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용어 설명을 한다.
<인과율>? 원인과 결과 사이의 사실 관계를 가리킨다.
쉽게 설명하자면, 모든 일이나 사건이나 행동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기에 발생한다는 개념이다.
아무런 이유나 원인 없이 생기는 결과는 없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핵심사상중 하나다.
윤회사상? 살아생전에 세운 업에 따라 존재상태가 달라지며 생을 반복한다는 사상.
동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속담 중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속담이 있다.
원인이 있기에 그에 따른 결과가 발생했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예수를 믿는 대다수 성도들도 이런 인과율의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이나 문제에 접근할 때에도, 그리고 사람을 판단할 때에도 이런 인과율의 개념을 자주 적용한다는 것이다.
"어떤 원인 때문에 이런 결과가 발생할까?"
과연 이런 개념을 가지는 것이 성서적일까요?
오늘 이 시간에는 이 주제를 깊이 다루어보겠다.
오늘 본문을 보자.
주요 등장인물이 야고보와 베드로이다.
분봉왕 헤롯이 작정을 하고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다(1)
여기서 <헤롯>은? 헤롯안티파스를 가리킨다.
우리가 알고 있는 헤롯대왕의 손자이다.
헤롯대왕? 예수님 탄생 당시 유대지역을 다스렸던 분봉왕이었다.
시범케이스로 헤롯안티파스가 제일 먼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죽였다(2)
야고보는 "참수형"을 당했다. 칼로 목이 베여 죽었다.
대중들의 반응이 긍정적이었다(3)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그러자 이번에는 베드로를 구금했다(3) 베드로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극적으로 탈출하게 된다(7-8)
죽기 하루 전날에 베드로는 한 편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감옥을 탈출했다.
본문의 줄거리를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야고보는 죽었고, 베드로는 구원받았다"
그 당시, 야고보와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의 <원투 펀치>라고 말할 수 있다.
원투펀치란? 원래 권투용어인데, 지금은 야구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다.
팀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 두명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야고보와 베드로는 기독교계와 예루살렘교회에서 이런 인물이었다.
그런데 야고보는 순교당했고 베드로는 구원받았다.
같은 시기, 같은 상황인데 다른 결과가 발생했다.
의문이 생긴다.
왜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아났을까요?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는가?
우리는 성경 속에서 아니면 세상 속에서 이런 사건들을 대할 때마다 적잖이 당황한다.
이런 류의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성서적일까요?
어떤 두 사람이 과거 같은 대학 같은 전공을 선택해서 학업을 마쳤다. 학업성적이나 개인의 역량도 엇 비슷했다.
그런데 현재 두 사람의 위치는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난다고 하자.
인과율로 해석 가능할까요?
무슨 원인때문에 이런 결과가 발생할까요?
교회 안에서도 이런 류의 사건들이 흔히 발생한다.
믿음으로 사는 두 자매가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두 자매가 각각 서로 다른 종류의 암 선고를 받았다.
담당의사는 두 사람 모두 살 가망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래서 교회가 열심히 기도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구원받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사망에 이르렀다.
인과율로 해석이 가능할까요?
무슨 이유로 한 자매는 살고 한 자매는 구원받았을까요?
야고보와 베드로는 동기 동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 몇 구절을 찾아보자.
마태 10:1-4, 마가 3:13-19, 누가 6:12-16을 차례로 찾아보자.
12명의 제자 명단이 소개되었다. 순서를 유심히 살펴보자.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마)
베드로, 야고보, 요한..(막)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눅)
이 순서는 어떤 기준으로 나열되었을까? 대체로 제자가 된 순서로 추측한다.
전입순으로 기록되었다.
베드로가 1순위 그리고 야고보는 2-3순위였다.
그러니깐 베드로와 야고보는 예수님의 원투펀치였다.
그리고 12제자 중 예수님으로부터 신뢰를 받았던 인물 세 명이 있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었다. 성경은 이 순서대로 기록한다.
야이로의 딸을 살릴 때, 변화산을 등산하실 때,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은 이들 세명을 따로 불렀다.
베드로가 1순위, 야고보가 2순위였다.
결국, 이 두 사람은 예수님 제자학교 동기동창이면서 학업 성적 1,2등을 차지했던 인물들이다.
예수님 승천 이후에도 이들은 앞장서서 예수님의 유언을 실행했고, 예루살렘 교회의 리더로 사역했다.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야고보는 죽음을 면치 못했고, 베드로는 극적으로 생존했다.
어떤 이유와 원인으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흔히 하는 말로, 단숨 한 해석이요 결론이다.
"베드로는 믿음이 좋아서 살아났는가?"
"아니면 교회가 기도했기에 살아났는가"(5)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지는 대전제 하나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죽음을 열등한 사실로 해석한다.
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안타까워하는 감정이 드러난다.
망자가 자신과 긍정적인 관계에 있었던 분이라면 더더욱이 안타까워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리도 본문을 읽다가 야고보가 죽임 당했다는 사실을 열등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리고는 더 나아가 야고보의 믿음이 베드로의 믿음보다 열등했다고 억측을 하기까지 한다.
앞에서 이런 예를 들었다.
한 교회 안에서 비슷한 시기에 암 투병을 하다 한 자매는 살았고 한 자매는 죽었다고 했다.
그러면 교회 안에는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체험한 가정을 심히 사랑하셔서 그런 복을 주셨다는 스토리가 소문처럼 교회 내부에 퍼진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죽음을 면치 못한 그 가정을 외면하시고 버리신 것인가?
이렇게 우리는 죽음이 열등하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이 전제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깨뜨려야 한다.
죽음은 결코 열등한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살아있다는 사실이 비참하기까지 할 때가 수도 없이 많다.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부활교리이다.
그런데 이 부활교리는 죽음 없이는 해석이 안 되는 교리이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부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죽음 없이는 해석이 안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죽음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자아가 죽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날마다 죽어야 한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여야 한다"
일종의 부활교리에 해당하는 말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입으로는 부활교리를 말하면서 아직까지도 죽음을 열등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전제를 깨뜨려야 오늘의 문제가 해결된다.
야고보의 죽음과 베드로의 구원 모두 동등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음도 기도응답이고 구원도 기도응답이다.
구원만 기도응답이 아니다.
사도행전 4장 23-31을 찾아서 읽어보자.
초대교회의 첫 번째 박해현장을 소개한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못 걷게 된 병자를 고쳤다.
이 일로 베드로와 요한이 공회에 끌러가 심문을 받았다.
심문 끝에 앞으로는 예수의 이름으로는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경고를 듣고 풀려났다.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교회를 방문하여 자신들이 풀려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23)
이 소식을 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24-30)
성도들이 사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내용이다.
이 중에 29절을 보라.
"주님, 지금 우리는 그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의 종들로 하여금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하소서"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유대인들이 자신의 교회와 신앙을 위협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 주소서"
"베드로와 요한을 살려주셔서 감사하다든지" "앞으로도 말씀을 전하는 자들의 생명을 보전하여 주소서"
혹은 "유대인들의 박해가 심하니 당분간은 조심하겠다"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뜻을 굽히지 않게 해 달라"라고 기도한다.
죽거나 살거나 관계없이 뜻을 굽히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니깐 이들은 자신들이나 사도들의 죽음과 구원에 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이들의 유일한 관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뿐이었다.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뜻이 보전되기만을 기도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 생사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성도들의 관심은 사도들이 살아나거나 죽는 것이 아니다.
오직 어떤 상황 중에도 사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 되어야 한다는데 관심이 있었다.
그러므로 야고보의 죽음이나 베드로의 구원이나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야고보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니깐 순교했다.
야고보의 순교는 그가 뜻을 굽히지 않았기에 획득한 거룩한 죽음이다.
베드로도 마찬가지다. 그의 구원도 그가 뜻을 굽히지 않았기에 획득한 거룩한 구원이었다.
죽음이나 구원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면, 그것은 거룩한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인과율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고 설명하려는 시도는 무지함에서 비롯된 발상이다.
지난 주중이 어떤 청년과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제가 누가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다고 전하니
그 청년이 자기 동기 중에 세 명만 결혼하고 나머지는 아직 미혼이다라고 말하더라고요.
누구는 결혼하고 누구는 미혼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인과율로 설명할 수 있는가?
세상에 일어나는 일조차 인과율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스토리를 인과율로 설명하려고 드는가?
성경은 이유나 원인을 설명하고 규명하는 책이 아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은 인과율, 즉 원인과 결과라는 등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
구원받기 전에도 우리는 주님의 뜻을 전혀 모른다.
예수 믿고 난 뒤에도 우리는 주님의 뜻을 온전히 알 수 없다.
설교 한 편 듣고 아니면 성경 한 구절 묵상하고 그리고 기도 한 시간 하고 난 뒤에 우리가 주님의 뜻을 말한다고 해서
그 진술이 주님의 뜻이라고 확정 짓을 수 없다.
논술이나 철학적인 논증으로도 주님의 뜻이 규명되지 않는다.
인과율이라는 개념으로도 주님의 뜻을 알 수 없다.
그러니 제발 앞으로는 개인에게나 교회안팎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안들을 인과율로 해석하려 들지 마라.
결론이다.
지금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운전하시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하나님이 조종사이시다.
비행기가 이륙해서 목적지로 운행 중이다.
때때로 일기가 불순하여 비행기가 제 속도를 못 내기도 한다.
천둥이나 번개로 인하여 기체가 요동칠 때도 있다.
비행기 안에 있는 우리는 왜 일기가 불순한지 왜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이는지 알 수가 없다.
원인과 결과를 모른 채 비행기에 탑승 중이다.
확실한 사실 하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사실 하나가 있다.
내가 탄 비행기의 조종사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우리가 사는 동안 인과율로 설명이 안 되는 수많은 사건 사고를 만나게 된다.
이런 사선이나 현상들로 인해 좌절하고 지친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 사는 것 같은데, 나만 왜 이렇게 살까?
불공평하다. 그런데 설명이 안된다.
이게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이다.
심지어 왜 하필 우리가 구원받았는지도 인과율로 설명할 수도 없다.
인과율로 세상의 모든 일을 해석하려 들지 마라.
인과율의 개념을 버려라.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더욱더 분명해진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면 신뢰할수록 하나님의 뜻이 더욱더 분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