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어떻게 다른가
강성원(한국외국어대 강사)
김부식(1075-1151)이 활동했던 12세기 전반기는 고려사회의 내부갈등이 심화되어 간 시기였다. 농민이 유망하고 지배층이 분열하는 가운데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과 같은 정치적 격동이 이어졌다. 또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우면서 종전과는 다른 국제관계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그는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구 후 무인정변이 일어나 무인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동안 사회모순이 더욱 격화되고 농민, 천민의 항쟁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이어 몽고족의 침략에 대항하여 오랫동안 항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이 무렵에 일연(1206-1289)이 <삼국유사>를 찬술하였다.
김부식과 일연, 두 사람의 성장배경이나 직업, 종교 등이 다르듯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서술체제와 내용, 역사관이 서로 다르다. 두 책은 신라를 중심으로 삼국에 관한 일들을 기록하였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차이가 난다. 그렇지만 두 책은 서로 보완적이며, 어느 것이나 우리 고대사를 공부하는데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유교적 합리주의 역사관
김부식의 본관은 경주이며, 21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 때부터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시작하여, 다섯 형제 가운데 승려가 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과거에 합격하였다. 김부식은 유교의 예법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을 정치의 목표로 삼았으며, 뛰어난 문학소양과 유학지식을 바탕으로 출세하였다.
그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인종이 즉위한 다음 이자겸이 정권을 장악하자 그에 붙은 사람들은 이자겸이 임금의 외조이고 장인이라고 하여 신하의 예로 대하지 말 것을 건의하였다. 또 임금에게 올리는 글에 이자겸은 신이라고 쓰지 말고, 신하들이 모인 연회석상에서도 백관들과 함께 설 것이 아니라 임금과 함께 앉게 하자고 하였다. 그 때 대 부분의 신하들은 이자겸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그 의견에 따랐으나, 김부식은 중국에서도 이 같은 예를 찾을 수 없다고 하면서 반대하였다. 또한 이자겸의 생일을 인수절이라고 부르자고 하였을 때, 김부식은 당나라 현종 때부터 황제의 생일을 천추절이라고 불렀는데 신하의 생일을 절로 부를 수 없다고 하여 반대하였다. 이처럼 김부식은 아무리 실권을 가진 사람의 의견이나 그 사람을 위한 일이라도 예의에 어긋나면 가차없이 반대하였다.
이자겸 세력이 제거된 다음 곧이어 묘청 세력이 임금에게 황제를 칭하고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하면서 서경천도운동을 벌였을 때, 김부식은 반대하였다. 그리고 묘청 세력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군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으며, 그 뒤 수상까지 승진하여 정계를 주도하였다. 이 무렵인 1145년(인종23)에 <삼국사기>편찬을 주도하였다.
흔히 <삼국사기>를 김부식 혼자 쓴 것처럼 생각하지만, <삼국사기>는 왕명에 의해 관에서 편찬한 역사책으로서 김부식이 책임자로서 감수를 했을 뿐이다. 물론 편찬 책임자인 김부식의 의견이 크게 반영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실제 자료수집, 분석, 서술에는 많은 학자들이 참여하였다. 그들은 대부분 과거에 급제하여 문장에 능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삼국의 역사를 정리하여 편찬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임금이었던 인종과 김부식 세력은 계속되는 사회변동과 정치변란에 대응하여 지배질서를 재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던 것이다. 사회가 어지러우면 흔히 역사 바로 세우기를 강조하는 것이 이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관료와 지식층이 우리나라 역사보다 중국 역사에 더 달통한 것을 개탄하고 중국 역사책만으로 교훈을 삼기엔 부족하다고 느꼈다. 이전에 만들어진 역사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것만으로는 정치를 밝혀 권장하고 훈계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역사책을 편찬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책은 당연히 유교적 역사관에 입각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삼국사기>에서는 유교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데는 인정을, 신하에게는 충절을, 자식에게는 효행을 강조하여 수술하였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의 어떤 부분에 유교적 역사관과 합리주의가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삼국사기>는 역사책의 편찬 방법 중에 본기, 지, 표, 열전으로 분류하여 편찬하는 기전체로 만들었다. <본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정치, 전쟁, 외교에 관한 것을 주로 기록하였다. 정치는 유교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아 그 실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왕을 하늘의 명령을 대리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왕을 거역하는 일은 철저히 응징하는 논조를 폈다. 이는 논어에 ‘왕은 바람이요 민은 풀이라 바람이 불면 풀은 눕게 마련이다’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사회기강을 확립하려는 데서 잘 나타난다. 그리고 자연변이에 대한 기록을 정치적 사건과 관련시켜 서술하였는데, 정치가 순조롭지 않을 경우 혜성의 출현, 일식, 월식 등 자연질서에 이변이 생긴다고 보았다.
<열전>에는 충효와 정절을 강조하여 그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기록하였다. 예컨대 승려였지만 백제가 침공하여 신라가 위기에 봉착하자 승복을 벗고 전쟁에 뛰어들어 온몸에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꽂혀 죽은 취도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그의 형제들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 미모에 반한 임금의 수청을 거부하고 갖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남편과 운명을 같이한 도미 부인의 기록에서 여자의 정절을 강조하였다. 자신의 몸을 부잣집의 노비로 팔아 부모를 잘 봉양한 효녀 지은을 서술하여 부모에게 효를 다하는 모습을 기록하였다. 그 밖에 열전에 기록한 많은 인물들의 사례를 통하여 유교의 기본 사상인 삼강오륜의 실천을 중시하고 그에 바탕을 둔 사회질서가 확립될 수 있기를 바랐다.
<삼국사기>, ‘술이부작’의 원칙 아래 서술
한편 <삼국사기>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것에 대해서는 가능한 서술을 피하고 있어 합리적이라는 평을 받는다. 그리고 삼국을 모두 ‘우리’라고 기록하여 우리나라의 독자성과 특수성을 인정하려는 국가의식을 강조하였다. 물론 이 책은 중세국가의 공식적인 역사서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지배층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백성들의 삶의 모습은 별로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은 ‘서술은 하되 편찬자가 창작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객관적으로 편찬하였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귀중한 역사책이다.
그런데<삼국사기>가 유교적 합리주의 역사관에 입각하여 우리의 고대사를 정리했기 때문에 나타난 한계도 있다. 신화를 비판하고 증거주의를 내건 나머지 단군조선과 삼한의 역사를 누락하였으며, 전통문화를 축소시켰다. 일찍이 일제 침략에 대항하여 고유의 전통을 살려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고 애썼던 신채호 같은 역사가는 이 책을 사대주의에 입각하여 편찬한 역사책이라고 혹평 하였다.
그는 이 책이 우리의 고유사상에 바탕을 둔 화랑도의 인물들을 기록하지 않은 대신 당나라 문화에 동화한 최치원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당나라에 대항하여 혈전을 벌인 복신은 열전에 기록하지 않고 오히려 투항한 흑치상지를 기록한 것 등을 지적하였다. 실제 한계로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이 당시 사회변동 속에서 유교이념으로 지배질서를 재정립하고 대외적으로 온건한 외교관계를 유지하려 했던 결과 그러한 한계를 보인 것이다.
<삼국유사>, 자주의식과 신이사관
일연은 속성이 김씨이며, 현재의 경북 경산지역의 향리집안에서 태어났다. 9세에 출가한 다음 승과시험에 합격하였다. 그 후 불법을 닦는 과정에서 몽고병이 침략해 왔을 때는 문수보살이 감응하여 피난처를 알려주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40대에 최우의 인척이었던 정안의 초정을 받고 남해분사대장도감에서 대장경 조판사업에 참여하면서 정계와 관련을 맺었다. 최씨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원종과 충렬왕의 존숭을 받았다. 77세 되던 해에는 충렬왕이 그를 국존으로 책봉하였으며, 임금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절하는 의례를 행할 정도로 일연을 후대하였다. 만년에 경북 군위군의 인각사에서 선문을 총망라하여 구산문도회를 두 번 개최하는 등 불교 교단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전국 각지의 절에서 승려생활을 하면서 일반민의 생활모습과 그들이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는 <삼국유사>를 편찬하는데 상당한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고려는 몽고와 장기간에 걸쳐 전쟁을 하고 끝내 그들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일반민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피해와 고통의 질곡에서 구원과 희망을 갖기 위해 신앙생활에 의지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때 일연은 이러한 욕구에 부응하여 실천적인 불교를 표방하고 민족적 위기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을 모색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가 1281년 무렵에 완성한 <삼국유사>의 편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삼국유사>는 일연 개인이 편찬한 역사책이기 때문에 체제와 양식이 자유롭다고 평가받아 왔다. 그러면 정말 이 책은 일연 혼자 편찬한 것일까. <삼국사기>가 김부식 한 사람만의 작품이 아니듯이, 이 책도 일연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고 자료수집, 필사, 판각등을 제자들과 함께 곧동 작업한 결과였다. <삼국유사>의 편찬에 앞서 선행 작업으로 여러 해 동안 자료를 수집하여 <역대연표>를 간행하였는데, 그런 과정에서 일연의 제자들이 참여하였을 것이다.
유교적 합리주의 역사관에 입각하여 편찬된 것이 <삼국사기>라면, <삼국유사>는 기이하고 신비한 일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신이사관으로 편찬되었다.
때문에 당대의 고승 일연이 이 책에서 불교사상, 불교설화, 고승들의 일화, 일반민들의 불교 신앙사례, 구도와 득도의 과정 등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은 당연하다. 일반민은 합리적인 유교사상보다는 무속 신앙을 믿었고, 불교 역시 미신적인 기복신앙의 형태로 믿었다. 또 산수와 지형의 모습이 인간생활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친다는 풍수지리 사상도 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삼국사기>가 유교이념에 입각한 사회질서 정치질서의 재정립에 목적을 두고 편찬되었다면, <삼국유사>는 당시 현실 속에서 광범위한 대중에게 구원과 희망을 갖게하기 위하여 신이사관으로 서술되었다.
또한 <삼국유사>를 쓸 당시는 이민족인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여 오랜 항전을 치루고 나서 그들의 간섭을 받으면서 민족적 자주의식 내지 위기의식이 높아져 있었다. 일연뿐만 아니라 <제왕운기>를 쓴 이승휴도 역사를 서술하면서 민족적 자주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시대배경과 편찬목적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 비교를 하여<삼국유사>가 <삼국사기>보다 복고적이거나 진보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삼국유사>, 민중에 대한 애정으로 당대 생활문화 생생히
<삼국유사>는 편찬체재에 구애받지 않고 수집된 자료에 의거하여, 왕력, 기이, 흥법,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으로 목차를 분류하였다.
<왕력>편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락국, 후고구려, 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다. <기이>는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서술하였다. 여기에서 현존하는 역사책 중 단군신화를 최초로 기록하여, 우리 역사를 고조선까지 소급하여 서술하였다.
그리고 각 나라 시조임금들의 신화를 채록하여, 그들은 보통 사람과 달리 신비하게 태어나고 초월적인 능력을 소유하여 통치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그 밖에 여러 곳에서 삼국시대에 일어난 신비한 일들을 기록하면서 신의 도움을 받아 정치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흥법>에는 삼국의 불교 수용과 융성에 관한 항목들을 설정하여 삼국에서 불교를 개척하고 기초를 닦을 때의 신기한 일들을 기록하였다. <탑상>에는 탑과 불상에 관한 사실들을 서술하면서 구도와 성불과정에서 일어난 신비스런 사건들을 수록하고 있다. 예컨대 황룡사 9층탑을 세운 후에 천지가 비로소 태평하고 삼한을 통일하였다 하여 이 탑의 영험을 치하하였으며, 신라가 불국토임을 입증하는 여러 가지 사례들을 수록하였다.
<의해>에서는 고승들의 저술과 포교 활동 등을 기록하였다. <신주>에는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들이 초월적인 힘으로 악과 미신을 퇴치하는 모습을 묘사하였다. <감통>에는 여러 가지 신비한 신앙 체험들을 기록하였다. 예를 들면 몸종 욱면이 용맹정진하는 도중에 법당 천정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 극락으로 간 사례나, 짚신 만드는 광덕과 농사짓는 엄장이 극락왕생한 경우 등 하층민들의 성불한 신앙 체험을 기록하였다.
<피은>에는 속세에서 초탈한 인물의 행적을 실었다. 그 안에는 공직자로서의 생활을 마다하고 구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다른 나라로 간 사람들도 있었다. <효선>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들을 수록하였다. 대부분 몹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일반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예를 들면 흉년에 먹을 것이 떨어지자 자기 다리 살을 베어 부모에게 봉양한 향득의 이야기나 늙은 어머니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아들을 민망하게 여겨 어머니 봉양을 위해 아들을 생매장하려고 땅을 파다 돌종을 얻은 손순의 설화 등이 그것이다.
<삼국유사>는 다른 어떤 역사책보다도 일반민에 대한 의식이 두드러져 보인다. 불교신앙을 고취시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기도 했지만, 그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전편에 걸쳐 그들의 생활상과 의식, 신앙 등의 사례와 향기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여 생생하게 전달해 주고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상호 보완적인 역사책
<삼국사기>와<삼국유사>를 낮추어 평가하는 사람은, 전자를 사대주의 역사관에 입각하여 편의대로 사료를 없애버렸다고 혹평한다. 그리고 후자에 대해서는 황당무계하고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기록하여 사료적 가치가 없다고 악평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유교사상에 바탕을 두고 객관적인 원칙 아래 철저하게 문헌기록에 의거하여 편찬되었다. 이 책은 삼국의 정치나 제도 등을 아는 데에 가장 기본이 된다. 비록 유교적 합리주의에 입각하여 사료를 선택하였지만, 사실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려는 자세를 견지하여 신라의 고유한 왕명 표기나, 전쟁에서 패배한 사실들도 그대로 기록하였다. 우리나라의 독자성과 특수성을 인정하려는 국가의식도 보여 준다.
<삼국유사>는 삼국의 역사 전반을 포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삼국의 불교를 전반적으로 모두 다룬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신화전설과 향가 등의 원형을 보존하여 사료적 가치가 높으며, 일반민의 생활상과 불교신앙을 복원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사료들을 제공한다.
<삼국사기>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만 서술하였음에 비하여, <삼국유사>는 고조선부터 삼한, 부여까지 기록하고, 아래로는 고려시대까지 기록하였다.
특히<삼국유사>는 <가락국기>를 통하여 삼국만이 아니라 가야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두 역사책이 각기 장단점이 있지만 우리는 두 책을 서로 보완적으로 이용한다면 고대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보다 정확히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