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후
한양을 지키기 위해 주변에 성을 쌓고
고려 말 건축 양식으로 축조한 성문이다.
한양 사방(四方)의 문은 사대문과 사소문으로 되어 있다.
사대문(四大門)은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 = 동대문(東大門), 보물 제1호인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 서대문(西大門),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 남대문(南大門), 국보 제1호
북쪽의 숙정문(肅靖門) = 북대문(北大門)?,
이 사대문의 명칭은 유교사상의 하나인
오행(五行) 즉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기반으로
붙여진 명칭으로 중간 글자에 이 사상이 잘 반영이 돼 있다.
신(信)자가 쓰인 것은 대문은 아니지만
방위(方位)의 중간을 뜻하는 것으로
사대문(四大門) 아니지만
그 중앙에 위치하는 보신각(普信閣)의 신자에 나타나 있다.
사소문(四小門)은 사대문의 사이사이에 위치하는 문으로
사대문보다 규모가 작고 기능도 사대문에 비해 떨어진다.
사소문(四小門)은
동북쪽에 홍화문(弘化門) : 흥인지문과 숙정문의 사이
동남쪽에 광희문(光熙門) : 흥인지문과 숭례문의 사이
서북쪽에 창의문(彰義門) = 자하문(紫霞門) : 돈의문과 숙정문 사이
남서쪽에 소덕문(昭德門)이 위치하여 : 숭례문과 돈의문 사이
사대문의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사대문 중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은
일제 시 도시계획을 하느라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지금은 삼대문만이 존재하는데
남대문인 숭례문이 이번에 불에 타
보기에도 흉한 몰골이 되어 버렸다.
사대문 중에서도
활용가치가 가장 많았던 문은 바로 숭례문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이 동대문이고 다음이 서대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숭례문이 그만 화마에 휩싸이게 되니
우리 국민들의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이다.
숭례문(崇禮門)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조선 태조(이성계) 4(1395)년에 시공하여
동왕 7(1398)년에 준공하였다.
조선 4대왕 세종 30(1448)년에 개축하였고,
성종 10(1479)년에 중수(重修)하였으며,
6 ․ 25동란 시 총상과 포격으로 일부 파손된 것을
1953년 졸속으로 복원되었고,
1962 - 1963년 원 모습대로 잘 복원되었다.
“崇禮門”이란 현판은 ‘예의를 숭상한다’는 뜻이다.
옛 건물의 간판은 가로 써서 가로 거는 것이 통례였으나
숭례문만큼은 세로로 걸었다.
그 이유는
서울이 정면으로 관악산이 보이도록 위치하면,
괸악산이 화기(火氣)를 띠고 있어
한양(漢陽)이 화재와 변란을 피할 수 없고,
가로로 현판을 달면 그 화기가 두 배가 되어 더 위험하고,
세로로 하면 관악산과 맞서 대적할 수 있다 하여 세로로 단 것이다.
현판 글씨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세종대왕의 맏형인 양영대군(讓寧大君) 글씨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이런 숭례문(崇禮門)은 다른 성문에 비해
그 역할과 쓰임새가 뛰어났다.
한양과 시골을 있는 교량적인 역할은 물론
중국이나 일본 사신들이 이 문을 통과하여 왕을 알현하였고,
왕과 세자가 나들이할 때 이 문을 통과했으며,
왕과 왕대비의 장례행렬도 이 문을 통해 이루어졌고,
영조(英祖)는 대역 죄인을 이 문 근처에서
고문하고 처형하는 것을 결정하기도 했다.
정조(正祖)는 아버지인 사도세자 묘역을 참배할 때 이 문을 통과했다.
많은 상인들과 보부상들이 이 문을 드나들면서
한양 사람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했고,
많은 곡식들과 공출물들
많은 무기들과 군사들
과거(科擧)를 보려고 각지에서 모여드는 선비들
낙향하여 고향으로 떠나는 선비들
죄를 짓고 귀양살이 떠나는 관료들
이 이 문을 통과했다.
그러나 1899년 12월 20일
용산으로 가는 전차가 개통되었다.
이 전차선로를 가설하기 위해서 일본인들이
숭례문만 남겨 놓고 좌우의 성을 전부 허물어버렸다.
이 무렵에 우리나라를 찾아온 일본 황태자가
고개 숙이고 남대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자만심으로
허문 성 쪽을 통과하여 왔다고 한다.
숭례문은 경험하지 않은 것이 별로 없을 정도로
온갖 것을 경험하면서 묵묵히 612년 동안을
갖은 풍상과 애환을 겪으면서 의연히 지켜왔다.
희로애락을 맛보면서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지켜왔다.
숭례문은 600년이 넘는 우리 역사를
말없이 지켜온 산 증인이었다.
이런 산 역사의 증인인 숭례문은
주변에 잔디광장을 만들고
분수대를 만들고
야간 조명을 멋지게 하여 단장하였다.
그리고는 2006년 3월 3일
숭례문 중앙통로를 일반시민에게 개방하면서
훼손 우려와 관람의 기쁨이 교차하게 되었다.
개방한 지 2년 남짓한 2008년 2월 10일
기어코 화재가 발생하여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부모 잃은 자식의 심정과도 같은 슬픈 마음 금할 길 없다.
어느 정신 나간 사람의 이와 같은 만행은
죽이고 싶도록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지는 일이다.
숭례문을 개방한 일도 잘못한 것임에 틀림없다.
문화재 관리를 허술하게 한 일도 크게 잘못한 일임에 틀림없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자기네들의 이익이나 권리만을 위해
다른 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도
나라와 국민을 위해 살아져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원망만 하거나 한탄만 할 겨를이 없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는 말이 있다.
위기를 당하게 되면 우리 민족은 의연하게 대처하여
그것을 밑거름으로 위기를 타개할 뿐 아니라
앞으로 모든 면에서 물 샐 틈 없는 계획과 진행 그리고
실천으로 더욱 굳건한 숭례문을 재건하고
나라의 기반을 만들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