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단靑丹놀음
전라도 한적한 어느 마을, 조상 대대로 넓은 들을 지켜온 터라 돈깨나 있는 집안에서 며칠째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인 몇을 거느리고 사는 집이라 밥 걱정이라고 없을 법한 집인데 무슨 사연인고 하니 이 집 주인 영감이 상사병으로 몸져누운 것이다. 부인이 죽자 항상 옆구리가 허전했던 영감은 고심을 거듭하던 중 이웃고을에 얼굴이 빼어난 처자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마침 집안이 가난하다는 소식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며 중간에 돈으로 매수한 매파를 넣어 그 처자를 돈으로 사오게 되었다. 그날부터 젊고 아리따운 처자를 아내로 맞이한 영감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고, 세상살이가 그저 즐겁고 행복했다.
그러나 그 여인네는 이미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하나 어찌하랴! 찢어지게 가난한 집을 일으키기 위해 스스로 팔려갈 수밖에 없었으니……. 영감의 손길이 달가울 수 없었음은 당연지사. 매일 밤이 고통이었고, 영감이 가까이 올수록 두고 온 낭군이 그리웠다. 그러나 이미 더럽혀진 몸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영감으로부터 도망을 치고자 해보았지만, 집에서 자신의 몸값으로 받은 돈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시간이 더디게 흐르던 어느 날이었다. 자신이 살던 마을로부터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아버지가 자신을 판 대가로 받은 돈을 들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은 기뻐하며 평소 생각을 행동에 옮기기로 결심하고, 조금씩 재물을 마련했다. 그리고 몇 달을 더 버틴 후 야심한 밤을 틈타 사랑하는 낭군과 함께 그 길로 도망치고 말았다.
젊은 마누라가 도망을 치자 영감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풀어 사방팔방으로 수소문을 시작했다. 그러나 여인은 이미 멀리 떠난 뒤였으니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그 후로 영감의 하루하루는 지옥과 다름없었다.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졌고, 밤이면 외로움에 가슴은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사정이 그러하니 아무리 맛있는 반찬이 상에 올라도 곰의 쓸개를 맛보는 것 같았으며,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자신의 마음같이 먹장구름처럼 보였다. 살맛이 날 리 없었다. 젊은 여인의 살결을 맛본 영감은 마치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결국 영감은 몸져눕게 되었고, 아들들 입장에선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방으로 약을 쓰고 용한 의원을 불러 진맥을 해 보았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이름 하여 상사병이 걸리고 만 것이다.
기골이 장대하나 용기가 부족하고 의심이 많은 맏아들은 이래저래 핑계를 대며 아버지의 청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박복하고 성격은 모질었으나 아버지에게만큼은 효도를 다하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여인의 얼굴을 잘 알고 있는 집안의 머슴들과 바람결에 들은 소문 하나만 믿고 경상도 땅으로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 넓은 경상도 땅에서 어떻게 찾을 것인가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또한 아들은 자신들이 여인을 찾는다는 소문을 들으면 더욱 멀리 도망칠 것을 우려했다. 이미 여인이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어 숨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아들은 생각 끝에 여인 스스로 나타나길 기대하면서 함께 간 머슴들과 탈을 쓴 광대놀이를 준비했다. 탈을 쓴 것은 자신의 얼굴을 알아보고 숨어버리는 것을 염려한 탓이요, 또한 무언극을 준비한 것은 목소리도 알아들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아들은 집요하고 치밀했다. 그렇게 놀이마당을 펼쳐가며 경상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들은 반드시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영감으로부터 도망친 한 쌍의 남녀는 어찌 되었을까. 둘은 쉬지 않고 몇날 며칠을 걸어서 전라도 땅을 벗어나 경상도 땅까지 흘러들었다. 그러나 경상도 땅에 도착한 둘의 기쁨도 잠시, 함께 도망친 정인이 도중에 병이 나 죽어버리고 말았다. 절망에 빠진 여인은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한탄하며 이곳 저곳을 떠돌았다. 방황을 하면서 경상도 예천 땅까지 흘러들었다. 인심이 남다르고 정이 깊은 예천에서 그간의 사연을 잊고 조금씩 정착해 갈 수 있었다. 작은 마을로 들어가 초옥 한 채를 구해 밤이면 길쌈을 하고, 낮이면 작은 텃밭을 일구며 성실하게 살고 있었다. 뛰어난 미모 덕에 중매쟁이들이 다투어 다녀가기도 했다. 그러나 여인은 여전히 먼저 떠난 남자를 잊지 못해 청을 물리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웃의 아낙이 찾아와 예천 장터에 ‘청단놀음’이라는 패거리들이 왔다며 함께 구경을 가자고 권했다. 여인은 마침 일손이 한가한 농한기라 함께 장터로 가게 된다.
이미 장터에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인은 그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서 그들이 벌이는 무언극의 놀음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북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허리를 굽히며 빙글 도는 모습을 보며 여인은 이상하게도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여인의 본능인가, 검은 옷을 걸친 외눈박이 탈과 붉은 장삼을 걸친 중을 마주하자 마치 자신을 잡으러 온 저승사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외눈박이 탈을 쓴 사람이 바로 영감의 둘째 아들이라는 사실은 눈치채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아들은 결국 서모庶母이자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친 그 여인을 찾았다. 그러나 여인이 눈치를 챌까 평소처럼 공연을 이어갔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던 여인은 그 길로 집으로 도망치듯 와버렸으나, 이미 아들의 눈치를 받은 놀이패 가운데 무동 한 명이 여인의 뒤를 밟아 집을 알아둔 뒤였다.
공연을 마친 이들은 밤이 이슥해질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다. 삼경이 넘은 야심한 시각이 되자 이들은 여인이 사는 마을로 은밀히 숨어들었다. 마을에는 불빛이라곤 없었다.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은하수가 눈으로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멀리 개 짖는 소리만 들려올 뿐, 사위는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들은 이미 보아둔 여인의 집으로 숨을 죽이며 들어갔다. 방안에는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초가삼간 기둥도 없는 쪽마루에 올라선 아들은 순간 망설였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강제로 끌고 갈 것인가? 아니면 점잖게 불러 설득해 스스로 돌아가게 할 것인가? 하는 갈등 때문이었다.
불 꺼진 방안에선 여인이 깊은 잠에 빠진 듯했으나, 실은 낮에 보았던 저승사자가 자신을 죽이러 온 악몽을 꾼 후로 여인은 진작 깨어있었다. 그러다 달빛에 어른거리는 검은 그림자를 확인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숨소리를 죽이고 밖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 터였다. 뚫어진 방문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검은 그림자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순간 여인의 머리 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혼자 산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을 보쌈하러 온 자들일까? 아니면 꿈에 본 것처럼 정말로 자신을 죽이기 위해 온 저승사자일까? 이렇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여인은 전라도 땅에서 자신을 찾기 위해 온 사람들이란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인은 쥐죽은 듯 조용한 마을이라 소리를 질러 마을을 깨울까 생각하다가 생각이 바뀐 듯 가만히 일어나 어둠 속에서 달빛을 빌어 옷을 대충 찾아 걸쳤다. 그리고 뒤에 난 쪽문을 살며시 열었다. 문은 미세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고, 열린 쪽문으로 밖을 살피던 여인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는 맨발로 땅을 디뎠다.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뒷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바닥이 무엇에 찔린 듯 아파왔다. 그러나 아파할 겨를이 없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여인 앞으로 검은 그림자 여럿이 나타나 그녀를 뺑 둘러쌌다. 이미 머슴을 뒤란에 잠복시켜 놓았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그만 넋을 잃고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앞에 우뚝 버티고 선 한 사내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머니,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여인은 이 빈정대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알고 있었다. 영감의 둘째 아들이었다. 머리를 둔탁한 둔기로 맞은 것 같았다. 깜짝 놀라서 올려다보니 역시 예상이 맞았다. 앞으로 튀어나온 좁은 이마 아래 한쪽으로 찢어진 이리 같은 눈, 코끝에는 늘 잘난 체하는 냉소, 짧은 인중에 난 상처, 생살을 얇게 저민 듯한 입술까지, 달빛 아래였지만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설마 이곳까지 찾아올 줄은…….’ 여인은 온몸에 피가 모두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만 팔을 들어 손바닥으로 앞을 가렸을 뿐이었다. 잠시의 시간을 둔 아들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억지로 죽여 가며 여인에게 말했다. 목소리는 낮고 잔잔했지만 살기가 품어져 나왔다.
“네 이년! 네가 감히 우리 아버지를 버리고 달아나? 그러고도 맘이 편하더냐? 네게 들인 돈이 얼마인데 네년이 배신을 해?”
한참을 앉아 있던 여인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어떤 지혜를 발휘해서라도 이 위기를 모면해야 했다. 하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목소리를 낮추어 침착히 말을 하려 하면 할수록 마음과 달리 입이 열리지 않았다. 얼마를 망설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모기소리 같았다.
“이미 더럽혀진 몸인데 어찌 모질게도 여기까지 나를 찾아왔단 말이오? 내 돈이라면 돌려줄 터이니 제발 나를 잊고, 못 본 체 돌아가 주시오.”
목소리는 점점 속으로 기어들어가며 애원하듯 한 말이었지만, 결국 여인네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그 말을 들은 아들은 어이가 없는 듯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그간 네년을 찾기 위해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당장 찢어 죽이고 싶으나, 네년을 그리워하며 병석에 계시는 아버님 생각에 차마 그럴 수 없음이 원통하구나! 그러니 잔말 말고 당장 나를 따라 돌아가자.”
목소리는 엄중하고 단호했으며, 그 속에는 비수가 숨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여인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생각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꿈에도 보기 싫은 영감을 위해 절대 돌아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또한 사랑하는 정인을 묻고, 모진 고생을 하며 겨우 이곳까지 와서 터를 잡은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 없던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찌 그리 야박하시오! 부디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가라! 그리 전하시오. 아무리 돈이 많은 양반이기로서니 그만큼 젊은 나를 희롱했으면 이제 놓아 줄 때도 되지 않소. 어찌 된 영감이 밤새 잠도 못 자게 괴롭히니 사람이 어찌 살 수가 있겠소! 늙어도 곱게 늙어야 하는 법, 여색만 밝히다가 복상사하지 않으시려거든 제 말대로 그리 살라 하시오.”
그러나 이 말은 끝내 다하지 못했다. 아들이 ‘복상사’ 이 대목에서 성질을 참지 못해 앞발로 여인을 걷어차 버렸기 때문이었다. ‘악!’ 하는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입에서 피를 흘리며 여인은 쓰러지고 말았다.
여인이 쓰러지자 주위에서 귀를 기울이던 무리가 여인을 들쳐업고 뒷산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끝끝내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한적한 야산으로 간 아들은 여인이 깨어나자 마지막이라는 듯 다시 한 번 돌아가기를 종용했다. 그러나 여인은 단호했다.
“이보시오. 부디 저를 살려주시오! 제가 가련하지도 않으시오? 이 나라 가난하고 힘없는 집에 한 여인으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꿈도 있고, 작지만 소망도 품었던 내였소! 그러나 집안을 위해서 다 늙어 죽음을 목전에 둔 영감을 남편으로 맞아 원하지 않는 사랑으로 고통의 나날을 보냈다오. 그리고 겨우 눈을 피해 운명 같았던 사랑을 다시 만났으나 하늘마저도 내 편이 아니었소. 그마저도 병으로 먼저 가고 절망 속에 이를 악물고 살아온 날들이었소! 이제 겨우 살만한 곳에서 정을 붙이려 하는데 여기가 어디라고 이 먼 길을 악착같이 나를 잡으러 왔단 말이오? 참으로 끈질기고 모질기는 고래 힘줄 같구려! 아무리 원수를 갚는다고는 하나 그간의 터럭 같은 작은 정이라도 마음에 묻어있을 터이니 제발 나를 내버려 두시오.”
그러나 이 말마저도 다하지 못했다. 이미 사태가 글렀다고 생각한 아들이 뒤에서 커다란 돌을 들어 여인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쳤기 때문이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여인은 통나무 쓰러지듯 넘어졌다. 여인의 머리에는 붉은 피가 폭포수 같이 쏟아졌고, 결국 그렇게 죽어버리고 말았다.
여인이 죽자 이들은 급하게 땅을 파고 여인을 묻었다. 아무도 보는 이 없었다. 다만 하늘에 떠 있는 달과 별들만이 알 뿐이었다. 멀리서 부엉이 울음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아들과 일행은 그동안 여인을 찾기 위해 놀이패를 꾸리며 함께 했던 탈과 복장들도 함께 묻었다. 그리고 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더는 놀이패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
여인의 한 많은 사연은 달빛과 별빛에 그렇게 묻혀가고 있었다. 몇 달이 흐르고 마을 사람들은 누군가가 여인을 보쌈해 갔을 것이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예천에는 재앙이 닥치기 시작했다. 빈번하게 화재가 일어나는가 하면, 조그만 비에도 둑이 넘쳐 홍수가 났고, 어떤 때에는 흙비가 내려 한 해 농사를 망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신임군수로 정재원이라는 사람이 부임해왔다. 예천에 재앙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을 알고는 그 방도를 찾기 위해 고민을 거듭하다 잠이 잠깐 들었다. 밤은 점점 깊어 자정이 가까운 시각, 방안에 으스스한 기운이 감돌더니 갑자기 바람이 불어왔다. 순간 촛불이 심하게 흔들리더니 꺼지고 말았다. 방안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그 바람에 놀란 정재원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옆에 놓아두었던 장검을 찾아 손에 꼭 잡았다.
어둡던 방안에 시나브로 보름날 달빛이 비춰들었고,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그림자가 방문에 어른거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여자 울음소리였다. 정사또는 앉은 채 칼을 칼집에서 뽑아들었다. 그리고 칼을 앞으로 하고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어둠을 향해 소리쳤다.
“귀신이냐 사람이냐! 귀신이면 썩 물러가고, 사람이면 정체를 밝혀라!”
목소리가 우렁찼고, 당장에라도 일어서 칼을 휘두를 태세였다. 그러나 정사또의 호통에도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재원은 서두르지 않았다. 담력이 컸으며, 무예에 자신이 있었다. 특히 그는 살아 있는 사람도 무서워한 적이 없거늘 귀신 따위는 무서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방문이 화들짝 열렸다. 방문 앞에 머리를 산발한 여인이 서 있었다. 여인은 천천히 정사또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로 얼굴과 흰옷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그러나 정사또는 물러서지 않고 대갈일성 했다.
“너는 사람이냐, 귀신이냐?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야심한 밤에 나의 방을 침범한단 말이냐?”
정사또가 말을 마치자 여자는 울음을 멈추고 정사또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런 모습을 보자 천하의 정사또라 할지라도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절을 마친 여인네는 다소곳이 앉아 입을 열었다.
“저는 전라도 아무개의 여식이라 하옵니다. 억울한 죽음으로 한이 맺혀 저승으로 떠나지 못하고 이승을 헤매고 있사옵니다. 부디 저를 굽어 살펴주옵소서”
목소리는 낭랑하되 처량했으며, 사또를 바라보는 눈빛에 슬픔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를 지켜보던 정사또가 말했다.
“마땅히 망자라면 이승에서 떠돌 게 아니라 저승으로 가야 하는 법. 왜 그런 몰골로 나를 찾아 놀라게 하는냐? 네게 무슨 억울한 사연이 있어 저승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것이냐? 혹 지금까지 이곳에 재앙이 떠나지 않은 것도 네가 풀지 못한 한 때문인 것이냐?”
그러자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간에 있었던 길고 긴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정사또는 그가 죽는 대목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고, 추임새로 그를 달랬다. 그리고는 그의 시체가 묻힌 곳을 찾아 후하게 장사지내 줄 것을 약속했고, 전라도 땅 그 둘째 아들을 찾아 반드시 죄를 묻겠노라 약속했다. 그러자 여인은 고마워하면서 또 하나의 제안을 했다. 재앙을 막기 위해 그들이 하던 청단놀음을 계속 이어달라고 부탁했다. 정사또는 흔쾌히 그리하겠노라 승낙을 했다.
이때 닭이 홰를 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여인은 화들짝 놀라 급하게 인사들 올리고 황망히 사라졌다. 아침이 밝자 정사또는 아전을 불러 여인이 말하던 곳을 파보라 일렀다. 그곳에는 머리가 깨어진 채 죽은 여인의 시신이 나왔다. 죽은 지 오래 되었지만, 여전히 썩지 않고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시신과 함께 온전하게 남은 ‘청단놀음’ 때 사용하던 탈과 옷가지도 함께였다. 정사또는 약속처럼 여인을 위해 정성껏 장사를 치러주었다. 그리고 날을 잡아 그때의 놀음을 재현하게 했다. 그러자 그렇게 빈번했던 재앙이 그치고 마을은 평안을 되찾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예천에서는 고을의 안녕을 위해 해마다 여인에 대한 제사와 창단놀음을 벌여왔다. 그 여인을 암매장 한 곳이 현재 ‘예천성당’이 있는 곳이라고 구체적인 장소까지 거론되는 것으로 보아 일부는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까웠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어쨌거나 여기까지 이야기는 예천에 전승되고 있는 청단놀음과 관련된 기원설화를 재구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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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단놀음은 예천의 읍치邑治에서 전승해온 무언無言의 탈놀이다. 안동 하회별신굿은 알아도 예천의 청단놀음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것도 그럴 것이 청단놀음은 주술 종교적 성격이 강했던 초기 탈놀이이자 야성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무언의 탈놀이며 근대까지 이어오다 1934년 8월 일제강점기 당시 예천경찰서 낙성식 기념공연을 마지막으로 전승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이 청단놀음은 기원전설이기도 하고 신이 된 여인의 내력을 밝히는 당신화堂神話이기도 하다. 이 설화는 그 성격을 잘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이 놀음은 한 여인에 대한 남자의 집착이 만들어 낸 탈놀이이고, 원치 않는 사랑을 끝끝내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젊은 여인의 원통한 죽음을 배경으로 전승되어 벽사辟邪의 소임을 다한 탈놀이다.
이 놀음에 등장하는 이는 모두 23명인데, 북광대 2명, 양반과 사대부 각 1명, 젊은 여자 배역인 쪽방광대 1명, 주지광대 2명, 지연광대 4명, 중광대 1명, 방자형인물인 얼레방아 1명, 무동 및 무동꾼 각 5명 등이다. 무동이나 무동꾼을 제외한 배역들은 모두 탈을 사용하거나 분장을 하여 자신이 맡은 배역을 표현한다. 탈은 북광대 탈 2, 쪽방광대 탈 1, 주지광대 2, 주지판 2, 지연광대 4, 중광대 1, 얼레방아 1 등 모두 13개가 있는데 지연광대의 탈은 키로 만들고 주지판은 나무판과 꿩 털을 이용해 만들었다. 나머지 탈은 모두 바가지로 만들었으며, 양반은 탈을 쓰지 않은 대신 백립을 쓰고 수염을 달아 인물을 표현하였고, 사대부 역시 정자관에 흰 수염을 달아 인물을 표현한다.
이 사랑과 벽사의 탈놀이는 모두 여섯 마당으로 구성된다.
가장 먼저 행해지는 ‘광대판놀음’은 놀이판을 여는 마당이다. 북광대들이 관중과 마당을 넘나들면서 청단놀음의 기원전설에 등장하는 가출한 여인이자 터서리당에 모신 검덕부인의 놀이적 현신을 보여준다. 쪽박광대가 나와 경박한 표정으로 휘젓고 다니면서 사람들 찾는 시늉을 하다가 별안간 놀음을 벌이는 광대의 멱살을 잡음으로써 관중을 웃기는 역할을 수행한다.
다음으로 ‘행의놀음’에는 양반과 사대부 그리고 쪽박광대가 등장한다. 허울 좋은 지세를 내세우는 양반과 사대부가 쪽박광대를 놓고 다툼을 벌임으로써 스스로 자신들의 위선과 모순을 드러낸다. 이때 쪽박광대는 적극적으로 남성을 유혹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한다. 특히 양반 행색으로 보아 상중喪中인데도 놀음판에 나왔다는 것을 알려 놀림감으로 전락시킨다.
세 번째는 ‘주지놀음’이다. 두 명의 주지가 주지판을 들고 서로 또는 관중들을 향해 주지판을 부치면서 극적 갈등 없이 마당 정면을 향하거나 주지끼리 마주 보며 전진과 후진을 거듭하는 마당이다.
네 번째는 ‘지연광대놀음’인데, 네 명의 지연광대들이 등장해 다양한 대형을 그리면서 활달한 의식무를 펼친다.
다섯 번째는 ‘얼레방아놀음’에는 쪽박광대와 중, 그리고 얼레방아가 등장한다. 일반적인 중마당처럼 중이 쪽박광대의 유혹에 넘어가서 파계하지만, 얼레방아에게 들켜 징치당하고, 쪽박광대를 차지한 얼레방아가 그녀와 놀아난다.
마지막으로 ‘무동놀음’이다. 이 놀음은 모두 다섯 조의 이무동이 등장하여 횡대형 또는 종대형이나 원형을 이루는데 무동은 팔을 흔들어 춤을 추고 무동꾼이 놀이꾼들과 관객들이 함께 신명을 푸는 대동마당을 펼친다.
청단놀음은 굿에서 연극으로의 전개 과정이 자연과 인간의 갈등을 다루는 데서 인간과 인간의 갈등을 다루는 데로의 변화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청단놀음은 매년 정월 보름에 터서리당에서 당제를 지낸 뒤에 행했다. 터서리당에는 검덕부인이라는 여신을 모셨고 청단놀음에서 사용한 기물을 이곳에 보관하였다고 한다. 당제를 마친 뒤에 지신밟기와 함께 청단놀음을 연행했다고 한다.
1910년대 일제가 공동체성이 강한 민속행사를 법적으로 금지하면서 중단됐다가 1930년대 예천경찰서 낙성식 때 공연된 후 자취를 감췄다. 이후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지역의 전통문화유산과 무형문화재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예천 출신 초등학교 교사였던 강원희 씨 등 지역 내외의 관심 있는 이들이 청단놀음에 대해 기초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1981년 제22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연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1년, 1987년에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매년 10월 중 청단놀음보존회에서 발표공연을 한다.
* 일러스트 / 서경덕
첫댓글 고향의 놀이를 소개하다...
난 제목을 보는 순간 홍단놀이와 초단놀이도 있겠네 싶었지... ㅎㅎㅎ
재밌어요..^^
전래동화 읽듯 읽어내렸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