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제8권 / 경기(京畿) / 양근군(楊根郡)
동쪽으로 지평현(砥平縣) 경계까지 27리이고, 남쪽으로 여주(驪州) 경계까지 23리이며, 서쪽으로 광주(廣州) 경계까지 39리이고, 양주(楊州) 경계까지 40리이며, 북쪽으로 가평현(加平縣) 경계까지 43리이고, 서울까지 1백 1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양근군(楊根郡)인데, 일명 항양(恒陽)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에서 빈양(濱陽)이라 고치어 기천군(沂川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옛 이름을 회복하여 광주(廣州)에다 예속하였다. 명종(明宗) 5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고, 고종(高宗)이 영화(永化)라고 일컬었으며, 원종(元宗) 10년에 위사공신(衛社功臣) 김자정(金自廷)의 향리(鄕里)였으므로, 승격하여 익화 현령(益和縣令)으로 삼았으며, 공민왕(恭愍王) 5년에 승격시켜 군으로 만들어 지금 이름으로 회복하였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인습하였다.
【속현】 미원현(迷原縣) 군 북쪽 41리 지점에 있다. 고려 공민왕 5년에 국사(國師) 보우(普愚)가 군(郡)의 미원장(迷原莊)ㆍ소설암(小雪菴)에 우거하고 있었으므로, 장(莊)을 승격시켜 현(縣)으로 만들고 감무를 두었다가 조금 뒤에 땅이 좁고 사람이 드물므로 도로 군(郡)에 예속시켰다.
【관원】 군수(郡守) 1인인데 종사품이다. 여러 군이 같다. 훈도(訓導) 1인인데 종구품이다. 여러 군과 현이 같다.
【군명】 항양(恒陽)ㆍ빈양(濱陽)ㆍ영화(永化)ㆍ익화(益和).
【성씨】 본군(本郡) 함(咸)ㆍ탁(卓)ㆍ부(傅)ㆍ경(耿)ㆍ경(敬)ㆍ이(李)ㆍ정(鄭)ㆍ박(朴) 모두 속성(屬姓)이다.
미원(迷原) 함(咸).
【형승】 좌편으로 용문(龍門)에 의지하였다 이적(李迹)의 시에, “좌편으로는 용문에 의지하고 우편으로는 호수를 베었네.” 하였다.
形勝
左據龍門。李迹詩:“左據龍門右枕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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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 가평군 향토문화재 제3호 경현단에 가면 ②◆편집자주 자연특별시 가평군에 국가지정 문화재는 어떤 것이 있을까? 가평문화관광신문은 지역 내 국보, 보물,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중요 민속문화재, 등록문화재 등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추억의 장소를 찾아 나선다.
GCTN.가평문화관광신문 | 기사입력 2021/08/27 [13:41]
다음은 역사와 함께 살아 숨 쉬고 있는 12인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출처 : 다음카페 설악신선봉/ 글. 이영재 ) 정암 조광조 선생(1482~1519)은 도학을 이념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추진한바 있으며 1510 사마시에 장원합격. 성균관에서 수학. 1515(중종10) 알성시에 2등한후 성균관 전적. 사헌부감찰. 사간원 정언 등을 거쳐 대사헌에 이르기도 했다. 정우당 김식 선생 1482(성종13)~1520(중종15)운 기묘팔현의 한분으로 1519(중종14) 현량과에 장원급제 성균관 사성. 홍문관 직제학. 홍문관 부제학. 대사성에 임명. 조광조와 함께 훈구세력 제거와 왕도정치 구현을 위해 정국공신의 위훈삭제, 향약실시, 미신타파 등 개혁정치를 실시했다고 한다. 잠곡 김육 선생은 1580(선조13)~1658(효종9) 1605년(광해1)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의 유적(儒籍) (청금록)에서 대북파의 영수 정인홍을 삭제하는 사건에 연루돼 대과 응시자격을 빼앗기고 가평 잠곡으로 10년 동안 낙향했다. 이어 1623년 금오랑. 이듬해에는 음성현감. 1624년(인조2) 증광문과에 장원. 아듬해 9월 안변도호부사. 예조참의. 우부승지. 장례원 판결사. 1638년 충청도 관찰사-공물법 폐지와 대동법실시를 건의했다. 동강 남언경 선생 1529(중종23)12.25~1594(선조28)은 1571(선조4) 청풍군수 1573 양주목사-도봉서원창건. 1592 여주목사. 전주부윤. 공조참의를 역임한 조선최초의 양명학자다. 1589(선조23) 왜란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설악면 영천부락으로 낙향. 1592(선조26)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천, 춘천, 가평, 양근등지에서 360여명의 근왕병을 모집 왜병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리다. 1694(숙종20) 12월 미원서원에 배향하게 된다. 농담 박세호 선생은 생몰미상이며 본관은 고령. 자는 거정. 호는 농담. 청백리 박처륜의 아들. 1519(중종14) 기묘사화때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이약수. 김수성. 윤언직. 홍순복등과 함께 조광조를 변론하는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청강 이제신 선생은 1536(중종31)~1583(선조16) 1558 생원시에 합격. 1564(명종) 식년문과에 급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1571(선조4) 울산군수. 1578 진주목사. 1581강계부사. 함경도 병마절도사 등 시문에 능하고 행서, 초서, 전서 예서에 뛰어났다고 한다. 삼연 김창흡 선생은 1653년(효종4)~1722(경종2) 좌의정을 지낸 문정공 청음 김상헌이 증조부이고, 영의정을 지낸 문충공 문곡 김수항의 3남이다. 큰형은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이고 작은형은 예조판서와 지돈령부사를 지낸 김창협이다. 남도진 선생은 1674(현종15)~1735(영조11) 본관은 의령. 자는 중옥. 호는 농환재이다. 조선 개국공신 남재의 11대손으로 국문 작품저서 중 농환재 가사집에 실린 “낙은별곡”과 단가 3수가 전하며 그가 24세에 금강산에 다녀와서 지은 봉래가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원충 선생은 1570년(선조3) 8.11~1646년(인조24)6.19 본관은 전주. 자는 백신(伯藎). 호는 자잠옹이다. 광해군이 선조대왕의 계비인 인목대비(영창대군의 어머니)를 서궁에 유폐하자 동학유생 조경기, 홍남철등 8인과 함께 구모소(救母疏)를 올린다. 이항로 선생은 (1792~1868) 본관은 벽진. 자는 이술. 호는 화서. 경기 포천 출신 3세에 천자문을 떼고, 6세에 십팔사략을 읽고, 청황지황변을 지었으며 조선초 말기 주리철학의 3대가 중 한분이다. 중암 김평묵 선생은 1819(순조19)~1891(고종28). 5세에 천자문을 시작 십팔사략 및 소학을 읽고 13세에 경서를 이해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중암선생문집’ 및 별집 ‘중암고’ ‘근사록부주’ ‘학통고’ ‘천군편’ ‘대곡문답’외에도 수두룩하다. 성재 유중교 선생(1832~1893)은 본관은 고흥. 자는 치정. 호는 성재. 아버지는 진사 조. 어머니는 한산 이씨다. 1897년 그의 제자 유치경. 주용규에 의해 51권 26책(원집46권, 별집4권, 부록1권). 목활자본으로 편집 간행됐으며 시. 사. 잡저. 설. 차의. 소지. 논 등 그의 저작들이 들어있다. 부록에는 연보와 1832~97 문집이 간행되기까지의 기사가 실려 있다고 한다. 설악면 지역에 조선최고의 성리학자들의 위신이 현재까지 살아있어 전통문화보존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낀다. GCTN.가평문화관광신문 <저작권자 ⓒ 가평문화관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성재집 제46권 / 가하산필(柯下散筆) / 미원서원을 철폐한 후 단을 설치한 의절〔迷源書院撤享後設壇儀節〕
명궁(明宮 사당)의 터를 고르고 큰 단(壇) 하나를 만들어 단 위에 정암(靜菴) 선생의 신의(神椅)와 - 위판(位版)은 교궁(校宮 향교)에서 모셔 넣었다. - 다섯 선생의 위판을 모셔 묻고, 각각 흙을 모아 작은 단을 만들고 돌에 새겨 기록했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과 대사성(大司成 김식(金湜)) 두 선생의 위(位)가 북쪽에 있는데 남쪽을 향하여 서쪽이 상좌(上座)며, 동강(東岡 남언경(南彦經)) 선생이 서쪽 제일 위에 있고,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 선생이 동쪽 제일 위에 있고, 잠곡(潛谷 김육(金堉)) 선생이 서쪽 제이 위에 있고,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선생이 동쪽 제이 위에 있다. - 살피건대, 고금의 향교와 서원의 배향위차(配享位次)는 동쪽을 높게 여기는 것이 있고 서쪽을 높게 여기는 것이 있는데, 주자(朱子)의 정론(定論)을 따르면 동쪽이 높은 것을 바르게 여겨야 한다. 다만, 본원의 위차는 서쪽이 높다는 설을 적용했고 지금 옛 모습을 모방하려 하기 때문에 감히 갑자기 고치지 않는다. - 단 아래 동, 서 두 계단을 만들었다. 뜰 가〔庭半〕에 옛날에 지세를 따라 옆으로 쌓은 축대가 한 계단 있는데, 지금 그대로 두어 신문(神門 사당의 문)의 자리를 대신하게 한다. 그 바깥에 있는 사방을 두른 담도 그대로 둔다. 문 자리〔門址〕는 돌로 표시하여 대문의 자리를 대신하게 한다. 대문 밖 약간 서쪽에 옛 재직실(齋直室 서원 지기가 거처하는 집) 세 칸이 있는데, 지금 서원의 종 한 사람을 뽑아 살게 하고 ‘신단수복(神壇守僕 신단을 지키는 종)’이라 명명하여 청소하고 잡초 뽑는 일과 나무하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출입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임무를 맡게 한다. 옛날부터 전해온 서원의 서적과 제기 등속은 모두 궤에 넣고 봉하여 수복(守僕)에게 맡기고 목록 여러 건을 따로 만들어 단 아래 사림(士林)의 집에 나누어 보관한다. 전토(田土)는 수복의 봉전(俸田)을 제외하고 본리(本里)의 주민에게 임시로 경작권을 줌으로써 그들의 노역〔徭役〕에 대한 대가를 지급하고 수복과 함께 신단(神壇)을 수호하게 하며, 조만간 수축(修築)하는 공사가 있으면 힘을 모아 노동력을 제공하게 한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신단 아래 장보(章甫 유생(儒生))는 번갈아 한 사람이 분향례를 행한다. 사철의 첫 달 초하루 서사(書社)의 강회일(講會日)에는 회원들은 일제히 나아가 전알례(展謁禮)를 행하고, 나가 신문 밖에서 무리를 나누어 마주 보고 읍한 채 한 사람으로 하여금 〈백록동학규(白鹿洞學䂓)〉를 읽게 한다. 그리고 물러나 서사에서 강(講)을 행한다.
[주-D001] 봉전(俸田) : 급료로 경작권을 주는 농토를 말한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하영휘 김정기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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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재집 제46권 / 가하산필(柯下散筆) / 신단(神壇)이 완성된 날 그 일을 고한 의절 주자 창주정사의 석채 의절을 따랐다 〔壇成日告事儀 依朱子滄洲精舍釋菜儀〕
시간 전에 헌관(獻官) 이하 모두 제복을 차려 입고 문밖에 이른다. 장의(掌議)가 집사(執事)를 거느리고 정암(靜菴) 선생 신단 앞 약간 오른쪽에 축판(祝板)을 놓고, 당(堂) 가운데 향안(香案)을 놓고, 제위(諸位)의 신단 앞에 위(位)마다 왼쪽에는 변(籩) 하나 오른쪽에는 두(豆) 하나씩 제기를 놓고, 당 위 동남쪽 모서리에 준(尊 술그릇) 하나를 작(勺 술을 떠는 구기)과 멱(羃 덮는 보)을 얹어서 두고, 동쪽 계단 동쪽에 대야 두 개를 놓고, - 손 씻는 대야는 동쪽에 잔 씻는 대야는 서쪽에 둔다. - 대야 동쪽에 탁자 하나를 두고 탁자 위에 상자 두 개를 둔다. - 동쪽 상자에는 수건을 담고 서쪽 상자에는 잔을 여섯 개 담고 또 잔을 받치는 쟁반 하나를 둔다. - 헌관의 자리는 당 아래 북쪽을 향하여 만들고, 제생의 자리는 그 다음인데 역시 북쪽을 향하여 서쪽에 윗사람이 서도록 한다. 시간이 되면 헌관 이하는 동쪽 담 아래 서열대로 서는데 서쪽을 향하여 북쪽에 윗사람이 오도록 한다. 장의가 집사를 거느리고 당에 올라가 술과 찬을 담는다. - 술은 술그릇에 담고, 포와 과일은 변에 담고, 나물은 두에 담는다. - 찬자(贊者 예식을 도우는 사람) 한 사람이 헌관을 인도하여 당에 올라가 점검하고 내려와 당하의 자리에 나아가고, 제생도 자리에 나아간다. 찬자 한 사람이 자리에서 조금 앞으로 나가 재배한 후 헌관의 오른쪽에 가 서서 서쪽을 향하여 ‘재배(再拜)’라고 하면 자리에 있는 사람은 모두 재배한다. 장의, 축(祝), 사준(司尊)이 모두 당에 올라간다. 장의는 동쪽 끝에 서쪽을 향하여 서고, 축은 동쪽 계단〔阼階〕 위에 서쪽을 향하여 서고, 사준은 준의 남쪽에 북쪽을 향하여 선다. 헌관이 찬자의 인도를 받아 손 씻는 대야의 남쪽에 가서 북쪽을 향하여 서서 손을 씻은 후 닦고 올라가 분향하고 재배한 후 내려온다. 헌관이 다시 처음처럼 나아가 손을 씻고 잔을 씻는 대야의 남쪽에 가서 북쪽을 향하여 잔 하나를 취하여 씻어 찬자에게 준 후, 모두 올라가 준이 있는 곳에 나아가 서쪽을 향하여 서서 찬자가 잔을 헌관에게 주고 사준(司尊)이 보를 들고 술을 따르면 헌관이 잔을 찬자에게 준 후, 모두 정암의 위 앞에 나아가 헌관은 북쪽을 향하여 꿇어앉고 찬자가 꿇어앉아 잔을 주면 헌관이 잔을 잡아 삼제(三祭 띠에 술을 세 번 붓는 것)하고 변(籩)과 두(豆) 사이에 잔을 올린 후 부복하고 일어나 내려온 후, 손 씻는 대야에 나아가 처음처럼 하고 잔을 씻는 대야에 나아가 잔 하나를 취하여 씻어 올라가 대사성(大司成)의 위(位)에 처음처럼 잔을 올린다. 의절이 끝나 헌관이 물러나 향안 앞에 나아가 잠시 서면, 축이 축판을 들고 헌관의 왼쪽에 나아가 동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읽기를 마치고 일어나 자리로 돌아가고, 헌관은 재배하고 내려가 손 씻는 대야에 나아가 처음처럼 손을 씻고 잔을 씻는 대야에 나아가 잔 네 개를 함께 씻어 찬자에게 주면 찬자는 모두 쟁반에 받쳐, 함께 올라가 준이 있는 곳에 나아가 네 잔에 술을 다 따라 동강(東岡)의 위 앞에 함께 나아가 잔 하나를 취하여 삼제한 후 잔을 올리고 재배한다. 순서대로 청강(淸江)의 위, 잠곡(潛谷)의 위, 삼연(三淵)의 위에도 의절대로 두루 올리기를 마친 후, 헌관 이하는 내려와 자리로 돌아가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더불어 재배한다. 장의는 집사를 거느리고 올라가 진설한 것을 철거하여 물러난다.
[주-D001] 석채(釋菜) : 입학할 때 선성(先聖)과 선사(先師)께 제사 드리는 일종의 전례(典禮)를 말한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하영휘 김정기 (공역) | 2015
明宮遺址。開拓爲一大壇。壇上奉埋靜菴先生神椅 位版自校宮奉入。 及五先生位版。各封土爲小壇。刻石以誌之。靜菴大司成兩先生位居北南向西上。東岡先生居西一位。淸江先生居東一位。潛谷先生居西二位。三淵先生居東二位。按古今校院配享位次。有以東爲尊者。有以西爲尊者。據朱先生定論。當以東尊爲正。顧本院位次。適用西尊之說。而今欲一倣舊貌。故不敢遽有更改也。壇下爲東西兩階。庭半舊因地勢爲橫築一級。當中有階。今仍之。以當神門位。外有四周墻亦仍之。當門址。用石標之。以當大門位。大門外少西。有舊齋直室三楹。今擇處院隷一人。名神壇守僕。令掌掃穢除草之役。及禁防樵牧之任。院中舊傳書籍祭器之屬。幷櫃封付守僕。別具目錄數件。分藏壇下士林家。田土除守僕俸田外。權付本里居民。以助給其徭役。令共守僕守護神壇。早晩有修築事役。亦令齊力應供。每月朔望。壇下章甫輪差一人行焚香禮。四孟朔書社講會日。諸員齊進行展謁禮。出就神門外。分隊對揖。令一人讀白鹿洞學䂓。乃退就書社行講。
壇成日告事儀 朱子滄洲精舍釋菜儀
前朞。獻官以下。皆盛服至門外。掌議帥執事者。設祝版于靜菴先生神壇前少右。設香案于堂中。設祭器于諸位神壇前。每位各左一籩右一豆。設尊一于堂上東南隅。加勺羃。設洗二於東階之東。盥洗在東。爵洗在西。 卓一於洗東。卓上箱二。東箱盛巾。西箱盛爵六。又置捧爵盤一。 設獻官位於堂下北面。諸生次之。亦北面西上。及期。獻官以下。序立於東墻下。西向北上。掌議帥執事。升堂實酒饌。實酒于尊。實脯果于籩。實菜于豆。 贊者一人。引獻官升堂點閱。降就堂下位。諸生亦就位。贊者一人。離位少前再拜訖。進立於獻官之右。西向曰再拜。在位者皆再拜。掌議祝司尊者皆升。掌議立於東序西向。祝立於阼階上西向。司尊立於尊南北向。贊引獻官詣盥洗之南。北向立。盥手帨手。升焚香再拜。降再詣盥洗如初。詣爵洗南。北向立。取一爵洗之。以授贊。俱升詣尊所。西向立。贊以爵授獻官。司尊擧羃酌酒。獻官以爵授贊。俱詣靜菴位前。獻官北向跪。贊跪授爵。獻官執爵三祭。奠爵於籩豆之間。俛伏興。降詣盥洗如初。詣爵洗取一爵洗。升獻大司成位如初儀訖。退詣香案前少立。祝執版詣獻官之左。東向跪讀訖。興復位。獻官再拜。降詣盥洗如初。詣爵洗。並洗四爵以授贊。贊以盤兼捧。俱升詣尊所。並酌酒。俱詣東岡位前。取一爵三祭。奠爵再拜。以次詣淸江位,潛谷位,三淵位。徧獻如儀訖。獻官以下降復位。與在位者皆再拜。掌議帥執事者。升徹陳設。乃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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省齋先生文集卷之三十九 / 柯下散筆 / 迷源六先生神壇誌跋
吾鄕舊祠靜菴趙文正先生。並享以大司成金先生。而南東岡,李淸江,金潛谷,金三淵四賢配焉。世所稱迷源六先生祠者是也。今上初服。朝廷有大擧措。毁撤國內祠院。而本祠與其中。鄕人士傷痛之。摭明宮遺址。奉埋六先生神位。各封土爲壇。刻甎標誌。以爲歲時致敬寓慕之所。旣而聞諸院之用此例者。又不得免焉。噫。天之厄斯文。乃至此耶。重敎間嘗取舊日手抄六先生行錄。授鄕士金君士綏。附載院享始終及設壇措置大略。而尾之以古今人題詠詩文。名曰迷源六先生神壇誌。謁文於重庵先生以弁之。盖以爲鄕人子弟欲見六先生者。猶可卽此而求之。又天道回還有時而復享焉。則此篇者當爲之力也。其志亦戚矣。士綏乎其愼藏之哉。抑嘗念之。今去六先生之世。其遠者三百有餘年。近者不下二百年。事變已冷。音形永閟。其正邪顯晦。何干於人。而讀其書過其墟者。未嘗不肅然而敬。慨然而慕。如或見其人。及論其所遇之不幸。則又悲憤掩抑不自勝。不啻若沉痛之在躳。若是者其孰使之然哉。得非所謂是非好惡之性。有萬世而一源者耶。後之啓是篇者。宜先講乎此而有以自得之也夫。崇禎五癸酉月日。後學柳重敎齋沐書。
성재집 제39권 / 가하산필(柯下散筆) / 《미원육선생신단지》의 발문〔迷源六先生神壇誌跋〕
우리 마을의 오래된 사당에서는 정암(靜菴) 조문정(趙文正) 선생을 대사성 김(金)선생과 함께 제사 지냈으며, 남동강(南東岡), 이청강(李淸江), 김잠곡(金潛谷), 김삼연(金三淵) 네 현인을 배향하였다. 세상에서 말하는 ‘미원의 여섯 선생의 사당〔迷源六先生祠〕’이 바로 이것이다. 금상(今上 고종)께서 처음 즉위하시고나서 나라 안에 있는 사당과 서원을 훼철(毁撤)하는 큰 조치가 조정에서 있었는데, 이 사당도 그 속에 들어갔다. 마을 사람들과 선비들이 마음 아파하고 비통해하며 명궁(明宮 사당)의 유지(遺址)를 모아 여섯 선생의 신위를 땅에 묻고, 각각 흙을 돋우어 단을 만들고 벽돌에 새겨 표지를 남겼으며, 세시(歲時)에 공경함을 바치고 사모함을 깃들이는 곳으로 삼았다. 그러고 나서, 여러 서원에서도 이러한 사례를 쓰는 것을 또한 면할 수가 없다고 들었다.
아, 하늘이 사문(斯文 유교)에 액을 끼침이 여기에까지 이르렀는가? 그 사이에 중교가 예전에 손으로 뽑아 적은 여섯 선생의 행록(行錄)을 일찍이 취하여 마을의 선비 김사수(金士綏) 군에게 주고, 서원에서 제향하게 된 전후 사정과 단을 만들게 된 조치 등을 대략 덧붙여 싣고, 말미에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여러 사람들이 이에 붙여 읊은 시와 산문으로 마무리 하여, 《미원육선생신단지(迷源六先生神壇誌)》라고 이름 붙였으며, 중암 선생을 뵙고 글을 청하여 첫머리를 삼았다. 마을 사람들의 자제들 가운데 여섯 선생을 뵙고자 하는 이는 오히려 이 책에 나아가서 구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천도가 다시 돌아와서 다시 제향할 때가 있게 되면 이 책이 마땅히 힘이 될 것이라고 여긴 것이니, 그 뜻이 또한 슬프다. 사수야, 삼가 이를 잘 간직하거라!
생각해보니, 지금은 여섯 선생의 시대로부터 멀게는 삼백년 남짓, 가깝게도 이백 년보다 적지 않게 떨어져서, 사변(事變)은 이미 식었고, 목소리와 모습은 영원히 그쳤으니, 그 바름과 삿됨, 드러남과 묻힘이 어찌 사람들에게 간여하겠는가! 그렇지만 그 글을 읽거나 그 터를 지나가는 이들 가운데에는 마치 그 사람을 보는 듯이 숙연히 공경하지 않거나 개탄하며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그들이 겪었던 불행한 일을 논할 때면 또한 비분강개하여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는 것이, 단지 몸 속에 침통함이 있는 것 정도가 아니었으니, 이러한 것을 누가 시켰겠는가? 이른바 옳고 그름과 좋아하고 싫어함의 본성에는 영원토록 하나의 근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뒷 시대에 이 책을 열어보는 이는 마땅히 먼저 이를 공부해야만 스스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숭정 기원후 다섯 번째 계유년(1873, 고종10) 월 일 후학 유중교가 목욕재계하고 씀.
[주-D001] 조문정(趙文正) 선생 : 조광조(趙光祖, 1482~1519)로,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다.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어 사림파의 영수로 중종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훈구파인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의 무함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에 능주(綾州)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사(賜死)되었다. 선조 초기에 신원(伸冤)되어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주-D002] 대사성 김(金)선생 : 김식(金湜, 1482∼1520)으로,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노천(老泉), 호는 동천(東泉)ㆍ정우당(淨友堂)이다. 1519년 4월 조광조ㆍ김정(金淨) 등 사림파의 건의로 실시된 현량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을 거쳐 홍문관 직제학(弘文館直提學)에 올랐다. 그해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선산(善山)에 유배되었다. 뒤따라 일어난 신사무옥에 연좌되어 다시 절도로 이배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자결하였다. 기묘사화 후에 현량과가 폐지되면서 그의 직첩과 홍패도 환수되었으나 명종 때 복관되었으며, 그 뒤 선조 때에 이조 참판을 거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주-D003] 남동강(南東岡) : 남언경(南彦經)으로, 자는 시보(時甫), 호는 동강(東岡),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다시 기용되어 공조 참의를 지냈으며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로 알려져 있다.[주-D004] 이청강(李淸江) : 이제신(李濟臣, 1536~1584)으로, 본관은 전의, 자는 몽응(夢應), 호는 청강,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병마사 이문성(李文誠)의 아들이며, 영의정 상진(尙震)의 손자사위이다. 저서에 《청강집》ㆍ《청강소설》ㆍ《진성잡기(鎭城雜記)》 등이 있다.[주-D005] 김잠곡(金潛谷) : 김육(金堉, 1580~1658)으로, 본관은 청풍,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이다. 실학(實學)의 선구적 학자로서, 천문ㆍ지리ㆍ병서(兵書)에 정통하였으며, 율학의 대가로서 1653년부터 새 역법인 시헌력(時憲曆)을 실시하였다. 우의정ㆍ좌의정ㆍ영의정을 역임하였다.[주-D006] 김삼연(金三淵) : 김창흡(金昌翕, 1653∼1722)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영의정 수항(壽恒)의 아들이고, 김창집(金昌集)ㆍ김창협(金昌協)의 아우이며,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아버지가 사사(賜死)되자 경기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박해당 권민균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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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養續集卷之四 淸風金允植洵卿著 / 祭文 / 迷源書院重修壇享祭淨友堂先生文
伏惟先生。道尊師表。學窮性命。聖賢爲期。出處以正。薦科擢甲。遂長國子。士民加額。天顔有喜。羣賢同德。協贊治化。庶幾三王。羞稱五伯。風俗丕變。男女異路。七趨不迷。涵泳陶鑄。扶正抑邪。揚淸激濁。君子道長。小人所嫉。北門之禍。千古同傷。網打一世。善類咸殃。君臣義重。日暮天昏。衣帶遺䟽。可質明神。窈彼迷源。兩賢攸卜。山高水淸。習靜硏易。鄕人追慕。于此建院。垂三百年。惟謹享薦。院廢以壇。壇亦乏享。瞻依靡所。後學安仰。復修舊儀。還奉神位。一籩一豆。式遵古制。天地雖閉。道則不變。靈庶來歆。多士之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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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養續集卷之四 淸風金允植洵卿著 / 祭文 / 迷源書院重修壇享祭潛谷先生文
伏以仁孝繼天。帝錫良弼。惟此良弼。爲國柱石。早歲嘉遯。晩許驅馳。尊主庇民。憂國忘私。心無適莫。惟義與比。炳炳弧忠。特立不倚。貢弊厲民。若恫在躬。力排衆議。刱設大同。巨瘼旣蘇。邦域寧謐。后嘉乃績。作輔王室。鞠躬盡瘁。知無不爲。論道經邦。動合機宜。世皆談兵。獨主安民。厥施普博。澤流千春。迷源之曲。有翼院宇。諸賢同郡。德星所聚。憲憲文毅。貽謨後昆。象其祖賢。配以令孫。世故屢變。院撤而壇。奠儀久曠。士林咨歎。建議重修。灑掃壇塲。吉蠲用享。時維重陽。籩豆有嘉。威儀秩秩。靈其來格。歆此芬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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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속집 제4권 / 제문(祭文) / 미원서원의 경현단을 중수하고 정우당 선생을 제향한 글〔迷源書院重修壇享祭淨友堂先生文〕
삼가 생각건대 선생께서는 / 伏惟先生
도가 높은 사표이시라 / 道尊師表
학문은 성명을 깊이 연구하셔서 / 學窮性命
성현을 기약하고 / 聖賢爲期
출처를 바르게 하셨네 / 出處以正
천과에서 으뜸으로 발탁되어 / 薦科擢甲
드디어 국자감의 수장이 되시니 / 遂長國子
사민이 우러러보고 / 士民加額
임금의 얼굴에는 희색이 만연하셨네 / 天顔有喜
여러 어진 이들이 덕을 함께하여 / 羣賢同德
정치와 교화에 협력하고 도와서 / 協贊治化
삼왕에 거의 가까웠으니 / 庶幾三王
오패를 칭하는 것 부끄럽게 여겼네 / 羞稱五伯
풍속이 크게 변하여 / 風俗丕變
남녀가 길을 달리하였고 / 男女異路
칠정의 추향 혼미하지 않아 / 七趨不迷
덕성을 훈도하고 차츰차츰 함영하였네 / 涵泳陶鑄
바른 것 북돋우고 사악한 것을 억제하며 / 扶正抑邪
깨끗한 이를 선양하고 혼탁한 자를 물리치니 / 揚淸激濁
군자의 도가 높아졌으나 / 君子道長
소인들이 미워했네 / 小人所嫉
북문의 화는 / 北門之禍
천고토록 슬퍼할 일로 / 千古同傷
한 세상을 망라하여 / 網打一世
선한 무리 모두 화를 당하셨네 / 善類咸殃
임금과 신하 의리가 막중한데 / 君臣義重
해는 저물고 하늘은 어둑한데 / 日暮天昏
의대 속의 유소는 / 衣帶遺䟽
신명에게 질정할 수 있네 / 可質明神
고요한 저 미원은 / 窈彼迷源
양현이 점지한 곳 / 兩賢攸卜
산 높고 물 맑아 / 山高水淸
정을 기르고 주역을 연구했네 / 習靜硏易
마을 사람들이 추모하여 / 鄕人追慕
여기 서원을 건립하고 / 于此建院
삼백 년을 이어서 / 垂三百年
삼가 제사 올렸네 / 惟謹享薦
서원이 철폐되어 경현단 설치했으나 / 院廢以壇
경현단에도 제향하지 못하여 / 壇亦乏享
바라보며 의지할 곳 없으니 / 瞻依靡所
후학이 어디를 우러르겠는가 / 後學安仰
옛 의식 다시 닦아서 / 復修舊儀
신위를 봉환하고 / 還奉神位
변과 두 하나까지 / 一籩一豆
옛 제도를 따랐네 / 式遵古制
하늘과 땅이 비록 닫혀도 / 天地雖閉
도는 변하지 않으리 / 道則不變
영령께서는 강림하셔서 / 靈庶來歆
많은 선비들의 정성을 흠향하소서 / 多士之奠
[주-D001] 미원서원(迷源書院)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 있는 서원으로, 1661년에 창건되어 1825년 사액되었으나, 1869년 훼철되어 현재 경현단으로 남아있다. 원내에는 중앙에 조광조, 김식을 모시고 그 왼쪽에 김육, 박세호, 남도진, 남언경, 김평묵을 오른쪽에는 이제식, 김창흡, 이원충, 이항로, 유중교 등 12인을 매년 제향한다. 근처에 유명산이 있다.[주-D002] 정우당(淨友堂) : 김식(金湜, 1482~1520)으로,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노천(老泉), 호는 동천(東泉)ㆍ정우당,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이다. 1519년(중종14) 조광조ㆍ김정(金淨) 등 사림파의 건의로 실시된 현량과(賢良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이 되었고, 홍문관 직제학ㆍ홍문관 부제학ㆍ대사성 등에 임명되었다. 조광조와 함께 훈구세력 제거와 왕도정치 구현을 위해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위훈삭제, 향약 실시, 미신타파 등 개혁정치를 실시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기묘사화로 선산에 유배되었다. 그 뒤 신사무옥에 연좌되어 다시 절도로 이배된다는 말을 듣고 거창으로 피했다가 〈군신천재의(君臣千載義)〉라는 시를 남기고 자살했다. 선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주-D003] 성명(性命) : 사람의 천성(天性)과 천명(天命)을 말한다. 성리학에서 진리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로, 여기서는 그가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음을 말한다.[주-D004] 출처(出處) : 벼슬에 나아감과 나아가지 않는 것을 말한다. 1501년(연산군7)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하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다 나중에서야 조광조의 천거에 의해 벼슬하게 된 사실을 가리킨다.[주-D005] 천과(薦科) : 추천에 의해 등용되는 과거의 일종으로 중종(中宗) 때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설치된 현량과(賢良科)를 말한다. 김식은 이때 장원으로 발탁되었다.[주-D006] 여러 어진 이들 : 조광조 등의 사림파를 말한다.[주-D007] 삼왕(三王) : 하(夏)나라의 우왕(禹王), 은(殷)나라의 탕왕(湯王),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을 말한다. 이상시대의 상징이다.[주-D008] 오패(五伯) : 주나라 춘추 시대 5패(五霸)인 제 환공(齊桓公), 진 문공(晉文公), 진 목공(秦穆公), 송 양공(宋襄公), 초 장왕(楚莊王)을 말한다. 힘이 우선인 시대의 상징이다.[주-D009] 북문(北門)의 화 :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홍경주 등이 야밤에 궁궐의 북쪽 문인 신무문(神武門)을 통해서 들어가 임금에게 변을 고하였는데, 이 때문에 기묘사화를 북문지화(北門之禍)라고 하였다.[주-D010] 임금과 …… 어둑한데 : 김식이 자결 전에 남겼다는 시의 구절들이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해는 기울어 하늘은 어둑한데 텅빈 산사위에 구름이 떠가네. 군신간의 천년의 의리는 어느 외로운 무덤에 있는가.〔日暮天含黑 山空寺入雲 君臣千載義 何處有孤墳〕”[주-D011] 의대(衣帶) 속의 유소(遺疏) : 조광조가 죽은 후 김식이 피신했던 곳에서 자결하였는데, 상소문을 옷끈 속에 넣어 두었다. 고을 원이 옷끈 속의 상소문을 거두어 정부에 제출하였는데, 이것을 의대유소(衣帶遺䟽)라 한다. 《중종실록》 15년 5월 27일 기사에 그 전문이 실려 있다.[주-D012] 양현(兩賢) : 김육과 김식을 말한다.[주-D013] 정(靜)을 …… 연구했네 : 김육이 이곳에 회정당(晦靜堂)을 짓고 은거한 일을 말한다. 계곡 장유는 〈회정당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청풍 김백후(金伯厚)가 가평(嘉平) 화개산(華蓋山) 남쪽에 터를 잡아 집을 지은 뒤, 《황극내편(皇極內篇)》의 범수(範數)에 의거하여 점을 친 결과 일지삼(一之三)의 수(守)라는 수(數)를 얻었는데, 그 점사에 ‘군자는 그렇기 때문에 숨어 살면서 조용히 기다린다.〔君子以晦處靜俟〕’라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그 말을 취하여 자신이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회정이라고 하였다.”[주-D014] 서원이 …… 설치했으나 :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이 서원 역시 1869년에 훼철되어 경현단만 남은 사실을 가리킨다.[주-D015] 의지 : 원문은 ‘첨의(瞻依)’로 항상 바라보고 의지한다는 뜻이다. 부모나 존장(尊長)에 대한 경의(敬意)를 나타내는 말이다. 여기서는 양현(兩賢)에 대한 사모의 정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시경》 〈소반(小弁)〉의 “눈에 뜨이나니 아버님이요, 마음에 그리나니 어머님일세.〔靡瞻匪父 靡依匪母〕”라는 말에서 나왔다.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백승철 (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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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양속집 제4권 / 제문(祭文) / 미원서원에 경현단을 중수하고 잠곡 선생을 제향한 글〔迷源書院重修壇享祭潛谷先生文〕
삼가 아룁니다 / 伏以
인조 효종께서 천명을 이으시고 / 仁孝繼天
천제께서 어진 신하를 내리시니 / 帝錫良弼
어진 신하가 / 惟此良弼
국가의 주석이 되셨네 / 爲國柱石
어릴 적에는 은둔을 좋아했고 / 早歲嘉遯
만년에는 바삐 활동하셔서 / 晩許驅馳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돌보며 / 尊主庇民
나라를 걱정하여 사사로움 잊으셨네 / 憂國忘私
마음에 옳으니 그르니 고집함이 없고 / 心無適莫
오직 의를 따라 행동하시니 / 惟義與比
외로운 충성심 찬란히 빛나고 / 炳炳弧忠
홀로 우뚝하여 의지하지 않았네 / 特立不倚
공납의 폐단 백성을 힘들게 하니 / 貢弊厲民
고통이 내 몸에 있는 듯 여겨 / 若恫在躬
힘써 뭇 비방을 물리치고 / 力排衆議
대동법 창설하셨네 / 刱設大同
커다란 병폐에서 이윽고 살아나 / 巨瘼旣蘇
온 나라 모두 평안해지니 / 邦域寧謐
임금께서 그 공적 가상히 여겨 / 后嘉乃績
왕실을 보필하게 하셨네 / 作輔王室
마음과 몸 다 바쳐 / 鞠躬盡瘁
아는 바를 모두 실천하셨는데 / 知無不爲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륜함에 / 論道經邦
일마다 합당하여 상황에 꼭 맞았네 / 動合機宜
세상 사람 모두 병사를 말할 때 / 世皆談兵
홀로 안민을 주장하니 / 獨主安民
베푸신 혜택 넓고 넓어 / 厥施普博
은택이 천년토록 이어지리 / 澤流千春
미원의 골짜기에 / 迷源之曲
우뚝 솟은 서원 / 有翼院宇
온 고을의 여러 어진 선비들이 / 諸賢同郡
덕성처럼 모였네 / 德星所聚
위대하신 문의공 / 憲憲文毅
후손에게 모범을 보이셔서 / 貽謨後昆
훌륭한 조상을 본받아 / 象其祖賢
훌륭한 후손 배향되었네 / 配以令孫
세상일 거듭 변화하여 / 世故屢變
서원이 철폐되어 경현단만 남아 / 院撤而壇
제사를 오래도록 모시지 못해 / 奠儀久曠
사림들이 탄식했네 / 士林咨歎
중수할 것을 건의하고 / 建議重修
제단을 청소하여 / 灑掃壇塲
좋은날 가려 제사를 거행하니 / 吉蠲用享
때는 바로 중양절일세 / 時維重陽
제기에 좋은 제수 가득하고 / 籩豆有嘉
제례의식 정연하니 / 威儀秩秩
영령께서 강림하셔서 / 靈其來格
향기로운 제물 흠향하시옵소서 / 歆此芬苾
[주-D001] 잠곡 선생(潛谷先生) : 김육(金堉, 1580~1658)으로,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시호는 문정이다. 1649년(인조27) 5월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사헌이 되고 이어서 9월에 우의정이 되자, 대동법의 확장시행에 적극 노력하였다. 1654년(효종5) 6월에 다시 영의정에 오르자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노력했다. 시ㆍ문을 모은 《잠곡유고(潛谷遺稿)》ㆍ《잠곡별고(潛谷別稿)》ㆍ《잠곡유고보유(潛谷遺稿補遺)》ㆍ《잠곡속고(潛谷續稿)》가 전한다. 그 외 《기묘록(己卯錄)》ㆍ《잠곡필담(潛谷筆談)》 등이 있다.[주-D002] 주석(柱石) : 기둥과 주춧돌이다. 즉, 국가(國家)의 중임을 진 사람을 비유(比喩)한 말이다.[주-D003] 어릴 …… 활동하셔서 : 김육은 1611년(광해군3)에 증광 별시에 합격하였지만 조정에서 뜻을 펼치기 어렵다고 느끼고 1613년 물러나 은둔생활을 시작하고, 1623년(광해군15) 인조반정이 있은 직후인 43세가 되어서야 다시 조정에 나갔다.[주-D004] 마음에 …… 행동하시니 : 《논어》 이인(里仁)에 “군자는 천하에 있어서 가한 것도 없고 가하지 않은 것도 없다.〔君子之於天下也無適也無莫也〕”라는 말에서 나왔다.[주-D005] 공납(貢納)의 폐단 : 공납은 왕실과 중앙관청의 용도와 각 지방관청의 수요에 충당하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그 지방의 토산물을 수취하는 세금제도의 하나이다. 조선 전기의 공납제는 국가의 재정이 부족할 때 별공(別貢)의 형태로 더 거두어들이는 가정(加定)과 다음해의 공물을 미리 상납케 하는 인납(引納) 등의 폐단이 심했다. 또 생산되지 않은 공물이나 농가에서 만들기 어려운 가공품(加工品) 등을 공납해야 할 경우에는 현물을 사서 바쳐야 했다. 그리고 이를 기회로 중간에서 이득을 취하는 상인 혹은 하급관리들이 등장하여, 그들은 정부와 납공자(納貢者) 사이에서 대납(代納)을 함으로써 많은 이익을 챙겼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불법적인 수단으로 농민의 상납을 막기까지 하는 방납(防納)의 폐해를 낳았다. 16세기 후반 이래 방납은 농민의 부담을 크게 증가시켜 농민경제를 파탄시키는 최대의 고질(痼疾)이 되고 있었다. 이에 방납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마침내 현물 대신 당시에 화폐기능을 하던 미곡으로 거두는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되게 되었다.[주-D006] 대동법(大同法) : 조선 중ㆍ후기에, 여러 가지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납세 제도이다. 방납(防納)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하여 이이(李珥), 유성룡(柳成龍) 등이 제기하였으나, 1608년(광해군1)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주장에 따라서 우선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시행되었고, 이후 찬반양론의 격심한 충돌이 일어나는 1623년(인조1)에는 강원도에서 실시되었다. 그리고 17세기 중엽에는 김육(金堉)의 주장에 따라 충청도ㆍ전라도ㆍ경상도의 순으로 확대되었고, 1708년(숙종34)에 황해도까지 실시됨으로써 평안도ㆍ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데 100년이란 시간이 걸린 것은 새로운 토지세인 대동세를 부담하게 된 양반지주와 중간이득을 취할 수 없게 된 방납인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었다.[주-D007] 도를 …… 경륜함에 : 보통 재상의 직무를 비유할 때 쓰는 표현으로, 《서경》 〈주관(周官)〉에 태사(太師)ㆍ태부(太傅)ㆍ태보(太保) 등 삼공(三公)을 세워 “도를 논하고 나라를 경륜하며 음양을 섭리하게 한다.〔論道經邦 燮理陰陽〕”라는 말이 나온다.[주-D008] 세상 …… 주장하니 : 김육은 정묘호란 직후인 1627년(인조5)에 평안도ㆍ황해도의 사정을 논하는 〈논양서사의소(論兩西事宜疏)〉를 올려, 전쟁의 참화와 각종 잡역의 부담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두 지역 백성을 살리기 위한 종합적인 대책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전쟁 직후인 당시의 과제는 백성을 아이 돌보듯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구체적으로 전쟁에 지고 도망한 군졸을 용서해 주고, 그들을 성 쌓는 데로 동원하여 기력을 고갈시키지 말 것이며, 살기가 어려워 고향을 떠나는 백성을 억지로 붙잡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원망을 품은 백성을 안정시켜 민심을 얻은 다음 농사짓는 것과 군사 일을 분리하고(兵農分離), 비어 있는 땅에다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등 장차 오랑캐가 다시 공격할 때를 대비한 방책을 제시하였다.[주-D009] 덕성(德星) : 목성(木星)으로, 상서(祥瑞)로운 표시(表示)로 나타나는 별이다. 서성(瑞星)이라고도 한다. 현인(賢人)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주-D010] 문의공(文毅公) : 김식(金湜, 1482~1520)으로,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노천(老泉), 호는 동천(東泉)ㆍ정우당, 시호는 문의(文毅)이다.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 사람이다. 1519년(중종14) 조광조ㆍ김정(金淨) 등 사림파의 건의로 실시된 현량과(賢良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이 되었고, 홍문관 직제학ㆍ홍문관 부제학ㆍ대사성 등에 임명되었다. 조광조와 함께 훈구세력 제거와 왕도정치 구현을 위해 정국공신(靖國功臣)의 위훈삭제, 향약 실시, 미신타파 등 개혁정치를 실시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기묘사화로 선산에 유배되었다. 그 뒤 신사무옥에 연좌되어 다시 절도로 이배된다는 말을 듣고 거창으로 피했다가 〈군신천재의(君臣千載義)〉라는 시를 남기고 자살했다. 선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주-D011] 훌륭한 …… 배향되었네 : 본래 미원서원은 김식(金湜)과 조광조(趙光祖)를 추모하기 위해 1661년 건립된 곳인데, 1668년에 김육(金堉)을 추가로 배향하게 되었음을 말한다.[주-D012] 세상일 …… 남아 :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이 서원 역시 1869년에 훼철되어 경현단(敬賢壇)만 남은 사실을 가리킨다.[주-D013] 중수할 것을 건의하고 : 1919년에 지방 유림들이 경현단(敬賢壇)을 중수하여 제사를 잇게 된 것을 말한다.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 백승철 (역) |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