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비라] 세계 정부로 가는 길 3-5: 유대인 천국, 매국노 천국 1904~1917 러시아 3-6. "두 마리의 호랑이를 모두 잡는 방법은 두 녀석을 서로 싸움 붙이는 것이다."
[세비라] 세계 정부로 가는 길 3-5: 유대인 천국, 매국노 천국 1904~1917 러시아
자주인라디오 2021. 10. 7.
[세상의 비밀을 들려주는 라디오] 영상에 등장하는 제정 러시아를 현재 [각국 국민]으로, 사회주의 혁명당(볼셰비키 전신)을 [각국 정부]로, 로스차일드(밀러 팀)를 [세계정부] 바꾸어 상상하면 재있는 그림이 펼쳐질 겁니다.
1904년 이전의 러시아.
알렉산더 2세(1818 – 1881)는 '러시아의 링컨'으로 불리며 노예를 해방하고 줄기차게 러시아를 개혁해 온 차르였다. 예카테리나 2세의 근시안적 자유주의로 인해 풀어 해쳐 귀족의 손으로 들어간 옛 농민의 토지를 백성의 편에서 해결하려 했다. 농노로 전락한 자영농을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려했다. 인민이 원하는 것이라면 주저 없이 허락해주려 했다. 러시아에서 그를 싫어하는 자들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차르의 권한을 빼앗으려는 지주-귀족들 뿐이었다.
1881년 3월 13일 그의 암살 다음 날, 입헌의회(두마)를 위한 법안은 거부되었다. 유대인 집단, '인민의 의지당'이 바라던 바였다. 암살자들은 차르의 개혁이 아니라 혁명을 원했다. 입헌의회 법안은 왕의 비서관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졌고 후임 알렉산더 3세는 “개혁은 끝났다”라며 암살에 관여한 슈테틀의 유대인들과 개혁 귀족을 강력하게 진압했다. 레닌의 친형(Alexander Ulyanov)이 참여한 인민의 의지당은 러시아의 진보를 막고 거꾸로 독재 혁명을 원했던 귀족 편에 섰다. 이들은 입헌, 민주화가 아니라 귀족과 함께 하는 권력 찬탈을 원했다. 이 노선은 SR(1901)로 그대로 이어진다.
한편 중상층과 귀족이 모인 Narodniks나 피요트르 크로포트킨과 같은 왕족, 고위층 자녀들이 모인 ‘차이코프스키 서클’이나 친서구 인텔리들은 자신들의 투쟁이 유대인의 정치투쟁에 의해 선택된 기만전술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차르 암살 시, 대다수 러시아인은 민족주의 청년들을 비난했지만 청년들은 젊은 패기를 가지고 끝없이 슈테틀 유대인의 정치적인 농간에 넘어가고 있었다. 1887년 형이 처형당한 일에 대하여 레닌은 “우리 형은 순진했다.”고 말한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혁명은 낭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알렉산더 3세는 차르를 암살한 비밀단체를 조사하고 회원을 체포할 비밀경찰을 조직할 수밖에 없었다. ‘안전보위부’(Okhrana, Department for Protecting the Public Security and Order)가 그것이었다. 이는 피터대제(1696-1725)의 경호실로부터 출발, 레닌의 체카(1917~1922)를 거쳐 KGB까지 이어지는 러시아 비밀경찰의 선조가 된다. 안전보위부는 유대인 테러단체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를 시작했고, 시베리아 유형을 처벌로 이용했다. 시베리아 유형을 강제노동 수용서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유형, 유배. 귀양에 불과했다. 1825년 데카브리스트 난동 장교들을 이르쿠츠크 같은 유통도시로 보내 그곳을 발전시킨 경우와 같다. 1860년 미하일 바쿠닌은 시베리아 유형 도중 결혼도 했고 인생의 자유를 마음껏 맛보았다고 했다. 서방 교과서에 나오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1905년 니콜라이 2세는 소비에트(노동자 자치위원회)를 인정했고 입헌의회도 허용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노동자 자치 사회주의 경제가 가능했다. 볼셰비키들은 사회주의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노동자 독재의 이름을 건 전체주의를 원했다. 스톨리핀을 암살한 보그로프(Mordekhai Gershkovich Bogrov) 같은 유대 사회주의자들이 보았을 때, 스톨리핀의 농지개혁 정책으로 인하여 혁명 기획이 무산될까 두려웠다. 보그로프는 안전보위부 요원이기도 했지만 아나키스트 혁명가이기도 했다. 그의 양극단의 위치는 당대 혁명가들과 유대인들이 어떤 환경 속에서 혁명을 꿈꾸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현실과 이상이 뒤죽박죽이었던 것이다. 인민의 의지를 몸소 실천한 스톨리핀은 그렇게 인민의 이름으로 암살당했다. 러시아에서와 같이 발칸에서도 약소 민족주의 스타일의 암살과 테러가 끝없이 벌어졌다. 그러나 대다수 프리메이슨의 공작에 의한 엉터리 사건들이었다.
[세비라] 세계 정부로 가는 길 3-6. "두 마리의 호랑이를 모두 잡는 방법은 두 녀석을 서로 싸움 붙이는 것이다."
자주인라디오 2021. 10. 9.
[세상의 비밀을 들려주는 라디오]
* 영상 서두에 이재명 낙점 운운하면서 그가 대통령이 안되면 영상을 지우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성급했지요. 알고 보니 수뇌부들이 나중에 윤씨로 낙점을 바꾸었더군요. 약속대로 지우려 했으나, 말리는 분들이 많고, 한 시간 정보를 1분의 잘못된 코멘트로 없애기도 뭐하기도 해서 그냥 놓아둡니다. 혼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자크 아탈리가 20년 전에 반복적으로 실토했듯이, “러일전쟁 도중 자콥 시프는 러시아의 1905년 혁명을 유발했다.” 어퍼컷에 뒤통수를 동시에 날리는 양수겸장은 시프 팀의 장기였다. 일본 또한 러시아 내란에 자금을 지원했는데, 이는 시프의 돈이 돌아서 나간 것이었다. 일본의 원숭이 습관은 제국 초기부터 있었다. 물론 러시아로서는 설상가상이었고, 영국으로서는 일거양득이었다.
독일과 러시아는 서로 피비린내 날 정도로 싸워주어야 했다. 미국의 은행들은 러시아에 기술적으로 융자를 해주었고, 독일은 루마니아와 러시아의 바쿠뿐만 아니라, 미국의 스탠더드 원유를 스칸디나비아를 통해 들여오고 있었다. 1915년 미국의 루시타니아호가 독일 유보트에 의해 침몰되었지만, 누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으로부터 물자를 실어 날랐던 독일선장, 쾨니히(Paul König)는 1916년, “독일 배들은 미국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석유 및 군사물자를 실어 날랐다.”고 현실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대서양을 촘촘하게 감시하던 영국 해군이 이를 몰랐을 리 없었다. 대전 당시 영국 해군의 독일해군탐사 보트장, 채터튼(Edward Keble Chatterton)은 영국정부가 이를 모두 눈감고 “일부러 적국 독일에게 공급을 허용했다.”고 밝혔다. 영국이 대서양 봉쇄에 적극적이었거나, 미국이 독일에로의 원유수송을 막았거나, 러시아가 바쿠 원유에 제재를 가했거나 친영 루마니아 정부를 설득, 독일에 석유를 끊었다면 독일은 그리 긴 시간(1914~18) 동안 전쟁을 끌 수 없었다.
로스차일드와 록펠러는 독일과 러시아가 전쟁을 계속하다가 국력이 약해지면, 적당한 시기를 잡아 미군을 유럽에 들여보내 전장의 환경을 청소시키고자 했다. 이때 혁명가들이 후방을 공격하여 러시아와 독일을 전복시키면 되는 일이었다. 이 양수겸장 시나리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그대로 반복되었다.
미군은 1917년 11월 5일에야 비로소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 청소부 역할에 들어갔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에서도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유럽 전쟁 청소부 역할을 했다. 미국이 가장 적은 인원, 가장 적은 비용, 가장 적은 전쟁기간을 통해 최대한의 이익을 뽑아냈지만, 러시아는 가장 많은 사상자, 가장 많은 비용, 가장 긴 전쟁 시간을 들여 가성비 형편없이 떨어지는 계산서를 받아 쥐는 멍청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Attali J.(2002), Les Juifs, Le monde et l'argent, France: Fayard, pp. 443-444
Keble Chatterton E.(1932), The Big Blockade, UK: Hurst & Blackett, p. 214.
König P.(1916), Voyage of the Deutschland, The First Merchant Submarine, USA: Hearst's International Library Co. p.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