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스펙 요구하는 회사들에 주눅… 가장이란 부담감도
5년 이상 복무자 전직지원금 도움으로 학원비·교재비 충당
공무원 목표로 매일 10시간 이상 공부, 전역 1년 만에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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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8일, 원주시청에서 9급 공무원 임용장을 받은, 내 인생에서 손에 꼽을 만큼 행복한 날이었다. 시장님께서 내게 임용장을
주시는 순간 그동안의 힘든 수험생활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시련의 시작
2014년 3월
31일, 아픈 기억이지만 지금은 웃을 수 있는 전역일이다. 난 군 복무 중 공상으로 인해 전역했다. 물론 다시 부대로 복귀할 기회가 있었지만,
아내의 권유로 결국 전역을 선택했다. 전역 후 1개월 정도는 여유 있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면서 취업준비를 해보겠다고 마음먹었으나 며칠도
지나지 않아 난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내가 생각했던, 만만하게 생각했던 사회가 아니었다. 그동안 뉴스에 취업난에 대한 소식이 들릴 때마다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한 귀로 흘려들었던 것이 이제 내 일로 다가온 것이다.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까지도 엄청난 스펙을 요구하는 세상이었다.
토익 900점은 기본이고, 각종 자격증에 화려한 경력, 20대의 젊은 나이를 요구하는 회사가 대부분이었다. 군 생활을 전방에서만 보냈던 나는
사실 자기계발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이렇게 갑작스럽게 전역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준비된 것이 거의 없었다.
자격증이라고는 민간자격증 몇 개와 운전면허증이 전부였다. 대학 때 보건행정학을 전공했던 나는 병원 쪽으로 취업방향을 돌렸다. 대형병원 원무과에
취업하는 것을 목표로 이력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서를 제출했다. 결과를 기다렸다. 묵묵부답……. 예상했던 결과지만 막상 서류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점점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중소병원으로 눈높이를 낮추었다. 그래도 중소병원은 면접을 보러 오라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첫 면접을 보러 가던 날, 마치 후보생으로서 3사관학교에 처음 입교하던 날의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병원 인사담당자가 나에게
“대위였으면 월급도 많이 받을 텐데 뭐하러 전역했어요?”라고 물어보는 순간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설명했다. 다음
질문이 이어졌다. “월급이 군대보다 많이 부족할 텐데 괜찮아요?”라고 물었고 나는 “저는 군대에서는 대위였지만 민간인으로서는 이등병입니다.
급여에 상관없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고 답변했다. 그 외 다양한 질문이 이어졌고 기분 좋게 나의 첫 면접이 끝났다. 이틀 후에 연락을
주겠다고 해서 계속 기다렸다. 합격을 기대했으나 예상외로 연락은 오지 않았다. 처음으로 전역한 것을 후회한 날이었다. 다시 입대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재입대를 할 방법을 알아봤다. 그러나 공상으로 인해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이력서를 제출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눈높이를 더
낮추었다. 여기저기 나의 적성과 상관없이 취업포털사이트를 통해 이곳저곳 마구 원서를 제출했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곳이 많아졌다. 하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내가 희망했던 직업이 아니었고 미래가 불투명한 곳이 많았다. 점점 취업에 대한 의욕이 없어졌다. 아내는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면서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라면서 격려했다. 하지만 계속된 취업실패는 점점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난 가장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전역 후 잠시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는 있지만, 하루빨리 당당하게 독립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직장이 필수였다.
목표를 재설정했다. 나라에 대해 헌신을 하기 위해 육군 장교로 입대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라를 위한 일…. 공무원? ‘공무원’이라는 세
글자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공무원……. 취업난이 있고 난 뒤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는 손꼽히는 직업 중 하나다. 경쟁률 700대 1을 기록한
최고의 인기직업……. 그것을 내가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과 이제는 더는 후퇴할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도전을
결심했다.
▲새로운 도전의 시작
먼저 공무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인터넷
카페, 친구 등을 통해 공부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마침 제대군인지원센터를 통해 전직교육을 받으면서 사이버교육이나 국가 자격증을
저렴하게 취득할 방법을 알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얻었다. 우선 공무원 학원을 인터넷강의로 등록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공무원 공부뿐만
아니라 국가 자격증 취득을 위해 컴퓨터 활용능력 1급과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도 같이 준비했다.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은 제대군인지원센터
사이버교육원을 통해 무료로 지원했기 때문에 경제적 부담도 거의 없었다. 진도가 나갈수록 삶에 대한 의욕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는 것만으로 삶이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성공한 것은 컴퓨터 활용능력 1급이었다. 필기는 한 번에 붙었지만,
실기는 무려 6번 만에 합격했다. 내 생애 운전면허증과 태권도 단증을 제외한 첫 국가 자격증이었다. 나도 아직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성취감이 매우 컸다.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물론 부모님의 집에서 함께 살았기 때문에 생활비가 많이 소비되지는
않았지만 아무 소득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통장에 잔액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 불안했다. 때마침 제대군인 지원센터 상담사님의 단비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10년 이상 장기복무 군인에게만 지원됐던 전직지원금이 나처럼 5년 이상의 중기 복무자에게도 지원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6개월간만
지원되는 것이지만 그것도 내게는 매우 큰 힘이 되었다. 전직지원금으로 사회복지사 자격증 취득을 위한 실습비용이나 학점인정에 드는 비용을 충당했고
남은 금액은 공무원 공부를 위한 학원비와 교재로 사용했다. 2014년 9월이 지나고 있었다. 아내가 임신했다. 결혼한 지 6년이 넘게 안 생기던
아기가 드디어 생긴 것이다. 너무 행복했다. 최고의 선물이었다. 하지만 부담도 생겼다. 반드시 내년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는
부담감이었다. 그래야만 당당하고 멋진 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부담감은 용기와 끈기로 변해갔다. 엉덩이가 땀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매일
10시간이 넘게 공부만 했다. 10시간은 휴식시간을 제외한 순수한 공부시간이었다. 뉴스에는 정부가 사회복지전담 공무원을 3년 동안 대규모로
채용하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침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취득예정이었던 나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모의고사를 보면서 실력이 점점 향상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주변 친구들과 선배들, 부모님의 친구분들은 걱정스러운 말씀도 하셨다. “공무원 준비하다가 몇 년씩 낭비하는 사람들도 많다는데
적당히 하다가 안 되면 그냥 취업하는 게 좋지 않겠니?”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지만, 그것은 오히려 나의 투지를 자극했다. 난
합격의 확신이 있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었다. 원서접수를 마치고 3월,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아내에게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보여줬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집을 나섰다. 시험을 치르고 만삭인 아내와 아주 오랜만에 춘천 남이섬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남이섬을 걸으며 아내에게 말했다. “여보, 벌써 다음 달이면 우리 아기 태어나네?! 공무원 시험보다 더 떨린다.”라고
말하자 아내는 “시험결과도 좋을 것이고, 우리 아기도 건강하게 세상에 나올 거야.”라고 답변했다. 아내의 말을 듣자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시련의 끝, 도전의 성공
3주 후 우리 아기는 건강한 사내아이로 태어났고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았다. 산후조리원에서 아내를 간호하던 중 어느덧 공무원 시험 필기합격 발표일이 다가왔다. 시험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산후조리원을 잠시
떠나 집으로 온 나는 컴퓨터를 켰다. 발표시간 1분 전…. 심장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난 긴장하고 있었다. 합격자 명단이
인터넷에 게시되었고 나의 수험번호를 확인했다. 나의 번호가 한 번에 눈에 들어왔다.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확인했다. 그대로 내 번호가 있었다.
혹시 내가 수험번호를 잘못 외운 것이 아닌가 싶어서 응시표를 다시 확인했다. 역시 내 수험번호가 맞았다. 손발이 떨리고 있었다. 아내에게
전화했다. “여보, 나 합격했어! 야호!”라고 소리 지르며 온 집안을 방방 뛰어다녔다. 아내도 내가 합격하자 매우 기뻐하며 웃었다. 우리 아기도
기쁜지 응애응애 우렁차게 울어댔다. 전역한 지 약 1년 만의 일이다. 내 인생 최고의 성취감을 느꼈다. 많은 사람이 내게 말했다. 우리 아기가
복덩이라고……! 맞는 말이다. 우리 아기가 태어남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겹경사다. 필기 합격 후 남아있는 면접을 준비하던 중 아버지께서 멋진
정장을 사주셨다. 아버지께 괜찮은 양복 한 벌 사주지도 못했는데 오히려 내가 받게 되어 죄송스러웠다. 꼭 최종합격해서 아버지께 좋은 양복 한 벌
사드리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면접 당일, 차분하게 면접관님들의 질문에 답변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준비한 만큼의 성과가 있던 면접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최종합격자 발표공고가 게시되었다. 합격이었다. 드디어 수험생, 요즘 말로 공시생에서 공무원이 된 것이다. 이후에 강원도 원주시에서
사회복지 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다가 평창군 일반행정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올해 5월까지 재직하였으며 경기도 사회복지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총
3번의 합격을 이루었으며 현재는 임용대기 중이다.
▲남을 의식하지 말고, 자신을
믿어라
수험생활을 하면서 ‘언젠가 나도 제대군인 취업 성공 수기를 쓰는 날이 오겠지’라고 생각한 적이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직접 쓰고 있는 나를 보며 나 자신이 매우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물론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끝까지 믿어준 아내와 어려울 때 큰
의지가 되었던 제대군인지원센터 상담사님,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수험생활을 지원해 준 제대군인지원제도가 존재한 덕분이며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매우 감사드린다. 아직 취업하지 못한 제대군인 전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끝까지 자신을 믿는 것이다. 주변 사람의 말에 절대
휘둘리지 말고 본인이 선택한 것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단, 선택했다면 많은 것을 포기할 각오를 해야 한다. 난 수험생활을 하면서 티브이를
포기했고, 여행을 포기했다. 또 친구들과의 유흥도 포기했다. 본인이 어떠한 길을 선택했는지에 따라 포기해야 할 것이 분명 존재한다. 성공을 위해
잠시 포기해도 되는 것은 과감하게 포기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남다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실패를 최소화할 전략도 치밀하게 계획해야 한다.
우리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할 수 있다.
끝으로 취업 성공 수기를 작성할 기회를 준 국가보훈처에 감사드리며 제대군인지원센터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수기 전문은 국가보훈처(www.vnet.go.kr)와 국방일보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