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풍수지리 명사의 전승계보 연구
■ 500~600년대
▶ 왕숭(王崇), 조사열(趙師說) : 생몰년대와 구체적인 활동내역, 저술은 알 수 없으나 道詵國師는 無憾錄에서 명사로 기술
■ 600~700년대
▶ 의상대사(義湘大師)(625∼702)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 개조(開祖). 속성 金氏 아버지는 한신(韓信). 浮石寺 등 전국 명찰 창건. 두사충은 《지경》에서 신승으로 평가
▶ 이천상(李天祥)(600년대)
전주이씨 시조 이 한(李 翰)의 손자. 이한을 全州 乾止山 조경단(肇慶壇)에 장사함.
■ 800~900년대
◉ 師弟傳承 : 道詵(827~898) ⇒ 강해(江海), 남아(南阿) ⇒ 독원(讀園)
▶도선(道詵)(827~898)
우리 나라 풍수지리 비조(鼻祖). 전남 영암 출생. 속성은 최씨 또는 김씨. 《십조통맥》《옥룡자 유산록》《구천현묘비서》《무감록》등을 저술. 고려 태조 왕건 생가, 전북 옥구 김씨, 전남 영암 신씨, 강원도 춘천 신숭겸 묘소 등을 소점. 영암(靈巖) 출생(出生)이며 속세(俗世)의 성(姓)은 김(金)이며 호는 옥룡자(玉龍子)다. 통일신라(統一新羅)때의 승려였다. 15歲에 구례 화엄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으며 지리산(智異山) 서봉(西峰)인 월류봉(月流峰) 인접(隣接) 구례군 마산면 사도리에서 풍수지리(風水地理)를 공부(工夫)하였다. 4年만인 846年 풍수(風水)에 통달(通達)하여 신승(神僧)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중국(中國)의 남돈선(南頓禪)을 받아들인 혜철(惠哲)의 무설설무법(無說說無法)의 법문(法問)을 듣고 오묘(奧妙)한 이치(理致)를 깨달았으며, 이를 신라(新羅)의 토양(土壤)과 풍습(風習)에 적용(適用)하고자 했다. 문제(問題)가 있는 땅에 탑(塔)을 세우거나 절을 지어 그 기운(氣運)을 제압(制壓)하는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이 그것이다. 저서(著書)로는『도선비기(道詵秘記)』『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등이 있으나 확인(確認)되지 않았으며, 그에 관한 설화(說話)는 옥룡사(玉龍寺) 비문(碑文)등에 새겨있다.
▶ 강해(江海): 道詵은《옥룡자 유산록》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로 평가 활동 사항은 미상
▶ 남아(南阿)(834~??) : 생몰연대, 활동 사항 등은 미상
▶ 독원(讀園) : 생몰연대, 활동 사항 등은 미상
■ 900~1000년대
▶ 왕욱(王郁)(936?~996) 고려 현종의 아버지로 자신의 묘지를 경남 사천의 성황당 남녘 귀룡동에 복매할 것을 지시
■ 1100~1200년대
▶이대극(李大克) (1170년대)
고려 명종(1171~1198) 시대 국지사. 이한의 묘소 발음으로 이씨의 조선 건국 예상.
▶묘청(妙淸) ( ? ~ 1135)
서경(西京) 평양(平壤) 출생(出生)의 스님이자 풍수(風水)로써 도선설(道詵說)의 신봉자(信奉者) 이다. 인종6년 정지상, 백수한 등과 함께 서경의 임원역으로 천도할 것을 주청했다. 인종이 친히 묘청과 배수한을 대동하고 서경 임원역으로 행차하여 답사하고 김안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하였다. 당시의 혼란한 내외 정세를 이용, 사대부들의 세력을 꺾기 위하여 서경천도를 획책했으나 김부식등 사대주의자들의 반대로 좌절 되었다. 왕에게 계속하여 천도를 주청했으나 불가능해지자 1135년 서경에 기반을 두고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고 천견 충의군을 조직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반란군은 김부식에게 섬멸되고 묘청 자신은 부하 조광에게 피살되어 개경에 효시되었다. 그의 피살후 묘청, 백수한, 정지상, 유참, 조광등의 처자들은 적몰되어 노비가 되었다.
▶김 위제(金謂纖)(고려 숙종)
생몰년 미상. 고려 중기의 술가(術家)이며 고려 숙종 · 예종 때의 풍수지리가 이다. 도선기 등의 풍수서적(風水書籍)을 인용하여 한양(漢陽) 오덕구설을 상소하였다. 조선(朝鮮)이 건국(建國)한 後 한양(漢陽)을 도읍지(都邑地)로 정한 데는 김 위재의 이론적(理論的) 뒷받침이 크다고 한다. 고려 숙종 1년(1097) 위위승동정(衛尉丞同正)을 지냈고, 예종 때는 주부동정(注簿同正)을 지냈다. 도선(道詵)의 지리도참설을 신봉하고 그 원리를 탐구하여 술수에 밝았다. 특히 1097년에는 당시의 비기(秘記)였던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신지비사(神誌秘詞)》 등 도선의 도참설(圖讖說)이론을 근거로 하여 남경(南京 : 지금의 서울)으로 천도를 하면 사해가 모두 조공을 바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남경은 오덕(五德 : 목(木)· 화(火) · 토(土) · 금(金) · 수(水))을 두루 갖추고 있고, 〈답산가(踏山歌)〉에 고려 개국 후 160년이 지나면 남경(목멱;木覓)으로 도읍을 옮기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면서 이곳에 도성을 쌓아 사직의 부흥을 일으킬 것을 역설하였다. 이에 1099년(숙종 4) 9월 숙종이 친행하여 지세를 답사한 후 1101년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 · 지주사(知奏事) 윤관(尹瓘) 등에게 궁궐의 착공을 명하여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을 두었고, 1104년(숙종 9) 궁궐이 낙성되었다.
▶백승현(白勝賢)(고려고종)
고려 고종 때의 풍수지리가·도참 사상가이며 정확한 생몰연대를 알 수 없다. 그는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명당과 산세(山勢)를 살펴 길흉을 점치는 일을 직업으로 한 술사(術士)로 고종 말년에 천거을 받아 중랑장(中郞將)이 되었다. 몽고가 침입하여 1264년(원종 5) 몽고가 화평을 구실로 왕의 입조(入朝)를 요구하자 강화도(江華島)에 있던 왕이 나라의 운명을 연장할 수 있는 땅이 어디인지를 묻자, 삼랑성(三郎城 ;현제의 전등사 일대)과 신니동(神尼洞)에 궁궐을 지을 것을 권하였다. 이에 왕이 여러 사람에게 토의하도록 하니 판사천국사(判司天局事) 안방열(安邦悅) 예부시랑 김궤(金軌)등이 마니산은 흉산(凶山)이므로 믿을 수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도가(道家)의 비록(秘錄)과 음양도참(陰陽圖讖) 등의 책을 예로 들어 주장을 관철하여 김준이 일을 강행하였다. 후에 도참설에 의거하여 왕의 이름 '정(禎)'을 '쇠(釗)'로 고치도록 청하여 개명하였으나 효험이 없었으므로 환원되었다. 백승현의 풍수설은 도참적 성격이 강하다.
▶호종단(胡宗旦) (韓國, 中國 12세기 초반, 생몰연대 미상)
송(宋)나라 출신의 고려 귀화인(歸化人) 송나라 푸저우[福州] 출생으로 복주 사람으로 상단을 따라 고려에 왔다. 일찍이 태학(太學)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그는 예종의 총애를 받아 좌우위 녹사(左右衛錄事)가 되고, 1111년(예종 6) 우습유(右拾遺)· 지제고(知制誥)에 이어 권지직한림원(權知直翰林院)이 되었으며, 보문각대제(寶文閣待制)를 거쳐 인종 때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다.
예종(1105~1122)의 남방정책의 일환으로 제주도엔 13개의 명당이 있어 천하제일의 인재들이 쏟아져 나와 세상을 주도하리라는 것을 믿고 압승지술(壓勝之術 명당기운을 억누르는 기술)의 대가 호종단을 제주도로 보내 13혈(穴)을 찾아 침질을 하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주로 제주도에서 활동한 기록이 많음.
■ 1300~1400년대
▶신돈(辛旽) ( ?~1371)
본관은 영산, 승명은 편조(遍照), 자는 요공(耀空)이며 공민왕이 청한거사는 법명을 내렸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영산에 무덤이 있었다는 것만이 확인될 뿐이며, 어머니는 계성현 옥천사의 노비였다. 어려서 숭려가 되었지만 모계 때문에 주위의 용납을 받지 못하고 늘 산방에 거쳐하였다. 1364년 두타승(頭陀僧)이 되어 국정을 자문하였는데 왕이 따르지 않는 바가 없었으며, 그로 인하여 많은 추종자가 생기게 되었다. 마침내 1365년 5월에 최영(崔瑩)을 비롯하여 이인복(李仁復), 이구수(李龜壽),등을 거세하면서 세력을 쌓았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부당하게 빼앗긴 토지와 강압에 의하여 노비가 된 백성들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과감한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성인으로 찬양받기까지 하였다. 그는 또 토지개혁에 머물지 않고 풍수지리의 지기 쇠왕설을 근거로 서경천도를 획책했으나 역모의 누명을 쓰고 수원으로 귀양을 갔다가 죽었다. 도선에서 묘청으로 이어진 개혁사상으로서의 풍수사상이 무학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이양달(李陽達)(1350~1430)
고려와 조선 두 왕도에서 활동한 풍수이다. 조선개국 초 도읍지 선정에 참여한 공로로 1432년 80세에 세종으로부터 역사상 풍수가 받은 최고의 벼슬인 서운관판사(1품)를 제수 받았다. 한양의 도읍지 불가론을 내세운 윤신달, 유한우 등에게 타당성을 강력하게 피력하였으며, 그후 세종 때 명당 논쟁이 재연되나 일괄되게 한양 명당론을 주장하였다. 그가 공식적으로 잡은 능은 태종의 무덤인 헌릉이다.
▶고중안(高仲安) (고려 말엽~ 조선조 세종)
세종 때까지 살지 않았는가, 추정되며 태종 18년에 서령(署令)으로 벼슬을 시작한 사람이다. 세종3년에 예조판서 이지강(李之剛)등과 함께 영녕전의 터를 잡았으며, 낙성과 더불어 목조의 신위를 종묘에서 영년전 제1실로 옮겼다. 또 당대에 논란이 되었던 경복궁 명당 논쟁이나 헌릉 봉요 논쟁에도 참여했다. 갖가지 풍수 서적이 범람하여 혹세무민 하는 현실을 개탄 하고 정리 했다.
◉ 師弟傳承 : 나옹(懶翁) ⇒ 무학(無學)
▶나옹화상(懶翁和尙)(1320~1376)
법명은 혜근(惠勤). 경북 영덕 출생. 황희 정승 조부 황균비의 장지를 전북 남원시 대강면에 점지함.
▶무학대사(無學大師)(1327~1405)
속성은 박씨, 당호는 계월헌溪月軒. 경남 합천군 삼가면 출신.《무학진법론》《東師心傳》저술. 조선 수도 한양, 원주 석경촌 원천석 묘, 충남 서천 한산면 목은 이색의 부친 장지 소점.
본명은 박 자초 호는 무학으로 합천에서 태어났다.18세에 소지선사의 제자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았고 혜명국사에게서 불법을 배웠다. 진주 길상사, 묘향산 금강굴 등에서 수도하다가 공민왕2년 원나라 연경에서 유학하였는데 그때 원에와 있던 인도의 고승 혜근과 지공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392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되어 회암사에서 지냈으며 이듬해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을 오가며 땅을 보고 도읍을 옮기는데 찬성하였다. 왕명으로 회암사 북쪽에 수탑을 세우고 회암사의 감주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직, 금강산 금장암에 머물다가 죽었다. 저서에『불종파지도』『인공음』이 있다. 무학대사가 찾아 주었다고 전해지는 소점지로는 정종과 왕비 정안왕후 김씨의 능인 후릉, 이색의 조모묘, 운곡 원천석 등의 묘, 조말생의택지, 남산기슭 비서감 동쪽 권람의 택지, 만리현에 있는 이정보의 집터 등이 있다.
▶정도전(鄭道傳)(1342∼1398)
1342(충혜왕 복위 3)∼1398(태조 7).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가·학자. 선향(先鄕)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향리집안 출신으로 고조할아버지는 봉화호장 공미(公美)이고, 아버지는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를 지낸 운경(云敬)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우연(禹延)의 딸로서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어려서 경상북도 영주에서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 와서 아버지의 친구인 이곡(李穀)의 아들 색(穡)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紹宗) 등과 함께 유학을 배웠으며 문장이 왕양혼후(汪洋渾厚)하여 동료사우의 추양(推讓)을 받았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成均試), 1362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충주사록·전교주부·통례문지후 등을 지냈다. 1392년 4월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에게 살해되고 반대세력이 제거되자, 7월 조준·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했다.
개국직후 17조목의 편민사목(便民事目)에 관한 태조의 교지(敎旨)를 지어 새 왕조의 국정방향을 제시했다. 이어 개국공신 1등으로 문하시랑찬성사·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겸판상서사사·보문각대학사·지경연예문춘추관사·겸의흥친군위절제사를 겸직하여 정권과 병권을 장악했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피살됨. 유학(儒學)의 대가로 조선개국 후 군사, 외교, 성리학, 역사, 행정, 저술 등 다방면에 걸쳐 조선 초기의 건국 작업에 활약했으며, 척불숭유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을 기했으며 글씨에도 뛰어났다.
본관 안동. 자 용부(容夫). 호 동고(東皐). 시호 문절(文節). 1353년(공민왕2) 문과에 급제하여, 대언(代言)을 거쳐, 지신사(知申事)로 전선(銓選)을 맡아보고, 우왕(禑王)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르렀다. 1390년(공민왕 2)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었다 하여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와 문하찬성사 ·상의찬성사(商議贊成事)를 역임하였다. 1392년 조선개국 후 문하부판사(門下府判事)에 올라 1396년(태조 5)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7년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예천백(醴泉伯)에 봉해진 뒤 치사(致仕)하였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고, 고사(故事) 및 의학 ·지리 ·복서(卜筮: 점)에도 통달했으며, 전서(篆書)를 잘 썼다. 작품으로는 글씨에 《회암사 나옹화상비(檜巖寺懶翁和尙碑)》(楊州)《광통보제사비(廣通普濟寺碑)의 전액(篆額)》(開城) 등이 있다.
▶하륜(河崙) (고려 충목왕3~조선 태종16) (1347~1416)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며 본관은 진주,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아버지는 순흥부사 윤린(允潾)이다. 1360년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1365년 문과에 급제했다. 밀직사첨서사를 거쳐 1388년 최영(崔瑩)의 요동 공격을 반대하다가 양주로 귀양을 갔다. 조선 개국 후 1393년 경기 관찰사일 때 태조 이성계가 신 도읍지로 계룡산으로 정하고자 하자〔지리신법〕을 근거로 부적격함을 주장하였다. 태조가 받아들일 정도로 그는 풍수지리에 해박했다. 그는 태조의 명에 따라〔무악(지금의 연세대 근방)천도론〕을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때〔도선비기론〕에 근거하여 주장하였다. 그는 태실을 정하기 위해 태실중고사 자격으로 전국을 순회하였다. 또 그는 태종6년 극심한 가뭄이 들자 자청하여 소격정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태종8년 이성계가 죽자 김인귀가 한 무덤자리를 영의정인 그가 낙점 하였다. 그는 중국의 호신순을 근거로 한 현재의 이기론 풍수의 선구자라 할 수 있으나, 중국의 술수성이 강한 이기론풍수를 유행하게 만듦으로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게 한 장본인이기도하다. 태종의 즉위로 좌명공신이 되었고,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좌정승에 복관, 승추부판사를 겸하였다. 문집에〔호정집〕이 있다.
■ 1400~1500년대
조선조 초기의 문신이자 집현전 학자로 본관은 하동(河東)이며 자는 백저(伯雎)이다. 그리고 호는 학역재(學易齋)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아버지는 석성현감 흥인(興仁)이며, 어머니는 진천의(陳千義)의 딸이다. 권우(權遇)의 문인이다. 문집에 《학역재집(學易齋集)》이 있고, 편저로 《고려사(高麗史)》《역대역법(歷代曆法)》《역대병요(歷代兵要)》《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등이 있다. 훈민정음 창제와 고려사, 용비어천가 등 저술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 세조 즉위를 도와 영의정까지 올랐다. 세종 때 《경복궁명당논쟁》과 태종 무덤인 《헌릉논쟁》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풍수이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83세에 멸하여 괴산군 불정면에 묻혔다.
▶문맹검(文孟儉) (생몰연대는 미상)
생몰연대는 미상이다. 세종 말부터 세조 때까지 활동한 것으로 보아 풍수학 시험을 거처 지관으로 임명된 전문 술사이다. 세종26년에 수릉선정에 참여했다. 궁궐뒤 불당 조성 입지를 선정했다. 이 사건은 유명한 사건이다. 대신들 일부와 풍수들 까지도 반대했는데, 억불숭유정책의 변화를 예고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각 지방의 지형지세에 따라 산천 정기가 다르다는 것을 젓을 전제로 한 점에서 도선의 풍수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어효첨(魚孝瞻) (1405~1475)
조선 초기 직제학 어 변갑(變甲)의 아들로서 자는 만종(萬從), 호는 구천(龜川), 시호는 문효(文孝)이며 본관은 함종(咸從)이다. 직제학 성사제의 외손, 좌의정 박은의 사위이다. 세종12년(1429)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참의를 거쳐 이조, 호조, 병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냈고 세조 9년에는 이조판서, 성종5년에는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성품은 순결하고 학문에 조예가 깊어 음양풍수 등의 미신을 적극 배척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아버지 장례 때에도 지관을 부르지 않았다고 해동 명신록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는 풍수지리설을 철저하게 배척한 반 풍수론자였다. 그의 풍수관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국역풍수론이다. 간략하게 말하면 풍수지리가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묘지 풍수론인데 이에 대해 그는 풍수 지리서를 공부하여 세종의 수릉 선정에 관여할 정도의 실력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26년 마침내 논풍수소(論風水疎)를 제출하는데, 그 핵심은 묘지풍수의 이론을 국토풍수에 적용 할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해 서울을 깨끗이 하자면 청계천 물을 맑게 해야 한다고 했던 황희, 신개, 하연, 김종서, 정인지 등의 주장에 반하여, 도시를 깨끗이 하기 위해서는 청계천에 생활쓰레기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 했다. 세종은 논리가 정연한 그의 탁견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동감하지는 않았다.
▶최호원(崔灝元) (1421~1502)
자는 혼연(渾肰) 관직은 첨지사(僉知事), 단종(端宗) 1년 (1453) 계유(癸酉) 증광시(增廣試) 정과(丁科)에 합격했으며 세조(世祖) 14년(1468) 무자(戊子) 중시(重試)에 합격함. 조선조 세종3년인 1421년 태어나 연산군 때까지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유학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유학자 출신의 조정 신하들과 사관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파직과 투옥을 겪었다. 그는 당시의 풍수들과 달리 도선 국사의 비보풍수를 신봉하였다. 그는 과거에 두 번이나 급제한 유학자 출신이면서도 주변의 비웃음을 감내하며 평생 풍수 역할을 당당하게 해 냈다. 그는 또한 중국의 풍수이론을 거부한 토종풍수였다.
▶조윤(趙倫) (韓國 1450~1500년대 초반 생몰연대미상)
중종의비인 인종의 모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 선정에 주도적 역할을 했으나 사후 의릉이 잘못 정해졌다하여 사후 부관참시를 당했다.
◉ 師弟傳承 : 無學 ⇒ 己和
▶기화(己和)(1376~1433) 법호는 涵虛. 충북 충주 출생, 劉씨
조선 전기의 승려로 여러 산을 편력하며 학인(學人)들을 지도하고 수도했다. 저서에 《원각경소(圓覺經疏)》 등 많다. 본관 충주(忠州). 속성 유(劉). 이름 수이(守伊). 법호 득통(得通). 당호 함허(涵虛).
1396년(태조 5) 관악산 의상암(義湘庵)으로 출가하였으며, 이듬해 회암사(檜巖寺)로 가서 무학왕사(無學王師)에게 법요(法要)를 배운 후, 여러 곳을 다니다가 다시 회암사에 가서 홀로 수도에 정진하였다. 그 뒤 공덕산(功德山)의 대승사(大乘寺), 천마산(天摩山)의 관음굴(觀音窟), 불희사(佛禧寺) 등에서 학인(學人)들을 지도하고 자모산(慈母山) 연봉사(烟峰寺)에 들어가 함허당(涵處堂)이라 이름하고 3년간 수도를 계속하였다. 1420년(세종 2) 오대산에 가서 여러 성인들을 공양하고 월정사(月精寺)에 있을 때 세종이 청하여 대자어찰(大慈御刹)에 머물렀다. 4년 후 이를 사퇴하고 길상(吉祥)·공덕(功德)·운악(雲嶽) 등 여러 산을 편력하다가 1431년 희양산(曦陽山)에 이르러 봉암산(峰巖寺)를 를 중수(重修)하고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에 《원각경소(圓覺經疏)》《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현정론(顯正論)》《반야참문(般若懺文)》 《윤관(綸貫)》 등이 있다.
▶학조(學祖)(14??~15??) 호 등곡(燈谷) 경북 안동 풍산 출신으로 안동 김씨 金係權의 장남.
안동 소산의 김계권의 묘소와 김번(1479~1544) 묘소 점지 ·황악산인(黃岳山人). 세조 때 여러 고승들과 함께 불경을 한글로 번역 ·간행하고 1464년(세조 10) 속리산(俗離山) 복천암(福泉庵)에서 왕을 모시고 신미(信眉) ·학열(學悅) 등과 함께 대법회를 열었다. 1467년 왕명으로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중창에 착수하고, 1487년(성종 18)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뜻을 받들어 해인사 《대장경》 판당(板堂)을 중창하였으며, 1500년(연산군 6) 신비(愼妃)의 명으로 해인사의 《대장경》 3부를 간인(刊印), 그 발문(跋文)을 지었다. 《남명집(南明集)》을 언해하고 1520년(중종 15)에는 왕명으로 다시 해인사 《대장경》 1부를 간인하였다.
▶하성부지(何姓不知)(14??~15??)
정집(鄭集)의 묘와 이창수(李昌壽)(전북 완주)의 묘 소점
▶이현로(李賢老)(?∼1453 ; 단종 1)
조선 초기의 문신. 초명은 선로(善老). 본관은 강흥(江興). 광후(光後)의 아들이다. 1438년(세종 20)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집현전교리를 거쳐, 1447년 병조정랑이 되었다. 이해 환자(宦者) 최읍(崔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매관(賣官)한 것이 탄로나 남평으로 유배되었다가, 1451년(문종 1) 방환되어 부사직·승문원교리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사직으로서 수양대군(首陽大君)측으로부터 안평대군(安平大君)에게 아부하여 권세를 부린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가,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남원으로 귀양가는 도중 정분(鄭苯)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일찍이 풍수지리설을 익혀 백악산(白嶽山)뒤에 궁궐을 짓지 않으면 정룡(正龍)이 쇠잔, 방룡(傍龍)이 일어날 것이라고 발설하였다가 조정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평소 유사(儒士)로 자처하면서 시부(詩賦)를 일삼다가 안평대군과 가까워졌고, 이를 기화로 교만하여져 뭇사람을 업신여겼다.
▶안효래(安孝禮) ( ?~1477)
중인 출신으로 세종 때 말단 벼슬에 진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 문종 단종 등 세 임금 시절에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수양대군 편에 가담함으로써 세조가 등극하자 원종공신에 봉해진다. 세조가 죽자 예종이 당상관으로 승진시켜 세조의 능침 선정에 참여케 했으며, 세종이 묻힌 영릉의 천릉 작업에도 관여 했다.
▶최양선(崔揚善)(14세기후반~15세기후반)
조선조 초기 유학자가 아닌 그는 종3품의 벼슬에 오르고 80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태종에서 세조까지 5대에 걸쳐 상지관으로 재임했다. 풍수지리의 기본기를 충분히 정립하여 논리 정연한 이론을 주장했다. 헌릉논쟁, 경복궁명당논쟁 등이 그에 의해 제기되어 수십 년 시끄럽게 한 장본인이다. 세조 10년 헌릉 고갯길 차단과 경복궁 흉지론을 상소하여 세조를 알현하고 의복을 하사받는 은총을 입은 바 있다. 풍수지리학적 관점에서 “서울의 동쪽, 서쪽 봉우리는 정궁인 경복궁의 양 팔과 같아 닫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숙정문을 폐쇄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따라 길에 소나무를 심고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시킴으로써 축조한지 18년만인 1413년(태종 13)에 숙정문을 폐쇄시키게 되었다.
1430년에는 종7품인 서운관장루(書雲觀掌漏)로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1433년 행부사정(行副司正)·행사정(行司正)의 체아직(遞兒職)을 지냈다. 이때 목멱산(木覓山)에 올라가 땅의 생김새를 살펴보고 길흉을 판단하여 태종의 헌릉로방새(獻陵路防塞)와 경복궁이 명당이 아니고, 승문원(承文院)의 자리가 실제로 명당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조정이 매우 혼란에 빠지게 되자 신하들은 물론 세종까지 직접 나서서 백악(白岳)에 친행하여 경복궁이 명당임을 확인하기에 이르렀고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세종은 집현전에서 풍수학 강의를 열기도 하였다. 이처럼 물의를 일으킨데 대한 책임을 물어 10여 년간 관직을 삭탈당했다가 1443년 서운부정(書雲副正)의 종3품직으로 복직되었고, 1460년(세조 6)에 원종3등공신(原從三等功臣)에 올랐다. 그 후 1464년 헌릉천천현(獻陵穿川峴)을 군사 요새로 만들 것을 건의하였고 실제로 이 의견은 가납되었다.
▶목효지(睦孝智)( ? ~1455 )
전농시 소속(所屬)의 노비(奴婢)로 애꾸눈이었다. 문종왕후(文宗王后)의 릉 (陵) 을 정(定) 하는데 일조 했다. 그 공으로 노비(奴婢)의 신분(身分)을 벗어났다. 8 年後 경기도 마전에 새 명당(明堂) 에 관(觀) 한 장문의 상소(上訴) 를 올렸다. 왕능(王陵) 으로 쓰여 지기를 바랐으나 世宗의 觀心을 얻지 못했다. 그 해 8月 궁궐(宮闕)뒤에 불당설치(佛堂設置)에 대한 불가상소(不可上訴) 를 올렸다. 상소내용(上訴內用) 의 과격(過擊) 함으로 세종(世宗)의 노여움을 사 다시 종으로 환원(還元) 되어 버렸다. 1542年(년) 문종(文宗)의 무덤자리로 예정(豫定) 된 자리가 적절치 못함을 지적(知的)하여 단종(端宗)의 후의(厚意)를 입어 노비(奴婢)에서 풀려났으나 세조(世祖)가 즉위(卽位) 하자 죽음을 당했다. 그로부터 300여년(餘年)이 지난 1791 年(년) 정조(正祖)에 의해 신원(身元) 되었다.
■ 1500~1600년대
▶이지함(李之菡, 1517~1578)
본관 한산(韓山). 자 형백(馨伯)·형중(馨仲). 호 수산(水山)·토정(土亭). 시호 문강(文康). 《토정비결(土亭祕訣)》의 저자이다.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의 흙담 움막집에서 청빈하게 지내 토정이라는 호가 붙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현령 이치(李穉)의 아들이며, 북인의 영수 이산해(李山海)의 숙부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인 이지번(李之蕃)에게서 글을 배우다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 들어갔다. 경사자전(經史子傳)에 통달하였고,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역학·의학·수학·천문·지리에도 해박하였다. 1573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6품직을 제수받아 포천 현감이 되었으나 이듬해 사직하였다. 1578년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어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다. 박순(朴淳)·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 교유했으며, 당대의 일사(逸士) 조식(曺植)은 마포로 그를 찾아와 그를 도연명(陶淵明)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의 사회경제사상은 포천 현감을 사직하는 상소문 등에 피력되어 있는데, 농업과 상업의 상호 보충관계를 강조하고 광산 개발론과 해외 통상론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것이었다.
《토정비결》은 이지함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퍼져 사람들이 찾아와 1년의 신수를 보아 달라는 요구로 지은 책으로, 이지함과는 관계없이 그의 이름을 가탁한 책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지함은 주자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는 사상적 개방성을 보였으며, 이러한 까닭으로 조선시대 도가적 행적을 보인 인물들을 기록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도 소개되어 있다. 또한 이지함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김계휘(金繼輝)의 질문에 이이가 '진기한 새, 괴이한 돌, 이상한 풀'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이지함의 기인적 풍모를 대변해 주고 있다. 171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보은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으로는 《토정유고(土亭遺稿)》가 전한다.
▶황득정 (黃得正) ( ? ~1537)
조선조 중종의비 장경왕후의 묘지 선정에 관여한 중종때 상 지사였다. 훗날 희릉사건에 연루되어1537년 문초를 당하던 중 장독으로 죽었다.
◉ 師弟傳承 : 두사충(杜師忠) ⇒ 나학천(羅 鶴天) ⇒ 박승선( 朴承先) ⇒ 난삼( 蘭三 )
▶두사충(杜師忠) (중국, 16세기 후반~1620년경)
호 慕明 임진왜란 때 이여송 장군을 따라 왔다 귀국. 정유재란 때 두 아들과 재차 건너와 귀화. 《地鏡》저술(일명 모명유결). 明나라 수군(水軍)도독 진린(陳隣)의 처남(妻男)으로서 진지(陣地)의 위치(位置)를 정(定)해주는 복야라는 관직(官職)을 맡아 우리나라에 들어온 군인(軍人)이자 풍수가(風水家)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끝나고 귀국(歸國)했으나 정유(丁酉)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조선(朝鮮)에 와 대구(大丘)에 정착(定着)해 살다가 죽었다. 그는 대구(大丘) 만촌동에 묻혔고 후손(後孫) 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살고 있다.
▶나학천(羅鶴天)(15--~16--)
호 鳳眼. 중국에서 정유재란 때 두사충을 따라 건너와 귀화. 《나봉안비결(羅鳳眼秘訣)》저술. 임진왜란 때 이여송의 지리참모로 조선에 왔던 두사충(杜師忠)의 사위인 나학천은 중국 남경의 건주(建州) 출신으로 장인과 함께 조선에 귀화한 인물이다.
▶시문용 (施文用) (중국, 한국에 귀화, 1572~1643)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조선에 귀화한 명나라의 장수. 우리나라 절강시씨의 시조이다. 중국 절강성[浙江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명나라 병부시랑을 지낸 윤제(允濟)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격장군 남방위(藍方威) 휘하의 행영중군(行營中軍)으로 종군해 7년 동안 많은 전공을 올렸다. 난이 끝난 뒤 병이 들어 귀환하지 못하고 성주(星州)에 정착, 귀화했다. 선조는 그의 전공을 포상해 첨지중추부사를 내렸다. 군사·풍수·의술에 능해 1616년(광해군 8) 정인홍(鄭仁弘)의 으로 궁궐 및 왕릉 축조사업에 참여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정권이 몰락하자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을 착취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했다. 정조 때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저서로 〈병학기정 兵學奇正〉〈감여지남 堪輿指南〉〈의복묘결 醫卜妙訣〉 등이 있다.
▶섭정국(葉靖國)(한국에 귀화, 조선 선조때 활동)
임진왜란때 두사충과 함께 들어온 명나라 술사. 중국의 여러 술사들 가운데서 가장 각광을 받은 이는 섭정국(葉靖國)이었다. 그는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윤근수(尹根壽)와 가까워 왕실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풍수에 관한 일이라면 모두 관여했다. 선조비(宣祖妃)의 능을 정하는 문제에도 깊이 간여했다. 서울에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하는 것까지도 그의 견해를 참고할 정도였다(선조32년4월29일 무인).
▶이문통(선조때, 생몰연대 미상)
중국의 풍수로 1600~1601년(선조33~34년)조선에 머물렀다. 선조의 비 의인왕후 장지 선정으로 명나라 장군 도양성이 소개한 사람이다. 그는 중국에서 유명한 이순풍의 후손이다. 그는 중국에서 사용하던 풍수서적들을 가져왔으며, 나침반을 최초로 소개 했다.
◉ 師弟傳承 : 성사겸(成士謙 )⇒ 박상의(朴尙義), 이자백(李仔栢)
▶성사겸(成士謙) (14??~15??)
생몰년과 활동내용 미상. 《成居士遊山錄》 저술, 《구천현묘비서》보완
▶박상의(朴尙義)(1538~1621)(선조~광해군)
본관이 태인(泰仁), 자가 의보(宜甫), 호는 백우당(栢友堂)으로 박연생의 6대손이며 종원(宗元)의 증손이고 사순(士珣)의 아들이다. 전남 장성 황룡면 출생. 선조시대에 관상감 교수, 사재감 주부벼슬을 하여 박주부로 불림. 부친 박사순 묘, 서울 동묘, 포천 백사 이항복 묘소 점지. 천문지리(天文地理)와 수학에 정통하였으며 제자백가에도 조예가 깊었다.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사재감 주부(主簿), 건옥서 주부 등을 역임하였으며 광해군(光海君) 때 본위부호군에 올랐으나 관직을 그만두고 향촌으로 돌아갔다. 이정구와 절친하였다. 광해군 9년부터 성천 부사와 평양감사를 지낸 박엽을 따라가 활동하다가 광해군 폐위와 더불어 그도 행적이 묘연해 졌다.
백사 이항복의 신후지를 찾아주었으며, 광해군이 창덕궁 경희궁 인정궁 관왕묘 터를 잡는데 중심 역할을 했다. 박상의는 선조와 광해군 때에 국풍(國風)으로 활약한 인물이며, 천문에도 밝아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예언한 것으로 전한다. 그는 봉훈랑행 관상감교수가 되었다가 사재감 주부에 올랐으며, 광해군 때 절충장군이 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유유자적(悠悠自適) 자연 속으로 종적을 감춘 것으로 전한다. 그의 아우인 눌헌(訥軒) 박상지(朴尙智)도 군자감봉사와 예빈시제검을 지냈으며, 성리철학 사서와 심경, 근사록 등의 글을 연구하여 사우들의 칭송을 받았던 인물이다. 박상의는 전남 장성지방에서는 ‘국풍(國風)’보다는 ‘박주부(朴主簿)’로 더 알려짐.
▶남사고(南師古)(1509~1571)
경상도(慶尙道) 울진군(蔚津郡) 근남면(勤南面) 출신(出身)이다. 과거(科擧)에 계속 낙방(落榜)하다가 환갑(還甲;선조2년인 1569년)에야 벼슬길에 올랐다. 천문학교수(天門學敎授)라는 한직에 근무(勤務)하다가 2年後 병(病)으로 죽고 말았다. 남사고(南師古)에 관한 전설(傳說)적인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으며 그의 저술(著述) 또한 많은 위작을 낳았다. 그의 아버지 묘(墓)를 아홉 번을 옮기고 열 번째 장사한 구천십장(九遷 十葬)으로 유명함. 현재(現在) 근남면 수곡리 대현산에 있으며 본인(本人)의 묘(墓)는 근처(近處) 성산마을에 있다. 그의 유일(唯一)한 글은 『격암일지』에 남아 있다.호 格庵, 경북 울진인. 명종시대 관상감 교수, 문정왕후 사망, 선조 즉위 예언, 구천십장 예화
▶진묵대사(震默大師: 1563∼1633)
이름은 일옥(一玉)이요 진묵은 그의 법호(法號)이다. 김제시 만령면 화포리(火浦里)에서 조의씨(調意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늘의 화포리는 옛날 불거촌(佛居村이)었으니 불개(火浦)에서 유래된 말로서 부처님이 살고 있는 곳이란 뜻이다. 대사는 어렸을 때 부친을 여의고 외로운 환경에서 족성(族姓)과 세계(世系)를 전하지 못한다. 나이 7세 때 출가하여 봉서사(鳳棲寺: 완주군 용진면 간궁리)에서 내전(內典: 불경)을 맺고 있었으니 봉곡(鳳谷)은 매양 대사를 진도인(眞道人)이라 칭송했다. 수백 년 뒤에 은고(隱皐) 김기종(金箕鐘)이 구전된 설화를 모아 초의대사(草衣大師)에게 전기(傳記)를 쓰게 하였으니 기적같은 갖가지 우화는 오늘에도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다.
▶성지대사(性智大師)(155?~1623)
광해군 때 활동. 군위에서 홍석구의 서자로 출생하여 승려가 되었다. 광해군의 신임을 얻어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아 인경궁과 경희궁터를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광해군의 축출과 함께1623년 죽임을 당했다.
▶이대윤(李 大胤) [1530(중종25)~1596(선조29)]
자는 경술(景述), 호는 금헌(琴軒) 또는 만휴당(晩休堂), 대군의 5대손이며 춘성정 담손(聃孫)의 손자이고 증 통정대부 혼(渾)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증 숙부인 풍산심씨로 증 참의 언통(彦通)의 딸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밀양박씨로 부사 응종(應宗)의 딸이다. 부친 李渾을 오공비천형에 안장함.
1558년(명종13)에 진사가 되고 1585년(선조18) 식년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까지 지내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 향리에서 도를 즐기며 후진계도에 힘썼다.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倡義)의 격문을 내고 남원성을 지키기 위하여 품관(品官)과 교생(校生)들로 오장(伍長)을 삼고, 팔결연호(八結煙戶)로 군졸을 삼아 남원성의 수비에 대비하였으며 수문장은 생원과 진사로 삼았다. 이어 담양의 회합에서 고경명(高敬命)을 대장으로, 자신을 위병소 도유사(都有司) 겸 모량장(募糧將)에 추대하여, 대장간 10여 소를 마련하여 병기를 만들었다. 또 군마와 군량을 모아 아들 엽(曄)에게 각 진영에 조달케 하였다. 순찰사 김성일(金誠一)이 “3남(三南)중에서 군량 보급은 호남이 제일 잘하였다”고 모량장 대윤에게 포상을 건의하여 통정대부 의흥위(義興衛) 상호군(上護軍)에 특제(特除)되었다. 그러나 의병을 모았다고 상을 받는 것은 선파(璿派)의 누가 된다고 상소를 올려 사양하자 선조대왕은 그의 뜻을 가상히 여겨 자손에게 벼슬을 내리라는 교지를 내렸다. 그 후 선산(善山) 진중에서 병을 얻어 순직하였다. 예조참판에 증직되고 월곡서원(月谷書院)에 배향(配享)됐다.
묘소는 전북 남원시 사매면 월평리 무산 간좌에 있다. 봉조하 이돈우가 지은 묘지에 참판 조석원이 쓰고 이기헌이 전자한 묘비가 있다.
▶이의신(李 懿信)(15??~16??)
원주 이씨, 전남 맹진인, 고산 윤선도 당고숙, 광해군 때 교하천도설 주장. 해남 맹진에서 태어난 서얼 출신으로 해남 윤씨 윤홍준의 셋째 사위였다. 그는 고산 윤선도에게 풍수학을 가르쳤는데, 윤선도의 처 고숙이기도 했다. 교하천도론으로 유명한 이의신은 서기 1600년에 등장하여 1616년까지 기록에 남아있는 인물이다. 1623년 광해군이 실각하자 많은 풍수들이 처형당했으나 이의신의 이름은 찾아 볼 수 없으니, 1616년 이후 자연사 했거나 위기를 느끼고 낙향하여 은둔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기록에 나타난 것은 선조의 비 박씨인 의인왕후가 죽어 장지 선정에 관여 하면서 부터이다. 그는 형세론의 주창자였다. 그는 산이 좋으면 수파를 따지지 않았고 산의 내맥까지 알아본다고 하여 이항복이나 성영 등에게 칭송을 받았다.
▶이기옥(李奇玉), 오세준 등이 활동.
■ 1600~1700년대
▶윤선도(尹善道)(1587~1671)
본관은 해남,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1612년에 진사가 되고, 1616년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 이이첨(李爾瞻)등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함경도 경원에 유배되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풀려나서 의금부 도사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 여러 관직에 임명된 것을 모두 사퇴했다. 1628년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 왕자사부가 되어 봉림대군(효종 때)을 보좌 했으며, 형조정랑을 거쳐 한성부서윤을 지내고 1633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문학에 올랐으나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영덕에 유배 되었다가 풀려나 은거했다. 그는 풍수에도 능해서 효종의 능침 선정에 관여 하였으며, 정조는 그를 풍수의 최고 단계인 [신안]으로 칭송했다. 그가 풍수와 관련해 남긴 글로는 [산릉의]와 심지원에게 보낸 편지 및 [산능간산시추고함답]이 전해진다. 저서에 [고산유고]가 있으며 무덤은 해남군 현산면에 있다. 전남 해남 연동인으로 효종 왕릉 점지한 산릉의(山陵議) 기술.
▶정두경(鄭斗卿. 1597-1673)
홍문관 제학 정두경의 자(字)는 군평(君平)이요 호(號)는 동명(東溟)이다. 성품이 호탕하고 술을 즐겼다. 그래서 자신을 엄중하게 단속하지 못했고 농담을 잘하였다. 문장은 사마천을 법으로 삼았고, 시는 두공부(杜工部)에 가까웠다. 그 문장과 시는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것이 많았다. 조정에 벼슬한 지 40여 년이었지만 끝내 대제학을 맡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는데, 이때에 죽으니 나이 77세였다. 정두경은 어릴 때부터 글로 이름이 있었으며 신흠, 이정귀, 장유 등 여러 사람의 받듬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시에 뛰어났는데 근세의 작자 가운데에는 그와 비교 될 자가 드물었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고 몸단속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일찍이 경기도사(都事)로 있을 때에, 군읍(郡邑)의 어떤 자가 " 공자를 모신 사당에 빗물이 새니 수선해야 한다." 고 알리자 정두경이 말하기를 " 한 조각 썩은 나무판을 무엇 하러 덮어주는가." 하였는데, 대개 이런 식으로 허튼 소리를 하였기 때문에 대제학의 직책을 얻지 못하였다. 송준길이 그의 글재주를 애석하게 여겨 경연 석상에서 진달하고 인사담당에게 말하여 비로소 제학으로 있게 되었는데 그때는 두경이 이미 노쇠한 상태였다. 죽을 때의 나이 77세였다.
▶목호룡(睦虎龍) (1684~1724)[1684(숙종 10)~1724(영조 즉위)].
조선 후기(朝鮮後期)의 지관(地官). 신임사화의 고변자(告變者)이다. 본관은 사천(泗川). 서얼 출신으로 어려서 풍수술(風水術)을 배워 지사(地師)가 되었다. 노론인 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 등과 왕세제(王世弟 : 영조)를 옹호했으나, 소론에 가담하게 되어 1722년(경종 2) 김일경(金一鏡)의 사주를 받아 경종을 시해하려는 역모에 자신도 가담했다고 고변했다. 이 고변으로 노론 4대신인 이이명(李頤命)·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조태채(趙泰采) 등이 사형에 처해지고, 역모에 관련된 60여 명이 처벌되는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이 고변의 공으로 부사공신(扶社功臣) 3등으로 동성군(東城君)에 봉해지고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뒤 노론의 상소로 신임사화가 무고로 일어났음이 밝혀지자, 김일경과 함께 체포되어 옥중에서 죽었다. 죽은 뒤 당고개(唐古介)에서 효수되었다. 권력지향형(權力止向形)의 비참한 말로였다.
◉ 師弟傳承 : 박상의(朴尙義 ) ⇒ 이호림(李虎林)
▶지영(智映)대사 : 생몰 연대 미상. 주로 호서지방에서 활동.
▶이중환(李重煥)(1690~1752)《택리지(擇里誌)》저술(1751)
조선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여주, 자는 휘조(輝祖), 호 청담(淸潭)·청화산인(靑華山人)이다. 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이진휴(李震休)이며, 어머니는 오상주(吳相胄)의 딸이다. 성호 이익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일찍부터 실사구시의 학풍을 이어 받았다. 1713년(숙종 3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 승문원 부정자, 부사정(副司正)를 거쳐 1718년(숙종 44) 김천찰방(金泉察訪)이 되었다.
1719년에는 승정원 주서를 거쳐 그 이듬해 사관, 전적을 지내고 1723년(경종 3)에는 병조정랑, 부사과에 임명되었다. 1722년(경종 2) 노론 대신들이 세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경종을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하려고 모의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임인옥(壬寅獄)이 발생하였을 때 그가 말을 빌려 준 것이 문제가 되어 영조가 즉위한 후 구금되었다. 이 일로 인해 1726년 절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으나 사헌부의 탄핵으로 다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전국 각지를 지역의 교통 지리 문화 인물 특산물 등을 정리하여 인문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八域志)》를 저술하였다. 이 책을 통하여 그의 인문지리사상과 이용후생의 실학정신을 살펴볼 수 있다.
▶이호림, 박승선(朴承先), 난삼(蘭三)등의 활동내용은 미상.
■ 1700~1800년대
▶師弟傳承 : 일지(一指) ⇒ 일이(一耳)
▶일지승, 일이승은 《일지유산록(一指遊山錄)》《일이유산록(一耳遊山錄)》저술.
▶일이승 (一耳僧) (생몰연대미상)
일지승(一指僧)의 상좌로서 풍수비결(風水秘訣)을 전수 받았으며, 홍경래(洪景來)의 스승이기도 했다. 도선 풍수의 전통을 이어 받아 풍수계에서는 전설적인 풍수대가(風水大家)로 추앙 받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도용한 숱한 필사본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정조(正祖, 조선조22대왕, 1752~1800)
1774년 스스로 풍수학을 익혀 비명에 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 이장에 적극 활용했다. 정조는 이기론보다 형세론을 중시하였다. 그의 정혈법과 청광론은 그 후 조선조 풍수의 지침이 되었다. 정조의 풍수관은 수원의 융릉에서 잘 드러나는데, 그의 풍수 관련 글들은〔혼제신서〕57권과 58권에 자세히 수록돼 있다.
■ 1800~1900년대
▶정만인(鄭萬仁) : 1850년대 전후활동. 충남 예산 남연군 묘소 점지.
▶민일(敏一)대사, 홍성문(洪成文) 대사 : 1800년대 전후활동, 내용은 미상.
■ 1900~2000년대
▶배종호(裵宗鎬) (1919~1990)
경남 산청 출생으로 경성 제국 대학 철학과를 졸업했다. 이종구에게 풍수지리학을 사사 했다. 연세대와 원광대에 재직했으며 『풍수지리약설을 발표 했다.
▶장용득(張龍得)(19??~1999)
호는 河南, 경북 울진인.《명당론》저술, 배합룡 불배합룡 이론 제시, 호암 이병철 친산 점지.
▶지창룡(池昌龍)(1922~1999)
호는 靑烏. 서울․대전 현충원, 과천 정부청사, 이승만․박정희 대통령 장지 점지. 《한국지리총람》저술. 군남면 옥계리 군자봉 기슭에 묘가 있다. 본관은 충주이며, 호는 청오이다. 1945년 일본정치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980년 UNION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풍수지리와 역리철학으로 일가를 이뤘던 인물로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 등 수많은 정·재계 인사들과 인연을 맺어 특별 자문 역할을 맡았으며, 정부중앙청사와 동작동 국립묘지, 대전 국립묘지의 자리를 잡을 때 자문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1974년 육영수(陸英修)여사의 동작동 국립묘지 내 묏자리를 잡을 당시 손석우(孫錫佑)와의 논쟁 끝에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 것은 국내 풍수지리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손석우(孫錫佑)(1926~1998, 8월 26일졸)
호 六觀. 용인 김대중 대통령 친산 소점. 《터》저술. 손석우 선생은 1926년 4월 경북 울진군 기성리 다천면에서 손두령의 3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 음이 약해 잔병치레를 많이 하였다고 한다. 이래서 당시의 호적이 늦게 올리게 되어1930년생으로 기록 되어져 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형편상 중학교를 진학할 수 없어 농사를 지으며 70리 밖에 선배의 집에 찾아다니며 독학으로 교원 자격고시에 합격하여 한때 울진 사동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6.25동란을 겪으면서 군에 입대 1957년 장교로 재대 하였다고 전해온다.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기도를 하던 중 땅 속이 유리관처럼 환하게 보이는 산안(山眼)이 열려, 이때부터 지리에 대해 밝은 지혜를 얻게 되었다고 함. 손석우씨의 묘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 5-104 임야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