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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9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장수정 한국 선수 40년만에 WTA 우승
여자프로테니스(WTA) 125K 시리즈 노디아오픈(총상금 11만5천 달러)에서 장수정(27·대구시청)이 우승 했다.
WTA 단식 세계 랭킹 155위 장수정은 9일(현지시간) 스웨덴 베스타드에서 열린 노디아오픈 단식 결승에서 리베카 마사로바(146위·스페인)를 2-1(3-6 6-3 6-1)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
WTA 투어는 10일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장수정의 우승 소식을 전하며 "1982년 이덕희가 WTA 투어 포트마이어스 오픈에서 우승한 이후 한국 선수가 단식에서 우승한 가장 큰 대회"라고 평가했다.
이번에 장수정이 우승한 WTA 125K 시리즈 대회는 투어보다 한 등급 아래지만 세계 랭킹 100위권 이내 선수들이 다수 참가한 수준급 대회다.
남자프로테니스(ATP)와 비교하면 투어 바로 아래 등급인 챌린저에 해당한다.
조윤정이 2002년과 2003년, 2006년에 WTA 투어 대회 단식 결승에 세 차례 올랐지만 모두 준우승했고, 장수정이 이번에 WTA 125K 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2021년 미국 캘리포니아 데스밸리의 퍼니스 크릭에서 측정된 기온은 54.4도였다. 기상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높은 수치였다
2020년 박원순 서울시장 자살
박원순(朴元淳, 1956년 3월 26일 ~ 2020년 7월 9일)은 대한민국의 변호사, 시민단체 출신의 정치인으로 제35·36·37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였다.
박원순은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박길보와 노을석의 2남 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해서 1975년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입학하였으나 입학한지 수개월만에 유신체제 반대 학생 운동과 관련하여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대학에서 제적되었다. 이후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1982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첫 발령을 받았으나, 6개월만에 사표를 내고 변호사로 개업하여 인권변호 및 시민운동을 했다.(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 변론,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변론, 여성 국제 전범 법정 활동, 국회의원 불법 낙선운동)
이후 아름다운 재단 설립, 결식제로운동 등흘하여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다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당선 된 후 35대, 36대, 37대 서울시장을 역임 하여 재직 중 여비서의 성추행으로 피소 되고 이튿날 자살하였다
2017년 경부고속도로 오산 구간에서 광역버스 운전기사 졸음운전 7중 추돌 사망 2명 부상 15명
2015년 ‘팝송 박사’… 국내 DJ 1세대 김광한씨 별세
서울 출신인 김씨는 서라벌예술대학 방송학과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부터 팝송을 좋아해 노래 제목과 가수 이름을 줄줄 외웠고, 육군사관학교에 가라는 모친의 권유도 거절하고 방송학과에 진학했다고 한다. ‘팝송 박사’로 불리던 대학 2학년 때 FBS FM 라디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방송 관계자들의 권유로 ‘FM 히트 퍼레이드’(1966)의 진행을 맡아 국내 최연소 DJ가 됐다.
KBS 라디오 프로그램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1982~1994) ‘김광한의 추억의 골든 팝스’(1999) 등을 진행하며 이종환·김기덕·백형두·박원웅·황인용씨 등과 함께 1980년대 대표적인 ‘인기 DJ’로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TV 개그 프로그램인 ‘쇼 비디오자키’에 출연해 얼굴을 알리기도 했다. 최근에도 CBS 라디오 ‘김광한의 라디오스타’(2013~2014)를 진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한국대중음악평론가협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2015년 오늘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012년 ‘병신춤’의 대가, 공옥진 여사 별세
1931년 전남 승주(현 순천)에서 판소리 명창 공대일 선생의 공씨는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일본으로 건너가 무용가 최승희에게서 춤을 배웠다.
아버지에게 창을 배웠고, 성원목·김연수·임방울 등 명창을 사사한 그는 1945년 조선창극단에 입단한 이래 평생 무용가의 길을 걸어왔다. 전통 무용에 해학적 동물 춤을 접목, ‘1인 창무극’이라는 독창적인 장르를 개척했다. 특히 ‘곱사춤’과 원숭이·퓨마 등 동물을 모방한 춤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70~80년대 서울 원서동 공간사랑을 무대로 노래와 춤, 연기를 곁들여 펼쳐진 그의 1인극은 장안의 화제가 됐다.
공씨는 그러나 1998년에 이어 2004년 다시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는 왼쪽 몸이 마비돼 거의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또한 그의 1인 창무극은 역사적으로 전승된 것이 아니라 창작무용이라는 이유로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지 못해 마음고생을 겪었고, 기초생활수급자로 생활하는 모습이 알려져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그는 2010년 전남도 무형문화재 ‘1인 창무극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됐고, 지정 다음 달 불편한 몸을 이끌고 국립극장에서 열린 ‘한국의 명인명무전’ 무대에 선 것이 마지막 공연이 됐다.
199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투병생활을 해 왔으며 이날 별세 했다.
2005년 북한 6자회담 복귀 선언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은 9일 베이징에서 만나 오는 25일 시작되는 주(週)에 회담을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미·북은 10일 이같은 내용을 공식 발표했다.
북한 외무성은 10일 대변인 발표를 통해 “미국측은 조선(북한)이 주권국가라는 것을 인정하고 침공의사가 없으며 6자회담 틀 안에서 쌍무회담을 할 입장을 공식 표명했다”고 밝혔다. 또 “이런 입장 표명을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의 철회로 이해하고 회담에 나간다”고 말했다.
미국은 이런 북한 발표를 반박하지 않았다. 이날 중국 리자오싱 외교부장과 베이징에서 회담을 가진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은 기자들에게 “(북한의 6자회담 복귀는) 첫 단계일 뿐이며 중요한 것은 회담에서 진전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또 “조선반도를 비핵화하는 것은 우리의 최종목표”라며 회담이 열리면 “조선반도 비핵화를 이룩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 백악관은 이에 대해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를 다짐하며 회담에 복귀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했다. 미국 언론들은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게 밝힌 ‘중대 제안’은 핵 포기를 전제로 한 대규모 에너지 지원이었으며, 이 제안이 6자회담 재개 합의에 도움이 됐다고 보도했다.
한편 우리 정부는 11일 정동영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 주재로 관계 장관들이 참석하는 고위전략회의를 열어 6자회담 대책을 논의했다.
2004년 서울 아차산 고구려 보루터에서 서기 500년 전후로 추정되는 건물터, 기와, 토기 조각 발견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 고구려 보루(堡壘·군사용 진지)터에 군사상 중요한 건물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와 조각(片)이 발견됐다.
이 지역에 대한 발굴 조사를 벌이고 있는 고려대 매장문화연구소는 9일 이곳의 홍련봉 1보루 발굴조사 결과 서기 500년 전후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기와·토기 조각이 처음 발견되었다고 밝혔다.
아차산 일대는 고구려의 최남단 군사기지가 있던 곳으로, 백제의 개로왕과 고구려의 온달이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2004년 월북한 미군 탈영병 찰스 젠킨스, 인도네시아에서 일본인 아내 소가와 상봉
북한에 납치됐다 일본으로 돌아온 소가 히토미(45)가 9일 저녁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한 호텔에서 미군 탈영병으로 북한에서 살아온 남편 찰스 젠킨스(64)와 두 딸 등 일가족과 1년9개월 만에 재회했다.
소가는 1978년 일본 니가타(新潟)현의 해안에서 납북됐다가 제1차 북·일정상회담 직후인 2002년 10월 일본으로 귀환했다. 젠킨스는 1965년 주한미군 병장으로 판문점에서 근무하다 탈영, 월북한 뒤 소가와 1980년 결혼해 북한에 살면서 북한의 선전영화 등에 출연했다.
젠킨스는 미카(21), 베린다(18) 등 두 딸과 함께 이날 일본 정부가 마련해준 전세기 편으로 평양 순안공항을 출발해 오후 7시쯤 자카르타에 도착했다.
소가는 젠킨스 및 두 딸과 함께 일본에서 살기를 희망하고 있지만, 미군 탈영병인 젠킨스는 미국과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고 있는 일본에서 소가와 만나기를 꺼려 제3국인 인도네시아에서 재회가 이루어지게 됐다.
2002년 정부 ‘도로교통법 위반자 벌점 등에 대한 특별감면조치’ 의결, 481만명 교통벌점 말소
2002년 6월 30일 이전에 교통법규를 위반해 운전면허가 정지·취소됐거나, 벌점을 받은 운전자 481만명에 대해 7월 10일자로 면허정지와 교통 벌점조치가 전면 말소됐다.
정부는 9일 국무회의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의 ‘도로교통법 위반자 벌점 등에 대한 특별감면조치’를 의결했다.
지난 98년 3월에도 새정부 출범을 기념해 도로교통법 위반자 532만명을 대상으로 면제조치를 취한 바 있어, 이번 조치는 그 이후 교통법규를 위반한 사람이 대상이다.
이번 특별감면조치에 따라 그동안 속도위반·신호위반 등으로 교통벌점을 받은 운전자 396만여명의 벌점이 완전 취소되고, 운전면허 정지기간 중인 10만여명과 운전면허 정지 또는 취소 대상자 27만여명 등 총 37만명이 행정처분 면제혜택을 받게 됐다.
또 음주운전 등으로 운전면허가 취소돼 면허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던 48만여명도 면허 재취득을 위한 응시가 가능해졌다.
2002년 아프리카 50개국이 참여한 아프리카연합(AU) 공식 출범
아프리카 50여개국의 정상과 정상급 대표들이 남아프리카공화국 항구도시 더반에 모여 지난 39년간 아프리카 국가들의 정치적 통합기구 역할을 해왔던 아프리카단결기구(OAU)를 공식 해체하고 아프리카연합(AU)을 출범시켰다.
회의에 참석한 40여개국 대표들은 AU의 주요 원칙과 주요 기구 설립을 결정했다.
그러나 회의에 참석한 리비아의 카다피의 예정에 없던 연설로 아프리카인을 위한 아프리카를 만들자며 친서방 노선을 발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한 AU 참가국들은 또 내분으로 갈라진 마다가스카르의 백만장자 기업가 출신 마르크 라발로마나나 대통령을 승인하기를 거부하고, 프랑스로 망명한 디디에르 라트시라카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표명, 미국·프랑스·독일 등과 다른 입장을 취했다.
2001년 박세리, 미국 LPGA투어 제이미파크로거 클래식 우승
박세리(24·삼성전자)가 미 LPGA투어 제이미파크로거 클래식(총상금 100만달러)에서 우승, 시즌 3승 겸 통산 11승 고지에 우뚝 섰다.
9일 오전(한국시각) 미국 오하이오주 실베이니아의 하이랜드메도GC(파71·6365야드)에서 끝난 최종 4라운드에서 박세리는 3언더파(버디 4, 보기 1)를 치며 최종합계 15언더파 269타를 기록, 2위 마리아 요르스(스웨덴)를 2타차로 제치고 우승 트로피를 안았다.
박세리는 98년과 99년에 이어 대회 3번째 타이틀을 따내는 한편 올 시즌 3승째를 신고했다
1996년 한국-파라과이, 범죄인인도협정 체결
1995년 순복음교회 안승운 목사, 중국 연길서 납북
중국 연변에서 선교활동 중이던 순복음교회 소속 안승운 목사(50)가 1995년7월9일 연길 시내에서 북한측에 납치됐다.
안 목사는 실종된 날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배웅하기 위해 연길공항으로 나갔으며, 공항에서 돌아오는 길에 조선족 부부의 안내로 새로 옮길 아파트를 둘러보러 갔다가 신원을 알 수 없는 3명의 남자들에게 납치됐다.
2년 전인 1993년 6월 연길시에 도착, 조선족들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학원을 경영하면서 선교활동을 해 온 안 목사는 한국에 가족을 두고 있었으며, 부인이 정기적으로 서울과 연길을 오가며 안 목사를 돌봐왔다.
안 목사는 1983년 3월 상당히 늦은 나이로 순복음신학원에 들어가 목회자의 길에 접어들었다. 1987년 신학원을 졸업하고 전도사로 활동하던 안씨는 1990년 목사안수를 받은 후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연길을 중심으로 연변일대의 선교활동에 종사했다. 1993년 6월 순복음교회로부터 정식으로 중국선교를 위해 파송된 안 목사는 현지의 조선족과 함께 한국어학원을 운영하면서 선교활동을 벌여왔다.
순복음교회측은 “안 목사가 북한 탈출자나 중국을 드나드는 북한주민을 상대로 성경을 전달하고 도움을 주어왔기 때문에 북한당국이 납치대상으로 지목한 것 같다”고 말했다.
2009년 9월 우리측은 안 목사 가족의 상봉을 성사시키기 위해 안 목사의 생사 확인을 요청했지만 북측은 ‘확인 불가’ 통보를 해왔다.
중국 공안당국은 사건 직후 안 목사를 납치한 북한 공작원 이경춘 등 3명을 체포했고, 중국 지린(吉林)성 법원이 이경춘에 대해 징역 2년을 선고했는데도 북한은 안 목사 납북을 부인했다.
안 목사는 이후 2~3년 동안 북한 TV 방송에 연설하는 모습 등이 방영됐다. 그러나 통일부에 따르면 2000년대 이후 안 목사가 북한 TV에 나온 적은 없었다.
안 목사는 2010년 자살한 것으로 확인됐다.
1989년 한국-이라크, 국교수립
1987년 연세대생 이한열군 장례식 노제에 100만 인파 운집
연세대 교문앞에서 시위도중 전경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사망한 연세대 이한열군의 장례식이 1987년 7월 9일 거행됐다. 노제를 지내기 위해 연세대에서 서울시청앞까지 장례행렬이 이어지자 광장앞 인도와 차도에는 100만 인파가 모여들어 이군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군의 죽음은 한 대학생의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다.
한국 현대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6월항쟁’의 처절하고 비장한 마무리였다.
전두환 대통령의 5공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은 연초부터 심상치 않았다.
국민들은 당시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출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다.
게다가 2월의 박종철고문치사사건과 이른바 4·13 호헌조치는 학생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학생시위가 절정에 다다를 무렵 시민단체들은 학생들과 연합해 ‘박종철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6월10일 전국적으로 개최하기로 했다.
당시 연세대 2학년생이던 이군은 이 대회의 일환으로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 교문앞에서 벌이진 시위에 참가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이군 사건은 도시 중산층과 샐러리맨들을 학생시위에 가세토록 하는데 결정적인 촉매제가 됐다.
그때까지 학생시위대를 ‘비난하지 않는 정도’의 소극적 호응으로 대하던 중산층이 적극적으로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정권은 결국 6·29선언이란 항복문서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1987년 시국사범 2,335명 사면 복권, 김대중 등 내란음모사건관련 18명 광주항쟁관련 17명 포함
1982년 미국 팬암 보잉727기 뉴올리언즈공항 이륙중 벼락으로 추락 153명 사망
1981년 프랑스 의회, 산업국유화 계획 등 포함 미테랑대통령의 사회개혁안 승인
1980년 국보위, 2급이상 고급공무원 232명 숙정 발표
1980년 미국 신탁통치령 미크로네시아-파라오제도, 세계최초로 핵무기사용. 실험, 비축금지 등의 비핵조항을 포함한 헌법 채택
1975년 사회안전법안, 방위세법안, 민방위기본법안, 교육관계법안 등 4대 전시입법안 국회 통과
1971년 키신저 극비 중국 방문
1949년 이후 20여년에 걸친 미·중 간 적대관계가 해빙무드로 돌아선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북베트남과 휴전교섭을 하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베트남으로부터 명예롭게 퇴진하기 위해서는 중국이 필요했고, 중국 역시 1969년 3월 진보도에서 소련과 무력충돌을 벌인 후 미국이라는 카드를 갖고 싶어했다.
1971년 4월, 미국 탁구대표의 중국 방문은 화해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첫 시도였다. 그리고 3개월 뒤 닉슨 미 대통령의 특별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아시아 순방길에 올랐다. 키신저는 7월 3일에 남베트남을 방문한 뒤 8일에는 인도를 거쳐 파키스탄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갑자기 심한 복통이 있어 영빈관에서 쉬겠다며 모습을 감추고 일주일이 지난 7월 15일 오후 10시30분, 닉슨은 라디오·TV를 통해 중대발표를 했다. “중국이 나를 초대했고 나도 세계 평화를 위해 베이징을 방문하겠다”는 것이었다. 전후 사정을 몰랐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뉴스였다. 복통을 핑계로 잠행한 키신저가 7월 9일 몰래 베이징을 방문, 저우언라이와 닉슨 방중을 타진한 성과물이었다.
1966년 한미행정협정(SOFA) 조인
1966년 7월 9일 서울 중앙청(舊 중앙박물관) 메인홀에서 한미 행정협정(SOFA)이 조인됐다.
한국 이동원 외무장관과 미국 러스크 국무장관이 1966년 7월 9일 서울에서 한미행정협정(SOFA)에 조인했다. 이 협정은 이듬해 1967년 2월 9일에 발효됐다. SOFA는 `Status of forces Agreement`를 줄인 말이다. 정식명칭은 `대한민국과 미국간의 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의한 시설과 구역 및 대한민국에서의 군대의 지위에 관한 협정`이다.
한미행정협정은 1948년 정부수립후 주한미군의 법적인 지위문제를 규정한 협정인 `군사안전에 관한 행정협정`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러나 이 협정은 우리의 권리 일체를 사실상 포기했다는 비난 여론으로 1949년 미군 철수와 함께 자동 종료됐다. 6.25 발발로 미군이 다시 주둔하게 되자 미국의 요구로 전시라는 급박한 상황을 반영, 미군에게 일체의 재판권을 부여하는 이른바 `대전협정`이 1950년 7월 12일 대전에서 체결됐다. 정식명칭은 `재한 미국군대의 관할권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국간의 협정`이다. 이날 체결된 한미행정협정은 이 대전협정을 대체한 것이다. 한미행정협정은 전문과 31조로 된 본문 그리고 합의의사록, 합의양해사항, 교환서한 등 3개 부속문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형사재판권이었다.
이 형사재판권을 둘러싸고 미국의 한국에 대한 주권침해라는 여론이 높자 우리 정부측의 문제제기로 1988년 12월부터 한미양국이 개정작업에 들어가 1991년 1월 형사재판권과 관련, 재판권 자동포기조항을 삭제하는 등 8개 조항을 개정했다.
1965년 남정현, 소설 ‘분지’로 구속
1965년 7월 9일, 중앙정보부가 소설가 남정현(南廷賢)씨를 구속했다
단편소설 ‘분지(糞地)’가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현대문학 1965년 3월호에 처음 실렸을 때만해도 특별히 주목받지 않았던 소설이 갑자기 문제가 된 것은 북한의 ‘통일전선’ 5월 8일자에 실리면서였다.
그리고 5월 어느날 남정현은 정보기관에 끌려가 상상할 수 없는 심문을 당한 끝에 7월 7일 구속된다.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북한은 남정현이 구속된 다음날 ‘조국통일’ 7월 8일자에 또 ‘분지’를 실어 부아를 돋우었다.
문인들과 언론기관이 다투어 ‘분지’의 무죄를 강조하는 과정에서도 곤욕을 치른 사람이 있었다. 조선일보 7월 13일자에 남씨의 구속을 항의하는 글을 쓴 백낙청과 원고를 청탁한 당시 조선일보 문화부장 남재희가 정보부에 끌려간 것이다.
남정현은 7월 24일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나긴 했으나 이듬해 7월 23일 불구속기소돼 결국 반공법으로 법정에 선 첫 작가가 됐다. ‘분지’는 1967년 6월 28일 1심 판결에서 선고유예판결을 받았다. 남정현의 이름이 ‘현대문학’에 다시 등장하는 데는 33년의 세월이 흘렀다. 현대문학이 1998년 10월호에 다시 ‘분지’를 실었기 때문이다.
1965년 프랑스, 나토 핵군안을 거부
1965년 백구부대 및 군사원조단 증원요원 460명 파병
1963년 말레이시아연방협정 조인
1955년 퍼그워시 성명 발표
1955년 7월 9일 철학자 러셀과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등 세계의 저명한 지식인 11명이 캐나다의 작은 어촌 퍼그워시에 모여 핵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핵무기 폐기 협정` 체결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문건은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중국 캐나다 6개 나라의 국가 정부 수반에게 보내졌다.
1957년 7월 7일 이 성명에 동조하는 10개국 22명의 핵물리학자들이 퍼그워시에 다시 모여 `핵무기없는 세계, 전쟁없는 세계`를 주창하는 첫 회의를 열었다. `퍼그워시 회의`의 출발이었다. 정확한 이름은 `과학과 국제문제에 관한 퍼그워시 회의`이다. 창립 회의에서는 방사능의 분석을 토대로 핵실험의 중지를 요청했다. 그뒤 매년 한두 차례 여러나라를 순회하며 열리고 있는 이 회의는 어디서 열리든 모두 `퍼그워시 회의`라 부른다.
창립되던 해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로 촉발된 미소경쟁의 와중에 양측 과학자들의 비공식 대화를 주선한 것을 시발로 핵확산 금지조약(NPT) 제안(1958년), 쿠바위기 중재(1961년), 핵실험 금지조약 체결(1963년), 화학무기 협상(1969년) 등 이들의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1975년의 제25차 회의에서는 완전한 비핵화를 요구하는 유카와 선언이 발표되기도 했다.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1990년대 북한 핵위기 때 북한과 미국간의 대화를 중재하고 제네바 합의와 경수로 제공의 길을 터놓은 것도 퍼그워시 회의였다.
퍼그워시 회의는 1995년 창립 멤버인 롯 블라트와 노벨평화상을 공동으로 수상하며 세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회의는 창립 당시부터 고수하고 있는 몇가지 원칙 즉 회원제를 배격하고 오직 초청에 의해서만 회의 참석자들을 선정한다든지, 모든 회의를 비공개로 진행한다는 고집 등을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
1951년 영국 최초의 상용컴퓨터 `마크I` 출시
1950년 한국전쟁 중 미8군 사령부 대구에 설치
1939년 함북 유산탄광 화약 폭발 45명 폭사
1937년 터키-이란-이라크-아프가니스탄 4개국, 상호불가침조약 조인
1932년 소설가 최서해 사망
1932년 미국의 발명가 질렛 사망
1910년 소설가 김광주 수원에서 태어남
1882년 근대 발생학의 창시자 영국의 동물학자 밸푸어 사망
1856년 이탈리아 물리학자 아보가드로 사망
1835년 쿠바의 초대 대통령 에스트라다 팔마 출생
1819년 재봉틀 발명가 하우 출생
의류의 대량생산에 있어 에디슨과 노벨에 비할만한 업적을 이룬 엘리아스 하우가 1819년 7월 9일 미국 매사추세주 스펜서에서 태어났다.
기계공이었던 엘리아스 하우는 바느질하는 아내의 모습이 안쓰러워 인간의 손 대신 바느질을 해줄 기계 ‘재봉틀(sewing machine)’을 고안해 냈다. 하우는 재봉틀을 실용화하려는 연구를 거듭하던 중 아프리카 원주민이 끝에 구멍난 창을 가지고 그를 죽이려드는 꿈을 꾸게 된다. 이 때 놀라 깬 하우가 꿈속에서 봤던 창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재봉틀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로써 5년 동안에 걸친 개발 끝에 하우는 결국 실용적인 재봉틀을 개발해냈고 1846년에 특허를 얻었다.
그러나 발명 초기에 이 기계가 미국에서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하자 결국 하우는 영국에 특허권을 250파운드(1,250달러)에 팔아넘겼다. 그후 영국으로 건너간 그는 재봉틀 개량 작업을 계속했지만, 재정상태가 악화되자 무일푼으로 미국에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정작 고국인 미국 내에서 자신의 특허권이 침해된 채 이미 재봉틀이 널리 제작, 판매되고 있는 게 아닌가. 여러 차례의 소송 끝에 1854년 하우의 권리가 확증되었고, 그때부터 특허권의 만기인 1867년까지 하우는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모든 재봉틀에 대해 로열티를 지급받았다.
그가 이뤄낸 재봉틀의 발명은 섬유공업의 마지막 관문인 바느질을 기계화한 것으로써 지난 18세기 실을 뽑는 방적기와 천을 짜는 직조기가 개발된 이래 세계적으로 과도하게 늘어난 면포 생산량을 소화해낼 수 있게 한 의복제조의 혁명이었다.
1816년 아르헨티나,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1802년 최초의 전동기 발명한 데이번포트 출생
1592(조선 선조 25) 의병장 고경명 세상 떠남
660년 신라와 백제의 황산(黃山)벌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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