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가는 길 (진실하라!)
[마태복음 5장 17-20절]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진실이라는 이 말은 라틴어로는 시네 세라(sine cera)에서 왔습니다.
이 말은 ‘밀칠하지 않은’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sun tested', 즉 '햇빛에 시험해 보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생기게 된 것은 고대 도자기 산업이 발달하면서 생긴 단어입니다. 우리가 보아도 값싼 도자기(옹기)는 두껍게 만들기 때문에 불에 구워낼 때에 금이 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값비싼 도자기는 얇게 만들고 가볍게 선명한 색깔을 넣습니다. 그러다 보니 값비싼 도자기는 불에 구워내기 전이나 구워낸 후에 금이 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정직한 도공은 이런 도자기는 깨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도자기에 색소에다 딱딱한 밀초를 섞어 갈라진 틈을 메워 유약을 발라 상품으로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 햇빛에 비쳐 밀초를 메운 자국이 있나 없나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런 후 그런 자국이 없을 때 'sine cera'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신자가 진실해야 한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흠도 없고 티도 없는 깨끗한 신자, 위선이나 분으로 위장하지 않은 모습을 가질 것을 말합니다.
신자란 “나는 조금만 다듬기만 하면 죄와 멀어질 수 있다 하는 자가 아니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주님이 원하시면 깨끗해질 수 있나이다.”라고 하는 자입니다.
어쩌면 오늘 말씀이 바로 진실논란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실이 무엇인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의로운 자들인지, 아니면 율법과는 다른 길을 걷는 것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의로운 것인지 진실을 밝히자는 것이죠.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고, 율법 전문가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철저하게 율법을 어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오늘 본문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율법 이해하기!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배경을 아는 것이 조금 중요합니다.
여러분 중의 많은 분이 성경을 읽으려 시도하다 실패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레위기나 신명기 부분에 나오는 율법에 이르게 되면, 소 잡고, 양 잡고, 염소 잡고, 고운 가루로 등등 정신 못 차리게 지루한 부분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루한 부분이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중요하냐면, 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에 깨달은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고난을 겪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이들은 율법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기 시작했습니다. 율법조항을 이마에 붙이고 소매에도 달고, 문 위에 붙여놓고 들어가며 나가며 늘 외우고, 자녀에게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을 잊지 않고 잘 섬기도록 주신 것인데, 어는 순간부터 주인공인 하나님은 사라지고 율법을 지키는 데 주력하기 시작한 것이죠.
결국,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예배하는 삶을 살도록 주신 것인데 본질이 사라진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본질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면 생명과 자유와 평안함이 있어야 하는데 율법을 지키기 시작하면서 율법의 노예가 되기 시작한 것이죠. 율법을 지키는 그들에게는 본질을 이야기하는 예수님이 마치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처럼 생각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외면적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 “선행”이죠. 본래 선행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어야 하는데, 이것 역시 하나님과 관계없는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 즉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를 자랑하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본문 17~18절이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서 모세의 율법이 가장 중요했고 또한, 장로의 유전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미쉬나’라고 했는데 랍비와 장로들의 가르침을 수백 년 동안 모아놓은 것이죠. 여기에는 율법을 지키도록 세부규범들이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율법에서는 정결하게 손을 씻으라고 했는데, 물을 떠다 놓고 씻는 방법이 다 다릅니다. 물의 양도 횟수도 그래서 규례를 정하게 되고.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디까지가 일이고 아닌지 정해 놔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무화과 하나를 드는 무게까지는 일이 아니지만, 그것보다 무거우면 일이 됩니다.
또 안식일에는 2000규빗 이상을 걸어가면 여행하는 것이 되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되죠.
이렇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모세의 율법보다는 실제 생활에서 지키는 ‘미쉬나’가 더욱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죠.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 만든 ‘미쉬나’가 오히려 율법을 범하게 한 것이죠. 사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는데, 무화과의 무게, 2000규빗의 거리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편법이 생기게 됩니다. 5000규빗 쯤 되는 거리를 가야 하면, 1900규빗쯤 가다가 쉬고 다시 걷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범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 이제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닌데, 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율법 논쟁을 벌이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나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 사건이 하나 있죠.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따서 까먹은 것입니다. ‘미쉬나’에 의하면 음식을 그냥 먹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지만, 가공을 하거나 어떤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것은 명백한 안식일을 범하는 죄가 됩니다.
예를 들어서, 식은 밥을 먹으면 죄가 아니고, 식은 밥을 데워 먹으면 죄가 되는 것이죠.
미쉬나를 신봉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율법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당연했겠죠.
마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습관과 전통을 율법으로 생각하고 착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자유함을 잃고,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법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잘못된 율법을 신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어제나 지금이나 내일도 같습니다. 단지 우리의 생각과 습관, 잘못된 믿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하고 있을 뿐이지요.
또 다른 각도에서 오늘 본문 17절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율법이나 선지자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나요? 모든 율법과 제사는 이 땅에 오실 메시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죄 없는 동물들의 죽음으로 죄사함을 받는 의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또한, 율법의 목적인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상수훈을 통해서 더욱 온전한 것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법은 결코 없어질 수 없습니다. 율법이 규정한 정한 것과 부정한 것, 먹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음식들에 대한 규례는 결국 “음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부정하게 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이제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율법의 각론들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율법이 점점 상징화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법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죠.
재미있는 글을 하나 소개하죠. [학교 밖 선생님 365]에 나오는 ‘잉꼬’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잉꼬는 남들이 보지 않을 때만 싸운다.
소문 한번 잘못 나서 참 힘들게 산다.
율법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율법을 지킬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율법을 지킴으로 완전해지려고 하면서, 자꾸 더 많은 율법을 만들어갑니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은 이 율법을 피해 가려는 교활한 지혜를 또 만들게 되죠. 그러면 또 율법을 만들고, 결국, 율법이 강화되면 될수록 인간들은 더 큰 죄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의롭게 살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드러나게 하고 경계하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을 가리켜 “몽학선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요즘 교회들을 보세요. 얼마나 많은 규정을 만들어 가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교회는 영적 공동체가 되기보다는 그 규율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에 의해 더욱 세속적인 공동체로 변해갈 따름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교회 안에서 “법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교회의 생명은 끝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통용되지 않는 곳에서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용서가 없는 율법,
사랑이 없는 공의.
용납하지 않는 정죄,
자유함을 잃어버린 규칙은,
이것이 종교 공동체가 되어 유기체로서의 신앙공동체를 상실합니다.
율법보다 나은 의!
김장환 목사님이 쓰신 예화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신장기능이 약화되어 건강한 사람의 신장을 이식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주일 날 임시로 강단을 맡아 설교를 하게 된 유명한 목사님이 전후 사정을 설명한 후 아무래도 교인들 가운데서 신장기증자가 나와야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고통 받는 주님의 종을 위해서 신장을 기증할 뜻이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표하라고 했습니다. 잠시 후 여기저기서 손을 들기 시작하더니 거기 모인 천여 명이 거의 다 손을 들었습니다. 그날 설교를 맡은 목사님은 감격하며 말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이처럼 주의 종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데 놀랐습니다. 그러나 신장은 한 사람 것이면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사람을 지적하는 것은 덕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오리털 하나를 꺼내 입으로 분 후, 이 오리털이 머리 위에 내려앉는 사람을 신장기증자로 선정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의 뜻을 기다리며 조용히 기도하며 기다립시다.“
드디어 오리털이 강단을 떠나 회중석으로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오리털이 가까이 날아오면 사방에서 ‘주여, 할렐루야, 아멘’ 소리가 입바람에 섞여 나오고 그와 동시에 오리털은 다른 곳으로 날아갑니다. 오리털은 누구 머리 위에도 내려앉지 못했답니다.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맙시다.
본문 20절을 메시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옳게 사는 문제에서 너희가 바리새인들보다 훨씬 낫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의”라는 면에서 오늘 우리가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보고 우리는 ‘종교인’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죠. 이들은 누가 보아도 종교적인 품위와 위신을 잘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어디에서나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오늘날로 예를 든다면, 이들은 회식자리에서 술과 담배를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며, 주일에 골프 약속을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니 감히 이들 앞에서 이런 것을 깨라고 이야기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나도 자기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는데 철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런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늘 자신에게 가혹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즐거움과 행복보다는 율법을 지키는 ‘자기 성취’에 만족함을 얻으려 하지만 절대 채워지지 않는 절망감을 경험합니다. 또한,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주변에 있는 누군가를 힘들게 하고, 정죄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의 즐거움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한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큰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보세요.
“하나님이 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 18:11-12)
참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게 허전한 것이며, 왜 예수님께서 이들을 인정하지 않으셨을까요?
종교인인 외적인 것에 치열하게 관심을 두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에 신경을 쓴다면, “신앙인”은 늘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합니다. 종교인은 의무감으로 살기에 위선적이 되기 쉽습니다. 의무감은 기쁨을 앗아갑니다. 의무감은 자신이 쌓은 ‘공적’이 있을 때 ‘의롭다!’라고 말하지만, 단지 자신을 만족하게 했을 뿐입니다. 단지 자기 일을 했을 뿐입니다.
누가복음 18장의 바리새인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신앙이 없는 종교인은 자신들이 ‘의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산다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렇죠?
종교적인 삶을 살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지 않는 것은 단지 자신의 성을 쌓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앙적인 삶을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지켜야 하는 종교적 삶을 살지 않는다면, 단지 자기 편의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종종, 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성도들의 교제나, 봉사, 섬김, 십일조와 감사의 생활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않아도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오늘 예수님께서 아주 명백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절)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의무감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지켜야 하는 ‘의’가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이 아닌 ‘자발적 의’입니다.
신앙인은 종교인을 능가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들도 하는 것을 신앙인이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둘 사이에서 우리는 늘 팽팽한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신앙으로 시작했는데, 어느 날 내 모습이 종교적으로 바뀌어 있지 않은지, 너무나 종교적인 내 모습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상실한 위선적은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도 공부하는 성경도 공부하지 않으면서, 바리새인들도 구제하는 일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바리새인들도 자신들의 것 중에서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여 드리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결국은 진실에 대한 문제입니다.
율법을 지키느라 하나님의 뜻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뜻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믿는 자로서 마땅히 행해야 하는 도리들을 외면하지는 않는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자신을 보지 않는다면 누구도 볼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독선적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을 믿으며 위선적이 되지 않도록 올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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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