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윤수 시인>>
<<사윤수 시인의 양력>>
* 1964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남.
* 영남대학교 철학과 졸업.
* 201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시집 : 『파온』, 『그리고, 라는 저녁 무렵』
*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2018년 서울 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사윤수 시인의 시>>
비꽃/사윤수
폭우는 허공에서 땅 쪽으로 격렬히 꽃피우는 방식이다. 나
는 비의 뿌리와 이파리를 본 적이 없다. 일체가 투명한 줄기
들, 야위어 야위어 쏟아진다. 빗줄기는 현악기를 닮았으나 타
악기 기질을 가진 수생생물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 비에겐 나
비가 아니라 허공을 버리는 순간이 필요한 것, 하얀 꽃무릇 군
락지가 있다고 치자. 그게 통째로 뒤집어져 세차게 나부끼는
장르가 폭우다. 두두두두두두 타닥타닥타닥 끊임없이 현이
끊어지는 소리, 불꽃이 메마른 가지를 거세게 태우는 소리가
거기서 들린다. 낙하의 끝에서 단 한순간 피고 지는 비꽃, 낮
게 낮게 낱낱이 소멸하는 비의 꽃잎들.
그 꽃 한 아름 꺾어 화병에 꽂으려는 습관을
나는 아직 버리지 못했다.
저녁은 단벌신사/사윤수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교장선생님은 낡은 양복 한 벌만
입고 다니셨지 우리가 단벌신사라고 놀리면 교장선생님
은, 때묻은 것이 권위 있다며 찡긋찡긋 웃곤 하셨네
진부하면서도 유서 깊은
이 저녁의 권위는 어디에서 왔을까
오래되기로는 저녁만 한 것이 없고
때 묻은 것이야 둘째가라면 서러울 저녁이 많았으니
저녁도 단벌신사,
저녁이 단벌신사라면 그 구두도 나달나달 닳고 구멍 났겠지
유구한 저녁의 힘은 그렇게
눌어붙은 다리미 자국과
기울고 구멍 난 저녁의 구두 뒤축에서 오는지도 모를 일,
밤수지맨드라미 빛 노을 위로
새들도 단벌로 날아가고
먼 길 걸어온 사람들은
팥 앙금처럼 쌓이는 어둠 속에 두 발의 뿌리를 내린다
씻고 벗고라는 말,
하나뿐인, 한 벌뿐이라는 뜻
씻고 벗고라는 간결함이
얼갈이 열무김치 맛처럼 좋아라
열 벌 스무 벌보다 단벌이 권위 있어
도둑도 단벌은 훔쳐가지 않네
오래되고 때 묻어서 더 빛나는 단추들
그 별자리 이름을 불멸의 저녁이라 하자
수평선이라는 직업/사윤수
수평선도 나름 바쁜 직업이다
수평선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들을 담당한다
날마다 해를 길어 올리고
수평선이 없다면 해는 어디로 떠오르며
달은 어느 배(腹)를 빌려 둥글어지겠나
수평선이 아무 일 안 하는 거 같아도
그 자리 고요를 지키고 있는 것이 수평선의 주소다
내게도 그런 수평선 하나 있다면
본적(本籍)이 필요 없으리
너의 타는 마음을 수평선에 널어 말릴 때
수평선은 그렇게
세상의 단 하나뿐인 너에게 기여한다
고깃배들 불빛이 보석 브로치처럼 밤바다에 맺혔다
이 배 저 배 배다른 새끼들까지 젖을 물리며
수평선은 순한 물의 짐승으로 누워 있다
만선이 될 때까지 새벽이 올 때까지
낯선 섬마을에서
나도 가끔 저 수평선의 무릎을 베고
잠들곤 한다
화엄장/사윤수
지리산 화엄사에
독수라는 부처가 살고 있었다는데
어느 날
법당의 촛불이 다 타고
공양주도 잠든 밤
부처가 마을로 간 까닭은
불심 깊은 보살이
부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라는데
독수공방은
부처의 방이 비었다는 뜻입니까
부처가 나의 방에 없다는 뜻입니까
빈 적도 없고 없는 적도 없어라
구름은 밤하늘에도 쉬지 않고 흐르나니
그날 밤
보살과 부처가 이루어 소신공양 보시하며 머문 곳이
화엄사 아래 화엄장이라는데
꽃들은 새가 되어 날아오르고
별들이 은하수에서 뱃놀이하는
화엄화엄 화엄의 장, 그 장엄한 전설이
아직 화개장터에 남아 있다는데
부처의 자식은 열 살이 될 때까지 색동옷을 입혀 키우면
무병장수한다는 설도 있다는데, 있다 하는데
슬픔의 높이/사윤수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에 앉은 중년 여자가 운다
세하게 흐느끼며 훌쩍훌쩍 콧물을 삼킨다
음 아파 우시는가
이 아파 우시는가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뒤인지 모를,
휴대폰을 열어 들여다보고
휴대폰을 닫으며 고개 떨군다
그 속에 아픔이 저장되어 있는지
그 속의 아픔이 삭제되지 않는지
실밥처럼 툭툭 터질 듯한 울음을
손수건으로 꾹꾹 여민다
슬픔은 식물성이어서
고도 칠천 미터 상공에서도 발아하는구나
화물칸에 싣지 못하고
선반에 따로 올려놓을 수 없는 슬픔
무심한 구름 속을 날아가는 쇳덩이 안
이쯤 높이에서도 슬픔은 창궐하나니
항로를 이탈한 그녀의 눈물이
기류가 불안정한 지역을 오래 통과하고 있다
허공의 비포장 길을
흔들리는 슬픔 혼자 가고 있다
만추(晩秋)/사윤수
목관악기로 불어 넣은
깊고 긴 숨은
악기 속 어느 마을에 닿아
키 큰 나무숲을 흔드는가
소프라노의 금빛 드레스가
노을에 야위어가는 오후,
소리는 소리를 닮지 않은
먼 곳으로부터 와서
점점 빛나는 소리가 되었다
저무는 서쪽 얼굴에
윤슬이 그렁그렁하다
저 빛은 죽은 사람들이 잠시 다녀가는
젖은 발자국
숲 너머 긴 강물이
당신의 연주를 안고 흘러간다
목관악기가 붉게 부서진다
청자상감매죽유문장진주명매병의 木牘 /사윤수
그날 밤 소쩍새 소리에 처음 눈을 떴습니다 검은 허공이 실핏줄로 금이 가 있었습니다 사깃가마 속 사흘밤낮 회돌이치는 불바람이 나를 만들었지요 흙이던 때를 잊고 또 잊어라 했습니다 별을 토하듯 우는 소쩍새도 그렇게 득음하였을까요 나는 홀로 남겨지고, 돌아보니 저만치 瓷器 파편 산산이 푸른 안개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모서리에 기러기 매듭 끈이 달린 국화칠색단 남분홍 보자기가 나를 데려갔습니다 다포 겹처마 팔작지붕 아래 슬기둥 덩뜰당뜰 당다짓도로 당다둥 뜰당* 거문고 소리 깊은 집이었습니다 달빛 애애한 밤 오동 잎사귀 워석버석 뒤척이면 나는 남몰래 사수 겹머리사위체 춤을 추곤 했지요 대숲에 댑바람 눈설레 치고 지고 내 몸에 아로새겨진 버드나무에도 당초호접무늬 봄이 수백 번 오갔습니다
여기는 커다란 하나의 무덤 그 속에 작은 유리무덤들, 이제 나는 침침한 불빛에 갇혀 있습니다 내가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나도 모르는데 날마다 많은 사람들 들어와 나를 쳐다봅니다 밖에는 복사꽃잎 붉은 비처럼 어지러이 떨어지는지** 전해주는 이 아무도 없고 그 사이로 천년의 강물 흘러갑니다 때로는 내가 흙이던 날의 기억 아슴아슴 젖어옵니다 누가 이곳에 대신 있어 준다면 나는 잠시 꿈엔 듯 다녀오고 싶건만 아, 그 소쩍새는 아직 울고 있을까요
* 슬기둥 덩뜰당뜰 당다짓도로 당다둥 뜰당 : 책 『슬기둥 덩뜰당뜰 저 소리 들어보오』에서 빌림.
** 매병에 새겨진 시문 將進酒 가운데, 桃花亂落如紅雨.
빨래가 마르는 시간/사윤수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빨래가 널려 있다
이동 건조대 가득 큰 대자로
위쪽은 나란히 직수굿하고
아래는 넌출진 구비를 드리운다
세탁기 속에서 혼비백산
그 컴컴하고 거친 물살을 통과한 기억이
빨래에게는 없는 것 같다
머릿속까지 표백되었을지도 모르니
세상에는 매달려서 견디는 것들이 많다
나도 어떤 것에 안간힘으로 매달려
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던 때가 있었다
외줄을 잡고 젖은 빨래처럼 허공에서 뒤채었다
씨앗이 여무는 시간도 그러했으리라
양팔 가득히 빨래를 걸치고 서 있는 건조대가
수령 오래된 한 그루 빨래나무 같다
은결든 물기와 구김을 다림질해 주듯
햇볕이 자근자근 빨래의 등뼈를 밟고 다닌다
어느 어진 이의 심성과 순교의 윤회일까
제 본분인 양 빨래는
모짝모짝 부지런히 말라간다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그 배경에 잠풀 향기 은은하다
착차스/사윤수
줄줄이 꿰인 짐승의 회색 발톱들이
반질반질 매끄럽다
안데스 라마들은 죽을 때
제 발톱이 잘 뽑혀서 악기가 된다는 것을 안다
마지막 눈을 감으며 안간힘으로
제 생의 기억을 밀어 넣어 준 발톱의 안쪽이 깊다
흔들면
오래전에 살점과 물렁뼈가 빠져나간 흔적이
착-착-착 흔들리는 소리
흙바람 속을 저물도록 걸었을
착-착-착 찰찰 기억의 껍질들이 부딪치는 소리
찰찰찰찰찰
소리가 소리를 자꾸 흔들게 만드는 소리
그것은 살아서 이룰 수 없는 구음이므로
돌아오지 못할 협곡을 맨발로 건너간
라마 떼가 물끄러미 이쪽을 돌아본다
파란 잉카의 하늘이 짐승의 속눈썹에 젖어 있다
차르르 차르르르
야윈 뒤편에서 와락 안고 싶은 소리
맑은 물살처럼 뒤집어쓰고 싶은 소리
죽어서 나도 악기가 되고 싶은 소리
* 착차스 : 안데스 지방의 민속 타악기.
벽에 박힌 못이 흘러내렸다/사윤수
거듭 내리치는 우레와 불꽃을 품고 돌이킬 수 없는 절벽 깊이 박혔다 단 한 걸음도 허락되지 않는 견고한 부동의 곡예 실핏줄 균열마저 움켜쥐어야 더욱 단단히 뿌리를 내릴 것이므로, 피가 거꾸로 솟는 자세를 묵묵하게 버텨내는 것에 너의 지극함이 있었다
벽의 지층에서 못의 뿌리가 갈래갈래 자랐다 어둠을 먹고 못은 붉은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싶었을 것이다 이마가 은색인 족속이 저무는 나의 기슭과 마주칠 때마다 유난히 빛난다면 그것을 저녁별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겠나 못도 오래 박혀 있으면 누군가 거는 외투만으로도 그 사람 생의 무게를 잴 수 있다
裵湖의 음성 같은 가을, 등에 못이 박힌 사람들이 서성인다 등이 벽인 줄 알고 잘못 일어난 일일까 귀뚜라미 노래로 만든 목걸이를 못에게 걸어주자 굵은 첫 빗방울처럼 박혀 있던 못이 툭 떨어진다 시간의 어금니 하나 빠지듯 허공 아래 풍덩! 그토록 드팀없던 한 세계가 해탈 臥佛이다 빈 동굴 한 채 유적지 되어 벽에 서리다
구름대장경/사윤수
위에 위에 허공 위에
그 위에 더 위에 구름나라
여기엔 구름이 산다
가없는 말발자국구름
하늘 솥 가득 수제비구름
긴긴 띠구름
구름 마을 구름집들
굽이굽이 구름굽이
사래 긴 구름밭
울울창창 구름숲
일파만파 구름파도
천 권 만 권 구름책
구름 안도 구름
구름 바깥도 구름
구름 아닌 것을 찾으려 한다면
구름은 허락하겠지만
나는 구름문을 열고 어디로 나서겠는가
이륙하기 전에 흩날려 보낸 문장들이
저기 구름으로 변해 있다
구름 나라에선 구름을 믿어야 한다
호호망망 오천오백 마일 로마행
나는 말[言]의 나라에서 왔으나
구름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전부가 구름이며 하나의 구름인 구름대장경
한 필 오려서 장삼 만들어 입고픈
오동나무는 한 그루 바다/사윤수
오동나무를 심고 싶어
작은 섬에는 큰 나무가 못 자라니까
나무가 많이 없으니까
그 중에 오동나무가 맨 먼저 떠올랐어
섬에게 오동나무를 보여주고 싶어
한 번도 오동나무를 보지 못한 섬에게
오동꽃을 보여주고 싶어
오동꽃은 숭어리 숭어리
허공에서 보랏빛 종소리를 울리지
세상에 없는 것을 찾아 헤맨
거친 꿈들이 해풍에 나부낄 때
오동꽃 등불이 우리를 환하게 비춰줄 거야
오동나무 이파리가 물결치는 거 보면
그게 바다 같아 바다를 넓적넓적하게 오려서
나무에 빽빽하게 붙여놓은 거 같아
오동나무는 한 그루 바다
가을밤이면 오동나무 이파리
워석버석 파도치는 소리
먼 달까지 별까지 밀려가는 소리
너에게 들려주고 싶어
섬이여, 한 그루 오동나무 바다를
너의 마을에 심고 싶어
저녁이라는 옷 한 벌/사윤수
누구에게나 옷 한 벌이 있다
모양과 색깔이 없는 옷
눈에 보이지 않고 벗을 수 없는 옷
잘 때도 입고 자는 저녁이라는 옷
이것은 인류의 오랜 풍습인데
어느 날 누군가가 갑자기 영원히 잠들더라도
저녁이라는 옷 한 벌은 이미 늘 입고 있어서
금세 어두워지기 쉽다
밤이란,
옷이 필요 없는 곳으로 떠나는 사람들이
생(生)의 문지방에 저마다 벗어놓고 간
저녁이라는 옷들이 쌓인 현상이다
그때 슬픔이 옷더미 벽에 자꾸 머리를 찧으며 부딪쳐
이쪽이 한동안 캄캄해지는 일이다
남는 사람과 떠나는 사람 사이에 옷이 있다
옷을 건너간 사람은 다시 옷을 건너올 수 없고
옷을 붙들며 남겨진 사람은 옷을 건너갈 수 없다
불이 서둘러 옷을 태워버리기 때문이다
서로 헤어지거나 멀어질 때
손이나 발보다 옷자락을 붙잡고 우는 풍습도 그래서 생긴 거 같다
시간의 뜨개실로 짠 옷을 입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하나의 작은 저녁이다
이겨도 져야 하는 노을처럼
어두워지면 저녁이라는 접두사가 붙지 않는 것이 없다
자두/사윤수
자두나무에 올라간 당신 한 움큼 자두를 땁니다
땅 위에 서서 당신을 쳐다보고 있는
나를 당신이 내려다보며 자두를 건네줍니다
빨간 빨그댕댕 자두 알들 당신 손에서 내 손으로
주먹 쥔 갓난아기 미끄러지듯 굴러 내립니다
동글동글 하나 둘 셋 넷
당신 손가락 끝을 지나 맞대고 벙그린 내 두 손으로
자두가 다 건널 때까지 당신과 내가 자두를 바라봅니다
나는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자두나무에 올라가 자두를 따고 있으리라는 것을
서로 자두나무 곁을 떠나더라도
이생에서 우리 잠시 자두나무 식구였다는 것을
뻐꾸기 소리 영롱한 한나절
풀쩍, 당신이 자두나무에서 뛰어내립니다
빨간 자두 알알이
수많은 풍선되어 날아오릅니다
갱빈에는 돌도만코*-손님/사윤수
목단 꽃 뒤에 숨어서 보았지 나 어릴 적에, 마당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던 너를 나
는 손님인 줄 알았다 제삿날 와서 하룻밤 자고 돌아가던 친척처럼, 목단 꽃잎 검게 지듯 너 돌
아갈 줄 알았다 기별 없이 예의도 없이 들이닥쳤던 너는 그러나 그날로 눌러앉아 숯검정 정지
로 열무시래기 걸린 뒤안으로 달구새끼들 도리반거리는 마당으로 잽싸게 쫒아 다니고, 마루 밑
으로 장독대로 지붕 위로 펄펄 훌훌 날아다녔지 쾌지나칭칭나 ~네 너는 밥상을 수시로 마당에
패대기치고 장독대 옆구리 걷어차고 방문 너들너들 떨구고, 달이 뜨거나 별이 지거나말거나 우
리 식구를 뜯어먹으며 세월을 휘저으며 찬란하게 슬픈 가문을 만들어갔다 너를 피해 내가 열
여섯 때 바다 깊이 뛰어드니 거기까지 따라와 너는 나를 물미역 건지듯 건져냈더구나 엄동설
한에 먼 길 이사하여 너 몰래 잘 도망 온 줄 알았다만 네가 먼저 도착해 있었지 나 시집가도 너
는 나를 계속 불러냈지 가라앉지도 늙지도 않는 너를 어루고 달래고, 업고 재우고, 깨면 안고
울었다 꽃눈개비 쏟아지던 작년 봄에는 나 대신에 난데없이 내 동생을 잡아먹고 그래도 아직
배고픈 눈을 하고 이제 네가 목단 꽃 뒤에 숨어 내 눈치를 보는 손님이여, 슬픔보다 크고 눈물보다
질긴 장구한 손님이여!
*영남전래민요 「칭칭이」 가운데
배롱나무/사윤수
꽃을 벗은 배롱나무
한 그루 하얀 불꽃이네
허공을 다 내어 주었겠으나 믿지 아니하고
마디마디 외면하였네
허공을 아름답게 속였네
동국진체 긴 편지를 쓰듯
눈(雪)을 기다리는 자태가
백년이네
코스모스/사윤수
코스모스가 살아온 방식은
한결같이 흔들렸다는 거다
이 바람결에 쏠리고 저 노을 쪽으로 기울며
제 반경을 끊임없이 넘어가던 그 범람이
코스모스의 모습 아니던가
가만히 서 있을 땐 속으로 흔들리는 꽃
몸이 그토록 가늘고 긴 것은
춤을 추라고 생겨난 것이다
가늘고 길수록 춤은 위태하니
위태해야 더욱 춤인 것을
어머니께서 나를 지으실 때
꽃대 무너진 아득한 어둠 속에서
그 꽃잎 한 움큼 뜯어 삼켰던 것일까
내 몸의 성분은 수많은 코스모스의 퇴적물 같다
눈을 감아도 흔들리고
국밥집 앞에서 개업식 공연하는
각설이 타령만 들어도 춤추고 싶다
한복입고 환영식에 나온 평양아가씨들 같은
코스모스는 뜨겁게 흔들리다 죽은 것들의 환생이다
흔들리며 사는 것들의 뒤통수에서 수군거리지 말자
가을 국도(國道)의 평화는 온통
코스모스가 이루어 놓은 것이니
파온(婆媼)/사윤수
파온,
세 번째 폭우가 그쳤다
멀리 숨었던 새들이 돌아오고
풀벌레들 똘똘똘 또르르르 노래하겠지
파온,
배롱나무 제 치마 아래로
자디잔 꽃잎 낭자하게 해산(解産)하였다
파온,
어디쯤에서
무말랭이 가지말랭이 박오가리가 마르고 있을 거 같아
슴슴히 뒤집어줘야 할 텐데, 생각한다
한나절 뒤뜰에 앉아 가만가만 울콩을 까고 싶다
파온,
조금 물 때* 밀치락달치락 갈마들어
왈강달강 왈강달강 조약돌들
파도는 밤새워 광목 이불 뒤척이는 소리
파온,
생의 무늬가 아스라이
흩어지던 은빛 낙발(落髮)이었나
그 무늬 만져보면 부드럽고 따스하니
진양조로, 불어라 바람이여
*조금 물때 — 밀물과 썰물의 변화가 심하지 않은 때
청보리밭/사윤수
이 짐승은 온 몸이 초록 털로 뒤덮여 있다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초록색이어서
눈과 코와 입은 어디에 붙어있는지 모르겠다
초록 짐승은 땅 위에 거대한 빨판을 붙인 채 배를 깔고
검은 밭담이 꽉 차도록 엎드려 있다
이 짐승의 크기는 백 평 이백 평 단위로 헤아린다
크지만 순해서 사납게 짓는 법이 없고
검은 밭담 우리를 넘어가는 일도 없다, 만약
밭담을 말(馬)처럼 만든다면 짐승은 초록말로 자라고
말은 초록 갈기를 휘날리며 꿈속을 달리겠지
바람이 짐승의 등줄기를 맨발로 미끄러져 다닌다
바람의 발바닥에 시퍼렇게 초록물이 들었다
굽이치는 초록 물결 초록 머리채
짐승은 바람의 안무에 초록 비단 춤을 춘다
이 짐승은 일생을 돌아눕지 않는다
한 여자만을 사랑했다는 걸 보여주는 건
꼿꼿하고도 무성한 황금빛 수염이다
이제 바람은 참빗을 들고 짐승의 수염을 곱게 빗어준다
짐승은 가끔씩 수염을 일제히 세우고
바람의 발바닥을 간질이며 논다
바람의 발바닥엔 그 짐승이 새긴 초록 문신이
아직 푸르게 남아있다
황룡사지/사윤수
당신 계신 곳으로
오래 걸어온 동쪽입니다
낮과 밤의 몸뚱이가 베어지고 불타고
세월의 지문과 시간의 잔해만 남은 신전
하얀 나비 떼 니일니일 햇빛 속으로 날아오릅니다
아득히 자줏빛 구름이 옷소매를 드리워
내 눈을 가립니다
아무것도 맹세할 수 없는 풍정
노래와 노래가 뼈와 뼛속으로 스며드는 늪입니다
당신의 손을 잡는 순간
내가 산산이 부서질 예감입니다
어찌 하시렵니까,
다시 천년을
방어(魴魚)/사윤수
머리에 뼈만 달린 주검이다
피 한 방울 흘린 자국 없이 살점은
이미 한 점 한 점 잘 도려내졌으니
자신의 죽음을 방어하지 못한 방어,
형식은 죽었으나 내용은 죽지 않았다는 듯
머리를 꼿꼿이 세운 채 가끔 입을 뻐끔거린다
밀물로 밀려왔다가 썰물로 쓸려가는 쇠잔한 숨
입 속의 어둠이 열렸다 닫혔다 한다
기억은 주검 안에 아직 살아서
모슬포 푸른 바다를 건너는가
저 살점들을 다시 뼈에 봉합하면
방어는 살아서 수평선 끝까지 헤엄쳐 갈 수 있을까
무슨 생각이 났는지
죽은 줄도 모르고 너는 또
파르르르 지느러미를 떤다
물고기 한 마리만 떠나도 바다는 허전한 법,
파도치는 무채와 오색 데커레이션 위에
가지런히 누운 방어회
한 틀 꽃상여 같다
곡두는 없으나 먹기조차 아까운 순교다
리스본/사윤수
―까몽이스 광장
동상 위로 비둘기들이 날아오른다
누가 그 높은 곳까지 올라가
검은 안대를 씌워놓았나
1547년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오른쪽 눈을 잃었고,
메콩강에서 조난을 당해, 떠내려가는 애인을 붙잡지 못하고
자신의 원고를 한 손에 든 채 헤엄쳐 나온
포르투갈의 민족시인 루이스 드 까몽이스
광장엔 저마다 앉았거나 누웠거나
노래하거나 춤추거나
시인의 영혼 아래 시끌벅적하다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맥주 집, 에그타르트, 기념품 가게가 즐비하고
여행객들이 북적이는 노천 커피숍엔
음유시인 페르난두 페소아가 태연히 앉아 있다
그는, 시는 더 차가울수록 더 진실하다,고 썼다
나는 오로지 이 풍경들을 보기 위해
마지막 금붙이를 팔아 여기까지 왔나니
유유幽幽한 테주강 바람이 불어와
자카란다 꽃숭어리들이 허공에 나부끼는 리스보아의 유월
여기서부터 고독이 끝나고 자유가 시작 된다*
밤이 오면
격랑의 목청을 뿜는 파두 라이브를 오래도록 보리라
*“여기서부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 된다”는 까몽이스의 시구를 변용.
리스본/사윤수
-호카 곶
와보지 않아도 될 줄 알면서 왔습니다
바다와 등대뿐인 줄 알면서도 와보고 싶었습니다
시든 자국을 보니
지나간 오월엔
노란 칼잎막사국꽃이 이곳을 뒤덮었겠군요
꿈만 같았겠군요
끝까지 가본다는 것
끝에서는
돌아가지 않거나
되돌아가는 길 뿐이겠지요
그럴 줄 알면서도 끝까지 가보고 싶었지요
이곳 기념품 가게에는 팔지 않는
끝이라는 말
당신처럼 참 끝스럽고 칼 같고
깨-끗,
합니다
*호카 곶 - 포르투갈에 있는 유라시아 대륙 최서단 곶
지붕을 잃어버리다/사윤수
하늘을 조금씩 떼어 인간에게 나누어준 것이 지붕이다
술 취하여 농기구를 집어 들고치는 아버지를 피해 한바탕 맨발로 동네를 돌아오면 시린 발끝에 달빛을 끌어당겨 덮어 자곤 했다 명지바람 발밤발밤 지붕 위를 거니는 소리 툭, 투둑, 투두둑, 자드락비 맨 먼저 떨어지는 소리 감또개 뚝! 또그르르 굴러 내리는 소리 그 우주의 초침 소리가 나를 키웠다
사람들은 지붕을 걷어냈다
지붕 위에 집을 짓고 또 지으며
사람 위에 사람이 떠다니는
욕망의 층수를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가슴에 비가 샌다거나 무엇을 찾아 헤매는 이들은 지붕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물탱크, 녹슨 에어컨 외기, 손바닥 만한 남새밭을 이고 서 있는 집들
고층 건물 꼭대기엔 불면의 안테나 어지럽게 솟아있다
할아버지를 내가 본 적 없듯이
아버지에겐 일찍부터 지붕이 없었던 것을
머위 잎 푸른 기억의 툇마루에 앉아
지붕을 타고 흘러내리는 낙숫물 소리 듣는다
처마 밑에 일가를 이룬 제비 식구 촉촉한 새끼들
새롱새롱 감꽃 같은 입을 벌리며 오졸거린다
푸른 물소리 아득히 번져간다
청보리밭/사윤수
이 짐승은 온몸이 초록 털로 뒤덮여 있다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초록색이어서
눈과 코와 입은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르겠다
초록 짐승은 땅 위에 거대한 빨판을 붙인 채 배를 깔고
검은 밭담이 꽉 차도록 엎드려 있다
이 짐승의 크기는 백 평 이백 평단위로 헤아린다
크지만 순해서 사납게 짖는 법이 없고
검은 밭담 우리를 넘어가는 일도 없다, 만약
밭담을 말(馬)처럼 만든다면 짐승은 초록 말로 자라고
말은 초록 갈기를 휘날리며 내 꿈속을 달리겠지
바람이 짐승의 등줄기를 맨발로 미끄러져 다닌다
바람의 발바닥에 시퍼렇게 초록물이 들었다
굽이치는 초록 물결 초록 머리채 초록 비단 춤
이 짐승은 일생을 돌아눕지 않는다
한 여자만을 사랑했다는 걸 보여주는 건
꼿꼿하고도 무성한 황금빛 수염이다
바람은 참빗을 들고 짐승의 수염을 곱게 빗어준다
짐승은 수염을 일제히 세우고
바람의 발바닥을 간질이며 논다
바람의 발바닥엔 그 짐승이 새긴 초록 문신이
아직 푸르게 남아 있다
수평선이라는 직업/사윤수
수평선도 나름 바쁜 직업이다
수평선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것들을 담당한다
날마다 해를 길어 올리고
달마다 달을 빚어 띄우는 일
그거 아무나 못한다
수평선이 없다면 해는 어디로 떠오르며
달은 어느 배[腹]를 빌려 둥글어지겠나
수평선이 아무 일 안 하는 거 같아도
그 자리 고요히 지키고 있는 것이 수평선의 주소다
내게도 그런 수평선 하나 있다면
본적(本籍)은 필요 없으리
너의 타는 마음을 수평선에 널어 말릴 때
수평선은 그렇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너에게 기여한다
고깃배들 불빛이 보석 브로치처럼 밤바다에 맺혔다
이 배 저 배 배다른 새끼들까지 젖을 물리며
수평선은 순한 물의 짐승으로 누워 있다
만선이 될 때까지 새벽이 올 때까지
낯선 섬마을에서
나도 가끔 저 수평선의 무릎을 베고
잠들곤 한다
북풍/사윤수
아무도 보지 못했네, 북풍의 검은 입을, 어디로 삼켰을까 눈 조차 없는 바람의 뱃속에서 사막이 뒤집히는 소리 짐승들 쫓기며 달리는 소리, 어제는 코끼리 떼를 잡아먹고 오늘은 산짐승을 꺾어 먹고, 저 잡식성 바람의 이빨에 끼여 울부짖는 짐승들, 세상의 배고픈 것들은 입이 없고 배만 있어,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북풍의 뱃가죽이 말라붙었네, 잠든 간판을 부숴 먹고 현수막까지 찢어먹고 그것들 내장이 덜렁덜렁 펄럭펄럭 홀러나와 만장 나부끼는 소리 너는 어디에 있느냐고, 내 머리 끄덩이를 잡고 끌어내려나 긴긴 밤 창문을 때리며 뒤흔드는, 작은 섬에도 북쪽이 있네, 북쪽은 크고 북쪽은 대문이 없고 아무도 없고, 무법천지네 촛불이 꺼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