는 비탈길에 차를 세웠다. "산길로 가야 돼요. 혹시 모르니까요." 흑장미는 간단하게 그린 고바야시 국장네 집 약도와 봉투 속에 든 여러 장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고바야시 국장의 여성 편력을 대번에 알 수 있는 사진들이었다. 나는 씩 웃었다. 고바야시 국장에 대한 사전조사가 치밀했다고 보기엔 너무 상세한 추적했거나 그런 자료를 가지고 있는 자와 접선을 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뒤따라오세요. 문이 열리면 뛰어드는 게 낫겠지요?" "그럽시다." 고바야시네 집 가까이 오자 손미라가 앞장 섰다. 대문이 열리고 손미라가 들어서며 신호를 보냈다. 나는 일본식으로 잘 꾸며진 대나무 울타리와 구옥을 본떠 새로 지은 손미라 말처럼 호화스럽게 생긴 고바야시네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현관 앞에 섰던 고바야시 국장이 후다닥 뒤꼍으로 뛰었다. 멱살을 옭아잡아 무릎치기로 사내를 주저앉혔다. 손미라가 밖으로 내던지라고 말했다. 나는 한번 더 고바야시를 가격한 기다리고 있던 흑장미 패거리들이 고바야시를 차에 실었다. 뭐라고 악을 쓰며 떠드는 집 안 사람들에게 손미라가 일본 말로 설명하고 있었다. "갑시다." "증거물을 찾아야죠." "깜빡했네." 나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고바야시를 태운 차 쪽으로 뛰어갔다. 절단한 전화선 옆의 꽃밭 주변엔 흑장미 부하들이 좍 깔려 있었다. 내가 뛰어가자 흑장미 패들은 고바야시를 무섭게 다루고 있었다. 아무래도 쉽게 입을 열 것 같지 않아보이는 분위기였다. 나는 다짜고짜 고바야시의 목덜미 혈을 짚었다. 눈알이 뒤집어지며 경련을 을러댔다.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금방 숨이 넘어가도록 혈을 짚을 수밖에 없었다. 살이 찢기는 것 같고 뼈마디가 모조리 어긋나는 것 같은 무서운 혈이었다. 숨도 턱에 막혀서 복식호흡을 시켜 주지 않으면 제대로 쉴 수 없는 혈이었다. 고바야시가 팔을 휘저으며 소리를 질렀다. 흑장미 부하 녀석이 재빨리 고바야시의 말을 메모지에 써서 내 주었다. 나는 메모지를 다시 손미라에게 전했다. "태웠대요." "뭐라고요?" "할 수 없어요. 우리가 복사해 놓은 걸 쓸 수밖에 없지요." "그냥 가잔 말입니까?" "이 사람들이 증거를 남겨놨을 리가 없죠." 우리는 할 수 없이 고바야시가 정리하다 만, 타이핑된 원고와 편지뭉치를 가방에 주섬주섬 담았다. 경찰 간부가 직접 현장을 확인하고 녹화 테이프와 필름, 고바야시의 상세한 고백과 미쓰로 두목의 범죄 사실을 모두 확인한 뒤에 당시 현장에 있었던 도오야마와 기술진들의 대조, 또 납치되었다가 풀려났던 여고생들의 증언과 마약 밀매파들의 부정할 수 없는 증빙자료들을 점검했다. "해결됐어요. 기자들이 인터뷰를 하겠대요." 손미라는 이틀 동안의 긴장이 풀렸는지 하품을 애써 감추며 이렇게 말했다. 미쓰로 일당의 조작극이란 걸 밝히기 위해 이틀 동안 밤낮 없이 뛰어다녔고 도주한 경찰관을 잡기 위해 일본 전역의 흑장미 조직은 물론 손이 닿을 만한 조직들의 후원을 받아 겨우 때맞춰 잡아올 수 있었다. 경찰관 두 명은 초급간부였고 이번 조작극에 앞장선 대가로 일억 엔을 받아 나누어 가진 것이 드러났다. "사양하겠어요. 난 체질에 안 맞아요. 한국인을 그렇게 못살게 굴고 의도적으로 한국인에게 엄청난 범죄를 뒤집어씌우고 일본인들의 지성이나 양심을 어떻게 내 입으로 얘기할 수 있습니까. 손미라 씨가 내 대신 하세요. 제발 좀 일본인이기 이전에 인간이 되어달라고." 어울리죠." "내가 욕지거리밖에 더 하겠어요? 말하다가 흥분하면 기자들까지 모두 창 밖으로 내던지게 될지도 모르는 놈입니다." 나는 한사코 텔레비전 방송국과 신문사 기자들의 인터뷰를 거절했다. 경찰 간부가 옆방에서 사건의 전모를 발표하는 사이에 우리들은 기자들의 눈을 피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아침 비행기 표를 예약해 뒀어요. 흑장미는 며칠 푹 쉬었다 가는게 어떻겠냐며 의사를 물어 보래요." 손미라네 찻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흑장미의 이런 제안을 또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흑장미를 위한 일이면 무슨 짓이라도 기회가 닿으면 반드시 오겠다고 해 줘요." "흑장미가 한국에 놀러가도 되느냐구요?"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흑장미 같은 여자라면 난 결코 미워하지 않아요. 일본인 가운데에도 사람다운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입니다." "그럼 오늘 밤만이라도 같이 있자는데요? 총찬 씨를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아요. 질투가 나는데요." "나도 그러고 싶어요. 나도 꽤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오늘밤만은 혼자 있고 싶어요." "할 수 없다니까 매우 실망한 눈치예요." 손미라는 우리들 관계를 알 턱이 없었다. 초면도 아니고 끈끈한 밤의 역사를 안고 있는 사이라는 걸 짐작조차 할 수 없었을 병규도 무사히 풀려나왔다. 꺼칠하게 생긴 얼굴이었지만 표정은 밝았다. "한국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게 이렇게 참담한 것인가 싶어 더럽게 원망도 했었죠. 그런데 한 가지를 배웠어요. 일본인도 사람다운 사람이 있다는 것과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결코 굴욕이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병규 녀석도 삼 일 동안 경찰서에 잡혀 들어가 조작극의 희생자로 퍽 고통을 받은 것 같았다. 얘기하지 않아도 알 만한 일이었다. 흑장미는 서운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녀와 밤을 그냥 새우지 않을 걸 알기 때문에, 그녀의 매력적인 몸을 기억하고 있어서 나는 혼자 잠들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흑장미와 더 아름다운 밤의 역사를 만들기엔 내 조그마한 양심이 허락칠 않았다. 나는 빨리 돌아가 다혜를 만나야만 한다는 일념 뿐이었다. 그녀를 떳떳하게 만나기 위해 흑장미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었다. 밤늦도록 다혜와 만나는 순간의 기쁨을 연상하느라고 이틀 동안 못 잔 피곤함도 잊었다. 밤이여 빨리 가거라. |
첫댓글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