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시 ; 2024. 4. 28(주일) - 부활절 다섯째 주일 - (2024년 17주)
제목; “우리가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자!”
성경; 요일 4:7-21 (p.391) (시 22:27-28, 304<404>, 430<456>, 621)
<예배의 부름> (시 22:27-28)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I.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 다섯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 주님의 사랑과 은혜, 평화가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지난 주에 이어 저의 모교회 권사님께서 보내주신 <제1회 ‘어르신의 재치와 유머’ 짧은 시 공모전 수상 작품집, 2024>에서 우수상을 차지한 네 편을 나누려고 합니다.
로맨스 그레이 - 정인숙
복지관 댄스 교실 / 짝궁 손 터치에 발그레 홍당무꽃
절친 - 이상훈
잘 노는 친구 잘 베푸는 친구 다 좋지만 / 이제는 살아 있어 주는 사람이 최고구나
퇴행성 - 문혜영
근육통으로 병원에 갔다 / 퇴행성이라 약이 없단다 / 관절염으로 병원에 갔다
퇴행성이라 약이 없단다 / 마음이 아프다 / 퇴행성이라 약이 없겠지
커피 주문 - 박태칠
아이스 아메리카노 / 따뜻한 거 한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 그대로 ‘짧은 시’인데, 그 내용은 결코 짧지가 않은, 오랜 세월을 살아온 어르신들의 지혜가 번뜩이는 함축된 인생을 보여주는 시들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커피 주문’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 따뜻한 거 한잔”이란 싯귀에 다들 공감하게 될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말도 따로 움직일 때가 많이 있지만, 마음만은 청춘으로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II.
오늘 우리의 본문 말씀(요일 4:7-21)은‘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답게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본성에 따라 또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써 사랑해야만 하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해야 합니다.
요한일서의 중심 주제는 하나님과의 수직적 교제에 기반을 둔 형제 자매와의 수평적 교제이며(요일 1:3,7). 이 교제 핵심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고린도전서 13장에 이어서 ‘제2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사랑에 관한 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4:7-21)은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중요한 단락으로, 성경에서 요한일서만 사용하는 독특한 표현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4:8,16)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가 믿음 안에서, 아버지-자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상호 내주라는 신비로써 친밀하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부께서 보내신 독생자를 영접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 곧 영생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에 대한 호소를 함에 있어서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요 13:34-35, 15:12,17 등)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 살기를 추구하는 모든 신자들이 ‘서로 사랑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는 “서로 사랑하자”는 사랑의 근원과 근거, 적용은 어떠합니까?
1. 참 사랑의 근원(7-8) :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7-8)
사도 요한은 주님이 사랑하신, 그리고 장로로서 자신이 돌보고 사랑하는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아”(아가페토이, Ἀγaπητoí)라고 부르며,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라고 사랑을 권면합니다. 이 “사랑하자”(아가포멘, ἀγαπωμεν)은 ‘사랑하다’(아가파오, ἀγaπαω, 자랑하다)의 1인칭 복수 능동태 현재 가정법으로, 사랑은 계속해서 반복적으로(현재형) 순종해야 할 명령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2인칭 명령인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지만, 요한은 “서로 사랑하자”라고 권면합니다. 사랑은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자녀로 살기를 추구하는 모든 신자들이 자발적인 의지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 성경은 “서로 사랑하라”를 ‘우리가 사랑합시다’(let us love, KJV, RSV)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근거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8)를 직역하면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시다’로, 앞 절의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이 될 뿐 아니라 본체상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본체에 대한 세 개의 다른 언급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영”이시며(요 4:24), “빛”이시며(1:5), “소멸하는 불”(히 12:29)이십니다. 그러나 본서에서 적그리스도 이단으로 간주되는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영”이고, “빛”이고, “소멸하는 불”이라는 사실은 믿었으나, 하나님은 “사랑”이라고는 결코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란 말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며 최고의 표현으로, 하나님의 많은 활동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 가운데 계시고, 사랑 가운데 행동하신다는 뜻입니다(Stott). 그러므로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면 이것도 사랑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Dodd).
사도 요한은 이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을 주님께 받았다고 말했습니다(요 13:34, 15:12). 그리고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세상이 정의하는 ‘사랑’과 다릅니다. 요한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물론 모든 종류의 선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 맞습니다(일반 은혜에 따른 자녀 사랑, 부부 사랑, 불쌍한 이웃 사랑 등). 하지만 요한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흘러나오는 참 사랑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8)라고 말합니다. 여기서‘알다’(기노스코, γινώσκω)는 머리로 생각하는 사변적인 ‘안다’가 아니라, 경험적으로 ‘안다’는 것으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단호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본성), 하나님께 속한 그 사랑,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 사랑이 그에게서 발견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과 예전부터 관계가 없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에 이런 사랑의 속성을 가지고 태어난 자는 그의 형제를 사랑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을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한 번도 경험한 적도 없으며 안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나름 종교 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 중에서 유독 사랑이 부족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래 참지 못합니다. 쉽게 화내고 거칠게 말하며 배려하지 않고 항상 자기 유익만 구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이 봐도 사랑 없는 자로 보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정말 하나님을 아는 자, 사귐이 있는 자로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그것을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받은 구원을 믿음을 통해 내 소유로 만들 뿐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치 자기의 믿음이 구원의 원동력인 줄 알고 늘 죄를 짓고 믿음으로 구원받을 줄로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살려 주시고 오늘까지 왔습니다.
성경 공부를 해서 구원받았습니까? 기도를 통해서 구원받았습니까?아닙니다. 순전히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구원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구원은 단순히 우리의 영혼이 천국에 가는 먼 미래의 일만이 아닙니다. 지금 이 땅에서 주님을 알게 된 이 구원을 소홀히 하면 안됩니다. 죄가 없어서 여기까지 온 사람이 있습니까?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십니다. 추함도 아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오늘까지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복을 주셨습니까?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때문입니다. 우리가 순종을 잘해서 이렇게 복을 주셨습니까? 헌신을 해서 이렇게 복을 주셨습니까?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때문에 복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사랑 없이도 의무 때문에, 혹은 정이나 자식 때문에 살지만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2. 참 사랑 실천의 근거(9-11) :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어 화목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9)사도 요한은 성도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나뿐인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서 화목 제물로 주셨기 때문이라고 단호하고 명쾌하게 말합니다. 본문의 ‘사랑’, 곧‘아가페’(ἀγάπη)는 자기 희생적이며 자기 부여적이며 자기 포기적인 사랑으로 신적(神的)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에서 출발하여 형제에게 이르고 다시 이웃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가페’의 신비로운 순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 하나님의 참 사랑의 시작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밝힙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10)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우리는 그분의 원수,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고 원수로 행하던 그때,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어 화목 제물 되게 하심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먼저 사랑하셨으므로, 이 사랑을 받은 인간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시작하신 참 사랑, 우리가 계속해서 받고 있는 참 사랑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누리는 사귐의 시작은 이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하나님과 우리가 지금 누리는 사귐도 이 사랑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과 누릴 영생의 사귐도 이 사랑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주도적으로 시작하신 그 참 사랑을 영원히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의 필요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자기 희생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을 베푸사 우리의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서로 다른 이의 필요를 보고, 먼저 찾아가 자기 희생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을 베풀어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3. 참 사랑의 실천(13-16) :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가능합니다.
독생자를 화목 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마땅히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참 사랑은 인간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참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성령의 내주하심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13-16).
그래서 요한은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13)고 말합니다. 참 사랑의 실천을 이야기하는 13-16절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거한다’입니다. 무려 7번이나 나오는 ‘거한다’(‘메노)는 ‘함께 머무르다’라는 뜻이며, 여기서는 ‘교제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사실 요한일서에서 ‘메노’(거한다)는 본서의 주요 주제인 하나님과 성도 간의 ‘사귐’(교제)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임재와 그분과의 교제 가운데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표현을 다른 말로 하면 ‘그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그 안에 거하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거한다’(메노)는 현재형으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주 안에 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어서 요한은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14-15)라고 말합니다. 즉 성도가 그의 믿음과 사랑을 보이는 것은 성령을 받은 증거가 되며,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내주를 증거하는 것으로, 독생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고 또 세상 사람들에게 증언합니다. 이처럼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내주는 불가분리적이며 인격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정말 우리와 함께하시는가? 나는 정말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가? 알고 싶다면,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13절에 말하는 것처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현재 완료형)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압니다. 다른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갈 5:22-23).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사랑을 맺으면 맺을수록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으로 보증하시는 성령을 통해 더욱 확신합니다(엡 1:13, 4:30).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4. 참 사랑의 완성과 결과(12,17-21) : 수직적인 하나님 사랑을 넘어 수평적인 사람 사랑으로 확산됩니다.
1) 하나님의 참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집니다(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12)
사도 요한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고 말하므로, ‘하나님 그 자체를 본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역사상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모세조차 하나님 그 자체를 보지 못했습니다(출 33:18-23). 하나님은 아무도 가까이 못할 빛에 거하시는 분으로서(딤전 6:16) 만약 그를 보게 되는 사람은 죽게 된다고 말합니다(출 33: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그런데 당시 영지주의적 이단들은 자신들이 환상 등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았다고 주장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그들의 주장의 모순됨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히 20절에서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사상을 요한은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본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보여지고 느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즉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써(7),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났고(9.10),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데, 이로써 하나님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은 요한복음 1:18을 차용한 것 같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독생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세상에 하나님을 누가 어떻게 나타내는가? 요한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세상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참 사랑, 하나님을 더욱 또렷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가 서로 사랑을 나누는 그 관계 안에서 온전히, 완벽하게 성취됨으로 나타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2) 하나님의 참 사랑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갖게 합니다(17-18).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17-18)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의 참 사랑이 우리 안에 이뤄진다고 말한 사도 요한은 이제 서로 사랑하면 두려움을 내쫓아내고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두려움”(포보스, φόβος)는 심판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큰 이적과 기사 앞에 사람들이 보인 두려움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되었습니다(막 4:1, 녹 2:9, 요 7:13).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닥칠 환난과 고난으로 인한 두려움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습니다(계 18:10).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써 종말론적인 성격을 가진 두려움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면’ 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움은 이미 형벌의 시작입니다. 지옥의 심판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내가 그분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고, 사랑의 아버지는 나를 거기로 결코 보내지 않으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모든 것을 환하게 아시고(심지어 속마음까지) 내 입에서 나온 말과 행한 일을 빠짐없이 기록하신 분이 행한 대로 심판하실 것을 기다리는 기분이 어떨까요? 만일 두렵다면 그것은 형벌 때문입니다(18). 그러면 심판 날에 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함을 가지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물론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그 행위를 내세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요 3:18). 예수님의 행위가 하나님 장부에 적힌 모든 죄의 빚을 해결했습니다.
이 사랑이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시켜 줍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5:24에 아주 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참되게 주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우리 대신 이미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심판을 생각하면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이 우리 안에 사랑이 이루어진 증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7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경건한 두려움을 가집니다. 우리 주변에서 그리스도 없이 살다가 죽어 가는 마지막을 목격할 때마다 그 두려움을 똑똑히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신뢰하는 사람들 안에는 확실한 믿음, 주님을 만나는 간절한 기대를 그의 얼굴 속에서 환희를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류의 조상 아담이 죄를 범하자마자 생긴 것이 무엇입니까? 두려움이었습니다. 누가 말한 것도 아닌데 “내가 두려워 숨었나이다”(창 3:10)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자마자 이 두려움은 변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담대한 사랑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받은 성도로, 서로 사랑하므로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심판 날에 담대하게 주님 앞에 서고, 영생과 천국을 소유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3) 참 사랑의 결과(적용) : 형제를 사랑하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19-21).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19-21)
“서로 사랑하자”,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 요한은 그 결론으로 ‘형제를 사랑하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19절에서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먼저”(프로토스, πρῶτος)는 ‘비교를 통해서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앞선 시간’의 일임을 나타내는 단어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이 인간의 사랑보다 선재하며, 인간으로 하여금 사랑의 실천을 가능하게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먼저”(프로토스)는 ‘모든 것보다 가장 귀하고 소중한’이란 뜻도 있습니다. 세상에 많은 피조물들이 있는데, 그 중에 인간을 가장 귀하고 소중한 존재로 여기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먼저 사랑해 주셨는데,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가까이 있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20).
요즘 우리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이혼 문제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지난해(2023년) 우리나라 이혼율이 47.4%라고 하니, 결혼하는 두 가정 중 거의 한 가정이 이혼한다는 것이니 참으로 심각한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사랑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서양 속담에“사랑은 망원경으로 보는 것이고, 미움은 현미경으로 보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깨끗해 보입니다. 그런데 현미경으로 몇천 배, 몇만 배 확대해 보면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다 보입니다. 제가 예배 드리러 나오기 전에 손을 비누로 깨끗이 씻고 나왔습니다. 보세요. 깨끗하지요? 그런데 멀리서 보면 깨끗한 이 손을 현미경으로 보면 어떨까요? 육안으로 보지 못하던 것을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보실 때 망원경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현미경으로 보아서 허물만 들춰내는 일은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정의 식구를 볼 때도 사랑으로 보세요. 교인끼리도 사랑으로 보세요. 동포끼리도 사랑으로 보세요. 이웃을 사랑하면 죄가 가려지니까 마음이 평안합니다. 그러나 이웃의 허물이 자꾸만 눈에 띄면 마음의 평화가 없어집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에게 수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를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 짐이 되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교회의 각 방면에서 봉사하는 수고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그것이 부담이 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합니다. 같은 일을 해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과 사랑 없이 하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가 누구입니까? 교회의 직분을 맡은 분입니까? 얼마나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했는가? 하는 년 수도 제자의 자격 요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자격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오순절 때 성령 충만함을 받고 서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편지를 쓴 사도 요한도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렸는데, 신경질적 성격으로 사랑하기보다는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불이 떨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요한도 오순절 때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나니까 이전의 성품이 완전히 변해서 사랑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III.
영국의 대정치가 중의 한 사람인 글래드스턴(William Ewart Gladstone, 1809-1898년)이 총리로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 사진 보며)
그는 의회에서 야당 의원들로부터 거센 야유와 함께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한참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을 때 그의 부하 직원 한 명이 그에게 다가오더니 귓속말을 하고는 나갔습니다. 이에 총리는 “공격을 연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일방적으로 말하고는 급하게 의회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의원들의 야유가 터졌고, 집기를 집어 던지는 이들도 있었다. 국회로부터 빠져나온 총리가 간 곳은 병원이었습니다. 그의 마차를 끄는 마부가 죽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늙은 마부는 평생을 섬겨 온 자기 주인의 손을 꼭 잡은 채 웃음 띤 얼굴로 행복하게 운명하였습니다.
이 소식은 의회에까지 전해졌습니다. 총리가 다시 의회로 돌아왔을 때 의원들은 야유 대신 기립 박수로 그를 반갑게 맞았습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10)
제2사랑장이라고 불리는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면서 “사랑”(아카페)이란 말을 30번이나 사용했고, 요한일서 전체에서 46번이나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표현하는 헬라어의 여러 단어(아가페, 필레오, 에로스 등)를 복음서에서는 혼용하지만, 요한은 요한일서에서는 오직 아가페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더하여 성경에서 공교롭게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다”(8)라고 정확하게 말씀하는 곳은 오늘 본문뿐입니다. 그리고 사랑에 대해 강조하면서도 ‘원수 사랑'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습니다.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요한의 사랑은 폐쇄적인 공동체 안에서 저들끼리만의 사랑을 말한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진 않습니다. ‘원수 사랑’도 결국은 형제 사랑의 연장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오늘 본문 바로 뒤 요한일서 5:2-3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사랑 그 자체이시고, 죄인인 우리들을 먼저 사랑해 주셔서 독생자를 화목 제물로 보내주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므로 구원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 무엇보다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므로,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로 서로 사랑하며 생명을 살리고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나눠주는 성도님들 다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멘!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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