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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6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우크라이나 화물기 그리스 북부 카발라시 인근에 추락해 폭발
2019년 말레이시아 개헌 통해 선거연령과 피선거권 21세에서 18세로 낮춤
2019년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으로 불리는 근로기준법 개정안 시행
2015년 대법원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대선개입사건 전원찬성으로 파기환송
2013년 검찰 16년간 추징금미납 전두환 사저 압류, 일가 회사 사무실 주거지 17곳 전격압수수색
2005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李玖)씨 사망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인 이구(李玖·1931~2005년)씨가 16일 일본의 한 호텔에서 사망, 유해가 20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조국의 품에 안겼다.
그는 조선 황실의 마지막 황세손(고종의 손자)이며, 영친왕(1897~1970)과 일본 왕족 이방자(1901~1989) 여사의 아들이다. 향년 74세. 도쿄 한복판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영친왕 궁터로 태어난 곳) 19층, 조그만 방(싱글룸)에서 나라 잃은 황실 후손의 슬픈 운명을 지켜보는 이도 없이 홀로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19일에야 우리 나라에 알려졌다.
이 씨의 사망으로 조선의 마지막 적통(嫡統)이 끊어졌다.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로 즉위했던 고종의 후손으로는 의친왕의 후손들만 남게 됐다.
일본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은 그는 14살 때 광복을 맞았지만 미국의 도움으로 유학길에 올라 MIT공대를 졸업하고 건축 사무실에서 만난 줄리아 여사와 결혼한다. 1963년 귀국했었지만,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하는 일마다 실패했고 “자손이 없다.”는 이유로 줄리아 여사와도 이혼해야 했다.
2003년 이두로 쓴 최고의 백제 시가(詩歌) 발견
지난 2000년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군(古墳群) 옆에서 출토된 목간(木簡)의 내용이 현전 최고(最古)의 백제 시가(詩歌)인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시립대 김영욱(金永旭·국어학) 교수는 16일 “현재 부여박물관에 소장 중인 목간(길이 12.7㎝)의 ‘숙세결업동생일처시비상문상배백래(宿世結業同生一處是非相問上拜白來)’라는 글은 사언사구(四言四句) 형식에 백제인이 이두(吏讀)로 기록한 최고의 시가”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이 같은 사실을 오는 24~25일 일본 도야마(富山)대학에서 열리는 ‘한·일 한자 한문 수용에 관한 국제학술회의’에서 ‘백제의 이두에 대하여’라는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다. 김 교수는 이 시가를 ‘전생(前生)에서 맺은 인연으로/이 세상에 함께 났으니/시비(是非)를 가릴 양이면 서로에게 물어서/공경하고 절한 후에 사뢰러 오십시오’라고 해석했다. 서울대 이종묵(李鍾默·국문학) 교수는 “부부가 함께 부처님 앞에서 죽은 뒤 같은 곳에서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발원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목간은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나무 조각에 문자를 기록한 것. 현재 전하는 백제 시가는 백제 멸망 후 800여년 뒤 조선시대 악학궤범(樂學軌範)에 한글로 기록된 ‘정읍사’(井邑詞)가 유일하다.
2002년 북아일랜드 아일랜드공화군(IRA), 과거 폭력행위 첫 사죄
북아일랜드의 구교(舊敎)측 준(準) 군사조직인 아일랜드공화군(IRA)은 16일 성명을 발표, 지난 30년 동안의 유혈 분쟁에서 자신들의 공격으로 희생당한 민간인들에 대해 사죄한다고 밝혔다. IRA가 공식적으로 사과 성명을 낸 것은 이번이 사상 처음이다.
IRA는 구교측 신문인 ‘안 포블랏트’에 게재한 성명에서 오는 21일이 북아일랜드 유혈분쟁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날 중 하나였던 ‘피의 금요일(Bloody Friday)’ 30주년이 되는 날임을 상기시키고, “이 비극적인 사건의 기념일을 맞아 우리는 우리의 폭력적 행위로 발생한 모든 비(非) 전투원 희생자들의 가족들에게 진심 어린 사과와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피의 금요일’은 1972년 7월 21일 북아일랜드 최대 도시 벨파스트에서 발생한 최악의 유혈사태를 가리키는 말로, IRA가 시내 곳곳에서 20여개의 폭탄을 잇달아 터뜨려 9명이 숨지고 130명이 부상했다.
북아일랜드에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아일랜드와의 통합을 바라는 구교도측과 영국 내 존속을 바라는 신교도측이 1969년 이후 30년 동안 유혈분쟁을 벌여왔다. 모두 3600여명이 숨졌으며, 그 중 구교측인 IRA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절반인 1800명이고 이들 중 650명 가량이 민간인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2001년 자크 로게, IOC 위원장에 선출
자크 로게 EOC(유럽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 2001년 7월 16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12차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의 위원장 선거에서 사마란치 위원장의 뒤를 이을 제8대 위원장에 선출됐다.
김운용 대한체육회장은 끝까지 경합했으나, 사마란치의 지원과 백인 IOC위원들을 등에 업은 로게에게 밀렸다. 로게는 2차 투표에서 과반수인 59표를 얻어 23표의 김 회장과 22표의 딕 파운드를 크게 앞질렀다.
로게가 1991년 IOC에 입성한 지 10년 만에 세계의 ‘스포츠 대통령’이란 대권을 잡은 배경은 유럽 국가들과 사마란치 위원장의 전폭적인 지원이었다. 유럽은 122명의 IOC 위원 중 57명을 차지, 단일 대륙으로는 최대 지분을 지니고 있었다.
로게는 벨기에 NOC 위원장이던 지난 1989년 이들이 모두 포함된 EOC(유럽올림픽위원회) 회장을 맡으면서 유럽 스포츠행정의 간판스타로 활동해 왔다. 이 과정에서 ‘냉혈한’이라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원칙을 고수해 ‘미스터 클린’, ‘IOC의 분쟁해결사’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러나 로게에게 사실상의 ‘양위’를 결심한 사마란치의 입김은 그의 급부상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사마란치는 지난 1995년부터 집중적으로 ‘로게 키우기’에 들어갔다. 그해 2000 시드니 올림픽 조정위원장을 맡았고, 1998년 IOC 집행위원이 되면서 동시에 2004 아테네 올림픽 조정위원장을 맡는 등 요직을 섭렵했다. 정형외과 의사인 로게는 요트선수로 1968년 멕시코시티, 1972년 뮌헨,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2001년 미국 하원의원 8명, 김대중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의 언론자유 억압 우려’ 표명
미국의 여야 하원의원 8명이 16일 김대중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의 언론자유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주미 한국대사관을 거쳐 한국 정부에 전달된 서한에 서명한 의원은 미국공화당 의원 7명과 민주당 의원 1명이다
이들은 서한에서, 한국의 활발한 민주적 절차에 지지를 표시한 뒤, 그러나 언론사 세무조사와 고발 등 일련의 사태가 “다가오는 선거들을 앞두고, 중요한 언론의 자유가 억제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고 지적했다.
의원들은 “우리는 각하가 공개적으로 언론 개혁을 촉구한 이후 몇주일 만에 국세청이 서울에 있는 23개 언론사에 대한 전면적인 세무조사 실시를 발표했음을 알고 있다”면서 “유권자들 사이에서 여당 지지도가 떨어지자, 정부 소유 신문과 언론사들이 독립적인 언론사들을 겨냥하여 반대 운동(campaign)을 펴고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고 말했다.
의원들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 대통령이, 활기찬 인쇄 및 전자매체의 존속을 제지하려는 정부 관계자들에게, 표현의 자유야말로 자유 국민의 초석임을 강조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1999년 탈옥수 신창원, 순천서 검거
탈옥수 신창원이 1999년 7월 16일 2년6개월 만에 전남 순천에서 경찰에 검거됐다. 신창원은 강도-살인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던 부산교도소를 1997년 1월 20일 탈옥한 후 2년6개월간 도피행각을 벌여왔다.
신창원은 이날 오후 가스레인지 후드를 고치러 온 전자제품 수리공의 신고로 검거됐다. 검거당시 신창원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연행에 응했다. 그는 재수감되기 직전 소감을 묻자 “편하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신창원은 1967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 밑에서 자라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신창원의 성격적 특성은 침착성과 순발력이다. 그는 경찰관이 눈 앞에 있어도 당황하지 않고 상대의 허점을 노렸고, 주위에 한패가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는 체력으로도 세상을 놀라게 했다. 도주중이었던 1998년 1월 천안에서 경찰관 2명과 맞닥뜨렸을 때 그는 왼손에 깁스를 하고 오른발은 뼈에 금이 간 상태였음에도 불구, 총든 경찰관을 쓰러뜨리고 달아났다. 그의 이런 괴력은 타고난 체력에, 교도소에서 단련한 근력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그는 야간도주 때 단전호흡으로 체온을 유지했다고 일기에 적었다.
1999년 임창렬 경기도지사, 경기은행으로부터 1억원 받은 혐의로 구속
경기은행의 퇴출 관련 로비 의혹을 수사한 인천지검 특수부는 16일 경기은행측이 임창렬 경기지사와 부인 주혜란씨 이외에도 정치인과 정부고위층 등에 로비를 벌인 혐의를 포착, 이들을 차례로 소환했다.
임 지사는 이날 오후 5시50분쯤 경기은행측으로부터 1억원을 받은 혐의(특가법상알선수재)로 인천구치소에 구속수감됐다.
임 지사는 6·4 지방선거운동기간중이던 작년 5월 초순 서이석 전 경기은행장을 서울 R호텔에서 만나 “은행퇴출을 막아달라”는 부탁을받고, 5월 하순 경기은행 의정부지점 지하주차장에서 현금 1억원을 받은 혐의다. 임 지사는 서씨가 승용차 트렁크에 실은 이 돈을 자택 금고에 보관하면서 선거운동 자금 및 당선 후 판공비로 사용한 뒤 은행퇴출 직후인 같은 해 7월 초 이 은행 상무를 통해 되돌려준 것으로 조사됐다.
임 지사는 “선거자금 명목으로 1억원을 받았으나, 경기은행 퇴출 결정 직후 양심의 스트레스를 받아 되돌려줬을 뿐 대가성은 없었다”고 혐의를 부인했다.
이후, 18일 구속수감된 임창렬 경기지사 부인 주혜란씨가 서이석 전 경기은행장으로부터 퇴출을 막아달라는 청탁을 받고 “정-관계 고위층에 로비를 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밝혀졌다.
1999년 존 F 케네디 2세 비행기 추락사
고 케네디 미 대통령의 외아들 존 F 케네디 2세(38)가 조종하던 경비행기가 1999년 7월 16일 미 매사추세츠주 동부 마사스 비녀드(martha`s vineyard) 해안에서 실종됐다. 사고로 케네디 2세와 부인 캐롤린 베셋(33), 처형 로렌 베셋(34) 등 탑승자 전원이 숨졌다.
케네디 2세는 사촌 결혼식에 가는 길이었다. 케네디 2세의 시신과 사고기 동체는 실종 사흘만에 매사추세츠주 마사스 비녀드섬 남서쪽 12km 해역의 30m 해저에서 발견됐다.
케네디 2세는 케네디 대통령의 외아들이었다. 아버지가 대통령 된지 17일 만에 태어났다. 따라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언제나 관심의 초점이 됐다. 그의 개인사는 케네디가의 저주와 비극으로 점철됐다. 세살때 동생 패트릭이 태어난 지 이틀만에 사망했고, 아버지는 암살됐다. 아버지는 1963년 11월 15일, 그의 세번째 생일날 댈러스에서 흉탄에 쓰러졌다. 관에 실린 아버지를 향해 케네디 2세는 거수경례했다. 미국인의 가슴에 눈물을 새긴 행동이었다.
1998년 미국 하원, 아태소위원회에서 한미관계 50주년 기념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
1997년 헌법재판소 동성동본금혼규정 헌법불합치 판정,
1997년 북한 도발에 의한 DMZ 교전
1997년 7월16일 오전 10시50분 강원도 철원군 육군 백골부대 전방 비무장지대에서 북한군 14명이 군사분계선을 70m 넘어 침범, 아군이 경고방송과 함께 경고사격 2백발을 발포한 뒤 북한군이 곡사화기(박격포 추정) 등으로 맞대응해 23분여간 양쪽 전방초소(GP)간에 사격전이 일어났다.
남북한군간에 포사격을 주고받는 교전이 벌어진 것은 70년대초 이후 처음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아군이 북한군을 향해 경고사격 2백발을 발포하자 북한군 초소 2곳에서 우리측을 향해 소총과 기관총 70∼80발을 조준사격해와 우리측이 캘리버50 기관총 70여발을 대응사격했다”고 밝혔다. 이어 북한군은 비반충포(무반동총) 2발을 발사한데 이어 곡사화기 10여발을 잇따라 발포했다. 우리측은 이에 맞서 기관총과 57㎜무반동총 한발로 맞대응했다.
국방부는 “이번 교전으로 우리측은 인명피해 없이 지하벙커 입구와 관측기 등만 파손됐으나, 북한군측은 낮 12시를 넘어 앰뷸런스 1대가 북한군 초소로 들어가는 것이 목격돼 인명피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한편 북한은 이날 오후 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을 통해 “인민군인들이 순찰근무중 괴뢰군의 총포 사격으로 심한 부상을 당했으며, 초소건물들이 파괴됐다”고 주장했다.
1991년 경기도 구리 수택동서 하수도 맨홀 폭발 주민 수백 명 대피소동
1990년 필리핀 마닐라와 루손 지역 진도 7.7 지진 사망실종 2,640명 부상 3천여명 이재민 100만 명
1989년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사망
지휘의 ‘마술사’ ‘황제’ ‘제왕’ ‘천재’라는 칭호를 들을 만큼 유럽 악단의 ‘신화적인 존재’였던 카라얀은 생전에 솔로몬의 영화못지 않은 ‘음악적 영광’을 누렸다. 그는 ‘현미경과 같은 예리한 귀, 뛰어난 음악적 감식안, 지칠줄 모르는 음악에의 정열’로 20세기 음악사에 찬연한 금자탑을 세워놓았다. 생전의 카라얀은 1백50곡이 넘는 레퍼토리를 연주 해석했고, 7백장에 가까운 디스크를 냈다. 그의 디스크는 전세계적으로 2억장 이상이나 팔렸다.
1908년 그리스계 아버지와 체코 출생의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카라얀은 3세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한 ‘신동’으로 비교적 순탄한 ‘음악인생’을 걸었다. 그는 폭넓은 레퍼터리와 정력적인 활동은 물론 사회적인 주목을 끄는 언동으로 유명했다.
세계정상급의 지휘자였던 카라얀은 베를린, 잘츠부르크, 빈에서 음악적 성공을 거두고 1955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종신 지휘자에 임명됐다. 그 뒤 세계 각지의 오페라극장과 오케스트라에 객원 또는 예술감독을 겸임했으며, 1969년 카라얀 지휘자 콩쿠르를 창시해서 후진양성에도 주력했다. 그는 완성을 위한 노력에 독특한 영감을 연결하여 감동적인 음감을 창조했다.
1986년 검찰,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수사결과 발표
1985년 독일 소설가 하인리히 뵐 사망
1985년 화가 최욱경(45세) 음주 후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사망,
1983년 문공부, 민족문화위인 57명 선정
1981년 미국, 핵확산금지지침 발표
1981년 조치훈 명인, 일본 본인방 획득
1980년 중국 혁명위 폐지하고 민선 인민정부로 대체
1979년 후세인 빈 온 말레이지아 수상 내한
1979년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에 취임
1978년 제4회 주요선진국 정상회담 개최(서독 본)
1975년 방위세법 공포
1974년 비상군법회의 윤보선 전 대통령을 민청학련 관련혐의로 기소
1973년 제주도 곽지리에서 신석기 시대인의 거주유적 패총 발견
1971년 `다리`誌 필화사건 무죄판결
1971년 7월16일, 월간 `다리`지(誌) 필화사건에 연루된 윤형두(주간)ㆍ윤재식(발행인)ㆍ임중빈(평론가)에 대해 법원이 무죄판결을 내렸다. 임중빈의 논문이 반공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판시였다.
검찰은 임중빈이 다리지 1970년 11월호에 쓴 논문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 반공법에 위반된다며 2월12일에 세 사람을 구속했었다.
다리는 당시의 대표적 정론지 `사상계` 폐간 직후인 1970년 9월에 창간돼 우리 사회의 여론을 주도했던 종합시사지였다. 박정권의 서슬에 눌려 인쇄소를 무려 20여차례나 바꾸는 등 온갖 시련을 겪었지만 창간된 지 얼마되지 않아 발행부수가 6만부를 넘길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김지하의 풍자시와 희곡이 실렸고 한승헌ㆍ김동길씨 등 쟁쟁한 논객들이 참여해 지식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필화사건은 이후 몇번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974년 5월, 대법원의 무죄원심 판결을 받아냈다.
1969년 최초로 달에 착륙한 미국 우주선 아폴로 11호 발사
1967년 뉴욕에서 흑인폭동 사망 20명 부상 1천명
1965년 한강 범람위기 위험수위 돌파. 중부지방에 폭우 사망 20명, 이재민 6만여명
1965년 소련, 중량 12.2톤의 세계최대 우주관측용 로케트 `프론트1호` 발사
1965년 프랑스-이탈리아 간 몽블랑터널 개통(11.6km)
1965년 7월 16일 프랑스와 이탈리아간의 당시로서는 세계최대의 자동차전용 터널인 몽블랑터널이 개통됐다. 드골 프랑스 대통령과 사라가트 이탈리아 대통령이 이날 알프스의 몽블랑 산밑을 뚫은 길이 11.6km의 세계최장의 터널 개통식에 참석했다.
터널은 1870년 프랑스인 G.드레피네가 제안했다. 유럽최고의 산인 해발 4,807m의 몽블랑 산밑을 꿰뚫은 이 터널은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4년간의 세월에 걸쳐 완성한 것인데 이 위험한 공사로 21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으며 기술상의 곤란과 수주일간 계속된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예정보다 1년반이나 늦게 공사가 끝났다.
이 터널의 개통으로 200km의 거리를 단축했으며 샤모니와 쿠르메이어 사이를 종전에는 반나절에 걸쳐 달렸으나 불과 15분에 달릴 수 있게 되었다. 터널의 개통으로 이지역은 유럽에서 주목받게 되었고 경제적, 정치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몽블랑터널은 1978년 오스트리아 서부 알베르크 도로터널(길이 약 14km)이 개통될 때까지 세계 최장 터널로 기록되었다
1956년 국회, 유엔가입 국민운동 전개에 관한 결의안 채택
1952년 한국전서 미군 손해 11만2천843명이라고 미국무성 발표
1950년 정부, 대전에서 대구로 이전
1948년 국회, 정부조직법안 통과
1945년 뉴멕시코 사막서 원자폭탄 첫 실험
1945년 미국 최초의 원폭실험 성공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30분 미국 뉴멕시코주 앨러모고도 북쪽 사막에서 인류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했다. 미국정부가 2차대전중 비밀리에 추진한 암호명 `맨해튼계획`의 결실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독일이 원자폭탄을 먼저 개발할 것을 우려한 아인슈타인이 1939년 8월 미국 과학자 질라드와 위그너의 권유로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개발촉구 편지가 발단이 됐다.
1942년 9월 로스알라모스 국립연구소 오펜하이머와 시카고대의 엔리코 페르미를 중심으로 원폭개발을 위한 연구실-실험실-제조실이 건설됐으며 1943년에는 영국 리버풀대의 핵물리학연구소장 조셉 롯블랫 박사팀도 합류했다.
이 프로젝트로 제조된 무게 4,082Kg, 길이 3m, 지름 0.72m, 위력 TNT 1만5천톤의 일명 `리틀보이`와 `팻맨`으로 불리는 2개 원자폭탄은 다음달인 8월 6일과 9일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각각 투하돼 한 순간에 모두 20여만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두 도시를 거의 초토화시켰다.
1944년 일본의 사이판섬 수비대 전멸
1941년 조 디마지오 56경기 연속안타
5월15일의 그의 안타를 주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41년 7월1일, 미국 프로야구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졌다. 디마지오가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대(對) 레드삭스전(戰)에서 홈런으로 45경기 연속안타 기록을 수립한 것이다. 1897년에 윌리 킬러가 세운 44경기 연속안타 기록을 45년 만에 갈아치운 순간이었다.
7월17일 미국인들은 여전히 새로운 기록에 목말라했다. 그러나 무안타였다. 하루 전인 16일에 수립한 56경기 연속안타에 만족해야했지만 6만7000명의 관중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 해 디마지오는 타율을 4할8리로 끌어올리며 타점왕과 MVP까지 거머쥐었다. 양키스가 월드시리즈를 제패했음은 물론이다.
1937년 임시정부 군사위원회 설치
1925년 을축년 대홍수(-7.20) 사망 실종 517명
1919년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출생
1918년 러시아 마지막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 처형
1894년 26세의 나이로 로마노프 왕조 제18대 황제가 된 니콜라이2세가 1917년 3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흐느낄 겨를도 없이 왕관을 빼앗겼다. 니콜라이2세는 그 후 우랄산맥 중턱에 있는 예카테린부르크(구 스베르들로프스크)의 한 외딴집에서 유폐(幽閉)생활을 했다.
그러던 1918년 7월 16일 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왕비 그리고 4명의 딸과 14세인 알렉세이 황태자가 억류됐던 집의 지하실로 끌려갔다. 가족 모두는 어떤 의구심도 품지 않고 이에 따랐다. 그런데 지하실에는 볼셰비키 총살대가 로마노프 왕가를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얼마간의 총격 세례 후 방안이 화약 연기로 자욱해졌다.
이로써 3세기 동안에 걸친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가 종말을 고했다. 그의 유골은 1989년 4월 한 희곡작가에 의해 발견되기까지 70여년 동안 인근 개천가 진흙탕속에 그대로 내버려져왔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아들이었던 니콜라이 2세는 신생 볼셰비키 정권의 정통성에 가장 위험스런 존재였다. 1894년에서 1917년까지 집권하면서 정치적으로는 서유럽식 입헌정치의 도입을 반대하고 보수적인 전제정치를 고집했던 그였지만, 개혁과 평화를 갈망하는 그의 조국의 뜻을 탄압할 만큼 그리 강력한 제왕은 못됐다.
1916년 러시아의 동물학자, 미생물학자 메치니코프 사망
1913년 중국 안휘성 독립선언 이후 각성(各省) 독립선언
1908년 홍삼전매법, 인삼세법 반포
1900년 레닌, 러시아 탈출해 스위스 망명
1896년 프랑스 작가 에드몽 콩쿠르(콩쿠르형제중 형) 사망
1877년 미국 철도 스트라이크를 군대동원 진압
1872년 세계최초로 남극 탐험한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센 출생
1903년 자석 상 북극 발견 1911년 12월 영국의 스콧보다 35일 먼저 남극점에 도달 1928년 북극 비행 중 조난된 노빌레 구하러 간 뒤 행방불명
622년 마호메트의 헤지라 (聖遷) - 이슬람교의 기원 원년
622년 7월 16일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고향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이주했다. 이것이 이슬람력의 기원이 되는 `헤지라`이다. 헤지라는 아랍어로 `이주` `이탈`을 뜻으로 쓰인다. 중국사람들은 헤지라를 성천(聖遷)으로 번역했다.
마호메트는 고향 메카에서 쿠라이시족의 박해를 받아 오던 중 이날 메디나의 한 유력자에게 초빙돼 소수의 신도를 이끌고 메디나로 이주했다.
마호메트는 헤지라 이후, 메디나 사회를 이슬람교도의 사회로 통합하고, 메카를 비롯하여 주변의 아랍과 유대교도들을 정복하여 이슬람 교단국가를 건설했다. 이같이 헤지라는 이슬람 발전의 전환점이 되었기 때문에 후에 이 헤지라의 해를 이슬람력의 기원으로 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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