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현의 시 세계 존재와 시간의 감응, 그 화해의 시학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 ‘연륜의 순리’와 자아(自我)의 인식 현대시의 위의(威儀)는 그 시인의 가치관이 내재된 자아를 인식하면서 현존(現存)의 고뇌와 갈등 요인에 대한 조화(調和)나 화해(和解)를 탐색하는 경향으로 현현되는 경우를 다양하게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시법(詩法)이나 시풍(詩風)은 작금(昨今)에 흐르고 있는 시류(時流)인 양 누구나 시도해 보는 경향이지만, 이러한 사유(思惟)의 근원(根源)은 그 시인의 체험이 중요한 조화의 중심축에서 작용하고 있어서 우리 시인들이 추구하는 작품의 주제는 대체로 휴머니즘(humanism)의 범주(範疇)를 크게 이탈하지 않는 성향(性向)을 이해하게 된다. 여기 남재현 시인이 상재하는 시집『』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엿볼 수 있는데 그는 우선 자아를 인식하는 과정이 시간에서 자아의 삶을 재발견하는 회상과 상상력의 재생이 그의 작품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시는 일상의 작은 살아있는 시간들이라고 했던 베르네르 랑베르 시인의 말처럼 살아있는 시간 즉 생을 노래하는 살아 숨 쉬는 시를 공간에 제약 없이 쓰고 싶은 것이다.’라는 소신과 같이 시와의 소통은 이미 그의 생활로 정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척 지친 얼굴을 하고 거실 벽 모퉁이에 말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벽지가 색 바래 밀쳐낼 때 말고는 언제나 제 모습을 잃은 법이 없다 주름살에 일그러진 모습에 싱그러운 미소는 온데간데 없고 세월의 풍파만 잔상에 그려진다. 한 번도 자신을 보려하지 않더니 작정한 듯 돌아앉아 내면을 보려한다. 슬플 때 같이 울어주었고 기쁠 때 같이 웃어주었지만 이제는 늙어가나 보다 슬퍼 울어도 눈물이 없고 기뻐 웃어도 미소가 없다 청춘의 일상에서 늘 하나였던 영상이 이제야 너와 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하루는 세정제를 들고 군데군데 얼룩진 때를 닦아내고 또 하루는 색조 화장품으로 주름을 한 줄 한 줄 메우는 게 생활이 됐다. 이미 도플갱어의 환영(幻影)에 갇힌 운명 지울 수 없는 연단(鉛丹)의 숙명과 끊을 수 없는 연륜의 순리를 알고는 서로를 마주보며 피식 웃고 있다. --「거울」전문 여기에서 우리들이 감지할 수 있는 그의 강렬한 자아 인식은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무척 지친 얼굴’이며 ‘주름살에 일그러진 모습’이라는 절박한 경지의 일단으로 인식하고 ‘싱그러운 미소는 온데간데없고 / 세월의 풍파만 잔상에 그려진다.’는 어조(語調-tone)로 긍정의 인식으로 정리한다. 그러나 남재현 시인은 이제사 ‘한 번도 자신을 보려하지 않더니 / 작정한 듯 돌아앉아 내면을 보려한다.’는 어조로 자신의 소회(所懷)를 적시(摘示)하여 자신을 보고 있다. 그에게 자신을 새롭게 인지(認知)할 수 있도록 ‘거울’이라는 매체(媒體)를 통해서 ‘이제야 너와 내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늙어가나 보다 / 슬퍼 울어도 눈물이 없고 / 기뻐 웃어도 미소가 없다’는 자조(自嘲)의 긍정을 분사(噴射)하고 있다. 이러한 긍정의 수용은 자아의 내적 세계와 외적 세계를 상호 연관시켜서 현재의 실체를 탐색하고 구명(究明)하면서 실생활(real life)에서 야기(惹起)된 다양한 현상들이 그의 운명(또는 숙명)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형상 변화를 ‘연륜의 순리’라는 결론으로 세월(시간)과의 상관성을 그의 사유(思惟)의 중심축을 설정하고 있다. 일찍이 프랑스의 사상가이며 시인인 가스통 바슐라르는 그의 저서 『시적 순간과 형이상학적 순간』에서 ‘시가 단순히 삶의 시간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시는 삶만 못한 것이다. 시는 오로지 삶을 정지시키고 기쁨과 아픔의 변증법에서 삶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다’는 논지와 같이 우리들은 외연(外延)과 내포(內包)의 조화가 바로 자아의 숙명을 인식하는 전제가 되고 있다. 남재현 시인의 이와 같은 인식의 저변(底邊)에는 ‘그러나 정작 내가 누군지를 알지 못했다(「세상만사」중에서)’라거나 또는 ‘참 홀로서기 어렵다 / 하늘은 높고 푸른데 / 큰 소나무 곁으로 갈까 / 부르면 오기는 할까.(「칡」중에서)’라는 어조로 운명과 현실과의 이완(弛緩)된 요소도 읽을 수 있게 한다. 그는 이러한 인식을 정리하면서 ‘ 나는 이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겨울나기」중에서)’는 고차원의 자아가 현현되고 있다. 그는 다음 작품「정상」과 같이 그의 웅지(雄志)가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높이 오르고 나면 오래 오르고 나면 끝내 다 올라보면 구름이 반쯤 걸쳐진 한 점 뾰족한 정상 長程의 산물 오르가즘 정상에서 느끼는 쾌감 가슴 넓어지는 큰 자유 내려갔다가 꼭 다시 오르는 마약성의 歡悅 또 오르고 싶어진다 2. 세상과의 조화 혹은 생명의 교감 남재현 시인은 다시 자아의 원류를 세상과의 조화 또는 생명의 교감에 사유의 정점으로 구도(composition)를 설정하고 상상공간을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상황(situation)은 존재의 의미성을 더욱 확고하게 정립하려는 그의 시적 지향점이 궁극적으로 현실감각과 무관하지 않다는 현실성(reality)의 반영이기도 하다. 그가 ‘아픔의 크기 세어보나 / 슬픔의 깊이 재어보나 / 의미 없는 세상살이 / 오늘 겪는 삶의 무게 / 어제 상처 실려 있다.(「상처」중에서)’라는 어조는 세상과 생명의 공존과 융합(融合)에서 야기하는 다원적인 현실과의 모순과 갈등요인이 항상 상존(常存)하고 있어서 이를 인식하고 수용하는 그의 지적 혜안(慧眼)이 열려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프랑스의 소설가 롤랑이 ‘생명만이 신성하다. 생명에의 사랑이 가장 첫째 가는 미덕이다.’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게 한다. 이는 많은 시인들이 존재속에서 지향하고 여망하는 생명성. 이를 위한 헌사(獻辭)가 현대시의 본령(本領)으로 나타는 경우를 많이 대할 수 있다. 그는 ‘세상 모두가 째깍거리는 시간으로 계산한다. / 계산 없는 세상은 시간 없는 공간뿐인지 / 계산 할 수 없는 곳은 자유가 없다(「계산」중에서)’는 어조와 같이 ‘세상’과 시간성에 대한 내밀(內密)한 상상력은 생명과의 교감이 작품 주제의 정점으로 유로(流露)하고 있음에 유념하게 된다. 세상만사 다 그래도 인간만은 꼭 다를 걸 하는 맘은 욕심이던가. 오는 만남도 쉽지 않고 가는 이별도 쉽지 않다 오직 평화로운 건 생을 자유롭게 노래하는 일 진정 편안한 건 虛無한 시간 무심히 보는 일 늙어져 가는 길은 누구나 가고 싶지 않은 길 깜깜한 밤 홀로 떠나는 여행 나이 먹어 가는 것은 누구나 더 먹고 싶지 않은 일 입덧에도 먹는 母情의 야식 오직 자유로운 건 그대 이름을 맘껏 불러보는 일 진정 행복한 건 多忙한 시간 잔잔히 흘러가는 일 --「공심(空心)」전문 그렇다. 남재현 시인은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에서 우리들이 절대적으로 성취해야 할 인본주의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多忙한 시간’과 ‘虛無한 시간’의 대칭에서 획득하는 심리적인 변환이 설득력 있게 적시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늙어져 가는 길’이며 ‘누구나 가고 싶지 않은 길’이다. 그는 ‘생을 자유롭게 노래하는 일’과 ‘허무한 시간을 무심히 보는 일’이 그의 시적 진실이며 그가 탐색하고 기원하는 조화와 화해의 시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삼월 삼짇날 / 강남 갔던 제비 녀석 / 자식 함께 온 식구 찾아왔네. / 티끌만한 정에 이끌렸나 / 세상만사 티끌로 사나보다(「티끌 #3」전문)’라는 단정도 ‘공심’과 접맥(接脈)되는 이미지로 현현되고 있다. 몸으로 산 것들은 온통 티끌이라 바람이 세찬 날 결국엔 허공에 흔적 없이 흩어지고 만다. --「티끌 #2」전문 여기에서도 ‘허공’과 ‘흔적 없'음을 적시하는 것은 그가 생명에 대한 진지(眞摯)한 통찰(洞察)을 통해서 존재의 형이상적(形而上的) 위의(威儀)에서 진실을 투영하려는 그의 절실한 여망이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진실의 탐색은 그가 ‘지극히 이성적인 주일 날 / 무릎 꿇고 앉아 이 모든 생명을 위해 / 참회의 기도를 하고 / 자연이 가르친 겸손의 노래와 / 하느님이 부르신 사랑의 노래와 / 주님이 남기신 평화의 노래를 / 거룩히 여김에 소리 높여 부르리라.(「본능의 샤우팅」중에서)’는 순수한 시정신(portry)이 잘 숙성(熟成)되어 있다. 또한 ‘앞마당 돌탑에 / 돌고 도는 중생들 / 세상살이 아무리 무거워도 / 부처님 입만큼 무거울까?(「더 무거운 것」중에서)’와 같이 세상의 잡다한 일들과 생명의 부적절성을 모두 한꺼번에 수용하고 포용하는 그의 내면에 잠재된 인생관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3. ‘그리움’과 연가적(戀歌的) 사랑법 남재현 시인은 다시 ‘그리움’을 원천(源泉)으로 하는 연가적인 사랑법에 관한 시법을 구사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인간들이 존재하는 동안 여망(輿望)하면서 추구해야 하는 보편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작품으로 형상화하는데는 상당한 체험의 효과가 동시에 확충되어야 한다. 그는 가을이 되면 사랑병이 도지는 특수체질을 소유하고 있다. ‘가을에는 / 그리움을 토해내야만 살 것 같다. / 숨죽어 지낸 귓불 하얀 솜털이 / 책갈피 추억처럼 일어나는 가을이다.(「가을에는」중에서)’와 같이 ‘그리움’이 그를 관류(灌流)시키는 계절적인 성향의 사랑법이 그에게 내재(內在)되어 있어서 ‘잠 못 이루는 밤이 있다. / 밤하늘 별들이 너무 총총한 날도 / 내겐 외로움에 떠는 그리움으로 다가온다.(「가을약속」중에서)’는 고독이 가을을 장식하고 있다. 일찍이 정비석은 그의 작품「들국화」에서 ‘깊은 밤에 귀뚜라미 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을 때 그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이 불현듯 그리워지기도 하고 가을볕이 포근히 내려비치는 신작로만 바라보아도 어디든지 정처 없이 따나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도 역시 가을이라는 계절이 무한히 외롭고 서글픈 계절이기 때문이다’라는 언지(言旨)와 동일한 이미지를 갖는다. 이러한 계절적인 충동이 남재현 시인에게서도 ‘우리의 가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며 하던 말 / 이젠 도리어 내 가슴에서 꺼내 그녀의 가을로 간다.’거나 ‘단풍 고운 낙엽에 사연 하나 쓰고 싶다. / 햇살 좋은날 구름 째 부치면 좋겠다.’는 기원이 가득 넘치고 있다. 밤하늘별을 보며 네 이름을 불러 보고 잊지 말자 언약 못한 벙어리 냉가슴 영원히 못할 인연이면 만나지나 말 것이지 이루지 못할 사랑이면 추억에도 지워야지 바보 같은 모습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 이미 지난 시간 돌이킬 수는 없는 일 어쩌면 내일 네 모습 마주할까 때 지난 청춘은 설레어 손거울을 보지만 잠 못 드는 이 밤 새벽은 가까워오고 넌 점점 멀어져만 간다. 빛바랜 사진 속 미소는 예나 다름없이 변함이 없으련만, 오늘은 저 하늘 교교한 달빛에 어차피 홀로 삼키며 지새야 하는 별밤이다. --「그리운 마음의 편지 1」중에서 바다 바람에 긴 머리 휘날리며 돌아섰던 여인아! 파도치는 빨간 등대에 기대서서 한 땐 환자처럼 네 이름을 목 놓아 부르곤 했지 하늘아래서 맺은 청실홍실 같은 고운 인연 세월을 두고 서로 앞서려 뒤서려 말고 더는 다른 인연에 애태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 향기 그윽한 멀지 않는 곳에 낮이면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들으며 밤이면 달빛아래 풀벌레 노래하는 그곳 네 모습 네 향기 고이 간직된 영혼이 머무는 추억 속 그곳에서 너와 영원히 살고 싶다. --「그리운 마음의 편지 2」중에서 보라. 남재현 시인의 고독한 상념은 연가풍의 시적 기능으로 우리들의 공감을 확산시키고 있다. 그는 ‘영원히 못할 인연’과 ‘이루지 못할 사랑’에 대한 강한 집착이 ‘잠 못 드는 이밤’의 ‘편지’로 남아 있다. 여기에서 ‘네’라는 화자와 ‘그때’라는 시간성이 과연 누구이며 언제인가라는 의문이 성립한다. 이러한 개념은 그 대상이 누구이거나 상관없다. 남재현 시인의 ‘이루지 못할 사랑’이거나 우리들 중의 누구라도 상관이 없으며 언제인가도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남재현 시인의 체험이든, 상상속의 스토리이건 시적 상관물로는 의미의 중심이 되지 못한다. 우리 모두의 공통된 의식 속에서 흐르고 있는 시적 기능이라서 더욱 공감의 영역은 확대될 것이다. 한편 ‘바다 바람에 / 긴 머리 휘날리며 돌아섰던 여인아!’라고 부르는 정황을 보면 어쩌면 별리(別離)의 애상(愛想)이 가미된 정감이 뭉클해지는 이미지의 투영이 돋보인다. 그는 다시 ‘밤이면 달빛아래 풀벌레 노래하는 그곳 / 네 모습 네 향기 고이 간직된 영혼이 머무는 추억 속 / 그곳에서 너와 영원히 살고 싶다.’는 기원의 어조가 말해주듯이 이별의 연가가 계속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이별에 대한 연주는 ‘까만 창가에 흐르는 뜨거운 눈물 / 네 등에 기대어 목 놓아 하염없이 / 울다가 한 순간 숨이라도 멎었으면, / 이별의 이 소리는 아니 듣고 갈 텐데(「네 손잡고 놓지를 못해」중에서)’ 그리고 ‘슬프면 더욱 흔들리는 몸짓 / 아프면 더욱 심한 몸부림 / 이별이 바람을 허공에 재운다.(「바람의 이름으로」중에서)’는 그의 애절한 그리움의 정표가 적나라(赤裸裸)하게 적시되어 있다. 박목월 시인이 「사랑의 결합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참으로 사랑은 그것을 위하여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거나 연소시키는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 우리들의 삶을 보람찬 것으로 이룩하기 위하여 그것(사랑)이 소중하다’는 명언처럼 남재현 시인에게서도 사랑의 필연성을 숙연하게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은 「그리운 이여」「그리움이 있으면」「기다림에 그리움은 커지고」「내 사랑 내 곁에」「사랑이 오는 길목에서」「사랑이 온다네」등에서 그의 사랑법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4. 자연 서정과 순응의 미학 남재현 시인에게서 최종적으로 감응할 수 있는 것은 자연 서정에 대한 순응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서정성에서도 자연의 정취(情趣)에 몰입하여 순응과 순리의 시학을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양지바른 땅 속 깊은 잠에 빠졌다가 驚蟄에 개구리 깨는 소리에 눈뜨는 착한 봄 아장아장 아기 걸음으로 찾아와서 봄쑥 향기에 씰룩거리며 자라는 귀여운 봄 늘어진 하품으로 아지랑이 피어내는 개나리꽃 같은 누이 닮은 예쁜 봄 이런 봄날 앞산 자목련 꽃망울이 젖가슴처럼 부풀어 오고 동변 실개천 버들개지 냇물소리 반겨 속살 내비치는데 어찌 그윽하게 익어가는 봄을 홀로 바라만 보고 있으랴. --「봄맞이」전문 벽 틈에 숨은 귀뚜라미 冊張 넘기는 소리에 놀라 그만 울음을 그친다. 사방이 고요하다. 잠시 귀재어 있다 보니 落葉 지는 소리 들리고 억새바람 휙 지난다. 아차 하는 사이 창 밖에는 싸락눈 날린다. --「가을」전문 이처럼 그는 계절의 이미지를 통해서 서정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는 특히 봄과 가을을 그의 사유의 축으로 설정하고 시학(詩學)에서 말하는 실제적 정서(emotion)와 상관물이 환기하는 정서(feeling)가 서로 교합(交合)하는 시법으로 서정성을 탐색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서정시(lyric)라고 하면 자연 풍경을 주로 그리는 서경시(敍景詩)로 여기기 쉬운데 인간의 절실한 심리적인 칠정(七情-喜, 怒, 哀, 樂, 愛, 惡, 慾)이 고르게 투영된 정서의 자연적인 흐름을 말한다. 요즘 서정시는 정서화된 현실적인 비평을 내포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남재현 시인은 자신만이 간직한 정서의 내면을 잔잔하게 ‘驚蟄에 개구리 깨는 소리에 눈뜨는 착한 봄’이라고 음유(吟遊)의 일면을 살필 수 있는 서정을 읽을 수 있으며 ‘낙엽지는 소리’와 ‘억새바람’ 또는 ‘창 박에는 싸락눈’이라는 가을의 정감이 정서의 주제(theme)를 형성하고 있다. 그는 작품 「나의 봄」「봄비」「가을 작은 풍경」「가을 너만 가렴」「입춘야설」「개망초」「초록연주」「하얀 나비」등에서 ‘그대 마음속에서부터 / 쉼 없이 밀려오는 / 거역할 수 없는 순리 / 작은 꽃씨하나 / 겨우내 품었다가 / 봄의 행인 편에 / 대가없이 내어주는 꽃눈’이거나 ‘겨우내 맨몸으로 노래하던 / 어미 느티나무 목쉰 새 가지에 / 갓 돋아난 연두 빛 여린 잎들이 / 비 젖은 초록건반을 토닥인다.’는 완전 서정의 정서로 인간과 자연의 ‘거역할 수 없는 순리’의 조화를 분사하고 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남재현 시집 읽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는 자아를 인식하면서 ‘연륜의 순리’를 수용하였으며 이 세상과의 실존(實存)에서 생명성의 교감을 시적 기능으로 포괄하게 되었고 그리움과 사랑학의 정리를 위한 고뇌의 해법을 탐색하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자연 서정이 우리 인간과의 절대적인 상응(相應)관계의 정립이라는 그의 시적 진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가 ‘시인의 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처음 시를 쓸 땐 이정표를 보고 목적지를 정하는 여행처럼 무작정 시가 좋아 방향성 없는 시를 썼던 것 같다. 살다보니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 공간이 전부가 아니라 시간이 늘 함께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는 고백적인 언술에서 우리는 그의 진솔하고 순수한 시심(詩心-poetical feeling)을 읽을 수 있게 한다. 그래서 그는 ‘ 시는 태초 순수 자연어로서 / 소통에 선구자요 / 감성과 이성의 조합이 빚어낸 道器다./ 혼이 없는 시인안의 詩語들 / 알곡인지 쭉쟁인지 / 까놓고 맛보니 맛도 없다.’거나 ‘깨어나라 시인이여 / 일어나라 시심이여 / 인생은 미완의 詩作 / 밤낮 뜬 눈 시인이 / 어제를 꾸어 오늘을 살고 / 내일을 위한 시를 쓴다.(이상「시인의 꿈」중에서)’는 결론이 남재현 시학의 정점이다. 그러나 우리 시학에는 ‘비정적 타자성(非情的 他者性)’이란 것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는 흔히 감상적 오류라는 자연의 인격화에는 동화(同化-assimilation)와 투사(投射-project)라는 두 가지의 원리가 있다. 동화는 시인이 모든 자연을 자신 속으로 끌어와서 그것을 내적 인격화하는 것이고 투사는 시인이란 정체가 없기 때문에 그가 계속해서 어떤 다른 존재를 채우는 것 곧 자연 속에 자신을 상상적으로 투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사물관(對事物觀)에서 응시하는 관점이 위의 두 원리에 의해서 작용하고 이를 외적인 요소(사물)와 내적인 요소(관념)를 적절하게 조합하는 시법이 필요하게 된다. 이러한 요소들도 다시 시간과 공간 개념이 가미되면 더욱 좋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다는 점이 대단히 중요한 작용을 하게 된다. 이것이 형이상시(形而上詩-metaphysical poetry)를 완성할 수 있는 첩경(捷徑)이기도 할 것이다.*(2011. 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