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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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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갑니다. 스크랩 여수의 소록도병원 애양원 가는 길
호남종합 추천 0 조회 152 12.09.17 18: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율촌2산단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수로가 애양병원 잔디밭, 이국적인 모습이 미국 선교사들이 고향을 그리워해서 만들었을 것 같다.

 

▲비행장을 돌아서 들어오는 애양원이 율촌2산단 호안 공사로 섬이 되어 다리로 건너는 듯 하다.

 

섬이 되어버린 애양원

37번 시내버스를 타고 애양원으로 갯가길 걷기를 하였다. 애양원과 주변 마을은 1971년 비행장이 들어서면서 비행장에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2004년 비행장 활주로 길이가 폭 40m 길이 2,100m의 국제선 규모로 확장되면서 당머리와 학서리 마을이 사라졌다. 그만큼 병원으로 들어오는 길이 돌아서 가게 되어서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애양원은 섬이 되어서 접근이 어렵게 되었다.

 

애양원이 있는 곳은 신흥마을, 애양마을, 도성마을로 이뤄졌다. 신흥마을은 애양병원이 만들어지면서 병원 관계자들의 숙소가 들어서면서 생긴 마을이다. 모래언덕, 모래촌이라 하여 공제동과 신흥이 있었는데 공제동은 공항이 생기면서 이주하여 폐쇄되었다. 30여 년전에는 이곳으로 해수욕을 하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병원 초창기에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설치하여 병원 밖을 문간이라고 불렀다.  

 

애양마을은 원래 3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바다갓 편평한 곳에 있어서 평지동(平地洞), 거북바위가 있고 가운데 있다고 해서 간지동(中洞), 간지동 너머에 있어서 넘어동(越洞)이 있다. 1897년 여수군 구산면이었다가, 1914년 율촌면 신풍리 구암마을로 그 후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산리, 1986년 8월 1일 다시 행정구역 분구로 구암리가 되었다. 

 

연안 차씨가 사는 구암리 2구 학서 마을은 사방이 확 트이고 풍조(風調)하여 새가 날기 좋은 곳이고, 마을 모양이 학 모양이어서 그렇게 불렀는데 1972년 비행장이 들어섰고, 지금은 사라진 마을이 되었다. 비행장을 돌아돌아서 애양병원 입구에서 시내버스를 내렸다. 새로 지은 병원 건물이 눈 앞에 우뚝 솟아있다.

 

 

▲새롭게 지은 애양병원, 전체적으로 옛것을 허물지 않고 조화를 꾀한 것이 마음에 든다.

 

▲옛날 돌로 만든 숙소가 매점으로 바뀌었다.

 

▲병원 신관이 예술적으로 지어져서 주위를 돋보이게 한다.

 

▲구관 건물과 신관 건물이 서로 잘 어울리게 병원 건물을 만들었다.

 

▲소나무 가로수가 길게 늘어서 있는 도로

 

▲이 길로 들어서면 애양병원 유적지가 모여있다.

 

 

여수의 소록도병원, 애양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 하면 모두들 '소록도병원'을 생각한다. 국립 병원인 '소록도병원'은 1916년 소록도 자혜의원으로 시작하였다. '여수애양원'은 1911년 광주나병원으로 시작하였으니 소록도병원보다 더 먼저 세워진 셈이다. 한국 최초의 민간인이 만든 한센병 치료 병원이다.

 

1909년 미국남장로교 한국선교회 포사이드 선교사가 광주 남평 부근에서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여성 한센병 환자를 발견하여 치료를 하였다. 그 후 1911년 4월 25일 광주시 효천면 봉선리에 '광주나병원'을 설립하였다. 환자가 늘어나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어서 1925년 경치가 아름다운 바닷가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1번지에 새로운 터를 잡고 당시 돈 77,000원으로 논과 밭 40,000평을 확보하여 공사가 시작되었고, 나중에 100,000평을 추가로 확보하였다. 1928년 한센병 환자 600명을 데려왔다. 1936년 '여수애양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금에 이르렀다. 애양원은 서로 사랑하고 보호하고 도우면서 살아가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다른 말로 ‘사랑의 동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1950년 한국전쟁 이후에는 일반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센병은 점차 사라졌고 일반 환자들이 많이 찾는다. '여수애양병원'은 피부과와 정형외과, 내과 진료를 하지만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이므로 피부과 치료를 잘 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1년에 4만명 이상이 치료를 받으러 온다. 정형외과 역시 한때 들불처럼 번졌던 소아마비가 백신이 생기면서 급감하고, 퇴행성관절염을 앓는 사람이 급증하면서 수술을 받으려오는 사람이 많다. 2011년 12월 EBS 메디컬 다큐 명의에 '시골 의사, 100년 인술을 잇다 - 정형외과 전문의 김인권 원장'편이 방영되었다. '여수애양병원'의 여수의 대표 브랜드 병원으로 전국에서 많은 환자들이 찾아온다.

 

 

▲140명 한센병 환우들의 사진, 역사박물관 소장

▲도성래와 안미령 원장 부부 의사의 조형물, 고마움이 잘 나타나 있다. 

 

▲율촌2산단 조성으로 만들어진 매립지로 건너는 나무다리, 아직 매립지는 큰 호수가 되어 있다.

 

▲광양만권 개발계획도, 광양만권경제자유구역청 홈피 참고

 

▲30년 전에는 모래밭이 좋았다. 멀리 거북바위도 보인다.

 

▲율촌2산단 부지, 아직은 담수호가 되었다.

 

여유가 느껴지는 병원 안 돌아다니기

바닷가 은빛 금빛 모래밭에서 치료와 휴양을 위해서 만들어진 애양원이 이제는 달라졌다. 광양만 갯벌에 율촌2산단이 만들어지면서 긴 둑이 생겼다. 요양병원 앞 율촌2산단은 2010년 2단계 사업으로 8,583억원을 들여서 3,792천㎡ 면적을 조성하려고 한다. 현재는 가호안 23.5km 축조를 완료했고, 가호안 안쪽에 준설토를 매립 중에 있다. 앞으로 2020년까지 공사를 진행하고, 개발 및 실시계획 승인 및 산단조성을 위해서 착공을 한다.

 

애양원은 율촌2산단 호안으로 둘러쌓여있다. 그 호안으로는 자전거를 타고 돌 수 있는 도로가 만들어졌다. 그 도로와 애양병원을 잇는 나무다리가 만들어져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병원에서 입원 중인 환자가 거닐 수 있는 곳이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넓은 병원 부지 곳곳에는 잔디밭과 운동 시설, 조각품이 만들어져 있어서 심심하지 않다.

 

애양병원에서 소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서 성산교회 쪽으로 걸어가면 특이한 나무를 만난다. 겉보기에는 흔한 버즘나무 가로수 플라타너스이다. 70 년이 넘은 높이 30m, 둘레 1m의 피칸(Pecan)이란 나무가 있다. 1925년 미국 장로교 선교사 윌슨이 병원 개원 기념으로 심은 것이다. 희귀 수종 제6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토플하우스'와 여자병사를 숙박시설로 개조하여 '치유의 숲'으로 만들어 새로운 이미지로 변신하고 있다. 

 

▲펜션 앞 부분은 옛날 여자병사였던 돌집을 그대로 살렸다. 

 

▲개조하기 전 여자 병사의 모습, 역사박물관 소장

 

▲호텔이 된 도성례 원장의 미국 이름을 딴 '토플하우스'

 

▲'토플하우스'의 역사를 대문에 써놓았다.

 

▲'치유의 숲' 안내도

 

▲이런 집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든다.

 

▲돌집 같이 생겼는데 이곳은 휘트니스라고 한다.

 

▲신풍비행장과 대포들, 가을이 익어간다. 황금물빛이 넘실대는 날이 기다려진다.

 

▲펜션 앞 호안과 십리방천, 게와 짱뚱이가 꿈틀거리는 갯벌, 생명의 역동성이 느껴진다.

  

▲살짝 들여다본 펜션 내부 모습, 공동 취사장의 모습이다.

 

▲감나무의 수피, 껍질 모습이 특이하다. 미술 시간에 배운 모자이크가 생각난다.

 

▲'치유의 숲' 펜션단지 연못

 

▲돌담 펜션에서 묵직함과 든든함을 느낀다.

 

▲'치유의 숲'길은 이렇게 나무로 둘러있어 숲길

 

▲'치유의 숲' B동

 

▲세미나실도 갖추고 있어서 행사를 하기가 좋을 것 같다.

 

 

애양원의 변신, 치유의 숲 펜션

1926년 병원을 먼저 짓고, 1928년 이곳에서 채석한 돌과 벽돌로 만든 41동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41동의 남녀 병동을 지었다. 현재까지 잘 보존되어온 여자 병사 15개를 리모델링하여 2012년 5월 펜션으로 준공하여 임대를 하고 있다. 여수세계박람회 때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앞에서 보면 옛 돌담집을 살리고, 본 건물은 컨테이너박스 모양의 철재 건물로 되어있다. 펜션은 10개 동으로 거실과 방 2개인 30평형 1동, 거실과 방 1개인 20평형 5동과 15평형 2동이 있고, 15평 원룸 2동이 있다. 단지 내에는 휘트니스센터, 공동취사장, 세미나실을 갖추고 있다.

 

잔디밭 언덕 위에 그림과 같은 집을 지어서 외국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가 떨어져 있는 군데군데 있어서 서로 독립적인 분위기를 갖추고 있었다. 감이 매달린 감나무의 악어 껍질 같은 수피는 독특하여 눈길을 끌었다. 펜션 앞으로 널따란 대포마을 황금 들판이 펼쳐져 있고, 뜨고 내리는 비행기 소리가 요란하지만 여수비행장의 쭉 뻗어 있는 활주로는 주변 들판과 구분이 되지 않아서 널따랗게 보였다. 펜션앞 길가에 깊숙히 드나드는 바닷물과 갯벌, 제방 둑은 서로 잘 어울린다.      

 

1955년 한성신학교로 사용하던 건물을 2000년 개조를 하여 호텔 '토플하우스'를 만들었다. '토플'은 애양원 미국인 마지막 원장으로서 애양원 발전과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힘쓴 업적을 기려서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 '토플하우스'는 7개의 침대와 온돌방 객실이 있다.

 

'치유의 숲'에는 숲속을 걷는 둘레길이나 자전거길이 있다. 하늘 높이 자란 나무로 된 숲속 사이로 난 길을 걸으면 돌로 만든 성산교회와 역사박물관이 나온다. 

 

 

▲100년이 넘은 등록문화재 32호 성산교회, 태풍에 십자가탑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애양원 박물관은 시간을 잘 보고 가야 한다.

 

▲성산교회앞 손양원 목사 순교 기념비

 

▲옛날 병원 건물이었던 역사박물관, 등록문화재 33호이다.

 

 

성산교회와 손양원목사

애양원에는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이 있고, 정신적으로 안정을 취할 수 있고, 삶의 용기와 희망을 갖게 하는 성산교회가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09년 4월 25일 서양 선교사가 세운 성산교회는 1층 602㎡ 규모로 여수에서는 보기 드문 석조 건물이며 애양원(애양병원)의 부속 전도실로 시작했다. '성산교회'가 광주에 있을 때는 '봉선리교회'였다가 신풍으로 이사오면서 '신풍교회'가 되었다. '애양원'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애양원교회'였으나 1982년 아이들을 위해서 지금의 '성산교회'가 되었다.

 

초대 김응규 목사가 문란한 생활을 바로잡고, 신앙의 기초를 다졌으나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사임을 하고, 1939년 후임에 2대 손양원 목사가 부임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옥고를 치르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손양원 목사는 1948년 여순사건 때 두 아들을 잃고,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한센인과 함께 있다가 순교했다.

 

성산교회는 늘 음악을 틀어놓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음악이 귀에 거슬리지만 한센병 환우들이 쉽게 예배에 참여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오래된 예배당에 들어가 조용히 기도를 하면서 손양원 목사님의 순교의 정신을 되새겨 본다. 

 

성산교회 건물은 여러 차례 증개축으로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 않는다. 그러나, 석조 골격과 창문 형태 등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서양 선교사에 의해 건축된 여수에서는 보기 드문 건물이다. 1900년대 초반 한국 선교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근대 종교 건축물로서 등록문화재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성산교회 앞의 역사박물관은 애양원이 여수로 이주한 후 현재의 현대식병원이 세워지기 전까지 한센 환우들을 치료했던 병원 본관 건물이었다. 역사박물관은 현대식 병원이 세워진 후 한동안 양로원으로 사용 되기도 하였지만 1999년 애양원역사관으로 수리되어 보존되고 있다. 상부 구조가 약간 바뀌기기는 했어도 골조는 원형 그대로여서 등록 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음성나환자가 정착하면서 만들어진 도성마을, 축사가 많이 보인다.

 

▲가축들은 보이지 않고 비어있는 축사가 많이 보인다.

 

▲비어있는 축사가 을씨년스럽다.

 

▲도성마을 간이 양로원, 한 칸의 방이 이채롭다.

 

▲축사에서 돼지들이 함께 몰려있다.

 

▲가운데 호수는 매립이 되고, 호안으로 자전거도로가 놓여있다. 묘도 옆에 이순신대교가 보인다.

 

▲가축 분뇨를 톱밥과 섞어서 비료를 만드는 공장

 

▲좁은 공간에 여주가 잘 익어가고 있다.

 

▲만물 수리소가 문이 닫혔는지, 폐업을 하였는지

 

▲곤충을 잡아먹는 미사모, 건드리기만 해도 잎을 모아서 숙인다.

 

▲도성마을 선착장 건너 삼간도 마을, 온통 빈집이고 머지않아 매립되면 섬 자체가 사라진다.

 

▲한 줄로 늘어선 양계장 닭 뒷꽁무니들, 민망스럽겠다. 

 

▲도성마을 골목, 피득천, 다윗마을 이름이 특별하다.

 

▲마을 공동 창고, 사료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물건이 쌓여있다.

 

▲달걀을 줄줄이 낳아놓고 기다리는 양계장 닭들, 몇 겹으로 키워지는 닭들

 

 

향기로운(?) 냄새의 도성마을

도성마을에 들어서면 누구나 코를 감싸안아야 한다. 돼지와 닭을 키우는 축산단지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여러 축사들이 비어있어도 냄새는 여전하였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역겨운 냄새 때문에 어떻게 생활하는지가 궁금하지만 중독이 되어서 느끼지 못할 것 같다.

 

도성마을이 생기게 된 것은 마지막 미국 원장이었던 토플, 도성래 씨 노력이었다. 한센병 환자들이 완치 판정을 받아도 마땅히 정착할 곳이 없었다. 1965년부터 1978년 2월까지 애양원 원장으로 재직하던 도성래 선교사( Stanly C. Topple)가 도성마을을 만들었다. 일반 주민의 토지를 매입하여 생활의 터전을 마련하여 준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도성이라고 하였다. 

도성마을에는 마을앞 손양원목사의 기념관이 위치한 '동섬'이라는 마을이 있다. 지금은 방조제로 섬을 이어 육지로 만든 동산이다. 방조제는 50여년 전 환자들의 식량자급자족을 위해 환자들이 미국원장의 도움을 받아 자력으로 만들었다. 미국 남선교회 피득목사가 환자들의 안식처로써 형성시킨 피득촌과 다윗목사가 지어.환자들에게 안식처로 형성시킨 다윗마을, 독신환자의 가옥을 변경하여 만든 마을을 신흥, 신기마을이라고 한다. 삼간도로 들어가는 선착장 부근을 인시동이라고 한다.

 

도성마을은 1975년 토플이 원장으로 재직할 때 400,000㎡에 달하는 터에 숙소와 작업장, 창고, 축사 등을 지어 생활 공동체를 이룬 곳이다. 소외 계층인 한센병 환자들의 자립적인 생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집단 농장 형태의 '도성농원'을 만들었다. 이때 애양원은 병원과 사회복지법인으로 분리되어  도성농원에 206명이 정착하였고 애양원에 250명이 남았다.

 

정착자들에게는 대지와 밭으로 가구당 1652.9㎡(500평)씩 배당하였다. 토지는 1975년 이전부터 약간씩 불하되어 왔고 여기에 마늘과 양파 등 채소 농사를 지어왔으나 이때의 대규모 정착 이후 축산 농가가 급속히 늘어나 축산단지가 되었다. 도성조합이라는 단일 축산 조합으로 운영되다가 1986년 도성조합은 양돈 농가 중심으로 남게 되고 양계 농가는 분리하여 우리조합을 만들었다.

 

좁은 공간에 사육되고 있는 돼지와 닭을 보고서 우리들은 동물에게도 권리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실감을 하였다. 도성마을에는 이제 돼지와 닭의 분뇨를 모아서 톱밥과 섞어서 비료를 만드는 공장이 두 군데나 있었다. 가축의 분뇨가 새로운 소득이 되고 있었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생활하고 있는 도성마을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일이 필요할 것 같다. 축산단지를 이사하고 싶어도 어느 지역에서 받아줄 수 있지 우려가 된다. 발길을 옮겨 2012년 5월 준공한 손양원 목사 기념공원으로 갔다.

 

 

▲손양원 목사 유적 공원의 길 사이로 잔디밭에 잡초가 더 크게 자랐다.

 

▲고난 속에 용서를 받고서 화해의 길로 들어서는 손양원 목사 기념 공원

 

▲삼부자를 상징하는 열매와 9가지 감사의 계단

 

▲이상하게 탑을 조각한 작가의 이름도, 세운 이 이름도 아무리 찾아도 없다.

 

▲성경의 8가지 복을 상징하는 광장 안내

  

▲새로 단장을 한 손양원 목사 기념관

 

▲전남동부지역에서 순교한 사역자들

 

▲기념관 내부의 모습

 

▲손양원 목사께서 입었던 옷

 

▲새롭게 달라진 기념관 내부

 

▲손양원 목사 일대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것을 상영하고 있다.

 

▲성산교회를 배경으로 즉석 사진 찍는 곳

 

▲손양원 유적 공원 순례도

 

▲기념관에서 본 도성마을 전경

 

▲손양원 목사와 두 아들 동인, 동신, 삼부자의 묘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경남 함안 출신 손양원 목사는1938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애양원교회에 부임하여 나환자들에 대한 구호 사업과 전도 활동을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40년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가 여수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8.15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고, 1946년 다시 목사가 되었다.

애양원 교회를 다시 담당하여 목회를 하던 중 1948년 여순사건으로 동인, 동신 두 아들을 잃었다. 폭도들에 의해 잃었으나 오히려 가해자들의 구명을 탄원하여 원수를 용서하고, 양자로 받아들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피난 권유를 거절하고, 행동이 부자유한 나환자들과 함께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군에 의해 둔덕동 과수원에 끌려가 총살당하였다.

 

1991년 시작하여 1993년 성산교회 교인을 중심으로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을 개관하였다. 2012년 세계박람회를 맞이해서 여수시가 나서서 손양원 목사 유적 기념 사업으로 새롭게 단장을 했다. 1층에는 손양원 목사의 생애와 업적을 종전과 다르게 입체적이면서도 미적 감각과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전시 체계를 꾸몄다. 지하에는 애양원을 배경으로 직접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손양원 목사 일대기를 영화로 상영하는 공간도 있고,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이 있다.

 

기념관을 나오면 2012년 5월 여수시가 나서서 조성한 손양원 유적 공원이 있다. 공원에는 '용서의 길'과 '고난의 길', '화해의 길'이 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총회가 모금을 해서 추모상징탑을 건립하였다. 상징탑의 9개의 계단은 손양원 목사가 두 아들을 잃고서 정한 9가지 감사의 제목을 상징하고, 3개의 기둥은 삼부자, 손양원 목사와 두 아들이 순교가 씨앗이 되어 귀한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다. 

 

손양원 목사를 참배하기 위해서 애양원을 찾은 사람들이 꼭 찾아가는 곳은 '삼부자의 묘'이다. 1948년 10월 21일 순교한 두 아들 동인, 동신이 잠든 묘역에 손양원 목사는 미리 자리를 만들었다. 1950년 9월 28일 한국전쟁 때 순교한 손양원 목사도 이곳에 묻혔다. 뒤에 부인도 손목사와 함께 합장을 하였다.

 

 

 

▲성산교회와 평안요양소

 

▲둑에 피어있는 들꽃, 배초향

 

▲도성마을 주민들이 둑을 쌓아 간척지를 만들었다.

 

▲넓은 손양원 목사 기념 공원

 

▲드러난 십리방천 둑 바깥쪽

 

▲십리방천 둑 안쪽 길

 

▲십리방천 둑 양쪽의 모습

 

▲십리방천 바깥 갯벌에서 맛조개를 잡는 주민들

 

▲십리방천을 만들면서 생긴 호수, 습지에는 갈대가 자라고 있고, 철새들이 몰려든다.

 

▲새로 만든 대포배수갑문, 덕양천과 덕양들의 침수를 막았다.

 

▲배수갑문 사이로 보이는 이순신대교

 

▲웅장한 배수갑문의 1개의 크기

 

 

 

 

 

▲넓게 퍼져있는 갈대밭, 그 규모가 엄청나다.

 

▲배수갑문을 지나서 바스프공장 옆 화치 망향비

 

 

십리방천 따라 화치로

화치에서 애양원으로 이어진 간척지 제방을 십리방천(十里防川)이라 부른다. 둑을 쌓거나 나무를 많이 심어서 냇물이 넘쳐 들어오는 것을 막아서 생긴 둑을 방천이라고 한다. 그 둑의 길이가 10리, 4km에 이른다는 뜻이다. 일본인 회사인 고뢰농장이 1922년 화양면 소백초마을과 소라면 가사리 사이의 해안을 막아 그 안쪽 걸망개 2.479㎢(75만평)을 간척지로 만들었다. 1925년 소라면 대포리와 삼일면 화치리를 잇는 둑을 쌓아서 4.958㎢(150만평)의 대포들을 간척하였다.둑의 길이는 2,150m이고, 높이는 4.5m이고, 저수량은 무려 594만 6천톤이다. 인력이 부족해서 남해군에서 많은 일꾼들이 옮겨와서 일을 하고서 정착을 한 곳이 바로 '남해촌'이다. 염분 때문에 간척하고서도 20년이 넘게 경작을 하지 못하였고, 장전마을의 목화 재배를 많이 해서 일본을 가져갔다고 한다.

 

화치 십리방천 둑이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호수가 만들어져서 습지에는 갈대가 많이 자라고 있다. 그 위를 날고 있는 백로를 쉽게 볼 수 있고, 최근 들어서 고니떼가 날아온다고 한다. 애양원에서부터 자동차가 다니면서 일부 시멘트 포장이 된 길이 있고, 둑 위로는 풀이 많이 자라서 다니기가 불편하다. 둑 건너 율촌2산단을 조성하면서 건너 거대한 매립지가 만들어지고 둑과 사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길이 생겼다. 1925년 십리방천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대규모 간척사업을 보면서 기술의 발전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 호안을 따라 만들어진 자전거도로는 한번 달려보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한다. 

 

태풍이나 집중호우가 내리면 여수지역에는 반드시 농경지가 침수되어 수해 복구에 동원되는 곳이 바로 덕양천 주변이다. 그런데 새롭게 거대한 '대포배수갑문'이 만들어지면서 침수 피해가 줄어들었다. 갑문 위로 지나면 바로 여수산단 임대산단이 나온다. 한국실리콘 공장이 바로 앞이다. 그 뒤로 올라가면 바스프공장과 화치 주민들이 애환이 서린 망향의 동산의 망향비와 정자나무가 지켜주고 있다. 이곳에서 임대산단행 37번 버스를 타고서 돌아오면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하루에 5회 왕복으로 오후 6시에 막차가 떠난다.   

 

 

▲애양원에서 화치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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