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 다섯째 이야기, 피 묻은 투표 용지(1)
[정해랑 연재소설] 노동자 신돌석씨의 하루 (211)
[삽화-백소(白笑)]
4.10총선이 끝난 지도 보름이 넘었다. 오늘은 지역에서 총선 평가를 하는 날이다. 대규모 토론회는 아니고, 그렇다고 몇 명이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하는 이바구도 아니다. 20명 넘게 들어가는 카페를 통째로 빌려서 지역의 다양한 견해를 들어보기로 했다. 발제자와 토론자를 고르는 데 이견이 많았다. 너무 빨리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너무 늦는 것도 곤란할 것 같다고 하여 그대로 하기로 하였다. 될 수 있는 대로 다양한 견해를 고르되 대표성이 있는 사람을 발제자와 토론자로 하고, 다른 의견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기만 하는 사람은 배제하기로 했다.
카페는 평소에 문화강좌를 하기도 하고, 라이브 공연을 하기도 하는 곳이었다. 주인이 운동권 출신은 아닌 것 같은데 지역에서 노동운동,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시간이 되기도 전에 많은 사람이 들어와서 자리가 몇 개 남지 않았다. 이 토론회를 주최하는 단체의 실무자들이 간이의자를 가지고 와서 여기저기 배치를 하였다. 평소 라이브 공연을 하던 무대에 네 사람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사회자와 발제자, 그리고 토론자 둘이었다. 사회자는 주최측 활동가가 맡았고, 발제자는 지역에서 두루 신망이 있는 시민단체 사람으로 현직 교수인데 정치색이 옅은 사람이었다.
토론자가 문제였다. 발제자가 정치색이 옅은 사람이다 보니 토론자도 그런 사람으로 선정하면 두루뭉술하고 어정쩡한 결론에 이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민주당 사람과 진보정당 사람을 토론자로 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에 대해서 진보정당은 이제 민주당과 연합한 정당과 연합을 거부한 정당이 있으니 나누어서 해야 한다는 반론이 나왔다. 설왕설래가 되다가 정당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이번 연합정치에 대해 우호적인 사람과 비판적인 사람으로 선정하자는 견해가 공감을 얻었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이 선정되었다.
신돌석씨에게 토론자로 나서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하지만 으레 그래왔듯 신돌석씨는 고사했다. 일단 토론회에서 논리적으로 말하기에 지식이나 논리력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공부도 많이 했고 정치적 경험이 많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는데 신돌석씨가 나선다는 것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신돌석씨는 그저 한두 마디를 보태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으로 족하다고 여겼다. 제안한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한 번 말하고는 더 이상 하라고 종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돌석씨는 그냥 청중으로 참석하기로 하였다.
늘 그래왔듯이 하기로 한 시각이 되어서도 토론회는 시작되지 않았다. 아직 장내가 정리되지 않았고, 꼭 와야 할 사람이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겠다고 한 뒤 10분이 지나자 사회자가 개회를 선언하였다. 사회자의 간단한 취지 발언 뒤에 주최측 대표의 인사가 잠시 있었다. 다 아는 사람들이므로 특별히 내빈 소개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장내가 잠시 술렁였다. 이번에 새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이 왔는데 그를 소개하지 않고, 인사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넘어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주최하는 단체들 사이에서 그런 합의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분위기가 조금 어색하다고 느껴졌는지 사회자가 당선인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박수가 나온 뒤 당선인은 그냥 인사만 하고 자리에 앉았다. 눈치가 있는 사람 같았다. 신돌석씨는 그를 보면서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신돌석씨 생각으로는 이런 자리에서 새로 당선된 사람을 소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유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찌 됐든 그는 엄청난 노력과 도전을 통해 그 자리에 선 것이다. 그와 시민사회가 가까워서 나쁠 것도 없다. 아니 그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 다만 그를 제대로 견인해야 한다. 지금까지 수많은 국회의원들이 날이 갈수록 고개가 뻣뻣해짐을 보지 않았는가?
이 자리에 온 당선인은 5선이나 되는 이를 경선에서 물리치고, 국힘당 후보를 압도적으로 이긴 사람이다. 신돌석씨가 사는 지역은 수도권임에도 막대기만 꽂아도 민주당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호남지역처럼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신돌석씨 기억에 처음 이 지역에 온 90년대 초반만 해도 당시 여당이던 민자당이 강세였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판세는 뒤집어졌다. 그러면서 몇 선을 하는 민주당 의원들이 생겼고, 그들이 특권화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본인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억울할지도 모르지만 유권자들은 분명히 그런 생각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삽화-백소(白笑)]
그러다 보니 민주당이나 국힘당이나 그 놈이 그 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돌석씨는 이런 견해에 단호히 반대한다. 민주당 의원 중에는 국힘당 의원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러니까 공천에서 탈락하자마자 옷 바꿔 입고 국힘당으로 출마하는 것 아닌가? 지역 유권자를 우습게 알아도 한참 우습게 아는 행태이다. 물론 둘 다 떨어졌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점점 유권자와 거리가 멀어지고 마치 특권계급인 것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신돌석씨 지역만 해도 학생운동부터 했던 사람들이 몇 선을 했는데 그들의 행동을 보면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인사가 끝난 뒤 발제자가 발제를 시작했다. 그는 먼저 이번 총선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언론에서는 야권의 압도적 승리라고 한다. 객관적인 지표로 그러하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하나는 진보적 의제가 실종되고, 진보세력이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선거였다는 것이다. 또다른 하나는 반대의 경우에서 문제제기하는 것인데, 이번 총선을 통해 확실하게 심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보는 것이 타당한지 의견을 모아 보아야 한다. 그러면서 사회자는 객관적으로 압승은 맞지만 이런 견해들이 반영되는 평가가 되어야 한다고만 했다.
총선이 있던 날 밤에 신돌석씨는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개표방송을 봤다. 지금까지 선거가 있는 날이면 지역 사람들이나 왕년의 동지들과 모여서 개표를 보곤 했었다. 이번에도 지역에서 같이 보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아들 딸이 모두 집으로 오겠다고 해서 그냥 집에서 보기로 했다. 아내는 물론 좋아했다. 애들 먹인다고 이것저것 만드느라 분주했다. 신돌석씨도 일찍 집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집안일을 했다. 아직까지도 집안일에서 큰일은 아내의 몫이었다. 아니 아직까지가 아니라 이제 거동이 자유로울 때까지 그렇게 될 것임에 틀림없다.
애들이 아직 도착하기 전에 출구조사 결과가 나왔다. 방송3사의 조사에서부터 야권의 압도적 승리였다. 야권이 이길 것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압승하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아니 내심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갖고 있던 신돌석씨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일이었다. 선거가 그런 혁명적인 결과를 낳을 거라는 것은 망상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기대하는 마음은 무엇일까? 그런데 출구 조사가 그렇게 나왔다지 않은가?
아름이와 사위가 먼저 도착했다. 아름이는 이전과는 달리 민주당에 대해 굉장히 조심스러운 접근을 했다. 아름이와 사위를 볼 때마다 마음이 짠했다. 아빠 영향 때문인가? 왜 그렇게 소수파를 고집하면서 사느냐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이번에도 말은 안 하는데 아마 출마 준비를 했다가 당에서 포기하라는 결정이 내려져서 접은 것 같았다. 그런 이야기를 자세히 하는 적이 없어서 모르는데 눈치를 보니 그런 것 같았다. 신돌석씨 지역 사람이나 알고 지내는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어렵게 어렵게 준비해 왔는데 하루 아침에 그만두어야 한다니 어떤 심정일까?
그런데도 두 사람은 선거 결과가 좋아서 그런지 얼굴이 밝았다. 하지만 그것을 그렇게 내색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내는 두 사람에게 별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내는 언제부터인지 현실적인 것이 중요하다며 민주당 지지를 선언했다. 그 점에서는 아들 힘찬이도 그랬다. 힘찬이는 좀더 나가서 현실적인 것이 바로 진보적일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오누이 사이에 견해 차이가 상당히 있었다. 아름이는 이번의 연합정치 이전만 해도 이제 진보세력이 민주당과 확실히 결별하고 자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것 때문에 오빠와 만나기만 하면 논쟁을 벌이곤 했다.
힘찬이가 오고 개표방송을 보면서 저녁을 먹고 술을 마셨다. 아름이와 사위가 얼마 전에 베트남에 갔다 왔다면서 베트남술을 가져왔다. 베트남에서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왕 이름을 딴 술이란다. 술을 돌려 마시며 방송을 보는데 이상하다. 초장부터 국힘당이 앞서는 곳이 많다. 1등 숫자로도 그렇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사위 말이 아직 개표가 적어서 그럴 거란다. 특히 사전투표에 야권 투표가 많은데 나중에 개표할 거기 때문에 국힘당이 우세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란다. 그런 거라면 다행인데 혹시라도 출구조사를 확 뒤짚는 결과가 나온다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삽화-백소(白笑)]
아내는 음식 준비하느라 피곤했는지 방송을 보며 졸기 시작했다. 가끔씩 아름이가 툭툭 치면서 깨우면 졸지 않는데 왜 그러냐고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이전의 할머니, 어머니들 모습이 생각난다. 텔레비전 보다 주무실 때 그때는 리모컨이 없어서 살짝 가서 스위치를 눌러 끄면 갑자기 깨셔서 나 안 자는데 왜 끄냐고 항의하듯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언젠가 술좌석에서 그 이야기가 나왔는데 집집마다 그렇다고 했다. 아마도 여자들의 과한 가사노동이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아내가 그런 할머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왠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국힘당이 1위를 하던 지역구가 대부분 뒤집혔다. 그러면서도 엎치락 뒤치락 하는 지역구가 많았다. 낙선 후보로 일찌감치 시민단체들이 찍어 놓은 용산, 동작을의 국힘당 후보가 계속 1위를 달렸다. 불안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부산 경남이 심상치 않았다. 특히 부산의 진보당 후보는 경선에서 민주당 후보를 이겼고, 국힘당 후보에게도 계속 여론조사를 통해 10% 이상씩 앞섰다고 했는데 비슷비슷하다가 뒤지기도 했다. 서울 강북지역에서도 몇몇 곳이 불안한 조짐을 보였다.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힘찬이가 녹색정의당이 출마해서 결국 국힘당 이롭게 한다고 한마디했다. 마포갑이나 도봉갑을 일컫는 것 같았다. 이전 같으면 아름이가 그러면 진보정당은 아예 출마하지 말라는 말이냐면서 반발을 했다. 대선에서도 심상정 때문에 졌다는 힘찬이의 말에 아름이가 발끈했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었다. 언제까지나 양당만이 해야 한다는 말이 어디 있냐는 것이었다. 그에 걸맞게 민주당도 양보를 하고, 연합을 위한 조건을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하면 쉬 끝나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아름이가 그에 대한 대꾸를 하지 않았다.
무슨 까닭으로 진보당은 민주당과 연대하고, 정의당은 하지 않았는지를 신돌석씨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진보대단결을 하고, 그를 바탕으로 민주당과 연대해야 한다고 재야 원로만이 아니라 노동계 원로들도 강력하게 제기했다고 들었다. 심지어 진본4당을 순회 방문하면서 읍소하듯이 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결국 반쪽 짜리 민주진보연대가 되었다. 그렇게 된 마당에 독자 출마를 한 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대선 때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 신돌석씨의 생각이다.
하지만 몇 가지 개운치 않은 점은 있다. 왜 정의당은 국힘당과 민주당을 동일선상에서 볼까? 아니 정의당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민주당 2중대가 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국힘당과 구별되지 않는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이재명 대표 체포동의안 투표 때 정의당이 당론으로 가결을 결정한 것을 보고 신돌석씨는 굉장히 실망했었다. 불체포특권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다. 심지어 민주당조차 자신들이 헌법상으로 보장받은 이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하지 못한다. 국회의원의 불체포특권을 포기하면 그것은 검찰독재가 국회의원을 마음대로 하게 두는 것이다.
또한 정의당 의원 한 사람이 이재명 대표가 국힘당을 광주학살의 후예라고 하자 법적 절차를 통해 구성된 공당을 그렇게 이야기해도 되는지를 문제삼은 적이 있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 신돌석씨는 이들은 논리상으로만이 아니라 정서상으로도 반파쇼투쟁에서 멀어져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평당원이나 지역 일꾼들은 신돌석씨가 보기에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이런 점들이 당 내부에서 주요한 견해로 되고 그것이 반독재의 염원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그래서 외면당하게 된다는 점을 그들은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다.
아름이와 사위가 내일 아침 일찍 회의가 있다면서 가겠다고 일어섰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아직 출구조사에는 못 미쳐도 야권이 1등 숫자가 훨씬 많아져서 다행이었다. 아름이와 사위를 보내고 아내는 다시 잠이 들었다. 신돌석씨는 내일 아침 송영이 있기 때문에 12시 조금 넘었을 때 먼저 자겠다고 했다. 출구조사 그대로 나올지는 아직 모르지만 그보다 못하더라도 압승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았고, 자신이 본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질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냥 자기로 했다. 힘찬이 혼자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서 술을 홀짝홀짝 마시며 개표방송을 보았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