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선_ 한국 근대미술 비평 연구, 윤희순을 중심으로
바라보다 ・ 2022. 12. 26. 0:28
한국 근대미술 비평 연구
- 1930∼40년대 윤희순의 민족주의 미술론을 중심으로
오윤선(제주대 교육대학원 미술교육전공)
석사학위논문(2003년 8월)
지도교수 김용환
목 차
Ⅰ. 서 론 ······················· 1
1.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 1
2. 연구의 내용과 구성 ····························· 3
Ⅱ. 근대 미술비평의 대두와 전개 양상 ················ 5
1. 근대 한국미술비평의 형성(1900∼1920) ······· 5
2. 리얼리즘 미술론의 대두(1920∼1930) ·········· 8
Ⅲ. 1930∼4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 미술계의 양상 ·· 14
1. 1930년대 대동아 공영권과 미술계 ················ 15
2. 1940년대 전시와 해방공간의 미술계 ············· 18
Ⅳ. 1930년대 윤희순 미술비평론의 성격 ······· 23
1. 미술 비평론의 형성 배경 ······················ 23
2. 계급적 현실주의 ························ 26
3. 표현적 사실주의 ··························· 35
4. 조선적 향토주의 ······················ 41
Ⅴ. 1940년대 동양중심 미술특질론 ··············· 51
1. 동양미술 특질론 ······································· 52
2. 동양적 유화론 ···················· 58
3. 시국 미술론 ·················· 61
Ⅵ. 결 론 ·············· 67
참고문헌 ········· 70
Abstract ·········· 73
<참고 도판〉 ·································· 75
<부록>················································79
▷윤희순(尹喜淳) 1902-1947.4
호는 범이(凡以). 서울 출생.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독학으로 서양화가로 활동 하는 한편, 1930년부터는 신문·잡지에 미술전람회평과 시론(時論) 등을 쓰며 미술비평 분야 형성에 공헌하였다.
서양화계 진출은 1927년부터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을 거듭하고 특선도 하며 이루어졌다. 서화협회전람회에도 참가하며, 사실적 자연주의 수법으로 꽃과 인물을 주로 소재삼은 유화활동을 하였으나, 전해지는 작품은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은 1937년까지였고, 그뒤로 서양화가로서의 활약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반면, 미술평론과 한국미술사 연구에 전념하는 가운데 1940년 무렵부터는 매일신보사 학예부 기자가 되어 미술전 평을 전담하였다.
8·15광복 직후에는 새로 설립된 서울신문사 문화부장으로 재직하는 한편, 좌익 노선의 조선조형예술동맹 위원장, 이어서 좌익계 미술단체 통합조직의 조선미술동맹 위원장 및 미술평론부 위원이 되어 진보적인 민족미술 방향을 주도하다가 1947년 4월에 폐결핵으로 죽었다. 저서로 『조선미술사연구』(1946)가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윤희순(尹喜淳))]
I. 서 론
1.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우리는 시간적․공간적으로 과거의 역사적 축적을 기반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만연된 서구 중심의 사고방식은 강대국 중심의 이념적 잣대에 의하여 우리 정체성에 대한 모멸감에 빠져들게 하였다.
지난 20세기는 일제에 의한 식민지시대였고, 반으로 나누어진 분단의 시대였다. 우리의 미술계 역시 시대의 굴절과 강대국 중심의 이념적 유입으로, 자기 정체성에 대한 확인을 무시하고, 서구적 척도에만 맞추려고 하는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서구적 정서와는 다른 우리들만의 정서와 그에 따른 미술이 엄연히 존재한다. 따라서 현대 한국미술의 흐름 속에 과거의 미술적 성과를 담아낼 수 있는 연구가 더욱 절실한 것이다.
현대 국제 사회는 강대국 중심의 문화적 사상적 보편화의 흐름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현대 미술은 세계 문화의 공통적 감성을 바탕으로 2차 세계대전 후에 나타난 다양한 미술사조를 이어 가면서, 기존의 전통적 미의식에 대한 관념은 재음미할 겨를도 없이 사장되고 있다. 또한 엄청나게 빠른 변화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치관은, 그 속도에 발 맞추기 위하여 앞만을 보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이들은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 본다는 것은 ‘국수주의’와 민족적 ‘전통주의’에 빠져들게 함으로써, 국제화에 적응할 수 없는 민족적 자만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고 한다.
지금은 격동의 지난 20세기를 살아온 역사적 반성의 세대와, 미래의 속도에 맞추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미래지향적 세대와의 중간적 교두보를 확보하여 이 시대에 맞는 올바른 가치관과 사상적 차이를 조화시켜야 할 시점인 것이다.
과거 일제 식민지 지배 하에서의 문화말살은 동양정신의 중심을 일본에 두어, 조선의 현실에 대한 사실적 시각을 정책적으로 철저하게 차단하였다.
서양화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일본의 인상파 아류를 수용했고, 선전은 이 화풍을 권장하여 선전 관학파를 만들었다. 일제는 ‘향토적 서정주의’의 권장이라는 교묘한 술책으로 문화정책을 일관되게 펴 나갔다. 그것은 민족의 한을 초가집 있는 풍경을 통하여 한낱 지나간 추억으로 만들며 현실에 대한 무관심을 유도하는 서정주의였다.
따라서 이러한 조선적 정조를 표현한 근대미술의 ‘향토성’이 진정으로 당시 우리 민족의 정조를 담아낸 미술 대한 반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처럼 지금까지, 철저하게 유린된 일제시대 근대미술의 정태적 속성이 이어져 왔다는 것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하는 국제화 시기에, 일제 잔재 청산은 물론, 한국 미술계의 반성과 정체성 확보라는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아울러 현대미술의 미학적 혼란에 대해서 동․서양 미학의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비교가 이루어져야 하며, 현대미술의 서구화에 따른 상대적 대안으로, 동양정신에 입각한 미학의 재고가 더욱 필요한 시기인 것이다.
특히 본 논문에 제시될 윤희순의 근대 미술론 연구는, 해방 이후 편협한 시각에서 구체화되어버린 한국미술의 미학적 담론을 문헌과 사료를 통하여 재구성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근대미술에 대한 사료 발굴이 미진하여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몇몇 미술사학자의 노력에 의하여 밝혀진 윤희순이라는 비평가는 근대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정립하기 위한 귀중한 존재이다. 이것은 이데올로기 시각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한국미술의 위상을 재점검하고, 국제화 흐름 속에서 한국적 미학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과제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본 논문은 당대의 시대적 상황에 따라 대처해 나간 여러 미술계의 활동과 성격을 확인하고, 그러한 상황에서 한국적 사실주의 미술을 주장한 윤희순이라는 비평가의 글을 중심으로, 이미 발표된 관련 논문과 문헌을 비교할 것이며, 특히 당대의 타 비평가의 글과 비교하여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윤희순의 위상을 새롭게 고찰하는 것이다.
정종여_ 병석의 윤희순 선생 (1947)
2. 연구의 내용과 구성
본 연구의 관심사는 일제 식민지하에서 서양화와 미학의 유입으로 파생된 한국 근대미술의 미학적 담론과 흐름을 짚어보고, 21세기 국제화에 따른 한국 미술의 정체성을 점검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굴절된 역사의 희생
물로 파급된 미학과 미술 비평론이, 어떻게 현재 한국 정통적 담론으로 성장 발달하였는지에 대한 흐름을 되새김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 한국 미술의 위상이 국제적 미술 흐름 속에 어떤 보편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인으로서 정체성 있는 미학적 담론을 제시할 수 있는가? 에 대한 물음에서 본 연구가 시도되었다. 이에 본 논문은 근대미술 형성기 중 일제의 압력이 가중되었던 시대적 상황에서, 서구 미술의 유입 과정에 나타난 미학의 혼란과, 이에 대처하는 윤희순 미술론을 중심으로 당대에 발표되었던 글과 문헌 등을 비교 고찰할 것이다.
이를 위해 당시 윤희순의 발표한 신문 논고를 중심으로 주제를 설정하고, 미술비평과 미술론을 비교할 수 있는 글들을 시대별로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열의 ‘한국근대미술의 역사’1)라는 단행본과 한국근대미술사학회의 논문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1) 최열(1998), 「한국근대미술의 역사」, 열화당.
하지만, 윤희순의 생애와 미술론에 관련된 두 편의 논문2)과 문헌에 의해서, 윤희순의 생애와 작품 비평관에 대한 연구가 이미 선행되었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개인적 생애와 미술론의 형성을 개괄적으로 제시할 것이다.
2) 윤희순 관련 연구 논문으로 최정주(1999), “윤희순(1903∼1947) 미술비평 연구”, 석사학위 논문, 홍익대학교 대학원. : 변세연(1998), “윤희순 미술비평관 연구”, 석사학위 논문,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따라서 본 논문의 연구 중심은 윤희순이 발표한 글을 중심으로, 시대적 정세 변화에 따른 미학적 담론의 성격과 변화를 제시하여, 미술비평가로서 당대에 처신했던 윤희순의 미술비평적 위상을 고찰할 것이다.
제 1장 서론에 이어 제 2장에서는 본 논문의 주제에 접근하는 장으로서, 서구 미학과 유화가 유입되고, 일제 식민지 지배 하에서 나타나는 근대미술 태동기의 비평적 변화 현상들을 시대별로 제시하였다. 제 3장에서는 윤희순의 비평적 활동이 활발하게 나타나는 시기인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일제 정책을 중심으로 점검하고, 당대의 정책적 흐름 속에서 나타난 미술계 소집단들의 활동과 그에 따른 미학담론의 차이점을 제시할 것이다. 제 4장에서는 본 논문의 주제 부분으로, 일본 유학파들이 조선 미술계를 움직이는 상황에서, 독학으로 유화와 미술론을 수학한 윤희순의 1930년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기저로 한 비평을 제시하였다. 식민지 정책에 의해 전개된 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나타난 향토적 조선정조와 관념적 미술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성격적으로 구분하여 제시할 것이다.
제5장에서는 일제 파시즘 강화와 패망에 의한 해방 정국에 이르는 1940년대 전후의 혼란 속에서, 시대에 대처해 나가는 윤희순의 변화된 동양중심 미술 특질론을 고찰하고자 한다. 하지만, 해방이후 민족미술 건설에 대한 구상은 「조선미술사 연구」3)라는 저서에서 제시되었고, 윤희순이 사망으로 인하여 식민지 잔재 청산을 위한 민족미술론 수립에 대한 내용은 제외되었다.
3) 윤희순(1946),「조선미술사 연구」, 서울신문사, 11월. : ──(1994),「조선미술사연구」,동문선, 재발간
제6장에서는 결론으로서 앞에서 논한 내용을 요약, 정리, 제언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그동안 윤희순이 주로 기고한 ‘매일신보’의 자료들이 축쇄판으로 복사되어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기사 내용을 확인하는데 한계가 있어서 기존 학자들의 자료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Ⅱ. 근대 미술비평의 대두와 전개 양상
본 논문의 주제에 접근하는 부분으로서, 우선 한국 근대미술의 태동기인 1900년대부터 나타나는 민족 계도적인 비평과, 1920년대의 본격적인 작품 비평이지만 관념적 비평 수준의 자료들을 확인하여, 윤희순이 활동을 시작한 1930년대 이전까지 미술비평의 흐름을 개괄적으로 확인할 것이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서구의 미학과 유화가 유입되고, 일제 식민지 지배 하에서 시작된 근대미술 태동기의 비평적 변화 현상들을 시대별로 제시하겠다. 먼저 근대미술 태동기의 계몽적 글들을 살펴보고, 식민 통치 하에서
민족해방을 위한 현실주의 문화활동과 연계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술비평론 확인할 것이다. 아울러 본 논문의 주제인 1930년대 초반 윤희순 미술론에 영향을 준 사회주의 프로미술운동의 전개 양상과 순수예술 담론과의 차별적 논쟁을 비교할 것이다.
1. 근대 한국미술비평의 형성(1900∼1920)
1900년대는 한국화단에서 근대미술이 시작되면서 미술비평이 태동한 시기이다. 이 시기의 담론 속에서 ‘미술’은 ‘새로운 기술’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중심에 놓여 있던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산업 발달’에 이바지
할 수 있는 공예품이었다. 최초의 미술에 관한 글은, ‘황성신문’에 공예품의 부당한 가격 설정과 정책 부실의 현실을 비판하면서 공예를 부흥시킬 것을 주장하는 ‘장지연’의 논설4)이다.
4) 장지연, “공예가면발달”, 황성신문 1900. 4. 25. : ───, “논공예장려지술”, 황성신문 1903. 1. 10.
이 당시는 주로 신문, 잡지를 통해 자유롭게 계몽주의 성격의 미술비평이 대두되었지만, “미술계의 움직임이 미약하였고 일반인의 미술에 대한 인식도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문화로서 신미술에 관한 글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5)
5) 김현숙(1994) “한국 근대미술비평 개관(1900∼ 1945)”,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단』 여름호, p.11.
초창기 근대 미술비평은 전문가가 아닌 문인이나 학자에 의해 시작되었고, 창작을 겸한 작가에 의한 비평활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한국인에 의한 전람회는 개인전과 단체전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게 일반적이었다. 최초로 열린 개인전 형태의 전람회로는, 일본 유학 1세대에 해당하는 1916년 평양에서 열린 김관호 개인전이 있었고, 뒤이어 고희동, 허백련, 강신호, 이종우, 변관식 등 개인 전시회가 잇달아 열렸다. 하지만, 전람회에 관련된 글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전람회의 등장 및 수용은 화가들과 감상자들에게 많은 자극이 되었지만, 작품에 임하는 태도와 감상자의 작품에 대한 충분한 이해에 있어서는 미학의 부재라는 전근대적인 상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1910년부터 3․1운동이 일어나기까지의 시기는 한일합방 이후의 무단통치 기간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제약을 받았고 개화기에 발행되었던 대부분의 신문이 폐간되었다. 국내 신문은 유일하게 「매일신보」뿐이었고, 잡지로는 최남선의 신문관에서 발행하는 「소년」, 「청춘」 등과 계몽 간행물이 약간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의 이러한 언론 상황 속에서 서양화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새로운 미술 활동에 대한 보도적인 성격의 기사 및 글이 발표되었다. 특히 1915년에 춘원 이광수가 동경에서 유학할 당시 ‘동경잡신’ 중에 김관호의 문전 첫 입선 및 특선(도판 1)을 한 작품을 동경 현지에서 목격하면서 흥분과 격려를 표명한 ‘문부성미술전람회기’ 글이 서양화 정착기에 쓰여진 주목할 만한 객관적 언급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 근대적인 자기인식을 보여주는 화가로 김찬영을 들 수 있는데, 그는 “미술은 인생과 자연의 반영”이라는 짧은 글에서 “미술은 단순한 기술도 아니고 문명의 수단도 아니다. 또한 그것은 단순한 사물의 모사나 재현도 아니다. 미술은 인생과 자연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연장시키는 ‘무엇’이 된다.”6)라는 이른바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한 사유를 밝힌 것이다.
6) 김찬영, “미술은 인생과 자연의 반영”, 매일신보 1917. 6. 20.
1920년대 들어서서 서구미술사조의 소개와 서화협회전(이하 ‘협전’이라 칭함)과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이라 칭함)7) 개최는 미술계 전반의 흐름을 새롭게 전개시킬 바탕을 마련하였다.
7) 1918년 한인들만의 모임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창립되었던 서화협회는 1921년에 첫 번째 전람회를 시작으로 1936년까지 15회를 거듭하였고, 조선미술전람회는 협전 창설의 자극과 민족적 단합체를 분열시키려는 정책적 차원에서 조선총독부 주최로 1922년에 창립되었다.
미술비평 역시 두 전람회의 전시평을 시작으로, 시각에 따라 다양한 견해를 보이는 관념 비평적 미술론이 제시되면서 “예술지상주의 예술론과 리얼리즘 예술론, 식민미술사관 같은 논쟁이 수면 위로 떠올라 20년대 전반기를 달구는 현상”8)이 빚어지게 되었다.
8) 조은정 외(2001), 「비평으로 본 한국미술」, 대원사, p.21.
초기 예술지상주의 예술론에 입각하여, 심미주의적 입장에서 서구에 관심을 두었던 글은 동인지 등을 통하여 미술인과 문인의 교류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문학에서 유미주의적 관점으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예술지상주의적인 경향을 미술에 도입”9)한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9) 기혜경(1998), “1920․30년대 한국 근대 미술과 문학의 교류상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 논문, 홍익대학교 대학원, pp.13∼25. 참조
3․1운동 이후 사이또(齊蕂實)가 총독으로 부임하여 종래의 무단정치를 문화정치로 바꾸면서, 이에 따라 신문 등 일간지와 ‘창조’, ‘개벽’ 등 종합 월간지의 창간이 허용되었다. 이 시기의 저널리즘의 출현은 미술비평이 대중적 관심을 제공하는데 중요한 여건을 제공한 셈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대체로 저널리즘의 한 영역으로 계몽주의적 성격을 벗어날 수 없었고, 단지 전람회의 비평적 소개, 계몽적 시론, 새로운 회화론, 미술론의 피력 또는 주장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특히, 서양미술 방법 소개와 이해를 위한 글이 참신한 미술론으로 받아들여지는 예가 많았다. 반면, 표현형식이나 미술사고 또는 미의식에 대한 구체적, 분석적 평론은 매우 드물었는데, 이것은 전문 평론가의 부재 및 그 방면 연구가의 활동 여건 미비와, 그나마 평론은 전적으로 화가 자신들의 책임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2. 리얼리즘 미술론의 대두(1920∼1930)
우리나라 근대 미술비평은 리얼리즘 미술론을 시작으로 비로소 본격적인 비평의 괘도에 진입하였다. 리얼리즘 미술론의 표명은 1920년대 초에 발표된 변영로의 글10)로 미술은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표현해야 한다고 하여 미술비평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10) 서양화의 대안적 언어로 ‘동양화’란 새로운 언어를 썼으며, 이 후에 이렇다 할 평문을 쓰지 않았다. : 변영로, “동양화론” 동아일보 1920. 7. 7. : 이경성, 이구열(1973), “20년대 미술평론”, 「공간」, 10월, p.32에 재 수록
변영로는 당시 시대적 전환기의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민중적 시각에서 ‘시대정신’을 표현해야 할 것이며, “시대정신은 회화, 아니 모든 예술의 혈(血)이며 육(肉)이며 향이며 색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예술가는 시대정신을 잘 동찰하고 이해하여 그것을 자기 예술의 배경으로 하고 근거로 하여 결국 모든 시대사조를 초월하는 영원불멸의 미를 창조하는 것”11)이라고 하여 다소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한계를 지니긴 했어도 모방하지 않는 조선화의 신화법을 제창하고 있어, 신문 학예면의 대부분이 문학론과 논쟁으로 채워졌던 상황에서 아직 궤도에 진입하지 못한 미술비평에 문학인들이지만 선구적 역할을 한 셈이 된다.
11) 변영로, 상게서
초기의 비평가들은 문학인이 대부분이었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이른바 전문적인 안목을 구비한 전문비평가의 출현은 상당 기간을 경과한 후에야 출현하게 되었다.
당시의 글들은 협전과 조선미전의 감상비평 혹은 시론 등으로 일본화와 일본양화의 직접적이고 강한 영향이 불가피하였던 상황에서, 민족적 현실을 망각하지 않게 촉구하는 계도적인 미술비평이다.
한편, ‘일기자’라는 논객이 협전에 출품된 작품에 대해서 쓴 글은, 당시 작가에 대한 사대주의적 안일한 태도를 성토하고 있다.
“예술은 자연과 인생의 실재를 그리는 것이니, 이 실재는 인생의 사상․감정을 떠나서 있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민중의 실생활을 떠나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즉 그 실재를 떠난 예술이 있다 하면 이 예술이 어찌 생명이
있는 예술이 되며, 이미 생명이 없는 이상에 어찌 가치가 있기를 바라리오.”12)
12) 일기자(1922), “서화협회 제2회 전람회를 보고”, 「신생활」, 5호 : 이경성, 이구열(1973), 「공간」, 10월, p.35. 재인용.
예술이 기묘하다 할지라도 실사(實寫)가 없으면 예술로서의 가치가 없으며 민중의 실생활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면 허위의 미라고 하는 것은 현실
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제고하는 민족주의와 일치하는 것이다.
또한 조선인의 생활이 전반적으로 비참하면 조선인의 일부가 되는 예술가도 그 생활이 비참할 것이기 때문에, 그 사상도 격(激)하며 분(奮)하며 용하며 노하여 감정의 표시나 생활의 표시인 예술은 그러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 근대미술비평의 사실주의적 민족미술론의 출발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한 민족의 위기에 직면한 시대상황 속에서 “민족주의는 우리 근대미술사 전체를 지배하는 이념으로 작용하게 되며 프롤레타리아미술론(이하 ‘프로 미술론’이라 칭함)이나 ‘향토미술론’의 형성 근저에는 모두 민족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음”13)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3)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엔솔로지(1984), 이구열, “근대한국미술과 평론의 대두,” 「한국현대미술의 형성과 비평」, 열화당, p.87 : 한국미술평론가협회(1994) 김현숙, “한국근대미술 비평 개관(1900~ 1945),” 「미술평단」, 여름호, p.13.
3․1운동의 실패 이후 조선사회에 유입되기 시작한 사회주의 사상은 민족해방을 위한 새로운 이념으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3․1운동이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은 고사하고, 어떤 실질적인 정치적 양보를 얻어내는 데도 실패하고, 그 운동의 평화주의와 비폭력 전술에도 실망했기 때문이다.
또한 연합국들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하자 많은 지식인들은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여 소련이 세계 피압박 민족의 옹호자임을 자처하고 나섬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사상의 역동성에 크게 고무되었다. 이는 서구 자유주의에 대한 매력적인 대안이 되었으며, 아세아에 대한 서구 정책의 실패는 공산주의의 호소력만을 증가하는 계기를 마련했을 뿐이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일제 치하 진보적인 미술창작과 활동은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주의를 기초로 한 사회주의 미술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Korea Artist Proletaria Pederation, 이하 ‘카프’라 칭함)14)의 문예운동 속에서 발견되는 미술활동은, 동경에서 조우하여 연대활동을 했던 김복진과 안석주에 의해 전개되었다.
14) 보수적 문예운동과 격렬한 계급투쟁을 벌이고 있던 문학단체인 ‘염균사’와 중견 문인이 집결된 문예단체로서 조직된 ‘파스큐라’라 협동한 단체로서 ‘일체의 전제 세력과 항쟁하고 예술을 무기로 하여 조선 민족의 계급적 해방을 목적으로 한다’는 강령을 채택하고 대규모 문학, 예술운동을 벌여 나갔다. 1925년 8월에 결성(1925년 4월에 조선공산당 결성)된 것은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고, 27년 방향전환기에 ‘조선 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으로 30년 8월에 약칭 카프로 개칭되었다. : 박영택(1992), “식민지시대 사회주의 미술 운동의 성과의 한계”, 「한국근대미술 논총」, 학고재, p.263.
또한 그들은 ‘창광회’15)라는 사회주의 성격의 미술부를 조직하여 카프내의 하부 미술부 조직과 연대한 미술계의 세력강화 요구에 협력하였다.
15) 창광회는 ‘조선미술의 창조’라는 야심적인 목적을 밝히면서 김복진, 안석주를 중심으로 출범한 미술가 단체로서, 이승만, 김창섭 등이 참가하였다. : 최열(1991), 「한국현대미술운동사」, 돌베개, p.42.
김복진은 일본의 좌익 사상가인 산천균(山川均) 등의 저술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저서를 탐독하였고, 안석주는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면서 동시대 반제․반봉건 문예운동의 맥락과 통합되는 풍자화(도판 2) 등을 연재하였다. 또한 안석주가 목적 의식적 사회주의 문예이론에 심취하여 사회혁명을 이룩하기 위해서 미술을 이용하자는 제5회 협전을 보고 쓴 글을 보면, 이는 당시 사회주의 문예이론에 의해 민중의 현실을 사실주의적으로 표현할 것과, 모든 대중의 이익을 획득하는 데에 도움이 될만한 작품을 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 그것은 그 시대 인에게 아무러한 반향이 없으면 자가(自家) 희롱물에만 그칠 것이다. 예술 거기에는 그 시대인의 생활 그것이 간접으로 드러나서 다시 그것에게서 민중이 자기의 생활을 엿보아 자기를 알게 되는 것이다. (중략) 또 말하자면 예술은 현실을 폭로시켜온 민중의 실재를 인도하는 책임이 있다.”16)
16) 안석주, “제5회 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25. 3. 30.
따라서 당대 민족적 현실에 처한 한국 민중의 생활을 들어내어 사회혁명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1927년 김복진의 ‘나형선언초안’에서 더욱 구체화하여 마련되었다. 그 글에서 예술은 무산계급성, 의식투쟁성, 정치성을 지니는 것이며 무산계급 예술가들을 조직하여 의식투쟁을 전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사회주의적 그룹 운동은 문학과의 교류에서 출발한 ‘토월회’(1922, 연극단체)와 ‘염균사’(1922, 문학단체), ‘파스큘라’(PASKYULA 1923, 문예단체) 가 협동이 되어 카프가 결성되었다.
초기의 카프 미술은 무대미술 및 잡지의 삽화, 포스터 제작 등 다른 분야의 보조적인 작업이나 미술비평 위주로 진행된 것 같다. 그들의 다양한 비평활동은 근대미술비평 활동을 성립․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하지만 프로미술운동으로서 실질적인 미술 창작활동으로 전개되지는 못하였으며 민중 속에 깊이 침투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본격적인 활동은 제1․2차 방향전환에 의해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만, 전람회를 통한 작품의 제작 발표는 거의 행해지지 못했다. 그 사정은 일제의 강압적인 탄압과 미술작가들의 빈곤한 생활고와 개인적인 형편때문이었다. 결국 일제 파시즘 체제의 탄압 대상이었던 카프는, 김복진 등 핵심 주동자들의 투옥과 조직 내부의 해소파와 비해소파 논쟁으로 결국 1935년 4월 사라지고 말았다.
카프 활동에 대한 의의에 대해서 “프로미술운동은 그 출발에 있어서 문학과 마찬가지로 민족해방운동의 올바른 노선과 궤를 같이 하지만, 미술이라는 특수성 속에서 이념을 드러내지 못했다. 또한 민족적 현실에 대한 계급적 모순을 우선시한 관념적 논쟁으로, 작품 창작에 소홀한 점과 이데올로기적 측면만 강조하다 보니 현실에서 구체적 실천을 간과한 점에 대해서 반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오 못지 않게 뒤틀린 민족현실을 극복하려는 예술인의 적극적인 대응, 작가적 소시민성을 극복하며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미학적 노정은, 당시 일제의 문화통치 하에 만연된 예술지상주의, 순수예술의 허구성을 밝히고 민족해방운동의 실천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투철한 역사의식을 지녔던 것은 의의가 매우 크다.”17)라 하여 당대 민족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프로미술운동의 조직적 한계와, 기존 미술계의 대안으로서 실천적 문예운동의 성과를 동시에 볼 수 있다.
17) 박영택(1992), “식민지시대 사회주의 미술 운동의 성과의 한계”, 「한국근대미술 논총」, 학고재, p.271.
한편 일본에서 유학한 김복진, 안석주, ,홍득순 등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프로 미술론에 대한 김용준 등의 반론적 반격은 프로 미술논쟁에 불을 지폈다.18)
18) 최열(1991), “1927년의 프로미술논쟁 연구”, 가나아트 9월,10월호. pp.130∼139. 참조
이 무렵 형성된 논쟁의 대립 구도는 문학계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문학 이론과 무정부주의 문예이론과의 논쟁에 김용준이 끼어 들면서 프로미술논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당대의 상대적 미술 담론에 대한 활발한 이론적 성과라 할 수 있다. 김용준에 의하면 “예술은 선전과 선전수단으로 이용하는 마르크시즘의 「예술도구론」밖에 없다면 사회운동과 예술운동은 본질적으로 상이할 게
없다”19)는 것이 그 반론의 요지였다.
19) 김용준, “프롤레타리아 미술비판-사이비 예술을 구제하기 위하여” 조선일보 1927. 9. 18∼30.
이러한 시각은 당시 김복진, 윤기정, 임화 등 급진적인 예술가, 문필가들부터 예술지상주의라는 비판을 받았
고, 이에 대한 자기 변론으로 ‘과정론자와 이론 확립’20)이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20) 김용준, “과정론자와 이론확립-프로 화단 수립에 불가결할 문제” 중외일보 1928. 1. 29∼2. 1
이러한 프로미술론에 대한 논쟁은 1930년대에도 계속되어, 조선 향토색을 둘러싸고 각각 상이한 입장을 보였던 김복진․윤희순과 김용준․오지호 대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 화단에서의 리얼리즘에 대한 담론적 논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해방 공간에서도 참여논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Ⅲ. 1930∼4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 미술계의 양상
본 장은 윤희순의 미술비평이 시작된 시대를 배경으로, 다양한 미술 소집단의 창립과 아울러 긴박하게 돌아가는 일본 제국주의 대륙침략의 교두보에 놓인 한국적 상황에 대한 미술계의 대처와 정치적 연결고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서양화가 유입되고 정세 변화에 따른 문화 통치일환으로 전개되었던 전람회 및 미술 풍토의 노정을 살펴보고, 미술계 한복판에서 벌어진 미학 담론의 주인공을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주제에 접근하기
위한 미술계 주변의 정세 분석과 일본을 통해 유입된 서구적 미학과 서양화 유입으로 나타나는 미학적 담론들의 성격을 제시할 것이다.
1930년대의 시대적 상황을 제시하기 위하여 먼저 1919년 3․1운동의 실패로 인한 민족 자강 운동의 변화와 사회주의적 사상운동에 의한 미술운동의 대두, 1920년대 후반에 형성된 프로미술론과 이에 대한 순수미술론과의
논쟁 배경을 제시하겠다. 아시아 패권을 위한 일제 파시즘 강화에 따른 정세 변화 속에서, 미술론은 1920년대 논쟁의 연장으로 순수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된 모습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조선정조라는 향토
색에 대한 논쟁으로 나타나게 된다.
1940년대 들어 일제는 대동아 주권에 의한 동양정신의 중심을 일본에 두었으며, 한국을 패권전쟁의 후방으로 삼아 철저한 식민화 정책을 추진한다.
따라서 한국 미술계는 해방을 맞이하지만 미처 준비하지 못했고, 이에 따른 이데올로기적 혼란 속에서 민족미술을 건설하기 위한 단체들의 형성과 성격을 확인할 것이다.
1. 1930년대 대동아 공영권과 미술계
한국의 근대 미술은 1930년대를 거치면서 일본의 정치적인 동아시아에 대한 대동아 공영권의 구축과 식민 이데올로기의 강화라는 격동기 혼란 속에 진행되었다. 31년 5월, ‘신간회’21) 운동이 실패한 후 국내 민족운동은 그 방향을 잃어 일본의 철저한 탄압으로 조직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고, 사회주의 운동 세력은 지하운동으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
21) 우익세력의 일부가 자치론을 내놓게 되자 이에 반대하는 다른 일부의 우익세력과 좌익세력이 함께 연합하여 해외 독립운동전선에서의 유일당 운동과 발맞추어 조직되었다.
1927년 2월 민족적 협동전선으로서 창립된 신간회는 일본측의 끈질긴 탄압과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은 좌익측의 파괴활동에 의하여 해체되었다. : 강만길(1985),「한국민족운동사론」, 한길사, p.23.
이러한 신간회 해산은 식민 통치하에서 우리민족을 이끈 주도세력들이 자신들의 이념을 유보시키고 단체를 결성함으로서 민족이 처한 현실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던 운동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다.
당시 일본을 휩쓴 경제공황의 영향을 집중적으로 받은 한국 농촌은, 궤멸적인 타격을 받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사유 재산을 부정하는 지하조직 운동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우가끼까즈시게(宇垣一成 1868∼ 1956)가 1931년 6월 17일 조선총독으로 취임하여 황민화의 초석을 깔아 놓았고, 조선 지배정책의 질적 전환이 요구되면서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우가끼까즈시게에 의하면 금일의 농촌 참상은 자본주의 악영향에 의한 것이고, 이를 방지하여 농촌 본래의 사명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농촌진흥운동의 첫째 목적이라 하였다.22)
22) 박계리(1995), “일제시대 조선 향토색 논의와 회화 작품의 제 경향”, 석사학위 논문, 홍익대학교 대학원, p.27.
따라서 농촌 생활이 현실과는 다른 극단적인 모습으로 찬미되었다. 이는 농촌의 모순된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고,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무디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농본주의는 반도시주의 반서구주의를 내포하고
있고, “이것은 동양사상을 자신들 가치체계의 중심으로 세우고 여기에 서양의 물질문명을 흡수할 수 있었던 일본인 자신들이 이제 서구를 제패하러 나간다는 정책적인 이념이 깔려있다.”23)는 것이다.
23) 박계리, 상게서, p.28.
한편 문화 부문에서 한국은 대동아 공영권을 구성하는 하나의 개별 민족으로 그 특색을 살리는 방향이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이는 미술 부문에서 조선미전 심사위원들은 한결같이, 어떤 경우에도 조선미술에서 시대성, 현실성, 정치성을 배제한 조선 향토색을 표현할 것을 더욱 노골적으로 강조하기 시작했다.24)
24) 조선일보, “이번 미전의 수확은 조선색이 농후한 점” 1935년 5월16일.
사실 조선 향토색 논의는 김주경과 심영섭을 중심으로 ‘녹향회’25)가 조직된 1928년부터이다.
25) 1928년 12월 장석표, 김주경, 심영섭, 이창현, 박광진, 장익은 평화로운 세계인 고향의 초록 동산을 창조할 것을 선언함으로서 녹향회를 조직하여, 1931년 제2회 전시까지 열었다.
이전 1925년 8월에 결성된 카프는 1927년 방향을 전환하여 카프 내에 미술부가 조직되면서 조선 향토색과 프롤레타리아 미술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 향토색이란, 카프가 미술계를 강타하면서 제기된 미술의 선전․선동성에 반기를 들고 미술에서의 예술성 추구를 주장하면서 등장한 순수미술론의 한 움직임이었다”26)고 파악된다.
26) 박계리(1995), 전게서, p.21.
그러나 이러한 논쟁도 일본의 제국주의가 1931년과 1934년 2차에 걸쳐 카프에 대해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하여 그 세력을 일시에 약화시킴으로써 문화•예술계의 주도적인 담론에 공백이 생기게 되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의 순수성을 제창하는 이론이 수면 위로 등장하여 주도 담론화 하게 되었다.
이 결과 카프 내부에서는 볼세비즘화가 공고히 되며 예술활동의 의미는 정치투쟁, 경제투쟁과 꼭 같은 문화투쟁의 일환이 되었다. 그러므로 최악의 경우 작품이 없더라도 혹은 작품이 미적으로 충족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운동으로서는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자체에 대해 근본적 이해를 달리하였던 아나키스트들은 카프조직으로부터 탈퇴하였는데, 무산계급 의식을 고조하면서도 예술의 독자성을 주장하는 이들의 논지는 카프의 목적론적 문예론이 풍미하던 당시의 문예계에, 예술의 본질과 예술가가 갖추어야 할 태도를 성찰하는 기회를 갖도록 했다는 점에서 ‘정통예술론’으로 인식되게 되면서 순수주의문예 이론
의 논의 가능성을 열어 놓게 된다.27)
27) 기혜경(1998), “1920․30년대 한국 근대 미술과 문학의 교류상에 관한 연구”, 석사학위 논문, 홍익대학교 대학원, p.32.
한편 20년대 말에 등장한 순수예술론은 ‘녹향회(1928)’, ‘동미전(1930)’, ‘백만양화회(1930)’, ‘목시회(1937, 목일회의 후신)’ 등을 통하여 30년대 전 기간에 걸쳐 지속되며 다양한 글들에 의한 논쟁과 함께 모더니즘적인 경향을 노정하기도 했다.
이러한 미술계 상황에서 1930년 벽두부터 윤희순, 김종태, 이태준, 이준, 김주경 등이 전람회 평과 회고록을 신문에 기고하며,28) 30년대 비평의 활로를 더욱 넓혀갔다.
28) 윤희순, “협전을 보고” 매일신보 1930. 10.21∼ 26. : 이 준, “서화협전을 보고” 동아일보 1930. 10. 22∼30. : 김종태, “제10회 미전평” 매일신보 1931. 5. 26∼6. 4. : 김주경, “제10회 조선미전 평” 조선일보 1931. 5. 28∼6. 10.
또한 고유섭이 조선미술사 관련 논문을 발표하고 있었고, 김용준, 구본웅 그리고 김주경 등이 동양주의 또는 조선주의를 지향하는 논객으로 문제의식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갔다. 물론 이들의 담론은 정치성을 배제한 예술지상주의 이념과 사상 또는 서구 모더니즘을 바탕에 깔고 있다. 정치성을 배제한 조선학운동처럼 ‘동양주의’ ‘조선주의’ 미학사상은 1930년대 중엽 미술가로써 식민지 지식인 민족운동의 일반 한계이기도 했다. 미술 부문에서 이른바 식민지적 자본주의 사회에 대응하는, 반 관료주의와 어우러져 모더니즘 또는 순수주의를 지향하는 경향이다.
따라서 관념적 조선주의 및 비정치, 탈 이념의 관념주의를 바닥에 깔고 있는 순수주의는 냉소와 절망과 허무 같은 관념, 때로는 신비주의, 동양주의의 옷을 입고 민족성을 앞세우는 조선 향토색 따위의 겉모습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30년대 중․후반에 이르러 이태준에 의해 서양미술 폐기와 수묵채색화로의 전향을 촉구하는 이른바 ‘서양화에서 동양화에로 전향’과 ‘조선화의 부흥’ 운동론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지호, 김주경의 순수주의와 김용준, 이태준의 정신주의로 나누어 졌고, 앞의 것은 인상파, 뒤에 것은 표현파 양식을 넘어 수묵채색화 양식까지 넘보는 것으로 흘러갔다.
2. 1940년대 전시와 해방공간의 미술계
전시 파시즘체제를 향해 달려가는 1940년 전반기 시대에 미술가들은, 민족주의 이념과 미술론을 시대 상황과 연계된 보국미술의 구호와 ‘동양미술 부흥론’과 ‘조선미술특질론’으로 집중시켰다. 이것은 1930년대 조선 향토색의 연장이며, 일제의 간섭과 탄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담론으로 발전하였다.29)
윤희순은 전시체제 아래 개최된 ‘제19회 선전개평’30)에서 동양정신의 신미술을 주장하며 현실에 대처해 나갔으며, 이른바 전쟁 후방의 시대를 반영해야 한다는 ‘총후미술론’31)은 많은 작가들이 파시즘체제에 대처를 하는 하나의 방법론이었다.
30) 윤희순 “19회 선전 개평” 매일신보 1940. 6. 12∼ 14.
31) 윤희순, “미술의 시대색-제21회 조선미전평” 매일신보 1942. 6. 9∼14.
따라서 당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잠적되고 국내파는 물론 일본 유학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유미주의적 미술론은 자연스럽게 체제에 순응하며 구체화되었다.
한편 대동아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일제는 조선에서 전쟁을 미화하는 미
술론과 미술행사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많은 미술가가 매판적 활동에 적극성을 띤 친일파 미술인들로 변질되고, ‘황국신민’의 예술가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등 청산해야 될 친일 작가들이 보국미술에 혈안이 되었다.32)
32) 이러한 친일 작가에 대한 글은, 원동석(1985), “일제 미술 잔재의 청산을 위하여”, 「실천문학」, 여름호. : 최석태(1990), “일제하 미술가들의 변상도”, 「역사산책」, 12월호. : 이태호(1991),“친일미술인의 몇낱 작품사례”, 「가나아트」, 9월,10월호. pp.122∼129, : ── 간행위원회(1992),“이구열 선생 회갑기념논문집”,「한국근대미술논총」,학고재, pp.320∼360. : 김윤수외 8인(1983), “한국 미술의 일제 식민잔재를 청산하는 길”, 「계간미술」, 봄호. pp.100∼114. : 윤범모(1999), “항일미술과 친일미술”, 「한국근대미술사학」, 제7집, pp.210∼250. 참조
1941년 2월 ‘경성미술가협회’는 1백50명의 미술가가 참여하여 결성식을 갖고, 국가의 비상시국에 직면하여 직역봉공을 다할 것을 다짐하였다. 같은 해 ‘구신회’33)에는 채관보국을 결의하고 김기창, 심형구, 김경승 등이 일본인 화가들과 함께 참여하였고, ‘조선남화연맹’이 전시회를 개최하여 판매 수익금은 모두 육․해군에 헌납하였다.
33) 조선의 수묵채색화가 대부분과 윤희순을 비롯하여, 일본인들이 참가한 단체, : 매일신보 1942. 9. 30.
1943년 ‘조선미술가협회총연맹’은 예술가단체연락협의회를 조직하여 그 산하에 미술가 240명이 참여한 ‘조선미술가협회’을 조직하여 일본 정신을 체득하기 위하여 성지순례 황군 등을 위문하기 위하여 미술가를 파견하여, ‘반도총후미술전’을 개최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해군특별지원병제도의 실시에 따라 일본 해군 관련 시설을 시찰케한 결과물과 강연회와 전람회를 기획하였는데, 이 사업에 김사량, 이무영과 함께 미술인으로는 윤희순이 선발34)되었다.
34) 매일신보, “해군 견학 반도 문인 화가 입경” “무적 일본 해군의 위용을 보고 그 훈련상황을 작품을 통해 반도에 전파” 1943년 9월 8일. : 매일신보, “김사량은 귀국 뒤 ‘해군행’이란 글을 발표, 윤희순은 삽화제작” 1943년 10월10일∼10월17일
이러한 활동으로 윤희순에 대해서 친일적 행각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에 앞으로 정리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또한 대표적인 친일 단체인 ‘단광회’는 조선징병제 실시를 기념한 공동작품 ‘조선징병제 시행’을 제작하여 헌납35)했다.
35) 매일신보, “김인승, 야마다 시니치를 비롯해 19명이 참가해 100호 크기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1943년 6월 15일.
한편 현실을 직시하여 표출해내려는 사실주의 작품도 제작되었지만, 시국과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철거를 당하기도 했다.36)
36) 최열(1998), 전개서, p.520.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해방을 맞이한 조선은, 해방을 이룩하게 한 강대국의 몫으로 미국과 소련의 점령지로 분할되었다. 조선은 강대국의 이데올로기의 잣대로 분열되며, 자주독립과 통일 국가 건설이라는 과제 담론이 혼란스런 상태에 빠졌다. 민족미술 건설이라는 대 명제에 대해서도 어떠한 합의조차 이루어지지 못하는가 하면, 정치적 입장을 무리하게 관철시키려는 욕구, 현실성 없는 이상주의적 구호의 남발뿐이었다. 이 와중에서 “반사이익을 취한 것은 이 시기 깊숙이 잠복해 있던 조선미전 계통의 아카데미 미술이며, 그 후에 등장한 보수성 강한 관제미술이었을 뿐이다.”37)
37) 서성록(1995), 「한국의 현대미술」, 문예출판사, pp.62∼63.
이러한 가운데 해방 3일 만에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발족되고, 그 산하의 ‘조선미술건설본부’(이하 ‘미건’으로 약칭함) 주최로 덕수궁 석조전에서 ‘해방기념미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중앙협의회 중심인물의 대부분은 그 후 정치적 좌익성을 드러내다가 월북한 문학인이었다는 사실이다.38)
38) 의장과 서기장에 임화와 김남천, 중앙의원의 박태원, 이기영, 이태준. : 이구열(1985), “혼란속의 미술계 재편성”, 「계간미술」, 여름호, p.45, : 한편 적극적인 친일 작가들인 김은호, 이상범, 김기창, 심형구, 김인승, 김경승, 윤효중, 배운성, 송정훈, 윤희순 등을 제외하였다. : 최 열(1991),「한국 현대미술 운동사」, 돌베개, p.91.
윤희순은 미건에서 제외되었지만, 미건의 활동과 미술전에 관련된 글 및 본인이 활동했던 단체의 글을 발표했다.39)
39) 윤희순(1946), “미술”「조선해방연보」, 문우인서관. : 최열(1991), 상게서, pp.91∼97. 참조
해방공간에서 일제시대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미술건설에 방향을 잡고 나타나는 단체들은, 다시 민족미술에 대한 미학적 혼란과 새로운 미군정 통치 하에서 기득권을 차지하려는 과도기에 휩싸였다.
미건을 비판하고 서화협회의 전통을 계승한다며 결성된 ‘조선미술가협회’40)(이하 ‘미협’이라 칭함)는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였으나, 12월 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 실시 결정을 발표하여 미협을 들끓게 하였
다.41)
40) ‘미건’의 주도적인 중심을 고희동, 임용련 등 미군정과 이승만의 비상국민회의 등 우익 정치세력과 손잡은 미술가에게 넘겨주고 초기 주도세력들이 오히려 이끌려 가는 결과를 빚었다. 1945년 11월 초순에 결성. : 최 열(1991), 상게서, p.97.
41) 정치적 개입은 명백히 강령에 위배되는 계기로, 김주경, 이인성, 박영선, 오지호 등 4명이 탈퇴하였고, 이어서 2월 1일에는 고희동이 회장 자격으로 이승만 주도하의 비상국민회의에 참가하는데 이에 대해서, 윤희순, 정현웅, 길진섭, 이쾌대, 정종녀 등이 미협을 탈퇴하게 된다. : 최열(1991), 상게서, p105.
미협은 회장단이 간판만을 계속 지키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다가, 미군정청의 지원으로 정부수립 후 오늘날 미협의 모태가 되었다.
한편 미협을 탈퇴한 미술인은 김주경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하는 ‘조선미술가동맹’과 1946년 2월 28일 윤희순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조형예술동맹’42)을 결성한다.
42) 최열은, 이 단체는 미협에서 탈퇴한 또 다른 ‘조선미술가동맹’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조선조형예술동맹’은 사회정치의식 수준을 보여주는 강령을 채택하고 활동을 하지만, 부르주아 문예단체 확대 개편을 위한 창립준비위원으로 위원장을 비롯하여 주도세력이 참가하는 조직적 구속력이 허약함을 지적했다. : 최 열(1991), 상게서, p.114.
이후 두 단체는 조각가협회와 ‘민주주의민족문화’의 건설이라는 슬로건으로 ‘조선미술동맹’을 결성하여 윤희순을 위원장(사후:길진섭)으로 추대하였다.
윤희순은 이러한 숨가뿐 미술계 재편성 속에서 일제 잔재 청산과 민족 미술 건설이라는 과제를 남기고 지병이었던 결핵이 악화되어 동대문 밖의 안암동에 있는 영도사 근처에서 요양하던 중 1947년 5월 25일에 생애를 마쳤다.
한편, 미술동맹은 광범위한 대중적 조직사업을 수행했으며, 대중의 삶과 호흡을 같이 나누는 조형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국내 친미반공세력을 육성, 지배구조를 완성해 나갔다. 미술동맹의 사실주의 미학과 사상에 동의할 수 없었던 예술지상주의자들은 새롭게 조성되는 정세에 따라 사실주의 미학사상에 대한 격렬한 비난과 혐오, 반대를 광범위하게 전개하면서 미술동맹은 위축되고 와해되었다.
해방공간에서 한반도는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하여 민족의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 방향을 설정함에 있어서 좌익과 우익의 첨예한 대립을 가져와 결과적으로 세계 최초의 이념적 양대 진영의 각축장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정치․사회적 갈등 현상은 문화계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많은 작가가 좌․우익으로 양분되어 여려 단체가 결성되었지만, 이 단체들은 “상대적 대결 구도가 아니라 철저한 사회주의 작가와 이외의 작가군의 대결”43)이라 할 수 있다.
43) 한국미술사99프로젝트(2000), 김재원, “한국의 사회주의적 미술 현상에서의 사실성”, 「한국미술과 사실성」, 눈빛, p.155.
이러한 혼란은 미군의 좌익 인사 검거라는 극단적인 개입으로 좌익 작가는 지하세력화 되거나 월북44), 혹은 전향이나 위장 전향으로 이어졌다.
44) 이 당시에 월북한 작가와 참고 그림은, 길진섭, 김만형, 김용준, 김주경, 배운성, 정현웅, 임군홍, 이석호, 이쾌대, 최대덕, : 국립현대 (1997), 「근대를 보는 눈」, 삶과 꿈, pp.242∼259. 참조.
결국 이념적 투쟁과 세력 다툼은 미군정의 비호로 우익의 승리로 일단락 되었지만, 민족미술 건설을 위해 반드시 청산되어야 할 친일세력이나 일제 잔재의 청산의 기회는 무산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해방공간에 있었던 좌파미술은 배제되었고 정치성이 탈각되며 1949년에 창설된 ‘국전’은 이른바 ‘순수미술’로 단일화된 미술계의 구조가 고착화되고 재생산되는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
Ⅳ. 1930년대 윤희순 미술 비평론의 성격
본 장은 논문 주제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1930년대 윤희순이 본격적인 미술비평을 시작하여 드러낸 미학적 담론과 위상을 확인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1930년대 초 윤희순의 사회주의 미술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점
검하고, 미술비평론의 특징과 성격을 구분할 것이다. 따라서 본 장에서는 1930년대 일제 식민지 정책에서 나타난 굴절된 미술론과 작가들이 안이한 태도에 일침을 가하는 윤희순의 날카로운 리얼리즘적 미술론 성격을 순수미술론을 내세우는 김용준 등의 글들과 비교하며 규명하겠다.
1930년대는 1920년대의 담론적 논쟁의 연장으로 더욱 풍부한 미술론이 형성되었으며, 일제 식민지 정책에 상반되는 미술론과 프로미술운동 단체에 대한 탄압은 노골화되었다. 따라서 윤희순의 사회주의적 현실주의 미술 비평론은, 당시 일본 유학파들 중심인 순수예술지상주의 미술론과의 대척점에서 나타난 특징과 위상을 확인할 것이다.
1. 미술 비평론의 형성 배경
1930년대의 한국 근대미술론은 항일운동에 대한 일제 폭압적 정책의 노골화와 아시아 패권을 위한 일제 파시즘의 강화에 따른 정세 변화 속에서, 1920년대를 이은 다양한 담론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당시 상황 하에서 미술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체제 순응’이냐 아니면 ‘체제 저항’이냐 라는 생존적 선택을 해야하는 형편이었다. 이것은 미술비평에서 양극적 담론으로 나타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그 하나는 한국의 시대적 현실을 주제로 하는 1920년대 프로미술론을 이어받은 사실주의적 그림이며, 다른 하나는 한국적 그림이라는 고정된 틀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살아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표현형식을 찾지 않으면 안되고 서구의 최첨단 미술사조를 무조건 배격해서는 안 된다는 순수미술론이다. 즉 1920년대 후반 프로미술논쟁의 연장선에서 심미주의적 보수 민족주의 미술론과 사실주의적 진보 민족주의 미술론으로 양분되면서 윤희순은 1920년대 김복진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론을 이어 민족주의적 리얼리즘론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러한 윤희순의 민족주의적 리얼리즘 미술론의 형성 배경은, 주교보통학교 시절 만나게 된 동료교사인 김종태를 알게되고, 그의 소개로 이승만, 김복진, 안석주, 김중현, 이창현 등과의 어울림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프로미술 조직활동의 핵심 세력들이며, 윤희순은 이들과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서양화 제작과 비평의 안목을 키웠다.45)
45) 자세한 윤희순의 생애에 대해서는 : 최정주(1999), 전게서, pp.13∼21. : 변세연(1998), 전게서, pp.12∼17. 참조.
또한 민족적 현실에 대한 사실주의적 시각은 윤희순 가족사에서 나타난 부친이 폐인적인 삶과, 어려웠던 가정형편에서도 영향이 되었을 것이다.
김종태와 이승만은 당시 조선미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기성화가들이었다. 윤희순이 이들과의 자연스런 만남은 이론가가 아닌 화가로서 미술계에 첫발을 내딛게 만든 계기가 된 것이다. 1927년 제6회 조선미전에 ‘램프와 꽃’을 출품하여 입선을 차지했고, 1929년 제8회 조선미전에서 ‘꽃’(도판 3), ‘소녀’(도판 4)로 입선을 차지했다. 1930년 제9회에서는 ‘황의소녀’(도판 5)가 특선을 차지하고 동시에 ‘목단’이 입선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 후 1931년 제10회에서는 ‘꽃’(도판 6), ‘모란’(도판 7)등이 입선을 차지하였지만, 그 후로 조선미전에는 출품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조선미전 집행부에 대한 불만과 독학에 의해 그려진 서양화는 꽃과 인물 등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게 되어 주로 비평적 이론에 치중했다고 여겨진다.
그 후 김복진이 사회주의 조직운동으로 투옥된 사이, 부재기간을 채웠던 윤희순의 현실주의 미술론은 추상미술과 상징주의를 통해 서구 모더니즘과 동양 전통미술의 만남을 꾀한 심영섭, 김용준, 구본웅 등 초기 모더니스트의 서구취향의 부르주아적 퇴폐미술과 당시 한국 전통 귀족의 완상물인 문인 취향에 물들어 있던 한국미술계를, 김복진의 미술론을 이어받아 통틀어 비판하는 담론으로 발전되어 갔다.
한편, 모더니즘 운동은 서구 모더니즘 미술교육의 세례를 받은 동경유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것이기는 하지만, 서구 상징주의나 표현주의 등 근대미술을 전격적으로 수용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서구와의 대립을 강하게 의식한 대동아주의를 뒷받침하는 동양주의사상을 기저로 한다는 점에서 윤희순의 현실주의 미술론과 상대적 담론으로 유지되게 된다.
당시 윤희순은 전람회 초창기에 근대 미술사조의 경향과 한국미술에 준 영향에 대해
“당시 대전 후 불란서 신흥미술이 파리에서 동양으로 파급되어 그 여파가 현해탄을 건너왔다. 자연주의의 정립적(定立的)인 범주를 접하기 않고 갑자기 뛰어든 후기인상파 이후의 잡다한 --미래파, 다다이즘, 표현파, 입체파, 구성파, 초현실파 등---실로 야수적인 반입적 미완성품을 범주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근대미술은 왜곡된 형태를 최초의 사조로 맞이해야 했다. 해서는, 반드시 세잔느 이전의 서양미술의 근원적인 특질을 이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느닷없이 세잔느 이후의 것을 최초의 서양미술로서 맞이해야 했다.”46)
46) 윤희순(1943), “ 의 모색성”, 「국민문학」, 7월호. : 윤희순(1994), “한국미술사연구”,「동문선」, p.243. 재 수록
윤희순은 세잔 이후의 신경향이 출현하면서 동시에 초창기 자연주의, 사실주의 아카데미 같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심경을 토로했던 것이다.
1930년에 와서 나타난 윤희순의 “협전을 보고”라는 글과, 이태준이 ‘매일신보’에서 “조선화단의 회고와 전망”으로 신춘문예에 당선한 사실은 미술비평의 활성화라는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일이다. “윤희순과 김용준은 본격적인 미술비평 활동을 통해 조선미술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는데, 당시 우리 미술사를 정리하던 고유섭의 영향으로 윤희순의 ‘조선미술사연구’와 같은 입장에서 한국적인 미의식을 요구하는 미술비평의 시각을 만나게 된다.”47)
47) 조은정 외(2001), 전게서, p.22.
1930년대 초반 윤희순은 현실적 시대적 상황에 대한 시의성 있는 평문 등을 연이어 발표, 사적 유물론의 견지에서 조선 민족미술의 계승과 혁신, 미술의 생활화 등을 주장하였다.
‘프로예맹’의 미술조직 활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좌파 지식인의 한 명으로서, 이같은 미술론은 러시아의 혁명적 민족주의자들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당대 식민지 지식인의 견해와 흐름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현실 지향적 예술의식을 수용한 윤희순은 스스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시원인 플레아노프의 사회주의 미술관을 학습하여 신문 비평에 인용48)하기도 하였다.
48) 윤희순, “제11회의 제 현상” 매일신보 1932. 6. 1∼8. : 최정주(1999), 상게서, p.28. 참조
그러나 윤희순 자신은 사회주의 사상에 공감하면서도 미술운동 조직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독자적인 민족주의 미술론을 세워나갔다.
2. 계급적 현실주의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고 파시즘이 강화되면서 전람회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미술가는, 서양화 유입과 전통 조선화단의 미학적 혼란으로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상태였다. 식민지 파시즘의 강화에 따른 조선민족의 현실에 대하여 안이하게 대처하는 미술가들은, 관념적 유희로서 서화(書畵)를 취급하고, 서구 중심적 미학사상의 유입으로 현실 참여적 자세가 무엇인지를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1930년대 초 윤희순은 식민지 시대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미전에 출품하는 작가에 대하여 계급적 현실주의에 맞출 것을 주장하며, 각종 전람회에 나타난 작가들의 안일한 태도에 대해 자주적 민족해방과는 거리가 먼 현실 도피적 퇴행이라며 관념적이며 나태한 작가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부자집 대사랑에서 술잔이나 얻어 마시면서 노리개 노릇 하는 퇴기적 시대 역행자가 얼마나 많은가? 대체 수 십만원을 드려 일본 혹은 불란서에 갖다 온 분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래도 입으로는 조선과 예술을 비관○○하면서 ○○같이 동방의 기백을 영민하고 있다. 편협한 예술가적 자존심과 유전적 사대 심리로 작가끼리 부질없이 멸시, 악평을 하면서 저널리즘에게 추태와 아첨을 받치고 있다. 그림은 가뭄에 콩 나기로 그것도 구실과 의무로 말류의 사이비 미술가가 얼마나 많은가?” 49)
49) 윤희순, “1931년 미술계를 회고하면서” 매일신보 1932. 1. 1∼1. 8. ○○는 원문을 읽을
수 없음.
봉건적 사대심리에 빠져 시대적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고 매너리즘에 빠진 미술가에 대한 책임과 충고로서 외국에서 유학한 유미주의적 화가에게, 현실주의적 활동 자세를 촉구했다. 또한 미술가의 자질과 자세에 대해서 “미술가들은 자질과 열정과 수양이 있어야 한다며, 자질은 선천적이나 열정은 반 선천적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또한 “수양은 태반 작가 자신의 의식에 있으므로 자질만 믿고 사대심리에 빠진 미술가들에게 부단히 노력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현 조선 자칭 미술가 중에는 삼 요소 중에 하나도 갖지 못한 분자가 많다”고 하여 “선조의 유산으로 유학 생활을 하고 다소 미술에 대한 상식으로 대중 앞에 활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50)며 안일한 미술가에게 민족적 고통을 함께 할 것을 주장했다.
50) 윤희순, 상게서.
또한 민간단체인 서화협회에 출품한 작품들에 대해서, 당화첩(唐畵帖)을 그대로 모방하는 동양화가와, 매너리즘에 빠진 서양화가가 언제까지든지 대중의 기대를 받을 것이라고 과신하면 안될 것이라고 꾸짖었다.
그는 관념적으로 미술을 등한시하는 과거 미학의 오류를 청산해야 한다고 하여 “관념적 미학이 인생의 현실에서 부이(浮離)하여 가공적 미를 만들어 놓고 인간고의 피난처를 그 속에서 구하는 폐단에 기인한 것이다. 추와 미를 적극적으로 극복 발전하지 않고 가식적 미화로 만족하였다.”51) 하여 과거 관념주의적 미학을 청산할 것을 주장하였다.
51) 윤희순(1932) “조선미술가의 당면과제”, 신동아, 6월 : ──(1994), 「조선미술사 연구」, 동문선, p.225.
한편, 김용준도 서화협회에 참가하는 작가들에 대해 “조선의 화가는 사산분리하고 있다. 나라가 망할수록 예술은 흥한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혹자는 명예에 취하여 더 훌륭한 큰 기관으로 달아나고, 세력 다툼과 질투로 탈출하고, 권태에 자멸하고, 마작에, 유탕(遊蕩)에, 이러한 등등 현상은 패잔한 사회의 필연한 침체”52)라고 하였다.
52) 김용준(1931), “제11회 서화협전의 인상”, 「삼천리」, 11월. : 김용준(2002), 「근원 김용준전집5」, 열화당, p251. 재 수록.
윤희순의 미술비평관은 시대적 혁명기에서 현실을 도피한 유미주의적 미술과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특권 계급의 유희물 처럼 여겨졌던 미술은, 이제 민족의 처한 특수한 정조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의 미술이 봉건시대 전후를 통하여 귀족 승려 부호의 특권계급을 위한 존재였고, 도 그들의 수하에서 발달한 것과 같이…(중략)…자연계를 상징적 기운에 도취하여 인생을 도피하였으니, 그들에게는 정치도 경제도 민족도 문화도 아무러한 생활도 관계가 없었고, 또 눈을 가리고 눈을 돌리어 관심하려고도 하니 하였다. 따라서 그의 결과는 스스로 명백하였으니 특권계급의 정치 경제적 여유가 있는 그늘 밑에서만 미술의 발달이 가능하였고, 그의 작품태도는 노비적임을 면치 못하였으며 작품 내용은 천편일률의 비현실적
복사에 불과하였다.”53)
53) 윤희순(1932),(1994), 전게서, p.220.
이처럼 “과거의 미술은 화공의 천역(賤役)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문인유사의 기생충적 유희에 불과하였다”고 전제하여 대중들과 괴리된 현상을 꼬집었다. 따라서 현 조선미술가는 특권계급 지배하의 노비적 미술행동과 중간계급의 도피적이고 퇴영적인 미술행동을 청산 배격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계급성을 바탕으로 하여 두어 대중이 절실히 느끼는 현실적 생활을 대상으로 한 민중 계급적 현실주의 미술론이다.
또한 미술과 생활이 별개가 아님을 주장하는 최근배도 “미술은 유한계급의 독점물이나 또는 특수한 사람의 소유물 혹은 골동 취미적 향락이라고 아는 이가 있으니 이것은 대단한 오해다.”54)라 하여 미술은 생활을 전재로 하여 발전하니, 민중에게 미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54) 최근배(1939), “미술계의 제문제”, 「조광」, 1월호, : (1974),「공간」, 6월호, p.61. 재 수록
따라서, 윤희순은 이러한 현실주의 시각으로 현 조선미술의 상황에 대해, 계급적 현실주의 미술론에 입각하여 서화협회에 출품한 동양화의 사군자와 서예에 대한 비평의 글로 조선화단에 필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서화협회의 상징성과 민중 중심의 민족미술에 대한 단체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회원들의 관념적 전통 서화관에 대해서 민중 본위의 현실주의적 성향의 작품을 촉구하였다.
윤희순은 서화협회전에 출품된 서(書)와 사군자가 회화와 함께 진열되었다고 하여 진정한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대성에 뒤떨어진 ‘서화(書畵)’에 대한 비평은 민족의 사변적인 성향을 접고 민중의 실생활과 예술
의 일치를 주장하는 글이다. 이러한 서화협회의 작품은 회원들 조직이 봉건적 사랑의 연장이라고 하여, “관념적 사군자, 서(書), 산수화 등을 표현하지 말고, 농민, 노동자를 화전민을, 방황하는 백인을, 그리고 지사를, 민
족의 생활을 묘사․표현․고백․암시하여야 할 것이다.”55)라고 하였다.
55) 윤희순(1932), “조선미술계의 당면문제”, 「신동아」, 6월, : 윤희순(1994), “조선미술사연구”, 「동문선」, p.224. 재 수록.
따라서 동양화는 관념적으로 표현함으로 실생활과 관련이 없는 여기나 취미로 보고 있다. 이것은 계급적 현실에 소외된 민중 대중의 모습을 표현해야 하며, 일폭의 풍경화라도 그 속에 현실성과 에너지의 발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민족적 현실과 거리가 먼 고답적인 서화협회의 안이한 회원 작품에 대한 대안적 자극을 주기 위함이었다.
윤희순은 협전에 출품된 동양화에 대해서 현실에도 없는 기암괴석을 늘어놓고 혹은 고대화첩을 그대로 모사하는 관념적 회화세계라고 하며, “예술은 고상한 취미로서 문인 사대부의 소견(消遣)이나 오락감상의 대상은 될 수 있으나, 문인 사대부가 예술가가 되는 것은 타락이나 사도(邪道)로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금기서화(琴棋書畵)를 한가한 때의 심심소적으로 장난삼아 하는 점잖은 놀음으로 생각하여 유한계급의 잉여 정력을 소모하는 일종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56)
56) 윤희순(1946), “동양의 서화여기사상” 「조선미술사연구」, 서울신문사. : 윤희순(1994), 「동문선」에서 재 발행. p.162.
동양화는 사대부의 유희물에 불과하다며 여기를 누릴 수 있는 유한계급만이 독점할 수 있고, 민중 계급적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다.
한편 프로미술론과의 논쟁에 참여했던 김용준은 ‘동미전’을 통하여 “이미 동양정신으로 돌아온 서구의 예술을 연구하여 향토적 정서를 노래하고 그 율조를 찾는 예술을 연구해야 한다”57)고 주장하여 윤희순의 현실주의 미술론과 상반되는 향토성론을 제시했다.
57) 김용준, “동미전을 개최하면서” 동아일보 1930. 4. 12∼13.
김용준은 사회주의 사상이 민족문화 운동으로 연결시켜, 동양의 전통 심미관이 마르크스주의를 대체하는 중심에 서게 되었다고 주장하며, 1920년 후반부터 시작된 논쟁에 불을 지폈다.
이에 대해 안석주는 동미전의 활동 대해서, 일본을 통한 서양미술에 젖어있는 예술지상주의 미술이라고 비판을 가했다.
“여기서 우리들의 예술이 대다수의 민중을 떠나서는 안 될 것도 알게 된다.
우리들 대다수 민중이란 투쟁하고 있다. 여기서 예술이 생화의 반영이라고 말하는 그 예술이 우리들에게서 유리되어야 할 것인가?”58)
58) 안석주, “동미전과 합평회” 조선일보 1930. 4. 23∼26. : 최 열(1998), 「한국근대미술의 역사」, 열화당, p.257.
이는 미술이 정치, 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전개되어야 한다고 하며, 예술지상주의 미술은 일본화단에서 유행하는 왜곡된 서양화의 영향을 받아 그것을 그대로 모방한 작품에 지나지 않고 시들어버린 아카데미즘에 빠져서 새로운 기운은 커녕 무기력해 보이기까지 한다고, 하면서 “대다수 민중이 투쟁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상아탑 속에 자신을 감추려 하는 예술지상주의자의 잠꼬대 소리를 반박하는 바”59)라고 하면서 부르주아 미술계의 향토색 표현에서 조선의 현실성이 결여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59) 안석주, 상게서
이어서 김용준은 ‘백만양화회’을 조직하여 “유물주의 사상과 프로 예술을 재차 부정하고 정신주의로 회귀할 것과 국경을 초월한 예술을 이상으로 주장하여 동양미학을 중심 사상으로 하는 순수주의 미술론”60)의 입장을 천명했다.
60) 김용준, “백만양화회를 만들고” 동아일보 1930. 12. 23.
이에 대해서 프로예맹의 정하보가 신비적 순수주의 미술론에 대해 “예술이 사회 속에서 생긴 것임을 모르는 이들이고, 소부르주아 계급의 불안 속에서 인간의 본능, 성의 향락을 구하는 가운데 생겨난 타락예술가들”61)이라고 반박했다.
61) 정하보, “백만양화회의 조직과 선언을 보고” 조선일보 1930. 1
한편 윤희순은 이러한 프로미술론과 순수미술론의 이론적 대립 사이에서, 서양화 작가들의 내용이 없는 작품 제작에 대해 ‘형식주의적 미술의 붕괴’라고 비판하였다.
“대상은 작가 기분 표현을 위한 소재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라 하여 인간이든 정물이든 그것을 한 개의 색판이나 면으로 밖에 취급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미전 작가의 다수한 정물화에서는 세잔느의 질, 피카소의 양, 그것에 대한 연구적 태도도 볼 수 없으며 다만 정물을 위한 나열을 위한 나열의 구도, 그리고 속악한 실감(?) 재현 등에 급급함을 볼 수 있음에 불과하니 이것은 미술연구기관이 없고 근대 미술품에 접촉할 기회가 없는 중에, 부질없이 전람회 흥행화와 저널리즘의 영합 등으로 인한 미술가 남조(濫造)에서 기인한 폐해이니, 전람회를 위한 작품, 작품을 위한 작품, 따라서 조급한 신기 조숙한 운필, 화면의 공간을 메꾸기 위한 사물의 배열 등이 내용 없는 또는 하모니가 없는 무질서한 작품을 만들게 하였다.”62)
62) 윤희순, “제11회 의 제 현상” 매일신보 1932. 6. 1∼8.
이러한 원인은 서구미술의 입체파 이전의 자연파와 사실파를 접하지 못하였고, 입체파 이후의 여러 유파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한데 있다고 보고 있다. 또한 금년에 돌발된 우연한 현상도 아니며 또는 작품 그것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현상의 내부적 소인은 사회정세, 각자의 생활 사상 및 감각, 기구 내지 전람회의 사회적 관련 등에 있는 것이니, 정치, 경제적 환경과 문화형태는 유기적 관계 하에서 변천된다고 하였다.
윤희순은 제11회 조선미전 작품을 평하면서 형식주의 붕괴 작용으로 기괴한 색조의 장식화로 퇴락한 작품에 홍우백의 ‘정물화’와 형식주의 아카데미적 달필로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작품으로 이마동의 ‘남’(도판 8) 이라는 작품이 있다고 했다. 이러한 가운데 가장 주목할 현상은, 내용 없는 내용으로 인한 형식주의 파탄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김중현의 ‘바둑삼매’와 최우석의 ‘을지문덕’(도판 9) 등을 예로 들고 있다.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추상적인 소재로 형식주의에 빠져, 고뇌가 없는 작가적 태도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따라서 작가는 현실적 상황에 따른 능동적 주제 설정이 우선이며 시대적 조류에 역행하는 관념적 미학에서 벗어나 테마에 대한 활동적인 접근과 노력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자신이 어떠한 사회적 존재이고 그것을 비판하여 극복하는 것은 물론, 퇴락하여 무관심 하는 자세는 비속한 것”63)이기 때문에, 장래에 있어서 사회 및 작가는 이에 대한 철저한 실천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63) 윤희순, 상게서.
또한 “관념미학 형태의 타락에서 벗어난 자유 발랄한 에네르기를 발산한 계급적 현실주의에 유일한 작품이 있더라도 그것은 입선 거부를 면치 못할 것이다.”64) 라 하여 식민지 정책적 차원에서의 운영과, 그에 안주하는 작가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했다.
64) 윤희순, 상게서.
이러한 탓에 조선미전은 민중에게 약동을 주지 않고 침체를 주려하고, 발전과 앙양을 주지 않고 퇴폐(頹廢)와 안분과 도피를 주려 하면서 스스로 퇴락 사멸의 길을 밟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는 서양화 유파에 대한 연구가 없이 일본을 통해 들어온 유미주의적 일본 아류에 속한다는 주장이다.
한편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내세우는 김종태는 “미술가의 생활의식”65)이라는 글에서, 조선 사회가 미술가를 기생이나 신선 따위로 여겨 푸대접하는 데는 미술가 자신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했다.
65) 김종태, “미술가의 생활의식-생활의 리얼리티” 조선일보 1935. 7. 8∼10. : 최열(1998), 전게서, p.344. 재 인용.
그 이유는 미술가 자신이 사회 현실에 대한 의식이 적고 미술 생활에 실감이 결핍한 탓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상과 생활의 일치와 생활과 예술이 정비례하기 때문에, 미술의 목적은 모든 문화와 마찬가지로 생활의 향상에 있다고 하면서 미술가야말로 시대에 민감하여 이 시대, 이 사회의 현실에 적응할 생활을 해야 하고 작품은 그 작자의 사상, 생활의 실재가 낳은 것임을 주장했다.66)
66) 김종태, 상게서.
이는 관념주의 미학의 퇴락과 예술과 생활의 일치를 주장하는 윤희순의 계급적 현실주의 미술론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윤희순은 조선미술가들의 안일과 침체에서 벗어나 진보적 민족미술을 요구하면서,
“근세 5백년의 미술공황시대와 최근 50년 간의 정치 경제적 파멸로 인한 민족문화의 미증유한 대 수난을 당하여 이제 배후의 폐허와 목전에 처녀지를 가로놓고 있으니, 조선민족 미술가는 정열과 별지(瞥智)로써 창작하여야 하며, 조선민족 문화운동자의 전 시선을 미술계로 집중하여야 할 시기에 박도하였다.”67)
67) 윤희순(1932) “조선미술계의 당면과제”, 「신동아」, 6월호. : ──(1994) “조선미술사 연구”, 「동문선」, p.219.
봉건적 미술사조와 일제의 침략에 의해 수난을 당한 조선미술계의 작가들은 문화운동의 선구자로 민중의 현실에 약진감을 줄 수 있는 현실주의를 주장하는 글이다.
이렇게 윤희순은 현실 참여적 미술론을 내세워 당시 미술계를 날카롭게 비판했지만, 이에 대한 어떠한 반론을 제시한 글들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이것은 윤희순이 냉철한 시각에서 한국미술계의 상황을 바로 짚어내는 통찰력 때문이라 여겨진다.
3. 표현적 사실주의
표현적 사실주의에 대한 내용은 앞 부분에 제시했던 계급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리얼리즘과 상통한다. 그것은 현실적 시각을 통한 작가적 표현 기법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사실적 표현기법에 대한 작품 평에서 나타난 주장을 정리하였다.
윤희순의 사실주의 미술론은 기법의 단련 이후 정신이 발현된다는 것이다. 그의 계급적 사실주의 미술론에 대한 견해는 ‘현대미술의 동향’68)이란 글에서 나타나는데 여기서 그는 상대적 계급관계의 화가들을 소개하면서
“근대미술의 출발이 지옷토(Giotto di Bondone)의 사실주의의 발견에서 시작하여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에 의해 과학적으로 기법을 수반하게 되었고, 이것이 자연주의 현실추구는 좌익미술가로 활동한 쿠르베(Courbet, Gustave)에 이르러 기법과 정신 모두에서 완성되었다”69)고 하였다.
68) 윤희순, “현대미술의 동향” 매일신보 1934. 1. 1∼18.
69) 윤희순, 상게서.
또한 대상 파악에 충실하지 않은 인상주의와 입체파, 미래파,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 첨단미술의 관념적 예술행위에 대해서 혼란을 야기하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고, 이러한 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은 현실을 인식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사실주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윤희순은 전람회장에 전시된 작품에 대해서, “해마다 전람회 개
최 대성황에 비해 새로운 감각으로 대중의 신경을 깨게 하는 쾌작, 사회의
저류를 대변하는 걸작, 혹은 클래식의 계몽적 작품, 새로운 사상 혹은 암시를 보여주는 수작을 발견하지 못하였다”70)고 통분했다.
70) 윤희순, 상게서.
조선미술가들이 시대착오적인 음풍농월(吟諷弄月)에 빠져, 대중과 호흡하는 작품을 찾아 볼 수 없음을 한탄했다. 작가는 희생을 통하여 데카당적 향락기분을 불살라 버리고 대중들과 함께 하기를 주장했다.
따라서 윤희순의 주장에 의하면, 미술은 생활과 대중들과의 현실적 반영을 나타내는 것이다. 예술은 현실적 주제를 다루되 실제의 생활감각을 반영하여 사실감이 나도록 창작하고, 이것을 다시 생활로 환원하는 것이며 현실이 요구하는 예술 구현은 한 시대의 예술원리를 형성하는 시대성으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는 시대성을 포함한 작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사실주의적 작품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주의적 작품 제작에 대한 방법으로, 윤희순은 외국 미술을 약진적 방법으로 비판 흡수하여, 조선의 현실적 상황에 맞는 표현 기법을 정착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먼저 “일본이 신흥 유럽미술을 수입하여 현 일본화의 형식이 성립되어 있으므로 그 표현기법을 직수입하지 말고, 일본화의 채색기교를 과학적으로 수입하여 소화하자”는 것이다. 또한 “현재 첨단미술가들은 르네상스 고전파 작품을 모사 혹은 연구하여 그 속에서 독특한 신경지를 터득 개척하였으니, 복제를 통하여서라도 고전파에서 약진적으로 흡수 소화 창작에 돌진하여야 할 것이다.”71)라고 주장하였다.
71) 윤희순, 상게서
특히, 윤희순은 조선의 관념적 미학을 타파하고 민족이 요구하는 현실적 미술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미술인 소비에트 신흥미술의 내용을 흡수할 것을 주장했다.
“소비에트 신흥미술의 내용을 수입하여 다시 민족적 특수 정조로 빚어낼 것이다. 신흥미술의 미는 실증적 미학을 기초로 하였으니, 그의 내용에 있어서 조선민족의 요구하는 미를 구비하고 있다. 즉 비현실에서 현실로, 감미에서 소박으로, 도피에서 진취로, 굴종에서 항거로, 회색에서 명색으로, 몽롱에서 정확으로, 파멸에서 건설로, 감상에서 의분으로, 승리로! 에너지의 발전으로! 맥진하는 미술인 까닭이다.”72)
72) 윤희순,(1994), 「조선미술사연구」, 동문선, p.256.
이는 당시 조선의 민족의 현실적 여건을 무시하고, 관념적인 미학에서 일탈하지 못하는 기존 미술계의 내용적 타락성을 일갈하는 것이다.
또한 윤희순은 민족적 특수상황을 고려한 외국미술 수입에 대해서 조선의 프로미술론이 민중본위의 현실 지향적 사실주의 예술의식을 수용하였고, 또한 “소비에트연방 노서아의 미술계는 기성미술의 작품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현실주의 아래서 새로운 미술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기성미술의 광란에 권태를 느낀 세계미술계는 신흥 러시아를 주목하고 있다.”73)라고 하여 러시아의 신흥 사실주의 미술의 수입을 주장했다.
73) 윤희순, “1931년 미술계를 회고하면서” 매일신보 1932. 1. 1∼8.
그리고 한국의 전통적 사실주의를 표현한 작품의 예로 “근세 조선미술이 초상화의 사실주의적 기법과, 동양화의 서양화적 사실에 성공한 김홍도와 조선민족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신윤복의 사실주의적 기교․미술의 생활화 및 조선화의 형식 등은 조선 미술가들의 연구 계승해야 할 문제다.”74)
74) 윤희순(1994), 전게서, p221.
라고 하여 대중과 실생활에 연관된 전통적 사실주의 표현 기법을 연구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윤희순의 사실주의적 표현기법에 대한 주장은 협전에 출품된 작품비평에서 볼 수 있다. 박승무의〈시골 어떤 집〉은 “구도에 있어서 보다도 색채에 있어서 실패했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산수화가 묵을 주로 하고 약간의 담채를 칠하여 윤택한 맛을 내는 효과를 스스로 망각하여 버리고 인물의 의상과 닭 지붕 등에 극채색을 칠한 것이 큰 결함이며, 사의가 사실적 경향이 있다는 것만을 알겠다.”하여 생활을 토대로 하고 작품을 만들 때에는 표현양식과 실제와의 사이에 타협과 조화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하의 산사〉에 있어서도 “가옥 지붕의 묘법이 전폭의 필법과는 동떨어지게 거슬려 보이는 것이 즉 사실적 묘법과 개념화된 필법과의 모순이 아닌가 한다. 사실묘사가 산수화의 개념적 필치와 조화될 때에 비로소 역작이 나온다.”라고 하여 관념적 산수화에서 벗어나 사실적으로 표현할 것을 요구했다. 동양화의 유일한 여류화가인 정찬영의 〈목단〉에 대해서는 “여유 있는 필의와 함께 풍부한 장래성을 말하며, 제작의 건실성은 충실한 사실력의 숙달을 따라 좋은 작품을 낸다는 것을 참고로 하여 동양화 중에 역작”이라고 평했다. 또한 김경원의 〈만추〉에 대해서는 “동양화의 표현양식에 있어서 양화와 같이 면을 따거나 강한 명함을 내어서 입체감을 낼 필요는 없겠으나, 농담․선으로 입체감을 내야 할 것은 회화가 평면의 입체화인 이상 잊지 못할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농담을 심각하게 하여 입체감”75)이 나도록 요구하고, 사실적 묘사인 만큼 실감 혹은 물질감이 표현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75) 윤희순, “협전을 보고” 매일신보 1930. 10. 21∼26.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양식에 있어서는 내용적 정서 보다 관찰묘사의 세밀한 감각이 예리하여야 한다고 사실적인 입체감 표현에 노력을 기대했다.
이외에도 이제창의 〈소녀〉평에서 객관성을 무시한 주관화 결정은 색채뿐만 아니라 형체에 있어서도 파탄을 면치 못하였다하여 동양화는 물론 서양화 작품 제작에 있어서 사실적 표현 기법의 부족함을 제시했다.
여기에서 윤희순의 주장은 조선 작가들이 매너리즘에 빠져 관념적인 자세로 현실을 무시한 사의(寫意)의 정신과 기법에 기대어 고답적인 기법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주의 기법에서 나타나는 과학적인 조형시각을 적용하여 현실과의 조화로운 기법을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표현 과정에 대해서는 조선의 현실이 반영된 주제와 그에 상응하는 소재를 선택한 다음 정확한 관찰력을 통해 화면상에 옮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부적인 단계는 먼저 투시원근법에 따라 화면의 구도와 소재간의 매치를 균형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첫 단계로 하여, 이러한 유기적인 조화를 통해 양감, 질감, 입체감, 색채감 등과 같은 기본적인 표현기법을 점진적으로 구사해야 한다고 하였다.
색에 있어서도 관념을 기준으로 하는 색채의 적용은 결과적으로 화면의 조화를 깨뜨리는 원인이 되므로 정확한 관찰을 전재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 보았다. 이러한 사실적인 표현이 동양화에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하는 방법이라고 여기고 채색법에 있어서 관념을 배제하고 체계적인 학습과 기술적인 단련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76)
76) 최정주(1999), 전게서, p.59.
1938년 ‘제17회 조선미전 평’77)에서 동양화의 색채가 갖는 품격 혹은 비속은 기술력이 결정한다고 하여 채색할 때에 기술력이 부족하면 남화나 채색화 중 본인이 의도하지 않은 분야로 귀착될 수 있고, 거장이라도 그러한 실수를 범할 수 있다고 하였다. 김은호의 〈향로(香爐)〉는 “구도라든지 치마의 아름다운 빛은 씨의 노련한 기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독특한 것으로서 아무나 추종키 어려우나 녹의(綠衣)의 빛깔은 이 그림의 가치를 손(損)했다. 그 원인이 관념에서 교착된 사실주의, 즉 색채의식에 있다.”78) 라고 하여 관념에 의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대상을 관찰하되 화면과의 조화 속에서 단색보다는 다양한 채도의 색채를 적용하여 입체적인 표현의 묘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고 비평하였다.
77) 윤희순, “제17회 조선미술전람회 평” 매일신보 1938. 6. 12∼13.
78) 윤희순, 상게서.
현실의 반영과 대상을 관찰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한 오주환의 〈이인여〉에 대해서
“장중 수작이라 하겠다. 간소한 배색으로 효과의 극치를 겨냥한 것이라든지 의문(依紋)의 참신한 배안(配案)이라든지, 두발의 수법(手法) 등 세련된 현대인의 감각을 보여준다. 광고도안 같다고 볼 수도 있으나, 그것은 선의 운동이 판에 박은 듯함에서 오는 느낌일 것이다. 씨의 의문을 그대로 실생활에 가져온다는 것은 별문제로 하고 의상 및 의문에 새로운 암시를 개척하였다고 보겠다. 서양화가 면을 기조로 하고 점차 양식화함과 연상하여 오씨의 〈이인여〉는 더욱 새로은 문제를 던져준다.”79)
79) 윤희순, “미전 인상” 매일신보 1936. 5. 21∼29.
서양화가 면을 기조로 하여 점차 양식화함을 연상하여 동양화를 조형적으로 해석한 점에서 시대에 맞는 서양화법과 절충한 사실적인 표현이라고 본 것이다.
또한 1940년 제19회 선전개평에서 식민지 시절의 어두운 모습을 사실주의적으로 표현한 정현웅의 〈대합실의 일우〉(도판 10)에 대해서 “서사적인 사상을 볼 수 있다. 흑과 황의 대비는 그 효과를 충분히 내지 못했으며, 이런 화인(畵因)일수록 회화적인 효과-여기서는 사실적 의미를 결코 소홀히 볼 수 없었음을 생각하게 한다.”80)고 하였으며, “파지(把持)만으로는 회화가 성립되지 않는다.
80) 윤희순, “제19회 선전 개평” 매일신보 1940. 6. 12 ∼14.
자연의 관찰과 실천적인 탐구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위대한 그리고 개별적인 작가든지 그의 기초는 사실에 두었고 그것이 튼튼할수록 출발은 힘차던 것이다.”81) 라 하여 진보적인 정신과 그 보다도 먼저 표현력의 충실은 양심적인 예술의 토대를 만들어 준다고 하였다.
81) 윤희순, “재동경미술협회전” 매일신보 1940. 9. 13.
이러한 윤희순의 사실주의 미술론의 근간에는, 당시 러시아의 사회주의 미술론이 한국에 파급되어 프로미술론의 기저를 이루어 조직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주의에 대한 진리는, 현실세계의 의미 있는 면을 충분히 꿰뚫어 보려는 능력에 의해 특징 지워 질 수 있다. 그것은 삶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 전형적인 상황 하에 있는 전형적인 인물들에 대한 충실한 묘사와 구체적인
표현을 전제로 한다. 리얼리즘 미술은 삶 자체에 대하여 미술적으로 유사하게 묘사하는 것이다.”82)
82) K.마르크스와 F.엥겔스(1975), 「서간 선집」, 모스크바, p.379. : Avner Zis지음, 연희원․김영자 옮김(1989), 「마르크스주의 미학강좌」,도서출판 녹진에서 재 인용
이러한 사실주의적 예술론은 당시 한국의 전형적인 식민지 상황에서, 지식인과 작가가 대중과의 교감을 통해서 식민지 통치 하에서 벗어나려는 조직운동의 바탕을 이룬다.
따라서 윤희순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목적은 사회주의 조직운동원과의 교감에서 얻은 민족해방이며, 한국 미술계의 방향은 신흥 러시아미술의 사실주의 기법을 수입하여 암울한 현실을 타개할 선구적 화가의 수양을
촉구하는 생활 미술론인 것이다.
4. 조선적 향토주의
한국 화단에서 향토색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였다. 일본에서는 향토 연구를 주도한 민속학의 주요 그룹 이름이 ‘향토회’인데, 이처럼 향토라는 단어는 일본에서도 폭넓게 사용된 단어였다. 향토는 문학과
예술에서도 도시화되고 산업화되어 가던 당대에 자연과 토지, 그리고 농민의 삶에서 그 뿌리를 찾으려는 의미를 가진 용어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83)
83) 김영나(2002), “한국근대미술과 시각문화-이인성의 향토색:민족주의와 식민주의”, 「조형교육」, p.315.
향토색에 대한 논의84)는 첫 서양화가 등장한 1910년대 이후로 서양미술의 새로움에 경도되어 있던 한국 화단에서, 1920년대 후반 서양미술 추종 일변도에 대한 반성의 분위기가 싹트면서 시작되었다.
84) 박계리(1995), 전게서 참조.
조선미전의 일본인 심사위원이 기대하는 이국적 정취에 대한 조선 미술가의 반응은 여러 가지로 나타났다. 조선미전에 참여하지 않거나, 동경으로 가서 추상미술 운동에 참여한 미술가가 있는 반면, 그룹전 활동을 하던 ‘녹향회’와 ‘동미회’ 회원을 중심으로 향토색론에 대한 글이 발표되면서 진정으로 향토색, 또는 조선적 회화가 무엇인지를 탐구한 화가도 나왔다.
김용준에 의하면 향토색은 “정치적으로 구분하는 민족주의적 입장을 설명하는 것도 아니요, 진실로 향토적 정서를 노래하고 그 율조를 찾는데 있을 것”85)이라고 하면서 프로미술론과의 차별성을 주장하였다.
85) 김용준, “동미전을 개최하면서” 동아일보 1930. 4. 12∼13.
그러나 김용준이 향토미라는 것을 관념적 차원에서만 국한하지 않고 현실적 차원에서 논의하고 또 적용하려 했음은 당연한 귀결이었지만, 향토미술의 현실적 구현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이러한 논의는 작품으로 구체화되지 못하고 단지 추상적 주장이었음은 다음의 글에서 엿볼 수 있다.
“물론 나부터라도 조선의 마음을 그리고 조선의 빛을 칠하고 싶다. 그러나 조선의 마음, 조선의 빛이 어떠한 것이지 그것을 가르쳐 줄 이 있는가. 조선 사람이 그들의 자화상을 못 그리는 비애란 진정으로 기막히는 것이다. 입으로만 그리고 손으로는 못 그리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86
86) 김용준(1931), “동미전과 녹향전평”,「혜성」, 제1권 3호, p.88. : 「근원 김용준 전집5집」(2002), “민족미술론”, 열화당, p.243. 재 수록.
따라서 김용준은 조선적 향토미술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림이란 어느 목적을 두고 그리는 것이 아니고 작가의 개인적 과제라고 보게 된다.
이에 대해서 같은 ‘동미회’ 회원인 홍득순은 ‘동미전’의 활동 기저에 대한 불만으로 “우리의 현실을 여실히 파악하여 가지고 우리의 자연과 환경을 표현하여 투쟁을 계속하는 단체활동을 주장”87)하였다.
87) 홍득순, “양춘을 꾸밀 제2회 동미전을 앞두고” 동아일보 1931. 3. 21∼22.
이에 김용준은 홍득순에게 미술가로서 자중하라고 한 것이다.88)
88) 김용준(1931), 상게서. : “무모한 일개인의 독단으로 전 회원의 명예에 관한 언구를 난용(亂用)한다는 것은 예술재판소에서 중대한 범죄인의 형을 받을 것이다.”라고 반박하면서 홍득순과 김용준의 견해 차이로 동미회에서 김용준이 탈퇴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김용준이 이러한 주장은 구미의 표현주의에 대한 옹호와, 그 표현주의 밑에 들어있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자조, 지식인 중 한 명으로 품었던 회의가 이상화된 예술의 예찬 또는 감상주의로 굴절되어 표명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김용준이 주장하는 향토미술에 대한 예술지상주의적 작품 성향들은 한국 화단에 빈번하게 등장하게 되는 데, 그것은 조선미전이라는 전람회에서 관변적 권위주의를 탐하는 작가들에게 일제의 정책적 보호 하에서 성장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 해방 후에도 제도화 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1930년대부터 조선미전에서 초가집이나 나물 캐는 처녀, 한복을 입고 일하는 시골 아낙네, 또는 담 모퉁이에서 노는 아이들과 같은 감상적인 작품을 대거 출품하는 현상으로 나타났는데, 이 작품들은 모두 ‘향토색’ 또는 ‘로칼 칼라’로 칭해졌다.
조선미전 서양화부 심사위원은 동경미술학교의 아카데믹한 교수급 화가를 주로 위촉하여 조선미술가가 민족적 현실이나 일제에 저항의식, 그 밖의 엄숙한 인간의 문제나 역사의식 또는 사회의식 등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하였다. 그들은 단순한 자연미의 재현으로서, 향토주의 풍경, 아니면 표현미 그 자체만을 추구한 인물화, 정물화에 그치도록 작용하였다.
따라서 당시 일본 미술학교에서 일본 양화 기법이나 예술적 관점 및 이론 등을 배우고 돌아와 조선미전에 출품하는 작가들은 결국 일본류의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내포하는 것이다.
이렇듯 조선 향토색의 표현은 일제의 변방적 지방색이라는 정책적 지지와, 조선인 미술가에 의한 민족성의 표현의지라는 모순된 개념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정책적인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에 미술계에서 양성화되어, 화단의 주류로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순수주의 미술 흐름 속에서 1930년대 화단을 주도하였다.
따라서 조선 미술의 ‘정체성’ 문제도 역시 순수미술론내에 국한되어, 당대 사회와 현실 부분을 비켜나 지나간 전통 문화유산이나 목가적 농촌 풍경을 통해 한국적 정조를 추구하는 방향을 취하게 된다. 이것은 미술의 비판적 기능을 무마시키고, 정서적이고 미적인 차원에서만 미술의 기능을 허용했던 지배층의 통치와 조정에 의한 결과였다.89)
89) 김현숙(1999), “조선향토색을 통한 정체성 모색”, 「가나아트」, 겨울호, p.124.
이러한 일제의 정책적 구조에서 나타나는 조선 향토색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윤희순은 심사위원이 관학파이며, 관념미학적 타락과 형식주의 붕괴작용 등 여러 가지 문제른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예술지상형식주의가 배태한 필연적 타락과정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전람회 기구의 정치적 카테고리와 작가의 무력 등이 진정한 능동적 예술을 구상할 여유도 없을 만치 가장 우열(愚劣)하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작가 및 심사원이
오인된 형식으로 상호 판이한 관점으로 편협한 관념으로 고집 고조 또는 무용의 고뇌를 거듭하는 미학이 있음을 용이하게 발견할 수 있으니, 그것은 소위 ‘로칼 칼라’ 즉 ‘향토색채’는 ‘향토정조’하는 것이다.”90)라 하여 일제 식민지 정책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조선미전의 구조적 문제점과, 그에 편승하여 관념적 안일주의 빠져든 타락한 조선미술가를 비판했다.
90) 윤희순, “제11회 조선미전의 제 현상” 매일신보 1932. 6. 1∼8.
또한 윤희순은 조선정조를 표현하는 주제에 대해서 조선의 자연과 인생에 관련된 사물을 그린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작가가 조선적 정조의 주제에 접근하여 표현하는 구체적인 가치를 알아야 할 것이라고 불만을 나타내었다.
따라서 윤희순은 조선의 자연은 인생과 아울러 가히 적막하고 퇴락 하였지만, “인왕산과 같이 철벽같은 바위들이 고통과 핍박에 엄연히 집요(執拗)하는 암괴, 무겁고 굳센 집적(集積)도 있다. 서양화가가 재미있게 묘사한 흐리멍텅한 담천, 혼탁한 공기보다도 한국에는 유명하게도 청랑한 대공(大空)있으며, 붉은 언덕의 태양을 집어 삼킬 듯한 적토(赤土)”91)를 그릴 것을 요구했다.
91) 윤희순, 상게서.
그리고 “약자의 예술은 항상 고뇌, 사멸, 쇠약을 미화하려고 한다고 하면서 타락된 민중이 현실적 현상을 감수할 수 없는 환경에 있을 때 저하된 생활 세계에 안분 만족하거나 혹은 감상과 비관에 잠겨 버린다면 결국 자멸의 구렁으로 떨어져 가고 말 것 아닌가?”92)라고 꼬집었다.
92) 윤희순, 상게서.
이러한 관점에 대해 조선 향토색에 대한 김종태의 글은, 윤희순이 추구하는 한국 자연에 대한 시각적 차이를 엿볼 수 있다. 김종태는 “회고주의도 좋으나 그것은 진보적이 아니고, 향토주의 그것은 스케일이 적다. 조선색을 낸다고 과거의 빨간 진흙산을 그려야 한다는 것은 인식 부족을 지나쳐서 일종의 넌센스이다. 신조선의 산림은 어느 정도에까지 녹색화하여 삼천리 강산에 그러한 골동산은 볼 수가 없었다.”93) 라고 하여 윤희순의 조선적 정조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리얼리즘적 접근이라 볼 수 있다.
93) 김종태, “미술가의 생활의식-생활의 리얼리티” 조선일보 1935. 5. 20.
따라서 윤희순의 조선정조는 조선의 시대적 상황에 맞는 풍경을 그릴 것을 주장하고, 이에 대한 주제 접근의 문제는 나약한 풍경 보다 굵직하고 힘찬 조선의 자연을 주제로 하여 저항적 정신을 담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윤희순은 조선미전에 출품된 조선 향토색을 표현한 작품을 평하면서,
“이들 풍경화의 화면에서 나오는 정서는 지극히 안일, 쇠락, 침체, 무 활동한 희망이 없는 절망에 가까운 회색, 몽롱, 도피, 퇴폐(頹廢) 혹은 영탄 등 퇴영과 굴복이 있을 뿐이니, 이것은 관념미학적 미학의 형태에서 출발한 오류의 로칼 칼라요 예술의 타락이다. 미는 켄버스의 색채를 거쳐서 인생의 신경계통에 조화적 율동과 고조된 생활을 감염 및 발전시키는 힘(力)이다. 그러므로 에네르기의 약동 내지 생활의 발전성이 없는 작품은 반비(反非) 미학적 사이비 미술이다.”94)
94) 윤희순, “제11회 조선미전의 제 현상” 매일신보 1932. 6. 1∼8.
관념미학적 정서에 의한 타락을 보여주는 작품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윤희순은 조선의 자연과 인생의 아무러한 약동적 미와 생명과 에네르기를 발휘, 앙양하지 못한 것은 작가의 정서 내지 미감, 즉 미학 형태의 오해 및 타락이 그 치명적 소인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윤희순이 주장하는 ‘향토색’은 애향토심의 표현이며, 향토 속에서 생활하며 향토와 함께 생장하는 중에서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그 예로 “영국의 터너, 프랑스의 밀레, 도시화가 유트릴로, 인상파 마네, 일본의 우다마로 등과 조선의 현동자 안견, 혜원 신윤복은 고대의 조선정조를 획득한 거장들이었다”95) 고 예를 들고 있다.
95) 윤희순(1932), 상게서.
그러나 미전심사의 구조적 문제를 탓하며 조선미전이 관념미학적 형태의 타락을 조선미술가 전체의 대변은 아니며, 미전 심사가 인상주의 자연주의 고루한 아카데미를 기준으로 한 만치 한 개의 카테고리 속에 영합되어 있음을 발견했다고 하였다. 따라서 윤희순의 조선정조에 대한 색채는 조선 향토 속에서 생장한 사실주의적 색채이며, 조선미전 심사위원들이 조장하
는 관념적 색채를 부정하고 있다.
한편 김종태도 사회주의 조직운동원들이 공통된 시각에서, 조선미전 작가의 조선 향토성 작품에 대해서,
“로컬은 외지의 예술가들이 조선에 와 으레 드러내는 지방색의 특징이며, 조선의 인상을 무책임하게 해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조선미전 작가들은 새삼스럽게 흥분하여 마치 조선에 관광이 나듯이 조선 속에서 소위 그러한 조선을 찾느라고 주책없이 허둥댄다.” 96)
96) 김종태, “조선미전 촌평” 조선일보 1935. 5. 26∼6. 2.
이에 대해 김용준은 김종태의 작품 〈여인상〉(도판 11)에 대하여 “조선사람의 일반적인 기호색이 원색에 가까운 홀란(惚爛)한 홍․녹․황․남 등 색이란 것을 알았고, 이러한 원시적인 색조가 조선인의 본래의 민족적인 색채로 알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색채상으로 조선인적인 리듬을 찾아내는 것이 곧 향토색의 최선을 다한 표현으로 알았던 모양이었다.”97) 라고 하여 김종태가 사용한 색채에 대해서, 원색인 오방색이 조선적 향토색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97) 김용준, “회화로 나타나는 향토색의 음미” 동아일보 1936. 5. 3∼5.
“미술에 이해 없는 일반 사람들이 흔히 외국의 인물이나 풍속을 그리는 이를 곧 외국화한 인간으로 취급하는 동시에, 조선의 인정풍속을 그린 작품만이 오직 조선심을 잘 포착한 작품이라고 오인하는 수가 얼마든지 있는 것은 심히 유감이거니와, 또한 민족의 색이 확호(確乎)한 것이 아니다.” “문화가 진보된 민족은 암색에 유(類)하는 복잡한 간색을 쓰고 문화 정도가 저열한 민족은 단순한 원시색을 쓰기를 좋아한다.”98)
98) 김용준, 상게
그렇다면 김용준은 회화의 어떤 특정 내용으로 어떤 민족의 성격을 나타낼 수 없고, 나라마다 다른 감각이 있기 때문에 그 독자성으로 조선미술이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예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조선의 예술은 애조에서 출발하고 이 애조가 조선 예술의 뿌리의 원천”으로 보는 견해에 대해 수긍을 할 수 없다면서, 고담하고 자연스러운 상태의 단아한 정취에서 향토색이 발현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은 민족적 감성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식민지 민족적 현실에 대한 외면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한 김복진의 향토색에 대한 생각은 김용준의 이론에 맞서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체로 향토색 조선 정조라 하는 것은 그렇게 표현될 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조선 특유의 정취는 하루 이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며 손쉽게 모방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조선의 환경에 그대로 물젓고 그 속에서 생장하지 않고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 사람만이 조선의 진실을 붙잡는다는 것도 아니다.”99)
99) 김복진, “미전을 보고 나서” 조선일보 1935. 5. 20∼21. : 윤범모, 최열(1995), 「김복진전집」, 청년사, p.100. 재 인용.
또한 향토성론에 대한 김복진의 주장은, 이는 총독부 전람회에서 ‘조선적’ ‘향토적’ ‘반도적’이라는 수수께끼를 가지고서 미술의 본질을 말살하는 모험을 되풀이 하고 있다고 하면서, “선전에 출진(出陳)한 수 많은 공예품에서 제저(題著)를 보는 것이니 이것은 지나가는 외방인사의 촉각에 부딪치는 ‘신기’ ‘괴기’에 그칠 따름이고 결코 ‘조선적’이나 ‘반도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100)라 하여 우수한 회화는 통틀어서 외방인사의 향토 산물적 내지 ‘수출품적’ 가치 이상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100) 김복진(1937), “정축 조선미술계 대관”, 「조광」, 12월. : 「공간」, 1974. 6월호, 재 수록, p.63
이러한 조선 향토색에 대한 다양한 논리 속에서 윤희순은 ‘제10회 조미전’을 평하면서 이인성의 〈세모가경〉(도판 12)에 대해서 향토색은 조선의 향토적 재료를 나열하고 그 재료의 고유의 색채를 표현하는 것이 향토색이 아님을 주장하며, “소위 향토색을 내려고 기도한 작품-사이비 향토애호가들의 작품에 비하여 군계(群鷄)확립의 광채를 내고 있으나, 풍속화적 제재-비시대적 재료를 나열하는 것이 결코 향토색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김중현의 〈춘양〉(도판 13)에 대해서는 “김중현 씨의 목표가 ‘향토색에 있음을 알겠으나, 그것은 의식적이면서도 극히 무고뇌 무반성한 계획에 지나지 않았다. 감각 내용에 있어서 향토미에 감흥이 있었다든지 향토애의 열정이 있었다든지 하는 심적 요동이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화면에 나열한 다수한 재료가 결국 설명도의 임무 그것도 극히 저열 비속함 밖에는 못하고만 것이다.”101)라고 평했다.
101) 윤희순, “제10회 조미전 평” 매일신보 1931. 5. 31∼6. 9.
이러한 견해는 관념주의적 소재주의에서 벗어나 현대적 제재를 택하여 주제의식을 분명히 드러낼 것과 한국적인 특징을 부각할 수 있는 표현기법을 모색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윤희순은 잠시 이론활동을 접어두었다가 1936년부터 조선미전 비평을 통해 활동을 시작했다.102)
102) 여기에서 윤희순의 이론활동을 중단한 동기에 대해서 최열은 ‘조선 미술계의 당면문제’를 발표한 이후에 총독부의 견제를 받았다고 하고, 매일신보에 입사한 년도에 대해서는 최정주(1999), 전게서, p.18. 참조
이후 윤희순은 1930년대 초에 보여주었던 현실적 리얼리즘 미술론은, 일제 정책적 강화에 따른 순수주의 미술의 확산 속에서 전통미술의 중요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프로미술운동 조직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던 김복진도 출소 후 사상적 전향과 함께 순수 미술인으로써 전통적 조각미의 특질의 계승과 내면성의 표출에 주안점을 둔 불상제작에 매진했다.103)
103) 박승구(1957), “김복진 선생을 회고하며”, 「조선미술」, 5월. : 윤범모, 최열 엮음(1995), 「김복진 전집」, 청년사, pp.275∼276.
이로써 일제의 폭압적인 정책으로 프로미술 운동이 점차 힘을 잃어감과 동시에 한국미술계는 예술지상주의 미학으로 자리 매김 하는 과도기적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는 윤희순의 1930년 초반의 사회주의적 비평관이 1930년대 후반에 와서는 인상적인 비평관으로 변모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윤희순은 제19회 선전 개평에서 손응선 씨의〈스키복〉(도판 14)에 대해서는 “너무 곱게 다스리려 하여 피상적인 묘사가 되었다. 악센트 표현”을 요구하였으며, 이대원 씨의 〈초하의 지(地)〉(도판 15)는 “도안 같기는 하나 여기에 정서의 약동만 있었다면 독특했을 것”104)이라고 인상 수준에 비평을 하였다.
104) 윤희순, “제19회 선전 개평” 매일신보 1940. 6. 12∼14.
그러나 윤희순 조차도 조선적 향토성에 대한 미학적 담론은 다소 추상적인 견해를 보였는데 이는 모든 문제는 작가의 마음과 양심에 맡기는 타의적 해결과제의 입장임을 주장한데서 볼 수 있다.
이러한 조선 향토색론은 이후 조선 특질론으로 그 모습을 바꾸어 동양주의 미술과 닿아 있다. 그리고 해방 이후, 1930년대의 향토색 주제는 평론가들에 의해 민족주의로, 또는 식민주의로 엇갈리게 해석되었다.
■ 윤희순 연보와 논고
1903. (광무 7년). 9월 9일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용정리 393번지 대한제국 군대 의 무관으로 재직 중인 아버지 윤방현(尹邦鉉)의 장남으로 태어남.
1916. 휘문고보에 입학. 화가 안석주(安碩株), 시인 홍사용(洪思容)과 동기.
1918. 결혼. 이 무렵부터 미술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지는 못하였음.
1920.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중퇴. 경성사범학교에 입학.
1923.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주교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를 시작함. 동료 교사이자 화우인 김종태(金鍾泰)와 더불어 화가 이승만(李承萬)의 집에 출 입하며 안석주, 김복진(金復鎭), 김중현(金重鉉) 등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미술가로 발돋움하기 시작함.
1927. 제6회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에 〈램프와 꽃 〉〈소년〉을 출 품하여 입선.
1929. 제8회 「조선미전」에 〈꽃〉〈소〉입선.
1930. 제9회 「조선미전」에 〈황의(黃衣)의 소녀〉특선. 이승만네 집에 별채를 얻어 살림을 시작. 교동보통학교로 자리를 옮김. “제10회 협전을 보고”를 「매일신보」 10. 21-28에 발표하면서 미술평론 활동을 시작.
1931. 제10회 「조선미전」에 〈모란〉〈휴식〉출품. 황실에서 〈모란〉을 사감.
제10회 “조선미전평”을「동아일보」5. 31-6. 9에 발표. “일본 미술계의 신경
향의 단편-초현실주의, 계급적 추세, 기타”,「조선일보」, 10. 27∼30.
1932.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매일신보」학예부 입사.
“1931년 미술계를 회고하면서”,「매일신보」, 1. 1 -1. 8. 조선미전에 출품거부. “아동의 도화를 어떻게 지도할까-교육자와 부형이 참고할 실제문제”, 「매일신보」,5. 27∼6. 3.
「신동아」 6월호에 문제의 “조선미술계의 당면문제”를 발표.
“제11회 조선 미전의 제 현상”,「매일신보」, 6. 1 -8.
1933. 첫 삽화에 관한 비평 “신문소설의 삽화에 대하여”,「매일신보」, 10. 12∼22.
“신문삽화 편견”,「동아일보」, 10
1934. 매일신보 학예「1934년 각계 전망」에 “현대미술의 동향”,「매일신보」1. 4∼14.
1935. “희 회산 김종태 형”,「매일신보」 8. 23∼27.
1936. “미전의 인상(美展印象)”「매일신보」5. 21 - 29에 발표하면서 중단했던 미 술평론 활동을 재개 함. 제15회 「협전」에 출품.
1937. 제16회 「조선미전」에 〈남아〉입선.
“조선미술원 낙성기념 소품전을 보고”「매일신보」, 4. 7
1938.「중견작가 양화전」2월 초대 출품. “제17회 조선미술전람회 평”「매일신보」, 6. 12∼13
1939.「매일신보」에「지향성의 파지, 박영선(朴泳善)개인전 평」을 발표한 이후 다수의 개인전 평을 발표.
“재동경미술협회 전람회를 보고”「매일신보」, 4. 24∼25.
1940. “동양 정신과 기법의 문제”,「동아일보」 5. 10
“19회 선전 개평”「매일신보」, 6. 12 - 14. “회사한상”,「문장」 6월
“재동경미술협회전-청년미술의 사명” 「매일신보」, 9. 13.
“전초병-서화협전에 제의”「매일신보」, 10. 7
“회화의 현대성, 길진섭 개인전을 보고”「매일신보」, 12. 6 - 7
1941. “서도 전각의 미-수모인 정해창씨 개인전을 보고” 「매일신보」, 3. 8.
“청전 화숙전을 보고”,「매일신보」, 3. 19∼21.
“사군자의 예술적 한계” 「매일신보」 3. 30.
“20주년 기념 조선미술전람회 평” 「매일신보」, 6. 19 - 21.
“이묵전 인상기” 「매일신보」, 7. 4.
“박성규 파스텔전 - 자연을 말하는 회화”「매일신보」, 7. 26.
“경라의 정서”, 「조광」8월.
“탄월 개전을 보고-화조화의 진로를 암시”「매일신보」, 10. 4.
“미술시평-후소회전 평”「매일신보」, 11. 14.
“동양화가 신작전을 보고”「매일신보」, 11. 21 - 22.
1942. 「서양화가 수묵화전」에 초대 출품.
“미술의 시대색-제21회 조선미전 평”,「매일신보」, 6. 9 -14.
“화단의 윤리-재동경미술협회전을 보고서”,「매일신보」, 10. 6.
“금년의 미술계”, 「춘추」, 12월
1943. 이 시기에 조광사(朝光社)로 옮김
“미술시평”,「국민문학」, 2월. “신미술가 협회전”,「국민문학」. 6
“동양정신과 기법의 문제- 제22회 조선미전평” 「매일신보」, 6. 7- 8
“조선미전의 모색성”,「국민문학」, 7월. “조선미전과 화단”,「신시대」, 8월.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주최로 일본 도쿄 해군성과 항공학교 시찰단 파견에 참가. 매본효일(梅本孝一)로 창씨개명
“심예일여-김중현 개인전을 보고”「매일신보」, 10. 2.
“후소회전 평” 「매일신보」, 10. 27.
“자아류의 위험-김만형 유화전을 보고” 「매일신보」, 10. 30.
“금년의 화단”,「춘추」, 12월
1944. “예술의 정제성-이쾌대 개전을 보고”「매일신보」, 4. 28.
“지향성의 파지-박영선 개인전”「매일신보」5. 3.
“미술-유채화 10인 전” 「매일신보」, 6. 6.
“배운성 개인전”,「매일신보」, 6. 7. “선전평-동양화부” 「매일신보」, 6. 23.
“조선의 회화”,「조선화보」, 7월.
1945. 해방 직후 조선미술건설본부 창설에 참가. 11월 매일신문사를 접수한 뒤 서울신문사를 창설하고 여기 자치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
“동양의 화심”, 「국민문학」, 3월.
1946. 2월 조선조형예술동맹 위원장, 조선미술동맹 위원장으로 선출됨. 조선미술 동맹 미술평론 부 위원장직을 맡음. 서울신문사 출판국장.
“조형예술의 역사성”, 「조형예술」, 2월.
‘조선 민족문화 건설의 노선“, 「신문학」, 3월.
11월 “조선미술사 연구”, 「서울신문사」출간. 이 해에 “청구화인고(靑丘畵 人攷)”, “고구려 벽화에 대한 소감(小感)”등 미술사 관련 논문 다수 발표.
1947. 5월 25일 오전 6시, 폐결핵으로 숨을 거둠.(46세) 동대문 밖 영도사(現 개운사)에서 영결식 거행. 당시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중앙위원인 문인 홍효민(洪曉民)이 추도사를 발표.
제2회 춘기 「조선미술동맹전」(동화화랑)에 박진명(朴振明)과 함께 유작전 개최.
1948 김용준 “미적 사색의 지표-윤희순의 조선미술사 연구”를 「서울신문」에 발표. 유고 “조선미술사의 방법”이 「개벽」지에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