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42)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경상남도 구간 사전 답사 (합천→양산) ① 강나루→ 밀양
2020년 11월 03일 (화요일) [카니발 투어]▶ 대원 동행
* [카니발 투어]▶ [비리산 강나루민박]→ 낙동로(1022번 지방도로)→ 학포수변공원→ 본포교 앞(30번 도로) 좌회전→ 삼거리 우회전(1022도로)→ 직선의 들판도로→ 반학교(청도천)→ 반월교→ 성북내교→ 성북회관(밀양시 초동면 검암리) 1022도로 우향(右向)→ 성북교(초동천)→ [3대째 가마솥 추어탕](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아침식사→ 하남읍 시내 중앙로→ 백산로(1022도로)→ (수산대교)→ 명례로(직선의 들판도로)→ 밀양 아리랑오토캠핑장→ 제방의 직선도로(1022도로)→ 해동마을회관(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오산교 앞(상남천) 좌회전→ 오산교회→ 상남면(25번 국도)→ 예림교(밀양강) 앞 좌회전→ 밀주교→ 삼문동→ 밀양교→ 영남루 주차장→ 밀양아리랑시장→ 밀양관아→ [영남루]→ * 밀양 / 청도 일대의 명승, 유적지 탐방 고찰
* [오늘의 일정] (1)— 창녕 강나루→ 밀양
경상남도 창녕군 부곡면 노리 비리산 산록, 낙동강 강안에 있는 ‘강나루민박’에서 아침을 맞았다. …어제 아침 합천(陜川)에서 시작하여 유서 깊은 합천과 의령 일대를 둘러보고, 오후에는 의령군 낙서의 낙동강 강변으로 나아가, 다시 물길을 확인하고 의령의 박진고개를 넘어 창녕군 남지와 남지대교를 경유하여 함안 칠서의 수변공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공원에서부터 바이크의 은륜을 굴려 함안의 강변을 타고 내려와 창녕-함암보를 건넜다. 이어지는 바이크 라이딩은 창녕 길곡의 노고지리수변공원, 가을의 정취가 풍기는 공원길을 타고 우리의 숙소인 강나루민박에 도착하였다. 쾌적한 강나루 숙소에서 하루의 긴 여정의 피로를 풀었다. 이상배 대장을 비롯하여 기원섭, 이진애, 김옥련 대원 등 모두 건강하고 컨디션이 좋아보였다. 쾌조의 아침이다!
[오늘의 전체 일정]▶ 창녕 강나루→ 밀양→ 삼랑진→ 양산→ 서울
오늘은 이곳 비리산 강나루 숙소에서 카니발을 타고 밀양으로 가서 밀양의 유적지를 탐방하고 이어서 밀양강을 따라 바이크로 삼랑진까지 달려갈 것이다. 그리고 삼랑진에서 다시 카니발을 이용하여 양산 물금까지 질주한다. 낙동강 물길을 따라가는 길이다. 양산 물금은 이상배 대장의 집이 있는 곳이다. 거기 양산에서 이 대장이 내리고, 나머지 일행은 일로 상경하는 일정이다. 상당히 먼 여정이다. 아침 식사는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에 있는 이 지방에서 이름난 유명한 추어탕 집에서 하기로 했다.
오전 9시, 행장을 수습하여 오늘의 일정에 들어갔다. 날씨는 화창했다. 이른 아침에는 고요한 낙동강에 엷은 안개가 스쳐가더니 해가 뜨자 고즈넉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신선한 강나루의 공기가 가슴을 열어주었다. 가을의 아침햇살을 따라 낙동로 1022번 지방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왼쪽은 비리산 산줄기가 내려와 있고 오른 쪽은 낙동강이다. 그리고 금방 좌측의 들판이 이어진다. 들판의 위쪽이 창녕군 부곡면 노리 마을이다. 수변공원의 바이크로드가 도로에 올라와 합류한다. 비룡산 산자락 모퉁이를 지나면 좌측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고 이어 너른 들판이 펼쳐지고 있다. 창녕군 부곡면 학포리이다. 그래서 오른 쪽 낙동강 강안의 둔치는 학포수변공원이다. 그리고 금방 청도천 하구, 30번 도로를 만나 좌측으로 청도천을 잠시 거슬러 올라가 들판 한 가운데 삼거리에서 우회전 하여 반학교[청도천]를 건넌다. 30번 도로의 오른 쪽은 낙동강을 건너는 본포교이다.
[당초 계획된 나의 낙동강 종주 코스]▶ 본포교 도강 (창원시)→ (김해시)→ 삼랑진
원래 ‘내가 가야 할 낙동강 종주 코스’는 본포교를 건너 낙동강 우안(右岸)을 따라서 걷는 길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여기 청도천 하구 30번 도로에서 우측의 본포교[낙동강] 건너 창원시 동읍 본포리에서 낙동강 제방 길을 걷는 것이다. 이 길은 실제 ‘낙동강 종주 바이크로드’가이다. 여기서 본포교를 건너 낙동강 우안을 따라 삼랑진까지 이어진다. 바이크로드는 본포교를 건너자마자 좌향, 창원시 동읍 본포리에서 창원 대산면의 일동리-모산리-유동리의 강안(江岸)을 따라 내려가다가, 김해시 한림면 시산리-금곡리를 경유하여, 김해시 생림면 마사리에서 삼랑진교[낙동강]를 건너, 낙동강 좌안의 삼랑진(三浪津)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낙동강 우안은 창원시와 김해시의 권역을 통과하는 노정(路程)이다. 나의 ‘두 발로 걷기’ 대장정은 이 바이크로드를 따라가는 길이므로 오늘 카니발이 아니었으면 그 길로 걸어서 갔을 것이다. 대신 그 길을 따라 가면 유서 깊은 밀양(密陽)을 지나쳐 버리게 된다.
청도천[반학교]
우리의 카니발은 낙동강 좌안의 1022번 지방도로 반학교[청도천]를 지나 직선의 들판 길을 달린다. 청도천은 현풍읍과 밀양시 청도면의 경계에 있는 천왕산(619m) 남쪽에서 발원하여 청도(면)을 경유하여 내려오다가, 청도면 인산리에서 청도면 화악산에서 발원한 요고천을 만나 이곳 부곡면 학포리에서 낙동강 유입되는 것이다. 경부선 철도가 지나는 경상북도 청도역[청도읍]은 화악산 너머 밀양강 수계(水系)에 위치해 있다. 학포리에서 반학교를 건너면 밀양시의 영역이다. 청도천[반학교]는 창녕시 부곡면 학포리와 밀양시 초동면 반월리의 경계이다. 낙동강 창녕시 박진교(남지면)에서부터 시작된 창녕시는 이곳 부곡면 학포리 청도천까지의 영역이다.
밀양시 청도면(淸道面)
여기 청도면은 경상북도 청도군의 청도가 아니다. 경상남도 밀양시의 북서부에 위치해 있는 밀양시 청도면이다. 면 소재지는 구기리이다. 청도(면)은 청도천 최상류 구기천에 위치한 산골마을이다. … 본래 이곳은 경상북도 청도군 지역으로 외서면(外西面)이라 하여 인산리(仁山里), 소고리(所古里) 등 6개 리(里)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밀양군에 편입되었으며, 하서면 일부를 병합하고 ‘밀양시 청도면’으로 개칭되었다. 구기리(九奇里)·소태리(小台里)·두곡리(杜谷里)·조천리(槽川里)·인산리(仁山里)·고법리(古法里)·요고리(要古里) 등 7개 리와 45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주위에는 천왕산(619m), 호암산(虎巖山, 612m), 화악산, 열왕산(烈旺山, 663m), 의봉산(儀鳳山), 형제봉 등의 높은 산들이 면을 둘러싸고 있어, 면 전체가 산지(山地)이다. 산지 사이를 흐르는 청도천이 서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가까워지면서 그 유역에 농경지가 형성되어 있다. 교통은 밀양∼창녕으로 넘어가는 24번 국도가 면의 중앙을 동서로 통과할 뿐이다.
밀양시 청도면의 문화유적은 소태리에 고분군, 천주사지(天柱寺址), 구천사지(九千寺址)와 오층석탑이 있으며, 두곡리에 선사유적지, 인산리에 고인돌군이 있다.
[1022 도로] — 밀양시 초동면의 들판 길
창녕 학포리와 밀양 반월리를 잇는 반학교(청도천)을 건너면서, 1022번 도로는 직선으로 이어진다. 낙동강 제방에서는 조금 떨어진 들판의 길이다. 들판의 도로를 달리는 카니발은 작은 하천의 반월교를 지난다. 그대로 직진하는 도로는 초동천의 지류인 성북내교를 건너 밀양시 초동면 검암리를 경유하여 성북교[초동천]를 건너 초동천을 따라 내려온다. 도로의 왼쪽의 산기슭의 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자태고개를 넘어 낙동강 곡강정이 있는 마을 앞을 지난다.
하남읍 수산리, ‘3대 가마솥 추어탕’
들판과 산 구비 길을 지나서 밀양시 하남읍 수산리 영역에 접어든다. 읍내로 들어가기 전, 길옆에 소문난 식당이 있다. 오늘 아침에 이상배 대장이 이야기했던, 이른바 ‘3대 가마솥 추어탕’ 집이다. 이 대장이 몇 차례 이용한 집이다. 허름한 시골집을 개조하여 꽤 너른 홀과 작은 홀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작은 홀에 자리를 잡았다. ‘장작불로 끓이는 가마솥 추어탕이 3대째’라니? 분명 그 오래된 세월만큼 깊은 맛이 있을 것이다. 식당 벽에 「경남도민일보」2008년 7월 22일자 화요일자 13면 전면에 ‘가난이 만들어 3대 맛집’ 제하에 ‘대를 이은 맛집 ② 밀양 수산 3대 가마솥 추어탕’을 부제를 붙인 신문을 게시해 놓았다. 기사 전문에 1대 할머니가 ‘3대 추어탕 장사’를 하게 된 내력이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2012년 2월 7일 한상권, 김솔희 아나운서가 진행한 KBS 「굿모닝 대한민국」에서 '전통의 맛 - 가마솥 추어탕'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옛말에 ‘호구지책(糊口之策)’ 또는 ‘목구멍에 풀칠한다’는 말이 있다. 도시도 아닌 시골 면소재지에서 땅 한 뙈기 없는 사람이 살아갈 방도란 남의 집 전답을 소작하거나 품을 파는 일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도 사내나 하는 일이지 아녀자의 몸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 2남 5녀 7남매를 거느리고 사는 윤분조 할머니(1대, 사망)로서는 전답 소작이나 품을 팔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밀양 하남읍 수산 5일장에 나가 인절미, 국수, 묵을 팔게 되었다. 그로나 이것으로 생계를 꾸려가기엔 쉽지 않았다. 결국 생각해낸 것이 시장 구석에 솥을 걸고 추어탕을 끓여서 파는 일이었다. 수산장이 서는 2, 3일 전 삽과 양철동이를 가지고 논배미마다 뒤져 진흙 속에서 꿈틀거리는 미꾸라지를 잡아 모아두었다가 장이 서면 미꾸라지를 푹 고아 얼기미(얼레미의 방언, 바닥의 구멍이 굵은 채)에 으깨어 걸러 풋배추, 토란대, 부추 등을 넣고 긇이다가 파, 마늘, 고추, 방아잎, 산초를 넣어 한 솥을 끓여내면 시골 곳곳에서 농작물을 이고 지고 장에 나온 사람들에게 추어탕만한 요깃거리가 없었다.”
수산 5일장에서 억척스럽게 추어탕을 끓여 아들 공부시키는 등 7남매를 모두 키워서 내고, 한 동안 손을 놓았다가, 둘째 딸 정기화(2대, 69세) 씨를 데리고 다시 추어탕을 끓이기 시작했다. 시집가서 쪼들리게 사는 딸 식구를 불러들여 다시 추어탕 장사를 한 것이다. 2대 정 할머니는 장터가 아닌 진청집에 무쇠 솥을 걸고 추어탕을 끓였다. 친정집은 지금의 식당인데 수산장에서 고개 너머 부곡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 2대 장기화 할머니의 아들은 대형슈퍼에서 비교적 안정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6년 IMF 사태에 실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 할머니는 며느리 노하순(3대, 44세) 씨를 데리고 추어탕 장사를 했다. 추어탕 대물림은 가난 때문에 대물림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극복하게 한 고마운 가업이 되었다. 하루에 5말 들이 가마솥 세 솥을 끓여내는 ‘3대 가마솥 추어탕’은 인근에 소문나서 손님들이 문전정시를 이루어 IMF로 실의에 빠진 김기업·노하순 부부에게 희망을 안겨준 가업이 되었다. 우거지·국물은 무한리필이고 가격은 몇 년째 5천원 그대로다,
오늘 실제로 먹어보니 경상도 추어탕 특유의 풋배추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우고 혀에 감기는 후련한 느낌과 미꾸라지 알갱이가 어우러진 구수하고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우거지 국물을 추가로 시켜 먹었다.
밀양(密陽) 하남읍(下南邑)
밀양군의 남서부 낙동강 연변에 위치한 읍으로 면 소재지는 수산리(守山里)이다. 본래 수산현 지역으로 고려 현종 때 밀양부에 병합되었다. 조선조에 와서는 밀양의 남쪽에 있어 하남면이라 하여 명례(明禮)·백산(柏山) 등 8개의 리(里)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서초동면(上西初同面)의 일부를 병합해 1973년에 읍으로 승격되었다. 수산리(守山里)·명례리(明禮里)·백산리(柏山里)·파서리(巴西里)·남전리(南田里)·대사리(大司里)·양동리(良洞里)·귀명리(貴明里) 등 8개리와 40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도로는 대구(밀양)∼부산(김해 진영)간의 25번 국도가 읍의 중앙을 통과하며, 낙동강 좌안을 따라 창녕(남지)∼밀양으로 이어지는 1022번 지방도로가 수산리 중심을 지나고 있다. … 오늘 우리의 노정(路程)이 바로 1022번 도로이다.
하남읍 북부는 밀양강(密陽江)이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하고, 남쪽에는 낙동강(洛東江)이 동쪽으로 흐르면서 동서로 길고 넓은 하남평야(下南平野) 백산(柏山)들을 펼쳐 놓았다. 넓은 평야가 분포해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하였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보리·감자·봄무와 그 밖에 채소류 및 사과·배·복숭아 등이 생산된다. 최근에는 단감나무단지가 조성되어 많은 양의 단감이 생산된다. 문화유적은 남전리에 고인돌군, 대사리에 봉선사지(奉先寺址), 양동리에 신라의 임금이 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를 지냈다는 풍류현(風流峴), 파서리에 파서막(破西幕)과 정남정(定南亭)이 있다.
하남평야 직선의 도로 → [제방 길]→ 오산교(상감천) 앞
좀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일행은 다시 출행을 시작했다. 우리의 카니발은 완만한 고개를 넘어 하남읍(수산리)에 진입하여, ‘봉사의 탑’ 삼거리에서 좌회전 수산리 중앙로를 경유하여 25번 도로를 만나는 교차로에서 그대로 직진하여 백산 들 한 가운데로 난 도로를 달린다. (25번 도로는 밀양읍에서 낙동강 수산대교를 건너 김해시 진영읍으로 통하는 국도이다. 그러므로 하남의 수산리의 교차로에서 우회전하면 수산대교, 낙동강을 건너면 창원시 대산면 일동리이다.) 직선의 도로는 끝이 없는 듯 엄청나게 길었다. 이른바 밀양시 하남평야(백산들)이다. 들판 한 가운데 백산이 있고 그 산 아래 백산마을이 있다.
낙동강 강안(오산리)에서 밀양으로 가는 길
1022번 도로는 하남시 명례리에 좌측으로 완만하게 구비를 돌아 다시 직진, 해동마을회관 앞에서 제방의 길과 하나가 된다. 제방[바이크로드]이 1022번 도로인데 자로 그은 듯한 일직선을 이루도 있었다. 그리고 밀양으로 가는 길, 상남천[오산교] 앞에서 좌회전하여 오산마을회관 앞을 지나 상남천 외산교를 통과하여 동산리를 지난다.
마을은 왼쪽에 있고 오른쪽은 상남 들판이다. ‘만산’ 왼쪽의 산굽이를 돌아, 상남면 동촌리 마을 한 복판을 지나서 25번 국도를 타고 상남(면)을 경유하여 밀양읍에 들어섰다. 밀양경찰서, 예림교[밀양강] 앞에서 좌회전, 밀주교[밀양강]를 건너면 삼문동이다. 삼문동은 밀양강의 하중도(河中島)이다. 삼문동에서 밀양교를 건너면 바로 영남루이다. 영남루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1022번 도로 상감천 오산교 앞에서 좌회전하여 25번 국도에 올라 상감(면)을 경유, 밀양시로 가는 길은 결국 밀양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노정이다. 밀양시는 낙동강 종주의 길에서는 상당히 벗어난 곳이지만 역사적으로 워낙 유서 깊은 고을이므로, 오늘 카니발의 기동성에 편승하여 탐방하는 것이다. 밀양 탐방은 당초부터 마음을 먹고 있었던 낙동강 종주의 중요한 포인트이다. 밀양에는 그 유명한 영남루와 표충사가 있고 밀양아리랑의 본향이며, 조선 유학의 조종인 점필재 김종직의 유적이 있는 고장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서술한 바, 실제 낙동강 종주 노선은, 낙동강[본포교나 수산대교]을 건너 창원-김해 권역의 낙동강 우안을 따라 삼랑진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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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密陽)
[밀양의 지세(地勢)]▶ 밀양의 지형은 대체로 낙동정맥(洛東正脈)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 낙동정맥은 밀양시의 북동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어 있다. 그러므로 낙동정맥이 지나는 북동쪽이 높고, 남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낮아지며 낙동강과 밀양강 유역에는 저평한 충적평야가 발달해 있다.
밀양의 진산(鎭山)인 화악산이 북쪽에 옹립하여 있고, 동쪽에는 주산인 가지산(加智山, 1,240m)을 중심으로, 영취산(靈鷲山, 737m), 재약산(載藥山, 1,108m), 신불산, 문복산으로 이어지는 산맥[낙동정맥]이 있다. 가지산은 서쪽으로 운문산(雲門山, 1,188m), 억산, 구만산(九萬山, 785m), 육화산으로 이어지는 지맥을 가진다. 서남으로는 열왕산, 도리산, 종남산(終南山, 664m), 덕대산으로 연결되어 낙동강으로 이어진다.
이외에 밀양 주위에는 능동산(陵洞山, 982m), 천황산(天皇山, 1,189m), 향봉산(香峰山, 992m), 천왕산(天王山, 619m), 종암산(宗巖山, 546m)·덕암산(德巖山, 544m), 만어산(萬魚山, 670m), 정각산(正覺山, 859m), 화락산(花落山, 625m), 추화산(推火山, 243m), 화악산(華嶽山, 932m) 등이 있다. 이들 높은 산지에서 발원하는 하천들이 모두 낙동강(洛東江)에 유입한다.
밀양강(密陽江)
밀양(密陽)은 ‘밀양강의 단전(丹田)’에 해당한다. 밀양 지역의 하천(河川)은 모두 고도가 높은 동북쪽에서 서남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한다. 언양 가지산에서 발원한 ‘동천수’가 밀양에 이르러, 청도군 쪽에서 내려오는 ‘북천수’와 밀양시 추화산 동쪽에서 합류하여 밀양강(密陽江)의 본류를 이루는데, 이 본류가 양 갈래가 되어 밀양시를 휘감아 돌아 남으로 흘러서 낙동강으로 유입한다. 그래서 밀양시 한 가운데 하중도[河中島, 밀양시 삼문동]가 있다. 유로의 연장은 약 96km이며, 여러 지류를 합한 유역의 면적은 약 1,476㎢가 된다. 길이에 비하여 폭이 넓은 밀양강을 따라서 남북으로 길고 넓은 지역에 걸쳐 발달한 하안평야(일명 삼문들) 등 비옥한 농경지가 펼쳐져있다.
밀양시 서쪽에는 청도천(淸道川)이 남류하여 밀양시 초동면 반월리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이 청도천은 청도읍에서 밀양강으로 흘러내려오는 청도천이 아니다.) 북동쪽에서는 산내천(山內川)·단장천(丹場川)이 남천과 함께 밀양강에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이 밖에도 안법천·초동천·원동천 등이 있다. 밀양강, 청도천 유역은 주요 곡창지대를 이룬다. 그리고 삼랑진읍의 딸기, 무안면 등지의 단감, 단장면의 대추 등은 품질이 좋아 전국적으로 인기가 높다.
밀양의 역사(歷史)
이 지역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변진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다. 밀양의 옛 이름은 ‘미리벌’로서, 미리미동국이나 추화군(推火郡, 밀벌군), 밀성군(密城郡)이 모두 ‘미리벌’의 한자 표기에서 생긴 지명이다. 낙동강 본·지류의 유역에서 좋은 위치를 차지한 밀양에는 일찍부터 하천과 구릉지대를 따라 군데군데 취락이 형성되어 있다가 읍락국가를 형성하였다. 신라(新羅)는 505년(지증왕 6) 밀벌군[推火郡]을 두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군현의 명칭을 고칠 때 밀성군(密城郡)이라 개칭하였다. 고려 초에는 중앙의 권력이 미약하고 지방에 대한 통치체제가 확립되지 못해, 대체로 신라의 주군(州郡)을 그대로 두었다. 1390년(공양왕 2)에는 밀성군이 공양왕의 증조모 박씨(朴氏)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밀양부로 승격되었다. 1394년에 김인포(金仁浦)의 청으로 다시 밀성부(密城府)로 승격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부사 박진(朴晉)이 병마절도사 이각(李珏)과 함께 동래성(東萊城) 밖의 소산을 지키다가 패하고 후퇴하여, 작원(鵲院: 지금의 삼랑진읍)에서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1600년에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여 밀양부사가 방어사를 겸임했는데, 이 후 1664년(현종 5)까지 60여 년 간 존폐를 거듭하였다. 『밀양부읍지(密陽府邑誌)』에 의하면, 1759년 밀양도호부의 호구수는 1만 49호, 5만 489명이었다.
밀양십경(密陽十景)과 밀양의 명승·유적지
밀양(密陽)은 부산이나 대구, 창원이나 진주는 물론 전라도 광양, 순천 등으로 통하는 교통(交通)의 요지이며, 경부선(京釜線)과 경부 국도(國道)가 시의 중앙을 남북으로 달리고, 밀양시 삼랑진(三浪津)에서 경전선(慶全線)이 분기한다. 이 지역은 삼한시대부터 영남지방의 행정·교통의 중심지였으며,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유물·유적이 많아 영남지방의 관광명승지로 알려져 있다.
유서 깊은 밀양의 주요 관광 명승지(名勝地)로는 한국 3대 누각의 하나인 ‘영남루(嶺南樓)’를 위시하여, 단군과 한국 8대 국조의 위패를 모신 ‘천진궁’, ‘무봉사’, ‘아랑각’, 영남루 아래의 ‘석화(石花)’ 등 영남루는 ‘조선 16경’의 하나로 알려져 왔으며, 선인들은 다음과 같이 ‘밀양10경’을 절경으로 삼았다.
제1경은 ‘牛嶺閑雲’(우령한운) 우령산의 한가로운 구름
제2경은 ‘馬山飛雨’(마산비우) 마산에 쏟아지는 소낙비
제3경은 ‘凝川釣艇’(응천조정) 응천의 고기잡이배
제4경은 ‘鈒浦漁燈’(삽포어등) 삽포의 고기잡이 등불
제5경은 ‘龍頭春花’(용두춘화) 용두산 절벽의 봄꽃
제6경은 ‘栗島秋烟’(율도추연) 밤섬의 가을 연기
제7경은 ‘瑩峰初旭’(영봉초욱) 형봉의 해돋이
제8경은 ‘羅峴積雪’(나현적설) 나현에 쌓인 눈
제9경은 ‘西郊修禊’(서교수계) 서쪽 교외의 계모임
제10경 ‘南浦送客’(남포송객) 남포에서의 손님 전송
그리고 영남루 뜰 동편에는 일제에 항거한 향토출신 독립열사를 기리는 ‘독립의열사중모비’도 있다. 밀양시의 동쪽 단장면 천황산 산곡에 사명대사의 ‘표충사’(국보 75호)를 비롯한 46개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고, ‘가지산도립공원’, 재약산 층층폭포, 무지개폭포, 구천계곡, 산내면 삼양리의 ‘시례호박소’, ‘추화산’과 ‘밀양강의 맑은 물’ 등 훼손되지 않은 자연관광자원이 많다. 이 밖에 밀양강변 ‘월연정’ 언덕에 있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두 그루의 ‘백송(白松)’이 있다. 특히 산내면 남명리에는 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얼음골’(천연기념물 제224호)이 있어 연중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밀양아리랑시장
☆… 우리의 카니발은 밀양의 하중도인 삼문동에서 밀양교를 건너 영남루 입구를 지나 공영주차장에 도착했다. 오늘의 중요 포인트(탐방지)인 밀양(密陽)에 도착한 것이다. 우선 길 건너편에 보이는 시장, ‘밀양아리랑시장’으로 들어가 지역민의 생동하는 삶의 현장을 둘러보았다. 시장 안 음식거리에는 방송에도 나왔다는 유명한 ‘돼지국밥’집이 있고 보리밥 골목에는 유명한 ‘할매 장국·보리밥’집이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식당에서 김이 번져 나오고 구수한 음식 내음이 은연히 코에 스며들었다. 이상배 대장이 이 두 가지 음식은 밀양의 대표적인 서민음식으로 아주 맛이 특별하다고 했다. 아침식사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므로 오늘은 눈으로만 맛을 보았다.
밀양관아(密陽官衙)
☆… 시장을 나와서 길 건너 높은 언덕에 밀양관아가 있다. 널찍한 계단 위에 삼문의 솟을대문이 있고 양 옆에 포졸(조형물)이 창을 들고 보초를 서고 있다. 현판에 ‘凝香門’(응향문)이라 했으니 인간미가 향기처럼 모이는 관청이다. 문 안에 들어서면 너른 마당, 오른 쪽에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세월을 말해준다. 정면 중앙에 동헌이 있고 그 정청 한 가운에 사또(조형물)가 앉아서 무언가 말을 하는 몸짓이다. 동헌은 ‘近民軒’(근민헌)이라 했다. 백성들과 늘 가까이서 따뜻한 정사를 펼치겠다는 뜻이 들어 있다. 동헌의 오른쪽에 담을 두른 ‘梅竹堂’(매죽당)이 있는데 사또의 독서당이고, 좌측에도 담을 두른 ‘北別室’(북별실)이 있는데 외부인을 접대하는 곳이라고 한다.
[밀양(密陽) 관아(官衙)]▶ 영남루 가까운 거리에 있다. 관아(官衙)는 지방의 수령이 공무를 보던 곳인데, 밀양읍성 축조될 당시 관아도 백여 칸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본래 건물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모조리 소실되었고, 1699년(선조 32) 부사 이영이 영남루 경내에 우선 초옥을 지어 집무하다가 1611년(광해군 3) 원유남 부사가 부임하여 원래의 이 자리에 관아(官衙)를 재건하였다. 1895년(고종35) 지방관제의 개편에 따라 군청으로 바뀌었다가 1927년 삼문동으로 밀양군청을 신축하여 옮겨가게 되자 본래의 용도가 폐지되었다. 지금의 관아 건물은 2010년 4월 복원하였다.
관아(官衙)의 삼문 밖, 담장 아래 좌측에 오래된 비석이 즐비하다. 계단의 좌측에 19개의 비석이 서 있다. 밀양도호부 부사나 관할 관찰사의 선정비(善政碑), 유애비(遺愛碑), 불망비(不忘碑) 등이다. 재임 중 선정을 베풀고, 사랑을 남기고 떠난 훌륭한 사또, 그를 잊지 못해 비석을 세워 기리는 것이다.
3·13 밀양면민만세운동(음력 2월 12일)
☆… 관아의 삼문 밖, 담장 아래 우측에 ‘3·13 밀양면민만세운동’의 표지석과 해설비가 있다. 밀양관아 앞은 일제의 강권통치에 항거하여 수천의 밀양인(密陽人)들이 만세운동을 일으킨 곳이다. 고종의 인산(因山,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한 윤치영, 윤세주는 서울 탑골공원의 3·1만세운동에 참여한 후 밀양에 돌아와 스승인 을강 전홍표와 논의 후 밀양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밀양면과 부북면 사무소의 인쇄기를 훔쳐 아북산에서 병풍으로 빛을 가린 뒤 인쇄하고, 윤세주의 경제적 지원으로 밀양교회 여신도를 중심으로 태극기 수백 매를 만들어 김병환과 윤세주 집에 보관하였다.
시위 당일은 ‘밀양 장날’로 윤치영, 윤세주, 권세호, 김상득, 감상이, 김소지, 노재석, 박만수, 박소종, 박작지, 설만진, 양쾌술, 윤방우, 윤보은, 이장수, 정동준, 최종관 등과 여성기독교도인 김시악,김영수, 이복수 등이 장터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선언서 낭독을 마친 윤세주의 선창에 따라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영남지방에서는 큰 규모로는 최초로 일어난 이 ‘3·13 밀양만세운동’은 밀양지역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충절의 정신과 개창학교, 동화중학을 통한 민족교육 그리고 일합사 등 비밀단체를 통한 항일의식이 표출된 저항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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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루(嶺南樓)
☆… 영남루를 오르는 계단은 높고 길었다. 그래서 지그재그식으로 오르도록 만들어 놓았다. 여기 밀양시 내일동 ‘영남루’(보물 제147호)는 관내에 ‘천진궁’(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7호), ‘무봉사’, ‘사명대사 동상’, ‘박시춘 생가’, ‘밀양읍성’, ‘아랑각’(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호) 등 여러 유적지가 있다.
조선시대 후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축물인 밀양 영남루(嶺南樓)는 신라 경덕왕(742~765년)때 신라의 5대 명찰(名刹) 중에 하나였던 ‘영남사’가 폐사되고, 고려 공민왕 때(1365) 밀양부사 김주(金湊)가 규모를 크게 중수하여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 하였다. 그 후 세조, 중종 때에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현재의 누각은 1844(순조 34년)년 이인재(李寅在) 부사가 중건한 것이다. 진주 촉석루(矗石樓), 평양의 부벽루(浮碧樓)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로 손꼽히는 보물이다.
☆… 낙동강의 지류인 밀양강변 절벽위에 위치한 영남루는 깨끗한 밀양강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외적인 아름다운 모습뿐만 아니라 높은 누각에 올라 바라보는 주변의 경치 또한 수려하다. 영남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이층 누각 팔작지붕집이다. 기둥이 높고 기둥 사이의 간격이 넓어서 규모가 매우 커 보이는데, 게다가 양쪽 옆으로 날개처럼 두 건물을 거느리고 있어 더욱 화려하고 웅장해 보인다. 위치 또한 밀양강을 발아래 둔 높은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어서 강의 남쪽에서 바라보는 영남루의 모습이나 영남루에서 강을 끼고 내려다보는 도심 경치가 매우 시원하다. 영남루에 올라 강을 내다보고 섰을 때 왼쪽에 있는 건물이 능파당(陵波堂)이요, 오른쪽에 있는 것이 침류각(枕流閣)이다.
현재 영남루를 관람하려는 사람들은 신발을 벗고 능파당(陵波堂)으로 해서 본루(本樓)로 올라가 경치를 즐기도록 되어 있다. 침류각(枕流閣) 쪽에서의 출입은 본루와 연결된 월랑(月廊)을 이용하도록 되어 있으나 계단의 파손이 심해서 통제되고 있다.
능파당(陵波堂)은 정면 3칸 측면 2칸짜리 익공식 팔작지붕집으로 본루와 마찬가지로 중층을 이루고 있으며 2층 두 칸은 온돌방이고 오른쪽 한 칸은 마루로 비워 마루를 통해 본루로 통하도록 돼 있다. 본루는 누마루 주위로 계자난간을 둘러 사방으로 주변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하였다. 누각에서 강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는 자연경관도 아름답지만, 넓은 마루에 편히 앉아 내부 구조를 요모조모 살피는 재미도 또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한다.
☆… 특히 화려한 단청과 다양한 문양조각이 한데 어우러진 누각에는 목은 이색, 서거정, 김종직, 퇴계 이황, 문익점 등 명사들의 시문 현판이 즐비하다. 신발을 벗고 누각에 올라 밀양강을 바라보며 선현의 문향(文香)을 몸으로 느낀다. 특히 영남루에는 특이한 서체의 다양한 현판(懸板)들이 게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1843년 당시 이인재 부사의 아들 이중석(11세)과 이현석(7세) 형제가 쓴 ‘嶺南第一樓’(영남제일루)와 ‘嶺南樓’(영남루) 현판이 눈길을 끈다.
[영남루의 현판(懸板)]▶ ‘江左雄府’(강좌웅부)는 ‘낙동강 왼쪽에 있는 아름다운 큰 고을’이라는 뜻으로 귤산 이유원의 글씨다. 현판 ‘嶺南樓’(영남루)는 송하 조윤형이 쓴 현판과 이인재 부사의 둘째 아들 이현석이 7살 때 쓴 현판이 있다. '嶠南名樓'(교남명루)는 문경새재 이남에 이름 난 누각‘이라는 뜻으로 귤산 이유원이 썼다. ‘嶺南第一樓’(영남제일루)는 이인재부사의 첫째 아들 이중석이 11살 때 썼다. ‘江城如畵’(강성여화)는 '밀양강과 밀양읍성이 어우러져 그림같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세종과 세조 때의 대문학가 서거정(徐居正)이 이 영남루(嶺南樓)에 올라 ‘밀양십경’(密陽十景)을 7언시로 읊었다. 다음은 제4경인 ‘영봉초욱’(瑩峯初旭)이다.
金鷄啁哳扶桑晨 금계조찰부상신 금계가 울어 부상에 새 아침이 오니
六龍扶出初日輪 륙룡부출초일륜 육룡이 둥근 아침 해를 받들고 나오네
蒸紅開熱珊瑚光 증홍개열산호광 뜨거운 붉은 햇살 산호처럼 빛나고
洪濤萬頃金鱗鱗 홍도만경금린린 만경에 금빛 비늘 큰 물결처럼 덮었네
須臾飛上萬丈岡 수유비상만장강 아득히 푸른 하늘 하루 한 바퀴 도네
一日一周天蒼茫 일일일주천창망 잠깐 사이 만길 산봉우리 날아올라서
我欲長繩繫九烏 아욕장승계구오 나는 긴 밧줄로 구오를 꽁꽁 묶어서
萬古懸在天中央 만고현재천중앙 영원토록 하늘 가운데 걸어놓고 싶네
영남루 주변의 유적지
☆… 영남루 너른 마당 건너편에 ‘천진궁(天眞宮)’이 담을 두르고 있다. 영남루와 마주보고 있는 천진궁(天眞宮)은 옛날 객사 건물의 하나였다고 하는데, 1957년 대종교 산하단체인 단군봉안회에서 이 건물의 이름을 ‘천진궁(天眞宮)’이라 하고, 그 안에 우리나라 시조인 단군(檀君)의 영정과 역대 8왕조, 즉 부여·신라·고구려·백제·가야·발해의 시조왕과 고려 태조·조선 태조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천진궁 앞에는 어떤 것은 둥글기만 하지만 어떤 것은 기묘하게도 장미나 모란같이 탐스러운 꽃무늬가 박힌 돌들이 있다. 그 앞에 ‘석화’(石花)라는 안내문이 적힌 표지판이 있다. 이런 기묘한 돌은 영남루와 아랑각 아래 강변으로 난 산책로
곳곳에서도 볼 수 있다. 조각된 것 같기도 하고 자연적인 듯도 한 것이 아주 독특하다.
☆… 그리고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93호)을 간직하고 있는 옛 영남사의 부속 암자였던 천년 고찰 무봉사(舞鳳寺)로 들어가는 길목, 높다란 석단 위에 ‘사명대사 동상’이 창공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영남루 산록에는 대한민국 대표적인 아리랑 중의 하나인 ‘밀양아리랑 노래비’가 있고, 그 뒤의 언덕을 따라 530여 년을 이어온 ‘밀양읍성(密陽邑城)’이 남아 있다. 그리고 영남루 아래, 밀양강 강안의 대숲에 비명에 간 아랑낭자의 전설을 간직한 ‘아랑사(阿娘祠)’가 있다.
아랑(阿娘)의 전설
경남 밀양시 영남루 아래쪽 절벽에는 아랑각(阿娘閣)이라는 사당이 있다. 아랑각은 아랑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이곳에는 '아랑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아랑(阿娘)은 조선 명종 때 밀양부사의 딸로 일찍 모친을 여의고 유모의 품에서 자랐다. 아랑은 자라면서 자태와 인품이 고와 주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아랑이 16세가 되던 어느 날, 유모의 권유로 영남루에 달을 구경하러 갔는데 유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평소에 그녀를 사모하던 한 관노(官奴)가 그녀에게 다가와 간곡하게 사랑을 호소했다. 그러나 아랑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관노의 무례함을 꾸짖었다. 뜻을 이루지 못한 관노는 연정이 증오로 변해 아랑을 살해하고 시신을 주변 대나무 숲속에 묻어 버렸다.
이 일이 있은 후, 밀양에 부임해온 부사(府使)들마다 첫날밤에 죽어나가고 마을에는 큰 우환이 돌았다.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이 지역의 한 대담한 사람이 밀양부사가 되어 첫날밤을 지켰다. 이윽고 밤이 되자 죽은 아랑이 귀신(鬼神)으로 나타나 새로 부임한 부사에게 자신의 억울한 죽음을 낱낱이 고했다. 부사는 다음 날 아랑을 살해한 관노와 이를 방관한 유모를 붙잡아 처벌하고 아랑의 원혼을 달래주었다. 영남루 아래 시신을 묻은 대나무 밭에 아랑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아랑각을 세워 영정을 모셔 놓고, 매년 음력 4월 밀양아리랑축제 때 뽑힌 규수가 제관이 되어 제향을 한다.
사명대사(四溟大師) 동상(銅像)
사명대사는 밀양이 그 본향이다. 그래서 대사를 기리는 표충사가 밀양에 있고 여기 영남루 무봉사 입구에도 그의 동상이 있다.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은 1544년 10월 17일 밀양군 무안면 고라리에서 태어났다. 속명은 응규(應奎), 호가 사명당이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黙)의 제자가 되었다. 사명대사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로부터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라’는 격문을 받고 최초로 금강산 건봉사에서 승병(僧兵)을 일으켰다. 처음 200여명에 불과하던 승병은 사명당의 탁월한 지휘능력과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충정에 감화되어 2,000여명으로 불어났고, 평양 외곽 임원평에 주둔하면서 평양과 중화를 오가며 적을 무찔러 1593년 1월 8일에는 마침내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평양성을 탈환한 사명당은 승병을 이끌고 적을 쫓아 남쪽으로 내려오며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으며, 도원수 권율(權慄) 장군과 합류하여 의령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1694년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진중에 들어가 네 차례나 휴전협상을 하였고, 정유재란 때에는 울산의 도산과 순천의 예교에서 전승을 거두었다. 전쟁이 끝나자 조선예조유서를 휴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교토의 후지미성에서 도쿠가야 이에야스(德川家康)와 강화회담을 하여 국교를 회복하고 이듬해 전란에 잡혀간 조선인 3,000여명을 인솔하여 돌아왔다. 사명당은 1610년 8월 26일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하였고, 밀양 표충사의 표충사 외에 여러 곳에 배향되었다. 여기의 동상은 무봉사(舞鳳寺) 주지였던 김대월 스님의 발의로 밀양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1971년 4월 25일에 건립하였다.
작곡가 박시춘(朴是春)
☆… 영남루 산록의 중턱에, 한국가요계의 거목인 작곡가 박시춘(朴是春)의 생가(生家)인 작은 초가와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도 있다. 박시춘(1913~1996)은 1930년대 ‘항구의 선술집’, ‘물방아 사랑’으로 인기를 얻고, 그 후 ‘신라의 달밤’,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럭키서울’ 등 대중의 사랑을 받은 총 3,000여 곡을 작곡하여 일제강점기부터 국민의 애환을 달랬다. 한국전쟁 때는 ‘전우여 잘 자라’ ‘전선야곡’ ‘굳세어라 금순아’ 등 수많은 국민애창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작곡한 ‘아들의 혈서’ ‘목단강 편지’ ‘결사대의 안해’ ‘헐서지원’ 4곡으로 인하여 2005년 9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사로 거명되어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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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산(天皇山) 표충사(表忠寺)
밀양의 표충사(表忠寺)는 밀양시 단장면, 밀양강 단장천의 지류인 시전천 최상류, 낙동정맥 천황산과 재약산 산곡에 자리 잡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의 충훈(忠勳)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표충사당(表忠祠堂)이 있는 절이다.
원래 이곳은 원효(元曉)가 창건한 죽림사(竹林寺)를 신라 흥덕왕 때 황면(黃面)이 재건하여 영정사(靈井寺)로 개칭한 절이었다. 표충사라는 이름은 사명대사를 제향하는 사당을 당시 서원(書院)의 격(格)으로 표충서원(表忠書院)이라 편액하고 일반적으로 표충사(表忠祠)로 불렀는데, 이 사당을 사찰에서 수호(守護)하여 왔으므로 사(祠)가 사(寺)로 바꾸어진 것이다.
원래의 표충사(表忠祠)는 밀양시 영축산에 있던 백하암(白霞庵) 자리에 있었으며, 사명대사의 제사를 모시기 위하여 나라에서 사원(祠院)을 세우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 뒤 병자호란이 일어나 승려들이 흩어지고 폐허가 되었던 것을 1714년(숙종 40)에 밀양 군수 김창석(金昌錫)이 사명대사의 충훈을 알고 사당이 허물어진 것을 민망스럽게 여겨 지방유지와 승려를 불러 사우를 다시 세울 것을 의논하였다.
그 뒤 사명당의 5대 법손인 남붕(南鵬)이 크게 중창하고자 1738년(영조 14)에 사명대사의 행적(行蹟)을 갖추어 임금에게 올리니, 임금이 교지를 내려 표충사의 잡역(雜役)을 면제하고, 전답(田畓) 5결(結)을 내리고 경상도 관찰사에게 중수하도록 명하였다. 사우를 3칸으로 하고 단청을 하였으며, 사명대사의 영정을 중앙에 모시고 동쪽에 서산대사, 서쪽에 기허당을 각각 모셨다.
밀양 표충사의 ‘땀 흘리는 비석[表忠碑]’
경상남도 밀양에는 신비로운 3대 현상이 있다. 한여름에 얼음이 어는 ‘얼음골’, 만 마리의 물고기의 전설이 담긴 ‘만어사’ 그리고 사명대사의 충절이 서린 ‘땀 흘리는 비석’, 즉 ‘표충비(表忠碑)’가 그것이다
예로부터 표충비(表忠碑)는 국가에 큰 어려움이나 전쟁 등 불안한 징조가 보일 때에 비석 전면에 자연적으로 땀방울이 맺혀서 구슬땀처럼 흘러내린다 하여 ‘땀 흘리는 표충비’라고 불리기도 한다. 때로는 비석의 4면에서 이슬처럼 몇 시간씩 계속해서 흐르다가 그치는데 글자의 획 안이나 머릿돌과 조대에서는 물기가 전혀 비치지 않는다고 전한다. 밀양 사람들은 나라와 겨레를 존중하고 근심하는 사명대사의 영험이라 하여 신성시하고 있다.
표충비(表忠碑)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1910년 국권 피탈, 1945년 해방, 1950년 6.25 동난, 1061년 군사정변 등 3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 사건이 발생할 때 마다 땀 흘리는 현상이 관찰됐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5호인 표충비는 1742년 10월 남붕선사가 경상북도 경산에서 돌을 가져다가 현재의 자리(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 세운 것으로 좌대를 포함한 총 높이는 380cm, 비신의 높이 275cm, 너비 98cm, 두께 56cm의 큰 비석이다.
통도사의 말사인 홍제사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는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비석의 정면에는 ‘유명 조선국 밀양 표충사 송운대사 영당비명병서(有明朝鮮國密陽表忠祠松雲大師靈堂碑銘幷序)’를 새기고, 뒷면과 옆면에는 ‘서산대사 비명’과 ‘표충사(表忠祠) 사적기’를 음각했다.
또한 서산대사의 제자이기도 한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스승의 뒤를 이어 승병활동을 한 사실,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 내용, 선조 임금의 어명을 받들어 일본에 건너가 포로로 끌려갔던 백성들을 데리고 온 사실 등을 적고 있다. 표충비는 비석 3면에 사명대사, 서산대사, 기허대사의 행적을 기록하여 일명 삼비(三碑)라고도 불린다.
표충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몸통을 세우고, 맨 위에 머릿돌을 얹은 구조이며, 비의 몸통은 검은 색 대리석을 사용했다. 비문은 영중추부사 이의현이 짓고, 홍문관 부제학 김진상이 글씨를 썼으며, 판중추부사 유척기가 전서했다.
홍제사는 1742년 사명대사의 5대 법손인 태허당 남붕선사가 조선시대 승병장인 사명대사(四溟大師)의 표충사당과 표충비각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사당 수호사찰이다. 현재의 터에 표충비와 사당을 세우면서 사당을 지키는 수호사찰 역할을 했으나 사당이 영정사(지금의 표충사)로 옮겨지면서 비각의 보호와 관리를 위해 작은 원당과 삼비문(三碑門)을 세운 것이 그 출발이었다.
[표충사의 여러 문화재]
표충사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1호인 대광전, 팔상전, 명부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2호인 만일루, 표충서원 등이 있다. 또한 국보 제75호인 청동함은향완(靑銅含銀香垸)은 1177년(명종 7)에 제작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고려시대 향로이다. 이 밖에도 보물 제467호인 표충사 삼층석탑, 중요민속자료 제29호인 사명대사의 금란가사(錦襴袈裟)와 장삼(長衫),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호인 표충사 석등,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인 표충사비 등이 있다. 절 일원이 경상남도 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밀양의 불교(佛敎) 문화재]▶
소태리 5층석탑(보물 제312호)이 있으며, 삼랑진읍에 만어사 3층석탑(보물 제466호), 밀양 숭진리 3층석탑(보물 제468호), 활성동에 영원사지 보감국사부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2호), 영원사지 보감국사묘응탑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호), 내일동(영남루)에 무봉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93호), 교동에 백운사 범종(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7호) 등이 있다.
[밀양의 유교(儒敎) 문화재]▶
밀양은 예부터 유교의 도학이 뿌리를 내린 곳이다. 조선 도학의 조종으로 일컬어지는 김숙자, 김종직 부자의 학문적 사상적 기반이 된 고을이기 때문이다. 김종직의 생가와 예림서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9호)을 비롯하여 사명대사를 모시는 표충사의 표충서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호), 칠탄서원(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2호), 밀양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14호) 등이 있다. 그리고 ‘점필재문집책판’과 ‘이존록’(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5호), ‘성호선생문집책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7호), ‘어연당부산포진해유문서’(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8호), ‘소눌선생문집책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76호) 등 귀중한 문헌 자료도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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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필재 김종직의 생가, 추원재(追遠齋)
밀양의 추원재(追遠齋)는 조선 도학(道學)의 조종 점필재 김종직이 태어난 곳이다. 바로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이다. 이곳은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가 처음 거처를 정한 곳이다. 그리고 그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별세한 곳이다. 두 부자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올라 크게 활약하기도 했지만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뒤를 이어 성리학(性理學)의 도통(道統)을 세우고 뿌리를 내리게 한, 사상적 역할이 중요했던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리하여 이곳은 조선시대 사림과 유학자들의 정신적 고향과 같은 곳으로 간주되었으며 많은 유학자들이 이곳을 찾아 두 분의 학문적 정신을 추모하고 기리는 곳이다. 그러나 전란과 오랜 세월 속에서 낡고 허물어져, 1810년 사림과 후손들이 중건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재사를 ‘추원재(追遠齋)’라 하고, 당호를 ‘전심당(傳心堂)’으로 정한 것은 멀리 두 분을 추모하고 도학의 의리와 정신을 전하였음을 기리는 뜻을 담고 있다. 재실은 6칸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일반적이 주택 살림채 규모이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의 예림서원(禮林書院)은, 김종직(金宗直)을 배향하고 후학을 교육하기 위해 1567년 밀양의 유림들이 덕성서원(德成書院)으로 건립했다. 그후 1637년 예림서원으로 개칭되었다.
김종직(金宗直)은 시조 김선궁의 16대손으로, 1431년(세종 13년) 밀성의 서쪽 대동리(지금의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 외가(外家)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숙자(金叔滋), 어머니는 사재감정(司宰監正) 박홍신(朴弘信)의 딸 밀양 박씨(朴氏)인데, 외가가 부유해서 어려움 없이 학문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김종직의 자는 계온(季溫)이고, 호는 점필재(佔畢齋)다. 김종직이 태어났을 때 한골 앞 냇물이 사흘 동안 달착지근했다 하여 사람들이 그 내를 감내(甘川)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김종직(金宗直)은 6살 때부터 아버지 김숙자(金叔滋)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동몽수지』와 『유학자설』, 『정속편』을 차례로 배웠다. 그런 다음 『소학』과 『효경』을 읽었고, 열두 살에는 시(詩)를 지었다. 8살부터는 『사서오경』과 『사기』를 읽었다. 평소 차를 즐기며 수많은 글을 지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이미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과거를 보지 않고 산림에서 학문에 정진하고자 했다.
1456년 아버지가 죽고 나서, 과거를 보라는 어머니의 청을 외면할 수 없고 아버지의 유지를 외면할 수 없어, 과거(科擧)를 보았다. 당시 승문원정자를 거쳐 봉상시녹사로 있던 어세겸은 김종직이 제출한 시문을 보고 감탄하며, “나에게 채찍을 들려 (김종직의) 마부를 시켜도 마다하지 않겠다”라고 찬했다.
이렇게 김종직은 세조(世祖) 때 관직에 나아갔다. 이때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도운 훈구파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김종직이 보기에는 이 훈구파는 이성계가 역성반역으로 고려를 무너뜨린 역도들과 다름이 없었다. 김종직은 평소 그 부도덕한 집단을 척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학을 열고 후학을 양성하여 조선사회에 도학정치를 실현시키려고 온 힘을 기울였다.
정주학(程朱學)을 연구한 정통 성리학자가 조선에서 맥이 끊어질 위기까지 몰렸던 이유는, 정도전 등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성리학자 대부분이 이성계의 반역에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조선(朝鮮)은 역성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탄생한 나라였다. 그런데 또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했고, 이후 공신과 척신들이 훈구세력을 형성하고 집권하고 있었다. 도학자의 양심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아버지 김숙자(金叔滋)의 뜻이기도 했다. 김숙자는 정의를 바로세우는 것부터 실천하여 도학의 형이상학적 이상을 실현하려고 관직에 나아갔다. 그러나 훈구세력의 온갖 모함으로 끝내 조정을 떠나야 했다.
김종직(金宗直)은 대과에 급제해 승문원정자에 제수됐다. 김종직의 글이 아름다운 것에 감탄한 세조는 김종직으로 하여금 「세자빈한씨애책문」, 「인수왕후봉숭왕책문」 등을 지어서 바치게 했다. 그 글에 다시 반한 세조는 김종직을 총애했고, 그 덕분에 1462년(세조 8년) 6월 승문원박사 겸 예문봉교, 이듬해엔 사헌부감찰에 제수됐다.
당시는 훈구세력에 눈과 귀가 가려진 세조는 훈구파가 천거한 인물만 중용했고, 관학 출신 위주로 인물을 등용했다. 임금이 훈구세력에 둘러싸여 언로가 차단당하고 현량한 인재를 찾아 등용하지 않았다.
도학적 양심으로 역성혁명파에 저항해 군자의 의리를 지키려 했던 이색(李穡)과 정몽주(鄭夢周) 중심의 고려 절의파(節義派) 정신과 그 학통을 계승한 김종직이었다. 김종직(金宗直)은 훈구세력을 강도 높게 비판하며 도덕성(道德性) 회복을 주창했다. 훈구세력으로서는 강직한 김종직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갖고 되었다. 그래서 김종직을 탄핵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 1463년(세조 9년) 여름 김종직이 사헌부감찰로서 임금을 알현하고 불사(佛事)에 대해 작심비판을 하는 일이 있었다. 훈구파는 김종직이 무엄함을 문제 삼아 탄핵으로 몰고 갔다. 김종직은 파직되었다.
내심 왕위 찬탈의 장본인인 세조에게도 반감을 품고 있었던 김종직은, 차제에 벼슬을 버리고 관향으로 내려가 후학을 양성할 계획을 생각했다. 그러나 김종직이 필요했던 세조는 곧 파직을 취소하며 출사(出仕)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임금의 눈과 귀를 막은 훈구세력의 국정농단은 날로 심해졌다. 김종직은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기회를 만들었다.
때마침 세조가 문신들에게 각자 7학을 나누어 익힐 것을 명했다. 김종직은 판종부시사 남윤 등과 함께 임금을 알현하고 잡학을 유자(儒子)들에게 익히게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항의했다. 잡학(雜學)은 그것을 업(業)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익히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예상대로 훈구세력이 김종직의 발언을 문제 삼으며 들고 일어났고, 세조 또한 대로하며 김종직을 내쳤다. 김종직은 신진사류를 양성해 관직에 진출시키고 청렴한 위민정치를 실현할 기회라고 생각하여. 즉시 짐을 싸서 관향 선산(善山)으로 내려갔고, 그리고 학도들을 모아 후학을 양성했다.
그후, 김종직(金宗直)은 성종(成宗)에 의해 중용되었다. 경연관(經筵官)이 되고, 함양군수, 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다. 김종직의 벼슬은 도승지, 이조참판, 한성부윤, 공조참판(工曹參判), 형조판서,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까지 이르렀다. 정치적으로는 성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의 문인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으므로, 훈구파(勳舊派)와의 반목과 대립이 심하였다. 김종직은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도학정치(道學政治)를 펼치기 위해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였으며 결국 훈구파 세력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金叔滋)로부터 수학하여 후일 사림의 조종(祖宗)이 되었다. 김종직은 문장·사학(史學)에도 두루 능했으며, 절의(節義)를 중요시하여 조선시대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김종직의 도학사상은 제자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일손(金馹孫)·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이맹전(李孟專)·이종준(李宗準)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김종직의 도학을 정통으로 계승한 김굉필(金宏弼)은 조광조(趙光祖)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켰다.
김종직(金宗直)의 도학이 조선시대 도통(道統)으로 이어진 것은 화려한 시문이나 부·송 등의 문장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김종직(金宗直)이 죽은 후인 1498년(연산군4) 그가 1457년에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관(史官)인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훈구파의 거물급이었던 이극돈(李克墩)에게 발각되었고 같은 훈구파 세력이었던 유자광(柳子光) 등이 주도하여 조선시대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게 되었다. 유자광은 김종직에 대해 사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초나라 회왕(懷王), 즉 의제(義帝)의 죽음을 조문하기 위해서였는데, 숙부인 서초패왕 항우에게 희생당한 어린 조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의제를 조문하는 내용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제자인 김일손은 스승의 이 글이 사림파의 의식을 가장 잘 반영했다고 판단하여 사초(史草)에 실었다. 그러나 이 사초 문제는 1498년 무오사화의 발단이 되었고, 결국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는 화를 입었다. 그러나 이 희생은 역설적으로 사림파 영수 김종직의 이름을 후대까지 널리 알리게 만들었다. 반정으로 중종(中宗)이 즉위하여 훈구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다시 정권을 잡게 되자 김종직의 신원이 회복되고 숙종(肅宗) 때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 구미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開寧)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점필재집(佔畢齋集)』, 저서에 『유두유록(流頭遊錄)』『청구풍아(靑丘風雅)』『당후일기(堂後日記)』등이 있고, 편서에 『동문수(東文粹)』『일선지(一善誌』『이준록(彛尊錄)』 등이 있다. 『』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김숙자(金叔滋)는 김종직의 아버지이자, 스승이다. 그는 고려 말인 1389년(창왕 원년, 공양왕 원년)에 태어나 1456년(세조 1년)에 세상을 떠난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다. 자는 자배(子培)이고, 호는 강호(江湖) 또는 강호산인(江湖散人)으로, ‘강호선생’으로 불렸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김숙자(金叔滋)의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선산 김씨(善山金氏)는 김알지의 30세손이며 문성왕의 8세손인 김선궁을 시조로 모시고 있다. 대대로 선산 봉하루지(지금의 구미 완전리)에 살며 관향으로 삼았다. 김숙자의 할아버지는 사재령 김은유이고, 아버지는 진사 김관이다. 김숙자는 선산 영봉리(지금의 완전리, 이문리, 노상리 일원)에서 태어났다. 이때의 선산은 유교적 문풍이 성숙돼 있어서 길재와 전가식 등 많은 유학자가 나온 곳이다.
김숙자의 아버지 김관은 이 문풍에 영향을 받아서 집안을 사족(士族)으로 성장시키려는 꿈을 품었다. 그래서 스스로 글을 익혀 『소학』을 공부할 정도로 천재성을 보인 아들 김숙자(金叔滋)를 12세에 길재(吉再) 문하에 들여보냈다. 하지만 김숙자는 길재의 학문이 너무 높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황간(지금의 충북 영동)의 현감으로 내려온 윤상(1373~1455, 호는 별동)을 찾아가 『주역』을 배우고 다시 길재(吉再) 문하로 돌아가서 수학했다.
김숙자(金叔滋)는 1414년(태종 14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1419년(세종 원년) 식년 문과 병과로 급제해 사관에 임명됐다. 고령현감, 내자주부를 역임한 후1438년(세종 20년) 집현전 천거로 서연정자를 겸했다. 고향 선산의 교수관(각 읍 향교에 파견한 교관), 개령현감(개령은 지금의 김천), 풍기군사 등을 역임한 후 단종이 즉위하여 성균관사예에 올랐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그 훈구세력의 견제가 심해지자 사직하고 선산(善山)으로 내려갔다. 1455년 처가가 있는 밀성(密城, 밀양)으로 이사했고, 성리학을 널리 전파하여 조선 사회에 도학이 뿌리 내리게 함으로써 왕위 찬탈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려 했다. 그러나 뜻을 다 펼치지 못하고 이듬해 3월 2일 세상을 떠났다. 선산 낙봉서원, 거창 일원정, 고창 운곡서원 등에 제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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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설화(說話)와 민요(民謠)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골이 깊으면 물이 맑다. 세월이 깊으며 유서가 많고 유서가 많으면 이야기도 많다. 오래된 옛 고을에는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전한다. 특히 뛰어난 인물에 대한 전설, 지명의 유래담, 기암의 전설 등이 그것이다. 밀양의 인물 전설은 변계량(卞季良), 김종직(金宗直), 임유정(任惟政), 박곤(朴坤)에 관한 것이 있다.
조선 전기의 정치가 변계량(卞季良)의 일화로는 다른 사람과 혼인한 처녀가 변계량의 인품과 벼슬에 반해 그 남편을 죽이고 변계량과 다시 혼인하여 세 자식을 낳고 살았는데, 뒤에 이 사실을 안 변계량이 그녀와 세 아들을 죽이고 「여자개가금지법」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김종직(金宗直)에 대한 일화가 특이하다. 김종직이 태어나자 마을 앞 시냇물의 맛이 사흘 동안 매우 달아 내 이름을 감천(甘川)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김종직은 어릴 때 짐승의 말소리를 알아들었다고 한다. 한편 죽을 때 유언으로 자기 관의 길이를 보통 관보다 한 자 길게 만들라고 후손에게 당부하여, 유언대로 관을 만들어 장사를 지냈다. 그 뒤 무오사화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할 때 관만 끊기고 시체는 손상을 입지 않았으며, 이장을 할 때 보니 비록 시체지만 머리카락·손톱·발톱 등이 자라서 자신의 무죄를 무언으로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임유정(任惟政)에 관한 이야기는 극적이고 기이하기 이를 데 없다. 임유정의 후처가 종을 시켜 전처 소생인 장남을 장가 든 첫날밤에 죽였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며느리가 자살하였다. 이에 임유정은 후처와 후처 소생을 집에 가두어 불을 질러 타죽게 하고, 진사인 자신은 산으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 뒷날 임유정은 이름보다 호로 널리 알려졌는데 그가 곧 사명당(四溟堂)이다. 유정(惟政)은 어느 날 휴정(休靜)과 추어탕을 먹은 뒤, 승려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먹은 것을 모두 토하기로 하였다. 휴정은 산 미꾸라지를 토하였으나, 상좌로 있던 유정은 송어새끼 같은 물고기를 토하였다. 이를 부끄럽게 여긴 유정이 열심히 수도하여 뒷날 훌륭한 고승이 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송어새끼 같은 물고기는 중의 턱에서 나왔다고 하여 중텍이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이 표충사 뜰에 지팡이를 꽂은 것이 자라서 모과나무가 되었고, 철화방(鐵火房) 뜨거운 곳에서 ‘雪(설)’자를 크게 써 놓고 떨고 있었다는 이야기, 임진왜란이 끝난 뒤 일본에 강화사(講和使)로 가서 왜인들을 감복시켰다는 일화가 즐겨 이야기되고 있다.
박곤(朴坤)에 관한 전설은 물고기가 용(龍)이 되어 승천하는 이야기다. 박곤은 어릴 때 집안이 가난해 집안 빈 터에 못을 파고 물고기를 길러 홀어머니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그는 이 연못에서 물고기가 용으로 승천할 때 남겨 놓은 한 쌍의 비늘로 말다래를 만들어 타고 싸움터에 나가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또한 어느 이른 봄날 남천에 물고기를 잡으러 갔을 때 자라 한 마리가 황금빛 찬란한 물고기를 물어뜯고 있는 것을 보고 작살로 자라를 내리꽂아 물고기를 살려 주웠다. 물고기를 자기 집 연못에 가져다 길렀더니 어느 날 용이 되어 승천하면서 비늘을 남겨 놓아 이 비늘 덕택으로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싸울 때마다 승리했다고 한다. 뒷날 명나라까지 그 이름이 알려져 명나라에 초대되어 황제 앞에서 그 곳 장수들과 무예를 겨루어 크게 이겼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자객이 밤에 몰래 그를 죽이려 했으나, 하늘에서 용이 불벼락을 내려 자객이 죽었다. 이 용은 전에 박곤이 구해 준 물고기였다. 이 일 때문에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고 미녀까지 받아 뒤에 아들 삼형제를 낳았다. 아들들 역시 재주가 뛰어난 무인이어서 후세 사람들이 장종삼걸(將種三傑)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사신(邪神)을 모신 사당을 불 지르는 등 대담한 행동을 보여준 「손병사 어머니전설」, 야욕에 찬 통인의 손에 남몰래 피살된 「아랑전설」 등이 있다. 지명전설로는 임진왜란 때 한 마을에서 충신·효자·열녀 등이 두루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지어진 「삼강문(三綱門)과 삼강동유래(三綱洞由來) 전설」이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산길을 가다가 술에 취해 잠자는 주인에게 다가오는 불길을 개가 온 몸에 물을 묻혀 와 꺼서 주인을 구하고는 자신은 죽었다는 「개고개 전설」이 전해진다.
또한, 신라왕이 죽어 동해 용이 되어 왜적의 본거지인 섬을 없애고 날아와 미륵불이 되고 그때 따라온 고기들이 돌이 되었다는 「만어산전설(萬魚山傳說)」이 있다. 이 밖에 기암(奇巖)에 얽힌 이야기로, 안씨 집안을 지켜준다는 「치마바위전설」, 종의 시샘으로 죽은 처녀의 원혼을 달래주듯 하늘이 종을 징계했다는 「우릉바위전설」, 바위를 깨니 조개가 나오고 그 일이 있은 뒤로 마을이 부흥했다는 「조개바위전설」, 불효자식이 벼락을 맞아 바위로 변했다는 「벼락바위전설」 등이 전한다.
「밀양아리랑」
우리나라에서 민요, 신민요 또는 유행가에 ‘아리랑’이라는 제목이 붙거나 뒷소리[후렴구]에 ‘아리랑’이라는 말이 붙는 노래는 매우 많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에 널리 불리는 아리랑은 「강원도아리랑」·「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이라 할 수 있으며 신민요 아리랑의 효시라고 보아도 무관한 「경기아리랑」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라는 노래로 국민가요처럼 불린다.
「밀양아리랑」은 ‘남녀 간의 사랑’을 주제로, 8분의 9박자 세마치 장단으로 되어 있고 8장단을 메기며 8장단을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났네에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하고 뒷소리[後斂句]로 받는다. 선율은 경토리와 메나리토리가 뒤섞여 있으며, ‘새마치 장단’에 맞추어 비교적 빠른 템포로 비교적 씩씩하고 경쾌하다. ‘시누부 죽으라고 축원을 했더니 고추장 단지가 내 차지’ 등의 사설에 보이는 투박한 정서와 빠른 리듬, 그리고 내어지르는 소리가 특성이다. 그리고 반말투의 첫 사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등 영남지역 사람들의 기질이 드러나기도 한다.
밀양아리랑 대축제는 매년 음력 4월 16일 이전에 길일을 택하여 4일간 개최하는 종합민속축제로서 사명대사의 충의정신, 김종직 선생의 지덕정신, 아랑낭자의 정순정신을 기린다. 남천강변 야외공연장 등 시 일원에서 진행된다. 매년 10월에 열리는 밀양예술제는 전통문화예술 계승발전과 지역예술 활성화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