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6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제1독서 : 묵시 22,1-7
복 음 : 루카 21,34-3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35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36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얼마 전에 초등학교 동창 몇 명을 만났습니다.
초등학생 때면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입니다.
너무나 긴 시간이 지난 것만 같은데, 중년의 나이에 다시 만났는데도
엊그제 만난 것처럼 친숙하고 반가웠습니다.
사회적으로 안정된 자리에 있는 친구들,
그 자리에서 나름의 위엄을 보이면서 지냈을 텐데
이곳에서는 모두 초등학생 애가 되어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저녁 식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한 뒤,
오랜만에 노래를 부르면서 신나게 놀자고 노래방에 갔습니다.
바쁘게 일만 하면서 지냈던 친구들,
그래서인지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몰라
노래방 책자를 한참이나 뒤적이다가 겨우 번호를 찍습니다.
그런데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글쎄 모두 느린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 때도 분명히 빠른 노래도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느린 노래만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어느 책에서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글쎄 나이가 들면 박자 맞추기가 힘들어서 느린 노래만 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이나 행동은 다시 초등학생 때로 되돌아간 것 같은데,
역시 나이는 모두 먹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를 받아들이기를 힘들어합니다.
받아들여야 “그러려니” 할 텐데, 받아들이지 않으니
세상의 모든 불공평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려니’라는 마음이 필요한 지금이 아닐까요?
마지막 주님의 날에 대해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이날은 갑자기 찾아오며,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치게 된다고 하시지요.
그렇다면 이날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혹시 ‘그날은 절대로 와서는 안 됩니다’라면서 거부하면 될까요?
아니면 그냥 포기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어야 할까요?
주님께서는 그 마지막 주님의 날에 주님 앞에 설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마지막 주님의 날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날은 무조건 거부하고 불평불만에 가득 차서
포기하고 좌절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받아들여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변화 자체를 거부해서는 안 되고,
또 불평불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도 안 됩니다.
그보다 마지막 주님의 날을 잘 맞이할 수 있도록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내일 우리는 교회력으로 새해라고 말하는 대림 제1주일을 보냅니다.
이 땅에 강생하여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잘 준비하는 방법은 깨어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제1독서의 묵시록 말씀처럼
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빛이 되어 주시기 때문에(묵시 22,5 참조),
다른 어떤 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늘 깨어 있어라!”
-깨어 있음, 천상의 꿈, 깨어 있기 훈련-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의 연중시기 끝은 내일의 대림시기 시작입니다. 끝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어제 설치해 놓은 대림초 화관이 벌써 마음을 대림의 기쁨으로 설레게 합니다.
연중시기를 끝맺으며 대림시기를 열어 주는 결정적 말씀 주제는 “늘 깨어 있어라!”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도 영성생활도 깨어 있음을 궁극의 목표로 합니다.
참으로 깨어 있을 때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대림을 앞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 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어느 말마디 하나 생략할 수 없어 복음을 통째로 전부 인용했습니다.
언젠가의 그날은 죽음일 수도, 사고일 수도, 병일 수도, 재난의 불행일 수도, 종말일 수도 있습니다.
유비무환입니다. 그러니 그날의 불행에 대비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깨어 사는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참으로 깨어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하나,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며 뿌리 없이 표류하며
생각 없는 삶, 의식 없는 삶, 영혼 없는 삶, 피상적인 삶,
죽어 있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살 때 참으로 살아 있는 존엄한 품위의 삶이 됩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다림입니다.
깨어 있음은 희망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은 순종입니다.
깨어 있음은 봉헌입니다.
깨어 있음은 겸손입니다.
깨어 있음은 순수입니다.
깨어 있음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깨어 있음은 지혜입니다.
깨어 있음은 생명입니다.
깨어 있음은 빛입니다.
깨어 있음은 힘입니다.
깨어 있음은 평화입니다.
깨어 있음은 은총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깨어 있음의 은혜입니다. 흡사 깨어 있음 예찬 같습니다.
깨어 있음은 모두라는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습니까?
답은 하나 꿈입니다. 희망입니다. 비전입니다. 셋 같지만 실은 하나입니다.
꿈 중의 꿈, 희망 중의 희망, 비전 중의 비전이 하느님 나라,
새 예루살렘의 꿈이자 희망이자 비전입니다.
이렇게 새 예루살렘 천상의 꿈이, 희망이, 비전이 깨어 있음의 원천입니다.
오늘 묵시록의 새 예루살렘의 천상 비전은, 꿈은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지요!
창세기 잃었던 낙원을 되찾은 것입니다.
바로 이런 꿈을 앞당겨 살 때 참으로 살아 있는 삶, 깨어 있는 삶입니다.
사도 요한이 체험한 제1독서 묵시록 많은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 천사는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내는 생명 나무가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
바로 성인들의 미래요, 우리 믿는 이들의 궁극의 미래입니다.
이런 아름답고 영원한 천상의 꿈, 희망, 비전이 생생할수록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있는 삶이 이런 천상의 꿈을 앞당겨 실현하며 살게 합니다.
바로 이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우리 공동체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함께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기도입니다.
“늘 깨어 있어라!”
구체적으로 끊임없이 기도하는 영적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깨어 있음의 훈련에 끊임없이, 한결같이, 간절히, 항구히 바치는 기도보다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기도는 감정도 기분도 마음도 아니라 끊임없는 훈련입니다.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회개의 훈련을 통해
비로소 성취되는 열정과 순수의 깨어 있는 삶이요, 새 예루살렘을 앞당겨 사는 삶입니다.
깨어 있음의 구체적 영적 기도 훈련을 소개합니다.
이 관상기도는 제가 40년 수도 생활하는 동안 늘 해온 기도입니다.
다시 오늘부터 심기일전하여 새롭게 충실히 수행하려 합니다.
바로 오늘 미사 중 화답송 후렴 성구를 기도 말로 하여,
즉 만트라로 삼아 수시로 마음과 몸을 고요히 한 후
호흡에 맞춰 다음 만트라를 속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1코린16,22ㄴ과 묵시22,20ㄷ).
'마라나타', 아람어로 우리말로 번역 하면 '오소서, 주 예수님'입니다.
마-라-나-타, 들숨 “마”, 날숨 “라”, 들숨 “나”, 날숨 “타”,
끊임없이 반복하여 바치는 아주 단순한 기도입니다.
이와 더불어 들숨 “오소서”, 날숨 “주 예수님!”
끊임없이 호흡에 맞춰 일정한 장소, 일정한 시간에 규칙적으로 훈련하는 것입니다.
수시로 언제 어디서나 늘 할 수 있는 참 좋은 깨어 있음의 기도 훈련입니다.
이 기도는 기도의 영성 대가 지금은 타계했지만,
영국 출신의 베네딕도회 수도 사제 존 메인 신부가 강력히 추천하는 기도입니다.
순전히 하느님 현존 안에 깨어 있기 위한 기도입니다.
영성 생활은 한 곁 같은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특히 기도 훈련입니다.
생생한 새 예루살렘의 천상 꿈이, 희망이, 비전이 깨어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源泉입니다.
주님의 매일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천상꿈을 새로이 하며 늘 깨어 기도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21,36).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늘은 교회의 전례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내일부터는 새로운 한해를 시작합니다.
교회의 전례력은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대림시기를 지내고 있으며,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탄생 4주 전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오늘은 예수님의 탄생 4주 전입니다.
2022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올 한해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드리며, 주
님 앞에, 이웃들에게 부족한 점이 있다면, 잘못한 것이 있다면
겸손하게 뉘우치면서 주님의 자비를 청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10월에 대한민국에서는 이태원 참사가 있었습니다.
사고의 원인은 많은 인원이 모이는 것을 예상했지만 안전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예전에는 할로윈 축제를 즐기러 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예상했고,
경찰들이 질서유지를 했다고 합니다.
지난 2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으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못했기에
이번에는 더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을 예상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시와 구청 그리고 경찰은 그에 대한 안전대책을 세우지 못했다고 합니다.
예전에도 별 일없이 끝났으니 이번에도 별일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백조가 호수 위를 우아하게 떠 있는 것은 물 밑에서 힘차게 노를 젓는 오리 발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중이 모이는 축제가 안전하게 마무리될 수 있는 것
또한 질서유지를 위해서 활동하는 안전요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후의 약방문일 수 있지만 다시는 이런 참사가 생기지 않도록
책임 있는 사람들은 안전대책을 숙지하고 실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봉화의 아연 광산의 갱도가 무너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광부 2 사람이 매몰되었지만 9일 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캄캄한 갱도에서 9일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20년 경력의 노련한 광부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습기가 많은 갱도에서 위험한 것은 저체온증이라고 합니다.
광부는 입사한 지 5일 된 신임 광부와 비닐을 모아서 작은 천막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천막 안에서 지내면서 저체온증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변에 있는 나무를 모아서 불을 피웠다고 합니다.
습기를 먹은 나무는 산소 용접기를 사용해서 불을 피웠다고 합니다.
늘 가지고 다니던 커피포트의 플라스틱 부분을 떼어내고 물을 끓였다고 합니다.
일하면서 먹는 커피믹스는 허기를 견디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아연광산은 통풍이 잘 되었고 호흡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고 합니다.
주변의 물건들을 적극 활용하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캄캄한 갱도에서 9일을 버틸 수 있었고 마침내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적성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본당에 25인승 버스가 있었습니다.
차량을 운전하기 위해서는 대형버스 면허가 있어야 했습니다.
본당 교우 두 분과 함께 운전학원에 등록을 했습니다.
열심히 연습을 했지만, 교우분들은 합격을 했고, 저는 시간 초과로 불합격 했습니다.
다시 한번 도전하려고 준비를 했는데, 아버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은 노력할 만큼 했으니 이제 운전면허 시험은 그만두고,
합격하신 분들이 버스 운행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아버님은 제가 불합격 한 것도 다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저는 차량 봉사자들을 위해서 주일 아침이면 커피를 준비해드렸고,
잘 다녀올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대신에 저는 9인승 승합차를 운전하였고, 동네의 약수터에서 물을 떠오곤 했습니다.
신발은 발의 크기에 맞추어야 하듯이, 제게는 9인승이 적합했던 것 같습니다.
스키를 배울 때도 그랬습니다.
강사는 스키를 잘 타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넘어지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리고 넘어졌을 때 일어나는 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몸의 균형을 잃어버리면 억지로 스키를 타려고 하지 말고
넘어지는 것이 안전을 위해서 더 좋다고 하였습니다.
넘어진 다음 다시 일어나는 법을 배우면 스키를 재미있고 안전하게 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강사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잘 넘어지고 곧 일어날 수 있으면 스키를 즐길 수 있습니다.”
재물, 권력, 명예, 성공이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사람, 부자 청년, 대사제, 빌라도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였고,
오히려 예수님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몸을 팔았던 여인도, 눈이 멀었던 소경도, 나병환자도, 하혈하던 여인도,
중풍병자도, 듣지 못하던 사람도 예수님을 만나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죄인으로 불렸지만, 예수님을 만났고,
그들은 살아서 참된 행복을 느꼈고, 영원한 삶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지키고 따른다면 그곳이 바로 ‘꽃자리’입니다.
우리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진다면 그곳이 바로 ‘가시방석’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한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너희는 ~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 내내 종말에 관한 말씀을 들었고, 오늘은 그 마지막 결론 부분을 들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사흘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당신의 공생활을 마무리 짓는 말씀으로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기다림의 자세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 말씀은 '스스로 조심'하되,
무엇보다도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물러지다’는 것은 ‘무디어지다,’ ‘각성하지 않다’라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물러지게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물러지게 하는 것들은 바로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심 걱정이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의 부족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스스로 조심'하라는 말씀은 사도 바오로의 말을 떠올려줍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1티모 4,16)
둘째 말씀은 “늘 깨어 기도하라.”(루카 21,36)는 말씀입니다.
'기도하라' 함은 자신의 약함과 무능력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주님의 능력과 선물을 믿으며 소망하고 의탁함이요,
'깨어 기도하라' 함은 그분을 맞아들이기 위해 준비하여 마음을 경계하고 그분을 향하여 있음이요,
'늘 깨어 기도하라' 함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께 향하여 있고,
그분 앞에 서 있고, 그분 안에 머물러 있음입니다.
결국 ‘주님 앞’에 서 있다면 깨어 기도할 것이요,
그렇지 않고 ‘자신 앞’에 서 있다면,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에 빠져 마음이 물러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것이 깨어 있음의 표시가 됩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 기도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깨어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 주님 앞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여전히 근심 걱정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주님을 향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빠져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처지가 ‘이방인의 땅 전쟁터’ 같아도 자신의 고집을 꺾고
주님께 의탁하면 바로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된다는
이 단순한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주님 앞에 서 있음’,
곧 ‘하느님에 대한 현전 의식’이요, 주님 면전에 나서 있는 대면의식입니다.
그분을 향하여 있는 것이요, 그분의 눈길, 그분의 돌보심 아래있는 것입니다.
결국 ‘깨어있음’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오늘의 말 · 샘 기도>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주님!
제 마음이 물러지지 않게 하소서.
흔들리더라도 당신을 벗어나지 않고,
넘어지더라도 당신을 붙들고 있게 하소서.
안일과 편리로 무뎌지지 않고 근심에서 벗어나
당신 사랑에 열렬하며, 늘 깨어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늘 깨어 기도하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34절)
영원하신 임금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술의 위험과 또한 ‘술 중독’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아무리 술을 많이 먹는 사람도 의사가 술을 먹으면
이제 죽는다고 하면 모두 술을 끊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영혼과 육신의 의사이신 주님께서 만취와 방탕과 일상의 근심에 빠지지 말라고 하신다.
그렇게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에 빠져 살면서 아무 탈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기에 만취는 모든 것을 망치는 원인이다.
육신과 함께 영혼까지 약하게 하는 유일한 병이다.
사도 바오로는 육신이 약할 때 영은 강해진다(2코린 12,10)고 하였다.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2코린 4,16) 하였다.
그러나 술에 취해 살면 육신과 영혼이 파멸한다.
육신과 영혼이 한꺼번에 타락하는 것이다.
모든 지체가 약해지면서 손과 발이 말을 안 듣고, 혀는 풀리고 눈은 어두워진다.
정신 또한 망가져서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심하면 자기가 인간이라는 사실조차 모른다.
술 중독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생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순간이 나에게는 아직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하고,
애써 잊으려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여도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앞에 당당히 버티고 있으며, 언제나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다만 그때가 언제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하여간에 우리 인간은 언제고 어느 때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깨어 있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라,
지금 당장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 있게,
기쁘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느님을 기쁘게 잘 만날 수 있으려면 평소에 죽는 연습을 잘해야 한다.
이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기 위해서
나 자신을 이기는,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나의 인간적인 뜻을 죽이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죽는 연습이 잘 되어있다면,
하느님 앞에 나아갈 때, 이 세상 삶도 잘 마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삶이며,
우리는 그날 어떤 어려움과 고통도 이겨내고 주님을 뵐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은 항상 기도하는 자세와 함께 이루어갈 수 있다.
기도하면서 내가 살아가는 매 순간들의 삶이
하느님께 바쳐지는 아름다운 기도로써 바쳐질 수 있도록 한다면
진정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잘 새기고 실천하여야 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인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온통 희망입니다.
"생명수"(묵시 22,1)
"생명나무"(묵시 22,2)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를 흐르는 강입니다.
이 강으로 매달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자라나
사람에게 열매를 내주고 그 나뭇잎으로는 치료를 합니다.
제1독서의 시작은 이처럼 주님에게서 나오는 활기 넘치는 생명의 기운을 이야기합니다.
이 생명이 사람을 어루만지고 키우고 치유하고 살립니다.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묵시 22,3-4)
주님 어좌 곁에는 그분과 얼굴을 마주하며 그분을 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 지복직관의 행복은 모든 신앙인의 바람이지요.
사랑이신 분과 사랑으로 머무르는 상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모습입니다.
"주 하느님이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묵시 22,5)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주님의 현존으로 인공적인 빛은
물론 자연의 빛조차 더 이상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빛이시고 모든 이가 골고루 그 빛을 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밝고 따사롭고 온화한 빛 안에서 모든 피조물은 저마다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심어 주신 본성의 가장 충만하고 아름다운 상태로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동안 제자들에게 펼쳐 보이신
종말과 재난의 예고를 간곡한 당부로 마무리하십니다.
"방탕과 만취와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루카 21,34)
이기심과 아집과 증오로 마음이 굳어지는 것 못지않게,
자기 분수와 절제와 감사를 잊은 허약한 마음을 경계하라고 하십니다.
때를 가늠할 수 없게 느닷없이 들이닥칠 사람의 아들의 날을 기다리며
겪어야 할 박해와 재난에 대비해,
충실한 사랑과 굳건한 신앙, 용기와 인내를 견지하라는 촉구시지요.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36)
종말에 대한 가르침은 이처럼 기도의 권고로 끝은 맺습니다.
충실한 사랑과 굳건한 신앙, 용기와 인내는
갑자기 뚝 떨어지는 마술이나 요행이 아니라,
하느님과 사랑하고 일치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형성되는 덕일 겁입니다.
기도하는 이는 기도함으로써 "힘"을 얻습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
지상에 사는 우리 중에는 사람의 아들의 날 이후
펼쳐질 영원한 삶을 체험한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주님의 가르침과 말씀에 기대어 더듬거리며 나아갈 수밖에요.
세속의 재물과 권력, 명예를 쟁취하기 위해 저마다의 방법론이 존재하는 것처럼,
세상 창조 때부터 우리를 위해 마련된 복된 미래를 얻는 길은 기도가 될 것입니다.
이 "기도"에서 사랑이 나오고 나눔이 나옵니다.
존중과 배려와 희생이 나오지요. 위로와 격려, 치유도 기도에서 흘러나옵니다.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흘러나와 도성을 흐르는 생명수의 강처럼 기도는
우리 자신과 타인, 세상을 살리는, 고요하고 온화하지만 매우 강력한 힘입니다.
깨어 기도하는 이는 이미 주님과 하나입니다.
내면에 그분의 거처가 단단히 자리하기에, 그분의 날이 언제 어떻게 닥치든 괜찮습니다.
진즉에 그 자신의 일이 곧 하느님의 일이 되고, 하느님의 일이 그 자신의 일이 되었으니,
주님을 맞이할 그 자리에 굳건히 서서 기다리면 되겠지요.
그날은 주님과 누리는 사랑이 일상이 된 이에게는
그 일상의 연장이고 절정이 될 것이니,
깨어 기도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맞이하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주님께서 오십니다!
지난 한 해를 정성껏 마무리하시면서,
다가오는 기다림의 시기를 잘 준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모두 정말 수고하셨고, 진짜 애 많이 쓰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마라나 타! 오소서, 주 예수님!(화답송)
알파요 오메가의 하느님
박상대 마르코 신부
“늘 깨어 기도하라.”(36절)
이것이 한해 전례달력의 마지막 날에 선포되는 메시지이다.
우리가 늘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이를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하기 위함이며,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재림하시는 人子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기 위함이다.
우리가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을 지내면서 매일미사의 복음을 묵상한 바에 의하면
인자의 재림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하나는 재림의 순간이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黙示的 징조나 표징과 함께 장엄하게 다가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도둑(마태 24,43; 루카 12,39)이나 덫(35절)처럼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들이닥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려거나 어느 것일까 하고 점치려 하지 말라.
잘 못 골랐다간 낭패를 본다.
그러므로 둘 다를 염두에 두는 것이 상책이다.
인자의 재림은 준비된 ‘바로 그날’에 일어날 사건이 되겠지만,
사실상 ‘갑자기’ 들이닥친다는 데 매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있듯이(루카 17,21)
인자의 재림도 반드시 미래의 어떤 사건만은 아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영광의 몸으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마태 28,30),
인자의 재림은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된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더 이상 옛적의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 새 창조를 향하여
그 여정을 시작하였고, 서서히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자의 재림은 예수님 편에서 볼 때, 별다른 사건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 이 사건은 나자렛 예수와 더불어 시작된
하느님의 심오한 구원계획이 완성됨을 증명하는 사건이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우주계시적 사건이며,
영광의 그분 앞에 서게 될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사건이 될 것이다.
우리는 올 한 해 동안 독서와 복음 말씀을 통하여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의 발췌된 성서를 읽음으로써
성서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성서는 누구에게나 그를 읽는 사람에게 필요한 의미를 제공한다.
그렇다고 성서가 자신이 담고 있는 모든 내용으로
세상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定形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처음이 어떤 모양이었으며,
그 마지막 또한 어떤 모양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서 또한 인간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기에 그 모양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가 서 있는 극히 제한된 그 자리와 시간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시키며, 전역사의 차원으로 극대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성서는 세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을 밝혀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것의 알파(a)요, 오메가(Ω)이시기 때문이다.
더러는 길게 살고, 더러는 짧게 사는 것이 세상이지만,
누구에게나 탄생과 죽음은 세상의 창조와 종말의 의미를 가지며,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한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는 세상 전역사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나의 존재가 사람들 앞에서는 비록 하찮은 것으로 보일지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결코 그럴 수 없다.
내가 없으면 창조도 없고 종말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그러기에 스스로 최선을 다해야 하는
나만의 삶을 소중함과 자랑스러움으로 살도록 하자.
그리고 그 삶을 사는 새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세상을 만들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일,
그 일을 당신 뜻에 맞게 질서 지워주시고,
용기와 지혜로써 진보하도록 이끌어 주시며,
은총과 자비하심으로 그 마침을 채워주실 것이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