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4. 4. 21(주일) - 부활절 넷째 주일 - (2024년 16주)
제목;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경; 행 4:5-12 (p.191) (시 23:4-6, 80<101>, 505<268>, 621)
<예배의 부름> (시 23:4-6)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 넷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화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특별히 기온 차가 많은 환절기이지만, 우리 주변의 나무들에 파릇파릇 새순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완연한 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좋은 봄날에 우리의 신앙도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서 새순을 틔우고 자라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의 모교회인 부산 동광교회에서 함께 교사로 섬겼던, 이제는 은퇴하신 권사님께서 저에게 <제1회 ‘어르신의 재치와 유머’ 짧은 시 공모전 수상 작품집, 2024>라는 제목과 함께 ‘60세부터 98세까지 전국 각지에서 투고된 5,800여 편의 응모작 중에서 엄선’된 수상작 몇 편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어르신의 재치와 유머’ 짧은 시 공모전 대상과 최우수상, 우수상 세 편을 나누려고 합니다.
<대상> 동행 - 성백광
아내의 닳은 손등을 / 오긋이 쥐고 걸었다/ 옛날엔 캠퍼스 커플 / 지금은 복지관 커플
<최우수상> 봄날 - 김행선
죽음의 길은 멀고도 가깝다 / 어머니보다 오래 살아야 하는 나를 돌아본다 /
아! 살아 있다는 것이 봄날
<우수상> 봄맞이 - 김남희
이제는 여자도 아니라 말하면서도 / 봄이 되면 빛고운 새 립스틱 하나 사 들고 /
거울 앞에서 가슴 설레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 그대로 ‘짧은 시’인데, 그 내용은 결코 짧지가 않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어르신들의 지혜가 번쩍이는 함축된 인생을 보여주는 시들입니다. 특별히 최우수상 ‘봄날’의 마지막 연 “아! 살아 있다는 것이 봄날”이란 싯귀를 마음에 새기고, 내가 살아있음에 ‘봄날’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오늘도 싹을 틔우고, 씨를 뿌리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행 4:5-12)은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당대 가장 높은 권력을 가진 이들 앞에서 담대하게 대답하는 말씀입니다. 성전 미문 앞에서 벌어진 기적 사건에 대해서‘누구의 권세와 이름으로 이 일을 행했느냐'고 묻고 있는 유대 교권자들에게 당당하게, 먼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고친 ‘이름과 권세’는 다름 아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고,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선포하는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3:2에 등장하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을 고친 이야기’에 대한 후속 보도에 속합니다. 성전에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못 걷게 되어 구걸하는 자를 만났고, 베드로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3:6)고 명령하므로, 나면서부터 한 번도 일어나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일어나 걷게 되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본 백성들은 놀라워했지만 이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이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의 첫 번째 갈등과 충돌입니다.
사도행전 4장은 이 갈등과 충돌을 잘 보여주는 말씀으로, 베드로와 요한의 투옥(1-4), 베드로의 산헤드린 공회의 변론(5-12), 사도들의 석방(13-22), 성도들의 반응과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교회의 기도(23-31), 초대 교회 성도들의 유무상통(有無相通)(32-37)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베드로의 산헤드린 공회의 변론(5-12) 역시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5-7절에서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행했느냐?’라고 심문하고, 8-12절에서 베드로의 대답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났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베드로의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담대한 예수 부활 생명 복음 선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십니까?
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세가 기적을 일으킵니다(10).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성령 강림후, 3장에서 성령 충만한 베드로와 요한이 제9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다가,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태어나서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는 걸인을 보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고 명하므로 뛰어 서서 걸으며 하나님을 찬송하고,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앉은뱅이를 고쳐주고 걷고 뛰게 해주었다는 사실을 듣고 오천 명이 믿게 되는 것을 보고(4:4) 불만과 위기를 느낀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4:1), 곧 유대 교권자들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핍박하는 내용입니다.
유대 교권자들은 성전 미문 앞에서 벌어진 기적 사건에 대해서“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라는 질문에 베드로가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고 대답합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가 걷고 뛰는 기적이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너희들이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부활시키신 예수 그리스의 이름과 권세로 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과 권세로 앉은뱅이가 걷게 되었다는 말은 특히 사두개인들에게는 큰 도전이고 위험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두개인(사두개파)들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기에, 이런 사실을 말하는 사도들이 싫어서 감옥에 가둔 것입니다(4:2-3). 이런 사두개인들 앞에서 베드로는 당당하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10)고 대답한 것이니 얼마나 위험한 말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세가 앉은뱅이를 걷게 만드는 기적을 일으키지만, 사도들에게는 혹독한 시련의 시작점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2-3절에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라고 말하는데 이런 일이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이어지는 18-21절에서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18) 위협하고 놓아주지만, 다시 5장에서 옥에 가두고(5:18), 또다시 채찍질하여 놓아줍니다(5:40). 그리고 후에는 권력자들에 의한 공식적인 박해 대신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을 ‘돌로 치고’(14:19), ‘죽이려 하고’(21:31), 심지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하며 동맹한 유대인이 4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23:13).
그러나 사도들은 이런 위협과 투옥과 능욕 받는 것을 기뻐하며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을 전합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5:41-4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베드로와 사도들을 이렇게 강하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부활 사건이 부활 사건으로 승화된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사도 베드로가 부활 신앙을 가진 후에 달라진 것은 죽음의 문제 앞에서 전혀 망설이지 않고, 주저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부활 신앙은 하나님의 능력을 전적으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께서 그대로 시행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합니다. 헤르만 헤세는 말하기를 기도는 음악처럼 신성하고 구원이 된다. 기도는 신뢰이며 확인이다.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원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의 경우와 고뇌를 말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보면 사도 베드로는 여제자 다비다의 죽음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믿음으로 간구했습니다. 다비다가 단순히 다시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비다의 생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확신하고 담대히 명령했다는 것입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다비다 아나스테디, Ταβιθά ἀνάστηθι), 이 말은 아람(히브리)어로 “다비다 쿰”(Ταβιθά κουμ)인데, 이 말은 과거 예수님께서 어린 소녀를 향하여 명령하신 말씀 “달리다 쿰”(Ταλιθά κουμ, 막 5:41)과 비교해 보면 히브리(아람)어 철자 하나(β와 λ) 차이만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 이적을 행하여 복음을 전파하였던 것처럼 초대 교회 당시 사도들을 비롯한 전도자들 역시 이러한 이적 행함을 통하여 많은 복음의 진보를 이루었습니다.
만약에 내 앞에 죽음과 같은 문제가 있을 때, OOO 쿰하고 믿음으로 명령해 보십시오. 그리고 곧바로, 주저하지 말고 믿음으로 일어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요 14:12-13)
2. 성령 충만함으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8).
오늘 본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세”로 앉은뱅이가 일어섰다고 말하는 것을 싫어해서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고 죽이려고 위협하는 사두개인들과 유대 교권자들 앞에서 사도들이 전혀 흔들림 없이 당당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고 전할 수 있게 한 근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 충만하여”(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살기등등한 사두개인들 앞에서 주눅 들고 진실을 말하기 어렵지만,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은 사도들을 강하게 만들었고, 어떤 위협에서도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더해 주었습니다.
성령의 지배와 인도를 가리키는이 “성령 충만”은 누가의 애용어로 에베소서 5:18을 제외하고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만 등장하는 용어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1:15.41.67 등에서 세 번 사용되었고, 본서에서는 본문을 비롯하여 2:4, 4:31, 9:17, 13:9 등에서 총 다섯 번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그 배경 기사들을 살펴보면 2:4의 경우 초대 교회의 탄생을 위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과 관련되었고, 4:31은 말씀 전파를 위해 주어졌고(행 4:29), 9:17은 바울(사울)의 다메섹 회심 사건과 관련되었고, 13:9는박수 엘루마를 저주하는 문구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용례로 볼 때 누가가 사용한 “성령 충만”이란 용어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나 받아야 하는 당연한 상황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특수한 사건이나 임무와 관련되어 특별하게 성령께서 임하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맹인이었지만, 위대한 스승을 만나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헬렌 켈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 사진 보며)
인생의 삼중고(三重苦)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한때 죽음을 선택했던 헬렌 켈러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내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통로는 오직 뜨거운 가슴 뿐이었죠. 앤 멘스필드 설리반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 내 가슴은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춰 있었어요. 일곱 살 되던 해에 애니 설리번 선생님을 만나면서 내 가슴이 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깨달았죠. 세상에서 좋고 아름다운 것은 가슴으로 느껴질 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설리반 선생님은 나와 참 많이 닮았는데, 고집불통인 성격도 닮았어요. 어쩌면 선생님의 어린 시절은 나보다 더 절망적이었을지도 몰라요. 선생님은 가난해서 빈민구호소를 전전했고, 트라코마라는 질병에 걸려서 한때 시력도 잃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누구보다 배움의 열망이 크셨죠. 맹인학교에 다니면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또 한 번의 기적을 만들어 보겠다고... 내 가족조차 포기한 나의 가정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대요. 선생님은 나의 가슴에 이렇게 말했어요. ‘네 두 손이 너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 줄 거야!... 다른 사람의 필요를 자기 자신의 필요만큼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할 때 사랑은 시작된단다. 사랑이란 태양이 나타나기 전에 떠 있는 구름과 같아. 구름은 만질 수 없지만 비를 내리게 하지. 비가 내리면 대지의 풀들은 기뻐하며 쑥쑥 자라게 돼. 이처럼 사랑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성장시킨단다.’ 설리반 선생님은 48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를 가르쳐 주셨어요. 내가 받는 모든 찬사는 나의 선생님 설리반의 몫입니다. 내가 그분의 사랑을 만져본 후에 나도 용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그 사랑을 전할 수 있었으니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은 우리를 부활 사건에서 부활 신앙으로 이끄십니다.그리고 부활 신앙은 단순히 부활을 ‘안다’하는 지식의 차원이 아닙니다. 부활 신앙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생명의 능력입니다. 주의 이름이 그의 심령에 들린 사람은 그 영이 살고, 영이 살아날 때 죽음에서 살아납니다. 죽은 심령이 살아날 때, 그 사실을 보고 확신을 가진 사람은 예수를 믿습니다. 나의 연약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의 연약함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시는 그 능력을 보십시오.
2차 세계대전 중 네덜란드 하를렘에서 유태인들을 숨겨준 죄로 붙잡혀서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부모님과 언니를 잃고 혼자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코리텐 붐(Corrie Ten Boom) 여사는 말하기를 아무리 커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하지 못할 것이 없고 아무리 작아도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지 못할 만큼 작은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 사진 보며)
모든 것은 내 마음으로 무엇을 (얼마나) 믿느냐? 이것이 생명이요, 능력입니다. 이제 성령 충만을 받고, 부활 사건을 넘어 부활 신앙이 내 안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나므로, 어떤 환경, 상황에서도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을 전하므로 생명을 살리는 성도님들 되시길 기원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우리의 구원자입니다(11-12).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는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마지막 회심의 한 방을 날립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11-12)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사두개인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죽인 버린 돌인 예수님이 머릿돌이 되고, 더 나아가 천하 사람 중에 유일한 구원자가 된다고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정말 대단하지요? 살기등등하게 감옥에 넣고 죽이려고 하는 유대 교권자들을 향하여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고 선포하는 베드로의 모습의 나의 모습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모든 인류의 구원의 중보자이자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이요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베드로처럼 성령 충만하여 담대하게 전하는 용기를 가집시다.
그런데 베드로는 제사장 그룹인 사두개인들뿐만 아니라 관리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주로 바리새인들) 예루살렘에 모여서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고 힐난할 때,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9)도 반문합니다. 이미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육체적 아픔과 장애의 치유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의 구원에 관해서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미 예수님께서 친히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마 21:42)라고 하신 말씀을 인용하여, 유대 교권자들이 “버린 돌”이라고 생각하고 십자가에 죽인 예수님이, 건축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모퉁이의 머릿돌”이라고 강조합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12)고. 오직 예수님만이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키실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시고, 또한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강한 확신 아래 선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런 법칙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신”(데도메논, δεδομένον)은 ‘주다’(give)는 동사 ‘디도미’(δίομι)의 완료 수동태 분사형으로, 여기서 수동태는 ‘신적 수동태’로써 구원의 주체가 ‘유일신 하나님’, 곧 ‘유일하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해줍니다.
그리고 여기서 “구원”(소테리아, σωτηρία)은 ‘치유’와 ‘구원’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먼저 ‘치유’, 즉 ‘육체적 구원’이란 의미를 갖는데(히 11:7), 이 경우는 앉은뱅이가 베드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던 역사를 가리킵니다(행 3:6-8). 두 번째, ‘영적인 구원’의 의미로(고후 7:10),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이 구원받지 못할 백성임을 확인한 셈입니다. 위의 두 가지 내용을 종합해 보면 베드로는 ‘구원(소테리아)’이라는 단어의 이러한 이중의 의미를 통해 자신을 죄인 취급하며 심문하는 대제사장과 무리들을 향해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이나 하던 앉은뱅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육신의 구원을 얻은 것처럼 너희들도 예수의 이름을 믿어 영혼의 구원을 얻으라’고 촉구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육신의 질병이나 물질의 복만을 구합니다. 또한 반대로 다른 이들은 육신의 일이나 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 영적인 구원에만 집중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이란 영혼과 육신이 모두 온전해지는 총체적인 의미를 담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이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고 강조하듯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종교 개혁가들이 외친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도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구세주로 고백하고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과 함께 천국을 향해 힘차게 자신있게 걸어가시기를 기원합니다.
III.
스웨덴의 작가 셀마 라게를뢰프는 여성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이 작가가 쓴 <진홍가슴 새>라는 동화가 있는데 줄거리가 이렇습니다. (☞ 사진 보며)
하나님께서 세상 모든 만물들과 동.식물을 만들고 계셨는데, 석양이 붉게 물들 즈음에 깊이 생각하시다가 잿빛 털을 가진 조그마한 새 한 마리를 만드셨는데, 새에게 ‘진홍가슴 새’라는 이름을 붙여주셨답니다. 그러자 이 새가 궁금한 게 있었던지 하나님께 물어보았대요. 하나님, 저의 몸통은 온통 잿빛 털로 뒤덮혀 있는데, 왜 ‘진홍가슴 새’라는 이름을 붙여주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인자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새에게 대답하시기를 네가 참 사랑을 베풀 수 있을 때, 그 이름에 합당한 깃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시더래요.
그 후에 오랜 세월이 흘렀을 때였어요. 진홍가슴 새가 머물고 있던 둥지 근처 언덕에 십자가 세 개가 세워져 있더래요.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진홍가슴 새가 가까이 날아가서 보니까 십자가에 달린 한 사람의 머리에 가시관이 씌워져 있는 거예요. 가시가 박힌 이마의 상처에서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죠. 그 새가 조그만 부리로 이마에 박힌 가시를 하나씩 하나씩 뽑아내는데... 가시가 뽑힐 때마다 솟아난 피로 잿빛 털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거예요. 이 새가 지칠 때까지 가시를 뽑다가 보니까 그 사람이 숨을 거두고 말았어요. 둥지로 돌아와서 몸에 묻은 피를 씻고 또 씻어도 목덜미와 가슴에 뿌려진 피가 지워지지 않더래요.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알을 낳고 새끼가 나왔는데, 그 새끼들의 목덜미와 가슴에 선명한 진홍빛 털이 나 있더래요. 그래서 이 새의 이름이 진홍가슴 새라고 영원히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홍가슴 새’는 주님의 십자가 사랑, 십자가의 보혈을 아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인간은 잿빛 털옷을 입고 사는 새와 같은 것입니다. 날마다 잿빛 날개를 퍼덕거리며 창공을 날아다니면서 먹거리를 찾고, 하루하루 살지만 텅빈 가슴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인생은 삶의 갈증을 해결하려고, 타는 목마름을 축이려고 이것저것 마셔댑니다. 그러다 비틀거리며 주저앉고 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생수의 근원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1:8(“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의 지리적 구도에 따른다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 중 아직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에 해당됩니다. 본격적인 이방인 선교는 사도행전 13장에서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 시작됩니다. 스데반의 순교(7장)와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게 되어(8:lb), 사마리아 전도는 빌립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이어지는 에디오피아 내시(8:26-40)와 고넬료(10:1-11:18) 이야기는 소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회심 보도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이방인들의 회심입니다. 특히 에디오피아 내시의 경우 이방인으로서 최초로 기독교 공동체에 받아들여진 사람(이승호, 142)이며, 하나님 주도적인 선교(missio Dei)에 의해 고넬료의 회심 이야기는 이방인 선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될 수 있음을 알게 하였습니다(11:18).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의 범주에 속하며, 특히 유대교 권력자들에 의해 반대에 부닥친 상황입니다.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이 전파되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요 대적인 유대 교권자들과 위협과 고통을 말해줍니다. 그런 살기등등한 유대 교권자들의 위협에 베드로와 사도들은 담대하게 병든 자가 고침받고 귀신들이 쫓겨나가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권능으로 가능하며, 성령 충만을 받아 담대하게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선포합니다. 우리 하존 가족들도 어떤 위협과 힘든 상황이 된다고 할지라도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과 충만을 받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고, 예수 부활 생명 복음을 전하므로 생명을 살리는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살전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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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1일(주일) 주일 2부예배 facebook 실시간 송출한 동영상 url 주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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