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문패
윤은자
내 방, 보조 서랍 맨 아랫간에는 아버지의 유품이 들어있다. 아버지의 유품은 운동화, 파자마, 지갑, 열쇠 꾸러미, 네발 지팡이가 전부다. 운동화는 깨끗이 빨아서 신발장에 올려두었고, 아버지가 입던 파자마와 해진 지갑, 실을 꼬아 엮은 열쇠 꾸러미는 서랍에 넣었다. 아버지가 짚고 다니던 네발 지팡이는 비닐로 꽁꽁 싸서, 내 차 트렁크에 실었다.
부모님이 살던 집에는 큰오빠네 식구가 살고 있다. 아버지의 문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수년간, 대문 기둥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 문패를 바라보는 순간만은 아버지가 그 집에 있는 것 같아서, 잠시나마 위로가 되었다.
전해줄 물건이 있어서 친정집에 들른 날이었다. 문패가 떼어져, 대문 아래 놓여 있었다. 먼지와 낙엽이 엉겨 붙어있는 모양을 보니, 그렇게 버려둔 지가 꽤 지난 듯 보였다. ‘문패를 떼어낼 때도 되었지.’하는 마음을 내어보았지만, ‘아버지 문패를 저렇게 두고, 아무렇지 않게 대문을 드나들었구나.’하는 섭섭함이 더 진하게 올라왔다. 나는 문패에 붙어있던 검불을 손바닥으로 밀어내고, 또 밀어냈다.
문패는 내 가방에 담겨, 우리 집으로 이사 왔다. 뽀득뽀득 씻겨서, 예쁜 손수건과 리본으로 단장하고, 서랍 속 친구들과 한 공간에서 살게 되었다.
아버지는 평남 성천이 고향이다. 6.25 때, 북한의 운전병으로 참전했다가 1.4 후퇴 때 남쪽에 남았다. 어머니도 평남 맹산이 고향인, 피난민이다. 졸지에 실향민이 되어버린 두 사람은 지인의 소개로, 인연을 맺었다.
몸뚱이가 전 재산인 아버지는 시장 노점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매일 밥은 먹어야 하니, 망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쌀가게를 열었다. 북한 사람 특유의 근면함이 몸에 배어있는 아버지는 부지런했다. 그날그날 방아 찧은 쌀이 밥맛이 좋다고, 아버지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길을 나섰다. 자전거 불빛으로 어둠을 가르며, 방앗간으로 향하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쌀이 좋다고 소문나면서 단골이 많아졌고, 나중에는 읍내에서 제일 큰 쌀집이 되었다. 내가 14살 되던 해, 아버지는 읍의 중심지에 2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건물을 삥 둘러 세를 준 후로는, 내 이름 앞에 부잣집 딸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근면한 아버지 덕에 가난을 경험해 본 적도 없지만, 검약한 아버지 덕에 풍요를 경험해 본 적도 없었기에, 별다른 감흥도 없었다.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아버지에게는 지적 욕구가 있었다. 간단한 생활 용어를 불쑥 영어나 일어로 말해서, 주변을 가끔 놀라게 했다. 콩글리시 수준이지만, 아버지의 기억력과 순발력은 예상 범위를 가뿐히 넘나들었다. 그런 아버지를 신기해하자, 외국인을 보면 무조건 쫓아가서 말을 걸었다고, 동네 사람이 다 알아도, 실천하기 힘든 비결을 알려주었다.
아버지는 중국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사람들에게 삼국지 이야기를 풀어놓다가 스스로 취해,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명심보감을 열심히 가르쳤지만, 게으른 삼 남매는 지루한 한문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타고난 소리꾼이었던 아버지는 민요든, 타령이든, 흥에 겨워서 노래를 시작하면 좀처럼 끝나질 않았다. 읍내에서 상이 나면, 선소리꾼으로 불려 다녔다. 아버지가 상여 앞에서 요령을 흔들어,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상주는 물론, 상여를 따라가던 사람들도 눈물을 쏟아냈다. 아버지는 ‘회심곡’을 즐겨 불렀다. 아버지가 눈을 지그시 감고 소리를 시작하면, 끊길 듯 이어지는 구슬픈 가락과 중간중간 알아들었던 가사가 애절해서, 어린 나도 따라서 울먹거렸다.
내가 어렸을 때는 동네에 걸인이 많았다. 아침저녁으로 빈 통을 팔에 끼고, 집집이 구걸하러 다녔다. 걸인들도 상도는 있었는지, 밥 때가 끝날 때를 기막히게 맞춰서 왔다. 아버지는 길에서 걸인을 만나면 빵과 우유는 사주었지만, 돈은 절대 주지 않았다. 돈을 주니, 꼭 술을 사 먹더란다. 빵보다는 밥을 먹고 싶다는 걸인을 만나면, 아버지는 무조건 집으로 데리고 왔다.
“손님 오셨다.”
성질이 급한 아버지는 문간을 들어서기도 전에, 소리부터 질렀다. 일상이라, 누가 왔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부엌에 걸어둔 손님 전용 개다리소반에 주섬주섬 반찬을 올리고, 한 주발 가득, 밥을 담아 올렸다. 손님의 주발 바닥이 보이기 시작하면, 아버지는 조바심을 내며, 재촉하기 시작했다.
“밥 더 먹으라우!, 밥 더 주라우!”
손님이 더 달라는 소리를 못 할까 봐, 아버지는 연신 선주문을 넣었다.
2007년 7월 7일. 중환자실에 누워 있던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 가족이 빙 둘러섰다. 들쭉날쭉 불규칙하게 선을 그리던 심전도의 그래프가 순식간에 한 줄 횡선으로 변했다. 계기판에서 경보음이 울리고, 아버지가 운명하셨다는 의사의 낮은 음성이 들렸다. 아버지를 오랫동안 힘들게 했을, 몸에 주렁주렁 달려 있던 기구들은 순식간에 제거되었다.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는 감각이 청각이라는 말을, 그 순간만은 간절히 믿고 싶었다. 아버지의 머리를 품어 안고, 아버지 귀에 내 입술을 붙였다. 목울대가 터질 것 같은 울음을 눌러 참고, 또박또박 허망한 고백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버지, 아버지는 세상 최고의 아버지셨어요.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라, 정말 고맙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오랜만에 열어본 서랍에서, 아버지의 지갑을 꺼내본다. 모서리가 닳고 해진, 싸구려 비닐 지갑은 만질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가 났다. 21로 시작되는 주민등록번호가 눈에 들어온다. 살아 계시면 100살을 훌쩍 넘겼을 나이다. 지갑 한편이 불룩해서 뒤져보니, 뚜껑도 없는 까만색 플라스틱 도장이 들어 있다. 한문 전서체로 새겨진 ‘尹炳善’이라는 이름이 새삼, 애틋하다.
떼구루루, 지갑에서 100원짜리 동전이 떨어진다. 서랍장 밑으로 굴러 들어간 동전을 꺼내, 한참을 들여다본다. 동전은 찾아서 내 손바닥에 올려두었지만, 그 동전의 마지막 주인이었던 아버지는 찾을 길이 없다.
아버지 문패와 마주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정 많은 아버지는 병약한 아내와, 걱정만 끼치는 자식 때문에, 스스로 약자가 되어 살았다. 신통치 않은 처자식을 지켜내느라, 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말을 삼켜야 했을까.
나지막이 아버지를 불러본다. 명치끝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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