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nytimes.com/athletic/5476903/2024/05/21/arne-slot-liverpool-manager-background/
by 사이먼 휴즈
11년 전 여름, 리버풀의 새로운 감독이 된 아르네 슬롯의 선수 생활이 끝났을 때, 그는 네덜란드 1부 리그에서 비교적 덜 유명한 클럽 중 하나인 PEC 즈볼러의 이사진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자신이 가능한 한 최고 수준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대신 14세 이하 팀에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막스 리플랑을 비롯해 그가 물려받은 축구선수들은 그를 FIFA 비디오 게임에 등장하는 선수로만 알고 있었다.
이제 23살이 된 리플랑은 이렇게 그를 회상한다. "처음 시작부터 그는 참… 어떻게 그걸 침착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일단, 우리가 경기장으로 가면, 그는 우리가 모든 것을 잘 해내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실수를 한다면, 우리는 첫 훈련부터 마지막 훈련까지 그 얘기를 계속 들었죠."
"만약 누군가 나쁜 볼 하나를 찬다면, 그는 세션을 중단하고 '다음은 좋아야 한다'라고 말할 겁니다. 그럼 생각하게 되죠. '침착하자, 나쁜 볼 하나였어, 그냥 실수 하나였을 뿐이야...' 그리고 나이가 들고 나서야 비로소 이런 것들이 기준이고, 코치님께서 정말 좋은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슬롯의 부임 이전과 이후 몇 달 동안, 리플랑의 표현대로 즈볼러의 성적은 아약스와 AZ 알크마르에게 각각 9-1, 6-0로 패한 것을 포함해 "매우, 매우 나쁜"상황에 처해있었다. 비록 그것이 슬롯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한동안 리플랑에게 즈볼러의 14세 이하 팀은 "내가 뛰었던 팀 중 최악"이라는 기억으로 남았다. 그 팀은 슬롯이 부임하기 전부터 산산조각이 나있었고 리플랑은 새로 계약된 9명 중 하나였다.
슬롯이 부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첫 시즌 전반기에 즈볼러의 14세 이하 팀 선수들은 단 한 번 경기를 이겼다.
"하지만 그때부터 우리는 이기기 시작했습니다. 또 이기고, 또 이기고 그리고 또 이겼죠. 갑자기 다들 우리에 대한 얘기를 하더군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 선수들은 진짜 별론데...'라면서요. 차이점은 아르네 슬롯이었습니다. 믿을 수 없었죠."
즈볼러의 선수들은 매일 아침 8시 30분부터 10시까지 1시간 30분 동안 훈련했다. 그 후 그들은 즈볼러의 훈련장 길 건너에 있는 스포츠 & 교육 센터에 위치한 학교로 갔다. 슬롯 아래에서는, 보통 오후 3시부터 그날 오전에 있었던 훈련 세션에 대한 분석이 추가로 있었다.
그러한 반성적인 행동은 처음에 리플랑과 그의 어린 팀 동료들에게 이질적이었지만, 슬롯은 그것을 필수적인 요소로 보았다. 이후 페예노르트에서, 그는 구단에 비디오 분석이 생긴 지 8년 만에 처음으로 세션을 촬영하는 드론 조종사와 직접 소통하는 최초의 사령탑이 되었다. 로테르담에서는 슬롯의 지시에 따라 모든 것이 기록되었다.
리플랑은 말한다. "아르네 이전, 즈볼러에서는 비디오 작업이 없었습니다. 전 그런 걸 본 적이 없어요. 모두에게 그것은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왜 이래야 하는 거야?'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이상했어요. 하지만 결과를 보고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리플랑은 슬롯의 팀에서 주장이 되었다. 그리고 중앙 수비수로서 예상할 수 없었던 지시가 내려졌다. "보통 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지키라는 요구를 받지만, 아르네는 제가 공을 가지고 앞으로 드리블하기를 원했습니다. 공격수가 다가오자마자 공을 드리블하고 움직이면서 또 다른 각도를 만들어내야 했죠. 그는 당신이 상대의 압박을 유도하기를 원했는데, 그러한 유도는 상대 선수를 포지션에서 끌어내고, 우리가 플레이를 이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줬기 때문입니다."
"그는 항상 '공을 뒤로 빼지 말고 항상 앞으로 나가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모든 세션이 경쟁적이었죠. 그것은 게임 내에서 3 대 3, 3 대 2, 2 대 2로 진행되었습니다. 모든 훈련 세션이 공을 소유한 상황에 기반해 있었어요. 그는 선수들이 강렬함과 더불어 상대의 압박을 느끼기를 원했습니다."
전통적인 네덜란드 방식과 같이, 즈볼러의 14세 이하 팀은 보통 4-3-3 포메이션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슬롯은 "항상 중원에 4번째 선수를 원했다." 이렇게 되면 오른쪽 수비수나 오른쪽 중앙 수비수가 경기장 한가운데로 끌어올려지게 되었다. 리플랑은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엘리트 클럽들의 오른쪽 수비수는 보통 높고 넓게 뛰었지만, 아르네는 다른 코치들보다 생각이 앞섰습니다."
리플랑은 슬롯이 원하는 것을 빠르게 이해하게 되었지만, 다른 소년들은 그것을 더 어려워했다. "그의 수준은 우리가 가진 선수들에 비해 너무 높았습니다. 일부 선수들은 그가 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죠. 그는 그러한 지점에 힘들었을 거예요. 그는 기본적으로 유소년 시스템도 1군만큼이나 전문적으로 훈련하기를 원했거든요."
하지만 즈볼러의 10대들은 슬롯에게 축구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리플랑이 말했다. "학교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학교에서 잘 못한다면 훈련할 수 없었어요. 어떤 한 세션에서, 우리는 단지 8명의 선수들만 경기장에 있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소년들이 학교에서 잘 못했기 때문이었죠. 그런 상황도 아르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규율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는 그 선수들 중 많은 수가 축구선수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교육을 열심히 받아야만 했습니다."
리플랑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선수는 '상당히 뚱뚱했다'고 한다. 슬롯은 각 훈련 세션 전에 운동장을 돌라고 지시함으로써 그가 몇 파운드를 뺄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매주 금요일, 선수들은 계체량을 했고, 만약 누군가가 그 이전 주보다 더 무거워졌다면, 그들은 주말에 경기를 할 수 없었다. 리플랑이 말하길, 슬롯이 클럽을 떠난 후 그 "뚱뚱했던" 선수의 체중은 더 늘어났고, 결국 그 선수는 축구계를 떠났다고 한다.
고 어헤드 이글스에 입단하기 전, 19살까지 즈볼러에 머물렀던 리플랑은 슬롯을 통해 자신도 코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나중에 베르쿰의 유스 팀에서 9세 이하 선수들을 맡았는데, 그곳에서 그가 맡은 선수들 중 한 명이 슬롯의 아들인 유프(Juup)였다. 이러한 인연에 의해 당시 즈볼러를 떠나 처음 1군 수석 코치를 맡았던 캄뷔르를 거쳐, AZ로 향하기까지, 슬롯은 리플랑의 보조적인 도움을 받았다.
리플랑은 현재 위트레흐트에서 스포츠 교사로 일하고 있으며, VVOG 하더베이크 소속으로 네덜란드 3부 리그에서 파트타임으로 뛰고 있다. 그리고 그는 그 팀에서 10번으로 전향했다.
"제가 14살 때, 아버지는 '아르네의 말을 잘 들어라, 그는 정말 좋은 코치다.'라고 말씀하시곤 했고, 저는 '아니, 좋은 다른 트레이너들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답하곤 했습니다. 이제는 제가 아주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는 최고였습니다."
"그가 캄뷔르로 건너간 후, 저는 '아르네 감독님, 제발 돌아와요…'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오랜 프로 경력을 가진 다른 코치들이 있었지만요. 그들은 프로에서 500경기 넘게 출장해 본 사람들이었지만 아르네가 그들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차이가 엄청 컸죠."
네덜란드에서 슬롯은 로테르담과 연관된 인물이다. 2023년 에레디비시 타이틀을 들어올린 페예노르트에서의 업적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코치 생활을 시작하고 선수로서 두 번의 기간에 걸쳐 경력을 쌓은 곳은 즈볼러다. 그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딸이 여전히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얀 에버세는 슬롯이 18살의 나이로 클럽에 데뷔한 후인 1996년에 즈볼러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1975년 네덜란드 국가대표로 두 번 출전한 경력이 있는 에버세는 로테르담에서 태어나 페예노르트에서 뛰다가 가장 큰 라이벌인 아약스로 이적하는 과감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약스에서 그는 전설적인 마르코 반 바스텐이 커리어를 망쳤던 바로 그 발목 부상과 같은 부상을 당해 26세의 나이에 은퇴해야 했다.
부상 때문에 그는 코치를 해야만 했다. 에버세는 포지션 플레이에 대한 반복적인 세션을 효과적으로 구사했던 아약스에서의 그의 스승 토미슬라브 이비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6년 후, 에버세는 즈볼러에 부임했고, 슬롯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경기에 대한 좋은 시야를 가지고 있던 기술적인 선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주변을 파악하고 있었죠."
에버세는 덧붙였다. "그는 항상 자신의 자질을 확신했습니다. 그는 결코 의심하지 않았죠.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수가 자기 자신을 믿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버세가 부임하기 이전, 슬롯의 프로 데뷔는 네덜란드 2부 리그에서 15위로 시즌을 마감한 팀에서 이루어졌다. 에버세는 말한다. "그들은 쓰레기였습니다. 하는 축구가 너무 형편없었죠."
슬롯이 프리시즌에서 부상을 입자, 코치는 그 없이 시즌을 계획해야 했다. 에버세는 이렇게 설명했다. "아르네는 본인이 왜 경기를 뛸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다시 건강해지면 팀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어요."
슬롯이 즈볼러의 선발 베스트 XI에 들어오는 데에는 18개월이 걸렸다.
"때때로 그는 20분 또는 30분 정도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는 왜 자신이 경기를 뛰지 못하는지 매우 궁금해했죠. 저는 그에게 '아르네, 너는 내가 가진 최고의 선수다. 그런데 문제는 경기를 할 때마다 상대도 상대팀 최고의 선수라는 것이다. 난 그럴 여유가 없어. 우리가 공을 잃었을 때,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공이 있을 때의 우리 자질에만 의존할 수 없어. 그런 건 현대 축구에서 충분하지 않다.'"
"'너는 더 많은 것을 해내야 한다. 넌 공을 보고 압박을 해야하고. 수비를 해야 해. 공격도 하면서 말이다. 넌 패스를 아주 잘하지만 경기에서 공을 15번만 건드리는 선수는 우리 팀에 있어 가치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로버트 매스칸트는 에버세의 수석 코치였다. 슬롯은 그에게도 찾아가서 왜 그가 원하는 만큼 뛸 수 없느냐고 물었고, 매스칸트도 같은 메시지를 주곤 했다. 이러한 대화는 여러 번 이루어졌다.
슬롯은 꾸준히 이해해내기 시작했다. 에버세는 그가 단거리를 더 자주 질주하기를 원했다. 그는 이러한 유형의 플레이가 게임당 60개에 달하는 더 많은 터치를 가져올 것이라고 계산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득점하고 팀 동료들을 도울 가능성을 높일 것이었다. 에버세는 4-3-3(그가 가장 선호하는)과 4-2-3-1을 번갈아 사용했다. 슬롯은 8번 또는 10번에 가장 적합한 선수였다.
"제 목표는 삼각형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4-3-3을 제대로만 사용한다면 선수들 간의 거리가 더 좁아지기 때문에, 최고의 찬스를 만들 수 있었죠. 이 전형에서는 패스를 만들기 쉬웠고, 아르네는 훌륭한 패서였습니다."
에버세는 그의 경기로부터 변화를 본 것을 기억하고, 마침내 그가 팀에서 주전으로 뛸 것이라고 말했던 날을 기억한다. "저는 그에게 말했죠. '내일이다. 아르네, 네가 선발로 나선다. 그리고 나는 네가 잘 뛸 것이라고 확신한다. 넌 이제 내가 원하는 선수다. 넌 핏을 갖췄어. 충분히 공격적이다.'"
"저는 러닝 코치는 아니지만 때로는 공에 압박을 가하고 공간을 만들기 위해 뛰어야 하죠. 마침내 아르네가 뛰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1년 안에 아르네가 에레디비시에서 뛸 것이라고 믿었고, 그는 후에 NAC 브레다로 이적했기 때문에 제가 옳았죠."
에버세가 즈볼러를 떠나 스파르타 로테르담으로 부임한 후에 슬롯의 이적이 일어났다. 10년 후, 에버세가 즈볼러 감독으로 복귀하고 슬롯이 임대로 다시 즈볼러로 합류한 후, 두 사람은 짧은 기간 다시 함께 일할 수 있었다.
그들 둘과 모두 잘 아는 저널리스트로 일하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는 에버세가 슬롯의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에버세는 슬롯이 페예노르트에서 해낸 것을 두고, "아약스의 축구를 노동자들의 도시인 로테르담으로 가져왔다."라고 믿는다. 즉, 그가 말하는 것은 기술적이면서도 신체적이며 전문성에 의해 지배되는 스타일이다.
에버세는 말한다. "그는 자신의 축구를 요구하며 페예노르트의 정신을 변화시켰습니다. 아르네는 저보다 팀의 감정을 잘 관리해요. 어쩌면 제가 너무 비판적이고 냉소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르네는 외교관입니다. 그는 아주 똑똑하죠. 그는 항상 처음에 10을 셉니다. 그는 마치 성직자 같습니다."
슬롯은 즈볼러 동쪽으로 40분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 베르겐트하임에서 자랐다. 베르겐트하임은 독일의 국토를 네덜란드가 둘러쌓고 있는 국경의 중앙에 있는 농지대다.
낮에는 30분마다 교회의 종소리가 울리고, 가족들은 침실에 성모 마리아의 작은 그림을 걸어두는 것이 일반적인 동네다.
보수적이고 종교적이고 냉철하며, 유일하게 있는 카페는 문을 여는 것보다 더 자주 문을 닫고, 바깥 외진 곳에 위치하고, 아무도 그곳에 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 곳이다.
"저는 아르네를 만나기 전까진 베르겐트하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고향이 독일과의 국경 근처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르네는 독일인이 아니죠. 그는 매우 네덜란드인입니다."라고 에버세는 말한다.
마찬가지로, 리플링도 디 애슬레틱이 베르겐트하임을 방문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미소를 지었다. "저는 축구 경기를 하기 위해 딱 한 번 거기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 경기 전에는 그 장소가 있는지조차 몰랐어요."
베르겐트하임 주민들이 주로 저렴하게 가스를 얻기 위해 방문하는 가장 가까운 독일의 이터벡 마을에서는 아무도 아르네 슬롯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베르겐트하임에서는 그가 아주 유명인사인 것은 아니지만 그 반대다.
베르겐트하임의 정육점 주인인 로엘 부어트링크는 더치 햄과 마카로니 치즈를 가게 카운터에 올려진 스틸 통에 섞으면서 그에 대해 말한다. "아주 좋은 사람이에요. 그는 이따금씩 돌아오곤 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그에게 집중하지 않아요,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여기 사람들은 겸손합니다. 그 또한 두 발을 땅에 대고 서 있죠. 우리는 여기 정육점에서 몇 마디를 나누곤 해요. 학교장인 그의 아버지는 항상 그의 트레이너였습니다. 그는 축구를 하며 자랐고요. 그는 축구 선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훈련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는 매우 의욕적이었죠. 그가 창문을 지나 거리를 뛰어다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어떻게 축구가 돌아가는지 알고 있었어요."
스포츠를 좋아하는 가정에서 태어난 세 형제들 중 막내였던 슬롯은 테니스도 쳤다. 즈볼러에 입단하기 이전, 그는 운하 건너편 마을 교외에 인상적인 시설을 가지고 있는 아마추어 축구 클럽 VV 베르겐트하임에서 뛰었다. 오래된 스탠드가 있는 잔디 구장이 있고, 4G 구역에는 "초록색의 괴물들! 초록색의 자존심!"이라는 메시지가 그려져 있는 배너가 깃대에 고정되어 있다.
그곳은 너무 작고 조용해서 하루 중 다른 시간대를 구분할 수 있는 요소가 거의 없을 정도다. 슬롯을 더 잘 아는 사람들에 따르면, 그는 벨기에 국경과 가까운 브레다로 이사한 후 더 버건디 색상(* 브레다는 붉은 머리 축제로 유명)을 띄는 삶의 방식을 배울 것이라고 한다.
에버세는 덧붙였다. "그는 작은 마을에서 온 남자같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큰 생각을 합니다."
에버세는 그가 리버풀을 이끌고 위르겐 클롭과 같이 인기 있는 사람의 뒤를 잇는 것을 즐길 것이며, 슬롯이 성공할 것이라고 "99.9%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아르네는 클롭과 몇 가지 세부 사항을 공유합니다. 특히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시골 남자들은 도시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클롭은 도르트문트에서, 아르네는 로테르담에서 그랬죠. 리버풀과 비슷한 노동자 계급의 도시에서 그렇게 해왔습니다."
첫댓글 https://cafe.daum.net/liverpoolfc/JxsZ/60102
클롭이 자라온 지역과 비교해봐도 재밌는 것 같네요.
그나저나 즈볼러 14세 팀을 지도하던게 2013년 즈음인데 그 시절에, 첫 지도자 커리어부터 유소년 팀을 대상으로 변형 3백을 구사해왔다는건 놀랍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