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nytimes.com/athletic/5479578/2024/05/16/jurgen-klopp-liverpool-fans-merseyside/
by 사이먼 휴즈
위르겐 클롭 감독은 9년 가까이 지휘봉을 잡았고 7개의 메이저 트로피를 거머쥔 뒤 리버풀을 떠난다.
그는 구단 역사와 현시대의 잉글랜드 축구에서 가장 혁신적인 감독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새 출발을 기념하기 위해, 디 애슬레틱은 축구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의 완전한 일대기를 따라 작성된 시리즈 기사인 'The Real Jurgen Klopp'을 독자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
4부에서 사이먼 휴즈는 그가 리버풀과 지역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머지사이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마이크 키어니는 시력 문제를 가지고 태어났고, 그가 7살일 때부터 시각장애인으로 등록되었다.
클롭 감독이 리버풀의 감독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24살이었고, 하룻밤 사이에 그는 리버풀의 팬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얼굴이 되었다.
챔피언스 리그 나폴리전에서 그가 모하메드 살라의 골에 반응하는 영상이 유명세를 탔기 때문이다. 해당 경기는 후에 해당 대회에서 우승하게 되는 리버풀이 조별리그를 통과하게 되는 경기였다.
콥 스탠드의 난리통 속에서, 사촌형제인 스테판이 몸을 숙여 맨 앞 줄에 자리 잡은 키어니에게 골을 묘사해 주고 같이 환호하는 장면이었다.
24시간 후, 키어니의 세계는 바뀌었다. 살라는 이 동영상을 온라인에서 봤고, 키어니를 리버풀의 옛 훈련장인 멜우드로 초대했다. 그리고 클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수와 코칭스태프를 그와 만나게 해 주었다.
키어니는 디 애슬레틱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애인으로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항상 받아들여지기를 원해요. 그 경험은 제가 응원하는 구단에 받아들여지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는 훈련장의 리셉션에서 기다리는 동안 멜우드의 계단 꼭대기에 나타난 클롭을 기억한다. 키어니는 훈련장의 윗부분으로 자신이 향해야 한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리버풀의 감독은 곧장 그에게로 내려왔다.
"카메라로 찍고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는 자신 이외의 사람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존경을 받으면 누구라도 기분이 좋아질 테죠."
어린 시절부터 리버풀의 경기를 관람해 온 키어니는, 29년 만에 리그 우승을 일궈낼 뻔했던 놀라운 시즌을 보낸 리버풀의 일부분이 됐다. 그러나 클롭 감독과의 유대감을 느끼는 것은 키어니뿐만이 아니다.
현대 축구의 슈퍼 감독 중 한 명으로서 그가 가진 모든 과시적인 요소들, 즉 전술, 영입, 그리고 맨-매니지먼트에도 불구하고, 클롭이 안필드에서 그렇게 칭송을 받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서포터들, 그리고 그들의 도시와 유대할 수 있는 그의 능력 때문이다.
많은 감독들은 클럽의 사람들과 관행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의 클럽과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클롭이 9년간 감독직을 맡는 동안, 그와 맞닥뜨린 팬들의 말을 들어보면, 클롭 감독과 함께라면 그 주장은 진짜처럼 느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키어니는 클롭이 2015년 10월의 취임 기자회견에서 말한 가장 유명한 대사를 언급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사람들은 의심하는 사람들을 믿는 사람들로 바꾸는 것에 대해 웃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2013년, 챔피언스 리그에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말라가를 상대로 2골을 터뜨려 준결승에 진출했던 것을 기억하며 키어니는 클롭 감독이 리버풀에 잘 어울릴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고 한다. 전임자인 브렌던 로저스 감독이 이끄는 리버풀은 레알 마드리드와의 홈경기에서 전반 3골을 실점하며 3-0으로 패했는데, 당시 키어니는 로저스 감독이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레알 마드리드야'라는 태도였어요"라고 말한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클롭 아래서는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대신 '나는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고, 당신은 우리의 경기장에 있고, 우리는 당신이 누구든 당신을 이기려고 노력할 것이다'라는 태도를 보여왔죠."
키어니의 병은 퇴행성이다. 그는 예전에는 안경을 썼고 시야가 더 넓었지만, 지금 그의 시력은 흐려졌다. 이러한 문제들은 그가 성인기에 접어들던 2010년 이후부터 가속화되었고, 그와 같은 사람들은 보수당 정부가 연속으로 집권함에 따라 필요한 지원을 받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는 말한다. "제가 충분히 장애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제가 받아온 도움을 계속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필요성이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는 이를 정치 지형 때문이라며 비판한다. 행정력의 공백이 확장되는 가운데, 키어니는 그가 믿는 클럽을 관리하는 누군가를 리버풀이 갖게 된 것이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리버풀은 좌경화된 도시이고 클롭은 좌파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죠. 그는 전혀 다른 말을 한 적이 없으며 리버풀 사람들에겐 일관성이 중요합니다."
"저는 우리가 그를 얻었을 때 복권에 당첨될 줄 알고 있었지만, 제가 그린 꿈에서 저는 우리가 모든 복권에 다 당첨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키어니는 클롭이 안필드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좌절감을 이용했다고 말한다. 그러한 일이 벌어지면 거부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다. 2019년에 리버풀이 3골 차로 뒤진 1차전 패배를 뒤집으며 챔피언스 리그에서 바르셀로나를 탈락시키는 것과 같은 일이 말이다.
키어니는 경기 후에 바르셀로나 드레싱 룸의 하프타임 영상을 분석했다. 그들은 경기에서 뒤처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3-1로 앞서고 있었다.
그는 설명한다. "모든 것이 여전히 그들의 손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구상 최고의 팀 중 하나였어요. 그들은 그 경기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들 중 한 명도 보유하고 있었죠. 하지만 몇몇 선수들은 거의 눈물을 흘리더군요.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있었습니다. 안필드가 그럴 때는 가능성이 없죠. 그리고 그들은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 에너지의 대부분은 클롭의 몫이었고요."
"모든 것이 끝나고 연기가 걷히고 그가 떠났을 때,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겠죠."
"다른 클럽의 팬들은 클롭 감독 아래에서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한 번밖에 하지 못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 시간을 살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느껴봤고 보스와의 시간을 향유했습니다."
클롭 감독은 리버풀을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3번 진출시켰으며, 시즌이 끝날 무렵 딜로이트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7-18 시즌 동안 총 부가가치(GVA*)를 기준으로 지역 경제에 4억 9700만 파운드(6억 2800만 달러)가 기여된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이나 산업에 의한 재정적 영향을 이해하기 위한 척도.
같은 보고서는 클럽의 활동과 성공이 이 도시에서 4,5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밝혔다.
경쟁력을 갖춘 리버풀 FC는 지역에 중요한 존재다. 그리고 클롭의 영향은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중요하다.
조용히, 그는 시민 대표단과 함께 함부르크로 가서 두 도시 간의 무역에 관해 논의하기도 했는데, 이 두 도시는 강력한 대체 이념을 가진 축구광, 노동자 계급이 있는 항구도시로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리버풀 시 지역의 광역 시장인 스티브 로더람은 클롭이 축구 감독이 아니었다면 산업의 리더가 되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는 클롭의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로더람이 보기에 클롭은 독일 정치의 전통적인 사회 민주주의자다. 한때 대영제국의 가장 큰 항구 중 하나였던 리버풀에서 이러한 가치들은 잘 융합되고 있는 것으로, 리버풀은 1980년대 심각한 실업률로 인해 정치 지형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청거렸고, 다시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강한 지역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로더람은 리버풀이라는 기관을 이끌고 사람들을 따르도록 하는 인물이 반드시 리버풀 출신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에어셔에서 태어난 빌 샹클리가 1959년에 부임 후 리버풀 FC에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 그 증거였다. 샹클리는 오늘날까지 무의식적으로 간직되어 있는 일련의 행위적 가치와 기대감을 심어주었다.
샹클리의 비교적 소박한 집이 멜우드와 가까운 웨스트 더비에 있었던 반면, 클롭은 도시에서 북쪽으로 14마일 떨어진, 나뭇잎이 무성한 해변 마을인 폼비의 '백만장자의 거리'에 살았다. 이곳은 수년간 많은 리버풀과 에버튼 스타들이 거주해 온 곳이었다. 클롭은 브렌던 로저스로부터 집을 물려받았고 스티븐 제라드가 그의 이웃이었다.
그가 영국에서 보낸 대부분의 시간은 그의 집과 리버풀의 훈련장 사이를 오가며 보내졌다. 처음에는 멜우드에서, 그리고 최근에는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커크비의 AXA 트레이닝 센터에서 말이다. 그는 화려한 색깔의 포드 코르티나를 몰고 도로를 통과해 도심으로 들어가 쇼핑을 하곤 했던 샹클리와는 다르게 거의 리버풀 시내에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특히나 성공한 리버풀 감독에 대한 관심은 샹클리 감독이 보냈던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이 이제 거의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그가 리버풀의 감독으로 공개되기 전날 밤, 클롭은 도시의 조지아 구역에 있는 올드 블라인드 스쿨 레스토랑에서 술을 마셨고, 그 모습이 사진에 찍혔다.
아마도 그때 그는 자신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어려울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 이후로 클롭이 외출을 한다면, 그것은 대개 폼비 내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프레시필드 펍(이벤트 행사의 날을 포함해)에서, 그리고 그가 개를 산책시키는 마을의 소나무 숲과 해변에서 정기적으로 목격되었다. 2016년에 그는 지역 단체에서 주최한 크라운 그린 볼 게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에인스데일의 스패로우호크 펍과 레스토랑에서도 목격된 적이 있으며, 도심의 부티크 시설이자 매치 데이 전 행사 장소로 선정된 리버풀 호프 스트리트 호텔의 단골이기도 했다.
한 번은 리버풀 남단 도베데일 타워에서 그가 목격된 적도 있지만, 그의 스폰서 중 하나인 독일 맥주 회사 에딩거의 광고를 촬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2009년, 샹클리는 죽은 지 28년 만에 리버풀의 명예시민이 되었다. 그러나 2022년 클롭은 클럽의 감독으로 있을 때 도시에서 자유를 얻은 인물이 되었다.
이것은 최초였다. 로더람은 리버풀의 알버트 독이 내려다보이는 만 아일랜드 사무실에서 디 애슬레틱에게 이를 설명했다.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원칙의 유형을 여러분들에게 보여주는 것이고, 그가 사람들에게 반향을 일으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로더람은 클롭과 도시 사이의 "영적 연결"에 대해 말한다. "라이벌 클럽의 팬들조차도 최소한 중립적인 말을 해 줄 리버풀 감독은 처음입니다. 심지어 그는 리버풀과 머지사이드에 대해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죠. 그리고 만약 그가 다른 클럽으로 간다면, 저는 그가 여기에서 존재하는 것과 같은 시너지 효과를 다시 경험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맨체스터 시장 앤디 버넘과 함께 로더람은 최근 "Head North: A Rallying Cry for a More Equal Britain"이라는 책을 공동 출간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 웨스트민스터 의회에서 반(反)-리버풀적 편견에 부딪혀 왔다고 말한다. 영국의 다른 지역에서 온 의원들은 리버풀의 대표자들이 런던에 그들의 "동냥 그릇"을 들고 왔다고 말한다.
로더람은 이런 인식을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인식은 더블린에서 리버풀로 배를 타고 넘어온 이민자들이 많았던 19세기의 반(反)-아일랜드인 정서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그는 클롭이 이 과정을 도왔다고 말한다.
"위르겐은 도시의 모든 역사를 아는 척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도시를 변호할 만큼 충분히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축구 경기장에서 일어나는 것을 초월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이안 번은 안필드 지역으로 이사하기 전에 리버풀의 캔틸 농장 사유지에서 자랐지만, 지금은 의회 의원으로서 인근 웨스트 더비의 선거구를 대표한다.
그는 1989년 노팅엄 포레스트와의 FA컵 준결승전에서 97명의 리버풀 팬들이 목숨을 잃었던 힐스버러 참사의 현장을 16살의 나이로 목격했다. 번은 사고에서 벗어났지만, 그의 아버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그는 2015년에 에버턴 출신 데이브 켈리와 함께 "Fans Supporting Foodbanks" 자선 단체를 공동 설립했다.
로더람과 마찬가지로 번은 리버풀 감독의 직무는 응당 리버풀 시민의 직무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공정하든 그렇지 않든 모든 감독은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번은 감독의 말이 신성하게 여겨지는 리버풀의 문화에 대해 샹클리가 "완전한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의 후임자들 중 일부는, 샹클리가 리버풀을 2부 리그에서 잉글랜드 축구의 정점으로 끌어올렸던 것처럼, 단순히 축구 클럽을 키우는 것보다 더 큰 도전을 해왔다고 말한다.
1989년부터 각 감독들은 힐스버러의 영향에 대처해야 했다. 케니 달글리시는 참사 당시 책임자였으며, 많은 희생자들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했다. 심지어 하루에 네 번씩이나 참석하는 날도 있었다. 그는 선수와 감독으로서의 눈부신 업적을 남긴 것에 대해 칭송받는다.
번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은 축구 경기장 안에서 리더십을 가지고 있지만, 경기장 밖에서도 그것을 꺼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당신들이 도시를 위해 일어설 것을 기대합니다. 이 직업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번에 따르면 클롭의 "국제적인 목소리"는 청중들이 리버풀에 더 많이 주목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가끔 리버풀 사람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확실히 전달할 수 있도록, 3, 4, 5배 더 강하게"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리버풀 사람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이런 것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한다.
번은 최근 그려진 벽화 앞에 서 있다. 이는 클롭의 리버풀 재임 기간을 기념하는 벽화다. 현재 안필드 지역에는 클롭 시대의 선수들을 포함하여 전설로 여겨지는 선수들의 이런 벽화들이 몇 개 더 있다.
안필드의 지역 주민들과 클럽의 관계는 15년 전, 클럽 홈구장의 잔류나 이전이냐에 대한 불확실성이 남아있던 때보다 더 좋아졌다.
영속성 부족으로 인해 이 지역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클롭의 팀이 한몫을 하며 지금은 안필드 확장으로 분위기가 개선되었다. 그러나 관계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안필드의 시즌 티켓 소지자인 번은 오랫동안 리버풀의 강경파들이 많은 이들에게 적으로 여겨졌지만, 클롭 감독 아래서는 시즌권자들 차원에서 사고방식 변화가 있었다고 말한다.
경기 당일 경기장 주변에는 입장객 수와 반사회적 행동의 증가로 인한 불안감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리버풀 경기에 대한 관심은 렌트형 숙박 옵션과 부동산 수요의 폭발적인 증가로 이어졌다.
번은 안필드 지역의 계단식 빅토리아 주택이 처음 구매하는 주택으로 이상적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리버풀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로 남아있는 이 지역의 경제적 위치는 가족들의 입주가 꺼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번은 클롭이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던 이 지역구의 상황을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세계적인 팀을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이로 인한 이점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벽화를 가리키며 클롭 감독이 샹클리 감독과 가장 가까운 리버풀 감독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디 애슬레틱 - The Real Jurgen Klopp 시리즈
The Real Jurgen Klopp, part.1 - '검은 숲에서 온 평범한 남자'
The Real Jurgen Klopp, part. 2 - '화약통'
첫댓글 4500개의 일자리 창출 ㄷㄷㄷ
클롭의 정치관마저 리버풀이란 도시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다는 게 새삼 기연이 아닌가 싶은…
감독 그 이상의 역할이란 말이 허투루 나오는 게 아니네요.
정말 괜히 샹클리소리 나오는게 아닌거 같아요.
리버풀이 역사적으로 정치얘기를 빼놓을 수 없는 좌파 지역인데, 클롭도 뭐 대놓고 좌파상향을 드러낸 인물이라 현지인들에겐 정말 축구 이상의 존재 아닐까 싶네요. 샹클리도 유명한 사회주의자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