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러운 가족
나의 가난에 대한 삶을 쭉 되짚어 보았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영화 ‘웰컴 투 동막골’ 에 나오는 곳과 비슷한, 전쟁이 일어나도 모를 정도로 깊은 산골짜기의 작은 마을이다. 실제로 6.25 전쟁 때 피난민들이 터를 잡아 만들어진 마을이라는 얘기도 있다.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대부분 농사를 지었고 마을 자체가 가족 단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랫집은 작은아빠네, 윗집은 이종사촌네, 등등. 하는 일이 비슷하니 경제적 상황도 비슷했고 가족이 많다보니 집에 행사가 있거나 할 때 마다 서로 돕고 나누며 살았던 것 같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60명 남짓이었다. 같이 졸업한 졸업생이 나 포함해서 9명. 친구들의 집안 사정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일단 비교군이 적었고 시골이라는 장소의 특성상 크게 부를 과시할 만한 곳(?)도 없어서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 생활 동안은 용돈을 벌기 위해 늘 각종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힘들다기 보단 오히려 성인이 되어 내가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뿌듯했다. 첫 직장을 얻었을 때 보증금이 없어서 1평 남짓한 고시원에서 월세를 내며 1년을 지냈는데 작지만 내 공간을 내가 번 돈으로 유지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경제적으로 크게 결핍이 없었다는 생각이드니 이번 주제는 내가 쓸 만한 소재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62페이지에 나오는 ‘정상가족’ 프레임 이라는 부분을 읽기 전까지는 말이다. 경제적인 가난과 결핍은 적었지만 다른 부분에서 결핍을 확인받았던 적이 있다. 정서적 결핍이라고 표현 해야할까? 아빠의 부재에 관한 이야기다.
중학교 2학년 때 아빠가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나는 나를 ‘비정상 가족’ 이라는 프레임에 넣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tv에 나오는 드라마를 보고 그랬는지, 책을 보고 그랬는지, 그 시대에 떠돌던 말들을 주워듣고 그랬는지, 내가 스스로 만든 편견에 그랬는지 말이다. 어쨋튼 나는 아빠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는 언제나 위축되고 조마조마한 마음을 안고 살았다. 에피소드를 하나하나 길게 풀어 낼 수는 없어 짧게 기록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 중학교때 학원에 등록할 때 가족 이름을 쓰는 칸에 아빠 이름을 적지 않고 엉엉 운 일.
둘. 22살에 만났던 애인이 자신의 부모님은 가정환경을 중요시 한다고 했던 말에 상처 받고 위축되었던 일.
(그 후로도 다른 애인을 사귈 때 마다 신경쓰임.)
셋. 23살에 친구와 타투를 하고 나서 나눴던 대화.
구름돌: 우리가 아빠가 있었으면 타투를 안했을까?
너구리: 아니, 그래도 했을걸. 하하.
구름돌: 그치? 하하.
넷. 가족에 대한 소개를 해야 할 때면 심장이 뛰고 피하고 싶었던 일.
다섯. 구김살 없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일부러 활발하고 밝은 척을 했던 일. 아빠가 있건 없건 나는 본래 타고난 성향이 낯가림 심하고 예민한 성격이라 골똘히 생각에 잠기거나 상황을 적응할 때 표정이 뚱해지는데 그걸 아빠가 없어서 그런거라고 오해할까봐. (ㅎㅎ 쓰다가 웃었다.)
일단 글을 쓰며 생각나는 일화는 이 정도이다. 남들에게 어떤 지적을 받거나 크게 불편했던 점이 있는건 아니었는데 스스로가 만든 편견이 컸던 것 같다. 나는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나는 아빠가 죽었던 그 당시에 내 감정과 그 상황을 제대로 해결 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내가 생각했던 아빠의 죽음은, 얘기하면 불편하고 슬퍼지는 것, 그러니 하지 말아야 할 것, 남은 존재가 살아가기 위해 세상에 없는 존재는 잊어야 편한 것 이었다. 분명 세상에 없는 존재인데 그 존재가 남긴 관계들과 추억들로 인해 나의 존재가 확인되기도 한다는 것을 살아가며 많은 순간 느끼게 되었고 더 이상 회피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게 해준, 나에게 울림을 준 몇가지 일화가 있다.
하나. 영화 '노팅힐'의 브라우니 게임.
친한 친구들 5~6명이 모여 저녁식사를 하고 디저트를 먹다 마지막 브라우니 한조각을 두고 누가 먹을 것인가 대결을 벌인다. 대결 종목은 '누가 더 불행한가' 이다. 한명씩 돌아가며 자신의 불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이혼했고 직업도 별로고 못생겼다, 나는 다리가 불구가 되었고 임신도 어렵다, 나는 머리숱도 없고 나쁜 남자한테만 끌린다, 10년동안 다이어트로 굶주리며 살았고 남자에게 구타도 당한다, 등등. 서로의 불행을 터놓는다. 그 장면이 왠지모르게 통쾌하고 멋있게 느껴졌다. 숨기거나 잊어야 하는 거라 생각했던 불행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 그로인해 주위가 숙연해지긴 했지만 어줍잖게 위로하진 않는 사람들. 그때 어렴풋이 생각했다. 나도 내 불행을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고 싶다고. 평온한 표정으로 남의 얘길 하듯 나를 말하고 싶다고.
둘. 그림책 ‘오소리의 이별 선물’
한창 그림책에 빠져 읽던 때에 만난 책이다. 이 책의 줄거리는 늙은 오소리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 진 것을 알고 차근차근 죽음을 준비해가는 과정과 그 후의 이야기다. 죽음을 소재로 한 그림책을 몇권 읽었는데 그 책들은 전부 죽는 당사자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 였다면 이 책은 조금 달랐다. 오소리가 죽은 후 오소리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모여 오소리에 대해 이야기 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소리가 알려줬던 종이를 접는 방법, 스케이트를 타는 방법 등 생전에 오소리와 관련된 추억을 이야기 하며 사람들은 오소리를 애도하고 그들의 슬픔을 서로 나눈다. 이 책을 읽고 그 당시에 못했던 애도와 서로(가족)에 대한 위로를 나눠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셋. 그룹 god가 해체하며 남긴 7집에 담긴 팬송(fan song), ‘하늘 속으로’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지금까지 god의 오랜 팬이다. 학창시절에는 god가 없는 건 내 삶의 절반 정도가 없어지는 것과 같았다. god는 7집을 끝으로 해체를 했었다. 그때 남긴 ‘하늘 속으로’ 라는 곡의 가사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볼 수 없다 해도 사라지지 않죠. 우리 맘 속에 여기 이렇게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잖아요.’
나는 당시엔 이 가사가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저 해체를 했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세월이 지난 지금 이 가사를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이게 되었다. 그치, 마음 속에 영원히 살아 있지.
넷. 아빠 이름
모 포털사이트에서 연재하던 웹툰이 우연한 계기로 책으로 출간하게 되었고 그 책의 뒤에 작가의 말을 쓰게 되었다. 고민할 것 없이 엄마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책을 본 작은 고모가 왜 아빠 이름은 넣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때문에 아빠 이름을 어딘가에 쓸 일이 생길거라고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 질문이 내 마음에 걸려 한동안 계속 생각이 났었다.
여기까지가 나의 변화를 만들어 줄 일화였다. 20대 초반부터 30대 초반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다.
변화의 첫걸음으로 나는 결혼식 청첩장에 아빠 이름을 새겼다. 청첩장을 맞추며 혼주란에 고인을 어떻게 표기하는지 알아보았는데 최근에 돌아가신거면 한자 ‘故’를 이름 앞에 붙여 표기하고 오래되셨다면 혼주란을 아예 비워두기도 한다고 했다. 아빠가 돌아가신지 20년이 넘었지만 나는 이름을 꼭 넣고 싶었다. 이 세상엔 없지만 그렇다고 나에게 아빠가 없었던 것은 아니므로.
가끔 명절에 친척들이 모여 아빠 얘기를 하면 어색하고 불편한 마음이었는데 이제는 나도 대화에 참여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모르던 시절의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말썽을 부렸고 무엇을 좋아했는지, 나의 아빠가 아닌 고모의 오빠, 삼촌의 형, 할머니의 첫째 아들, 엄마의 남편으로서 어떤 사람이었는지말이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이제야 조금씩 익혀가려고 한다. 어릴적 스스로에게 씌운 ‘비정상 가족’이라는 프레임을 다시 스스로 벗어나고 싶다. 적어도 내 자신에게만은 비정상 가족도 정상 가족도 아닌, 그냥 자연스러운 가족이고 싶은 마음이다.
(이 책을 읽으며 ‘정상, 비정상 가족’ 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다. 그 단어를 활용해보았는데 쓰면서도 좀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