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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북 신광수가 고문헌(石北申光洙家古文獻)』에 관한 이야기
[연재]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61)
애서운동가(愛書運動家) 백민 이양재(白民 李亮載)
필자는 1982년부터 ‘KBS한국방송사업단’의 문화재 관련 기획전에 자문하거나 참여한 바 있고, 이후 2000년 초까지 내가 발견한 상당수의 문화재와 역사적 사실은 KBS, 서울신문, 세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등등의 여러 언론에 수십 차 보도된 바 있다.
1975년부터 고서를 수집하던 나는 1980년대 초반부터 해외의 여러 고서점과 ‘앤틱 북 페어(Antic Book-Fair, 고서전)’를 둘러보면서 미적 감각이 뛰어난 미본(美本)에 큰 충격을 받았고, 미본과 미술품을 동급(同級)으로 보게 되었다. 1991년 4월경에 나는 한국 최초의 크루즈 전문 여행사를 정리하면서 거의 동시에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고서점 겸 갤러리를 한때 개설한 바 있다.
1. 『석북 신광수가 고문헌』을 입수하다
당시 내가 개설한 갤러리는 서양의 미서와 한국 관련 서양고서, 조선의 고판화본 등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것을 사업 목적으로 하였다. 그렇지만 내가 수집하여 소장하고 있는 불서(佛書) 소장품을 가지고 기획전 ‘한국불서일천년전’을 열기도 하였다.
그 사업을 시작한 1991년 4월 이후 9월에 나는 의성 허준(許浚, 1539~1615) 선생의 묘소를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129에서 발견(9월 27일)하여 화제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나에 관한 보도를 눈여겨본 신 모씨가 1991년에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자신을 석북 신광수(申光洙, 1712~1775)의 후손으로 소개하며, 가지고 온 『고령신씨세보(어성보)』 3권2책을 꺼냈다. 그는 내게 그 족보를 가지고 “통문관을 다녀왔는데, 통문관에서는 호가가 맞지를 않았다”라고 말한다. 그 족보에 관한 가격을 대담하는 가운데 그는 성동구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와 줄 것을 요구하였고, 며칠 후에 나는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의 집은 단층 주택이었다.
『고령신씨 석북 신광수가 고문헌』 일부. [사진 제공 – 이양재]
당시 그는 필자에게 몇 점의 골동품과 며칠 전에 본 족보를 포함한 한 무더기의 고서 및 고문서를 내놓았는데, 그 한 무더기에는 『고령신씨세보』 외에도 백두산 기행시문집 『북록』 1책과 제주도 기행시문집 『영주창화시』 1책, 『관서록』 1축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신 모씨는 석북의 『관산융마(關山戎馬)』 원본 1점만은 매도에서 제외하여, 나는 그 한 점을 제외하고 전체를 일괄로 매입하였다.
나는 1970년대 후반부터 우리나라 여러 문중의 초간보(初刊譜)와 재간보(再刊譜)를 집중하여 수집하였기에 내 앞에 있는 한 무더기의 고서 및 고문서를 더 이상 검토할 것 없이 서둘러 일괄 매입하였다.
2. 30년 넘게 지켜오다
여러 달이 지난 후에 나의 갤러리에 대구의 고서점 집문전의 신준식 사장이 왔다. 신준식 사장은 고령신씨이다. 그는 내게서 여와(餘窩) 목만중(睦萬中, 1727~1810)이 남긴 최대 유묵을 보더니, 욕심을 낸다. 자신에게 “목만중의 작품을 찾는 고객이 있다”라며 부득부득 그것을 양도해 달라고 간청한다. 나는 신 사장에게서 1984년경부터 여러 자료를 매입한 바 있어, 결국 그 한 점만은 넘겨주어야 했다.
수년 후 신 사장은 내가 고령신씨 초간보도 매입하여 가지고 있음을 알고는 자신에게 양도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괄 자료라서 족보만 빼 팔 수가 없지 않습니까?”라며 양해를 구했다. 당시 내가 일괄 매입한 자료는 이후 30년간 내 소장품으로 잘 보관되었다.
필자가 『석북 신광수가 고문헌』을 입수한 이후, 이 자료를 연구해 줄 학계의 소장파 학자를 10여 년 전에 수소문하여 한 소장파 학자를 찾았다. 그러나 당시 나는 해외에 자주 나가 있었고, 사업상 여유가 없어 연구비를 주지를 못했으므로, 결과적으로 연구를 돕겠다는 말 만 꺼낸 상태에서 이를 이행하지 못했다. 이에 이 자리를 빌려 그 소장파 학자분에게 “말만 꺼내고 이행하지 못해 미안합니다”라고 공식 사과드린다.
석북 신광수가 자료를 입수하던 당시 30대 중반이던 나는 이제는 60대 후반에 이르렀고, 건강의 악화로 인하여 50대 중반에 쿠싱증후군 치료를 위하여 오른쪽 부신피질 제거 수술을 받았고, 2020년 10월에는 암 수술을, 2021년 1월에는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2020년 암 수술을 앞두고 그해 1월부터 나의 ‘페이스북’에 석북 신광수가의 자료에 관한 소개를 하기 시작하였고, 2021년 11월 27일에는 「서천군에 보내는 공개 항의」를 페북에 게재하였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서천군에 보내는 공개 항의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민중시인 석북 신광수(申光洙)와 신광하(申光河) 신광연(申光淵) 삼형제는 "충청도 한산군 남하면 활동리"에서 태어났고 조상대로부터 후손까지 누대를 그곳에서 살아왔다.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활동리’이다. 이들 고령신씨 가문의 묘소도 그곳 ‘어성산’ 지역에 있다. 찾아보면 생가터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서천군은 석북 신광수 삼형제의 문학을 기리는 기념관을 착안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아쉽게도 석북 신광수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그들의 자손으로는 현대의 유명한 시인 신석초(申石艸, 1909~1975)가 있다. 그의 본명은 신응식(申應植)으로 신긍우(申肯雨)의 아들이다. 그의 문학관도 필요한 시인이다.
신광수 삼 형제와 신석초가 아까울 따름이다. 서천의 문인들은, 서천의 문화예술인들은 잠들어 있는가? 인제 그만 잠에서 깨어나라.
이 내용은 서천이 고향인 친지 백병훈 박사에 의하여 서천 출신의 여러 사람에게 퍼져나가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나 그저 하나의 메아리(울림)에 그쳤다.
3. 석북 신광수 문학관을 제안하다
필자는 이에서 더 나아가 2022년 5월부터 인터넷 통일뉴스에 1년간 연재하였던 『이양재의 ‘문화 제주, 문화 KOREA’를 위하여‘(7)』에서는 「석북 신광수 문학관’을 위하여」를 기고하였다(2022년 6월 17일 자).
석북 신광수는 신호(申澔, 1687~1767)의 자녀 네 남매(四男妹) 중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즉 석북 신광수와 기록 신광연(申光淵, 1715~1778), 진택 신광하(申光河, 1729~1796), 부용당 신씨(芙蓉堂 申氏, 1732~1791) 등 네 남매다. 이들 네 남매의 고향은 “충청도 한산군 남하면 활동리”인데 조상대로부터 근래의 후손까지 누대를 그곳에서 살아왔다. 이들 네 남매와 후손의 문장 활동이 대대로 활발하여 그들의 고향 일대는 숭문동(崇文洞)으로 불리기도 했다. 석북의 후손으로 현대의 유명 시인으로는 석초(石艸) 신응식(申應植, 1909~1975)이 있다.
필자는 2022년 6월 17일 자로 통일뉴스에 기고한 위의 글에서 “필자에게는 석북의 선대(先代)를 포함하여 20세기 초까지의 석북 집안의 10대에 이르는 자료가 60여 점 이상이 있고, 그리고 마침 조선시대 여러 문인의 자필 시문 유묵과 제주도 관련 고문헌을 상당수 소장하고 있어, 박물관을 개관하는데 필요한 법에서 정한 유물의 최저 수량 100점을 충족하고 상회하여, ‘석북 신광수 기념관’을 세우는데 자료 부족의 어려움은 없다. 여기에 신석초 자료를 일부라도 수집하여 포함하면 된다.”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 60여 점은 어림잡아 추산한 수량이었다. 그런데 2023년 1월 26일자로 계수해 보니 후대 자손들의 간찰까지 포함하면 모두 138점이 넘었다.
어떻든 필자는 노쇠해진 상태에서도, 아직도 이 자료를 흩을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사망한다면, 가치도 모르는 가운데 흩어지는 것은 고사하고 쓰레기로 취급받아 없어질 수 있는 것으로 이미 오래전에 판단이 섰고, 2022년에는 『석북 신광수가 고문헌』을 일괄하여 어디엔가 최소 20년간 영구기탁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그 기탁처를 찾기 시작하였다.
이에 처음으로 떠오른 곳이 충남 서천군이다. 7~8년 전에 “서천의 금강 하구에 부동산을 매입하여 석북기념관을 세울까?”를 검토한 적이 있으니, 우선 서천군이 떠 오른 것이다. 이에 11월(2022년)에 서천군청으로 전화하여 김 모 학예관과 통화하게 되었다. “내년 초에 한번 보시러 오십시요”라고 정중히 부탁했더니 부득부득 “금년중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한다. 날짜를 12월 20일로 정했다.
필자는 고령신씨문중에서도 한 분이 오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수소문하니 신왕수 회장이 신경식 선생을 추천한다. 신경식 선생이 12월 20일 오실 것을 약속하셔서 왕복항공을 예약해 드렸다. 그런데 약속을 열흘 정도 앞둔 12월 어느 날 서천군 학예관이 갑자기 전화해 왔다. “연말이 바뻐서 못 갑니다”라고 한다. 나는 “예, 절대로 오지 마십시오. 안 오시는게 제게는 이익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귀측은 볼 이유가 없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서천군에 최소 20년간 영구기탁하는 것은 말도 못 꺼내고 무산한 것이다. 그러나 신경식 선생과 잡은 일정을 취소한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대로 진행했다.
4. 신광수의 제주기행시문집 「탐라록」의 원본 『영주창화시』
인터넷 통일뉴스에 2023년 3월부터 연재하던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산이’(29)』 - 「조선시대 민중시인의 효시 석북 신광수」에서는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 1712~1775)가 1764년에 제주도에 와서 기행한 시문집 『영주창화시(瀛洲唱和詩)』를 상세히 다룬 바 있다((2023년 8월 18일 자).
『영주창화시』의 작품 중 5⸱7언시 「망한라산오체(望漢拏山吳體)」는 제주의 개국신화와 전설을 내용으로 시상을 전개했고, 「토풍(土風)」에서는 제주와 본토가 언어와 풍속이 다름을 나타냈다. 또한 「하포(下浦)」에서는 장수자(長壽者)가 많은 고장임을, 「입도(入島)」에서는 흰 꿩이 나타나면 상서로운 일이 생긴다는 것을, 「삼월십삼일제해(三月十三日祭海)」는 용제(龍祭)를 소개하여 풍속지적(風俗誌的)으로 고찰할 수 있게 하였다.
고체시(古體詩)는 가창할 수 있게 지었는데, 그 중 「한라산가(漢拏山歌)」는 한라산의 위치와 삼신산(三神山)이 일컫는 신화와 전설을, 「제주걸자가(濟州乞者歌)」는 당시 제주인의 비참한 생활상을, 「잠녀가(潛女歌)」는 제주 해녀들의 생활과 관리들의 횡포 등 실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 『영주창화시』에는 조선 본토와는 다른 제주의 여러 가지 특색이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특히 1764년을 전후로 한 조선중기 제주지방의 신화⸱전설⸱언어⸱풍속 등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풍토지 관련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그런데 『석북선생문집』 권지7 「탐라록」에는 도사 박수희(朴壽喜)와 영원 이익(李瀷)의 부화시는 빼고 석북의 시만을 수록함으로 해서 시로서의 대화가 단절된 감이 드는데, 『영주창화시』에는 동행인 박수희와 이익의 부화시(附和詩)가 모두 들어 있다. 이것은 『영주창화시』가 「탐라록」의 원고(原稿)라는 사실을 말하여 준다. 이 책은 제주도로서는 매우 소중한 고문헌 원본일 것이다.
5. 신광하의 백두산기행시문집 「백두록」의 원본 『북록(北錄)』
『북록』의 끝에 쓴 「제진택자백두유록후(題震澤子白頭遊錄後)」의 일부(첫 면과 마지막 면), 허만의 자필이다.
[사진 제공 – 이양재]
인터넷 통일뉴스에 2022년 2월부터 연재하던 『애서운동가 이양재의 ‘국혼의 재발견’ (24)』-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 다룬 고문헌과 근대 문헌」에서는 진택(震澤) 신광하(申光河, 1729~1796)가 1783년에 백두산을 기행한 시문집 『북록(北錄)』을 간략히 소개한 바 있다(2022년 7월 19일 자).
진택 신광하가 백두산을 올랐고, 그 기행문을 남겼다는 사실은 그의 『진택선생문집(震澤先生文集)』이 1985년 9월에 신광수와 신광연, 신광하, 부용당(芙蓉堂) 신씨 등 4남매의 합동 문집인 『숭문연방집(崇文聯芳集)』에 포함 발간함으로써 구체적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신광하의 『북록』은 『진택선생문집』 권지6 「백두록(白頭錄)」에 수록되지 않은 기행문 성격의 「유백두산기(遊白頭山記)」와 제문(祭文) 「제백두산산신문(祭白頭山山神文)」, 「상번암서(上樊巖書)」 등등의 문(文)도 싣고 있고, 한시의 수록 순서도 「백두록」과는 다른 초고의 온건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북록』의 끝에, 1788년(戊申) 원월(元月) 하한(下澣)에 양천(陽川) 허만(許晩) 성보(成甫)가 지은 「제진택자백두유록후(題震澤子白頭遊錄後)」가 4면에 걸쳐 자필로 쓰여 있어 이 『북록』이 『진택선생문집』 권지6 「백두록(白頭錄)」의 원고임을 입증한다.
한편 석북 삼형제의 둘째 신광연과 셋째 신광하는 모두 친자가 없어, 둘째 신광연은 석북의 다섯 아들 가운데 넷째 아들 신석상(申奭相, 1737~1817)을 양자로 입양하고, 셋째 신광하는 석북의 다섯째 아들 신보상(申甫相, 1743~1807)을 양자로 입양한다. 즉 석북의 동생들 후손도 실제로는 석북의 혈통을 이어받은 직계 자손인 셈이다.
1991년 당시에 이 자료를 일괄하여 필자에게 넘겨준 신 모씨에게 “『북록』은 진택의 원고로 보인다”라고 지적하자, 그는 “『북록』을 신광하의 직계 후손에게서 이미 오래전에 양도받은 책이라 그럴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6. 맺음말 : 최근의 이야기
2022년 12월 서천군 접촉을 포기한 필자는 2023년과 2024년에 석북 신광수와 인연이 있는 지자체를 접촉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석북과 인연이 있는 광역지자체는 제주도가 있고, 지방자치체는 그가 한때 현감을 지낸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영월이 있다. 그리고 고령신씨와 연고가 있는 지방자치체는 보한재 신숙주의 묘가 있는 경기도 의정부시와 관향인 경상북도 고령군이 있다.
2022년 대선 이후 2023년과 2024년 각 지방자치체의 문화 예산은 형편없이 깍여 나갔고, 지난해 내가 사는 곳 제주도의 늘공들은 문화협력위원회 구성에서 필자를 배제하여 ‘석북신광수문학관’을 도립 제주문학관 부설기구로 설립하자는 말을 꺼낼 기회조차 없애 버렸다. 의정부시에 건의한 부분은 석북 신광수는 신숙주의 후손이 아니라는 누군가의 말에 묵살되었고, 다른 곳의 지자체장들은 모두 모 당 출신으로 문화에 관심이 없다.
이러한 가운데 2023년 두 곳의 기관에서는 일부만 유상 인수할 의사를 표하여 왔다. 한 곳은 간찰이라든가 고문서를 제외하고 석북 신광수와 그 형제들 관련 문학서 만을, 다른 한쪽 기관에서는 초간 ‘어성보’ 만을 입수하고자 했다. 그러한 의사는 금년에도 계속 타진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필자는 ‘석북신광수문학관’ 설립을 위한 개인적인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여기 `『애서운동가 백민의 신 잡동동산이』에 기록으로 남긴다. 일괄 기탁받아 ‘석북신광수문학관’을 운영할 주체가 없다면 인제 그만 차선책을 찾아야겠다. 4월의 봄도 깊어 간다.
출처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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