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모던포엠 신인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양소연
■방화동 마더스 독서 클럽 외 2편
방화동 마더스 독서 클럽
무대는 정면 오후 2시의 햇살 왼쪽에 피아노 가운데 플루트 연주자 ‘모든 날 모든 사랑’이 흐른다 네 개의 귀퉁이에서 동백나무들이 막 꽃을 피우고 있다 나무 아래마다 흰색 테이블 노란색 의자 두 개 흰색 의자 두 개 테이블 위에 동백꽃빵과 커피가 놓여있다 오른쪽 나무 아래 은유의 힘*, 죽음의 한 연구*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 불안의 서*가 앉아 있다
은유의 힘: 잘 지내셨어요? 먼저 돌아가면서 1주일 지낸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웅성웅성, 시끌벅적, 소리들이 섞인다. 무대 양쪽에 있는 화면으로 글자들이 흘러간다. 시어머니, 시누이, 전 부치기, 차례상, 대게, 친정어머니, 아들, 딸, 아파트값, 가성비 마트 등등)
은유의 힘: 그럼 각자 읽어 오신 책 중에서 187페이지를 이야기해 볼까요?
(자기가 말할 때는 조금 도도한 목소리로, 자기가 읽은 책이 아주 훌륭하다는 듯이, 남이 이야기할 때는 빨려 들어갈 것처럼 앞으로 허리를 숙이고 눈을 반짝거리며 듣는다)
죽음의 한 연구: 바람 자지 않는 나무는, 죽은 나무보다 더욱더 탐욕스러이, 빨고 드는 삶과 죽음의 고통 탓에, 그 불같은 아집 탓에, 더욱더 그 혼이 무성해지는 것이다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 나는 마음속에 한 악절을 가지고 침대에서 일어나서는 그 화음들을 찾아내곤 했다. 에디는 베이스 기타를 들고 합류했다 그것은 사랑으로 이루어진 작업이었다
은유의 힘: 이 고요한 노동 속에서 나〔주체〕-사과〔대상〕-칼〔도구〕은 한 덩어리다. 그러나 한 찰나 속에서 엮인 이것들, 즉 나, 사과, 칼은 제각각의 개체들로 돌아간다
불안의 서: 1930년 5월 18일 사랑하는 사람이 연인에게서 느끼는 낯선 거리감, 아내가 남편에게 끝내 숨기는 것들, (중략) 이 모두가 나의 바닷가 산책에 동행했고, 나와 함께 돌아왔다
은유의 힘: 이젠 뒷장의 빈 페이지를 함께 채워보겠습니다
일동: (4명이 합창하듯 낭송한다)
혼이 무성한 이 나무는
저 나무와의 거리가 낯설어
기타의 한 악절을 몰래 가지고 있다
바닷가를 산책하며 찾아낸 화음으로
엮인 것들을 풀어내며 다시 돌아온다
카페의 손님들이 책을 들고 일어나 한 명 두 명 무대 아래로 내려와 출구로 걸어간다
‘다시 사랑이’*의 가사들이 펄럭거리며 그녀들을 따라간다
오후 5시 반의 동백꽃 같은 조명이 객석까지 비추고, 아까처럼 무대 양쪽의 화면에 글자들이 흘러간다
*장석주, 2017, 다산책방
*박상륭, 1997, 문학과 지성사
*제임스 데이트, 2019, 창비
*페르난두 페소아, 2014, 봄날의 책
*박정현의 노래
모나코 블루 이어링
벽지를 뜯어냅시다
확 뜯어냅시다
색을 바꿀게요
어떤 색이 좋아요?
블루
블루
모나코 블루
그녀는 운다 무턱대고 운다
비어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운다
무턱대고 운다
비어있는 쪽이 가득 찰 때까지 무턱대고 운다
비어있는 쪽은 대답이 없을 때가 더 많다
대답이 나올 때까지 그녀는 쉬지 않고 울다가
울다가
눈을 깜박이기 시작한다
깜박여도 대답이 없자
그녀는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한다
손톱 깨무는 소리가 들리도록 물어뜯는다
입술도 깨물고 어금니도 깨물어 본다
그렇게 울고 뜯고 깜박이고 깨물다가
결국 대답이 없는 쪽으로 구멍을 만든다
구멍들은 자라나고 늘어나고
여린 빛들이 오가고
G단조의 소리들이 들락거린다
저 구멍을 메꾸지 않으면 집이 무너질 거예요
허겁지겁 구멍을 메꾸느라
그녀는 연애편지를 쓰기로 한다
그녀는 구멍구멍 색을 칠한다
그는 그 색들에 홀려 밤을 새워가며 편지를 읽었다
그녀는 연애편지 곳곳에 소리를 넣는다
사랑이라는 낱말 위에서 꼭 소리가 났는데
그는 그 소리를 듣느라고 밤을 새웠다
그가
소리 아래에서 구멍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늦은 봄이었고
색깔들 아래에 숨어있던 구멍을 발견했을 때도
봄은 이미 늦어 있었다
블루
블루
모나코 블루
솟을민꽃살무늬 문
코끼리가 목이 마르네
잔지바르 어느 집 대문을 코로 미네
머리로도 안되네
어깨로 힘껏 밀자 문이 화들짝 열리네
식구들은 혼비백산
코끼리는 물을 마시네
한 사내가 걸어갑니다
등에 무얼 매달고 갑니다
걸음이 무겁습니다
등에 무얼 메고 가세요?
문이란다
열어도 열어도 안 열리던 문
끝내 열지 못한 문
버리지 못한 문
문이 업혀서 갑니다
너는 살아있니?
살아 있으니 얼마나 좋아
살아서 열어야 한다
살아있을 때 열고 싶은 문은 다 열어 보렴
그가 집은 문이 반이라고 말한 적 있습니다
사방 천지에 문
고향 바다 긴 다리는 떨쳐버리고 온 첫 문
당신은 열린 듯 닫힌 듯, 문
나는 나에게 가장 어려운 문
기우뚱한 문
그림 속의 문
누군가 막아버린 문
벽인 척 속이고 있는 문
움직이면서 움직이면서 내 움직임을 보고 있는 문
빛나는 통로를 볼 수가 없네
커튼을 연다
문이 생긴다
빗살만 만들어 놓고 꽃은 달지 못한 문
방 안에는 어제가 있고 밖에는 오늘이 있다
코끼리는 목이 마르네
대문을 코로 미네
문을 부수네
양소연_강화 출생. 중흥중학교 교장 역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재학 중
■스타일러 스타일 외 2편
스타일러 스타일
내 관 같은, 키 188cm, 폭 45cm, 깊이 60cm 남짓한 회색 튜브가 39분짜리 광풍을 일으킨다 불금을 불끈 달구고 바깥바람이 잔뜩 든 카키 재킷, 블랙 셔츠, 블루진 바지를 다시 바람의 아가리로 밀어 넣는다
횃대에 걸린 네 팔, 두 다리, 상반신 둘, 하반신 하나가 춤을 춘다 허랑방탕이 춤을 춘다 껍데기들이 무한천공을 휘휘 젓는다
여기 물 좋은데, 역시 우린 룸 체질이야, 발광체들이 불을 뿜는다 관 속에서 단내가 난다 금속성의 타악기 소리가 지나간다 사이키델릭 사운드 질펀한, 분 냄새 지분거리는 어제를 드라이클리닝한다 이래도 되나 싶었던 어제를 감쪽같이 씻어낸다
구겨진 시간이 거짓말처럼 펴질 때 뚝, 스위치가 꺼진다 한번 생긴 구김은 호락호락 펴지지 않는다는 듯, 좀 더 구겨져서 다시 오라는 듯
- 난 생겨먹은 대로 사는 애야, 뭘 더 바라, 댓츠 마이 스타일*
표준코스로 39분짜리 회개를 끝낸 올 누드의 사내가 중얼중얼하며 페이드아웃 된다
* 걸 그룹 아이브의 ‘키치’ 노랫말
산곡역山谷驛
서울 다녀온 열차가 산골짝 사람들을 쏟아낸다 커다란 누에 한 마리 시커먼 싱크홀 속으로 사라지고
승객 A 승객 B … 승객 N이 마스크를 쓴 채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초점 없는 시선들이 앞사람의 뒤통수에 꽂혀 간다 갑자기 떠꺼머리만 보이는 소년이 뛰기 시작한다 미니스커트 서넛이 급히 따라붙는다 문득 땅 밑 시계가 빨라진다
우르르르르, 에스컬레이터를 뛰어오르는 산골짝 카드들이 꽁무니를 바싹 좁힌다 오감을 좁힌다 108 개찰구가 삐릭! 삐릭! 어딜 다녀왔는지, 누굴 만나고 왔는지, 아니 무슨 생각을 하며 왔는지 다 알고 싶다며 스캔을 시작한다
환승입니다! 출발과 도착이 정산될 때
타전음이 바삐 울린다 서울 방면으로 가는 열차가 전역을 출발했다는 안내 방송이 들린다
7번 출입구에서 땅속으로 뛰어드는 승객 a 승객 b … 승객 n과 마주쳤다 무슨 환승의 의무라도 있는 걸까? 산골짝 사람들은 오늘도 부지런히 환승 연습 중이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다시 지상에서 지하로 이 세상에서 저세상으로
스포일러
51번 SPO TV
어젯밤 딥데일 스타디움에서 치러진 토트넘과 프레스턴의 경기가 재방송되고 있다 남편은 소파에 새우처럼 누워 있고 라이브 중계를 놓친 그녀는 TV에 딱 달라붙어 있다
슈웃 꼬올! 아아!
괴성보다 탄성이 더 크게 들린다
노골이라니까 ··· 이따금 남편이 웅얼거리는 소리 들린다
다시 보는 자와 처음 보는 자가 엇박을 내며 재방과 생방을 넘나 든다 탁자엔 벌써 맥주 캔이 두 개나 찌그러져 있다 그녀는 오늘 꽈리고추 넣고 볶은 멸치를 특별 안주로 기용하고 있다
전반 33분, 토트넘 이반 페리시치 선수의 슛이 골대를 강타한다 아아, 그녀의 한숨이 골문 앞에서 뚝뚝 끊어진다 입이 근질거리던 선지자가 그만 발광을 하고 만다
- 여보, 제아무리 난리를 쳐도 전반전은 0:0이라니까, 골이 들어갈 수가 없다구!
- 대체 언제쯤 골이 들어가냔 말이에욧!
그와 그녀 사이에는 패스가 끊긴 말들만 오고 간다 선지자의 예언대로 슛은 모두 빗나가고 선수들만 쓸데없이 지쳐간다
그녀도 심드렁해진 후반 5분, 손흥민이 왼발로 감아 찬 공이 골대 우측 모서리를 뚫는다 TV가 소니! 소니! 를 연발한다 어느새 TV 속으로 뛰어 들어간 그녀는 관중석에서 줌바 댄스를 추고 있다
우리 선수 하나가 토트넘에 있다고 듣도 보도 못한 프레스턴의 적이 되는 아이러니,
가만히 보면 참 재미난 인간들의 운명을 신들도 가끔 꺼내 볼까? 재방송 보듯 다시 볼까?
얼마나 속이 터질까, 얼마나 끼어들고 싶을까
이찬규_공주사범대학 졸업.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졸업. 부천 상동중학교 교장. 부천 교사문학회 ‘글샘’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