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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인 그날, 서울 묵정동 민성공업사 지하실은 화창
한 바깥 날씨에 아랑곳없이 눅눅한 습기로 차 있다. 지하실의 그을음 앉은
천장에는 삼십 촉 알전구가 달려 밀폐된 공간을 얼마만큼 밝히고 있다. 민
성공업사가 조전(조선전기)의 영향력 있는 납품 업체라 특선 혜택을 받아
낮인데도 송전이 되고 있다. 지하실은 출입구가 양쪽에 있다. 동쪽 출입구
계단 앞은 통로 만 남긴 채 폐품이 된 변압기와 발전기 따위의 잡동사니가
재였고, 서쪽은 비상 계단이다. 지하실 천장 가운데에 매달린 알전구 아래
헌 책상이 수 개 있고 나무 의자 여럿이 그 주위를 싸고 있다. 책상에 놓
인 소형 무전기가 이따금 금속성 잡음을 흘린다. 통신 요원인 무전사가 무
전기 앞에 앉아 수신기를 귀에 꽂고 단파 무선 내용을 청취하는 참이다.
책상 주위 의자에는 예닐곱 사람이 제가끔 편한 자세로 앉아 무전기를 주
의 깊게 보고 있다. 서울시당 당기관지 「로력인민」 주필 조민세를 비롯
하여 노동부 간사 민영만. 이론진 요원 성주 걸, 교양부 지도원 곽종결, 부
녀부책 공현숙이다. 노동부 연락책 홍락과 선동부 요원 하나가 앞뒤 출입
구 시멘트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보초를 서고 있다. 민성공업사 주위에는
고물상 용원으로 일하는 김장쇠,마칠구,홍동구, 넝마주이로 위장한 김석 응
변용개가 임무를 맡고 있다. 모두의 표정이 긴장기를 띠어 새앙쥐처럼 눈
이 반들거린다 아무도 말을 꺼내는 자가 없다. 몇은 담배질로 초조함을 달
래어 알전구 불빛 아래 담배 연기가 실타래를 이루어 스멀거린다. 찍찍 잡
음을 내는 무전기와 어느 구석에서 낙숫물이 듣는 소리가 지하실의 정적을
흩뜨린다. "교신이 계속 중단 상태요? 수염꺼칠한 작업복 차림의 성주걸이
무전사에게 묻는다. "열시 정각 '조국전선'에서 파견한 세 동무가 여현역에
도착했다는 소식 이후로 잡히는 게 없는데요." 북선 제의를 반대할 게 뻔
한 이친데 남반부 쪽이 그 호소문을 받아갈 리 있나요 받아가게 버려두지
도 않겠지만." 공현숙이 치마로 무릎을 덮으며 다리를 포개곤 말한다. 모두
긴장을 풀지 못한 채 무전기만 뚫어져라 바라본다. 조민세 역시 책상에 얹
은 손을 깍지끼고 무전기를 주시한다. 깡마른 얼굴에 일주일째 깎지 못한
수염이 인중과 턱을 가린 그의 표정 역시 심각하다 그들은 북선의 '조국통
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에서 제의한 '평화적 조국 통일 추진 제의' 에 따
른 호소문을 남반부 정당과 사퇴 단체 대표들이 접수해가느냐의 여부에 지
금 관심을 집 중하고 있다 호소문을 받아갈 장소는 개성에서 서북방에 위
치한, 삼팔선 경계 지점에서 약 5백 미터 북쪽 경의선 간이역인 여현역이
다. 북조선 조국전선의 제의는 남반부 정권 당국의 반대에 부딪혀 그 실현
이 불가능할 것임을 예측하고 있지만 남조선 측 대응 태도가 역시 궁금할
수밖에 없다, 서울시당은 그 사태 추이를 주목하는 한편 북조선의 조국전
선이 갑자기 취하는 '평화적 통일 공세' 의 취지를 토의하기 위하여 오늘
오전 열시에 제 5호실(민성공업사 지하) 아지트에서 간부책 집회를 갖기
로 했던 것이다. 어제 아침 서울시당 지도부 중앙위원 박태길이 연락원 세
포를 통해 소집 지시를 내린뒤다. 그런데 어젯밤 자정, 박헌영과 이승엽이
이끌고 있는 해주지휘부와 서울시당과의 정규 무선 교신 시간이었다. 해주
지휘부측은 서울시당의 소집을 이미 알고 있기나 한 듯 때맞추어 지령을
하달했던 것이다 10일 오전 열시의 해주측 특별 지령을 명심하라는 내용
이었다. '결정적인 시기에 대비하여 지하 조직의 세포화 , 속도화' 를 가일
층 추진하라는 늘 있어온 지령이 아니더라도 서울시당은 열시에 있을 해
주측 특별 지령을, 조국전선이 남반부측에 제의한 '평화 통일 호 소문' 에
따른 그 어떤 훈령이라 결론내리고 있다. 평양방송은 이틀 전인 8일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남반부 각 정당과 사회 단체 대표가 10일 열시 여현역
에 와서 조국전선측의 호소문을 받아가도록 통보한 바 있었다. '평화 통일
방안' 의 호소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호소문은 서두에서, 미 제국주의 사
주를 받고 있는 이승만 괴뢰 정권을 격렬하게 비난하며 아울러 남조선의
현 정세를 분석 평가하고 다가오는 팔일오 해방 5주년에 남북 조선 인민
은 함에 모여 공동의 해방 기녕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 뒤, 그 구체적
인 통일 방안을 제시했다. 첫째, 8월 5일에서 8일 사이에 남북 조선 전지
역을 통하여 총 선거를 실시하고 통일된 최고 입법 기관을 창설할 것. 둘
째, 8 월 15일 해방 5주년 기념일에 총선거에 의하여 선거된 최고입넙
기관회의를 서울에서 소집할 것. 셋째, 그에 앞서 6월 15일부터 17일에
걸쳐 평화 통일을 원하는 정당 , 사회단체대표자협의회 를 38선과 인접한
해주시 또는 개성시 어느 한 도시에 소집할 것. 이 협의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토의하고 결정을 채택 \할 것. 가, 조국의 평화 통일을 위한
제조건. 나, 최고 입법 기관 총선거 실시와 절차. 다, 총선거를 지도할 중
앙지도위원회의 창설. 넷째, 조국전선 중앙위원회는 남북 조선의 민주주의
제정 당 사회단체대표자협의회 참가 조건을 다음과 같이 제의함. 가, 이승
만.이범석.김성수,신성모,조병옥,채병덕,백성욱.윤치영,신흥우 등을 대표자협
의회에 참가시키지 말 것 나, 조국 통일 사업에 '유엔한국위원회' 의 간섭
을 용허하지 말 것. 다섯째, 남북 대표자 협의외 사업 기간과 총선거 실시
기간에 남북의 양 정권 당국은 사회 질서 보장에 책임을 질 것. 북조선 조
국전선측의 호소문은 이렇게 다섯 항으로 끝낸 뒤, 전달 방법과 절차로 마
무리되어 있었다. 호소문을 전달하기 위해 북조선측은 「조국전선」지 기
자를 포함하여 세 사람을 6월 10 일 오전 열시에 삼팔선 비점의 여현역
으로 파견한다. 그리고 호소문을 전달받을 남조선의 정당 및 사회 단체를
규정하고 있었는데, 이승만, 김성수 계열인 국민당 , 민주국민당-독촉국민
회 등을 제외한 여러 정당과, 과학 문화,종교,교육을 포함한 사회 단체가
열거되어 있었다. "열시가 지났는데도 남조선측이 여현역에 나타나지 않았
다면 호소문을 접근해갈 의사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조국전선측이 미제
앞잡이 반동 정치 단체와 그 무리를 제외시켰을 때, 남조선 경찰 당국이
각 민주 사회 단체에 강귄을 발동하여 참여를 단속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
비하여 여현역을 봉쇄했음이 틀림없습니다 미제 정보국놈들이 북조선 제의
를 묵살하라고 당국에 사주했을 게고." 곽종결이 말한다 갑자기 무전기의
발신음이 -삐 하고 울린다. 모두 귀를 세워 그쪽으로 눈길을 돌린다 무전
사가 해주지휘부로부터 교신한 내용을 받아 양면괘지에 숫자 난수표를 휘
갈겨 적는다 무전사가 아라비아 숫자로 된 난수표를 조민세에게 넘긴다.
난수표 해독은 박태길과 조민세가 숙지하고 있다. "여현역에는 아직까지 남
반부 대표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는군요. 오늘도 아침부터 북조선 전역
에서는 평화 통일 호소문을 지지하는 민중 집회가 대대적으로 열리고 있답
니다. 남조선 전 지하당원과 노동자 농민의 지지 궐기도 아울러 세차게 독
려하고 있습니다." 조민세가 침통하게 말한다. 조민세의 마지막 말이 지하
실의 분위기를 시들하게 만든바. 고대하던 특별 지령이란 게 겨우 그 독전
이란 말인가, 하는 표정들이다, 의자 등받이에 늘어져 한숨을 내쉬는 자도
있다. 만약 남반부의 인민 대중이 그 평화 통일 호소문의 지지를 귈기 했
다간 모조리 공산주의자로 지목되어 경찰서로 연행당하겠지만 그런 투옥까
지 각오하고 궐기한다는 전제 조건에 앞서, 무엇보다 남반부 인민 대중은
북조선측 제안조차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북조선측이 연 이틀에
걸쳐, 미제와 남조선 정권 은 북침 흥계를 포기하고 평화 통일 호소문에
찬동하라는 대대적인 군중 대회를 열고 있는 반면, 남조선측 인민은 남과
북 정보에 깜깜하므로 침묵할 수밖에 없다. 물론 거기에는 남반부 남로당
지하당의 적극적인 홍보가 없었고. 남조선 당국이 언론의 보도 관제를 통
해 북조선 제안 사실을 일체 신문이나 방송에 곧이곧대로 발표하지 못하게
하고 그 정보조차 왜곡하여 흘리기도 했다. 남조선에서 남로당은 이제 당
이라 부를 수도 없을 만큼 산 산조각난 데다 모든 선이 끊겨 인민 대중을
움직일 능력이 전무 \한 실정이다. 또한 언론 매체는, 북의 괴뢰 정권이
남침 야욕 망상을 버리지 못해 순수 애국 정당을 배제한 총선거 실시를 제
안했다며 , 그것도 방송과 신문에서 짤막하게 언급하고 말았다 해주지휘부
는 8일 자정의 정규 무선 연락을 통해 서울시당과 지도부에, '조국전선의
평화 통일 호소문 지지를 선동하라' 는 지령을 내린 바 있었다. 그러나 지
금 서울시당파 지도부란 자체 도생도 급급한 형편이라 대중 동원 능력은
기대 밖의 주문인 셈이다. 조민세만 하더라도 지난 2일, 남대문시장에 있
은 서울시장파 지도부 주요 연락 거점 중 하나인 백광세탁소가 서울시경
특수사 찰계의 급습을 받아 연락원 방기오 방기철 형제가 체포됨으로써 신
변의 위기를 감지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수상해 보이는 자들이 드나
든다는 이웃 주민의 신고로 경찰이 세탁소를 덮쳤을 때 용케 그 시간에는
아무도 그곳에 없었기에 다행이었다. 남대문 군복 수리점 아지트도 당분간
폐쇄해야 할 형편이고, 서울시당 간부조차 이제 대낮에 얼굴 들고 거리를
활보하기 힘든 몸이 되고 만 셈이다 연락책홍락은 조민세에게, 잡혀간 방
씨 형제가 고문에 못 이겨 실토를 하면 곤란할 테니 얼마 동안 피신하라고
말했다 조민세는 한 울타리 안에 사는 식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벌써 닷때
째 민성공업사 지하실에 잠복하며 「로력인민」 다음 호 원고나 교열하고
지내는 형편이다. 그의 식사는 민성공업사 사무원 함군이 비밀리에 날라다
주고 있다 "해주지휘부는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사경을 헤매는 중환자에
게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라는 꼴이니. 소리 동지(김용팔)가 서 울 실정을
자세히 보고했을 텐데도 그렇게 차막눈들인가." 공현숙이 한동안 침묵을
깨고 이기죽거린다. 김용팔이 김삼룡이 주 하 피체에 따른 경위와 책임 추
궁, 서울시당과 지도부 뒷수습을 위해 남파되었다. 다시 월북한 지도 벌써
스무 날째이다. "꼭 그렇게만 볼 순 없겠지요. 북조선 군중 대회가 북로당
측 동원 집회란 점을 감안할 때 해주지휘부도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남반
부 실정을 알면서도 과장된 선전을 할 수도 있으니간요. 해주에서 지난 사
월에 하달된 남조선 빨치산 투쟁의 혁혁한 성과라는 전과보고서도 북로당
측에 내보이는 선전 효과라면 모를까.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남반부 실정
관 다르지 않습니까." 성주걸의 차분한 설명이다. 작년 6월에 '남조선민주
주의민족전선' 과 '북조떤민주주의민족전선' 이 통합되고 양쪽에 소속된 단
체를 망라하여 '조국통일 민족주의전선,' 줄인 말로 '조국전선' 이 새로 결
성되었다. 한편. 남로당과 북로당이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으로 이름을 바꾸
었다. 그러나 말이 합당이지 내용을 뜯어보면 남로당이 북로당에 흡수된
감이 없지 않았다. 북에서의 남로당은 북로당의 막강찬 실새에 밀려 그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남조선 쪽 사정으로 보자면 47년에만
해도 37만 당원을 자랑하던 남로당은, 미 제국주의의 든든한 지원을 받는
이승만 정권의 가호한으로 대량 탈강과 검거 사태의 악순화을 겪어왔던 터
이다.
9월 22일 23일에 걸쳐 서울시당 지도부 간부는 물론 구당 조직책이
무더기로 집단 전향하고 10월에는 근로인민당 재수습과 '조 국통일민주주
의전선' 확장 임무를 띠고 남파된 공산당 간부였던 정백이 체포되고 그는
11월에 사상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보도연맹 명예 간사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배신으로 남로당 지하 조직이 낱낱이 밝혀져 체포 구금이 잇달았다.
6월에 조직된 보도연맹은 10월과 11월에 걸쳐 자수 기간을 설정하고 지
하 남로당원의 전향 공작을 통해 내부로부터의 와해를 시도한 결과 전국적
으로 30만 명. 서울시민도 1만 7천 명을 연맹원으로 가입시키자, 남로당
은 자멸의 길을 재촉했다. 올해에 들어서 굵직한 사건만도 서울시당 부녀
부 핵심 인물 김수임의 피체. 북로당에서 독자적으로 남파시킨 거물 첩보
원 성시백의 피체, 이어 서울지도부 특수 공작부 책임자인 김형육의 변절
로 남로당 남반부를 실제로 이끌던 김삼룡과 이주하의 피체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김과이의 피체는 그나마 남로당의 지하 생존에 결정적인 타격
을 주고 말았다. 남로당이 그렇게 궤멸되기까지는 여러 차례 시도한 각종
단체의 노동조합 파업 성과 미약, 각 지역의 폭력 무력 투쟁의 실패와 남
반부 경찰의 지속적이고도 조직적인 탄압과 회유책에 원인이 있겠지만, 당
내부 사정 역시 머리와 손발이 따로 놀고 있다는 데에도 문제가 있었다.
남로당이 총지휘본부를 삼팔선 이북 해주에 두고 있다. 그러므로 해주지휘
부는 군졸 없는 장수처럼 물적 지원 없이 14호실 무선 지령을 통해서만
있음이 요즘의 사정이다. 서울시당과 지도부는 있다는 점이 남로당에 목청
을 돋우 그럴 수밖에 없는 해주측 실정을 직접 목격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
작할 수 있다. "위원장(박헌영) 선생의 고군분투도 이해는 가지만 활동 터
전과 부족 없이 언제까지 이빨 빠진 호랑이로 버티어낼 참인지 모르겠구
려." 민영만이 가시 있는 말을 뱉는다. "민동무는 이 마당에 무슨 대안이
있어 그런 말씀 합니까? 공현숙이 따지듯 묻는다. "내 성질이 개떡 같아 단
도직입으로 말하겠소, 위원장 선생이 북조선에서도 실세를 얻자면 남반부
를 살려내야 하고, 그 길은 남반부를 해방시지는 수단밖에 없다고 믿소." "
남반부를 해방시키다니? 누군가의 입에서 이 말이 튀어나오고, 무슨 뚱딴
지 같은 소리냔 듯 모두 벙벙한 얼굴로 민영만을 본다 "제주도 인민 항쟁
과 여수 , 순천에서 국방군 봉기도 투쟁 자체의 성과는 있었지만 성공했다
고 평가할 수 없잖습니까. 노조 파업도 그나마 이젠 동지 이탈이 많아 시
들해졌고. 이런 마당에 무슨 힘으로, ,,,," 성주걸이 말꼬리를 사린다. "내 말
은 그런 국지전 게릴라 투쟁이 아니라 삼팔선을 민족 해방, 통일의 이름으
로 깨부수는 전면전을 말한 것이오." 민영만의 발언에 좌중은 두번째 얻어
맞은 듯 아무도 대꾸하지 못한다. 예상을 뛰어넘는 말이고, 현 정세로서 남
북 조선의 전면적 전쟁은 탁상공론에 불과한 공상이다 이승만이 미 제국주
의 원조에 의지해 군사력을 착실하게 증강시키며 북진 통일론을 외치고 있
지만 아직은 실전 결의보다 정치적 선전 내지 반대 세력 탄압에 더 목적을
두고 있음을 모두가 인지하고 있다. 또한 민영만의 발언은 지금 조국전선
의 이름으로 발표된 평화 통일 제안 호소문과도 전면 위배된다. "다른 사정
이 있는지 아직 박위원께서 도착하지 않았으나 마냥 기다리기도 무엇하니
예비적으로 오늘 안건의 의견을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민세가 손목
시계를 보곤 비관론에 차 있는 지하실 분위기를 돌린다. "성동지 의견부터
들어보도록 합시다." 곽종결이 제안한다. "제가 보기에 조국전선의 평화적
통일 제의는 두 다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겠습니다." 오래 여물어온 생
각인 듯 성주걸이 발언을 시작한다. "그 한 가지는, 국제 정치 무대를 겨냥
하여 북 선 당국이 통일 문제에 먼저 헤게모니를 잡자는 선제 공격 측면
입니다. 세계 무대는 우방 쏘련과 미제가 냉전 논리를 앞세워 날로 첨예하
게 대립하고 있으며 중국 공산당이 대륙을 제패한 이 시점에 즈음하여, 조
선 통일 문제도 양대 세력 헤게모니 쟁탈에 주요 당면 과제가 아닐 수 없
습니다. 그러므로 조국전선이 평화적 통일 방안을 먼저 제창함으로써 남반
부에 상주하는 유엔위원단의 축출 효과는 물론 북조선이 국제 무대에 기득
권을 선포하 는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국내적 사정으로는 어
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김삼룡 비서와 이주하 선생을 비롯한 구금된 애국
인사를 구출해야 한다는 당 면목입니다. 지난달 이십사 일 조국전선 중앙
위원회가 발표한 성명서에도 불구하고 남반부 사법부는 재판을 속결로 진
행하여 두 지도자에 사형 언도를 내리고 말았습니다. 조선 공산주의 투쟁
사에 혁혁한 공적을 남겼고 서울시당, 아니 남조선노동당을 이끌어오신 두
지도자의 생명이 이제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성주걸이 잠시
말을 끊는다. 3월 27일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되고 서울시당과 지도부가
완전히 와해되었다는 소식은 해주에 있는 남반부 노동당 지휘부에게 결정
적인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박헌영과 이승엽은 5월 2 일에 입북한 안영
달과 보용복으로부터 김과 이의 피체 경위와 남반부 정세를 보고받고. 그
보고의 현지 확인차 김용팔까지 서울로 내려보냈던 것이다. 그즈음부터 해
주지휘부는 김과 이의 구명 방법을 다각도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5
월 24일 조국 전선 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남선 당국은 그들을 고문 또
는 처단하지 못하게 하는 방편으로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성명서는 '공화국 남반부의 애국적 지도자들과 애국적 인사들에 대한 이승
만 매국 도당의 야수적 학살과 박해에 관하여' 라는 긴 이름으로 되어 있
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3월 27일 열렬한 애국 투사 김삼
룡과 이주하를 체포하고 고문과 박해를 가하고 있다. 둘째, 김과 이는 일제
때부터 애국 운동을 해온 독립 투사이다. 셋째, 이승만 일파가 이들을 체포
한 것은 매국 매족적 음모를 수행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기 때문 이다
김삼룡과 이주하의 체포와 고문에 대하여, 그리고 수천 수 만의 애국적 인
사들을검거 ,고문, 학살한 데 대하여 이승만도 당은 반드시 대답해야 하며
인민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한 애국 자를 체포하고 학살하면 몇백 몇천의
애국적 인민들이 그들 뒤 를 이어 궐기할 것이란 점을 기억해두라.[ ~조국
전선에 망라된 전체 정당.사회 단체의 당원 , 맹원파 인민은 미 제국주의의
침략 정책을 걸음마다 파탄시키며 이승만 도당을 타도하고 조국의 평화 통
일을 쟁취하기 위해 한층 치열한 구국 투쟁을 전개할 것이며 감옥과 고문
실에서 신음하는 애국적 지도자와 그 인사를 석방하기 위한 각종 형식의
투쟁을 다할 것이다 조국전선 중앙위원회가 선동적인 과격한 어휘를 동원
하여 협박에 가까운 성명서를 평양 방송을 통해 발표해도 남조선은 '5. 30
선거' 운동이 한창이라 당국이 그런 성명서에 관심을 둘 짬이 없었다. 그리
고 보름 남짓사이, 조국전선은 '각쏭 형식의 투쟁' 에서 정반대로 선회하여
갑자기 평화 공세를 취해온 것이다. "현 정세로서는 무력 투쟁만으로는 두
지도자를 구명할 수 없으므로 조국전선측은 처형을 늦추어보려고 평화통일
호소문을 발표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성주걸이 말을 맺는다. "평화통일
호소문을 두 분 구출과 결부시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석해캬 할까요? 공
현숙이 주위를 둘러보며 묻는다. "남반부에서 투쟁해온 무력 항쟁 노선의
수정으로 간주해야 하지 않을까요," 곽종결이 조심스럽게 말한다. "이번 남
반부 선거 결과에서 북조선이 크게 고무받은 게 틀림없습니다. 국민당 . 민
국탕 파쇼 집단 후보들이 그 막대한 뇌물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거 탈락되
지 않았습니까 그리도 성시백 동지와 함께 구속된 조소앙 선생이 전국 최
고 득표를 했고 윤기섭 후보까지 당선했다 는 점이 그 단적 증거입니다.
당국은 조소앙 선생을 구속하며 빨갱이 간첩이라고 신문지상과 방송을 통
해 그렇게 떠들어댔는데 도 서울 성북구 인민은 삼만 사천여 몰표로 선생
을 밀었으니깐요. 이제 남반부 인민의 마음이 이승만 괴뢰 정권과는 완전
히 등을 돌렸고 오히려 민족주의 좌파를 지지하고 있음을 북선 또한 확인
했습니다 " 곽종결의 목소리가 어느덧 열기를 띤다. 국회의원 선거 결과
분석은 모두가 수긍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새삼 강조해도 귀가 즐거운 소리
이다. "인구 비례로 보자면 북조선이 남반부 절반을 겨우 상회하는 열세인
데 조국전선이 최고입법회의 구성을 위한 남북 조선 총선거를 실시하자고
과감하게 제의하는 근거가 바로 전 조선 인민 투표 대결에서도 이길 수 있
다는 자신감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쉬잇'무전사가 손을 흔들며 곽종결의
말을 제지시킨다. 무전기가 단파 승신을 보내오고 있다 무전사가 양면괘지
에 빠르게 난수표를 기록해나간다. 책상 주위의 눈이 그 숫자에 쏠린다. -
드디어 중앙당 십사호실 특별 지령입니다? 무전사가 득의의 표정으로 외친
다. 중앙당 제14호실은 해주에 있는 '대남유격사업지도부' 의 약칭이다 무
전사는 잠시 끊겼다 이어지는 암호 숫자를 써나간다. 송신이 끝나자 조민
세가 난수표를 받아든다. -이십이와 에이제로가 안전하게 착점했다는 소식
이오. 접선 장소는 주파수 팔백십오로 에이제로가 직접 연락을 취한답니다.
-이십이와 에이제로? 공현숙이 눈을 크게 뜨고 조민세를 바라 본다. "이중
업 동지와 안영달 동지요." 조민세의 말에 지하실은 금방 흥분으로 들뜬다
환성을 지르지 않았으나 전등 불빛 아래 모두의 표정이 가뭄 끝에 비 만난
푸새처럼 싱그럽게 피어난다 풍비박산이 된 서울시당과 지도부에 드디어
환로가 열림을, 결코 해주지휘부가 서울시당을 난파 상태로 버려두지 않는
다는 서광을 한순간에 느끼는 그런 얼굴이다. 조민세만이 이렇다 할 표정
이 없다. 그는 성냥을 켜 암호문을 태우며, 해주지휘부가 둘을 다시 남파시
키는 목적을 따져본다 그러나 서울시당과 지도부의 재건을 위한 목적 이외
다른 조 건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이중업은 남로당 조직부장 겸 중앙군사
부장으로 암약하다 작년 봄 서울시 경찰국에 체포되었으나 심문 도중 용
케 탈출하여 곧 해주로 월북했다. 서울지도부 중앙위원이었던 안영달은 작
년 말 부산으로 내려갔다 불심 검문을 당해 경남도경에 체포되었으나 치안
국 사찰과 중앙분실장 백형복을 매수하여. 백형복은 물론 역시 중앙위원이
었던 조용복과 가족 모두를 데리고 월북해서 해주에 머물러 있었다. 해주
지휘부는 서울지도부의 실력자렸던 그 둘을 다시 남파시켰으니 그들은 틀
림없이 새로운 지령을 하달받고 왔음이 분명하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
으로 조국전선의 평화 통일 호소문을 두고 그 진의를 밝히기 위해 설왕설
래할 필요가 없는 것이. 둘은 그 발표 경위와 대책을 이미 숙고하고 남파
되었음이 틀림없다. 약속된 시간 삼십여 분이 지났는데도 중앙위원 박태길
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하실 안은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듯 갑자
기 활기를 띠며 부산하다. 침울하던 분위기가 그치고 모두 두 간부를 맞기
위한 여러 안건을 두고 새로운 기분으로 의논을 맞추기 시작한다 오른쪽
출입구 벽에 붙은 벨이 길게 한 번 울린다. 위험하지 않은 누군가 도착했
다는 신호다. 잠시 뒤, 홍락의 안내를 받으며 안경 낀 깡마른 박태길이 파
나마 모자를 벗어 부채질하며 지하실 계단을 내려온다. "이제 나도 또 피신
해야겠는걸. 아홉시에 집을 나서다보니 대문 밖에 수상한 자가 얼정거려.
당최 그놈이 자리를 떠줘야지. 소피 보러 가는 짬에 얼른 도망쳐나왔지만,
아차했으면 원주로 내려가지도 못하구 낭패당할 뻔했어." 땀이 찬 와이셔
츠 소매를 걷어올리며 박태길이 말한다, 그는 작년 8윌 25일 조직부장
대리 윤순달이 피검되어 서울지도부 특수부가 일망타진된 뒤부터 올 봄까
지 시골집 강원도 원주에 은신해 있었기에 가까스로 잡히지 않은 중앙위원
중 유일한 인물이다.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박태길에게 해주지휘부의 특
별 지령을 보고할 동안. 사업이 바빠 늦었다며 정장 차림에 넥타이 맨 안
진부가 지하실로 내려온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어 번질거리는 이마의 땀을
닦는다.이와 안이 서울로 다시 들어온다? 역시 해주지휘부가 우릴 버려두
진 않았군. 서울시당은 물론 지도부도 이제야 활로가 트여 . 역시 이 물에
놀아본 실력자가 진두 지휠 해야 길이 뚫리지. 여름 들고 보다씨피 뭐 되
는 일이 있어야지 " 박태길이 서울시당 조직책 조민세의 무능을 두고 빈정
거린다 조민세의 얼굴이 굳어지며 안색이 핼쑥해진다. -박위원님, 되는 일
과 안 되는 일이 뭐며, 지난 몇 년 사이 된 일은 또 뭡니까? 조민세가 맞
받아나서려는 눈치를 채고 안진부가 대신 나서서 박태길에게 대들 듯 말한
다. -안부장이 왜 나서오? 조부장을 추천한 책임을 통감한 모양이 지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이러다 쌈 나겠어요. 왜들 이래요. 만나면 으르렁거리니.
힘들수록 힘을 합쳐야지요." 이럴 때 언제나 수습책으로 나서는 공현숙이
다. -맞아요. 토론을 계속하시오." 계단에 쭈그려앉아 담배를 태우던 홍락
이 참견한다. 지하실 간부들은 머리를 맞대고 남반부 현 정세와 교각 상태
에 빠진 서울시당과 지도부의 활로를 두고 다시 토론에 들어간다. 재조직
점검으로 고군분투하는 서울시당 현황을 남파되는 두 간부에게 보고하기
위한 자료도 만든다. 그 서기 역할은 성주 걸이 맡는다. 그들은 점심도 거
른 채 회의에 열중하는 한편 남반부로 내려와 무선으로 띄우게 될 안영달
과 이중업의 접선 연락을 기다린다. 무전사가 수신기를 귀에서 메지 않고
청각을 곤두세우기 여러 시간, 오후 두시 오십분에 가까웠을 무렵이다. 무
전사가 조통(조선통신사),해주 중앙당 14호실, 평양방송의 주파수를 맞추
자 여 현역에서 총격전이 있다는 평양방송의 긴급 뉴스를 듣는다 평양방송
은 그 동안, 오전 열시에 조국전선에서 파견한 세 명이 호소문을 지참하고
여현역에 도착하여 대기했으나 지정된 장소에 남반부측 대표가 오후 두시
까지 나타나지 않았고, 삼팔선 접경 지점에 십수 명의 사복 입은 사람과
스무여 명의 국방군이 나타났을 뿐이라고 평양방송 아나운서가 말한다. 그
러자 오후 두시 사십오분, 삼팔선 접경 지역의 숲속에서 오백 미터 떨어진
여현 역사를 향해 국방군이 집중적인 사격을 개시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북조선 인민군은 대항 사격을 하지 않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철
저한 방위 임무에 총력을 경주하고 있음을 북조선 애국 인민들에게 알려드
립니다. 호전적인 이승만 괴뢰 도당 앞잡이 국방군이 만약 삼팔선 경계 지
점을 넘어 여현 역사를 진격해 온다면 우리 인민군 전사들은 수백 수천 배
로 응징할 것 임을 엄중히 경고합니다. 두시 오십사분, 지금 이 시간도 남
반부 국방군은 박격포까지 동원하여 수천 발의 포탄과 총알을 퍼붓고 있으
며, 호소문을 전달받기 위해 여현역에 파견된 이인규 동무가 적 총탄에 가
벼운 부상을 입었다는 긴급 보고가 땅금 방송국에 접수되었습니다... " 평
양방송은 계속 여현역의 총격 자태를 보고하는 사이마다 군가를 흘려보낸
다. 방송만 듣고 있다면 마치 전쟁이라도 난 듯하다. 평양방송은 국방군 집
중 사격이 네시 십분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뒤부터 다섯시 이십분까지는 산
발적인 사격이 있었다고 전한다
안영달이 팔백십오 주파수를 이용하여 서울시당에 접선 연락을 해오기는
오후 여섯시 삽십분경이다. 6월 들어 삼팔선 일대의 긴장이 부쩍 고조되고,
그 경계가 매우 삼엄해져 이중업과 안영달은 해주에서 모터를 정착한 작은
고깃배 거루를 타고 내려와 김포군 금잔면 해안에 상륙했다. 새 벽 세시경,
칠흑의 밤이었다. 둘은 오유리 뒷산까지 나와 날이 밝기를 기다려, 이중업
은 면서기나 선생 차림인 반소매 노타이에 낡은 가방을 들고, 안영달은 등
짐 진 건어물 행상으로 위장했다. 안영달은 소형 무전기와 난수표를 소지
하고 있었다. 둘은 낮 동안 백오십 미터 남짓 거리를 두고 쉬엄쉬엄 김포
클을 질러왔다. 위조한 남반부 도민증과 시민증을 소지하고 있었으나 검문
을 염려하여 한강 인도교를 이용하지 않고 신곡리 나루에서 나룻배로 한강
을 건넜다 접선 장소는 마포구 도화동 골목 필숙이 자리잡은 자그마한 세
칸 한옥이다 그 집은 민주학생동맹 교양과 강사요 보성중학교 교사인 함정
국 자택이다 이중업과 안정달이 접선 가옥에 도착하기로 약속한 오후 여덟
시 전에 이미 조민세 ,박태길,성주걸,안진부,공현숙이 안방에 미리 대기하
여 둘을 기다린다. 신발은 모두 방안에 들여놓았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
여 연락원 세포를 골목 입구 한길에 셋, 중간에 하나, 집 앞에 둘을 경계조
로 세워두었다. 날이 어두워져 전등불이 들어와서야 둘은 누색을 거쳐 도
화동 어귀로 들어선다. 전차 종점 건너 난민 주택이 밀집한 언덕길로 오르
자, 마중 나갔던 함정국이 둘을 만난다 함정국을 앞세워 이중업과 안영달
이 방으로 들어오자, 서울시당과 지도부 요원은 모두 일어나 두 간부를 반
갑게 맞는다. 얼굴이 익은 사이이므로 모두 굳게 악수를 나누고, 그 동안
고생이 많았다며 위로의 말이 오고 간다. 이중업과 박태길은 서고 껴안고
등을 다독거렸고 공현숙은 재회에 감격하여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다. 지
하 활동을 하는 자들이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순간은 죽은 자가 살아 돌
아온 듯 그렇게 반가울 수 없다. "고생이 얼마나 심한지 얼굴만 봐두 훤하
구려, 박동지는 안경 도수가 더 높아진 것 같구, 성은 버썩 더 말랐구 공여
사 얼굴은 주근깨투성이구려 . 「로력인민」 주필을 맡아 수고가 많다는
조동지 소식두 해주에서 잘 듣구 있었어요." 마흔 중반이지만 머리카락이
희끗하여 중늙은이로 보이는 이중업이 말한다. "범 아가리로 다시 돌아왔지
만 이제야말로 서울시당과 지도부의 살 길이 트일 거요. 조국 해방의 혁명
날이 조만간 닥칠 것이니, 국토 완정의 그날까지 합심하여 당 재건에 열성
을 다 합시다." 굵은 몸집에 수염 더부룩한 안영달이 웃으며 말한다. 낡은
밀짚모자에 후줄그레한 조선옷을 입은 그는 영락없는 행상 장수다 이중업
은 서울시당 책임자 격으로, 안영달은 지도부와 중앙위 원회 책임 비서로
정치 공작 임무를 띠고 파견되어왔다고 자기네 목적을 밝힌다. 둘은 북조
선의 현 상황과 해주지휘부의 작금 소식을 털어놓았는데, 놀랄 만한 내용
을 담고 있었다. 둘은 번갈아가며 다음과 같은 새로운 정보와 지령를 전하
여 모인 동지들을 감격으로 설레케 한다. 북조선은 지금 남반부에 적극적
인 평화 대공세를 취하는 한편 만약의 돌발 사태를 대비하여 전국 총동원
령을 내려 강력한 '남반부 통일 혁명 전선' 을 구축하고 있다. 돌발 사태란
무력 북진 통일을 연일 호언하고 있는 이승만 파쇼 정권의 전면적인 도발
을 뜻하며, 6윌 들어 삼팔선 경계 지점에는 예비적 전쟁 성격을 띤 잦은
뚝지전이 간단없이 계속되고 있다. 작년 유월 삼십일분 터 칠월 일일에 걸
쳐 북로당과 남로당이 통합되어 조선노동당을 결성했을 때. 대내외적으로
공식작 발표를 하지 않았으나 중앙 위원으로 위원장에 김일성, 부위원장에
박헌영, 비서에 허가 ,이승엽, 김삼룡 세사람이 임명되었다. 다섯 명 중남
로당 출신이 세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북조선에서의 남로당 기반은 우리 두
사람이 월북 전에 우려했고 여러 동지들이 염려했던만큼 그 상황이 나쁘지
않으며 그 지지 기반이 비교적 확고하다. 특히 남반부 총책 김삼룡을 당비
서로 추대했다는 점은 그만큼 남반부 남로당을 북조선에서도 인정해주는
셈이다. 그러므로 김삼룡 비서와 이주하 부책의 구명끈 어떤 대가를 치르
더라도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의견이 조국전선 중앙위원회에서 일치를
보았다. 또한 지금 북조선은 남반부 현 정세를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 미제
수탈로 물가고의 폭등은 물론 애국 인민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과 탄압으로
남반부 전 인민 대중의 불만은 폭발 직전에 있음을 알고 있다. 북조선은
남반부의 5,30번거메서 미제 수구 부르주아 정당의 패배를 그 결정적인
증거로 보고 있으며, 작은 충전으로도 남반부 인민은 쉽게 봉기하여 혁명
대열에 참가할 수 있음을 확고히 믿고 있다, 둘의 보고는 서울시당 간부들
에게도 새로운 신념을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그럼 조선 반도에 곧 전쟁이
일어난단 말입니까? 함정국이 안영달에게 묻는다 "전쟁이 터질 위험은 지
금 이 순간에도 상존해 있고, 삼팔선 접경 지대는 지금 위기 촉발 상태에
있소. 삼팔선 지대의 일백리 안쪽에 사는 북조선 인민은 만약의 사태에 대
비하여 모두 후방 안전 지대로 소개시켰소. 전 북조선 인민군은 춘계 기동
훈련에 이어 지난 일일부터 하계 야영 전투 훈련에 들어갔어요." "삼팔선이
그 정오 긴장 상태라니, 우리는 통 몰랐어요." 공현숙이 놀란다. "양쪽 공히
유월 들어 무력 증강이 삼팔선으로 집결되고 있소. 지난 이월 중순 일본
동경에서 있은 맥아더 , 이승만 회담에서 '북조선 토벌과 해방에 관한 십일
개 조항 체결' 만 보더라도 미제는 괴뢰 정권을 앞세워 이승만에게 전쟁
도발을 충동질하고 있소, 이차 세계 대전 종국 키후 미제의 군수 산업 자
본과 잉여 군수 물자가 이제 포화 상태를 이루어 세계 어디서든 국지전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 와 있어요." "동경 회담이 미제의 군수품 원조 구걸로
만 알고 있었지 북침 조약까진 짐작하지 못했더랬어요." "우리두 해주에서
그 정보를 알게 되었어요." 이중업이 공현숙의 말을 받는다 "그렇다면 곧
있을 결정적 니기란 남반부가 먼저 전면적안 선제 공격을 할 것이란 확실
한 정보를 북조선이 입수하고 있어 평화적 통일을 호소하게 된 결과로군
요? 곽종결이 자기 의견을 보태어 묻는다. "그 기밀까진 우리가 입수한 정
보는 없어요. 다만 결정적 시기 가 임박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소. 그래
서 해주지휘부는 유월 들어 남반부에 새로운 각도의 정치 공작을 시작했어
요." 이준업이 그 말에 달아. 또 다른 새로운 소식을 전한다. 해주지휘부를
총괄하는 박헌영과 이승엽은 6월에 들어서자 북조선 전역에 당 지도원급
으로 흩어져 있던, 원적이 삼팔선 이남 인 남로당 출신 간부들을 해주로
소환해서, 남반부 각도에 도책 을 새로이 임명하고 다섯 명 내지 열 명 정
도 소규모코 정치 공작대를 편성하여 남파시켰다는 것이다. 남파된 그들은
48 년 6월 일부터 육일 동안에 걸쳐 해주에서 열렸던 '남조선인 민대표자
회의' 에 월북 참석한 1002명 중에서 다시 월남하지 않고 북조선에 주저
앉은 투쟁성 강한 간부급이라 했다 그들은 모두 해로를 이용하여 남파되었
는데, 결정적 시기에 대비하여 파 괴된 지역당 재건의 정치 공작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중업의 말로는, 그들은 남반부 각 도별로 활동 임무를 받고
이미 자기들이 해주를 떠나기 일주일 전에 남파되어 지금 각 지역에서 맹
렬한 지하 공작을 통해 조직 재건에 분주하고 있다는, 서울시당조차 깜쪽
같이 모르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서울시당과 아무런 선도 맺지 않고 독자
적 활동을 전개한다는 말입니까? 조민세가 참담한 마음으로 묻는다. 분명
희망적인 소식임은 틀림없으나 이제 해주지휘부가 남반부 지방당까지 직접
챙기고 나서니 남반부 노동당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는 서울 시당은 공중에
뜬 격이 되고 만 꼴이다. "왜 선 연결을 않겠어요. 우선 잠입 착지가 선결
문제니 안정이 되는 대로 선 연결 무선지비가 있을 것이오." 이중업이 눈
을 껌벅이며 말한다. 해주지휘부가 벌이는 뜻밖의 가열찬 남반부 공작에
모두 흥분하여 여러 말이 오가고, 함정국 아내가 마련한 저녁 식사를 마친
뒤다. "조학구 동지 , 지난달 서울시당이 발간한 「로력인민」 사십팔 호
는 해주에서도 잘 접수했더랬소." 안영달이 조민세를 보며 냉랭 한 목소리
로 말을 꺼낸다. 「로력인민~ 48호는 김삼룡이 서울시당을 관장할 동안 켠
주간 으로 발간되었는데 그와 준필 김래룡의 구속으로 정간 상태에 있다
조민세가 주필을 맡아 처음 만든 당보이라. 침묵을 지키던 조민세가 대답
없이 안영달을 건너다본다. 밀 선을 타고 오느라 밤잠을 놓친 안영달의 핏
기 선 눈이 마뜩찮은 무엇을 추궁할 기세다. -원고 취집에 어려움이 있어
좋은 당보가 되지 못했습니다." 조 민세가 침통하게 대답한다. -그 정도 지
면을 채우기도 힘들 거란 사실은 해주에서도 인정 한 바요. 그러나 조동지
가 그 핀문에 집필한 '유격전띄 전략과 전술.이 중앙당 십오호실에서 토의
안건에 올랐더랬소. 그 내용 중에 '농촌 유격 활동의 함정' 띠 특히 문제가
되었는데, 조동무 는 미제의 혹독한 수탈을 받고 있는 남반부 농민 대중을
어떤 의 도에서 회색주의적인 반혁떵 집단으로 규정했소? 조민세는 안진부
의 우려대로 그 글이 드디어 해주지휘투에서 문제가 되었음을 안다. 조민
세는 비판받을 각오가 되어 있는 만 큼 솔직히 시인하며 자기 주장을 개진
하기로 마음먹는다. "현재의 피폐된 남반부 농촌 실정이란 북선에서 파악하
고 있는 그대로, 일제 말기의 파국 직전과 다름없을 정도로 참담하다는 점
은 사실 그대롭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존권 확보를 선동하 여 혁명 떤위
대로 앞세을 수 있다는 인식도 가능하지요. 그러나 농민 대중의 현실적 상
황이, 그들을 주체적 혁명 역량으로 삼기 에는 그 여건이 해방 직후에서
많이 후퇴되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반부 경찰 통치가 무자비
하게 강화되었고 농 민 대중은 무기력한 체념주의에, ,,, " "그만 하시오. 조
동지의 그런 분석이 바로 지식인의 함정이요, 회의적 사고관의 발현이오,"
안영달이 수세게 몰아친다. 그는 곧 목소궈를 낮춘다. "더 시급한 당면 문
제가 산적해 있으니 그 문 제는 뒷날 중앙위원회를 재구성한 후 소집하여
토론에 부치겠 소." "그 글을 두고 서울지도부에서도 비판이 있었습니다. 그
래서 제삼장만은 삭제 내지 수정하기를 강력히 주장했으나 조동지싸 조직
부장 직대에 주필이란 직권으로, 영웅 심린지 뭔지 그대로 게재하고 말았
지 않습니까." 박태길이 안영달의 말을 거든다, "그 유격전 논문은 논조에
있어서 회의적인 제삼장이 문제점으 로 검토되긴 했으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남반부 농촌 현실에 대 한 진솔한 피력이라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성
주걸이 곤궁한 처 지에 몰린 조민세를 변호한다. "성동무, 남조선 민중 역
량을 뭘로 보는 거요? 그들이야말로 바 지저고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혁명
에 봉화를 올릴 때 일파만파 불길을 옳겨 붙일 기본 세력이오. 잘못이 있
었담 당면한 역사적 인식을 주지시키지 못한 우리 역량 부족이지 솔직히
시인하시 오." 박태길이 성주걸을 나무란다. 조민세는 침묵을 지킨가. 그는
아무 말도 하기 싫고 말할 마음 도 아니다. 이중업과 안영달의 남파로 서
울시당에서 앞으로 자 신띄 역할이 없다는 판단만 되씹는다. "누구요, 누가
조동지의 글에 동조했단 말이오? 안영달이 다 른 안건을 꺼내려다 성주걸
에게 따진다. 치안국 사찰과 중앙분 실장, 백형복을 세뇌시켜 북으로 데려
감으로써 이승엽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은 뒤 새로운 중책을 맡아 남파
된 그로서는 이 제 지난날 중앙위원이 아니다. 새 난수표를 가져왔으므로
앞으 로 해주지휘부와 모든 연락은 그를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자연 그의
목소리는 서울시당과 지도부 요원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 그때, 마당에서
바sul신발 끄는 소리가 난다. 안방은 모두가 문밖 동정에 귀늘 기울인다. "
명희아버지, 어제 왔던 친구분이 오셨는데요." 함정국의 아내 가 방문 앞에
서 말한다. "중학교 동창이라요. 쉬 돌려보낼 테니 걱정들 마시이소." 함정
국이 방안 사람들을 안싱시키고 밖으로 나간다 앞치마를 두른 채 마당에
오도카니 서 있던 그의 아내가 불안한 눈길로 서방을 본다. "대문 밖에 있
소? "손님들이 오셨다니간 팔씀만 드리고 가겠다기에 .... .." 함정국이 조심
스럽게 대문을 반쯤 연다. 계단 앞 어둠 속에 가 방을 든 흰 노타이 차림
의 사내가 서 있다. 취직 부탁차 진영에 서 올라온 이문달이다. 함정국과
진주사범 동창인 그는 서울로 올라와 친구 집을 돌며 숙식하고 있었는데,
함정국 집에서 이틀 째 신세를 지려고 찾아온 참이다. 계단 아래에서 이운
달이 꺼벙 한 얼굴로 함정국을 쳐다본다. "문달이군. 그런데 이걸 어쩌지.
시골에서 손님이 여럿 오셨어, 아무래도 자네가 잘 방이 여의치가 못 한데,
이거 미안해서 어떡 하노." 함정국은 지금 안방에 있는 조민세와 이문달의
고향이 같 으므로 아는 사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지만 그런 내색을 할 수
말 다 "신세지는 내가 미안한데 뭘. 원밤동 덕우네 집으로나 가봐야겠어.
노친네가 계셔서 그쪽도 잠자리가 불편할 테지만 어쩔 수 없지 . 그런데
알아본다던 일은? "한선생하곤 연락이 됐어. 내일 오전중에 가부간 소식을
알려 주기로 했으니깐 아마 좋은 소식이 있을 끼라 내일 오후에 학교 로
전화 한번 내줘." "그라지 뭐 좋은 소식이면 다행이겠는데------ "신학기에 신
규 채용키 있다 했으니간. 그쪽만 아니라 내가 다 른 길도 알아보고 있는
중이야 "그라면 갈게 ." 이문달은 꾸부정한 어깨로 골목길을 걸어나간다 함
정국은 대 문 밖으로 목을 내밀고 어두운 골목 양쪽을 살핀다. 넝마주이
하 나가 넝마 바구니를 등짐 진 채 옆집 담벽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 를 태
우고 있다, 멀리로는 머릿수건 쓴 아기 업은 아낙베가 한길 쪽 골목길을
얼정거린다. 둘 다 경계 임무를 맡은 연락원이다. 이문달은 골목길을 천천
히 빠져나가며, 잠자리가 불편한 덕우 의 셋방을 찾아갈 게 아니라 서울역
앞 도동 언덕-기에 있는 극 빈자 합숙소를 찾기로 한다 엿새 전 그가 서울
역에 내렸을 때는 초저녁이었고 밤중에 찾아갈 마땅한 잠자리가 없었다.
여관에 들 수로 있었지만 가지고 온 돈을 절약하기 위해 역 광장 안내소
에 들러 알게 된 합숙소다. 그는 미국 예수교 자선 단체가 운영 하는 그곳
에서 서울의 첫 밤을 보냈다. 그 합숙소는 여름철이라 다행이지만 이불 없
이 가마니 바닥에서 하룻밤을 자면 청소를 핑계로 아침 일찔 숙박자 모두
를 내쫓기 전 더운물에 푼 가루 우 유 한 컵을 주었다. 북박비는 무궁화
담배 한 갑값인 일백 원이 다. 부랑자.무전 취식자, 가출자, 가족 없는 노친
네, 거기에다 터를 잡지 못한 월남 난민까지 껴붙는 하루살이 인생들이 모
여드는 곳이다. 일백 원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블 록 벽돌
로 엉성하게 지은 세 개의 건물에 동마다 마흔 명 정도 수층했으므로 그나
마 늦게 가면 삔원 초과로 관리인이 정문을 잠가버린다. 그날 밤. 아문달은
그곳에서 뜻밖에도 서울역에서 지게품을 파는 지판숱를 만난다. 이문달이
차음 찾아든 날은 지판수가 다 른 동에 있었단지 만나지를 못했는데, 제2
동 구석에 쭈그리고 앉 아 있던 그의 얼굴이 퍽 눈에 익었던 것이다. 자세
히 보니 진영 장터마당 놀랑패로 하치호 최희출돠 어울렸던 지판수였다.
그 는 좌익하는 사람들 심부름꾼이란 소문이 돌더니 48년 2윌, 조민 세
휘하의 유격대로 입산해버렸다. 이문달은 그를 보자 화차고 개 사잔을 떠
올리고, 입산 투쟁하던 조민세 무리가 겨울을 마감 하고 서울로 잠입했으
리란 심찬수의 추측을 확인한다. "자네 김해 진영 사람 맞지? 지군 아닌가?
이문달이 그쪽으고 다가가 말을 건넨다. 지판수가 이문달을 쳐다보곤 시침
이라도 뗄 듯 작은 눈을 깜 박이다니, 한참 뒤 찬웃음을 입가에 문다. "이
선생닝이시군예. 절 따라오이소." 지판수가 이문달을 변소 뒤 창고 건물 쪽
으로 데라고 간다. 한적한 곳이다 "자네, 입산 소문이 자자하더니, 화차고
개 사건 때도 나타났 다더군,,,, 서울엔 언까 올라왔는가? "이선생님, 나 이
렇게 서울로 숨어들어 역에서 지게품 팔며 고 생하고 삽니더. 이선생님 이
쪽으로 모시고 올 땐 나쁜 마음도 먹 었지만, 생각을 바됐심더 . 지가 당부
하겠는데 절대로 날 고발할 생각은 마시이소. 난 이미 그 바닥에서 손 씻
은 놈이니간예, 만 약 선생님이 지를 경찰에 밀고한다면 선생님을 평생 원
수로 여겨 내 언젠가 출옥마게 되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복수하고 말겠심더. 산생활하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겨. 이미 지는 포기
한 인생이라예. 지가 사형당하면 귀신이 돼서 선생님 따라 댕기며 복수하
고 말 낍니더." 어둠 속, 지판수의 매서운 눈 에 불이 일고 그 목소리는 당
장 이문달의 목이라도 죌 듯 사막하 다. "지군, 고발하다니. 객지서 모처럼
만난 고향 사람을 내가 왜 고발해 자네도 소문 들었다면 나란 인간이 어떤
사람인 줄 대충 알잖는가. 내가 어데 반공 단체에 가입했던가, 지서 순경과
친하 게 지내던가 자네 심정으로야 오해할 만하겠으나 사람을 가려 보아야
지." 이문달이 지판수의 어깨를 토닥거린다 그는 낯선 서 울 바닥에서 고
향 사람을 만나니 우선 반가숨부터 앞선다 지판 수의 우격다짐에 섬뜩했다
기보다 그를 고발할 마음이 애당초 없 었기에 마음이 편하다. "그건 그렇고,
조민세 선생도 서울에 계 신가, 배종두군은 어째 됐고? "모르겠심더. 하산
후론 통 소식 몰라예. 그들이 모두 어찌 됐 는지 알수음심더. 내 한몸 앞가
림도 힘든판이라서... ," "그런가" 하고 말했지만 이문달은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지판 수는 필경 지금도 남로당 지하 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을 터이
고 그가 입을 열면 진영을 감쪽같이 떠나버린 조민세 가족 거처도 알 수
있으려니 싶다. 그러나 지판수는 자신의 신분을 끝까지 감 출 터이고, 그렇
다면 아무것도 알아랠 수 없다. 아니. 이문달이 발벗고 나서서 캐내어야 할
문제도 아니다. "그런데 이선생팀이 웬일로 이곳 합숙소까지? 학교가 방학
중이 진 않을 낀데예." 긴장을 조금 누그러뜨리며 지판수가 묻는다. 그는
말을 하면서도 오른쪽 허리께에 손을 꽃고 있다. 바지 안쪽에 차고 있는
군용 단검을 쥐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봄부터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농지
개혁을 자네도 아는가 모르겠군? "대충은 알고 있지 예." "유상 몰수 큐상
분배란 정책 자체에도 모순이 있지만 그 분배 과정에서 숱한 부정이 저질
러졌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읍내 근 동 작인을 모아 그 부정을 따지는 쟁
의를 주동하다 학교에서 쫓 겨났어. 학교 재단 이사장이 농지위원장을 겸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김해경찰서까지 넘어가 고초도 좀 겪었지. 그래
서 놀고 만 있을 수 없어 어떻게 취직 자리나 알아볼까 하고 올라온 참이
야" 둘은 창고 건물 뒤를 돌아 아카시아나무가 있는 비탈로 옮겨 앉는다.
엿새 전 이문달이 합숙소로 찾아들 때만 해도 아카시아 꽃이 채 지지 않아
그 향기가 합숙소의 퀴퀴한 내음을 덮었는데 어느 사이 꽃이 져버려 시든
꽃잎이 땅바닥을 덮었다. 둘은 요즘 진영 소식을 두고 여러 이야기를 빠눈
다 이문달은 그가 상경하기 전 조민세 가족의 행방을 추적하기 위해 김해
경 찰서 수사관까지 동원된 여러 사람의 연행 사건도 은근히 비친 다 어둠
탓으로 표정을 읽을 수 없으나 지판수는 그 말에 별다 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문달의 지금 처지가 그러하고 그가 보는 시국관 역시 부정적이
나, 지판수는 끝까지 경계심을 룰지 않고 자신의 신분 역시 밝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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