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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 21. 예수비전교회 주일낮예배 믿느냐? 더 큰 일을 보리라 유백선 목사
요한복음 1:48-51
예수비전교회 주소 // 서울특별시 노원구 한글비석로 24라길 76-5 (상계5동 136-55)
상담 : 유백선 목사, ybs9191@hanmail.net
대표전화 02) 6221-6468, Mobile. 010-8346-6468
예수비전교회 카페에는 삶의 행복과 깊은 감동을 주는 메시지가 더 많이 있습니다. 카페에 들어오셔서 함께 나누시고 예수님의 비전으로 복을 받고 함께 주님의 교회를 세워나가시기 소망합니다.
http://cafe.daum.net/jesusvision91, http://cafe.daum.net/boram9191
조선 정조 때 문장가 유한준(俞漢雋)이 남긴 명언이 있습니다. “지즉위진애(知則爲眞愛) :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된다. 애즉위진간(愛則爲眞看) :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된다. 간즉축지이비도축야(看則畜之而非徒畜也):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된다.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게 되면 알게 된다. 알게 되면 보인다.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자신이 아는 만큼 보입니다. 믿는 만큼 보입니다. 알아야 참으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알면 진실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 깊이 알아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알면 궁금증이 보이는 것입니다. 한자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부동산을 알면 투자가 보이는 것입니다. 뇌파를 알면 사람이 보이고,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움직임도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뇌파를 알면 정신건강이 보입니다. 주기도를 알면 복음이 보이는 것입니다. 직분을 알면 교회가 보입니다. 경제를 알면 사람이 보입니다. 사람의 생각을 알고, 마음을 알면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사랑을 더 깊고, 폭넓게 알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신앙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서 자신의 믿음과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신다.(갈 2:20) 내가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성령을 통해서 너희의 속사람이 강건하기를 기도한다.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기를 기도한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기도한다.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달아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기도한다.”(엡 3:16-19) 예수님을 알면 사랑이 깊어지고, 믿음이 견고해집니다. 지금 내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을 얼마나 깨달으며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사람은 외모를 보고, 외부환경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합니다. 외모와 현상을 보는데 치중하면 본질을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씨앗이 꽃잎을 보지 못하고, 꽃잎이 씨앗을 보지 못한 경우와 같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가지면 씨앗을 보고 꽃잎과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상 속의 본질을 보는 눈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선포했던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 4:17) 여기서 “회개(메타노이아/μετανοια/metanoia)’는 말은 ”메타=변화, 옮김“과 ”노이아=생각하다, 이해하다, 알다.“ 라는 합성어입니다. 회개는 자기의 마음, 생각, 태도를 예수님의 마음, 생각, 태도로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의 눈을 바꾸어서 예수님의 눈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을 갖고 보는 것입니다. ‘네 마음과 생각을 바꿔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가져라, 네 마음의 완고함을 바꿔(회개하여)서 온유한 마음으로 깨달아 회개하여 고침을 받으라. 너희 눈이 보고, 귀가 들음으로 복이 있다.(마 13:15,16), 현상 속에서 본질을 보는 눈을 가져라.’ 사람이 왜 예수님의 마음, 생각, 예수님의 눈을 가져야 합니까? 예수님의 생각을 가져야 전체를 보는 시각을 갖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눈을 가져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이 세대를 본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새롭게 변화를 받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기뻐하신 것을 생각합니다.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분별하기 때문입니다.(롬 12:2-3) 예수님의 믿음을 가지면 사람과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오스트리아 종교철학자 마틴 부버가 말했습니다. ”나와 너의 인격적인 만남이 참된 삶의 만남이다.“ 인격적인 만남이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과 인격적인 만남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차별하지 않고 사람들을 만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당시에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던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과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좋지 않는 시선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따로 서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세리와 죄인들과 같지 않는 것을 감사합니다.’(눅 18:11)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너희 선생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느냐?“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배우라.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 하신 뜻이 무엇인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 9:11,13) 하나님의 뜻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하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현절 세 번째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목적이 예수님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임마누엘).’ 라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제자들이 양육을 받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던 그 메시아를 우리가 만났다.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메시아를 만났다. 그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시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아주 간결하게 사실과 진리를 전했습니다. 빌립의 말을 들었던 나다나엘이 자기생각을 말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는가? 그곳은 이방인들과 혼혈인들이 사는 곳이 아닌가?” 유대주의 사고를 가졌던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렛은 이스라엘 국가와 종교적인 영역에서 중요한 지역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특정 지역(사람)을 멸시하는 태도를 가지고 사람을 대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멸시하는 태도를 가진 사람은 인생의 해답이 없습니다. 나사렛이 주목을 받게 된 것이 예수님께서 소년시절을 보내셨고, 메시아로서 공적인 직무를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던 베들레헴과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셨을 때 환영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눅 4:22-24) 하지만 빌립은 나다나엘의 말에 논쟁하지 않았습니다. 설득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와서 보라.” 네가 직접 와서 예수님을 만나보면 예수님의 실체를 알게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이 빌립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지혜를 말했습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전 1:21)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 속에 간사함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다나엘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나쁜 꾀를 부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의 이익과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사람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어야 매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생각에 간사함이 없어야 편견을 갖지 않고 진실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독일의 작가 장 폴 리히터(Jean-Paul Richter)가 말했습니다. “행동만이 삶에 힘을 주고, 절제만이 삶에 매력을 준다.” 그렇습니다. 시한부의 생명보다 더 무서운 것이 시한부 인격입니다.
나다나엘이 자신의 속을 알아보신 예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모릅니다. 그런데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 나를 어디서부터 아십니까?” 본문 4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여기서 “안다(기노스케이스/γινωσκεις/ginoskeis)”는 말은 “알아차리다, 분석하다, 이해하다, 확신하다, 인식하다, 느끼다, 지식을 갖다, 사귀게 되다, 허락하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이상하게 사람이 많이 알고, 많이 가질수록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지각이 있어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사람이 무지해서 죄악을 행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부르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부정합니다.(시 14:1,2,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처음부터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원초적인 속성을 잘 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올랜도 제일장로교회 데이비드 스완슨(David D. Swanson) 목사님이 쓴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찾다>라는 책에서 말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를 찾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고, 명상도 한다. 심리학에 몰두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모든 노력과 해답이 허상에 불과하다.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보다 더 잘 알지 못하고,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전자제품을 사용설명서가 없이 제품을 이해하고, 사용하려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으라. 나의 정체성이 관계적인 존재이다. 예수님과 관계에 마음을 열라. 나를 찾고 싶으면 하나님부터 찾으라. 자신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면 이렇게 질문한다. ‘내 삶이 공허한 이유가 무엇인가? 내 삶이 의미가 있는가? 외로움이 왜 찾아오는가? 어떻게 해야 내 짐을 벗을 수 있는가?’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점점 영적인 갈망이 커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삶의 기쁨과 자유를 주시고, 확신과 용기를 주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기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긍정의 힘으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각보다 더 가까이 계신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 가장 온전한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고 따르라.“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언제 나다나엘을 보고, 알았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사람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앉고 일어서는 것, 눕고 자는 것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땅 위에서 번성하기 시작할 때도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좋아하는지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사람의 외모를 보고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창 6:2) 좋은 환경과 여건, 좋은 배경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레아가 매력이 없다고 야곱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을 보셨습니다. 레아를 위로하기 위해서 생명을 잉태하는 복을 주셨습니다.(창 29:31) 하나님께서는 라반이 야곱에게 품값을 열 번이나 바꿔서 손해를 입힌 것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받은 야곱이 고난을 겪고, 수고하는 것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방식으로 공의롭게 행하십니다.(창 31:42)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릴 때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창 37:2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학대를 받고, 무거운 짐을 지워서 괴롭게 하는 것도 보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사람들에게 학대를 받을수록 더 번성하여 퍼져나가게 하셨습니다.(출 1:11-12) 히브리 산파가 생명을 살리는 것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출 1:20)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는 것도 보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떨기나무에 불이 붙어서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려고 갔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1-5)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상한 사람을 가까이 하십니다. 충심으로 통회하는 사람을 구원하십니다.(시 34:18) 내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를 때 주께서 오른손으로 붙들어주십니다.(시 63:8)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그 사람이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습니다. 주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전파합니다.(시 73:28)
여러분!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자신을 보고 계셨다고 말하자 생각과 태도와 말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본문 4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랍비(‘ραββι/hrabbi/)”는 “선생님, 위대한 자, 존경하는 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그 아들입니다. 그 이스라엘의 임금(바실류스/βασιλευς/basileys/주권자, 왕)입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자신의 생각이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왜 예수님을 ’랍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주권자)입니다.‘ 이렇게 고백했습니까? 예수님이 사람의 본질(성)을 미리 보시고, 멀리 보시고 아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주를 의지합니다. 왜냐하면 주를 찾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시 9:10) 다윗이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고난을 보시고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기 때문입니다.‘(시 31:7) 그래서 후손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 여호와께 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시 34:8)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아시고, 마음의 비밀도 아십니다.(시 44:21) 프랑스 철학자 뤽 페리가 말했습니다. “만일 ‘로고스(λογος/logos=그 말씀)’가 ‘한 인격체’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지지하는 인권철학은 확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시대가 인간의 인권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데 그 인권확립이 그리스도(기독교)에게서 온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절대 멸시할 수 없는 모든 시대의 답이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5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예수님을 메시아(그리스도)로 믿으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더 큰 일을 보는 영광을 얻습니다. 국제적인 TV프로그램 진행자인 조나단 버니스가 <랍비가 본 나사렛 예수>라는 책에서 말했습니다. “나는 전통적인 유대인 문화권에서 성장했다. 어려서부터 유대인은 예수를 믿을 수가 없고, 믿어서도 안 된다고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토라(율법)를 포함한 성경을 연구하다가 ‘나사렛 예수가 진실로 유대인 메시아’라는 명백한 증거를 발견했다. 나는 몇 가지 질문에 답을 찾으면서 예수님을 만났다. 1) 성경의 예언자들은 예수님에 관해서 무엇을 예언했는가? 2) 유대인 예슈와가 어떻게 이방인의 예수로 불리게 되었는가? 3) 신약성경이 반유대적인가? 4) 유대교 안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예수가 단순히 좋은 스승(랍비)이었다면 왜 자신을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생명의 떡이다.’(요 6:35), ‘세상의 빛(요 8:12)이다.’,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다.(요 14:6) 나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다.’ 나는 예수를 믿지 말라고 배웠지만 진실이 내 경험으로 진리인 것을 입증되었을 때 나는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성경을 읽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을 믿고 더 큰 일을 행할 것입니다. 랍비로 불렀던 예수님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고, 믿을 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더 큰 일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과 증거 사이에서 믿음이 도약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메시아(그리스도)’로 믿는 사람에게 하늘을 열어주십니다. 본문 5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하늘이 열려야 하나님의 성령님이 내 위에 임하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려야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기뻐하는 사람이다.’“(마 3:16-17) 하늘이 열려야 하나님께서 그 길을 인도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나의 주요, 하나님이시다.’ 이 믿음으로 하늘이 열리고 더 큰 일을 보고, 하나님의 뜻(구원)을 행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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