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2023년 상반기 작품을 <詩山> 96호에 모았다. 먼저 <준비 안 된 ‘존버’>를 펼쳐본다.
준비 안 된 ‘존버’*
-남한산성 남문
차용국
설을 쇠고 나니 북극 한파가 밀려왔다. 일기예보에서 서울 기온이 영하 16.7도라고 한다. 경기 북부와 강원 내륙 지역은 영하 20도, 중부지역은 영하 15도, 남부지역은 영하 10도 내외로 떨어졌다. 기상청은 한파특보를 발령했다.
설 연휴 마지막 날 아침, 남한산성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행신역에서 경의중앙선을 타고, 왕십리에서 수인선으로 갈아타고, 복정역에서 8호선으로 갈아탔다. 남한산성 가는 길은 멀고,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냉기가 기내로 파고든다.
문득 1636년 인조의 남한산성 행차를 생각했다. 아니 생각났다. 생각은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것이라고 어느 심리학자가 말했는데, 가끔 뜬금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생각해보면, 생각은 '나는' 것 일 듯도 싶었다. 그렇더라도 생각과 이어지는 어떤 연상의 끈은 있을 것이었다. 설 연휴를 보내면서 읽은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의 여운이 작동한 것일지도 모른다.
1636년 12월 6일 의주 건너편 용골산 봉수대에서 봉화 둘이 올랐으나 황주 정방산성에 주둔한 도원수 김자점은 무시했다. 봉화는 평시에 하나 올리고, 적이 나타나면 둘을 올리고, 국경을 넘으면 셋을 올리고, 전투가 벌어지면 넷을 올리도록 정해져 있었다. 봉화는 김자점이 주둔한 황주 정방산성까지만 전달되었다. 그는 서울로 이어진 봉화로를 차단했다. 봉화가 서울에 닿으면 큰 소동이 일어날 거라고 우려했다.
김자점은 청군이 겨울에 침략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근거는 비현실적이었지만 믿음은 강했다. 김자점은 현실의 문제를 소망의 얼개에 짜 맞추어 세상을 보고 읽었다. 김자점은 청군이 침략할 거라고 말하는 이를 미워하고 책망했다. 그의 부하들은 청군 침략의 징후를 섣불리 꺼내지 못했다. 봉화의 길이 막히기 전에 언로가 먼저 막혀있었다.
청군은 1636년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넜다. 그제야 김자점은 청군 침략의 장계를 올렸다. 장계는 12월 13일이 되어서야 조정에 도착했다. 영의정 김류와 신료들은 인조에게 서둘러 강화도 행차를 촉구했다. 조선은 비상시를 대비해서 강화도에 피난처를 마련해놓고 있었다. 강화도에는 군량과 화약 등과 같은 전시물자도 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조는 청군이 그렇게 빨리 내려올 리 없다며 망설였다. 그는 대신 윤방과 승지 한흥일에게 종묘 선왕들의 신주를 수습하고, 빈궁 및 왕자들과 먼저 강화도에 들어갈 것을 지시했을 뿐이다. 한시가 급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인조는 우유부단했다.
청군의 침공로에 저항은 없었다. 조선의 진(陣)은 대로의 길목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여서 병력의 주둔과 수성만으로도 위협과 지체의 효과는 상당할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진에 조선군은 없었고, 병력 없는 진은 무용지물일 뿐이었다.
"조선은 청군의 철기와 야전에서 정면으로 맞설 경우, 승산이 없다고 보았다. 대신 청군이 돌격해오는 대로에 위치한 진을 버리고 군민들을 주변의 산성으로 집결시킨 뒤 화포와 조총 등으로 저항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말하자면 청야견벽(淸野堅壁) 전략이었다. 의주의 군민들은 백마산성으로, 평양의 군민들은 자모산성으로, 황주의 군민들은 정방산성으로, 평산의 군민들은 장수산성으로 옮겼다."**
치명적인 작전 실패였다. 청군은 의주와 곽산을 지나 정주에 무혈 입성했다. 곽산과 정주의 군민은 투항했고, 의주-안주-평양-황주-평산-임진강으로 이어지는 방어선은 텅 비어서 거칠 것이 없었다. 청군의 선봉 주력은 철기라 불리는 기마병이었는데. 대로에서 멀리 떨어진 산성까지 찾아가 공격하면서 전력과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었다. 청군은 산성을 무시하고 텅 빈 대로를 따라 질풍처럼 남하했다. 청군에게 의표를 찔린 조선군은 속수무책으로 청군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결국 산성을 나와 청군이 지나간 대로를 뒤따라가는 꼴이 되어버렸다. 야전군 총사령관의 무책임과 무능과 무사안일이 빚은 허물과 결과는 처참했다.
인조는 12월 14일 저녁 무렵에 강화도행에 나섰다. 이미 때는 늦었다. 인조가 남대문에 도착했을 때 마부대가 이끄는 청군 선봉대가 양철평(은평구 녹번동 부근)을 지나 홍제원을 넘었다는 보고가 날아왔다. 지척의 거리에 청군이 출현한 것이다. 다급해진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옮겼다.
"인조가 도성을 겨우 빠져나와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행렬은 처연했다. 도성을 버리고 피난하는 것이 이괄의 난, 정묘호란에 이어 벌써 세 번째였다. 구리개(현재의 을지로 1가와 2가 사이에 있는 고개)를 넘어 수구문(현재 중구 광희동의 광희문)으로 이어지는 파천 길에는 어가 행렬과 백성들의 피난 행렬이 서로 뒤엉켰다. 인조를 호위하던 군사들부터 갈팡질팡하여 대오가 흩어졌다. 혼란의 와중에 가족과 떨어져버린 백성들의 통곡 소리가 넘쳐났다. 빨리 적을 피해야만 하는 황망한 상황에서 말이 제대로 준비될 리 없었다. 신료들 가운데는 말이 없어서 도보로 수행하는 자들이 있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기온은 더 떨어지고 남한산성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남한산성 남문으로 오르는 길은 헐거웠다. 하늘은 파랗고 햇빛은 맑았으나 차가운 바람이 샅샅이 훑어가는 계곡은 얼어서 물소리는 기진했다. 떨어진 마른 잎은 정처 잃은 삶의 조각처럼 흩날리며 오락가락했다. 남문 양쪽으로 한 그루씩, 수령 470여 년을 살아온 느티나무 거목이 비탈길로 올라오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남한산성은 험한 산봉과 능선을 이은 11.76km의 석성이다. 방위에 따라 좌익문(동문), 우익문(서문), 지화문(남문), 전승문(북문)이라는 4개의 대문과 문루를 세웠다. 이 대문의 현판은 정조 때 성을 개축하며 하사한 명칭이다. 남문의 '지화(至和)'는 '화합하고 화목하라'라는 뜻이다. 백성들과 신하들이 화합하고 화목하기를 바라는 정조의 염원이 담겨있다. 남문은 성문중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다.
남한산성에는 5개의 옹성(1남옹성, 2남옹성, 3남옹성, 연주봉옹성, 장경사신지옹성)과 16개의 암문, 그리고 125개의 군포(초소)를 갖추고 있었다. 옹성은 성문 밖에 한 겹의 성벽을 둘러쌓은 이중 성벽을 말한다. 군포는 초소를 말하는데 지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성벽 안쪽의 시야 넓은 곳에는 장군의 지휘소인 장대를 5개 세웠는데 지금은 수어장대만 남아있다. 군사훈련 지휘소인 연무관과 훈련장으로 쓰였을 공터는 넓다. 남한산성은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남한산성 내부에는 왕의 거처인 행궁도 복원하여 작은 궁궐 같았다. 행궁 주변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궁궐의 정원처럼 보이기도 한다. 산성마을은 올 때마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서 풍경을 바꾸고, 간판은 날로 늘어나 번잡한 유원지 배경으로 변해간다. 지금 산성마을은 현실의 삶으로 바쁘다.
인조와 신료들은 1636년 12월 14일 저녁 9시 무렵에 남문을 통해서 남한산성에 들어왔다. 남한산성은 인조 2년(1624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4년(1626년)에 축성했다. 성안에 행궁과 관청을 지었고, 마을을 조성하여 백성을 이주시켰다. 산성마을은 경기도 광주목(廣州牧)에서 관할했다. 산성마을은 행정과 군사뿐만 아니라 농ㆍ공ㆍ상이 활발한 산중 교역의 중심지였다.
주봉인 청량산(479.9m)을 필두로 산봉에 둘러싸인 300~350m의 분지에 조성한 산성마을은 안전지대였다. 외곽은 급경사를 이루고, 거기에 견고한 성곽을 쌓아 방어가 용이한 천혜의 요새였다. 9개의 사찰을 지었고 성을 방어하는 승군도 두었다. 청군이 14만여 명의 병력이라 하더라도 얼어붙은 산길을 올라와 전투를 벌이려면 위험한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험지였다.
인조와 신료들은 산성마을에 들어가 ‘존버’했다. 문제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특히 식량이 부족했다. 당시 남한산성에 비축한 군량은 대략 6천여 석이었고, 주둔한 조선 병력은 1만 5천여 명으로 추산된다. 대부분 인조를 호위하며 들어온 어영군과 광주, 양주, 여주 등지에서 들어온 군졸이었는데, 제대로 훈련받거나 당시 주력 무기인 화포와 총 등도 갖추지 못했다. 부족한 식량을 조달할 여건은 꽉 막혀있었고, 그것을 헤쳐 나갈 능력도 없었다. 그들이 먹고 버틸 수 있는 식량의 한계는 겨우 45일 정도인 셈이었다. 준비 안 된 ‘존버’였다.
김훈은 준비 안 된 ‘존버’의 실상에서 벌어진 현란한 허상의 말 조각들을 소설 『남한산성』에서 쓸어 담았다. 인조와 신료들이 갇힌 공간에서 헛것의 푯대를 펄럭이며 벌인 말 잔치는 비말(飛沫)의 편린(片鱗)처럼 난무했으나 치욕은 너무도 컸다. 인조와 신료들은 삼전도에서 머리 박고 궁궐로 돌아갔으나 조선인 50만여 명이 가족과 생이별하여 청국으로 끌려가는 처참한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준비 안 된 ‘존버’의 이면을 채우고 넘치는 것은 결국 민중의 몫으로 떨어지고, 그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는 애달프다.
* 온라인 게임 '스타크래프트' 유저들이 사용하는 '존나 버로우' 스킬에서 유래하여 '존나게 버티기'로 변천된 비속어의 줄임말로, 엄청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참고 버티는 상황에 사용한다.
** 한명기, <역사평설 병자호란 2> 85쪽, 푸른역사, 2016
*** 한명기, <역사평설 병자호란 2> 90-91쪽, 푸른역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