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은 겸재 정선(1676∼1759)이 비단 바탕에 수묵 담채로 그린 그림으로, 각 그림의 폭은 세로 20.8~31㎝, 가로 16.8~41㎝로 그려졌으며, 1권으로 완성되어 있었으나 1802년 2권으로 개첩되었다. 현재 간송미술관 소장하고 있다.
경교명승첩의 상첩에는 정선이 양천(陽川:지금의 서울 강서구 가양동·등촌동 일대) 현령으로 재임하던 1740년에 친구 이병연(李秉淵)과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보자는 약속을 위해 그렸던 양천팔경을 비롯하여 한강과 남한강변의 명승도들이 수록되어 있다.
하첩은 상첩보다 10여 년 뒤에 그려진 것으로, 서울 주변의 실경도들과 함께 타계한 이병연을 회상하며 양천에 있을 때 그로부터 받은 시찰(詩札)을 화제로 한 그림들이 실려 있다.
상·하첩에 모두 33점이 수록되어 있으며 파묵(破墨)·발묵(潑墨)·훈염법(暈染法)에 토대를 두고 발전된 그의 60대 후반에서 70대 중반의 독창적인 진경산수의 특색과 변모의 과정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하첩은 상첩보다 10여 년 뒤에 그려진 것으로, 서울 주변의 실경도들과 함께 타계한 이병연을 회상하며 양천에 있을 때 그로부터 받은 시찰(詩札)을 화제로 한 그림들이 실려 있다.
상권엔 19폭, 하권엔 14폭의 그림 모두 33점이 실렸다.
그런데 상권과 하권의 그림들은 화법(畵法)이나 그림 재료(畵材)에 있어서 사뭇 다르다.
제목 그대로 서울과 주변의 명승을 담은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한양의 주변 지역의 모습이 담겨 있다. 양수리 부근에서 한양으로 들어와 행주산성까지 이르는 한강과 주변의 명승지가 25폭의 그림으로 형상화되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림을 그린 배경도 흥미롭다. 65세인 1740년 정선은 양천현령으로 부임했다. 이때 정선을 찾아온 벗 사천 이병연(李秉淵,1671~1751)이 이별하면서 이런 제안을 하였다. ‘자신이 시를 지어 보내면 자네의 그림과 바꾸어서 보자고’. 이 제안은 1741년 [경교명승첩] 상하 2첩 25폭으로 완성을 보았다. 이 화첩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컸던지 정선은 “천금을 준다고 해도 남에게 전하지 말라(千金勿傳)”는 인장(印章)까지 남겨 두었다.
[경교명승첩]은 한강 상류의 절경을 담은 <녹운탄 綠雲灘>과 <독백탄 獨栢灘>에서 시작한다. ‘탄(灘)’은 ‘여울’이란 뜻으로, 현재의 양수리 부근으로 추정된다. 한강 상류에서 시작한 그림은 현재의 서울 중심으로 향한다. <압구정(狎鷗亭)>은 조선초기 세도가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별장 주변을 담은 그림이다. 그림의 중앙부 우뚝 솟은 바위 위에 별장이 위치하고, 백사장이 길게 뻗어 나온 모습이나 돛단배들이 정박해 있는 모습은 최고급 아파트가 들어선 현재와는 너무나 다른 평화로운 풍경들이다. <광진(廣津)>과 <송파진(松坡津)>, <동작진(銅雀津)>의 그림들은 18세기에 이 지역이 포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작진>에는 18척의 많은 배가 그림에 등장하며, 바다와 강을 왕래하는 쌍돛대를 단 배도 등장하고 있다. 물화(物貨)의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지던 한강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행호관어(杏湖觀漁)>에는 고깃배가 등장하는 점이 흥미롭다. ‘행호’는 지금의 행주산성 앞 한강으로 이 일대에 많은 고기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한강의 명물이었던 웅어(멸치과의 바닷물고기로 남서해로 흘러드는 강어귀에서 많이 잡힘)는 바닷물과 민물이 합류하는 곳에 살았으며, 그 맛이 뛰어나 왕에게 진상하는 물품으로 사용되었다. <행호관어>에는 웅어가 뛰어놀았던 한강의 운치가 느껴진다. 남산의 풍광을 그린 <목멱조돈(木覓朝暾)>은 이병연이 보내온 ‘새벽 빛 한강에 떠오르니, 언덕들 낚싯배에 가린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남산에 떠오른다.’는 시에 맞추어 남산에 떠오른 일출의 장관을 그린 것이다. 이병연과 정선이 약속한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시와 그림을 맞바꾸며 감상함)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네이버캐스트]
상권
녹운탄(綠雲灘)
겸재의 '경교명승첩'은 남북한강의 합수머리인 양수리 부근에서 시작한다. 그 첫째가 녹운탄인데 현재 이런 지명은 없다. 아마도 광주군 남종면 수청리 큰청탄 아닌가 한다. 깍아지른 듯한 절벽아래 여울 물살이 거센 듯 강물을 거스러 오르는 배에서는 사공들이 있는대로 다 나와 앞뒤에서 삿대와 노질에 여념이 없다. 절벽 위 등선너머 산 밑에는 제법 살 만한 터전이 있다. 누구의 별장이었던 모양이다. 버드나무, 느티나무 등 잡목이 숲을 이루어 집 둘레를 감싸고 푸르른 산등성이 위로는 소나숲이 듬성듬성 보인다.
채색을 지극히 아끼던 조선시대 산수화답지 않게 청록색을 풍부하게 써서 화려한 느낌을 주는데 이는 겸재가 국왕 이하 일국 감상인들이 존숭하는 당대 제일의 화가일 뿐만 아니라 청나라에서도 평가하는 세계적인 대가로 값비싼 채색을 비교적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독백탄(獨柏灘)
이 곳이 남.북한강이 물머리를 맞대는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의 전경이라는 것을 한눈으로 알아 볼 수 있다. 물 안으로 밀고 들어온 긴 섬이 중앙에 가로 놓여 남.북한강을 갈라 놓았다. 섬 위로 나 있는 강줄기가 북한강이라는 것은 수종사가 거의 산 상봉 가까이에 있는 운길산이 그 뒤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단정지을 수 있다. 더구나 그 좌측으로 이어진 예봉산과 운길산 산자락이 강으로 달려들어 만들어 놓은 긴 반도 모양의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의 지형에 이르면 이곳이 양수리 일대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능내리의 마재 끝자락에 해당하는 억센 바위 봉우리 앞의 긴 섬이 바로 쪽자섬이고 그 사이를 지나는 여울목이 바로 쪽잣여울, 즉 독백탄이라 할 수 있겠다.
우천(牛川)
석실서원(渼湖石室書院)
삼주삼산각(三州三山角)
광진(廣津)
현재 워커힐호텔과
워커힐 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는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 일대의 모습이다. 이 곳에 한강을 건너는 가장 큰 나루 중 하나인 광나루가 있었다.
광나루가 언제부터 이 곳에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의정부 동두천 쪽에서 내려와 한강을 건너 광주 여주 충주 원주로 가려면 이 나루를 건너는 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니 우리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이 나루도 함께 생겨났을 듯하다. 더구나 이 나루 건너편이 백제의 옛 도읍지인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임에랴!
송파진(松波津)
송파진은 지금 송파대로가 석촌호수를 가르고 지나서 생긴 동쪽 호숫가에 있던 나루터다. 이곳은 서울과 남한산성 및 광나루에서 각각 20리씩 떨어져 있던 교통의 중심지라서 광주(廣州) 읍치(읍소재지)가 남한산성으로 옮겨지는 병자호란(1636) 직후부터 서울과 광주를 잇는 가장 큰 나루로 떠오른 곳이다.
압구정(狎鷗亭)
압구정은 강남구 압구정동 산 310에 있던 정자다. 남쪽에서 우면산 자락이 밀고 올라와 북쪽의 남산 자락인 응봉(鷹峯)과 마주보며 한강의 물목을 좁혀 놓은 곳의 끝부분에 세워져 있던 정자다. 원래 이곳 응봉 아래를 휘감아 도는 한강 기슭은 두무개 혹은 동호(東湖)라 하여 경치 좋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그래서 중종(1506∼1544) 때부터는 독서당(讀書堂·젊고 재주 있는 관리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하게 하던 집)을 이곳에 두기도 하였다. 이런 두무개 맞은편 강변의 제일 높은 언덕 위에 정자를 세웠으니 이곳에 올라앉으면 서울 강산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이에 수양대군(首陽大君·1417∼1468)의 모사가 되어 왕위를 찬탈하게 했던 권신(權臣) 한명회(韓明澮·1415∼1487)가 일찍이 이곳을 차지하고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정계에서 은퇴하여 이곳으로 물러 나와 갈매기와 더불어 여생을 한가롭게 보내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독서여가(讀書餘暇)
「독서여가」는 매우 드문 사인풍속화 중의 하나이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으로 보이는 선비가 툇마루에 비스듬히 앉아 부채를 펼쳐들고 마당의 화분에 있는 꽃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어차피 그 선비가 정선이 아니더라도 그 인물은 정선을 비롯하여 그림을 보는 모든 감상자들을 대신하고 있다. 선비의 배경이 되는 초가집, 서가, 나무 등은 선비의 지성을 상징하고 있다. 살짝 보이는 초가집에 깔끔하게 정돈된 서가의 모습이 선비의 청빈함을 강조한다면, 문 사이로 보이는 우람한 향나무는 선비의 기상을 대신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배경을 뒤로 하면서 여유있고 자신감에 찬 선비는 자연의 신비를 축소한 화분의 꽃과 조금도 손색없이 대등하게 마주보고 있다. 이상적인 자연 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펴는 것보다 가까이에 있는 마당의 화분을 바라보며 자연을 관조하는 선비의 태도가 보다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막연한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이전의 사인풍속의 산수인물화와는 달리 선비의 집을 배경으로 삼은 점에서 좀더 우리 생활의 곁으로 다가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에서 특이한 점은 사인풍속의 세계를 채색화풍으로 표현한 것이다. 대개 러한 작품은 수묵이나 수묵담채로 그리는 것이 상례이나, 이 작품에는 채색을 과감하게 사용하였다. 또한 방바닥이나 마루, 기둥에는 문양과 나뭇결을 자세하게 묘사하였다. 이처럼 배경을 충실하게 묘사하고 색채를 풍부하게 구사하여 선비의 옹골찬 분위기가 느껴지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시도는 아쉽게도 더 이상 확산되지 않았다.
<출처는 다음 문화원형>
상첩 중 양천 10경
목멱조돈(木覓朝暾)
목멱산은 서울 남산의 다른 이름이다. 남쪽 산을 뜻하는 순 우리말 ‘마뫼’를 한자음으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마뫼’는 마산(馬山) 또는 마시산(馬尸山) 등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로써 동방 청룡(靑龍), 서방 백호(白虎), 남방 주작(朱雀), 북방 현무(玄武)의 사방신(四方神)을 설정하여 그에 해당하는 산이 사방을 에워싸야 명당이라는 중국식 풍수지리설이 들어오기 이전에도 남산을 남쪽 산이라는 의미의 ‘마뫼’로 불렸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던 것이 조선왕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정궁(正宮)인 경복궁(景福宮)을 백악산(白岳山·북악산이라고도 함) 아래에 짓자 백악산은 현무인 진산(鎭山·명당의 뒷산)이, 목멱산은 주작인 안산(案山·책상과 같은 산이란 의미로 명당의 앞산)이 된다.
당연히 백악산에서 갈라져서 동쪽을 휘감아 도는 낙산(駱山) 줄기는 청룡이 되고 백악산 서쪽으로 이어져 웅크리듯 솟구친 인왕산은 백호가 된다. 조선 태조는 명당인 한양을 금성철벽(金城鐵壁·쇠로 만든 견고한 성벽)으로 보호하기 위해 이 ‘사방신산’의 산등성이를 따라 석성을 쌓아 둘러놓았다. 한성부(漢城府)라는 명칭은 이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다.
안현석봉(鞍峴夕烽)
안현은 안산(鞍山) 또는 모악산(母岳山)이라 부르는 서울의 서쪽 산이다. 봉원사(奉元寺)와 연세대 및 이화여대를 품고 있는 높이 296m의 산이다. 한양의 내백호(內白虎·명당의 서쪽을 막아주는 안쪽 산줄기)인 인왕산에서 서쪽으로 다시 갈라져 인왕산 서쪽을 겹으로 막아주고 있으니 한양의 외백호(外白虎)에 해당한다.
이 산을 안산 또는 안현이라 부르는 것은 산 모양이 말안장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길마는 안장이란 뜻의 순 우리말이다. 아마 안현이나 안산은 길마재의 한자식 표기일 것이다. 모악산 또는 모악재라 부르는 것은 풍수설에 의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서울의 조산(祖山·풍수설에서 명당의 근원이 되는 으뜸산)인 삼각산(북한산)은 부아악(負兒岳·애 업은 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를 업고 서쪽으로 달아나려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서쪽 끝의 길마재를 모악(母岳·어미산)이라 하고 그 아래 연세대 부근 야산을 떡고개라 했다 한다. 어미가 떡으로 아이를 달래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공암층탑(孔岩層塔)
공암(孔巖)은 양천(陽川)의 옛 이름이다. 신라 경덕왕 16년(757) 주군현(州郡縣)의 이름을 한자식으로 고칠 때 이렇게 바꾸었다.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뒤에는 제차바위(齊次巴衣)라 했다. 이런 이름은 모두 한강 속에 솟아 있는 세 덩어리의 바위로부터 말미암았다. 차례로 서 있는 바위란 뜻으로 제차바위라 했고 구멍바위라는 의미로 공암이라 했던 것이다.
금성평사(錦城平沙)
상암 월드컵경기장과 월드컵공원 등이 들어선 난지도(蘭芝島) 일대의 262년 전 모습이다. 원래 이곳은 모래내와 홍제천, 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드넓은 저지대라서 한강 폭이 호수처럼 넓어지므로 ‘서호(西湖)’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곳이다. 따라서 이 세 개천과 대안의 안양천이 실어오는 흙모래는 늘 이곳에 모래섬을 만들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난지도가 이렇게 생긴 모래섬인데 그 모양은 홍수를 겪을 때마다 달라져서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여 일정치 않았던 모양이다. 오리섬(鴨島)이니 중초도(中草島)니 하는 이름들이 난지도의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도 이 모래섬이 떨어졌다 붙었다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현상일 것이다.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인 영조 16년(1740)에는 난지도가 이렇게 강 가운데로 깊숙이 밀고 들어온 모래섬들의 집합체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1919년에 펴낸 경성지도를 보면 난지도는 서호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는 하나의 큰 섬으로 합쳐져 있다. 이 모습은 1970년대 중반까지 크게 바뀌지 않아 신촌 쪽으로 모래섬에 밀린 샛강이 반달처럼 에둘러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드넓은 물가 모래밭이었기에 겸재는 ‘금성평사(錦城平沙·금성의 모래펄)’라는 제목으로 이 일대의 한강을 싸잡아 그려놓았다. 그런데 어째서 하필 ‘금성의 모래펄’이라 했을까. 이는 난지도로 모래를 실어오는 모래내와 홍제천 사이에 금성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모래섬 뒤로 보이는 마을터가 금성산일 것이다. 이 산을 금성산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종(재위·1506∼1544) 때부터다. 충청병사를 지낸 김말손(金末孫·1469∼1540)이 본래 강 이쪽 양천 두미에 있었던 금성당(錦城堂) 불상을 강 건너로 쫓아보냈기 때문에 한양 모래내 쪽 강가 야산에 금성당이 세워지고 금성산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양화환도(楊花喚渡)
행호관어(杏湖觀魚)
행호관어는 ‘행호(杏湖)에서 고기 잡는 것을
살펴본다’는 뜻이다. 한강물은
용산에서 서북쪽으로 꺾여 양천 앞에 이르면 맞은편의 수색, 화전 등 저지대를 만나 강폭이 갑자기 넓어진다. 그래서 안양천과 불광천이 강 양쪽에서 물머리를 들이미는
곳부터 서호 또는 동정호 등으로 불렀는데 창릉천(昌陵川)이 덕양산(德陽山) 산자락을 휘감아 돌며 한강으로 합류하는 행주(杏州) 앞에 이르러서는
그 폭이 더욱 넓어진다. 이 곳을 행호(杏湖)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해청조(宗海聽潮)
종해헌(宗海軒)은 양천현(陽川縣·지금의 강서구) 관아의 동헌(東軒·지방 수령의 집무소) 이름이다. 그러니 ‘종해청조(宗海廳潮)’라는 그림의 제목은 양천현 현령이 동헌인 종해헌에 앉아서 조수 밀리는 소리를 즐기고 있다는 뜻이다. 양천현 관아가 현재 양천향교의 서남쪽 가양1동 239 일대인 성산 남쪽 기슭 한강가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악후월(小岳候月)
소악후월(小岳候月)은 소악루에서 달뜨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다. 겸재가 이런 제목으로 그림을 그리게 된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다. 동복현감을 지내다 스스로 물러나 소악루 주인이 된 이유(李a·1675∼1757)는 겸재보다 한 살 위인 동년배인데 율곡학파의 조선성리학통을 계승한 성리학자이자 아름다운 생활환경을 즐길 줄 아는 풍류문사였다. 당연히 자연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고 술과 시문 서화를 사랑하니 사람들은 그를 ‘강산주인(江山主人)’이라 불렀다. 따라서 그와 사귀던 인사들은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이거나 최고의 풍류문사였다.
설평기려(雪坪騎驢)
설평기려(雪坪騎驢)는 ‘눈 쌓인 벌판을 나귀 타고 가다’라는 뜻이다. 겸재가 영조 16년(1740) 초가을 양천 현령으로 부임해 그해 겨울에 그린 그림이다. 겸재의 벗인 사천 이병연이 동지 이틀 전에 보낸 편지를 통해 그 직전에 이 그림이 그려졌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겸재가 겨울 어느날 새벽에 일어나(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오전 3시에서 5시 사이인 인시(寅時)에 일어나 오후 7시에서 9시 사이인 술시(戌時)에 잠자리에 드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방문을 열어보니 온 천지가 새하얀 눈으로 가득 차 있었던 모양이다.
문득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눈길을 따라 어디론가 하염없이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던가 보다. 그래서 삿갓과 눈옷을 차려입고 나귀에 올라 아무도 몰래 동헌을 빠져나와 정처 없이 길을 나섰던 듯하다.
삼문 앞의 고목 밑을 지나니 양천 들이 넓게 펼쳐져 있고, 그 끝에 우장산(雨裝山) 두 봉우리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의 눈 경치는 대상의 윤곽이 더욱 뚜렷이 드러나는 법이라 우장산 두 봉우리도 실제 이상으로 윤곽이 분명하다.
나무마다 눈꽃이 만발하고 산과 들은 온통 눈뿐인데 동 터 오는 새벽 하늘에는 아직 어둠기가 남아 있다. 그러나 우장산 아래 양지바른 마을에는 새벽 햇살이 얼비친 듯 소나무 숲 사이로 번듯번듯 솟아 있는 기와집 울 안에는 새벽빛이 붉게 물들어 있다.
눈 덮인 우장산 산마루와 골짜기에도, 양천 들의 둑길과 까치내 주변 논두렁에도, 겨울 아침해의 붉은빛은 점점이 물들여진다. 갈 곳은 나귀에게 맡긴 채 아무도 다니지 않은 새벽 눈길에 첫 발자국을 남기며 떠난 나들이길이니 그 흥취가 어떠했겠는가. 시정(詩情)과 화흥(畵興)을 아는 겸재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이었다.
이런 감흥을 겸재는 ‘눈 쌓인 벌판을 나귀 타고 가다’라는 제목으로 이처럼 그려냈다. 아마 겸재는 우장산 아래 어느 마을을 찾아가면 반가운 설중매(雪中梅)라도 피어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빙천부신(氷川負薪)
빙천부신은 ‘얼음벼루에서 나무를 지다’는 뜻이다. 벼루라는 말은 낭떠러지 아래가 강이나 바다인 위태로운 벼랑을 일컫는 순우리말로 베리 또는 벼리라고도 한다. 벼루를 뜻하는 말이 우리 한자에 없어 ‘오를 천(遷)’ 자를 빌려 ‘벼루 천’이라는 독특한 훈(訓·뜻 새김)을 보태 써왔다. 한자가 우리 문자화한 대표적인 예 중 하나다.
이 그림은 겸재가 양천 현령으로 부임하는 영조 16년(1740) 겨울에 그린 것이 분명하다. 시와 그림을 서로 바꿔 보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던 평생지기 이병연이 이 해 동짓달 22일 겸재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가 이 그림 뒤에 붙어있기 때문이다.
‘글월이 동어(凍魚·언 생선) 풍미(風味)를 띄우고 오니, 아침이 와도 밥상 대할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받들어보니 정무가 매우 바쁘신 모양이나 어찌 조금 참지 않으시겠습니까. 십경(十景)이 매우 좋아서 시가 좋기 어려울까 걱정입니다. 곧 벽에 걸어놓고 보겠습니다.’ 다시 그림 곁에는 사천이 보낸 시를 겸재가 옮겨 적은 제화시가 있다.
‘층층이 얼어붙고 등에 나뭇짐 있어도, 올라오면 어려웠다 말하지 않네. 다만 걱정은 도성 안이니, 노래방에서 노래하고 춤추는데 춥지나 않을까(層氷薪在負, 登頓不言難, 惟恐洛城裡, 曲房歌舞寒).’
겸재는 천지 사방에 눈이 가득 쌓인 어느 추운 겨울날 꽁꽁 얼어붙은 한강가 얼음베리에서 백성들이 나뭇짐을 지고 오르는 위태로운 장면을 목격했던 모양이다. 아마 설경(雪景)을 즐기기 위해 소악루에 나왔다가 내려다본 정경이었을 것이다.
하권
인곡유거(仁谷幽居)
인곡유거도는 그의 독특한 암준을 바탕으로 하고 그위에 남종화적인 감화를 나타낸 작품의 하나이다. 겸재처럼 서울과 서울 근교를 사생한 작품을 많이 남긴 작가는 또 없었다. 따라서 서울을 사랑하기로 하면 아마 다른 작가들이 훨씬 미치지 못할 사람이다.
먼 산은 검은 암벽으로 표현하고 가까운 산은 미점으로 표현했으며, 숲의 바탕에 역시 암벽이 깔려 있어서 서울 북교의 산들이 지니는 생리를 잘 파악해서 그린 그림이다.
양천현아(陽川縣衙)
겸재가 영조 16년(1740) 초가을 양천현령으로 부임할 당시 양천현 관아의 모습이다. 양천읍지에 ‘동헌 종해헌(宗海軒)이 건좌손향(乾坐巽向·서북쪽에 앉아서 동남쪽을 바라봄)’이라고 기록돼 있어 현아 전체의 좌향(坐向·명당이 틀고 앉은 방향)이 동남향이었을 것이다. 겸재는 이를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건물들을 모두 서북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틀어 놓았다. 방향 감각까지 배려한 빈틈없는 사생 능력이다.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사천과 겸재가 마주앉아 시와 그림을 주고 받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서로 바로보는 표정이 오랫동안 함께했던 지기끼리만 나눌 수 있는 표정이다.
행주일도(倖州一棹)
창명낭박(滄溟浪泊)
은암동록(隱岩東麓)
장안연우(長安煙雨)
봄을 재촉하는 이슬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서울 장안을 육상궁의 뒷산쯤에 해당하는 북악산 서쪽 기슭에 올라가 내려다본 정경이다. 육상궁은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1670∼1718)의 사당으로 지금 청와대 서쪽 별관 서쪽의 궁정동에 그 일부가 남아 있다. 사적 149호인 이곳이 최근에는 일반에 공개된다고 한다. 연무(煙霧)가 낮게 드리워 산 위에서는 먼 경치가 모두 보이는 그런 날이었던 모양으로, 남산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멀리는 관악산 우면산 청계산 등의 연봉들이 아련히 이어진다.
겸재가 전반의 생을 보냈던 북악산 서쪽 산자락과 후반의 생을 산 인왕산 동쪽 산자락이 마주치며 이루어 놓은 장동(壯洞) 일대의 빼어난 경관을 눈앞에 깔면서 나머지 부분들은 연하(煙霞)에 잠기게 하여 시계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꿈속의 도시인 듯 환상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킨 서울 장안의 진경이다.
개화사(開花寺)
현재 서울 강서구 개화동 332의 12에 있는 개화산 약사사의 겸재 당시 모습이다. 그때는 주룡산(駐龍山) 개화사(開花寺)라 했기 때문에 개화사로 그림 제목을 삼았을 것이다. 주룡산은 안산의 수리산과 인천의 소래산 줄기가 뻗어 나와 한강변에 솟구친 산으로 양천현아의 뒷산인 성산에서 보면 서북쪽에 위치한다. 신라 때 이 산에 주룡(駐龍) 선생이라는 도인이 숨어 살며 수도하고 있었다. 그는 매해 9월 9일이 되면 동지들 두세 명과 함께 이 산 높은 곳에 올라가 술을 마시곤 했다. 그는 그 술 마시는 행사를 ‘구일용산음(九日龍山飮)’이라 불렀다 한다. 9월 9일 주룡산에서 술 마시기라는 의미다.
사문탈사(寺門脫蓑)
사문탈사(寺門脫蓑)는 ‘절 문에서 도롱이를 벗다’라는 뜻이다. 도롱이는 물기가 잘 스며들지 않는 띠풀을 엮어 어깨에 둘러쓰던 비옷이다. 눈이나 비가 올 때 이를 두르고 삿갓을 쓰고 나다녔다.
이 그림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가 세밑 어느 눈 오는 날 소 타고 절을 찾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사실은 사천 이병연이 영조 17년(1741) 겨울에 양천 현령으로 있는 겸재에게 보낸 편지가 그림 뒤에 붙어있는 데서 알 수 있다.
“궁하고 병든 몸이라 문안 못 드립니다. 다시 화제(畵題)를 써서 보내드리는데 사문탈사는 형이 익숙한 바입니다. 소를 타고 가신 율곡 고사(故事)의 본시(本試)에 이렇게 읊었습니다. ‘한 해 저물고 눈이 산을 덮는데, 들길은 큰 나무 숲 속으로 나뉘어 간다. 또 사립문 찾아가 늦게 두드리고 읍하여 뵈니….’ 갖춰 쓰지 못하고 보내드리니 살펴보십시오.”
몇 백년이나 묵었을 노거수(老巨樹)가 절 문 앞에 늘어서 있는데 잎 진가지 위에 눈꽃이 가득 피어있다. 절 문이 행랑채 딸린 재궁(齋宮) 건축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왕릉의 조포사(造泡寺·두부 만드는 절이란 의미로 왕릉 원찰을 일컫는 말)인 것이 분명하다. 당시 서울 주변에 남아있던대표적 원찰인 뚝섬 봉은사(奉恩寺)가 아닐지 모르겠다. 절 문이나 줄행랑의 지붕 위에도 눈이 가득 쌓여 있고 땅 위에도 눈빛뿐이다. 이렇게 눈빛 일색의 단조로움을 깨뜨리려는 듯 절 집의 벽을 온통 분홍빛으로 칠해놓았다.
절 문 앞 큰길가에는 큰 도랑이 여울지며 흐르는데 그 위에 네모진 한 장 판석(板石)으로 돌다리를 놓았다. 방금 그 다리를 건너온 듯한 율곡 선생이 검은 소를 타고 도롱이 삿갓 차림으로 절 문 앞에 당도하고 있다. 소가 아직 채 걸음을 멈추지 못한 상태인데도 고깔 쓴 승려들이 달려들어 우선 도롱이부터 벗겨드리고 있다. 정녕 ‘사문탈사’의 장면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얼굴이 보이는 쪽 승려는 나이가 상당히 들어 보인다. 아마 절의 주지인 듯하다. 주지가 직접 달려나와 이렇게 허겁지겁 도롱이를 벗겨드릴 정도라면 율곡 선생과의 관계가 어떤 것일지 대강 짐작이 간다. 문 안으로부터 젊은 승려 하나가 합장하며 달려나오고 문 안 층계까지 달려나오던 노승은 뒤따르던 젊은 승려에게 다담(茶啖·손님에게 대접하기 위해 차려 내는 다과)을 준비시키는 듯 돌아서서 무엇을 지시하고 있다. 눈 속을 뚫고 눈 사랑하는 감회를 함께하려 찾아온 현자를 맞는 사찰의분위기가 유감 없이 드러나 있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척재제시척
녹음 가득한 마당에 서 생선꾸러미를 선물로 받고는 시로 감사의 답을 하는 친구 척재 김보택(척齋 金普澤·1672∼1717)을 그린 ‘척재제시’(척齋題詩·척재가 시를 짓다)는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생활상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좋은 작품이다.
어초문답(漁樵問答)
장안연월(長安煙月)
사진 설명은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Jrig&fldid=QfOE&datanum=22&openArticle=true&docid=1JrigQfOE2220100118173557 참고
첫댓글 전부 엑박아닌가요?
그림이 대부분 안 보이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