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서 유관순 누부야가
영원한 민족독립투사 - 유관순 의사!!
One who fought for independence of her country - Uisa Kwan Soon Ryu
서대문 독립공원에 가면 유관순의사가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이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저항하는 모형을 볼수있읍니다.누구나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낍니다
유관순의사(누나 언니는 애칭이 될리 수는 있지만 다른 열사,의사와 견주면 차별적 용어라고 보고,
공식적으론 의사라고 해야할 것같습니다)는
그동안 제대로 평가를 못받은 위인이라고 보는 데,여자이기 때문에 어리기 때문에 그런 측면이 있었을 것이니다.이 얼마나 비이성적 가치판단입니까.인격자를 규정하는 데는 아무런 제약이 있어서는 안됩니다.유관순은 어리고 여자 였지만 다른 성인남자의 독립투쟁보다 더 가열찼고 위대했읍니다 .삼일운동 당시에 유관순만큼 치열하게 투쟁하다,처참하고 잔인하게 고문 당하며 즉사한 투사가 있었는지도 의문입니다
There is a statue which shows the figure of Miss Kwan Soon Ryu, who endures senseless torture and resists in a dignified manner at Independence Park in Seodaemun. We feel that our eyes become so sore that tears drop.
Uisa Kwan Soon Ryu( a more proper title for her like those who also fought for their country than Miss or sister) is one of the great people who has not been seen as a great person due to the fact that she was a female and young. What an irrational judgement this is! There should not be any constraint or attempt not to consider her as a decent human-being. Although she was young and a female, she was even greater and more enthusiastic than all other men who were involved in activities for independence. I doubt whether there was any warrior like her who endured such reckless, cruel tortures and died instantly.
지금까지도 우리는 친일파를 정리하지 못해 가치판단의 혼란을 겪고있으며 수많은 사회갈등과 반목의 원흉이 되고 있읍니다.따라서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 시각으로 보더라도 유관순의사는 의인이고 위인이며 최고의 인격자로 존경하기에 충분하다 하겠읍니다
-다음은 오픈사전의 인용입니다 좋은 참고가 되겠네요
Still, we have not been able to find many of those who were hospitable to Japan yet. Hence, it resulted in a confusion in judgement on values and a social conflict that cause enmity towards one another among members of the country. Thus, Uisa Ryu Kwan Soon is more than sufficient to be recognized as a great and righteous person by today's point of view as well as by any standard of past ever.
- The following is a quote from 'Open Dictionary'. This would be a good reference.
유관순은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16세의 소녀로 시위대열에 끼어 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시 이 운동의 전국적인 파급의 일익을 담당키 위해 고향으로 내려갔다. 주야을 가리지 않고 천안, 연기, 청주, 진천등지의 학교와 교회를 방문하면서 시위운동을 계획, 음력 3월 1일 일제히 궐기하였다.
Ryu kwan Soon has participated in the protest that took place on 1st March in 1919 in Seoul at the age of 16, and yet she went down to her hometown so as to propagate this protest natoonawide. Visiting schools and churches in Cheonan, Yungi, Cheongju, Jincheon, etc., she orgarnized protests against Japan and held them on 1st March by lunar calendar in unison.
삼일운동은 당시의 조선민중의 뿌리깊은 독립의지에서 일어난 것으로서 이름 모를 수 많은 사람들이 하나로 합류한 민족운동이다. 한국의 잔다르크로 불리우는 유관순은 당시 16세의 이화학당의 학생으로서 고향인 천안시 목천면 지평리로 내려가 수천명의 시위군중의 앞장을 섰다. 이때 그녀의 아버지 유중권은 헌병의 발포로 즉사하고 어머니역시 참살당하고 말았다. 유관순은 체포되어 오빠 관옥과 함께 유치된 뒤에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그녀의 옥중 법정투쟁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This campaign, called 3.1 Protest, is a people's action that united a large number of anonymous peope as one body which raised, owing to wills of people that rooted deep for independence in their mind at that point of time. Ryu, now named Jean of Arch in Korea, went to her homwtown, Jipyung-ri in Cheonan-si, as a student of Ewha School at the age of 16 and led a protest of thousands of people. Her father died of a shot by a Japanese M.P.(military policeman) and mother also got killed during the protest. Ryu was captured and jailed along with her brother, Kwan Ok. The story of her resistence in jail remains as a famous episode while the case in court was in process.
그녀는 "죄를 지은 것은 일본인이다. 그런 일본인에게 우리를 재판할 권리가 있단 말인가?"라는 주장을 시종 굽히지 않았다. "죄를 뉘우치고 제국신민이 되겠다고 다짐을 한다면 관대한 처분을 내리겠다."는 재판관의 회유에 "강도를 몰아낸 것이 무슨 죄가 된단 말인가? 살아서도 독립만세 죽어서도 독립만세다."라며 한 걸음도 물러설 줄 몰랐다. "너희들 조센징이 무슨 독립이란 말이냐."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한 재판장의 검사를 향해서 의자를 집어던지기도 하였다.
"You, the Japannese, did commit crime. Do you think that you have the right to try us?" said Ryu, not subduing her assertion. A judge persuded her, "if you repented and sweared that you would become a citizen of Japan Empire, you would be pardoned." She responsed, "how can attacking theives like you be a crime? I want independence alive or dead," not withdrawing a step. She even threw a chair to a prosecutor in court when he said, "Independence to you, Chosenjing(Korean)?" in an insulting tone.
날밤으로 계속된 고문은 그녀의 죽음을 앞당겼다. 그녀의 밥에다가 모래와 쇳가루를 섞어서 먹게했다. 머리에는 콜타르를 칠해 머리 전체를 잡아 당기고, 가발처럼 머리가죽을 벗겨내기도 하였다. 겨드랑이와 음부의 털도 불에 달군 인두로 태워 버렸다. 코와 귀는 면도날로 잘리우고 손톱, 발톱은 몽땅 집게로 뽑아 버렸다. 그러면서도 유관순은 '독립만세'를 외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1920년 10월 12일 그처럼 가혹한 고문과 영양실조로 그녀는 끝내 숨지고 말았다.
Continuing tortures day and night upon her advanced her death. They forced her to eat rice mixed with sand and debris of iron. They painted coaltar on her hairs, pulled them and skinned them off. Besides, they burnt her hairs in the armpits and the private part by a soldering iron. Moreover, they cut nose and ears with a shaving knife and ridded of all fingernails and toenails. On no account did she stop shouting 'independence!'. On 12th Oct. 1920, she passed away due to such endless cruel tortures and mal-nutrition.
17세의 꽃다운 나이 그녀의 사망소식을 접한 이화학당의 프라이교장은 국제여론에 호소하여 그녀의 시신인도를 거듭 요구했다. 학교측에 인도된 유관순의 시신은 눈뜨고는 볼 수 없을 만큼 무참히 머리, 몸통, 사지가 따로따로 여섯토막으로 절단되어 있고, 코와 귀가 잘리우고 머리와 손톱, 발톱이 뽑혀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흉보하기 그지없는 일제의 고문은 그녀의 육신을 무참히 죽게 할 수 있었으나 그녀의 애국심만은 죽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At the age of 17, when the principal of Ewha School, Mr. Pry, heard the news that Ryu died, he requested that the body be returned to her people by appealing to international media. When he received the body, he saw that it was chopped into 6 pieces with ears and nose cut and hairs, fingernails and toenailed removed. That unutterablely ferocious tortures by Japan Empire could kill her physically in a ruthless way, but they were unable to kill her spirit and desire for independence of her country one bit. Not at all.
![](https://t1.daumcdn.net/cfile/blog/151B030C4B8A68719A)
유관순(柳寬順)
1902년 음력 11월 17일/12월 16일 ~ 1920년 9월 28일
일제 강점기에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제국의 모진 고문으로 18세 때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1996년 이화여자고등학교는 명예 졸업장을 추서하였다.
김연아와 비슷한 또래에 유관순 열사는 일본에 맞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시신마저 사라진 채 지하에 묻힌 유관순 열사는 우리를 뜨겁게 감동시켰던
밴쿠버의 젊은 열사들을 보며 기뻐하지 않았을까?
일본의 혼을 빼버린 김연아를 보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지않았을까?
그래서 젊은 그들은 애국자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3517B1C4B87731311)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 나는 독립운동을 하였다.
이 땅은 소중한 나라다.
과연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1.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30%2F14%2F45%2F48b8de616ff78%26filename%3D%25EA%25B4%2591%25EB%25B3%25B5%25EC%25A0%2588%25EC%259D%2598%25EC%258B%259C.jpg)
조국의 해방을 환호하는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의 인파 -
만나는 이마다 서로 부둥켜 안고 목이 터져라 해방 만세를 외치면서
밤이 되어도 흩어질 줄을 몰랐다.
밤새도록 기뻐서 울었다...1945. 8.15일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시인.독립운동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달이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게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 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 나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도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셈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무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집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1901. 4. 5 ~1943. 4. 25)시인님 대구 출생, 독립운동가, 시인.
![](https://t1.daumcdn.net/cafefile/pds86/8_cafe_2008_08_15_22_51_48a589f095a4b)
선생님은 아버지 시우(時雨)와 어머니 김신자(金愼子)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나 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정 사숙(私塾)에서 공부하고 1916년 중앙고를 나왔다
3·1운동시 대구 학생 운동에 참여 백기만과 함께 거사/ 발각 되어 서울로 도피했고/ 1921년 현진건의 추천으로 〈백조〉동인이 되었다, 1922년 프랑스 유학을 목적으로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 1925년 박영희·김기진 등과 함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에 참여했으며, 1927년 대구에 돌아 왔으나 일제순사의 가택수색을 여러번 당하고, 의열단 이자 대구의 독립투사인 이종암사건시에 동지들과 같이 구금되었다. 중국의 한인 독립군 대장인 친형 이상정 장군 만난 후에 일제 의해 체포되어 5개월 옥살이하고. 1934년 〈조선일보〉 경상북도 총국을 경영했으나 실패하고, 1937년~교남 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선생을 했다 .이때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권투부를 신설했다. 1940년 학교 선생을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며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불란서 시 평석〉 등을 기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위암으로 죽었다. 1946년 경상북도 대구 달성 공원에 상화 시비가 세워졌다.
일제시대 우리나라 일부 문인들을 보면, 스스로 문약하고 지조를 지키지 못하며, 일순의 영달과 영화를 위하여
일제에 아부하고 부왜한 시인/ 문인들이 더러 있었는데
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선생이야 말로 시인이시다---이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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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1.daumcdn.net/cafefile/pds80/14_cafe_2008_08_14_23_16_48a43e2690ce0)
해방을 맞아 모두 길거리를 나와 만세를 부르는 시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