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방영될 가요무대에서는 인기 가수 김연자 님이 <찔레꽃>을 열창합니다. <찔레꽃>은 많은 한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명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찔레꽃>은 가요무대에서 가장 많이 신청된 가요 중 하나라고 합니다. 가사에는 한국적 색채가 짙은 용어들이 많이 나오고, 따라 부르기도 쉬워 많은 한국인들이 애창하는 명곡이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찔레꽃>에 대해서는 ‘트로트의 백미’라는 평가가 있고 더 나아가서 ‘국민가요’라고까지 평가하기도 합니다
해마다 봄이 오면 한국의 들녘에 다소곳이 피어나는 찔레꽃은 한국인의 정서에 잘 녹아있는 꽃이라 할 수 있지요. 그동안 이 곡이 흰색으로 알려진 찔레꽃을 붉은 색으로 묘사한 데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지요. 붉은 색의 찔레꽃이 과연 존재하느냐라는 문제 제기였지요. 그러나 꽃 전문가들의 증언을 통해 붉은 색의 찔레꽃이 실제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지요.
<찔레꽃>은 1942년 발표됐던 가요로서 북간도에 거주하는 한 조선 여인이 고향과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노래이지요. <찔레꽃>은 일제 시대 조선의 어느 마을에 살던 국민학교 동창인 세 친구가 일제의 만행으로 뿔뿔이 흩어진 사연을 노래한 것이지요. 이 곡은 외형적으로는 고향과 친구를 그리는 내용이지만 그 이면에는 슬픈 사연이 깔려 있습니다.
찔레꽃
<찔레꽃>의 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 잊을 동무야
2.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던 세 동무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삼년 전에 모여 앉아 백인 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3.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
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
꾀꼬리는 중천에 떠 슬피 울고
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초가삼간
가사의 내용과 이 노래를 작사하신 김영일 선생님의 회고담을 토대로 아래와 같이 스토리를 재구성해봤습니다.
일제 시대 조선의 어느 마을에 국민학교 동창인 세 친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세 친구는 마음이 잘 맞아 항상 같이 놀러다녔고, 달 뜨는 저녁에는 한데 모여 북두칠성을 쳐다보며 학교에서 배운 노래나 유행 가요를 노래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세 친구는 얼마 뒤에 일제의 침략전쟁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한 친구는 가족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이사를 갔고, 가자마자 정신대 소집을 피해 시집을 가야 했습니다. 또 한 친구는 불행하게도 정신대에 끌려가 타지로 갔고, 다른 친구는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그 중 북간도로 떠난 한 친구는 친한 친구 하나없는 천리 타향에서 나날이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짙어만 갑니다. 고향 언덕의 초가삼간집, 들녘에 흐드러지게 핀 찔레꽃, 들판을 날라다니던 꾀꼬리, 호랑나비, 이별가를 불러주던 친구들이 기억이 났습니다. 그럴 때마다 3년 전에 함께 모여 웃으며 찍은 사진을 한없이 쳐다보며 즐거웠던 시절을 회상하곤 합니다. 또 밤마다 하늘을 보며 친구들과 보았던 북두칠성을 쳐다보곤 했습니다. 이제 혼자서 북두칠성을 바라보다가 고향에서 친구들과 보던 북두칠성이 생각나 밀려오는 외로움에 서러움이 북받쳐 오릅니다.
<찔레꽃>에는 천리객창, 북두성, 백인, 동무 등 생소한 용어들이 나옵니다. 천리객창은 머나먼 타향에서의 고달픈 객지살이, 백인은 사진을 찍은, 북두성은 북두칠성을 뜻합니다. 동무는 일제시기에 많이 사용된 용어로서 친구를 뜻하지요. 이 시기 많이 불려진 <동무 생각>, <봄노래 부르자> 등의 노래에는 동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한편 현재의 <찔레꽃>은 악보마다 용어가 조금씩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정확한 것은 발표 당시의 SP 음반과 가사지에 적힌 원가사이지요. 발매 당시의 SP 음반과 가사지에 의하면 1절의 ‘못잊을 사람아’는 ‘못 잊을 동무야’, 2절의 ‘노래하던 동창생’은 ‘노래하던 세 동무’, ‘작년 봄에’는 ‘삼년 전에’, ‘찍은’은 ‘백인’이 정확한 표기입니다.
북두칠성
<찔레꽃>이 발표된 시점은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개시한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을 거쳐 1941년 미일전쟁을 도발한 때입니다. 일제는 계속되는 침략전쟁에 물자들을 동원하고자 조선인을 철저히 이용했지요. 1936년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는 전시체제하에서 일본군의 식량을 조달하고자 쌀농사에 익숙한 조선인 100만명을 만주에 강제 이주시켜 쌀을 생산하게 했지요. 또한 수많은 노동 현장에 조선인을 내몰아 강제 노동을 시킵니다. 조선 여자들도 많은 수난을 당했지요.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조선 여자들은 1939년부터 근로정신대로 끌려가기 시작합니다. 이 노래에 나오는 여자 동창생 두 명은 이같은 일제의 침략전쟁으로 외지로 뿔뿔이 흩어진 것이지요. 그 결과 세 친구들은 더 이상 한데 어울려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됩니다.
강제 동원됐던 근로정신대 소녀들
일제 시기는 엄혹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듯 따뜻한 봄날 즐겁게 뛰어놀았던 고향과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노래들이 많이 불려졌습니다. 동요 <고향의 봄>, 가곡 <동무 생각>, 대중가요 <봄노래 부르자>, <타향살이> 등이 대표적인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찔레꽃>도 그러한 시대 분위기에서 지어진 곡이라고 할 수 있지요. <찔레꽃>은 특히 북간도라는 머나먼 곳에서 고향을 그린 노래라서 더욱 애절하게 들립니다. 북간도는 두만강 건너 소재하는 지역으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연변 지역을 포함하지요. 몇년 전 겨울에 연변의 들녘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춥더군요. 노래의 주인공은 그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맞는 새봄이라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찔레꽃>은 발표 당시에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고 합니다. 조선총독부가 전시체제 하에서 애절한 가요보다는 우렁찬 군가를 틀 것을 강요했고, 음반에 20%의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찔레꽃>은 해방 이후 도시화, 산업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애창하는 노래로 큰 인기를 끌게 되지요. 이 노래는 찔레꽃, 남쪽 나라, 초가삼간, 자주고름 등 한국적 색채가 짙은 단어들로 인해 절로 고향 생각에 빠지게 하지요.
<찔레꽃>은 처음에는 북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이 고향을 그리는 노래로 시작했지만 점차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민족의 노래로 격상됐습니다. 고향을 애타게 그리는 심정은 시대와 국적을 떠나 보편적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해외로 이민을 갔든, 국내에서 거주하든 고향을 떠나 타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이 노래에 공감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차별과 풍파를 겪을 때마다 아늑했던 고향과 친구들에 대한 생각이 더욱 깊어져 이 노래를 따라 불렀겠지요.
< 찔레꽃 >은 본래 3절의 가사로 되어 있습니다. 이 곡은 3절까지 들어야 곡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지요. 3절에 이 곡의 주인공이 거주하는 북간도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5월 30일 방영됐던 가요무대에서는 < 찔레꽃 >을 2절까지만 들려주더군요. 2절까지만 들려준 것은 나무로 치면 줄기만 남기고 뿌리를 뽑아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