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안[서안(西安)]에서 5일(1-1)
(2024년 4월 24일∼28일)
瓦也 정유순
1-1. 누관대[樓觀臺, 루관대(楼观台)]
새벽 3시. 다른 날 같으면 곤한 꿈속에서 헤맬 시간이지만 중국 시안으로 가는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 눈이 떠진다.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에서 예정시간 보다 약40여분 늦게 출발한 비행기는 3시간 반을 날아 중국 시안공항에 착륙한다. 공항 밖에는 붉은 바탕에 하얀 글씨로 쓴‘千年古都 常來長安(천년고도 상래장안 “천년고도 장안은 늘 찾아오는 곳”)’이란 현수막이 시안에 도착했음을 알려준다.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장안[長安(창안)]은 중국의 고도(古都)로 현재 섬서성[陝西省(산시성)]의 성도(省都) 서안시[西安市(시안시)]에 해당한다. 한(漢) 왕조의 시기에 장안으로 명명되었는데, 이후 전한(前漢), 북주(北周), 수(隋) 왕조의 수도였다. 당(唐) 왕조의 시대에 장안은 대제국의 수도로서, 세계 최대 규모의 도시로 발전했으며, 서도(西都), 대흥(大興), 중경(中京), 경조(京兆) 등으로 불린 적도 있었다.
<서안공항 밖 '천년고도 상래장안'>
당대(唐代)의 일본의 헤이조쿄(平城京)와 헤이안쿄(平安城)가 장안을 모방해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송(宋) 왕조 이후 정치·경제의 중심이 동쪽의 개봉으로 옮겨가면서 장안은 더 이상 수도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수도를 가리키는 말인 ‘장안’은 오래된 도읍인 이곳 장안에서 유래되었고, ‘장안의 화제가 되다’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서안공항>
입국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빠져나와 시내에서 점심을 한 후 누관대로 향한다. 버스에서 내려 누관대로 향하는데, 입구에는 ‘김가기전’비석이 눈길을 끈다. 타향에 가면 고향 까마귀도 반갑다고 했는데, 이곳에서 신라(新羅) 사람 김가기(金可紀)라는 사람의 비(碑)를 만나니 마냥 반갑다. 김가기(?∼859)는 당으로 건너와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김가기 선인 기념비>
그러나 그는 성품이 침착하고 도를 좋아하여 종남산(終南山) 자오곡(子午谷)에 은거하여 도를 닦았다. 그는 하늘로 올라가기 1년 전에 당시 황제인 선종(宣宗)에게 “신은 옥황상제(玉皇上帝)의 조서를 받자와 영문대(英文臺) 시랑(侍郞)이 되어 내년(859년) 2월 25일 하늘로 올라가야 하옵니다.”라고 상주(上奏)하였다. 그리고 그 날짜가 되자 종남산 금선봉(金仙峰)에서 우화등선(羽化登仙)했는데 이때 조정 신료와 많은 사람이 이를 봤다고 한다.
<김관기 선인 기념비>
김가기비를 지나면 곤산율사의발비(崑山律師衣鉢婢)가 나온다. 의발(衣鉢)은 불교 수행자의 의복과 식기, 일상 최소한의 도구 등 소지품이라는 뜻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허용하는 정법, 또는 깨달음을 나타내는 물증이다. 인도 불교의 계율에서 승가이의(僧伽梨衣, 보통 옷), 울다라승(鬱多羅僧, 상의), 안타의(安陀衣, 속옷)라는 3종류의 가사와 하나의 발다라(鉢多羅), 즉 발우(鉢盂)를 소지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중국의 선종에서는 오조의 법을 잇는 신수(神秀)와 혜능(慧能)이 그 의발을 다투었다고 한다.
<곤산율사의발비(崑山律師衣鉢婢)>
누관대(樓觀臺, 楼观台)는 도교의 시조인 노자(老子)가 도를 닦고 연단하던 곳으로서 중국 최초의 도관이다. 처음 명칭은 초루관(草樓觀)이었으나 주나라 목왕(穆王)이 누관궁(樓觀宮)으로 개명한 뒤 당나라 고조(高祖) 때 종성궁(宗聖宮)으로, 현종(玄宗) 때 종선관(宗聖觀)으로 바뀌었다. 오랜 세월 동안 훼손과 복구공사가 반복되었으며, 1949년 이후 중국 정부에서도 여러 차례 복구하고 전국중점도가궁관(全國重點道家宮官)으로 지정하였다.
<누관대 표지석>
김가기비를 지나 10여분 정도 걸어 들어가면 ‘누관대’표지석과 ‘玄圃(현포)’편액이 걸린 문을 통과한다. 현포(玄圃)란 ‘곤륜산의 서왕모(西王母) 신선이 기거하는 곳’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노자(老子)가 ‘도(道)와 덕(德)을 전파하던 이곳을 신선의 땅’으로 표현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누관대 안에는 측백나무 등 오래된 고목(古木)들이 숲을 이룬다.
<현포(玄圃)문>
현포문을 지나 10여 분 걸어 들어가면 그 옛날 우물로 사용했던 상선지라는 우물이 나온다. 우물 안 벽에는 태극(太極)과 팔괘(八卦)가 새겨져 있다. 上善池(상선지)는 <도덕경>에 나오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上善若水(상선약수)’에서 따온 것 같다. 상선지는 산문 앞에 있는 우물로 바닥의 돌에 새긴 용머리에서 맑은 물을 뿜어낸다.
<상선지 비각>
<상선지>
바로 옆에는 설경대가 있다. 설경대(說經臺)는 노자가 도를 전파하던 곳으로 윤희(尹喜)에게 <도덕경(道德經)>을 전한 노자사(老子祠)가 있다. 직사각형의 대전은 남향이며, 아름다운 그림을 조각한 대들보와 기둥, 처마 서까래 끝에 부연을 달아 네 귀가 높이 들리게 한 비첨교각(飛檐翹角)이 매우 아름답다. 전면에는 명나라 때인 1460년에 주조된 쇠종과 1583년에 주조된 철제향로가 있다.
<설경대>
<노자사(老子祠)>
노자는 춘추시대 말기 초나라 고현(苦縣, 지금의 하남성 녹음현[허난성 루이현(鹿邑縣)] 출신이다. 이름은 이이(李耳)이고 자는 담(聃)이며 호는 백양(伯陽)이다. 노자가 태어난 시기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현재 중국에서는 BC 571년에 태어나 BC 471년에 죽은 것으로 보지만 신빙성은 없고, 심지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고 한다. 노자는 동주(東周)의 도서관을 관장하는 책임자를 지냈는데, 주나라가 쇠퇴하자 이를 한탄하며 서쪽 산관(또는 함곡관)을 나가 은퇴했다고 전해진다.
<노자>
노자사 외벽에는 ‘동천복지(洞天福地)’라는 글이 보인다. 동천복지는 ‘신선이 사는 불로불사의 낙원’을 의미하는 도교의 용어 같다. 도교에서는 수련 결과에 따라 하늘에 올라가는 상자(上者)가 천선(天仙)이 되고, 중자(中者)는 동천복지의 지선(地仙)이 되며, 하자(下者)는 혼백이 육체로부터 분리되어 시선(尸仙)이 된다고 한다.
<노자사 외벽의 '동천복지'>
누관대 권역 안에는 사성전(四聖殿)과 약성전(藥聖殿)이 있다. 사성전에는 공봉도덕천존(供奉道德天尊)인 노자(老子)의 4대 제자인 장자(莊子)·열자(列子)·문자(文子)·경상자(庚桑子)가 모셔져 있다. 그래서 이곳을 일명 사자당(四子堂)이라고도 한다. 이는 도교(道敎)를 숭상하는 당 현종이 741년(개원29) 도교사원 현원황제묘(玄元皇帝廟)를 세워 숭현학(崇玄學)을 두고, 노자ㆍ장자(莊子)ㆍ열자(列子)ㆍ문자(文子)의 도교 4서를 가르쳤다.
<노자사 앞의 향로>
이듬해인 742년(천보원년) 이들 저자와 경상자(庚桑子)에게 각각 도덕진인(道德眞人)ㆍ남화진인(南華眞人)ㆍ통현진인(通玄眞人)ㆍ충허진인(沖虛眞人)ㆍ동령진인(洞靈眞人)의 호를 추증하고, 각각의 저서 이름을 도덕진경(道德眞經)ㆍ남화진경(南華眞經)ㆍ통현진경(通玄眞經)ㆍ충허진경(沖虛眞經)ㆍ동령진경(洞靈眞經)이라 명명하면서 비롯됐다.
<사성전>
약성전(藥聖殿)에는 동한(東漢)시대 의사 화타(華陀), 동한 말의 의성(醫聖) 장중경(張仲景), 전국(戰國)시대 의학자 편작(扁鵲), 동진(東晋)시대 의약학자 갈홍(葛洪)을 모셨다. 화타는 천하제일의 신의로 본명은 부(旉)이며, 조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아 죽임을 당했다. 장중경은 난세에 의술로 어려운 사람들을 묵묵히 도우면서, 스스로의 이름이나 이익은 앞세우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편작은 죽은 사람도 능히 살린다는 명의였다. 갈홍은 오랫동안 연단술에 종사하면서 양생(養生) 및 불로(不老)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약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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