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죄부를 팔아 종교 개혁을 초래한 교황 레오 10세와 불멸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 둘을 하나로
묶을 만한 공통점이 있다. 바로 메디치(Médicis) 가문이다. 레오
10세는 메디치가의 일원이고 다빈치는 메디치가의 식객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은 사람들 명단에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군주론》을 지은
마키아벨리도 포함되어 있다. 종교재판에서 근신을 명받은 후 여생을 메디치가의
보호 속에서 보낸 갈릴레이는 새로 발견한 목성의 위성에 '메디치의 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후발 은행업자인 메디치 가문이 도약한 계기는 1412년 1월 16일 체결한
교황청과의 전속 은행 계약. 메디치는 프랜차이즈 제도를 처음 도입해 유럽
16개 도시에 지점을 깔았다. 돈은 권력으로 이어졌다. 1743년까지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는 가장 많은 교황(레오 10세, 클라멘트 7세,
레오 11세)을 배출한 집안으로도 유명하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상업 자본으로 출발한 정치권력이 300년 넘게 유지된 사례도 메디치가
유일하다.
중세
후반과 근대 이탈리아 역사를 대변하는 메디치 가문사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두 사람. 코시모(Cosimo de Médicis, 1389 ~
1464)와 그의 손자 로렌초(Lorenzo de Médicis, 1449 ~
1492)다. 문화 예술을 후원하고 대학에 막대한 기부금을 낸 '위대한 로렌초'는 수필과 극화를 남긴 르네상스의 문장가로도 기억되고
있다.
코시모는 현대 기업 경영에도 영향을 미친 인물. 상인과 군인, 예술가, 성직자 등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을 모아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창조와 혁신으로 연결시킨 그에게서 '메디치 효과'라는 용어가 나왔다. 코시모는 고리대금업으로 번
막대한 돈을 교회와 도서관·병원 건립, 학문 지원에 쏟아부었다. 면죄부를 팔아 종교 개혁의 빌미를 제공한 교황 레오 10세와 서구적 자선 문화의
선구자가 한 집안에서 나왔다는 점이 이채롭다.
평민 집안을 명문家로 만든 코시모 메디치… 서로 다른 분야
접목해 '文化 혁신'
'메디치 효과'로 유럽의 역사 바꿔 死後에 피렌체의 國父로 숭배받아
"왕조는 소멸하며 국가는 붕괴한다.
학설은 효력을 상실하며 기관은 영락한다. 그러나 작품은 살아남는다."
미술평론가 데이브 히키가 남긴 이 말은 아마 이 가문에 딱 들어맞는 말일 것 같다. 15세기부터
300여 년간 피렌체와 토스카나 지방을 실질적으로 통치했으며 네 명의 교황과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했던 메디치 가문 말이다. 18세기에
대가 끊긴 이 가문은 그들이 남긴 예술작품과 21세기에도 유용한 삶의 태도로 계속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폰토르모,
‘코시모 메디치의 초상화’, 1519~1520.
평민 출신의 메디치 가문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바꾸어 놓은 사람은 코시모
메디치(1389~1464, 재위 1434~1464)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작은 도시국가들이 군웅할거하며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상인이자
은행가였던 코시모는 평화야말로 국민적인 부가 창출되는 기본 조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전쟁 대신 탁월한 외교술로 이탈리아 전체에
힘의 균형을 만들어냈다. 전쟁으로 인한 세비 부담을 없애고 경제활동에 매진할 수 있는 평화의 분위기를 조성해내는 데 성공했다. 평민 출신으로
아무런 공직도 갖고 있지 않던 그에게 '공화국 수장'이라는 칭호가 부여되었으며, 사후에는 피렌체의 국부(國父)로
숭배받았다.
코시모는 "인도의 향료와 그리스의 서적을 종종 한배에 실어 수입해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열렬한 학문 숭배자이자
예술 애호가였다. 학문과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시대를 변화시켰다. 코시모가 후원한 이들은 모두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로 성장했다. 그는 기성의
유명 작가들보다 젊고 신선한 아이디어를 가진 작가들에게 건축과 작품을 의뢰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낯설고 새로운 것들에서 더 나은 것들이
자라나는 흥미로운 과정을 지켜보았다. 코시모의 방식에 주목한 경영학자들은 '서로 다른 이질적인 분야를 접목하여 창조적·혁신적 아이디어를
창출해내는 기업 경영 방식'을 의미하는 '메디치 효과(Medici Effect)'는 말을 만들어냈다.
평소에 즐겨 쓰던 붉은
모자가 등장하는 코시모의 초상화는 그가 죽은 지 50년이 지나서 그려졌다. 그의 장자 가문이 대가 끊기자 방계 후손이 대를 이으면서 그를
기리고자 의뢰한 그림이다. 이 그림이 그려질 무렵 코시모 메디치가 만들어 낸 '메디치 효과'는 피렌체를 넘어서 전 유럽의 역사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고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돔 건축이다. 코시모의 전격적인 후원으로 젊은 건축가 브루넬레스키는 1436년 16년 만에 높이
109m에 이르는 돔을 완공할 수 있었다. 돔의 건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브루넬레스키는 '선(線)원근법'의 원리를 발견했다. 선원근법은 르네상스
이후 500여년간 서양 회화를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시각적·철학적 원리가 되었다. 의도하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생산적인 결과가 얻어진 것이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1475년에 파올로 토스카넬리는 돔의 높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의 움직임을 관찰해서 태양의 운동을 계측했다. 그의
실험은 천문항법 시대의 문을 열었고, 이는 1492년 인도를 향한 콜럼버스의 대항해의 근거가 되었다.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하여 식민지
개척을 시작함으로써 그를 후원했던 스페인은 서구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로 등극하게 된다. 돔의 건설에서 원근법의 발명, 그리고 콜럼버스의 항해까지
예기치 못한 생산적인 결과들의 연이은 도출, 이것이 바로 메디치효과의 가장 긍정적인
예이다
메디치家에서
배우는 명문가가 되는 길
"피렌체를 오늘의 피렌체로 만든 것은 메디치 가문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다 아시는
사실입니다. 그 메디치 가문을 있게 한 사람 중 한 사람이 코지모 데 메디치(1389-1464)입니다.
천재적인 경영능력과 정치수완으로 메디치가를
유럽 최고의 부자
가문으로 만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신조는 '겸손'이었습니다. 그분은 말을 타지 않고 당나귀를 타고
다녔습니다. 피렌체 시내를 다니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항상 공손히 절을 하였습니다. 그는 대중의 질투심이 얼마나 큰 것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집을 지으면서도 귀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네가 아닌 시장 바로 옆에 집을 지었습니다.
대중과 가까이 있으려는
배려에서 였지요.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집을 지으면서도 호화스럽게 짓지 않았습니다. 대중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지요. 지금도 피렌체를 방문한 분들이 안내인의 설명이 없으면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평범합니다."
우리 모두가 르네상스를 가져온 메디치 가문의 부흥자로 알고 있는 코지모 데 메디치가 '겸손'을 평생의
신조로 삼고 대중의 질투심을 두려워 하여 당나귀를 탔다는 사실은 저에게 충격으로 전해졌습니다. 코지모 보다 훨씬 못한 부를 가진 우리들도 좀 더
큰 차, 좀 더 좋은 집을 원하는데 코지모는 대중을 늘 생각하며 돈을 벌고 피렌체를 경영하였던 것입니다.
"메디치 가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코지모 데 메디치의 손자 로렌조 데 메디치입니다. 여러분 코지모와 로렌조 정도는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로렌조 데 메디치는 어느날 공원을 지나가다가 조각을 하고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합니다. 그가 노인을
조각하고 있는데 이빨이 너무 가지런 하였습니다. 이를 보고 로렌조는 이야기합니다. '이빨이 너무 젊은 것 같아 다시 만드는 것이 좋겠어.' 그
다음날 그 소년은 기가 막힌 작품을 만들어 가지고 옵니다. 로렌조는 그의 아버지를 불러 그 아이를 양자로 삼겠다고 합니다. 그가 바로
미켈란젤로입니다. 미켈란젤로는 로렌조 데 메디치의 양자가 되어
최고의 인문학 교육을받습니다. 그가
인류를 위한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능을 발굴하여 교육을 시킨 로렌조 데 메디치의 덕분입니다. 우리 모두는 로렌조에게
감사하여야 합니다."
예술가를 후원할 수는 있지만
양자로 삼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특히 그 아이를 데려다가 미술 교육이 아닌 최고의
인문학 교육을 시켰다는 대목에서 로렌?뗌?비범함이 느껴집니다. 미켈란젤로는 플라톤 철학을 공부하고 자신의 조각, 그림, 건축에 이를 모두
반영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 로마 철학으로 대변되는 이런
인문학 배경이 없었다면 그런 위대한 작품이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미술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주목해 보아야 할 대목인 것
같습니다.
"메디치가의 마지막 후손인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데 메디치는 몰락한 가문의 재산을 정리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메디치가의 모든 재산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로레인 왕가에 넘기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오랜 침묵 끝에 협상 테이블에 나와 두 가지 조건을 내겁니다. 첫째 메디치의 모든 예술품들은 국가의 소유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피렌체를 떠날 수 없다. 둘째 이 예술품은 국가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한다. 이를 계기로 우피치 미술관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메디치가의 미술품이 유럽으로 흩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우피치 미술관은
오늘날도 피렌체를 찾는 많은 관광객이 반드시 가보는 미술관이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우리가 잘 아는 작품들이 많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보디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입니다. 메디치가가 피렌체를 부흥시키기도 하였지만 메디치가의 마지막 상속녀 안나 마리아 루이자의 역사적 결정이 없었으면 오늘날 피렌체가 이 많은
미술품을 가지고 있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
설명 대목에서 일제 시대때 문화재를 사재를 털어 구입 보존한
간송 전형필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우리에게는
이런 명문가가 없었을까 아쉬움을 가져 봅니다. 고려시대 무신 집안들도 있었고 조선조 권문세가들이 있었는데 우리에게는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줄 가문이 없다는 사실이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몇백년 후 삼성의 리움 박물관이 이런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해 봅니다.
우리나라에 가문이라는 개념이 있기나 한 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문중이라는 개념이 있지만 유럽의 가문만큼 세력화 되어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요즘 들어 삼성가 현대가 LG가 등 재벌
집안을 일컬을 때 가문이라는 표현이 더러 사용되기도 하지요. 메디치가의 역사를 보면 역사에 남는 가문은 가문 나름의 철학이 있을 때 가능한 것
같습니다.
"유럽에서 명문가가 되려면 십자군
전쟁 당시 기사단에 참가하여 전사한 가족이 한 사람 쯤 있어야 했습니다. 한 가문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어떤 희생을 하였는 지에 따라 그 가문에
대한 대접이 달려졌던 것입니다."김상근 교수님의 부연 설명입니다.
재산이 많아 명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를 위한 헌신이 전제 되어야 명문가가 될 수 있다는 유럽의 전통은 오랜 세월을 거친 의미
있는 것으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대목이었습니다.
토스카나 출신, 메디치가와 관련된 인물들,
교황 레오 1세,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 마키아벨리(1469-1527),
피렌체, 메디치(1434 1737), 미켈란젤로(1475),.......
첫댓글 정말 꼭 읽고 명심하고 실천해야 할 훌륭하고 좋은 자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유포하고 꼭 실천하도록 퍼뜨리겠습니다. 물론 저 자신도 실천!!! 하겠습니다.
메디치가(家), 늘 동경하고 속으로 우럴어봤던 가문인데, 참으로 역사속에 남을 만한 명문가 올시다. 사람이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을까. 정말 나 자신이 한 없이 작아지는 순간입니다.
또 다시 읽었습니다. 이런 건 알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몇 사람이나 알까요.
메디치가문 정말 어마어마합니다. 후원 받은 인물들이 모두 역사에 남는 예술가, 저술가입니다. 부럽다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