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으로 중매함
2022. 7. 3. 이현래 목사
오늘은 고린도후서 11장 말씀이다. 사도바울의 개인적인 간증을 제일 많이 볼 수 있는 것이 고린도후서이다. 물론 다른데도 다 간증이 포함되어 있다. 간증이 없는 말은 문서에 있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전하는 사람이 간증이 없이는 말씀을 전할 수가 없다. 간증 없이 하는 것은 사역이 아니라 교사이다. 고린도후서는 사도바울의 간증이 가장 많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오늘 내 마음과 꼭 맞는 말씀이 있다.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1,2)
그 뒤도 많지만 여러분이 읽어보면 마음에 닿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중매하려고 한다.
내 남은 목표가 그것이다. 여러분을 어떻게 그리스도께 중매할 수 있을까? 이것이 나의 사역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 혼자 결혼하려면 그런대로 할 수 있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주님께서 봐주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나 혼자 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나도 의미가 없지만 신랑에게도 의미가 없다.
하나님의 목표는 무엇인가? 아들의 배필을 찾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배필을 찾듯이 배필을 찾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그렇고, 예수도 그렇고, 혼자서는 무엇을 할 수 없다. 꼭 배필이 필요하다. 이것이 생명의 원칙이다. 세상일은 협력이 필요한 것도 많지만 혼자 할 것도 많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혼자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아예 안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연합을 통해 완성하도록 구조가 그렇게 짜여있다.
하나님 자신도 그렇다.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은 영이요 생명이 어떻게 일을 하겠는가? 표현이 될 수 없다. 표현될 수 있는 형상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6)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쉬워서 창조한 것이다. 우리가 요청해서 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창조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형상으로 만들어달라고 해서 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배필이 필요하니까 자기가 필요해서 사람을 만든 것이다.
이 말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말이 창세기 2장에 가면 “사람(아담)이 혼자 사는(독처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2:18)고 이렇게 은유적으로 표현하셨다. 아담이 그렇다는 말은 자신이 그렇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아서 돕는 배필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것은 깊이 새겨들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아니 하나님이 뭐 배필이 필요한가? 이런 사람이 있다. 하나님을 잘 몰라서 그렇다. 하나님은 영이요 생명이니까 자기를 나타내려면 뭐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을 표현하려면 뭐가 있어야 표현이 되지 그냥 표현되지 않는다.
6.25 때 본 가장 불쌍한 사람 가운데 하나가 팔다리가 다 끊어져 버렸다. 속에 마음은 다 있다. 사람으로 느끼는 모든 것이 있는데 손발이 전혀 없으니까 자기 스스로 전혀 움직일 수도 없고 아무것도 못 한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 없다. 말을 해봤자 그렇다. 참 불쌍한 사람을 봤다. 이 사람을 백 팩에 넣어서 다닌다. 그때는 보훈청이 없어서 손이 잘려 갈고리를 단 사람이 매고 다니는데 어디든지 가서 돈을 내놓으라고 해서 먹고 산다. 한번은 한 바퀴 돌고 와서 여관집에 앉아 있는 것을 봤는데 매고 온 그 사람은 구석에 내동댕이치고 자기들끼리 놀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라. 얼마나 기가 막힌 장면인가. 죽는 것만 못하지 않겠는가.
카프카의 변신이 그런 것이다. 잠을 자고 일어나보니 괴물이 되어 있다. 자기 식구들이 자기를 몰라보고, 자기는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안 된다. 식구들이 와서 처음에는 울고불고하더니 몇 날이 지나니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하고 자기 앞에서 의논하는 것이다.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인의 불통을 묘사한 유명한 카프카의 작품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사회를 묘사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그것을 내놓으려면 뭔가가 필요하다. 손발이 필요하다. 우리의 손발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 같은 사람을 불러 놓으신 것이다. 그런데 훌륭하고 멋있는 사람을 불러 놓으면 좋은데 그런 사람은 부르면 안 온다. 남 심부름하기 싫어서 안 온다. 내가 왜 남 심부름을 하냐? 나는 나 대로 살아야지 한다. 이것이 사람의 생각이다.
하나님이라고 하면 굉장히 높게 생각하지만,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이다. 그분이 나를 쓰겠다고 하면 한편으로 생각하면 너무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내가 왜 나 대로 못살고 하라는 대로 살아야 되느냐는 생각이 된다. 그러니까 쓰이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다.
나는 하도 할 일이 없는 사람이어서 하나님이 불러주시니까 감사하고 써주시니까 감사했다. 나는 그분이 불러주지 않았으면 꼼짝도 못 할 사람이다. 그분이 안 써줬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할 사람이다. 그런데 그분이 있어서 나는 내가 정말 살게 된 것이다. 육신적으로도 그렇고 인생 전체가 그분 때문에 내가 살고 있다. 지금도 하나님이 안 쓰시면 내가 뭐하고 있겠는가? 내 나이에 하나님이 안 써주면 뭐 하고 있겠는가? 애를 보려고 해도 힘이 있어야 애를 본다.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이 쓰시지 않고 하나님이 필요가 없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 어떻게 쓰든지 좌우간 써준 것이 감사하다. 우리가 형상으로 지어진 것은 얼마나 축복인지, 우리 같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쓰여진다니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한 예를 들어보겠다. 창세기 2장에 가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창2:7)라고 한다. 그런데 뒤에 보면 아담을 그 동산에 두고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라고 명령을 했다. 무엇을 경작할 것인가? 영이요 생명이신 씨다. 씨를 흙에 심으면 열매가 나온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생명을 사람 속에 심어서 열매가 나오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같이 먹는 양식이다.
내가 인생이 흙이라고 안다면 나한테 그 씨를 심어서 밭이 되게 하는구나. 옥수수를 심어서 옥수수밭이 되게 하는구나. 옥수수밭이 되면 아무도 흙이라고 하지 않고 옥수수밭이라고 한다. 흙의 모든 부끄러움이 사라져 버린다. 덮어버린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사람이 생긴다. 가을이 되면 주인이 다 가져가 버린다. 그러고 나면 자기는 아무것도 없다. 흙이 가질 것은 옥수수 대공이 밖에 없다. 그러면 인생이 허무하다고 할 수도 있고, 반대로 나 같은 흙이 하나님께 주인에게 이렇게 귀한 선물을 바쳐드리다니, 라고 하면 그것이 영광이다. 영광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보다 영광스러운 것이 있겠는가? 흙이 옥수수밭이 됐다는 이보다 영광스러운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싫으면 벽돌 되는 것이다.
창세기 12장에 가면 그 사람이 나가서 벽돌이 된다. 벽돌이 되면 흙에 비해 값은 더 비싼데 죽은 것이다. 흙으로서는 죽은 것이다. 흙은 오래될수록 더 좋은 흙이 된다. 좋은 밭이 된다. 거름이 들어가기 때문에 썩고 이런 것이 들어간다. 인생의 많은 여정과 고난을 겪지만 그것이 다 밑거름이다. 밑거름이 들어갈수록 땅은 더 좋아진다. 땅은 오래 써서 못 쓰는 땅은 없다. 이 세상에 밭이 오래되어서 못 쓰는 밭은 없다. 오히려 생땅이 밭으로 적합하지 않다.
생땅에 무엇을 심어놓으면 오히려 농사가 안된다. 흙으로서는 생생한 흙이니까 참 좋은 흙인데 농사가 안된다. 어떤 사람을 보면 참 거짓투성이고 아무것도 아니고 말썽이고 이런 사람인데 하나님께 놀랍게 쓰일 수가 있다. 이것이 우리 상식과 다른 것이다. 그것은 썩은 것이 많이 들어간 흙이다. 냄새나는 똥이 들어가서 썩고 이런 사람이다. 만고풍상을 겪은 사람이고, 의지할 데가 없어서 방황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오히려 잘된다.
예수님 시대에도 예수님이 와서 복음을 전할 때, 천국 복음을 전했는데 누가 맨 먼저 왔는가? 유명한 분들이 왔는가? 아니다. 유명한 사람은 아무도 안 왔다. 그중에 한사람 니고데모가 왔었다. 그런데 와서 말을 못 알아듣고 갔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18:18) 좋은 일 좀 의논하자고 왔는데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눅18:19)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한 이유가 나는 그런 일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하고 이렇게 매서운 말을 해서 보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이 말을 한다.
민수기에 보면 독사의 골짜기를 지나게 되었는데 독사에 물려 다 죽게 되었다. 그때 백성이 원망을 하니까 모세가 구리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놓고 이것을 봐라. 이것을 바라보면 살아난다고 했다. 어떻게 구리뱀을 봤는데 독사의 독이 없어지겠는가? 이것을 어떤 사람은 해석하기를 무독, 독이 없는 뱀이다. 그래서 독이 없는 뱀을 바라보니까 독이 빠진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비슷하지만 정확하게는 아직 모른다. 독이 없는 뱀이 어떤 뱀인지 우리가 아직 모른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것을 자기로 인용을 했다. 자기가 놋뱀이라는 그 말이다. 그러고 나서 한 말이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라고 했다. “이처럼 사랑하사”가 무엇인가? 놋뱀을 주었다는 그 말이다. “이처럼 사랑하사”, 무엇이 “이처럼 사랑하사” 인지 생각을 해보기 바란다. 놋뱀을 주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놋뱀을 준 것이 무슨 “이처럼 사랑하사” 인가?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오지 못한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 이 문제는 해석되지 않는다. 성경 어디에 가봐도 그것을 해석할 적절한 말이 없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서 내려오지 못한 예수를 보면 ‘아 저것을 말하는구나.’ 왜냐하면 나를 살게 한다. 다시 나게 한다. 새사람이 되게 한다. 그러니까 놋뱀이 맞다.
예수는 그때의 놋뱀이다. 그때의 놋뱀이 실재화된 것이다. 우리가 그 놋뱀의 실재를 본다면 우리 인생이 완전히 바꿔진다. 다른 사람이 된다. 사람의 기준이 달라진다. 이런 사람이 사람이네, 이런 사람이 사람이네 했던 그 기준이 다 없어진다. 전혀 새로운 사람이 보이면서 이 사람이 기준이구나. 이 사람이 사람이구나.
하나님이 사람을 지어놓고 사람이라고 이름했다. 그 이름한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이름이 지어진 사람이냐? 이런 사람이라는 그 말이다. 거듭난다, 거듭난다고 많이 하는데 어떻게 거듭나는지 모른다. 그래서 교회 와서 생활이 바꿔지고 행동이 바꿔지면 거듭났다고 한다. 그것이 아니다. 세상에 나가도 그런 사람은 많다.
내가 늘 말하는데 노화도 옆에 넙도에 부자가 있었다. 그래서 봄에 쌀 한 가마니를 빌려주면 가을에 두 가마니를 받는다. 장이자라고 하는데 사람이 무슨 수로 빚을 지면 일어날 길이 없다. 배를 주어야 한다. 6.25가 나니까 사람들이 미워해서 그 사람의 발에 돌을 매달아서 바다에 빠뜨렸다. 그런데 어떻게 재수 좋게 돌이 빠져 살아났다. 그러고 나서 사람이 개과천선을 했다. 그다음부터는 봄에 이자 없이 쌀을 빌려주고, 여름에 붉은 돔 주산지니까 돔을 잡으면 다른 사람에게 주느니 나에게 팔라고 했다. 그래서 넙도의 모든 주민들이 다 잘살게 되었다. 그때는 돔을 잡으면 얼음을 채워서 바로 일본에 수출하던 때이다. 붉은 돔은 비싸서 잘 먹을 수 없었다. 완전히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 교회를 가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
교회에서 거듭난다는 것은 그것과 좀 다른 말이다. 놋뱀을 보고 다른 사람이 된 그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독생자가 누구인가? 놋뱀이다. 지금 와서 그 놋뱀은 누구인가? 어디에 놋뱀이 있는가? 우리가 보고 내 인생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어디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너는 누구인가? 이렇게 물으면 우리는 간판 밖에 내 놓을 것이 없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물었을 때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라고 대답했다. 나무 뒤에 숨었다고 했다.
왜 사람은 일생동안 이마에 땀이 흘러야 하는가? 이 나무를 만드느라, 자기를 가릴 나무를 만드느냐고 힘이 든다. 그래서 명함에 무엇이라 찍을까? 이것이다. 거기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사람이라고 찍어 다니겠는가? 그 말은 내 스스로 아무것도 못한다는 말이다. 그 말이 내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못한다. 이런 사람인데 이 명함을 내놓으면 누가 받아주겠는가?
예수를 전하려고 가 보니까 이렇게 전해야 한다. 이것을 누가 받아주겠는가? 그래서 사도 시대가 지나고 나서 바로 예수 신격화 운동이 진행되었다고 생각된다. 불가피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을 선전하려니 선전이 되겠는가? 유명한 사람이 많은 희랍세계다. 철학자, 신학자, 세상에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거기 가서 예수 명함을 어디다 내놓겠는가? 배짱 좋다고 내놓겠는가?
바울이 한 말 가운데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1:16) 왜 부끄럽다는 말을 하겠는가? 이런 예수를 내놓으려니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 부끄러움이 부끄러움이 아니고 영광스러워야 한다. 그래야 복음을 전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이 포장한 것이다.
그래서 어디까지 포장을 했는가? 하나님은 다 같은 하나님인데 구별은 되나 분리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니 우리가 알기 어렵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알기 어렵다. 목사들도 신학자들도 많은데 설명을 해봐야 못 알아듣는다. 우리가 그런 것을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알려면 본 일이 있어야 안다. 안보고는 모른다.
전에 말했는데 내가 미국 가서 먹어본 첫 번째 과일이 망고였다. 이것을 먹어보니 생전 처음 먹어보는 과일이다. 집에 와서 그 얘기를 했더니 아무도 못 알아듣는다. 복숭아 같다고 해도 안 되고, 사과 같다고 해도 안 되고, 어떻게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다.
내가 그때 알았다. 사람이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비슷한 것이라도 봤어야 알지, 전혀 보지 않고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을 그때 알았다. 아 우리가 뭔가를 봤기 때문에 아는구나. 이것도 인간이니까 알지 컴퓨터는 모른다고 한다. 컵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한 가지 종류를 입력시켜 놓으면 그 컵만 와야 컵인 줄 알지 다르게 생긴 컵은 컵으로 못 알아본다. 그런데 사람은 어떤 컵이든지 하나를 보면 어느 종류의 컵을 보든지 컵인 줄 다 안다. 이것이 컴퓨터와 인간의 다른 점이라고 한다.
우리도 놋뱀을 보고 이 사람이 이 사람이구나, 이렇게 알아야지 놋뱀은 놋뱀이고 이 사람은 이 사람이라고 알면 컴퓨터만도 못하다. 하나님이 말씀한 것은 전부 이런 식이다. 하나님은 자유롭게 하겠지만 우리가 들을 때는 그렇게 들린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길이 참으시고 말씀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모세 시대만 하더라도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오직 한 사람만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접견할 수가 있었다. 그 하나님을 지금 우리 교회에서도 마음대로 하나님, 하나님 한다. 다 아는 것처럼 말한다. 그만큼 많은 단계를 거쳐서 알기 쉽게 됐다는 뜻이다.
더 알기 쉽게, 더 알기 쉽게, 모든 사람이 알기 쉽게, 이것이 신약이다.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세우리라).”(렘31:31),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생각)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3) 그러면 그 후로 하나님을 알려 할 필요가 없다.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알라고 전도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것을 알게 하려고 전하는 것이다. 새로 만들어 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앎이니라).”(렘31:34)
힘써 노력해 보라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절에 가면 노력해봐, 의심해봐, 이런다. 교회에 가면 믿어 이러는데 절에 가면 의심해봐, 라고 한다. 백양사 앞에 큰 바위에 ‘이 뭐꼬’라고 써놓았다. 그래야 불교 입문이 가능하다. 그런데 무조건 믿어야 기독교 입문이 가능하다. 이렇게 차이가 난다. 그러니까 거기 가면 이 뭐꼬부터 시작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내가 알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하지 가만 있으면 모른다.
그런데 하나님의 길은 그것이 아니다. 이미 다 만들어져 있다. 만들어져 있는데 우리가 못 본 것뿐이고 활용하지 못한 것뿐이다. 그래서 사역자는 자기가 아는 대로 이것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좀 열어놓으면 그 다음 사람이 좀 열고, 또 좀 열어놓으면 그 다음 사람이 또 열고, 차근차근 열어지는 것이다. 마지막에 가면 다 알게 된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가 되지 않겠는가.
어떤 특별한 사람만 알고 만나면 하나님 나라가 언제 되겠는가? 한꺼번에 어느 날에 확 알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그런 날이 온다.
씨를 하나 심어놓으면 처음부터 큰 밭이 되는가? 아니다. 큰 밭이 안된다. 옥수수를 심어놓으면 첫해에 얼마나 나오겠는가? 한 되쯤 나온다고 하자. 그 다음 해에 또 뿌려 놓으면 열 말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 다음에 또 뿌려 놓으면 백 말이 나오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명은 커진다. 시작은 아주 미미하지만 결과는 창대할 것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
이 생명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농사를 못 짓는다. 농사를 아무도 못 짓는다. 우리 집에 나무를 심어 보니까 3년 이상 된 나무를 갖다 심는다. 파는 것은 3년에서 5년 된 나무를 판다. 한 3년을 기다려야 열매가 열리는데 처음에는 1~2개 열린다. 그 다음 해 10개쯤 열리고, 그 다음 해에는 20개쯤 열린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열려서 어느 날 가 보면 온 나무가 다 열매가 되어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생명은 그렇게 늘어난다. 공장에 찍은 것처럼 한꺼번에 천 개 만개 이렇게 되는 게 아니다.
지금 생각하면 언제 어린양이 통치하는 나라가 오겠는가? 그렇게 생각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양이 통치하는 나리인데 그 나라가 도대체 언제 이 세계가 얼마나 되면 그렇게 되겠는가? 그러면 예수를 못 따라간다. 그를 못 따라간다. 어느 때 되겠는가? 그러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그런 사람이 있다. 예수를 믿으라고 하면 예수 믿느라 고생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죽을 때쯤 돼서 믿으면 되지, 이런 사람이 있다. 어쩌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겠는가? 평생 예수 믿어도 똑같으면 마지막에 가서 회개하고 돌아가면 안 되느냐는 것이다. 변화를 못 보니 그런 생각이 나는 것이다.
생명은 우리 생각과 전혀 다르다. 전혀 다르게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어느 날 가면 얼마나 나오는지 상상을 못 한다. 나는 그날이 오리라고 믿고 있다. 이것이 미친 짓이다. 그날이 오리라고 믿고 있으니 미친 짓이다. 공장에서 막 찍어내면 쉽다. 하나님의 일은 작게 시작하는데 크게 번지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중매 얘기를 하다가 이런 얘기를 했다. 나는 여러분을 그리스도께 중매하려고 한다. 나 혼자 시집가려면 아쉬운 대로 간다. 나 정도 되면 아쉬운 데로 간다. 결점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결점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봐주지 않겠는가? 그런데 나 혼자 가면 의미가 없어서 여러분과 같이 가려고 한다.
왜 하필이면 훌륭한 예수 놔두고, 부활도 있고 성령 충만도 있고 다 있는데, 왜 그런 예수를 놔두고 하필이면 모든 사람이 버리고 간 그 예수를 내 앞에 보여주겠는가? 나는 그런 데 가서는 예수를 만날 데가 없다. 나에게 십자가를 지고 그렇게 하라고 하면 못한다. 내가 왜 유대인들을 자극해서 미움 살 필요가 뭐가 있는가? 좋은 말 했으면 된다.
유대인들이 제일 듣기 싫은 말만 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 유대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얘기다. 하나님인체한다. 지가 하나님같이 생각한다. 동등으로 여긴다. 이렇게 히필 듣기 싫은 얘기를 하는가? 좋은 말이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죽은 것이다. 죽은 것이 다른 이유가 없다. 유대인이 시기가 나서 죽은 것이다.
저런 소리 하고 다니는데 사람은 많이 모이니까 시기가 날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들은 일점일획이라도 틀리지 않게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데, 촌놈이 와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다니는데 사람은 많이 모이니까 시기가 날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죽었다. 십자가의 예수를 그런 예수인데 나 같으면 안 하겠다. 나 같으면 뭐하러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듣기 좋은 얘기만 할 것이다.
유대인들이 뒷받침하여 이 사람이 선지지이니 너희는 이 사람 말을 들어라, 이러면 얼마나 좋겠는가? 세례요한이 예수를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고 했으니 사람들이 얼마나 호감을 가졌겠는가? 거기서 예수의 제자들이 나왔다. 예수의 제자들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이었다. 세례요한은 그 시대에 대단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뒷받침해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세례요한이 헤로디아의 일로 헤롯을 간섭하다가 잡혀갔다. 옥에 갇혀 죽게 됐는데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눅7:20)하고 물었다. 그런데 예수님 대답을 보라.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소경)이 보며 못 걷는 사람(앉은뱅이)이 걸으며 나병환자(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7:22) 그 말을 듣고 세례요한이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내가 잘못 봤구나. 다음날 죽었다. 그리고 예수는 거기를 떠나서 시골로 내려가 버렸다. 왜 그랬겠는가? 이 판에 있으면 안 되겠다 싶으니까 내려간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죽을 때가 아닌데, 이 판에 있으면 나도 잡혀가면 목 잘려 죽겠구나. 그러고 내려가셨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우리의 관념을 바꿔야 된다. 생각을 아주 바꿔야 된다. 나만 가려면 아쉬운 대로 갈지 모르겠는데, 여러분 혹시 가면 내가 뭐가 되겠는가? 여태까지 뭐했는가? 나 혼자 살려고 한 것인가?
나는 여러분을 그리스도한테 정결한 처녀로 중매시키고 싶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분에게 여러분을 중매시키겠는가? 또 딴 데 가면 여러분은 다 신부감으로 불합격이다. 그런데 이 안에 오면 신부감으로 불합격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왜? 다 정결해졌다. 어떻게 정결해졌는가?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다. 내 소유, 내 자랑, 내가 이것이 나라고 했던 내 명함, 나무, 다 없어져 버렸다. 그것이 정결해진 것이다. 목욕한다고 정결해지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헛된 일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다. 죄 사함의 복음을 듣고 얼마나 좋았는지 발이 땅에 닿는지 모르고 6개월을 돌아다녔다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얼마나 죄책감에 시달렸으면 그렇게 되겠는가? 이것은 종교에 들어와서 병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70년대 지각변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교회 성도들이 빠져나가서 그 교회가 세계적인 큰 교회가 됐다. 한국에서 50만 성도를 가지고 있는 교회가 됐다.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그런 교회가 됐다.
우리가 생각을 바꿔야 된다. 나는 나 혼자 시집가려는 사람이 아니고 여러분과 함께 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 혼자서는 안 된다. 내가 아무리 아름답고 정결해도 나 한 사람으로는 안 된다. 만유가 다 포함되는 그런 분이다. 부활도 좋고 다 좋다. 그런데 거기에는 포함이 안 된다.
예수가 포함된 줄 알면서도 내가 거기에 포함이 안 된다. 내가 그 안에 포함이 되어서 부활을 느낀다면 내가 이러고 가만히 있겠는가? 은사를 받은 사람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방언만 해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밤새워 기도한다.
나는 그게 너무 부러웠다. 부러웠는데 안 되었다. 아무리 해도 안 되었다. 나는 못한 사람이다. 안 한 사람이 아니고 못한 사람이다. 어디를 가도 내가 알아볼 사람이 없다. 내가 알아볼 그리스도가 없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그리스도가 있어도 내 그리스도는 없다. 나와 함께 살아줄 그리스도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 오니까 나와 함께 살아줄 그리스도가 있다. 나를 품어 주실 분이 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천사가 왜 하나님 아들이 못 되는 줄 아는가? 죽지도 않고 능력도 있다. 그런데 왜 하나님 아들이 못 되는가? 그것은 나를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을 포함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죽지도 않는 천사가 나를 어떻게 포함하겠는가?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어떻게 알겠는가? 능력이 하나님 같은 천사가 나를 어떻게 포함해 주겠는가? 보기는 좋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안 죽고 싶다. 사람의 궁극적인 소망은 안 죽고 싶은 것이다. 그게 가능하겠는가? 천사를 바라본다고 가능하겠는가? 불가능하단 말이다.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의 주님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아무런 볼 모양도 없다.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어떤 것도 없다. 시편에 있는 말이 지나친 말이 아니다. 십자가에 와 보면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오히려 모자란다. 거기서 풍채라는 말을 쓸 수가 있는가? 십자가에 매달려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죽은 하나님 아들이 어디 있겠는가? 세상에서 그런 하나님 아들은 없다. 우리 개념 속에는 없다.
그런데 내가 가서 보니까 그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포함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여러분이 다른 데 가서 포함될 수 있다면 내가 굳이 여기로 오라고 할 필요가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좀 훌륭하고 넉넉하고 괜찮은 사람 속에 포함돼라. 내가 말리겠는가? 못 말린다. 그리고 내가 말린다고 해서 오겠는가? 더 좋은 신랑이 있는데, 내가 마지못해 시집을 가겠는가? 어림도 없다.
부모가 반대해도 간다. 아주 좋은 신랑을 만나면 부모가 반대해도 소용이 없다.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고 가지 않겠는가? 시원치 않으니까 그렇다. 여자들 위주로 말했는데 남자도 그렇다. 자기 마음에 기가 막히게 맞는 여자를 만나면 부모 말 소용이 없다. 어떻게 하든지 거기로 장가를 가고 싶다. 아담이 왜 선악과를 먹었겠는가? 그것 때문에 선악과를 먹은 게 아니겠는가?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누가 정결한 처녀인가? 율법 안에서 정결한 처녀가 되겠는가? 양심 안에서 정결한 사람이 되겠는가? 성경 안에서 정결하다고 해도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아니한다. 내가 스스로 갈 수가 없다. 오라 해도 가지 못한다. 내 스스로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자리에 오니까 부끄럽고 할 것도 없다. 그냥 인생의 본질만 본체만 딱 남아 있으니까 나도 그 자리에서 창조되었고, 그도 그 자리에서 창조되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서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고전1:30)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한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구속함)이 되셨으니.”(고전1:30)라고 한다. 이미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한다.
되어 있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복음이다. 지금 새로 변한 게 아니다. 이렇게 해 봐라, 저렇게 해 봐라가 아니고 이미 되었는데 봐라. 네 집이 여기 있다는 것이다.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물은 것이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14:5)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길이 어딥니까? 물은 것이다. 그랬더니 “내가 곧 길이요.”(요14:6)라고 하셨다. 이게 예수님의 특색이다. 예수님 말씀의 특색이다.
부처님에게 물으면 ‘내가 곧 ~다.’라고 답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뭘 물어도 ‘내가 ~다.’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그냥 객관적으로 대답하면 아무 소용도 없는 말이다. 전부 다 자기를 말하는 것이다. 빛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빛이다. 진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진리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계시할 때 ‘내가 누구다,’라고 하셨다. ‘I am ~.’ 불완전 자동사다. 그 뒤에 목적어가 붙어야 문장이 된다. 그러니까 ‘나는 ~이다.’라는 이 말이다.
왜 이런 이름을 주었는가? 바로 앞에 갈 때 내가 누구기에 가겠습니까? 내가 바로의 궁전을 모릅니까? 내가 어떻게 거기를 간다는 말입니까? 하니까 내 이름이 ‘I am ~.’이다. 그래서 네가 뭐가 될 것이니까 가보라는 뜻이다. 그래도 안 된다고 하니까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신이 되게) 하였은즉.”(출7:1) 내가 너를 바로 앞에 신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에게 갔던 것이다. 모세가 신으로 안 보였으면 바로가 사람을 내어주겠는가? 1~2명도 아니다. 출발할 때 200만이 넘었다고 한다. 그 백성을 내어주겠는가? 그것도 노예인데 매일같이 일을 시킬 수 있는 노예인데 내어주겠는가? 마지막에 왜 나가라 했겠는가? 신으로 보이니까 나가라고 한 것이다.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 원래 그렇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의 배필로 만들었다. 형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신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신인가? 신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사람이다. 여전히 사람인데 표현되기를 신으로 표현될 수가 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해 보니까 나와 전혀 관계가 없다. 내 말이 별 것도 아닌데 즉석에서 사람이 뒤집어지는 것을 봤다. 전혀 유명한 말을 한 게 아니다. 성경을 깊이 이야기한 것도 아니다. 그때는 신으로 보인 것이다. 그런데 내가 신인가? 신으로 보여도 신이 아니다.
예수님은 나보다 신부가 더 필요하다. 왜 거기까지 내려왔는가? 해석해보면 신부를 구하러 내려왔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11)라고 하였다. 왜 자기 땅인가? 사람 땅이니까 자기 땅이다. 사람이 사는 곳에 왔더니 사람이 자기를 맞이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내가 사람 사는 데 와서 사람을 인도하러 왔더니 사람들이 맞이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나를 거부하더라는 것이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1,12)라고 하였다.
우리가 그분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판이 바꿔지는 것이다. 내가 그분을 어떤 곳에서 만나느냐에 따라서 판이 바뀐다. 조*기 목사님은 말끝마다 신이다. 병 고치는 이야기를 한다. 왜 그런가? 병 고치는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다. 아주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마지막 설교할 때 내가 들어 왔는데 똑같다. 그 자리에 오니까 딱 전환해서 병 고치는 대로 들어갔다. 자기가 본 대로 말하니까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보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거짓말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 앞에 간다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무지무지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여기 와서 보면 무지무지하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그분이 신랑인데, 우리가 시집가는 게 뭐가 어려울 게 있겠는가? 오히려 우리가 부자가 되어서 안 가려 하는 것이다. 저런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시집을 가는가? 창피해서 못 가겠다. 나는 저런 예수 안 믿어, 나는 저런 신랑에게 시집 안 가, 이런 것이지 오지 말라고 해서 우리가 안 가는 게 아니다.
다 오라고 문 열어놓았다. 문턱이 없게 만들어 놓았다. 그 정체성을 천한 말로 하면 까발려 놓은 것이고, 좋은 말로 하면 정체성을 내놓았다. 예수의 실재가 나왔다. 우리가 모르던 실재가 드러났다. 하나님으로 보였던 그분의 실재가 지금 드러났는데 그런데도 우리에게는 하나님 같았다.
정결하다는 게 다른 게 없다. 그 눈으로 보면 다 정결하다. 우리는 그 앞에 설 때 아무것도 가질 필요가 없다. 해수욕장에 가서 넥타이 매고 다니는 놈은 미친놈이다. 해수욕장에 가서 자기는 딱 넥타이 매고 저것들 빨가벗고 무슨 짓이냐고 하고 다니면 그가 온전한 사람인가? 비정상적인 사람인가?
대천 해수욕장에 가니까 시내가 온통 다 해수욕장이다. 시내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다 수영복 복장으로 돌아다닌다. 다른 데서는 해수욕장이라고 부르는데 거기는 15분 가까이 붙어 있어서 다 수영복 입고 돌아다닌다. 거기서 넥타이를 매고 다닌다고 해서 점잖은 사람이 되겠는가? 거기서는 다 수영복을 입어야 된다. 그래야 어울린다. 다른 일로 왔더라도 수영복 입고 돌아다녀야지 양복 입고 들어가면 병신 된다.
이 예수 앞에 오면, 우리는 저절로 다 벗겨진다. 내가 벗어야겠다, 이것 버려야겠다고 할 필요가 없다. 더우면 외투를 안 입는다. 아무리 좋은 외투라도 못 입는다. 아무리 벗어라, 벗으라고 해도 추운데 벗겠는가? 더우니까 아무리 비싼 외투를 사다 줘도 입고 있을 수가 없다. 여름에 밍크 외투를 갖다 줘 보라. 이것 입고 있으라고 주면 천만금을 준다고 해도 못 입고 벗어버릴 것이다.
판이 달라진다. 예수 판이 달라진다. 그러면 우리 인생도 달라진다. 저절로 달라진다. 내놓아 봐라. 내놓을 게 뭐가 있는가? 더우면 옷 벗을 것인데 그렇지 않은가? 좀 과격한가? 내가 사람은 과격하지 않은데 이런 말을 할 때는 아주 과격하다. 여러분이 오해하지 마시기 바란다. 평소에도 그렇게 과격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란다. 나는 아주 부드러운 사람이다. 오래 참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말을 할 때는 도저히 못 참겠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나는 지금 간절한 마음이 그것이다. 여러분과 함께 시집가기를 원한다. 함께 갈 자리가 또 없다. 여러분과 나도 차이가 많다. 어떤 면에서는 여러분과 나도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목사님 같은 분이나 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니다. 나의 실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얻어들은 것이다. 내가 태어나서 오래 있다 보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이런 것이지 아무것도 아니다. 거기에 가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분 앞에 가면 내가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다. 내가 스스로 없앤 게 아니고 나는 아무것도 없다. 없어진 것도 아닌데 있는 데도 아무것도 없다. 그냥 있는데 아무것도 없다.
얼마나 자유로운가! 옷 한 번 벗어 버리기 참 어렵다. 더구나 계급장이 있는 옷을 벗어 던지기 쉽겠는가? 어떤 사람은 교장에서 퇴직하고 나오다가 인생이 확 허물어지니까 계단에서 넘어져서 중풍이 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오면 허물고 말 것도 없다. 그냥 이 자리에 있는데 나는 나 대로 벌거벗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만나고 이런 것이 접신이 되는 것이다.
내가 워치만 니에게서 야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내 자신 속이 전부 공개되어 버렸다. 내가 부처님 손바닥에 있는 손오공이네, 이렇게 공개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게 너무 편했다. 감추고 사는 것보다 훨씬 편했다. 숨어 사는 것보다 훨씬 편했다. 자수하여 광명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자수할 능력이 있는가? 자수할 용기가 있는가? 저절로 햇빛이 비춰버리니까 내가 다 비춰져 버린다. 하나님 말씀은 이상하다. 야곱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왜 벗겨지는지 모르겠다. 다 알고 있는데, 더 이상 감출 것이 없다.
정결한 처녀! 누가 정결한 처녀인가? 예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정결한 사람이다. 계급장이 있는 예수 앞에 서 있으면 나는 옷이 더 없는 것이 한이다. 더 입을 게 없는가? 살림이라도 팔아서 옷을 사 입어야지 했는데, 그 앞에 가니까 있는 옷도 다 소용이 없다. 자유롭고 경제적이고 유익하고 편하고 공평하고 좋다. 평등하지 못한 세상에서 아무리 평등하려고 해도 안 된다. 저 인간이 왜 저래? 이렇게 해 버린다. 아무리 안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다.
그런데 예수 앞에 오면 저 인간이 왜 저래? 그게 없어진다. 왜냐하면 똑같다. 내가 누구에게 이야기할 때, 당시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라고 할 때 제일 편하다. 너도 사람 나도 사람 그럴 때 제일 편하다. 계급이 없을 때 제일 편하다. 이거 말하다 보니까 끝이 없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나는 뚜쟁이가 아니다. 여러분을 성경 말씀으로 중매해주는 게 아니고, 내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주님에게로 가는 것이다. 그러면 그분 안에 새로운 풍성함이 또 있다. 세상에서 풍성하지 못했던 것이 그 안에 오면 새로운 풍성함이 있다. 전혀 다른 풍성이 있다. 그 풍성을 가지면 사람이 달라진다.
소고기 많이 먹다 보면 다른 것 잘 못 먹는다. 미국에 갔더니 가는 데마다 LA갈비를 구워 준다. 그 고기가 얼마나 맛있는지 우리나라 소고기보다 훨씬 더 맛있다. 그것을 한참 먹다가 집에 오니까 밥을 먹으려 해도 먹을 게 없었다. 전에는 잘 먹었는데 이제 먹으려니까 한숨이 나온다. 왜 이렇게 푸른 초장인지 모르겠다. 환경이 바꿔져 버리면 사람은 확 변한다. 변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변하게 된다.
판을 바꿔야 한다. 예수 판으로, 그 판으로, 바꾸면 세상이 아주 달라진다. 뭐가 달라졌는지 내놓아 보라. 그런 사람에게는 안 내놓아도 된다. 볼 자격이 없다. 판이 바꿔진 사람을 보고 뭘 내놓으라고 하는가? 우리는 내놓을 게 아무것도 없다. 판이 바꿔지면 그 안에서 풍성을 누리게 된다. 다른 풍성이 있다. 그 풍성으로 풍성해지면 세상의 다른 것이 부럽지 않다. 부럽지 않으면 달라진다. 부러우니까 문제가 생긴다. 부럽지 않으면 왜 문제가 생기겠는가?
우리 인생이 달라진다. 염려하지 말라. 옆에 사람을 염려하지도 말고, 자기 염려도 하지 말라. 못 살겠다 갈아보자고 하듯이 이 인생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면 전망이 없다고 생각하면 판을 바꾸라. 그러면 아주 간단하다. 여러 말 할 것도 없다. 잔소리할 필요가 전혀 없다.
성경도 판을 바꾸고 봐야 제대로 보인다. 판을 안 바꾸고 성경을 보면 다 자기 생각대로 밖에 안 된다. 그 관념으로 볼 게 아니겠는가? 공산주의자가 성경을 보면 공산주의적 관점에서 보게 된다. 자본주의자가 보게 되면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게 된다. 내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책이 이 책이다. 공부 많이 한다고 잘 보이는 책이 아니다.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오해했었는데 그게 아니다. 입장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첫째는 입장을 바꾸는 것이다. 어떤 입장인가? 예수의 입장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필요에 사용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이 나를 밭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가라지까지도 다 해결해 주신다. 이 자리에 오면 가라지가 심겨질 시간이 없다.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벧전3:19)고 하였다. 전에 노아의 날에 방주 예비할 때 비가 온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 듣던 사람들이 거기까지 갔다고 하였다. 구제 불능의 인간들에게도 이 복음이 다 도달된다는 말이다.
우리를 그리스도께 중매하는 바울의 심정이 내 심정과 똑같다. 그래서 이 말이 너무 좋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11:2) 그러나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11:3)고 했다. 그 뒤에 읽어보면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말씀이 있다. 피하지 말고 다 읽어보라.
나는 내 인생의 막바지에 와서 여러분과 함께 그분에게로 함께 들어가고 싶다. 그러면 그때 나는 목사가 아니고 사역자도 아니다. 앞에 있는 자도 아니다. 다 하나다. 그때 목사라는 이 거추장스러운 감투를 탁 벗어 던질 수가 있다. 처음부터 길이 나서 나는 벗어버리려고 해도 잘 안 됐다.
어떤 때는 나이 많은 노인을 보고 형제님, 형제님 하는 것도 보기 싫었다. 할아버지 하면 될 것을 가지고 형제님이라고 한다. 나이 많으신 분을 보고는 아버지나 할아버지나 삼촌이라고 하면 좋다. 또 언니, 오빠하면 좋지 고등학생이 와서 할아버지에게 형제님이라고 하는데 우리 정서에는 안 맞다. 영어에서는 brother라고 하면 되지만 우리는 형제님 하면 안 맞는다. 옛날 분들이 생각할 때는 버릇없다고 하지 않겠는가?
우리 교회는 칭호가 자유롭다. 이모, 삼촌, 언니, 오빠, 자유롭고 자연스럽다. 그것만 해도 많이 가까운 것이다. 이제 그날이 오면, 지금 그날이 왔다. 그날이 오면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도 나도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나와 차별이 있어서 불편하거든 빨리 오시라. 빨리 오면 차별이 없어진다. 목사라서 저런 소리를 한다고 생각되면 빨리 들어오면 된다. 여기에는 목사가 없다. 쉽지 않은가? 남의 머리에 쓴 모자를 벗기려 하지 말고 들어와 버리면 저절로 없다. 목사가 없는 세계에 들어오면 된다. 여기에 들어오면 목사가 없다. 그러면 나도 짐이 가볍고 얼마나 좋은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다닐 필요가 없어서 좋다.
나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에게 인계하고 싶다. 같은 사람으로 인계하고 싶다. 인계 해 주고 가야지 안 해주고 가면, 길바닥에 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여러분을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 앞에 인도하기를 원한다. 그게 나의 마지막 소원이다. 여러분도 나와 함께 배필이 되기 위해서 그분의 마당에 이를 때, 우리가 그동안 살아온 모든 것이 열매를 맺는 날이 될 것이다.
남이 먼저 먹을까 봐 침부터 뱉은 사람도 있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한 그릇에 밥을 먹다 보니까 빨리 먹어야 되니까 침을 뱉어 놓으면 남이 못 먹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잘 먹었다. 그런 시절도 있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열매를 맺는 날이 온다. 아웅다웅했던 것도 있었다. 좁은 집에서 세 집이 살면서 남자들은 잘 모르지만 여자들은 얼마나 불편했겠는가? 부엌을 하나로 쓰니까 오죽했겠는가? 자매들이 고생 많이 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았던가? 여기에 오려고 그렇게 산 게 아닌가? 평생 그렇게 살려고 그랬던가? 그때 누구 집에 가니까 방에 외풍이 심해서 비닐에 텐트를 해 놓고 그 안에서 자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이렇게 옹색하게 사는 집도 있구나. 한 번도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집에 갔다가 모른 체 하고 나왔다. 그렇게 해서 이 교회가 있는 것이다. 그냥 있는 게 아니고 그런 사람들의 헌신이 있어서 오늘날 우리가 편히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교회당을 짓느라고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헌금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하는 말이 누구 한 사람이 돈 좀 벌어서 해라. 그때는 한 100명 될 때니까 100명 들어갈 자리 마련하는 데 큰돈이 드는 게 아니다. 우리가 9번 이사해서 이 동산으로 온 것이다. 그래도 마음 편한 게 낫지 건축헌금 하려고 쥐어짜는 것이 내가 제일 하기 싫은 것이다. 차라리 논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면 되지 그런 일은 싫다고 했다.
그랬는데 덕*이가 나와서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은데 돈이 모자란다고 하였다. 송현동에 땅이 110평이 되는 것을 계약하려는데 돈이 모자란다고 했다. 그래서 갑자기 건축헌금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건축헌금 하자고 해서 한 게 아니다. 그랬는데 어떻게 돈이 그렇게 모여졌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돈이 나올 데가 없는데 어떻게 100억이 넘는 돈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숨은 사람들이 다 있다. 그러니까 다 우리를 위한 게 아니겠는가? 다 함께 살자고 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이것저것이 다 보상이 될 게 아니겠는가?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알게 될 것이다. 그래야만 만유의 하나님 나라가 되지 특별한 사람만 천당에 가면 언제 그런 천당이 채워지겠는가? 규정이 까다로워서 천당에는 인구가 없다. 그런데 규정이 없는 지상 천당이 있다. 아무 규정도 없다. 사람이기만 하면 된다.
이 세계로 우리 함께 가자.
‘함께 갑시다. 내 아버집’ 노래를 부르고 마치겠다. 감사하다. 또 한 달 후에 뵙겠다. 코로나 때문에 교회에 못 와서 방학 생들이 많은데 이제는 다 해제가 되었다니까 교회에 나오시기 바란다. 또 교회에 검사할 것을 다 준비해 놓았으니까 혹시 준비를 안 하고 오신 분은 들어오시면서 꼭 검사하고 들어오시기 바란다. 남도 중요하니까 자기도 그렇게 해 주시길 바란다. 그냥 아무 준비 없이 오면 안 된다. 없으면 바깥에서 한 번에 검사하면 나오는 것을 갖다 놓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